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활발하고 외향적이며 누구하고나 친하게 지내고 그래서 발이 매우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MBTI 검사를 하면 'E'가 아니라 'I'가 나온다는 걸 못 믿겠다고 같은 자리에서 한 다섯번쯤 확인하는 사람도 봤다. 그러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의 일면에 대해서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것이지. 사실 나는 상당히 내성적이며 (아 저를 아는 분들이 웃을까봐 걱정..ㅜ) 사람들과 겉으로는 잘 웃고 지내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까칠하다'는 얘기도 듣곤 하는데, 이건 정확할 수도 있다. 업무적으로 까칠한 건 기본이고 (흠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상당히 까칠한 편이다. 까칠하다는 게 공격적이다 이런 건 아니고 내가 싫은 유형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어제 회의가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회의였는데, 그다지 기대는 하고 가지 않았다. 그 전에 그 중 한명을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이 있었고 상당히 같은 공간에 있기 힘들었던 유형이라 아 그 사람하고만 좀 안 섞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머지 한명도 같은 스타일인 거다. 으악. 나는 회의시간 1시간 반 내내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웃어야 하는데 안 웃어지는.

 

그러니까 이런 스타일인 거지. 굉장히 크게 얘기하고 말이 많고 그 내용이 허세가 반 이상이고, 그게 허세가 아니더라도 전혀 맥락 닿지 않는 자기 자랑을 넣고... 그리고 웃음은 왜 그리 작위적으로 크게 웃는 지. 싸구려 영업이나 하는 그런 웃음을 서로 좋다고 웃어대는데,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물론 그들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고 그동안 그다지 거칠 것이 없었고 머리도 좋겠지 아마도. 그렇지만 듣는 사람도 생각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마음에, 속으로 화까지 났다.

 

저녁 먹자는 거, 정중히 거절하고 나오면서 드는 생각이,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가 라는 자책감이었다. 사람들은 종류가 상당히 많고 나도 뭐 그다지 정상범주 내에 들지 못하는 부류일 수도 있는데 너무 남을 판단하고 싫다고 분류해서 대응을 안 해주는 거 아닌가. 내가 이래서 출세라는 걸 못하는가. 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면 좀 둥글둥글 해져야 하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이, 왜 내가 자책을 하고 있나, 이게 내 잘못인가...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나는 그냥 잘났든 못났든 솔직하고 담백하고 너무 시끄럽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 좋은데. 왜 사람들은 말의 대부분이 허세인가. 잘난체인가. 나이들수록 그런 게 다 참 소용이 없더라 절실히 느끼는데 말이다.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으며 심지어 정말 잘났으면 모르겠는데 없는데 있는척, 모르는데 아는척, 호탕하지 않은데 호탕한척 하는 걸 못 참겠다.. 흠. 그래, 사회성 부족 맞는 듯 ㅜ 철푸덕.. 비연... 우째... 참아야지, 사회생활하려면..ㅜ

 

암튼 난 얌전히 집에 와 조용히 집에 장착된 술들을 보며 주종을 뭘로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아이스와인이 두 병이나 집에 있길래 (다 선물받은.. 나, 술선물 받는 사람) 하나를 따서 홀짝거리며 책을 읽었다. 내 마음의 평안은 책 뿐인가. 근데 정말 평안이 왔다. INNER PEACE...

 

 

 

 

 

 

 

 

 

 

 

 

 

 

 

 

 

