빨강 머리 앤이 3년 후 나에게 : Q&A a day 빨강머리앤 Q&A a day
더모던 편집부 엮음 / 더모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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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이대로 일상이 무너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새벽에 일어나 책상 앞에 앉습니다. 사실 전세계적인 전염병의 재앙이 모두의 일상을 멈추게 하기 전부터, 제 일상은 멈춰 있었습니다. 몇 달 전, 어떤 오해를 계기로 전력을 다했던 '꿈'을 잃고, 삶의 '리듬'을 잃고, 돌연 내일 해야 할 '일'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던 건 친구를 잃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쓰라리고 아팠습니다.

<빨강 머리 앤이 3년 후 나에게>라는 이 다이어리북을 보고,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을 삼켰던 건, 친구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이고,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책 속 캐릭터이며, 누구보다도 가장 친해지고 싶었던 '앤'이었으니까요. <빨강 머리 앤이 3년 후 나에게> 뿐 아니라, 시리즈로 <5년 후>, <10년 후>도 있는 것을 보았지만, 저는 빨강 머리 앤이 '3년 후 나에게'로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먼 미래를 그리는 것보다, 하루치씩 살아낼 힘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What do you think you can do to achieve your goal?)

이 책은 일기장처럼 하루하루 빨강 머리 앤과 대화를 나누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매일 빨강 머리 앤이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짧은 질문이지만 그리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2020년 3월 23일 월요일, 오늘의 질문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였습니다. 사실 이 질문 앞에 얼어붙어버렸습니다. 이 질문이 무섭게 느껴진 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단단한 각오를 세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너무나 가까웠고, 믿었고, 평범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슨 일(짓)까지 할 수 있는지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 채, 시간을 그냥 덧 없이 흘려 보냈습니다. '나는 이런 각오로 반드시 이 일을 해내고야 말꺼야'라고 할 만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자꾸만 거꾸로 된 답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친구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을 꺼야, 내가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사람을 시기하지는 않을 꺼야, 내가 잘 안 됐다고 남도 잘 안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꺼야' 하고 말입니다.

'빨강 머리 앤'이 내게 묻는 질문 앞에 설 때마다, 질문이 가진 힘을 실감합니다. 어디선가 올바른 질문을 찾고 던질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단순히 일기를 쓰는 것보다, '빨강 머리 앤'의 질문에 답하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생각의 힘이 더 자라지 않을까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생각을 정리하게 해주니까요. 무기력하신 분들, 친구가 필요하신 분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지 점검해보고 싶은 분들, 무엇인가 새롭게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성경에, 잠언 27장 17절 말씀을, 표준새번역 번역본으로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쇠붙이는 쇠붙이로 쳐야 날이 날카롭게 서듯이, 사람도 친구와 부대껴야 지혜가 예리해진다." 딱 이 책을 비유하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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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마음에 하나님을 새기라 - 교회와 부모가 함께하는 신앙 교육 매뉴얼
신형섭 지음 / 두란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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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긴급 소환, 믿음의 부모 세대를 회복하라!

최근 어떤 매체에서 "진짜 땅끝은 내 자녀의 방이다"라는 설교 제목을 보았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과연 우리 다음 세대가 신앙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서 있습니다(65). 청소년 기독교 분포율과 교회 내 청년 분포율의 지표율은 우리의 자녀 세대가 바로 '미전도 종족'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위기를 인지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논의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소망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진짜 문제는 보지 못하고, 오로지 다음 세대들만 이해하려고 애써온 탓은 아닐까요? <자녀 마음에 하나님을 새기라>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진짜 문제를 보지 못했구나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녀 마음에 하나님을 새기라>에서 발견한 한 문장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음 세대가 무너진 것을 애통해하고, 다음 세대에게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골몰해왔는데, 이 책은 다음 세대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실상은 부모 세대가 무너진 것이라고 외칩니다!

 

 

 

 

"부모 세대 기독교인 21%와 청소년 복음화율 3.8%의 현재적 상황을 볼 때 과연 어느 세대의 신앙이 무너진 것일까요? 수치적으로는 다음 세대가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부모세대가 무너진 것입니다"(66).

