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 신화에 가려진 여자
제시 버튼 지음,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 그림, 이진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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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눈빛만으로 남자를 죽였다고 말하면 당신은 나머지 이야기를 듣겠는가?

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듣겠는가?

아니면 나에게서 도망치겠는가?

이 흐릿한 고대의 거울로 부터, 이 기이한 육체로 부터 도망치겠는가?

나는 당신을 안다. 당신은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해 보면 어떻까. 괴이한 머리카락을 바람에 흩날리며 절벽 끝에 서 있는 한 여자. 그리고 절벽 바로 아래, 배를 타고 있는 한 남자. 둘은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시간보다도 오래된 이야기를 둘은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제시 버튼의 <메두사> 중에서

그리스 신화 속 괴물 메두사는 눈빛 만으로 남자를 죽일 수 있고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돌로 변하는 괴물로 변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메두사에게도 치명적인 운명의 족쇄가 있다.

그건 고르고네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불사신이 아니기 때문에 영웅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메두사라는 존재가 남자들에게 주는 공포심을 '거세 불안증'과 연결 시켜서 심리학적으로 분석을 했을 정도로 <메두사>는 수 세기 동안 여러 문화에 깊이 영향을 끼쳤다.

역사 속에서 문화와 관습의 차이로 오인 되거나 간과 됐던 여성의 삶을 다시 쓰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는 영국의 작가 겸 배우 제시 버튼은 <메두사>의 신화에서 태생적 운명의 출발점인 언니들과 바위 섬에 살던 시절부터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해서 남성 서사 중심의 신화를 전복 해 버린다.

어느 날, 메두사가 살고 있는 섬에 아름다운 청년 페르세우스가 찾아오고 고립된 섬의 외로운 유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메두사는 바위에 모습을 감춘 채 페르세우스에게 말을 건넨다.

메두사가 페르세우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메리나 라고 말하자 페르세우는 섬에 진짜 온 목적을 숨기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각자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동안 잊고 있었던 끔찍한 기억들이 떠오르고 진짜 벌을 받아 섬에 유폐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할아버지는 늘 지위를 잃을까 봐. 자기보다 젊은 누군가에게 권력을 뺏길까봐 두려워 했어. 예언자의 말만 믿고 자신의 두려움에 놀아난 거야. 태어나지도 않은 어린애가 늙은 나무의 껍질을 벗기듯 자신의 가죽을 벗기고 뼈를 장작으로 쓰리라 생각한 거지. 결국 할아버지가 생각해 낸 해결책은 고작 어머니를 청동탑에 가둬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는 일을 막는 거였어. 그러고는 절대로 어머니를 풀어 주지 않겠다고 맹세 했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 수록 강하게 끌리지만 페르세우스는 메리나에게 자신의 '메두사'를 사냥하러 섬에 온 것이라는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페르세우스에게 반해버린 메두사는 머리카락이 아닌 뱀을 머리에 이고 있는 흉측한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어야 할 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숨을 내쉬면 뱀들도 숨을 내쉬었다. 나의 근육이 긴장하면 뱀들도 공격 태세로 몸을 뻗었다.'

-만약 그때 내가 외롭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내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만약, 만약, 만약, 우리 인간들은 왜 항상 지난날을 돌아보고 더 쉬운 길이 있었을 거라 생각할까?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믿는다.

메두사의 모습은 현 세상으로 건너와 세상의 중심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들이 남성을 누르고 올라섰을 때 '악의적'인 이미지를 덧 씌워 버렸다.

두 개의 자아가 충돌했다. 새로운 자아와 과거의 자아, 마음이 무거운 자아와 근심 걱정 없는 자아. 흉측한 자아와 아름다운 자아

남성 중심의 서사적 신화에서 여성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손쉬운 평가의 대상이 되어 신들의 싸움에서 희생양이 되어 버린다.

나는 위엄 있고 당당했다. 어린 시절처럼 나의 주인은 나였다.

무슨 말과 행동을 하건 그것은 나의 영혼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자기 꼬리를 먹는 뱀처럼 나는 저녁이 되면 태양과 함께 죽었다가 아침에 다시 태어났다. 우리가 어디로 향했느냐고? 안개와 우울의 땅도 아니고 피와 연기의 땅도 아니였다. 그런 곳이라면 이미 볼만큼 봤고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무언가를 찾아 세상을 헤매는 영혼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우리는 바다에 머물며 계속 항해했다.