<캘리번과 마녀>는 이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몇 장 읽으면서부터 실비아 페데리치가 좋아져 버렸다. 그래서 이 책과 커플을 이룬다는 <혁명의 영점>도 사려고 보관함에 푱 집어넣은 상태다. 이 책 펼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사람한테는 잘 두근거리지 않는 (이제는 말이다.. 예전엔 나도 안 그랬어!) 내가 책을 보고 두근거린다니. <세상의 봄>은 내가 좋아라 하는 미미여사의 에도시대 책이라 읽고 있다. 근데 원래 에도시대 책은 북스피어라는 출판사에서 처음 소개해서 줄곧 내고 있는데 언제인가부터 비채(김영사)가 새치기를 해서 한두 권씩 내고 있다. 이거 좀 기분이 별로인데 싶은게.. 예전에 <벚꽃 또 벚꽃>이라는 책을 비채에서 낼 때 판권에 돈을 더 얹어서 뺏어왔다는 얘길 들어서이다. 그래서 <세상의 봄> 이 책을 살 때 사실 북스피어 출판사에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었다. 개인적으로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나 출간되는 책이나 마음에 들어서 왠만한 건 다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미미여사의 에도시대 소설은 북스피어에서만 나왔으면 좋겠다. 유명하지 않을 때 소개해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 대형 출판사라고 은근슬쩍 돈으로 끼는 모양새는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김영사에서도 할 말은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다시.. 책 얘기. ..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밥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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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30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람 성격과 사람을 대하는 것에 딱히 정상성 이란 건 없을 것 같고요, 대중적인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리고 저도 허세 쩌는 사람들 싫어하는데, 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요? 허세 쩌는 사람들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들은 허세인줄을 몰라서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의 작은아버지가 허세킹인데 친척 모임에서 작은 아버지가 얘길 시작하시면 저희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버리시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작은아버지로부터 무슨 말을 듣고 아빠가 와서 전달하면 ‘아빠 구십프로는 구라야...‘라고 제가 말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정상성이란 것은 없고 비연님은 비연님의 성격이 있고 또 비연님을 좋아하고 비연님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잘 지낸다면 그것이야말로 퍼펙트 아닙니까. 저는 둥글둥글한 성격이 되기 싫습니다. 우리 둥글해지지 말아요!!


저는 지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읽고 있는데 넘나 좋네요.. 책 만세!!


(아, 그리고 오래된 비연님 페이퍼에 땡투 날렸으니 내일쯤 적립금 들어올 겁니다. 훗)

비연 2020-06-30 12:15   좋아요 0 | URL
허세쩌는 사람들 다 싫어하는데... 전 표가 많이 나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 않나 싶은..ㅜ
어제도 눈에서 빔이 나가는 게 느껴졌었거든요.. 앞으론 얼굴을 들지 말까 ㅜ
.. 그러나 둥글해지지 말아요! 이 부분에 완전 동감이 가는 걸 우짭니까 ㅋㅋㅋㅋ
아울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그 책, 저 예전에 읽었는데.. 다락방님 심정 이해갑니다요.
심지어 땡투를 날려주셨으니.. 우힝. 다시 책을 사야 하나. 내일이 7월이잖아요!!! 냐하하~

페크pek0501 2020-06-30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칠하다는 얘기가 오늘처럼 좋게 들리기는 처음입니당~~~ 비연 님의 덕분.

안 그런 척하고 사는데 사실은 저도 까칠과에 속할 거라는 생각이 스치네요. ㅋ

비연 2020-06-30 12:58   좋아요 1 | URL
앗. 그렇다니 왠지 제가 다 으쓱..ㅎㅎㅎㅎ
개인적으로는 좀 까칠한 면이 있는 것이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것도 자기합리화인가.. 라는 생각도 들고 ㅋㅋㅋ

꼬마요정 2020-06-30 1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내가 가기 싫은 자리는 안 가게 되어 좋더라구요. 어릴 땐 인맥 넓고 많은 사람들을 아는 게 중요한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구요. ㅎㅎ ‘나‘가 힘들고 불편하면 ‘인맥‘이고 ‘출세‘고 다 의미 없죠 뭐. 자기가 살고 싶은대로 사는 게 중요하죠. 인생은 짧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건 많은데 그 중에 듣기 싫고 보기 싫은 거 꼭 해야 하는 거 아니면 굳이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요 ㅎㅎ 일 하는 것도 힘든데 사적인 시간까지 함께 해서 얻는 사회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ㅎㅎ 좋아하는 사람들과 있는 게 훨씬 행복하죠. ㅎㅎ

비연 2020-07-02 10:32   좋아요 1 | URL
꼬마요정님, 요즘 제 생각이랑 딱 맞는 생각을 써주셔서..넘 감사요~
이제 나이 좀 들어보니 정말 내 마음 가는대로 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게 행복이구요.