이 한 문장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만 뜨겁게 깨달아도 잃어버린 다음 세대를 세워가는 길에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녀 마음에 하나님을 새기라>는 부모 세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이 시대 믿음의 부모 세대는 우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목숨을 걸고 전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이름인가요? 아니면 명문 대학, 명문 직장인가요?"(67)

아마도 많은 교회가 '어머니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자녀의 인생 계획서를 짜서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 열심을 다해 자녀의 세상적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원하던 소원을 이루면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기뻐하는 신앙생활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사역하던 교회에서 청소년부 예배 시간을 조정하는 문제로 부모님들과 목회자들이 크게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고등부 예배 시간이 길어지는 것에 대해 부모님들이 거세게 항의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담당했던 목사님께서 우리 아이들이 일주일 중에 고작 1시간 예배, 5분도 안 되는 기도로 어떻게 신앙으로 문제를 돌파할 수 있겠냐고 부모님들께 호소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책은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먼저 부모 세대의 믿음을 회복시키는 데 그 돌파구가 있음을 역설합니다.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은 '교회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교회와 부모가 한 팀이 되어 동역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이 힘주어 강조하는 전략입니다. 이를 위해 보통 지역별로 구분되어 있는 성인 교구 조직을 자녀의 연령별로 재조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웁니다. 그리할 때, 교회 교육과 가정 교육이 더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으며, 주일예배와 주중의 삶을 연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책은 부모의 영적 역량을 키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를 위해 회중들의 인생 주기에 따른 신앙 지도 매뉴얼을 구체적으로 제공합니다. 개인적인 관심사가 청소년기(중고등학교)에 있다 보니, 그 시기에 무엇을 중점적으로 해야 하는지가 크게 와닿았습니다. "가정과 교회가 청소년기 자녀들에게 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 존귀한 존재임을 일관되게 알려 주고, 그들 내면의 소망과 비전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 주고 대화를 시도하며 기도로 지원하는 것입니다"(142). 얼핏 보면 당연한 말 같지만 이 당연한 일이 정작 우리의 가정과 학교와 교회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책은 교회와 가정이 함께 읽어야 할 책입니다. 부모 세대의 회개 없이는 다음 세대도 회복될 수 없음을, 부모 세대의 회개로부터 다음 세대의 부흥은 시작된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주는 책입니다. "자녀를 향한 우리의 기도 제목을 하나로 줄이면 무엇이 남습니까?"(59) 어쩌면 이 단순한 질문 하나 속에 우리가 찾던 답(길)이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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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의심하다 - 노진준 목사의 믿고 듣는 믿음 강의
노진준 지음 / 두란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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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비록 죽음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놓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실 인내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 고난의 현실에서 "왜?"에 대한 답이 없습니다. "어떻게"에 대한 답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어코 선을 이루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확증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 우리는 고난 중에 고쳐 달라 말하고, 주님은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동문서답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신 주님의 사랑의 선언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위대한 사랑의 선언입니다(81-83).

정말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나요?

오직 믿음으로 어떻게 사나요?

죽은 믿음이 있나요?

믿는 자에게는 하지 못할 일이 없나요?

믿음이 자라나요?

겨자씨만 한 믿음이 무엇인가요?

믿음의 반대는 의심인가요?

강한 믿음, 약한 믿음이 따로 있나요?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아도 구원을 받나요?

믿음을 '은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왜 복되나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질문해봤을 궁금증들입니다.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아도, 막상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러운 질문들이기도 합니다. '믿는대로' 살아내야 하는 믿음의 역동성을 생각하면,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적 수준에서 이것이 정답이라고 간단하게 말하여질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금방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성경 자체가 이 믿음의 문제에 관해 그 진리를 수수께끼처럼 숨기고 있어, 우리로 계속 고민하게 만들고, 더 생각하게 만들고, 끊임없이 그것을 탐구해가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진준 목사님의 <믿음을 의심하다>는 이와 같이 많은 성도들이 한번쯤 질문해봤을 믿음에 관한 22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탐구해나가는 책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요셉이 알고 싶다>는 책을 통해 저자의 이름을 익혀 두었던 터라 두란노에서 나온 이 신간이 무척 반가웠는데, 그 믿음과 선택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믿음에 관한 22가지 질문'에 대해 이렇게 탁월한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 과정은 진중했고, 결론은 성경적으로 명쾌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강함이 되어 주시지요. 그래서 강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강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164).

<믿음을 의심하다>는 정답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닙니다. 믿음에 관한 질문은 결론(정답)보다 풀이, 즉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에 더 집중해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질문에 대한 정답을 찾아 어느 한 부분을 떼어 읽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 전체를 읽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적 동의로서의 믿음, 확신과 소신으로서의 믿음, 신뢰로서의 믿음의 차이도 단순히 용어(개념)적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역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말하는 '살아 있는 믿음'의 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을 의심하다>는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개념들을 단순히 바로잡아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어째서 그런 오해들이 발생하는지, 우리는 왜 그런 오해들에 빠지게 되는지부터 차근하게 설명을 해나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개인적으로는 '은사'에 관해 내가 얼마나 큰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은사는 내가 남들보다 탁월하게 잘하는 그 무엇(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의심하다>는 믿음의 문제는 자기 마음이 상태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 믿음의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의 순종,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할 때, 우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강력하게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책을 읽으며 믿음에 더 알아가고, 이해가 깊어질수록, 내 안에 큰 기쁨이 풍성하게 넘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믿음을 잘못 이해하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복음과 정반대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가 흔히 말들을 보면, '믿음'이 자랑이 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에 관해 얼마나 무지한가를 드러내는 단적인 지표이기도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일을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말은 행함이 없으면 믿음은 본유적으로 죽은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입을 것을 주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살아 있네!"라는 말을 듣자는 권면입니다"(54).