결국 남성의 힘으로 눌러 버린 메두사는 현 시대의 여성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세기 동안 권력을 가진 여성 또는 권력을 위해 싸우는 여성들은 탁월한 싸움꾼 또는 표독하고 악랄한 모습의 메두사에 비유되어 왔다.

기존의 신화에서 메두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다 아테나의 저주를 받았고 그녀를 단칼에 제거해버린 페르세우스는 신화 속 영웅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태어날 때 부터 몸 속에 운명의 지도가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그 지도는 어떻게 만들어 질까?

신의 선택에 의해서? 아니면 우주 만물의 신묘한 기운을 받아서?

아니면 마치 로또 당첨의 행운의 숫자를 뽑듯이 경이로운 유전자 조합으로 태어나서?

어떤 능력을 갖고 태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저 태어난 순간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갈 운명으로 신의 아들과 딸 그리고 권력자의 아들과 딸로 태어나도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연 신화의 결말처럼 작가 제시 버튼이 다시 쓴 <메두사>에서 페르세우스는 자신의 마음을 뒤흔든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 버릴 수 있을까?

한때는 우리가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나는 스테노와 에우리알레

뱀들을 리본처럼 휘날리며 갑판에 서 있는 나, 햇살에 금빛과 은빛으로 털을 반짝이며 뱃머리 양쪽에 앉아 있는 개들...

이제 나는 안다. 우리가 찬란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스토리에서 선과 악이 등장하고 서로 충돌하다 결국 영웅이 악당을 무찔러 버리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 온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누가 옳고 그른지, 누구 편에 설지, 고민하지 않고 악당을 물리쳐 버린 영웅을 응원한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다르다. 절대선도 절대악 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제시 버튼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형적인 악인 캐릭터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는 <메두사>는 인류 역사에서 추앙과 멸시의 대상으로 석화석 처럼 굳어져 버린 여성의 신체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들에게 정당함을 부여하는 것들을 완전히 전복 시켜버렸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보아주기를 원했다. 사랑을 원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뱀들까지 전부 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원했다. 그러길 원한다고 인정하는 게 나약한 마음이 아님을 스테노가 일깨워주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어떤 여자도 외딴섬이 아니었다. 낯선 이들에게 외딴섬이 되길 강요 당할 뿐이다.

-제시 버튼의 <메두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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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30 02: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신화도 남자가 썼으니 여성을 안 좋게 이야기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런 거 예전에는 거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메두사도 어쩌면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그것 또한 남성이 질투해서 안 좋게 이야기했던 건지도...


희선
 

캐런 제닝스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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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갈이 흩어진 섬의 해변에 파도에 씻긴 석유 드럼통이 떠 밀려 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난 세월 간간이 이런 저런 물건들이 도착했다. 해진 셔츠며 밧줄 찌그러진 플라스틱 도시락 뚜껑, 인조 가발 등. 이따금 시신도 도착 했는데 오늘도 한 구가 있었다.

-캐런 제닝스의 <섬> 중에서

어느 아침과 다름 없는 하루를 시작하는 일흔 살의 등대지기 새뮤얼은 등대 내부 계단을 내려오다 파도에 떠밀려 온 드럼통을 발견한다.

서둘러서 해안가로 달려간 등대지기는 자신이 등대 창문으로 보았던 드럼통 바로 앞에 시신 한 구를 발견한다.

노동자들의 상징인 푸른색 작업복과 같은 색의 플라스틱 드럼통 안은 텅 비어 있었다.

등대지기는 이 드럼통을 자신이 거주하는 오두막으로 가져가 텃밭에 쓸 빗물을 저장 해두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드럼통 옆에 발견 된 시신은?

앝은 모래층 밑에 단단한 바위층으로 이루어진 섬의 지층에서 시신 한 구를 파묻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등대지기는 섬에 가장 많은 돌멩이들로 시신을 눌러 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돌멩이들을 찾아 보지만 시신의 부피가 너무 커서 그 시신을 덮기 위한 돌멩이들을 찾아 다니는 것도 엄청난 시간과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지난 23년 동안 등대지기로 섬에 거주 하는 동안 해일에 떠밀려 온 시신은 모두 서른 두 구로 그는 시신이 발견 될 때마다 당국에 신고를 했다.