수이 2020-06-30 14: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오래 전 친구들 만나고 돌아와서 느낀 게 사람들 많고 친구들 많으면 좋은 건 줄 알았는데 알고보면 모두 얼추 까칠이들 중에서도 왕 까칠이들인데 일부러 가면 쓰고 다정한 척 친절한 척 그렇게 살 필요 뭐 있을까 싶더라구요. 위안이 책이 되어줄 때도 있긴 한데 책은 노래를 불러줄 수 없으니까 노래 불러주는 친구들 있는 것도 좋은 거 같아요 비연님 ......... 이러고 나는 다시 동영상을 플레이한다 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7-02 10:33   좋아요 0 | URL
... 이 좋은 말 말미에... 동영상 플레이라는 마지막 말에.. 저 갑자기 쭈그리...ㅜㅜㅜㅜㅜ
우리 함께 노래 불러주는 사이가 되어요, 수연님 ㅋㅋㅋㅋ
 

 

 

 

 

 

 

 

 

 

 

 

 

 

 

독특한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어떤 연유로 알게 되어 읽겠다고 샀는 지는 가물가물한데.. (아마 라로님 페이퍼를 읽고 골랐던 게 아닌가 어렴풋한 기억이..) 읽어보니 이 학자의 인생도 놀랍고 이런 분야가 가능한 것도 놀랍고 무엇보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 저저 깊은 곳에 흔적이 남아 누군가 그 어딘가에 있었는 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왔다.

 

퍼트리샤 월트셔는 원래는 식물학자이자 생태학자이다. 화분학자라고도 해야 하나. 우연한 기회에 이 학문을 접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여 푹 빠진 나머지 평생의 업으로 삼아 공부한 사람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때가 된 듯하다.

내 인생은 내 바람대로 훌러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훌륭한 이야기는 모두 이렇게 시작한다. 50대 초반의 나는 어느 날, 인생의 방향을 바꿀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며 법의학 수사의 세계로 들어섰다. (p45)

 

인생은 이런 것인가. 어느 날 받은 한 통의 전화로, 인생의 나머지를 다 바칠 만한 길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 물론 그 이전에는 어이없는 일로 다른 일을 했어야 했다. 어딜 가나 남자들이란.. 이란 생각을 하게 한 대목도 있었다.

 

 

나중에 나와 결혼한 당시 남자 친구는 내가 대소변과 혈액을 분석하고 쥐를 다루는 일보다는 더 '여자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다운' 이란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사무직과 비서직을 위한 강의를 소개하는 광고를 보고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여긴 나는 강의를 신청했고 돈을 받는 상근직 일자리를 얻었다...(중략)... 여기서 하는 일들은 정말 이상해 보였다. 어두운 양복 차림의 이기적이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위해 바보같이 일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기계적인 일상에 치이다 보니 매혹적인 지식들을 얻을 기회가 적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p46~47)

 

나도 궁금하다. '여자다운' 일이란 무엇일까. 예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선생님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자기가 왜 국문과를 선택했는 지를 얘기해줬다. 입학할 때 학부제로 들어가서 2학년 되기 전에 전공을 선택해야 했고 자기는 러시아문학이 좋아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나 그 당시 남자친구가 "나는 국문과 다니는 여자친구가 좋다" 라는 말 한 마디에 국문학을 선택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있어.. 라고 코웃음쳤던 기억이 난다. 결국 그 남자친구랑도 헤어졌다면서 자기도 그 때 왜 그런 선택을 그렇게 했는 지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아고. 그러나 살아보니 그 때 그 때의 선택에서 가끔 그런 바보스러운 이유로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된다고 해도 그럴 때가 있는 것임을 알고 나니, 그 선생님께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뭐 어쨌든 재미있는 이유 아닌가.

 

통찰력 있는 경찰들이 범죄의 현장을 뒤쫓기 위해 식물/화분학자를 필요로 했고 그렇게 인연이 닿은 관계는 주욱 이어진다. 범죄조직의 현장을 찾기 위해 차의 곳곳에 묻은 토양 표본들과 현장의 표본을 대조하는 작업을 하기도 하고 시체가 파묻힌 곳에 범인들이 갔었는 지를 찾기 위해 범인의 소지품을 다 조사하고 그 균류와 먼지의 성분, 토양의 성분 등을 대조하여 알아내기도 한다. 에드몽 로카르의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 라는 말이 여실히 입증되는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책은 단지 그런 직업적인 면만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퍼트리샤 윌트셔라는 사람의 자라온 이야기들. 살아온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인생과 어찌 연결되는 지를 말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죽음이, 사람의 생과 사라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도 더럽지도 않은 것임을, 누구나 그 길을 가고 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덕분에 이 험한 일을 하는 데에도 두려움 없이 임할 수 있었노라 이야기한다.

