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러시아 작가 -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푸쉬킨, 체호프, 투르기네프, 고리키 등등 - 들을 좋아해서 그 작가들의 유명한 작품은 거의 다 읽었노라 생각했는데, 흠? 니콜라이 레스코프 라는 낯선 러시아 작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책제목이 <레이디 멕베스>.  러시아 작가 가운데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라고 했고 톨스토이도 인정했다고 했고. .그래서 두말없이 샀다.

 

대부분의 러시아 작가 소설들은 진지하고 무거운 편이다. 체호프 정도가 좀 농밀한 유머와 뒤틀림의 중단편들을 써내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진지하다 못해, 어떤 것은 머리에 끈을 두르고 읽어야 할 정도로 심오하고.. 길다... 그래서 두 번 읽고 싶어, 라고 덮은 책도 두 번 읽으려고 마음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 그런데 이 레스코프라는 작가는 시종일관 아주 해학적이다. 이걸 노어노문학 하는 사람이 원문으로 읽었다면 더 마음에 와닿는 러시아적인 소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투리도 들어갔을 것이고 단어들도 한국어로는 표현이 안되는 유머가 녹아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 책에 수록된 <레이디 멕베스>와 <쌈닭>은 가볍고 재미있지만 각 작품의 주인공인 여성들의 삶은 매우.. 슬프다.

 

*

 

<레이디 멕베스>의 주인공인 카테리나 리보브나는 가난한 집에 태어나 나이가 두배는 차이나는 잘 사는 상인집에 시집을 왔다. 90이 다 되어가는 시아버지와 50대의 남편은 일하느라 정신이 없고 게다가 아이도 생기지 않아 카테리나는 매일을 무료하게 여기저기 왔다갔다 하며 지낸다. 그러다가 문득, 산책하던 중 하인들과 어울리게 되고 거기서 세르게이라는 잘생긴 청년을 알게 된다. "키며, 얼굴이며, 어떤 여자든지 원하기만 하면 금방 꾀어내어 결국 일을 치르고 마는 도둑놈이자 비열한 변덕쟁이"인 세르게이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버린 카테리나는 남편이 멀리 나가 있는 사이 세르게이와의 환락에 푹 빠져 지내게 된다. 그렇게 지내던 중, 시아버지에게 들켜버렸고 그래서 노환처럼 시아버지를 독살해버린 후 소식을 듣고 달려온 남편도 함께 묻어버리고... 이제 다 해결되었나 싶었더니 유산 공동상속인이라고 먼 친적 아이가 나타나 이들을 방해하니..

 

"잘 들어, 세료자! 다른 여자들이 어땠는지 나는 알 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단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물론 내가 너를 원하기도 했지만, 네가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고, 또 네 술수 때문이란 사실은 너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에, 세료자 네가 나를 배신하거나, 내 대신 다른 여자를 택한다면, 나는, 결코 살아서는 너와 헤어지지 않을 거야." (p41)

 

사실 이 남자가 죽일넘인데.. 주변 여자들만 놀아남을 당하고 버림을 받고 죽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이런 구도가 좀 못마땅한 면이 있다. 이 남자를 죽이면 다 끝나는 건데 말이다. 어쨌든 카테리나의 마지막 선택은, 찝찝한 구석이 있다. (더이상은 스포일이라 말하지 않겠다는..ㅜ)

 

*

 

<쌈닭>은 더하다. 돔나 플라토노브나라는 한 여성이 등장하고 이 여성은 원래 직업은 레이스 파는 사람이지만, 페테르스부르크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오지랖 넓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중매쟁이가 되기도 하고 물건을 알선하기도 하고 돈을 구해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인력들도 구해주고, 심지어는 능력 안되는 여성들을 돈많은 늙은이들에게 알선하는 역할까지도 자청하고 나선다. 뭔가 매우 사악한 기운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딴에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최선을 다한다고나 할까. 그런 작업들을 자신의 작품인 양 사랑하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모양새다.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이 작품의 '나'라는 남자에게 썰을 푸는 내용들은 읽어보면 꽤 재미있다. 황당한 일들도 있지만, 말하는 내용이 재미있어서 그냥 쭈욱 읽어나가게 된다. 한없이 오지랖이 넓어서 돈도 많이 못 모으고 그렇지만 별로 개의치 않게 살고 그러나 자기가 뿌린 일들에 늘 배신당한다고 생각하는 여자. 늘 당당하고 수다스러운 여자.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있는 여자. 그게 돔나 플라토노브나였다. 그리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였다.