오랫동안 독재 정권의 지배를 받다 새로 들어 선 정부 부처의 공무원들은 등대지기의 신고를 받고 섬으로 찾아 와 독재 치하에서 고통 받다 행방 불명 된 이들을 찾아 주겠다는 신념으로 보디백까지 들고 와 섬 전체를 빗질하듯 샅샅이 뒤졌다.

밀물과 썰물이 강하게 밀려 들어 올 때마다 시신이 한 두 구 휩쓸려 섬에서 발견되고 등대지기가 무전으로 연락을 하면 담당 공무원들은 이렇게 물었다.

'그들은 무슨 색입니까?'

'무슨 말씀인지?'

'무슨 색이냐고요? 시신들, 색이 어때요? 그러니까 그들이 우리보다 피부색이 짙은가 하는 걸 묻는 겁니다. 당신이나 내 피부색 보다 짙습니까?'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얼굴은 요? 우리보다 긴 편인가요? 광대뼈는 어떻게 생겼죠?'

'그냥 아이들입니다. 아이들 시신입니다.'

'잘 들어요. 우린 바쁜 사람들입니다. 다뤄야 할 진짜 범죄들이 산적해 있었요. 실제 잔혹 행위 말이죠. 다른 나라 난민들이 도망치다 물에 빠져 죽을 때마다 섬으로 가서 시신을 끌고 와야 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건 우리 일이 아닙니다.'

'그럼 저 시신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신 좋을 대로 하세요. 난민 시신은 필요 없으니까.'

섬에 시신이 발견 되어도 더 이상 당국에서 처리 해주지 않게 되자 등대지기는 텃밭을 일구고 돌담을 쌓아서 섬 이곳 저곳에서 벽돌만 한 돌을 주워 모은 뒤 적당한 높이와 길이가 될 때까지 하나씩 맟추며 쌓아간다.

등대지기가 돌을 쌓아 올릴 때마다 작은 만이 조금씩 넓어지고 톱니 같이 생긴 모서리들이 둥그스름해지면서 섬 모양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공사를 계속 해나갔던 등대지기는 해안가에서 시신이 발견 될 때마다 돌담 외벽 안 쪽에 파 묻어 버린다.

드럼통과 함께 발견된 그 시신도 텃 밭 돌담 외벽에 묻어버리려고 살짝 건드리자 팔과 다리가 움직이면서 시신의 목구멍에서 으르렁 소리가 났다.

50,200,350,500.....

시신의 맥박이 파도 소리에 맞춰 뛰고 있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모래 밭 위에서 정신을 차린 남자는 등대지기 새뮤얼이 내 준 옷을 입고 홀로 살고 있는 등대지기가 먹고 자는 공간을 차지 하면서 지난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이 한 꺼번에 밀려 들고 서서히 낯선 이방인의 존재를 두려워 하게 된다.


나라가 독립했을 때 아버지는 심각한 신체 장애를 입었음에도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들고 갈 수 없는 책상이며 의자, 전구,의약품, 전화까지 식민주의자들이 남김없이 파괴했는데도 아버지는 이 파괴를 옹졸한 행위나 폭력으로 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새뮤얼이 거리로 옮겨둔 의자에 큰 머리와 앙상한 몸을 힘없이 기대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캐런 제닝스의 <섬> 중에서

어린 시절 새뮤얼의 나라는 어느 날 갑자기 식민지가 되면서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가족과 함께 쫓겨났나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면서 구걸 하는 동안에 국가는 식민지에서 독립해서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군부 독재로 국민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는 군사 정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장애를 갖게 됐다.

청년이 된 새뮤얼은 자유를 위해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고 아버지 처럼 끌려가 감옥에 갇혀서 짐승 취급을 당하며 노동형에 처해진다.

그토록 염원하던 독립을 쟁취한 후에도 좋은 시절은 찾아 오지 않았다. 부패한 권력자들의 손에 넘어간 정부의 무능한 정책에 이웃나라에서 밀려 들어온 난민들까지 나라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결국 나라는 무정부 상태가 되고 어디에도 살 곳이 없었던 새뮤얼은 등대지기에 자원에서 홀로 섬에서 살아간다.