 

종종 죽음, 강간을 비롯한 여러 범죄에 관한 경험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질문을 받는다. 내 인생에서 죽음을 통해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명은 내 딸과 할머니였다. 아직도 지혜와 위안을 주던 할머니의 빈자리가 그립다. 내 딸 역시 내게 아픔을 주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가슴속 깊이 간직한 그 아이를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생각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그동안 마주친 사체들 역시 이들에 대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 깨닫게 했다. 그러면서 나는 무고한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존중하고 보살필 수 있었다. 비록 검사대 위의 사체가 나와는 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이 사체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을 나는 항상 명심해야 한다. 사람이 객관적이지 않으면 쓸모 있는 일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이 사체가 한때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p359~360)

 

그래서 이 책의 원제가 <The Nature of Life and Death> 인가보다. 사건을 추적하고 균류와 먼지를 분석하고 실험으로 그들을 대조하여 범죄를 좀더 명확하게 보는 데 일조를 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지만, 역시, 사람이 산다는 것, 나고 죽는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힘이 있다, 이 책은.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거기에서 나서 그 곳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 슬프지만 어쩌면 인정해야 하는 일인지도. 인간의 육체는 죽고 나면 그저 기존의 자연 모습 그대로 분해되어 자연의 분자와 원자 속으로 사라질 뿐이라는 것.

 

 

나는 범죄 현장에서 구더기가 끓는 시체를 한동안 살폈고, 우리가 뭔가를 배울 수 있도록 시체를 썩게 내버려 두는 미국 테네시주의 '시체 농장'에도 가봤다. 나는 여러분을 피가 흠뻑 젖은 카펫과 쿠션이 있고 회색과 갈색 곰팡이가 잔뜩 자라 희생자가 살해된 순간을 밝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던디의 한 아파트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무들이 무성한 숲과 외딴 황야에 버려진 시체들, 영국 남부 한복판에서 환각을 일으키는 독성 식물과 함께 벌어지는 샤머니즘 의식, 실종된 수많은 소녀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한 채 얕게 파묻힌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여정에서 또한 여러분이 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끌고자 한다. 거기에는 나의 사랑과 상실 그리고 어린 내가 자연 세계의 드넓은 경이에 눈떴던 웨일스의 작고 좁다란 골짜기가 있다. 그 끝에 지금껏 내가 식물과 동물, 미생물을 관찰하면서 발견한 경이로움을, 어떻게 우리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작동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다면, 이 작업은 성공인 셈이다. (p19)

 

 

책을 읽다가 '시체 농장'에 대한 글을 읽고 허걱 했는데, 그러니까 1970년대에 퓔리엄 배스 라는 미국 인류학자가 녹스빌 테네시 대학과 인접한 삼림지대에 부지를 받아 시설이라는 걸 세운 게 시초라고 한다. 말하자면 시체를 산재시켜 놓고 호나경이 시체가 부패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기 위해 시체들을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시키는 곳이라고.. 헐... 심지어 퍼트리샤 콘웰이 이에 대한 책도 썼다고 해서 찾아봤다.

 

 

 

 

 

 

 

 

 

 

 

 

 

 

 

 

 

번역판까지 있었다니. 이건 제목만 봐도 읽기가 싫어지는 류의... 이 책에 이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써놓아서 더 그런 것 같다.

 

시설에 기증된 시신은 수많은 종류의 버려진 시체를 시뮬레이션하는 데 사용한다. 시신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때로는 특이하고 기괴한 상태에 방치되며 그 부패 과정이 상세히 기록된다. 이런 과정이 충분히 자주 반복되면 특정 조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 이 시설이 유명해지자 수많은 박사 과정 학생들이 사체나 그 주변 토양 그리고 그곳에 대량 서식하는 곤충들에 관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p197)

 

 

여기까지. 곧 점심 시간인데... 학문을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정말 깨끗하지도 완벽하지도 멋지지도 않은 것임을 다시한번 절감. 뭔가를 밝혀내기 위한 과정은 가장 지독하고 무시무시하고 지저분한 과정인 지도 모르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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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6-29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4월에 서점 갔다가 저 책을 보고 너무 사고싶어져서 보관함에 넣어뒀었거든요. 여즉 안사고 있었네요. 7월 구매에 넣겠습니다. 너무 궁금해요. 읽어보니 ‘호프 자런‘의 [랩걸]과 비슷한 것 같아요. 아, 너무 읽고 싶ㄴ에요. 오늘도 책이 도착했고 내일도 도착할텐데 또 사고 싶네요. 이런...