<믿음을 의심하다>는 목회자들에게 먼저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책임을 우선적으로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의심하다>를 읽으며 깨닫게 되는 것은, 믿음도 잘 가르칠 때 더 강력하게 역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목회자들부터 믿음을 먼저 점검하고, 바로 이해해야 할 테니까요. 잘못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전국민이 느끼고 있는 요즘, '믿음'을 의심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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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죽이기 세계기독교고전 64
존 오웬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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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문제점은 성화론을 기독교 윤리로 대체해 버린 데 있다"(12).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예배에 회개는 사라지고 승리의 외침만 넘치는 것이 우려스럽습니다. 이 책의 <해제>를 맡은 역자는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에서 오늘날의 문제점은 "성화론을 기독교 윤리로 대체해 버린 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성화가 아니라 기독교 윤리에 집중할 때, 우리는 '죄'의 문제, 다시 말해 회개의 문제를 단순히 '행위'의 문제로 축소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죄를 죽이는 문제가 행위의 문제로 축소되면, 자신의 행위에 따라 '나는 더 선한 사람', 이 정도면 '나는 더 괜찮은 사람'이라는 교만한 마음과 우월감을 심어줄 수도 있습니다.

오웬은 죄 죽이기를 단순히 외적으로 행하는 죄를 그만두는 것으로 이해하는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 사람이 변화되었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이 그 죄를 포기한 것이 전혀 아니라 여전히 그 죄를 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가증스러운 위선이라는 죄까지 추가함으로써, 이전보다 더 신속하게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 그의 마음은 달라졌지만, 더 거룩하게 된 새로운 마음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니라, 더 교활한 마음이 된 것일 뿐이다"(77). 무서운 경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죄 죽이기'의 문제를 잘못 이해하면 우리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더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죄'의 무서움, '죄'의 교활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서는 먼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지요. 우리가 여전히 존 오웬의 <죄 죽이기>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죄'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죄인'이라고 하면 모욕감을 느끼며 인간의 내재적 선함을 믿는 현대적 분위기 속에서, 교회에서마저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일을 게을리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로마서 8:13).

존 오웬은 이 구절을 토대로 죄를 죽이는 것은 신자에게 주어진 임무임을 일깨우며, 죄를 죽일 수 있는 실천적인 지침들을 제시합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죄의 실체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그들을 정죄하는 죄의 권세로부터 분명히 해방되기는 했지만, 그들 안에 내재하는 죄의 권세를 죽이는 것을 그들의 평생의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42). 존 오웬은 죄가 단지 우리 안에 거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활력과 힘이 있어, 우리를 악에 끌리게 하거나, 선한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거나, 우리 영혼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훼방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죽이는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죄의 결과들이 생산해내는 열매가 우리 삶에 가득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죄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끊임없이 싸우는 것"(47)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없이는 죄의 죽음도 없다"(95).

(오웬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은 죄가 우리를 격퇴하거나 우리가 죄를 격퇴허거나, 죄가 우리를 이기거나 죄를 이기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율법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죽이는 싸움 자체가 커다란 짐이 되고, 양심이 죄책감에 눌리며, 심판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게 되겠지만, 죄의 실체를 바로 이해하고, 우리의 죄인됨을 깊이 깨달을수록 복음이 진정한 복음이 되는 은혜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진실로 깨닫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찾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죄 죽이기>는 결국 매일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죄를 죽는 토대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뿐입니다. 존 오웬은 가장 큰 원수를 물리치기 위해 구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원군, 즉 "성령"과 "새로운 본성"을 날마다 사용하라고 조언합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 이것만이 죄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죄 죽이기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 이 복음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죄 죽이기'를 단순히 기독교 윤리적으로 접근할 때, 우리에게 어떤 비극이 벌어지는 지를 존 오웬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은 영혼은 죄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지만, 그 싸움을 수행할 힘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싸우지 않을 수 없지만,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들은 원수들이 그들을 죽이기 위해 휘두른 칼에 찔린 사람들과 같다. 그들은 율법에 의해 정신 없이 쫓기고, 죄에 의해 두들겨 맞는다"(65).