파도가 밀려 드는 바다는 사납고 무서웠지만 무정부 상태의 육지보다 등대 불빛만 비추는 이 곳 섬의 삶은 자유로운 낙원이였다.



'이것은 땅이다. 나는 땅을 맛보았다. 땅은 내 핏속에 들어 있다. 땅이 내 몸이고 내 몸이 땅이다. 두려움 없이 땅에 맹세한다. 나는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 피와 불로 맹세하나니, 땅은 나의 것이고 내가 땅이다.'

새뮤얼은 오두막 돌담 외벽사이 떠밀려 온 시신을 매장 시키는 동안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과거의 기억 속에 휘청거렸다. 그리고 이젠 그의 삶의 영역이자 유일한 '땅'에 낯선 남자가 그를 죽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도망가지 말아야 했어.'

'난 늙은이야. 내가 누구를 다치게 한 적이 있겠나?'


거대한 석상이 사라진 육지에서 새뮤얼이 군인의 목을 끝까지 졸라서 독립의 깃발을 자신의 손으로 쥐고 흔들며 거리낌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그는 자유롭게 육지에서 가족을 이루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2021년 부커상 후보에 올라갔던 캐런 제닝스의 <섬>은 영국의 마일스 몰런드 재단의 지원을 받아 출간되면 큰 호평을 받은 작품이였지만 정작 작가의 고향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어떤 출판사도 선뜻 출판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캐런 제닝스의 세번째 소설 <섬>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식민지 역사의 상흔과 백인 독재 정권의 악랄한 모습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는 이유로 여러 해 동안 외면 받았다.

'우리는 빼앗김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똑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캐런 제닝스

폭력은 어떻게 또 다른 폭력을 낳는가?억압된 자유에서 해방되어 또 다른 억압은 누구를 향하는가?

나와 다른 피부색을 갖은 낯선 이방인들은 사회의 안전망에서 어떤 보호를 받아 삶을 살아 갈 수 있는가?

지도 상 어디에도 없는 섬에 살고 있는 어느 등대지기와 파도에 휩쓸려 온 어느 낯선 남자의 이야기가 모습이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 두 발을 안전하게 딛고 걷고 뛸 수 없는 땅 한 평 없는 유랑자이자 난민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처음 섬에 들어 왔을 때 가장 무서웠던 건 마구 구르고 뒤채고 휘도는 파도였다. 고립보다도 길들지 않는 땅보다도 다른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럼에도 새뮤얼은 싫은 내색 없이 파도를, 그리고 섬을 둘러싼 거대한 바다를 경외하려 애썼다. 그가 계속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돌담을 쌓은 건 아마도 물살의 공격에서 땅과 자신을 지켜내려는 시도 였을 것이다.

2주에 한 번 오는 보급선이 세상과 유일하게 연결 되는 순간으로 등대지기 새뮤얼에게 섬은 온전히 그의 것, 그의 전부 였다.

파도에 떠밀려 온 낯선 그 남자가 섬 전체를 누비는 동안 등대지기의 고립과 평화가 동시에 깨져 버리고 사람에 대한 동정과 애정이 폭력으로 돌변해버린다.

'외국인이 이 땅에서 우리 걸 갈취하고 우리가 힘들게 쟁취한 것을 훔치게 둘 순 없습니다. 이 땅은 우리 땅이며, 우리 말고는 그 누구도 이 나라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 말고는 누구도 여기 있을 권리가 없습니다. 이 나라는 우리, 오직 우리만의 나라입니다. 이제 외국인은 더는 환영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줍시다. 그들을 내쫓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캐런 재닝스의 <섬>이 2021년 부커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자 영국 가디언지와 미국 뉴욕타임스는 고립된 섬에서 단 4일 동안에 발생하는 이야기를 통해 아프리카의 잔혹한 식민지 역사와 어느 날 난민이 되어 바다 위를 표류 하게 된 현 세계의 비참한 삶이 압축적으로 묘사된 수작이라 평가했다.