 

 

"돔나 플라토노브나! 오래전부터 묻고 싶던 것이 있는데 말이에요. 당신은 젊어서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었는데, 정말로 한번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나요?" 내가 말했다.

"마음을 주다니,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누군가를 사랑한 적이 없었느냐고요?"

"정말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왜 어리석은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그게 왜 어리석은 말이냐 하면, 그런 사랑 이야기 같은 것은 도와주는 사람이나 살펴 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한테나 걸맞은 것이기 때문이야. 혼자인 나는, 언제나 나 스스로를 부양하고, 언제나 절약을 밥 먹듯이 하며 살지. 그런 것은 전혀, 정말이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다니까."

"정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요?"

"눈곱만큼도 없었지! 그리고 또 자네니까 하는 말인데, 사랑이란 모두 쓸데없는 짓이야.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들은 이런 정신나간 말들을 하곤 했지.

'아, 죽을 것 같아! 그 남자 없이는 혹은 그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어!'

그것뿐이야. 내 생각에 사랑이란 남자가 여자를 잘 도와주는 것,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그리고 여자는 모름지기 언제나 자기 몸 잘 건사하고 정숙해야 되고."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손톱을 비비면서 덧붙였다. (p267-268)

 

 

 

이랬던 돔나 플라토노브나의 말로를 보면, 뭔가를 너무 부정하며 산 사람에게 그 무언가가 갑자기 들이닥칠 때 와르르 무너지기도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닫혔던 마음이 급격하게 부서지는.

 

*

 

나한테 아주 맞는 스타일의 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뒤의 작가 해설을 보니 흥미가 좀 돋는 책들도 있어서 번역된 것들을 보관함에 담아둔다. 내 느낌엔, 이 사람은 마치 .. 우리나라로 말하면 김동인의 느낌이랄까. 그리고 요즘 들어 고전을 읽다보면 늘상 드는 생각인데, 참 어투나 문체나 고풍스럽고 템포도 많이 느리구나 싶다. 요즘 태어난 아이들이 이런 고전을 읽어내려면 많이 힘들겠다 싶기도 하고.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고, 물론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 법이니 고전은 영원하겠지만, 어쩌면 아이들한테는 새로운 요즘 세대의 고전이 필요한 지도 모르겠다 라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

 

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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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7-28 18: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거군요. 전 처음 듣는 작가에요. 러시아 소설 많이 읽지도 못했지만요.
소설 이야기도 재미있었지만, ˝머리에 끈을 두르고 읽어야 할 정도로 심오하고.. 길다.˝ 전 이 문장이 제일 웃겼어요.
러시아 소설은 머리에 끈을 두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7-29 14:25   좋아요 0 | URL
저도 하나인 줄 알았는데, 두 개더라구요. 둘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러시아 소설은 정말 머리에 끈 두르고 공부하듯이 읽어야 할 때가 많아서 ㅎㅎ;;;;
그래도 러시아 소설, 사랑합니다~

라로 2020-07-29 0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두말없이 샀다....결단력과 행동력이 퐉 느껴지는 더 문장! 멋져요, 비연님! 근데 저도 그래요,,,ㅎㅎㅎㅎㅎㅎㅎㅎ우리 둘이 넘 멋진가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러시아 문학은 톨스토이하고 체호프만 제대로 읽었네여,,,도스토예프스키 먼저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전 갈 길이 멀죠~.

비연 2020-07-29 14:26   좋아요 0 | URL
캬캬. 책 살 때는 정말, 넘 결단스러운 비연과 라로..ㅎㅎ
도스토에프스키의 책들은 정말 하나같이 좋습니다. 특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악령> 추천드려요^^

Falstaff 2020-07-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돔나 플라토노브나가 어느 여성분이 우는 모습을 보며 하는 말씀이,
˝왜 아침부터 소금물에 세수를 하는 거예요?˝
겁나 웃겼던 기억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비연 2020-07-29 14:2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정말 주옥같은 재미있는 문장들이 꽤 되었더랬죠~