문득 인생을 살면서 성장과정에 어떤 사람을 만나는가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돼요.
저 고등학교때 화학선생님은 여자분이셨는데 본인은 수학과를 가려고 생각했대요. 그걸 과학선생님이 알고 오시더니 ‘숫자만 계산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공부가 과학이야, 과학이 어떠니‘ 라고 하셔서 화학을 전공하게 됐다고 하셨거든요.


저 대학때 남자친구가 긴 머리 자르지 말라고 긴 머리가 좋다고 해서 내내 제 긴머리를 자랑스러워했던 생각나네요. 아 짜증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점심 맛있게 드세요, 비연님!

비연 2020-06-29 12:28   좋아요 0 | URL
재밌어요, 이 책. 정말 다양한 식물종과 균류 등의 이름들이 나와서.. 가끔 헷갈리는 것만 빼고는 ㅎㅎㅎ
저도 지금 신간들 보면서 아 책을 또 사야 하나... 일단 보관함에 푱푱.. 까지만 하고 있는데. 내일까지는 버티려구요. 양심상 그래도, 7월에 샀다고 하고 싶어서... (조삼모사 ㅜ)

긴머리..ㅋㅋㅋㅋ 전 예전 남친이 짧은 스트레이트 머리 귀엽다 해서 짧은 스트레이트 머리만 고수했던 한 때가. 꼬불이 파마하고 싶어도 참고.. 이런. 하나쯤 짜증나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는 건가요.. 흠냐.

점심.. 먹어야죠. 맛나게 맛나게. 먹는 게 맛날 때가 좋은 거다 하고 푸짐하게 먹을 생각.. ㅋㅋ
다락방님도 맛난 점심요!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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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는 것을 벗어나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폐해가 여성과 자연과 식민지에까지 걸쳐 있으며 이를 기존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따라서 소비의 패턴을 바꿈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함을 더할 나위없이 잘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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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지난 19일에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암이었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이 작가가 죽다니. 이렇게 이른 나이에. 어떻게 이런 일이.

 

https://www.news1.kr/articles/?3971147

 

<바람의 그림자>는 내가 읽은 소설 중에서도 상위에 랭킹되는 소설이다. 이걸 읽고 나서 여러 사람에게 소개해준 기억이 난다. 책 이야기이고 미스터리의 형식을 빌었지만, 소설의 완성도나 짜임새나 무엇보다 그 지적인 분위기가 읽는 이를 저도 모르게 책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하는 매력 아니 마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 이후에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이잡듯이 사서 읽었지만, <바람의 그림자>만한 책은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2.

 

까치글방의 박종만 대표가 지난 14일에 돌아가셨다. 직접적으로 아는 분은 아닐 지라도 까치글방이라는 출판사가 지향하는 출판의 모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석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75세. 요즘 같은 때는 너무나 이른 나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950382.html

 

그 예전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었고 이런 류의 책은 그 어디에서도 안 나오던 시기였다. 최근에 나온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같은 책도.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학 등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싶어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출간 목록이 아닐 수 없다. "생전에 베풀어주신 후의와 배려에 감사한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고 돌아가실 때는 가족들에게 "간다"라고 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괜히 눈물이 났다. 한평생 출판을 위해 헌신한 분 다운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으면서도 좀더 사셨으면 좋았을텐데 라는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어떤 인생을 살았든 죽는다. 그 뒤에 책이 남을 수도 있고 글이 남을 수도 있고... 누군가가 죽었을 때 주변 사람에게 아쉬움을 남긴다면 그 인생은 나쁘지 않았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삶 속에 죽음이 항상 내재해있음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작가와 박종만 대표.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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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6-23 1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종만 대표님이 계셨기에 우리의 젊은 시절 독서가 그런 식으로도 형성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연 2020-06-23 12:0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좋은 책들 많이 내셨는데. 그런 열정을 끝까지 지니고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정말, 좋은 곳에서 이제 평안하셨으면 싶어요. 병으로 많이 고생하셨다 하니..

stella.K 2020-06-23 1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의 그림자 사 놓기만하고 안 읽은 게 여러 핸데
그 사이 그런 일이.,ㅠ 아무리 백세 시대라지만
그렇게 일찍 떠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두 분 모두
안타깝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연 2020-06-23 14:48   좋아요 1 | URL
<바람의 그림자>는 조심스레 추천해봅니다.
제게는 굉장히 인상적인 작품이었거든요...
먼저 가신 분들의 명복을 다시한번 빕니다.. 참 서글픈 일이에요...