낯선 작가의 얇팍한 분량의 이 책<섬>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외로운 섬과 바다 사이를 비추는 등대의 불빛이 하나 둘 꺼지면서 육지와 맞닿은 항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 십만개의 번쩍이는 불빛들이 어디에도 아무 곳에도 닿지 못한 채 끊임없이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망연히 지켜보던 새뮤얼은 문득 게들이 나타난 그곳, 햇빛이 닿지 않는 해저 깊은 곳, 그들이 수세기 동안 섬으로 길을 내며 온 그 침몰한 외계 깊은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거대하고 육중한 몸으로 바위와 다시마와 해안에 밀려온 다양한 표류물과 배에서 버린 해양폐기물을 꾸준히 헤치고 수세기 동안 항상 같은 지점으로 나아가는 한결같은 마음. (…) 이듬해, 그는 두려움 없이 혼자 게를 잡았다. 그리고 14년 동안 한 번에 한 마리 원칙을 고수하며 같은 방식으로 게를 잡았다. 그런데도 게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섬으로 돌아오는 게는 점점 줄다가 결국 어느 해, 돌아오기를 멈추었다.

-캐런 제닝스의 《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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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3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16년 약 3,700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세계 제 1차 대전을 겪은 인류는 전후 전쟁에서 싸우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전투기 조종을 맡았던 조종사들은 전쟁터에서 '바람직하게' 싸우는 전쟁을 펼쳐 나가야 한다고 주장 하기 시작한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 비행기는 합판과 천, 금속, 고무 재질로 제작 되어 위 아래 두 쌍으로 달려 있는 날개는 지주로 연결 되어 있었다.

좌석은 하나 였고 프로펠러와 동기화 된 기관총이 앞을 향해 있고 총알은 프로펠러 사이로 발사 되었다.

차고에서 순식간에 조립해서 급박하게 움직이는 전쟁터로 출격해야 하는 전투 비행기들은 공습 목표물 폭격 뿐만 아니라 무고한 시민들의 목숨까지 파괴 시켰던 괴물이였다.

폭격 대상을 정밀하게 조준하는 능력이 형편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향한 정확도가 떨어지는 전투 비행기는 시속 300-500킬로미터로 날아 올라서 800킬로미터까지 치솟다가 9킬로 미터 상공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순간 지상으로 폭탄 물이 떨어 질 때 까지 약 35초가 걸렸다.

만약 폭탄이 떨어지는 동안 바람이라도 분다면 시속 160킬로미터까지 이르러서 지상으로 폭탄이 떨어지는 순간 조종사가 조준 했던 목표물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떨어 지는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목표를 이룰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전혀 몰랐죠. 어디인지는 모르면서도 거기에 이를 것이라고 믿은 것입니다.

집단 내부에서 일어난 정말 특이하고도 중요한 일은 기술적인 진보와 소재 개발에 대한 강한 믿음, 적절한 비행기를 손에 놓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말콤 글래드웰의 <어떤 선택의 재검토> 중에서

20세기 초 공중에서 적과 교전 할 수 있는 기동성이 뛰어난 비행기는 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1930년대 비약적인 항공 기술로 거듭 발전해 나갔다.

알루미늄과 철이 합판을 대체했고 엔진은 더 강력해졌고 항공기 내부 크기는 더 커지면서 더 높이 날아 오를 수 있었다.

어떤 전쟁에서도 멋지게 창공을 가로 지르며 적을 제압 할 수 있는 항공기들은 193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칼라일 소재 육군 대학원에서 탄생 했다.

이곳에 항공 기지가 설립 되면서 세워진 항공단전술학교에는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속도에 미쳐버린 20-30대 젊은 리더들이 모였다.

'우리는 관습에 구애 받지 않고 진보 한다.'


이들은 일명 '폭격기 마피아'집단으로 불렸던 항공단 교수진들로 대부분 1차 대전에 참전 했던 전쟁 용사들이였다.

전쟁 후 장군으로 진급한 이들은 전자 회사나 거대한 방산 업체에서 근무 하면서 항공 기술 개발에 몰두 했다.