Falstaff 2020-07-29 1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들 아실 것 같아 댓글 달기가 좀 거시기한데요, <레이디 맥베스>는 쇼스타코비치가 역사상 처음으로 침대 위에서의 정사 씬을 넣은 파격적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로 만들었습니다. 음악 자체가 기발하고 쇼킹합니다. 대본 역시 레스코프의 원작하고 상당히 유사하고요. 그러니 어떻겠어요. 재미있지요. 당연히 모스크바 사람들에게 인기 폭발이어서 평소 쇼스타코비치를 어여쁘게 보고 있던 스탈린 각하 역시 어느 날 객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근데 오페라 시작하고나서 불과 얼마 가지 않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옆에 있던 비밀경찰, KGB의 전신이지요, 대빵한테 지시합니다. 지금 당장 쇼스타코비치한테 가서 A4용지로 반성문 30장 써오라고 해!
물론 쇼스타코비치는 반성문을 썼고, 당시에 경찰에 끌려가는 경우엔 거의 대부분 새벽에 잠옷을 입은 채로 끌려갔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는 그때부터 정장에 넥타이까지 하고 침대에 올라 잠을 자기 시작합니다.
이건 줄리언 반스가 쓴 <시대의 소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혹시 잘난 척 한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비연 2020-07-29 14:49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시대의 소음> 읽었는데 이게 <레이디 멕베스>를 가지고 만들었다는 건 몰랐네요. (아님 내용에 있었는데 잊은 건가..) 책은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이런 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레스코프 - <레이디 멕베스> - 줄리언 반스 - <시대의 소음> - 쇼스타코비치 - <므첸스크의 레이디 멕베스>.. 넘 즐겁습니다 ㅎㅎㅎ
 

 

 

 

 

 

 

 

 

 

 

 

 

 

현직 내과의사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라는 선전문구보다는 제목에 이끌려 책을 구입했다. <사일런트 브레스: 당신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저자는 소설에 들어가기 앞서 사일런트 브레스를, 조용한 일상 속에서 평온한 종말기를 맞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아프면 병원에 가고 거기서 의사가 권하는 치료란 치료는 다 받고 나중엔 콧줄 끼고 연명치료까지 하다가 병원 침대 위에서 죽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책은 집에 머물며 방문의사와 사회복자사의 보살핌을 받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인 미토 린코는 대학병원의 종합진료과에 10년 동안 근무하다가 갑자기 도쿄 변두리의 작은 방문 클리닉으로 가라는 좌천 비슷한 명령을 받는다. 처음엔 자존심도 상하고 대학병원에 비해 턱없이 열악한 환경에 실망했지만, 환자가 머무는 집으로 가서 그들의 일상을 함께 하며 그들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도와주는 역할을 지속하면서 의사가 하는 일이 병을 억지로라도 치료하는 것도 있지만, 환자 본인의 판단을, 그들의 인생을 지켜주는 것에도 있다는 것을 꺠닫게 된다.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고 집에서 죽겠다며 자포자기한 모습으로 돌아온 저널리스트, 근디스트로피를 앓고 있어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지만 늘 밝고 긍정적인 청년, 연명치료를 거부하다가 아들의 막무가내에 결국 연명치료를 받게 된 80대 여성, 다카오 산기슭에서 버려진 채 발견되어 언어능력을 상실한 채 지내는 소녀, 그리고 적극적으로 암을 치료해야 한다고 평생을 주장하며 바쳐왔으나 자신이 췌장암 말기 선언을 받자 모든 치료를 거부하는 의사, 그리고 미토 린코의 아버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다양한 경우를 보며, 함께 울고 웃으며, 미토 린코는 죽음을 통해 삶을 보게 된다. 의사에게 있어 죽음이 패배가 아니라 어쩌면 목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점점 수긍하게 된다고나 할까.

 

 

"잘 생각해 봐. 사람은 반드시 죽어. 지금 우리에게는 패배를 패배로 생각하지 않는 의사가 필요한 거야."

정신이 버쩍 드는 말이었다.

"죽는 환자도 사랑해 주라고."

팔짱을 낀 오코치 교수가 찡끗 웃으며 린코를 보았다.

"알았지? 죽는 사람을 사랑해 주자고, 고칠 생각밖에 없는 의사는 고칠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 그 환자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려. 그렇다고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으니 어영부영 치료를 질질 끌다가 결국 병원 침상에서 고통만 안겨 주는 상황이 되지. 이건 환자에게나 가족에게나 정말 불행한 일이야." (p288)}

 

 

우리 외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크게 문제가 없으셨는데 갑자기 몸이 불편해지셔서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만 해도 돌아가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병원 침대에 앉아 계시던 외할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할머니, 얼른 퇴원하세요. 별일 아닐 거에요,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안 좋아지셨다. 신장 기능이 망가지기 시작했고, 병원에서는 투석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전까지는 투석이 그렇게 힘든 건 줄 몰랐는데... 병원에 가서 보니 거의 반나절을 기계에 사람을 묶어 놓고 혈액을 교체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었고 그걸 하고 나면 늘 외할머니는 녹초가 되셨더랬다. 그리고 계속 그러셨다. "집에 가고 싶어.." 엄마는 그런 외할머니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었다. "엄마, 좀만 참아. 곧 가게 될 거야." 그러다가 의식만 있는 상태가 되더니... 돌아가셨다. 우리랑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누셨는데...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시고 그대로 병원 침대 위에서 돌아가셨다. 가서 보니 그 휑한 병실 침상 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누워 계셨더랬다. 사람이 나고 살고 죽는 게 이런 것인가 싶어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었고. 지금도, 외할머니가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을 때 그냥 집에 모시고 갔더라면 좀더 편하게 계셨을까. 투석 같은 거 받으며 고통스러워 하지 않고 살던 자리에서 그렇게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실 수 있었을까.. 라는 후회가 스미곤 한다.