단발머리 2020-06-23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종만 대표님... 누구신지~~ 했는데 링크해주신 책 보니 저도 큰 도움 받았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비연 2020-06-24 19:41   좋아요 0 | URL
책 면면을 보면 참... 더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텐데.. 싶은 아쉬움이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리도 솔직하고 세심하고 유려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지. 마여 앤젤루의 장단에 맞춰 재미있게 슬프게 조마조마하게 책을 읽어내려가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과 만나서 얘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어를 그렇게까지 못하기도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되어 버린 지라 바라보며 얘기하긴 글렀으니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왜, 많은 흑인들이 그녀를 존경하는지 칭송하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었다. 단 한 권의 작품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이 책은 마여 앤젤루의 자서전이지만, 한 흑인의, 한 흑인여성의, 한 성폭행 피해자의, 한 버림받은 자식의, 한 미혼모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책에 너무나 조화롭게 어우러져 묘사되어 있다.

 

지금도 난리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그 시절에는 더 심했었다. 북부보다 남부가 심했고 그게 너무나 일상에 파고들어 있어서 세상에 백인이라는 부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읽고 있노라면, 어떻게 사람을 이리 분류하여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지, 그런 세상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는 지 그 속에서 흑인들이 느꼈을 수치심과 분노와 자괴감은 어떠했을 지 상상이 안 될 정도였다.

 

우리 마을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사람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두 좋아하지는 않았고 몇몇은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었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 즉 외계인처럼 사는 것 같지 않게 살고 있는 그 낯설고 창백한 피조물들은 사람들로 생각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백인들일 뿐이었다. (p38)

판사는 '미세스 핸더슨'을 소환하라고 명령했고, 마마가 도착해 자신이 '미세스 핸더슨'이라고 말하자 판사와 법정 관리, 백인 방청객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판사는 흑인 여자를 '미세스'라고 부르는 실언을 내뱉고 말았다. 파인 블러프에서 왔을 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서 가게를 가지고 있는 여자가 흑인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그 사건을 가지고 오랫동안 킬킬거렸고, 흑인들은 이 사건으로 우리 할머니의 가치와 위엄이 입증됐다고 생각했다. (p65)

의사는 문손잡이를 놓고 마마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비좁은 층계참에 우리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애니, 내 원칙은 말이오. 검둥이 입에 내 손을 집어넣느니 차라리 개 주둥이에 집어넣겠다는 거요." (p249)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부인 한 사람이 전차에서 흑인 시민이 옆으로 비키면서까지 앉을 공간을 만들어줬는데도 그 옆자리에 앉기를 거부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부인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은 징병 기피자에다 흑인인 그 사람 옆에는 앉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이오 섬에서 싸우고 있는 자기 아들처럼 그 흑인도 최소한 조국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부인은 덧붙였다. 소문에 따르면 흑인 남자는 창문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팔이 잘려나가 텅 빈 한쪽 소매를 그녀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조용히 위엄 있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시면 부인, 아드님께 그곳에다 두고 온 제 팔을 좀 찾아봐달라고 부탁하시죠." (p280)

 

또한, 흑인 여자아이로서의 마여 앤젤루는 아름답지 않다고 고정관념화된 자신을 이야기한다. 백인은 아름답고 우아한데 반해 흑인은 못생기고 거칠고 투박하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그녀에게 자리잡혀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내가 이 어둡고 흉측한 꿈에서 깨어나면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까? 마마가 곧게 펴지 못하게 하는 곱슬머리 대신에 기다랗고 금발인 내 진짜 머리카락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모두 내 눈이 너무나 작고 사팔뜨기라서 "아버지가 중국 사람임에 틀림없다"고들 말했는데 본래대로 돌아온 연푸른 내 눈동자를 보면 그들은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매혹당할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내가 왜 남부 사투리를 구사하지 않으며 저속한 속어를 사용하지 않는지, 그리고 흑인들이 잘 먹는 돼지 꼬리와 돼지 주둥이를 먹으려고 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나는 백인이었는데 잔인한 요정인 계모가 아름다운 내 모습을 질투해서 나를 검정 곱슬머리에 두 발은 마당만 하고 이와 이 사이가 넘버-2 연필이 들어갈 만큼 벌어진 몸집 큰 검둥이 계집애로 만들어버렸다. (p11)

 

 