이들 폭격 마피아들은 레닌과 스위스 연방공대 동기 출신의 네덜란드 태생 괴짜 엔지니어 칼 노든이 개발한 폭격 조준기( 망원경·볼베어링·수준기(水準器) 등으로 구성된 조준기에 공기 온도 등에 관한 64개 알고리즘을 활용해 조작하면 어느 시점에 폭탄을 투하해야 지상 목표물에 명중할 수 있는지 계산하는 조준기)로 비행기에 장착해서 적의 병참·군수 핵심만 정밀 타격하면 민간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편은 십 수 명에 불과 하지만 상대편에는 1만 명의 장교로 가득 찬 육군 해군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열의가 충만했다. '

당시 이들의 교육 방침이나 항공 기술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폭격 마피아'들이 어떤 일을 시도하거나 추진하고 있을 때 상황을 점검 하라 거나 멈추라고 지시 할 사람이 없었다.

교과서나 지침서도 없었고 강의 계획서도 없었던 항공단전술학교의 모든 교육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실시 되었다.

폭격 마피아 교수진들은 장소를 정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든 지 공개적인 토론을 벌이며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육군성 지휘부의 참모들이 당시 우리가 하고 있었던 일이 무엇이였는지 알았다면 우리 모두 즉시 감옥으로 끌려 갔을 것이다. 기존의 군사 규칙이나 무기 개발과는 완전히 상반 되었던 것으로 이 사실을 알고도 우리가 개발을 지속하고 있는 행위를 절대로 묵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폭격 마피아 교수진들 중 핵심 멤버 도널스 윌슨 자서전 중에서


이렇게 엄청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던 폭격 마피아들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항공기, 즉 인입 식 착륙 장치와 가압형 동체를 부착한 항공기를 탄생 시킨다.

이 항공기는 미국 전역으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상업 항공기가 아닌 오로지 폭탄을 싣고 날아 올라서 기상의 적들에게 무시 무시한 파괴력을 보여주는 강력한 무기였다.

1차 대전 당시 적진에 폭탄을 떨어뜨렸던 시기는 어두운 밤, 달빛이 떠올랐던 순간이였지만 이제 폭격 마피아는 훤한 대낮에 공격에 나설 수 있었다.

시야가 확보된 상태에서 목표물을 향해 정확하게 조준하는 변수를 입력해 작동을 시키는 순간 9킬로 상공에서 지상의 오크통 위로 정확하게 폭탄을 떨어 뜨릴수 있다.

하지만 1930년대 폭격기 마피아들의 이런 구상과 설계는 지극히 이론적인 것, 존재하기를 희망하는 것 이였을 뿐 이였다.

1930년대 전장에 투입했던 비행기들을 보게 된다면 이런 말을 내뱉을 것이다.

'뭐야, 이 사람들은 마약을 얼마나 많이 했던 거야?'

1차 대전을 겪었던 공군들은 필사적으로 육군이나 해군과 전혀 다른 전투력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전쟁을 치르고 싶었다.

1931년부터 1941년 항공 단 전술 학교를 중심으로 공군은 해군과 육군보다 앞선 기술력을 발전 시켜 나갔다.

이들이 집중 폭격 대상으로 삼은 건 '교량'과 '송수로' 그리고'전력'시설물이 였다.

교량을 파괴하고 송수로를 붕괴 시키고 전력을 불 태워 버리면 전쟁에 승기를 잡는다고 가정 했지만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로지 폭격의 정밀한 기술과 폭격수가 어떤 표적을 정확하게 타격 시킬 수 있는데 만 집중적으로 연구 했다.

'폭격기 마피아'들은 폭격기를 동원해 도시를 초토화 시켜서 단 시간 안에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공군력은 수 개월 동안 적과 충돌을 거듭하며 참호 궤멸 작전 속에서 수 백 만명의 목숨을 잃은 1차 대전의 대 학살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이 20여 년 동안 운영한 항공단 전술 학교 졸업생은 고작 천 여명 남짓으로 수세 대에 걸쳐 육군 장교를 배출한 웨스트 포인트의 위엄과는 수적으로 전쟁 경험으로 비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1941년 여름 히틀러의 진격으로 유럽 전역에 나치 깃발이 꽂혀 버리자 워싱턴은 폭격기 마피아 전술 교관들을 호출한다.

교관들은 이라는 놀라운 문서를 들고 간다.