 

주인공인 미토 린코도, 이 일련의 과정 속에서 뇌경색으로 쓰러져 10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지를 달리 바라 보게 된다.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매달리는 엄마를 보며 아버지를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는가 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억지로 관을 통해 유동식을 넣다보니 자꾸 폐렴이 생기고 그 과정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보며, 이것이 과연 아버지가 원했던 죽음일까를 생각한다. 사실, 자식의 입장에서 병원을 나와 집에서 편안히 보내드리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잘못하면 두고두고 죄책감으로 남을 수도 있는 일이라 정말 쉽지 않은 결단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적어도 나는.. 연명치료 없이 그냥 명이 다하면 그대로 두어 사나흘 내에 조용하고 깨끗하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이 대체로 (다는 아니지만) 그렇듯이 술술 읽어나가게 써서 하룻 밤 새에 후딱 읽을 수 있는 책이었지만, 내용 자체는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돌봄노동에 대해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의료라는 것에 대해서 진진하게 생각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다. 인생에서 죽음이란 무엇인지, 죽음도 인생의 일부라면 준비를 해야 하는 게 아닌지, 그리고 그 준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거듭거듭 생각하게 했다.

 

 

'그런데 여러분은 happiness와 happening의 어원이 같다는 거 알아? 둘다 '기회'를 뜻하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hap에서 유래한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해피하게 있기로 결심했어. 앞으로 인생에서 다양한 해프닝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함께 파이팅하자고! 그런 의미에서, 조금 이른 듯 하지만 Merry Christmas and a Very Happy New Year with a lot of HAPPENINGs!'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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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7-24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외할머니 연세가 아흔이 넘으셨어요. 그래서인지 이 책은 제가 꼭 봐야하는 책 같네요. 비연님의 글 자체도 무척 좋고요.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비연 2020-07-24 11:47   좋아요 0 | URL
연세가 있으신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이 계시다면.. 남의 일이 아닌 지라 좀더 감정이입해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미토 린코와 아버지와의 이별은...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팠구요. 한번 읽어보시길..
 

 

어제 회의가 있었다. 친한 L선배(여)가 왔고 또 다른 P선배(여)와 셋이 회의 끝나고 잠깐 커피를 마셨다. 난 그 전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고르다가 다 낑기는 바람에 좌절하여 어쩔 수 없이 허리 부분이 좀 들어간 옷을 선택하여 입고 간 차였다. (그거만 그래도 대충 맞았다..) 걸어다니면서 배에 힘 꽉 주고 숨도 덜 쉬고 하면서 나의 살찐 배를 가리기 위해 최선을 노력을 다한 하루였고. 카페 어느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L선배가 말했다.

 

 

L: 야야. 너 살 엄청 쪘다. 지하철에서 임산부석 양보할 정도다.

비연: 헉. 제가 코로나 이후로 5키로 넘게 찌긴 했어요..(ㅠ) 그래도 임산부석은..

L: 임산부석 양보해주면 고맙다고 앉아도 되겠다.

비연: 차라리 임신을 했으면 고맙지만.. 그게 고마울 일이 될 수 있나요.

L: 비연아. 비만에는 식욕억제제가 필요하단다. 얼른 하나 사먹어라.

비연: ....

 

 

그런 와중에도 난 이 부끄러운 대화를 다 잊고 저녁 약속에 가 엄청 먹어대었고.. 집에 와 옷을 갈아입으면서 백과사전처럼 두꺼워진 뱃살을 보며 생각했다.. 빼야겠구나. 때가 되었다.

 

어떻게 빼지. 하다가 결심. 하루에 두 끼 샐러드 아니면 과일. 걷기. 요가. 절주.

 

뱃살을 빼자. 빼고야 말리라. 잘록한 허리로 L선배 앞에 등장할 날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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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7-21 2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이팅!!!!!!!!

비연 2020-07-21 21:54   좋아요 0 | URL
감사.. 진정 뽯팅!!