<죄 죽이기>의 핵심은 내가 '더' 깨끗한 사람, '더' 거룩한 사람이 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을 미워하고, 경계하고, 멀리하고, 파괴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아의 만족이 아니라, 성령님의 새롭게 하심을 날마다 누리는 거룩한 삶의 자리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책의 표지에 발췌되어 있는 제임스 패커의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죄 죽이기>에 가장 많은 빚을 졌다. 이 책은 영적 금광이다." 재임스 패커의 고백이 공연한 찬사가 아니었음을 깨닫습니다. '죄 죽이기'를 잘못 이해하면, 죄를 없애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우다, 죄 가운데서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경건했던 바리새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복음의 은혜를 누리는 것, 구원의 기쁨을 충만히 가지는 것은, 죄의 자리,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 책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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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에서 왔니 - 탄생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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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짐승도, 유전자가 인간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침팬지도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별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땅과 숲을 보며 꽃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짐승과 똑같은 동굴 속에서 살던 때도 우리 조상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과는 전연 다른 허구와 상상의 세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이 신화와 전설과 머슴방의 '옛날이야기' 같은 것입니다"(11).

이 책은, 이제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이어령 박사님이 한국인의 DNA 속에 생명줄처럼 이어져온 한국인의 이야기를 담아낸 책입니다. 이야기꾼의 천성을 타고난 이어령 박사님은 꼬부랑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옛이야기처럼 한국인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너 어디서 왔니>를 읽으면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들이 이야기로 이어져 있으며, 생명은 이야기로 시작되며 이야기가 끊기면 목숨도 끊긴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천하루 밤 동안 왕을 위해서 들려주는 아라비아의 이야기가 그랬듯이 진짜로 "이야기가 곧 목숨"(9) 셈입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야기는 '태명'부터 시작합니다. "무엄하게도 고종 황제의 아명이 '개똥이'었다니"(15), 태명은 없었지만 '진희'라는 예쁜 아명을 가지고 어린 시절을 살게 해준 부모님께 새삼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한국인의 탄생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별스럽지 않게 부르고, 말하고, 쓰고, 나누며, 살아가는 나와 너의 이야기 속에 참 많은 세월과 지혜와 사연이 담겨 있음을 새삼 알게 해줍니다. "세계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마당쇠의 마당은 '맏이'가 변한 것이며", "로마인들은 이름이 좋은 사람부터 전쟁터에 보냈으며", "나는 한 살 때에 났다"라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소설의 한 대목, "고려 사람들은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는 시시콜콜 하면서도, 깨알 정보를 담은 이야기들이 꼬불꼬불 이어집니다.

어쩌다 보니 세상에 나와 있고,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눈이 아니라 냄새로 엄마의 젖을 찾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모든 힘을 입술로 모아 엄마의 젖을 빨며 살아냈고, 그냥 읽었던 에스겔서 성경 구절 속에 "당시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르고, 정결하게 씻고, 소금을 뿌리고, 긴 천으로 둘러 감싸던 풍습이 있었음을"(185) 배우며, 아이가 태어나면 꼭 안아주어 아기가 젖을 물고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들으며 안심할 수 있도록 해주었던 한국 엄마들의 이야기에 새삼 감사와 경의를 표하게 되는 책입니다.

언제가 이어령 박사님은 엄청나게 방대한 글감들을 모아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좋은 문장, 재미있는 이야기, 새로운 정보 등 다양한 글감들을 읽고, 스크랩하고, 메모해두는 습관이 있다고 말입니다. <너 어디에서 왔니>는 이어령 박사님이 그런 '이야기'들을 얼마나 귀담아 듣는 분이신지, 이야기를 얼마나 사랑하는 분이신지 알게 해주며, 이어령 박사님의 지혜는 바로 이야기 속에서 캐어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어릴 때부터, 처음부터, '이어령 박사님'이라고 불러서 그런지 제게 이 꼬부랑 이야기 할아버지는 언제나 '이어령 박사님'이었는데 이번에 알았습니다. 이분은 '이야기' 박사님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국인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너 어디에서 왔니>는 어렸을 때 들었던 옛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책입니다. 한국에는 한국의 밤이 있고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밤이 있고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해주는 책입니다. 시시해보이던 삶이었고, 별 것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의 일상 속에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지를 발견하게 해주는 이야기 책입니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지고 있는 줄 몰랐던 아름다움, 미쳐 깨닫지 못했던 소중함들, 놓치고 있었던 의미들을 재미있게 일깨워주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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