이 문서에는 미국이 필요한 항공기(전투기, 폭격기, 수송기)종류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조종사와 몇 톤의 폭발물이 필요한지 부터 독일 지역의 50개의 발전소와 47개의 수송망,27개의 석유 정제소,18개의 항공기 조립 공장, 6개의 알루미늄 공장,6개의 마그네슘 공급원 같은 중요 표적물 까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은둔의 10년 동안 오로지 항공 기술 개발에 매달렸던 폭격기 마피아 교수진들과 교관들은 미국 군 수뇌부에 단 9일 동안 전쟁을 승기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 준다.

미국 육군 항공단 전술 학교에서는 폭격기 마피아들이 폭탄을 고도로 정밀하게 사용하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반면 영국의 물리학자 린더만은 탁월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 조차 증명 하지 못했던 수학적 명제를 해결 했던 천재로 미국 측 폭격기 마피아들과 전혀 상반된 논거를 처칠 총리에게 제시했다.

영국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 폭탄을 만들고 폭격기 승무원을 훈련 시키고 이 모든 폭격기와 승무원을 독일 노동자 계급의 가옥을 폭격하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전력을 다한다면 18개월 안에 인구 5만 이상 모든 도시의 50퍼센트를 파괴 할 수 있습니다.

린더만은 처칠을 설득했고 처칠은 영국 폭격 사령부 지휘관 자리에 아서 해리스를 임명한다.

부하들에게 도살자로 불렸던 아서 해리스는 폭격 작전을 맡자마자 독일 쾰른 시에 대규모 공격을 시작한다.

표적을 확인하지 않고 영국에서 천 개의 폭탄을 싣고 서 쾰른 시 중심부에 90퍼센트를 초토화 시켜 버렸다.

그는 단 3일 만에 드레스덴을 폭격해서 2만 5000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폭격의 이유는 군의 이동을 막기 위한 것 이였지만 폭격의 대상은 민간인들 이였다.

아서 해리스는 폭격을 더욱 정확하게 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믿으며 전쟁에서 사람들이 아닌 전쟁 기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42년 가을 B-17 폭격기를 몰고 슈바인푸르트를 향하고 있었던 육군 항공대 대령 커티스 르메이는 회피 기동을 하지 않은 채 약 8분 동안 직선 고정 비행으로 목표물에 접근해서 폭탄을 떨어뜨리는 전략을 세운다.

슈바인 푸르트 공습 전날 대령 르메이는 제4폭격비행단(B-17 폭격기)를 이끌고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매서슈미트 전투기 공장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하기로 했지만 출격 당일 날 아침 극심한 안개로 인해 활주로에 발이 묶여 버린다.

기상 악화로 인해 125대 비행기 중 24대가 독일 폭격기에 맞아 공중 분해 되었고 50-60대 비행기가 크게 파손되었다.

각각 8-9개의 폭탄을 실은 230대 폭격기들이 총 2000여개의 폭탄을 떨어뜨렸지만 목표물 중 고작 80여개 만 사라졌고 매서슈미트 전투기 공장은 큰 파손 없이 정상으로 가동 되었다.

슈바인푸르트는 1,2차 공습을 당해도 항공기 산업이 전혀 마비 되지 않았다.

반면 미국 측의 제 8공군이 출격한 60대의 전투기 중 17대는 심각한 손상으로 폐기 해버렸고 650명의 항공병이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참전한 대원 중 4분의 1이 사라져 버린 폭격기 마피아는 절박한 심정으로 새로운 전투 계획을 세우고 기술력을 보강해 나간다.

1944년 12월 괌 사령부의 대 언론 공식 발표 자리에 선 공군 사령관 해이우드 핸셀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폭탄을 우리가 원했던 장소에 정확히 떨어뜨리지는 못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해온 일에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초기 실험 단계에 있을 뿐이다. 배워야 할 것이 많고, 많은 운영상의 문제와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1944년 미군은 일본 군이 주둔하고 있던 괌, 사이판 등 서태평양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하자마자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 기지로 변모한다. 당시 이곳 전초 기지를 지휘 했던 인물은 헤이우드 핸셀 준장으로 그는 제21폭격기 부대를 이끌었다.