블랙겟타 2020-07-21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비연 2020-07-21 22:55   좋아요 0 | URL
💪💪💪

라로 2020-07-22 00: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L선배 님 말투는 전 별로네요. 쫌 화나요.
어쨌든 뱃살은 빼는게 건강에 좋으니까 화이팅!!

비연 2020-07-22 11:16   좋아요 0 | URL
워낙 친한 사람이라.. 농담처럼 말한 거긴 한데.. 비수로..ㅜㅜ
정말 건강도 그렇고.. 뱃살 빼기로! 홧팅!

공쟝쟝 2020-07-30 0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와중에 금주가 아니라 절주여서 엄청 웃었다능!!! 코로나확찐자 동지가 여기저기 속출하고 있네요 ㅋㅋㅋ 저도 화이팅!!!

비연 2020-07-30 15:19   좋아요 0 | URL
안되는 걸 억지로 하려고 하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어느날 폭음.. 이런 연쇄고리인지라 아예 처음부터 ... 접고 들어가는..ㅜㅜ 8월에 꼭 확찐자를 탈피하겠다는 굳은 결심. 퐛팅!
 

 

 

 

 

 

 

 

 

 

 

 

 

 

 

 

이 책을 함께 읽기로 하지 않았다면 난 이 저자도 책도 아예 모르고 살았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랬다면, 이 혁신적인, 말하자면 튀는 생각을 접할 행운도 놓쳤겠지. 정말 다행이다 싶다.

 

나는 뭐든 좀 다르게 보는 걸 좋아한다. 예전에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태평양의 끝>이란 책을 읽었을 때도 그랬다. 우리가 아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이야기는 백인 남성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고 기독교도인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떨어져 살아남는 생존기이며 모든 이야기는 그가 중심이다. 거기 나오는 원주민 격인 프라이데이(프랑스말로는 방드르디)는 그냥 곁다리로 등장하고 심지어 서양문물에 경도되는 내용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미셸 투르니에는 이 생각을 뒤집어서, 방드르디의 입을 통해 이야기를 하고 그의 사는 방식에 로빈슨 크루소가 따라가게 된다는 내용의 소설을 썼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랄까, 놀라움이랄까. 내가 이제까지 알던 소설을 이렇게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관점을 달리 하니 그 내용이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것, 무엇보다 어쩌면 우리는 백인에 서양인에 영국인에 기독교도인 사람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는 데만 익숙했지, 원주민의 세상은 그냥 주변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이런 역발상 혹은 혁신적인 관점으로의 전환을, 나는 매우 사랑한다.

 

 

 

 

 

 

 

 

 

 

 

 

 

 

 

 

 

 

이 책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도 마찬가지다. 이제 70페이지 남짓 읽었는데도 그 예상치 못한 관점과 생각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다. 찬성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아 나의 고정관념이 이정도구나. 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자꾸 훼방놓고 있는 내 머릿속의 그 고정관념을 계속 느끼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내가 refresh 되는 느낌을 함께 가진다.

 

 

그러므로 성(sex)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이 있을 뿐이다. 성을 생산하는 것은 억압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p45, <성의 범주> 중)

 

그리고 진실로, 여성의 투쟁이 없는 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갈등은 없다. 예상되는 비율에 따르면, 재생산 신체 노동까지 더해서 사회적 일의 4분의 3을 수행하는 것은 여성의 운명이다. 살해당하고, 절단당하고,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고문당하고 학대당하고, 강간당하고, 얻어맞고, 결혼을 강요당하는 것이 여성의 운명이다. 운명은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자신들이 남성에게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마침내 그 사싱르 인정했을 때 여성들은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 ..(중략).. 남성은 자신들이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지배하도록 훈련되었다. 남성은 그 사실을 항상 표현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자신이 소유한 것에 대한 지배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p47, <성의 범주> 중)

 

 

남성과 여성의 성을 나누는 것 자체에서, 지배와 억압은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남성은 그 관점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대의 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게 지배라는 걸 알지만 구태여 되새김질 할 필요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태생적으로. 누가 성별을 자연적인 것을 만들고 그로 인한 억압 구조를 만들어내어 받아들이게 했는가.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쩌면, 지금 일어나는 이 모든 사안들이 이런 기저에 깔린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대의적으로는 이론을 말할 수 있는데 생활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남성'이라는 성별이 가지는 거대한 억압 기제를 뿜어내는 지도 모르겠다.