이 대목에서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p165~p166에 걸쳐 바로 '이 대목'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야 안젤루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아름다워지는 유일한 방법은 백인이 되는 것이라는 점을 고통스럽게 깨닫게 된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위 단락 이용) ... 흑인을 "밝은 피부를 지닌" 흑인과 "시시한 흑인"의 두 범주로 나누는 것은 흑인여성에게 서로 다른 영향을 미친다. 검은 피부를 지닌 여성은 열등한 존재이자 "잘 안 빗어지는 머릿결을 지닌 뚱뚱한 흑인소녀"로 취급된다. (p165~p167, <흑인 페미니즘 사상> 중)

 

마여 앤젤루는 흑인이기 이전에 여성이었고 어린 시절, 어머니의 흑인 애인에게 무참하게 성폭력을 당한 후 4년간 말을 잃었다. 같은 멸시받는 흑인이면서 남성이 여성을 또 폭력으로 억압하는 상황.

 

"마거리트, 질문에 대답을 해요. 당신이 강간당했다고 말한 그날 이전에도 피고가 당신을 건드린 적이 있었나요?

법정 안에 있는 사람이 모두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분명히 "아뇨"일 거라고 생각했다. 프리먼 아저씨와 나를 뺀 모든 사람이. 나는 애타게 "아뇨"라고 대답해달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저씨의 슬픈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아뇨" 하고 대답했다... (중략) .. "이 늙고 비열하고 더러운 놈아. 더럽고 늙은 놈아." (p113)

 

아이는 처음에 성추행을 당했을 때 그것을 따뜻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고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간을 당하고 나서 그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네"라고 답하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실을 알고, 그러니까 자신이 그냥 받아들인 것을 알고 착한 아이가 아님에 실망할까봐 차마 "네"라는 답을 못한 채 "아뇨"를 한 후 소리소리 지른다. 그렇게 거짓말을 하게 한 강간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서 사는 내내... 흑인여성은 한편으로는 인종에 대한 충성심과 다른 한편 여성으로서 느끼는 연대감 사이에서 분열을 느낀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신을 억압하는 편을 드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녀들은 거의 언제나 여성보다는 흑인인종을 선택했다. 인종의 편을 들면서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자아와 온전한 인간성을 희생한 것이다. (p221, <흑인 페미니즘 사상> 중)

 

 

그러나 마여에게는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친할머니 마마가 있었고, 어머니 비비가 있었고 플라워즈 부인이 있었고 오빠 베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민한 그녀 자신이 있었다. 마여는 그렇게 스스로 처한 험한 인생살이를 버티고 지켜 나간다. 그녀는 순순히 그렇게 차별받으며 운명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빠가 집을 나가자, 전차 차장이 되기로 결심했으나 흑인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에 끝까지 투쟁하기로 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곁엔 어머니가 있었다.

 

 

"그게 네가 원하는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한번 시도해야지. 네가 가진 걸 모두 바쳐라. 너한테 여러 번 말했지만 '할 수 없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는 말과 같으니까. 그 두 가지 말은 의미가 없어."

그 말을 해석하자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고, 또한 인간이 관심을 가져선 안 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나한테 그보다 적극적인 격려는 없을 것 같았다. (p347)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도 줄곧 얘기하고 있지만 흑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는 남다르다. 흑인 어머니는 자녀에게 특히 딸에게 좋은 훈육자이자 생존을 위한 보호자라는 말. 마여는 그렇게 어머니에게서 힘을 얻고 그 나름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결국 최초의 전차 회사 흑인 직원이 될 수 있었다. 부라보!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니까 사고방식이 너무나 많이 변해버려서 나 스스로도 이것이 내 모습이 맞나 생각할 정도였다. 폐차장 친구들이 나를 무조건 받아들인 탓에 보통 느끼게 마련인 불안감이 사라져버렸다. 전쟁의 광란이 만들어낸 진흙투성이 집 없는 아이들이 뜻밖에도 나에게 처음으로 형제애라는 것을 가르쳤다. 미주리 주에서 온 백인 소녀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멕시코 소녀, 오클라호마 주에서 온 흑인 소녀와 함께 깨어진 빈 병들을 주워 파는 생활을 하고 나니까 나 자신이 인류라는 울타리 밖에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임시로 만들어진 우리의 특별한 공동사회가 보여준 비판 없는 분위기는 나에게 큰 영향을 주고 내 삶에 관용이라는 색조를 낳았다. (p333)

 

 

아버지에게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우연치않게 한 달간 노숙을 하면서 (구태여 데려와달라 연락하지 않은 채) 마여는 또 다른 세상을 맛본다. 모든 인종이 가난 속에서 모여 살면서 느끼는 형제애. 그 속에서 관용이라는 것, 일종의 인류애라는 것을 느낀다. 십대 여자아이였지만,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모습은, 성장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경탄하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 아이가 성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급기야 열 여섯살에 미혼모가 되기를 선택하는 과정 또한 드라마틱하다.