 

 

성은 여성이 벗어날 수 없는 범주이기 때문에 성 범주는 인구의 절반을 성적 존재로 만드는 이성애 사회의 생산물이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공적 영역에서 일하는 것을 포함해서) 여성은 남성에게 성적으로 접근 가능한 것처럼 보여야 하고 (만들어져야 하고), 가슴과 엉덩이, 옷은 반드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여성은 노란별을 달고 늘 밤낮으로 웃어야 한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모든 여성은 강압적인 성적 서비스를 한다. (p52, <성의 범주> 중)

 

성 범주는 여성에게 딱 붙어 있기 때문에, 여성은 범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여성은 오직 성, 그 성이다. 그리고 성이 여성의 마음, 몸, 행동, 제스처를 만든다. 심지어 살인과 구타도 성적이다. 정말로 성 범주는 여성을 꽉 옭아매고 있다. (p53, <성의 범주> 중)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인 성별에 매여 있는 나는, 자꾸만 헷갈린다. 성별이 없다면 범주를 어떻게 나누지? 만약 범주가 필요하다면, 그 이외에 뭐가 있지?.. 그런 게 무슨 걱정이겠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학적 양태를 펼쳐놓고 구분하면 되는 거지, 필요한 경우에 한해. 뭐든 두 개로 쪼개놓으면 대결 구도가 되고 누군가가 누군가의 위에 서는 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아마도 이 성별이라는 문제 자체가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 어이없는 구조를 만들어냈는가 싶다.

 

그래서 저자는, 용감하고 과감하게 시몬 드 보부아르의 "누구도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라는 명제를 비판한다.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가 없다." 라고 얘기한다. 그 성별이 있는 것부터가 모든 문제의 온상이므로. 따라서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분법 자체를 배격하고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문제로부터의 탈출 trigger로 잡는다.

 

어렵고 잘 안 읽혀지지 않는 책이지만, 읽을수록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답다. 기존 관습에 대한 도전, 고정 관념의 전복, 그리고 당당하게 이를 벗어나고자 하는 논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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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7-17 15: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크, 책보다 비연님의 이 페이퍼가 더 좋습니다. 정말이지 이런 명품 페이퍼를 만날 때면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하는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요.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감상을 읽는 일은 정말 즐겁습니다! ㅜㅜ

비연 2020-07-18 22:2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명품 페이퍼라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 같은 주제로, 그것도 관심이 큰 주제로 다 같이 함께 책을 계속 읽고 얘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씩 알아가는 느낌이 들어 저도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에요. 이런 게 책을 함께 읽는 묘미구나 싶구요.

단발머리 2020-07-17 2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락방님 의견에 완전 동감하는데요. 비연님 페이퍼가 책보다 좋습니다.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듣고 그 생각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네요.
비연님은 글을 더 자주 쓰셔야 하지 않나요? (은근한 강요+협박)

비연 2020-07-18 23:2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칭찬에 부끄러워지는... 전 정말 여성주의 책 함께 읽기가 좋습니다. 뭔가 풍요로와지는 느낌이에요.. 글을.. 더... 자주 쓰도록... 그것은 노력을... 쩜쩜쩜... ㅎㅎ;;;

수이 2020-07-19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다시 읽다가 아 무리다 싶어서 중간에 다시 덮었어요. 좋았는데 딱 알맞은 표현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래도 아름답다는 비연님 문장에는 동의! 전 이번 책 읽으면서 둘러싸고있는 테두리에
금이 간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 받았어요. :)

비연 2020-07-19 19:06   좋아요 1 | URL
둘러싸고 있는 테두리에 금이 간다... 이 문장 좋네요. 뭔가 제가 느낀 것과 비슷한 느낌의 글.
책이 좋은 것 중 하나는 (무지하게 많지만 그 이유는 ㅎ),
이렇게 우릴 늘 살아있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데 있는 것 같아요. ;)

수이 2020-07-19 19:27   좋아요 1 | URL
처음에 마리아 미즈 읽고난 후에 막 숨 벅차고 잠도 오지 않고 그랬는데 그 정도 임팩트는 아니어도 아 내가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있겠구나 이걸 좀 더 또렷하게 보여주지 않았나 싶어요. 생리통 때문에 머리 쪼개질 거 같은데 이 아픔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끔 한다고 해야할까요. 말이 막 나오려고 하다가 멈추고 그래요. 아 말 잘하는 사람들 부러워요. 그리고 글 더 자주 써주세요, 단발머리님 협박에 살짝 협박 한 숟가락 더 보태요 ㅋㅋ
 

 

 

 

 

 

 

 

 

 

 

 

 

 

 

호기롭게 사서 바로 읽기 시작했지만, 다락방님 코멘트대로 그다지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시공간을 왔다갔다 하고 사람도 왔다갔다 하고, 묘하게 눈에 잘 안 익혀지는 이름들 속에서 그 인생들이 헷갈리기도 했다. 그냥 어쩌면 요즘의 내 심정이 심란하고 갈팡질팡하여 그런 지도 모르겠다.

 

원래 이 시기가 되면, 멍때리는 일이 잦아지는데, 근간에 있었던 사건과 그로 인해 오고간 많은 말들, 공격들이 계속 스트레스가 되어 더 힘들어졌었다. 누구를 옹호하고 누구를 비난하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내 마음을 가르지 못했고 그게 묘한 죄책감이 되기도 해서인지, 더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다만, 그냥 사는 게 왜 이리 힘든 지 사는 게 뭔지 정말 아무리 시간이 가도 잘 모르겠구나 라는 생각만이 짙어지던 요즘이었다.

 

이 책은 여자 수형소 얘기이다. 가난하고 사회 밑바닥에서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래서 입게 된 마약사범, 살인자, 사기범 등의 이름. 그 결과로 가지게 된 장기수, 사형수, 전과자 라는 굴레. 그런 이야기이다. 누구나 쉽게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 죄를 짓게 되는 것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하는 거다. 가난해서였을까. 못 배워서였을까. 부모가 학대를 해서였을까. 뭐였을까.. 하지만 어쨌든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런 '남보다 못한' 배경 때문에 죄라는 걸 짓게 되고, 사법체계는 거기에 그 죄에 엄중한 처벌만을 내린다. 처벌을 그 개인에게 한다는 게 옳은 일인가. 어쩌면 많은 사연이 있었던 사람들. 그 사연을 만들어낸 사회나 배경에는 철퇴를 내리기 힘드니 결국 죄를 짓는 '개인'에게 처벌할 수 밖에 없는 건 아닐까. 그런 이야기들을 이 책은 하는 것 같다.

 

제목인 <마스룸>은 주인공인 로미 홀이 일했던 클럽이다. 여자들이 거의 헐벗은 몸으로 나와 '가짜' 애무를 하면 그 주변에 둘러 앉은 남자들이 스스로에게 '진짜' 애무를 하는 곳. 남들은 뭐라 할 지 몰라도 로미는 그 직업이 싫지 않았다. 스트립댄스를 추며 남자들의 시선을 끌었고 거기에서 번 돈으로 아들 잭슨을 키우는 생활. 그러다가 지미 달링이라는 남자를 알게 되었고 애인이 되었고 그럭저럭 재미있게 살만하다 싶은데, 커트 케네디라는 스토커를 만나 결국 집에까지 좇아 들어온 그 자를 쳐서 죽였다. 29살 나이에 종신형 두 번 추가 플러스 6년을 받아 영원히 감옥에서 보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오래 살 계획은 없다. 그렇다고 짧게 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내게는 그런 계획이라는 게 전혀 없다. 문제는 계획이 있든 없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계획 따윈 무의미하다.

그러나 계획이 없다고 후회도 없는 건 아니다.

내가 마스 룸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소름 끼치는 커트 케네디를 만나지 않았다면,

소름 끼치는 커트 케네디가 나를 스토킹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하지만 그는 마음먹었고, 그러고 나니 끈질겼다. 저 일들 중 어느 하나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콘크리트 구덩이 속 인생을 향해 달리는 버스에 타고 있지는 않았을텐데. (p26-27)

 

 

호송되는 버스 안에서 지난 인생들을 훑으며 로미는 이런 후회를 한다. 인생이, 참 그런 것 같다. 납득 안되는 결과를 받아들이려고 애쓰다보면, 과거에 그 결과를 일으켰으리라 예상되는 여러 원인들에 생각이 닿게 되고 그 때 그걸 안 했다면, 인생이 달라졌겠지 라는 후회를 하게 된다. 그러나 정말 잔인한 것은, 인생은 그냥 one-way라는 것. 돌이킬 수 없는 한 방향. 후회한다 해도 영화처럼 그 선택의 순간에 돌아갈 길은 없다.

 

 

"감옥에서는 말이야, 적어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가늠할 수 있어. 내 말은, 진짜로는 모르지. 예측이 불가능해. 근데 그 예측 밖의 일들마저도 다 따분할 뿐이야. 비극적이고 끔찍한 뭔가가 벌어질 수도 있는 그런 곳이 아냐. 내 말은, 물론 벌어질 수 있지. 당연히 벌어질 수 있지. 하지만, 교도소에서 모든 걸 잃을 순 없어. 이미 모든 걸 잃은 뒤니까." (p42)

 

 

감옥은 그런 곳이다. 특히 이렇게 장기수이며 무기수인 사람들에겐 더 하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희망이 없으니까. 이미 인생의 막장 코스에 올라탔으니까. 그런 사람에겐 외부의 사람과의 연락이 정말 간절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소용없다. 애인이었던 지미 달링은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다. "당신이 지미 달링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지 모른다. 편지에 야구 얘기를 쓰지는 않았을망정 인생이 끝장난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어버리긴 했을 것이다." (p43) 로미는 그렇게 받아들인다. 뭐하러 교도소에 있는 여자랑 연인을 하겠냐고. 그렇게 그들은 점점, 어떨 땐 아주 확, 소외되어 가고 잊혀져 간다.