 

이 책은 자서전 6권 중 첫 번째 권으로 4살부터 16살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마도 가장 강렬한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흑인이면서 여성이면서 가난한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으로서,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넘고 마여 앤젤루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된다. 그 성공 스토리를 꼭 말하지 않더라도, 이 책 한 권만으로도 마여 앤젤루의 가치는 높이 살 만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자서전이라는 분야를 좋아해서, 여러 사람의 책을 읽었지만, 이 책만큼 재미있고 솔직하고 담대한 책은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은,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읽은 수많은 분석과 의견들을 한방에 다 증명해내고 있어서 읽는 내내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뒤적거리며 아 이 부분이야 그렇지 이 부분이 현실에선 이렇겠구나 할 수 있었다. 이야기의 힘은, 그 어떤 이론서도 뛰어넘는다는 것을 다시한번 입증해낸 책이다.

 

 

 

 

 

 

 

 

 

 

마여 앤젤루의 다른 번역책들도 냉큼 보관함에 넣어둔다. 이런 재치있고 진솔한 글이라면 언제든지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마여 앤젤루의 이후 인생 또한 매우 다채롭고 흥미진진하여 번역이 되지 않았다 해도 자서전 나머지를 원본이라도 사서 읽어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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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23 0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정말 좋은 책이긴 한데 사실 어려울수도 있잖아요. 두껍기도 하고요. 우리가 이런 거를 또~~ 솔직히 인정하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두 권 모두에 흥미가 생긴다면 <새장에 갇힌 새가..>를 먼저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전 흑페미를 읽었어도 인용해주신 부분들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165-167쪽은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전, 마야 안젤루가 올해의 발견 Top 5에 들어가거든요. 너무 좋았어요. 비연님 말씀대로 소장각인데 전 도서관책으로 읽어서 이제 구입하려고 합니다. 비연님의 완벽 고퀄 페이퍼를 이 아침에 읽노라니, 전 저절로 굿모닝!입니다. 감사해요, 비연님!

비연 2020-06-23 09:51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이 좋다고 하신 글도 보고 <흑페미> 보면서 흥미도 생기고 해서 읽었는데 정말 잘한 일 같아요.
소설의 힘은, 예술의 힘은, 이렇게 좋은 내용을 마음에 확 와닿게 해주어서 더 큰 듯 해요.
저도 올해 책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책을 읽고 함께 동감해주는 분들이 계시니 더욱 힘이 나는 것 같아요~

단발머리 2020-06-23 09:54   좋아요 1 | URL
그리하여 전 어제 <엄마, 나 그리고 엄마>를 읽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고로, 전 에코페 진도가 지지부진하다는 기쁜 소식 2도 전해드리고요^^

비연 2020-06-23 09:56   좋아요 0 | URL
어멋어멋. 그새 <엄마, 나 그리고 엄마>를 읽으셨다니! 페이퍼 기대합니다 으흠~
에코페 진도가 지지부진하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라뇨...ㅎㅎㅎ 어느새 훌렁 읽어서 절 놀래키실 거라
지금 다시금 긴장 모드. 제가 3일 천하였잖아요.. 흑흑 ㅜㅜㅜㅜㅜ

다락방 2020-06-23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으네요. 흑인 페미니즘 사상 읽은 분들이 다 같이 마야 안젤루에게로 뻗어나가는 독서.. 너무 근사합니다. 이럴 때면 사실 저는 제 자신이 뿌듯하고요(응?)
저는 마야 앤젤루의 책을 이미 갖춘 이상 읽는 일만 남았습니다. 움화화핫.

비연 2020-06-23 09:52   좋아요 0 | URL
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요즘 독서의 재미는 연결되고 또 연결되는 이 맛.
읽으면서 내내 머릿 속에서 뭔가 뿅뿅 떠오를 때의 뿌듯함... 이런 거 같아요.
이 책 꼭 읽어보시실 권해드려요. 저희가 또.. 책을 집에 가지고 있으니 바로 집으면 되니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