 

세상사는 우리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복잡하다. 인간은 우리가 기꺼이 인정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멍청하고 덜 사악하다. (p266)

 

 

인정.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전부를 담은 문구인 듯 하다. 세상사도 인간도 우리가 알고 인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걸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 그래서 다들 살면서 계속 실수를 한다. 작은 실수, 큰 실수. 로미 홀은 큰 실수. 근데 그게 그렇게 종신형을 살 정도로 그녀만 잘못한 일인가.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는 큰 실수로 그녀의 인생은 그냥 망가졌는데. 스토킹이라는 걸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남자가, 그녀가 얼마나 두려웠을 지 얼마나 몸서리쳤을 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생각할 때는 그런 '사소한' 일로 사람을 죽이다니, 심지어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스트립댄서 여자가 흉기를 휘두르다니, 선처의 여지가 없지, 라는 판단 밖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인 나는 그 느낌을 안다. 내 일상 전부가 위협받는 듯한 그 느낌. 뭔가 내게서 소중한 것을 잃을 것 같은 느낌. 무엇보다 그 소름끼침. 그럴 때 옆에 몽둥이가 있다면 힘껏 쥐고 내리치는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우리는 그걸 정당방위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걸 안다. 사회에, 남자에, 설명도 안되고 납득도 안되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생각보다 대단히 훌륭한 소설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읽어볼 만은 한 책이었다. 내내 좀 불쾌하고 잔상이 남는 이야기라, 요즘 같은 때 읽기 좋겠다 라고 말하기도 어렵겠지만, 읽고 있으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니 다른 잡생각은 안 들어올 수도 있겠다.

 

 

계속 소설을 읽어대느라, 7월 책은 앞의 몇 장만 뒤적이고 아직 진도를 못 뽑고 있다. 200페이지인데, 다른 때 같으면 벌써 끝냈을 분량인데 말이다. 이제 잠시 소설을 놓고 이 책을 봐야겠다. 물론 <캘리번과 마녀>는 매일 조금씩 아주 재미나게 읽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도 조만간 페이퍼를 써야지 작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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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7-14 13: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리뷰랑 비연님 리뷰 읽고 나니 왠지 친근한 이 소설.... 전 아무래도 패쓰할 것 같아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스트레이트 마인드는 이제 두 꼭지 남았는데, 아직도 제 자리네요ㅠㅠ 오늘의 결심, 꼴등하지 않으리....

비연 2020-07-14 13:4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괜찮습니다. 꼴등은 저로 확정...ㅜ 이제 10페이지인데요..
<캘리번과 마녀> 읽느라 그렇다고 괜히 핑계대봅니다...
이 소설은, 강추는 아니지만, 나중에라도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다.. 조심스레.
아.. <스트레이트 마인드> 읽을 날이 이제 17일 남았군요. 헉.

레삭매냐 2020-07-14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초반에 아주 흥미롭게 몰입했었는데,
로미 레슬리 홀이 감방에 간 다음에 잠깐
주춤하고 있네요.

스탠빌 교도소와 프리스코에서 성장기,
싱글만 랩 댄서로서 로미의 고단한 삶,
미국 서브컬처에 대한 조금은 장황한
하지만 그네들에게는 공감을 살만한
이야기들이 조금 동 떨어져 있다는 느낌
이 드네요.

소설의 소재 선택과 구성은 뛰어나다
는 느낌이네요.

전작 <화염방사기>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연 2020-07-14 20:46   좋아요 0 | URL
전체적인 구성은 나쁘지 않은데 좀 산만한 느낌이랄까. 아주 현실적이진 않은 느낌이랄까.
좀 그렇긴 했어요... <화염방사기>라는 전작이 있나요? 제목 끝내주네요 ㅎㅎㅎ 저도 찜.

파이버 2020-10-03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주인공 로미 홀의 이야기 외에 다른 인물들의 묘사가 많아 읽는 속도를 내기 힘들었습니다^^;; 생각해 볼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었던 것 같아요

비연 2020-10-03 08:08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ㅠ 헥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