핸셀 준장은 낮에 폭격기를 출동 시킨 뒤 공장, 발전소 등 적국의 기반 시설을 조준해 타격하는 ‘정밀 폭격’ 전술을 선호했지만 적의 대공포를 피하려 구름 위를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정확한 위치에 폭탄을 투하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전략이 연달아 실패하자 민간인 학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미국 본토에선 새 지휘관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 소장을 새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르메이 소장은 정밀 폭격을 포기하고 적의 대공(對空)공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 시간대에 표적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보단 광범위한 공격을 가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야간 공습 전략에 '사탄의 제안'이라고 불렸던 '네이팜탄'을 썼다.

1945년 3월9일 밤 도쿄 커티스 르메이의 지휘로 첫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었고 네이팜 탄을 장착한 폭격기는 오사카-구레-고베-니시노미야-오카야마-도쿠시마-도야마를 초토화 시켰다.

7월26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방송으로 내보냈지만 일본 군부는 ‘최후통첩’ 격인 포츠담선언을 격렬히 비난하고 언론을 통해서 절대로 항복할 의사가 없다는 걸 명확하게 밝혔다.

“(8월6일) 8시15분 15초, 폭탄 투하실의 문이 열리고, 리틀 보이가 떨어진다. 티비츠는 비행기를 급격하게 오른쪽으로 돌린다. 43초 후 조종석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은 빛으로 가득해진다. 충격파가 비행기를 때리고, 티비츠는 아무것도 없는데도 소리친다. ‘대공포!’ 뒤를 돌아보니 에놀라 게이를 향해, 훗날 그의 회상에 따르면 ‘살아 있는 생물처럼 끔찍하게’ 솟구쳐 오르는 구름이 보인다. 아래쪽에서는 히로시마가 타르 양동이처럼 검게 끓어오른다.”

-에번 토머스의 '항복의 길'중에서

일본 땅에서 진짜로 핵이 터지자 전쟁을 이끈 일본 최고전쟁지도회의 6인은 항복 여부를 투표에 부쳤다.

결과는 ‘3대 3’ 군 강경파는 항전 할 의지를 밝히며 전쟁의 지속을 위해 황궁 내 쿠테타까지 모의 한다.


8월 6일 특별 장비를 장착한 B-29 에놀라 게이가 세계 최초의 원자 폭탄을 히로시마에 떨어 뜨리자 정확히 43초만 7만명이 즉사했고, 뒤이어 약 7만명은 천천히 고통 속에서 사망했지만 일본이 여전히 항복의 의지를 밝히지 않는다.

3일 후 휴전 협상을 기대했던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만주로 침공을 개시하고 8월9일 규슈의 나가사키에도 핵폭탄 ‘팻 맨’이 투하된다.

전쟁 막바지 최고전쟁지도자회의 참석자 6인 가운데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연합군의 최종 목표는 도쿄로 최후의 항전이나 결전이 아니라 오히려 항복만이 일본과 천황을 살리는 길이라 믿고, 핵폭탄 투하 후에도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한 군인들에 맞서 히로히토 덴노의 결단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8월15일 정오 일본 전역에서 ‘라디오 도쿄’를 통해 히로히토 덴노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생각하건대, 이제부터 제국이 받아야 할 고난은 진실로 심상치가 않다. 너희 신하와 백성의 충정은 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짐은 시운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곤란을 감당해내고, 참아야 할 곤란을 참음으로써 만대를 위한 태평시대를 열고자 한다.”

일왕이 항복을 선언하자 2차 대전이 끝이 났다.

일본 외무 대신 도고 시게노리 예측 대로 세 번째 핵 투하 장소는 도쿄였다.

스파츠는 자신이 이끄는 항공대의 B-29 폭격기 7대를 도쿄 상공에 띄워 가로 4인치, 세로 5인치의 전단(삐라) 500만장을 살포했다.

도쿄 상공에서 떨어진 삐라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금 전쟁을 종결할 기회다.

천황(일왕)을 설득하라.”

임진 왜란 당시 왜군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손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가 천황을 설득 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이 일본 땅에 핵 100기를 투하 해도 일본 군부는 절대로 항복 하지 않았을 것이다.

종전 후 전범재판을 받고 수감됐던 도고가 1950년 7월 면회 온 가족에게 마지막 이런 글귀를 남겼다.

‘일본의 미래는 영원하겠지만, 매우 끔찍한 이 전쟁이 끝나 조국의 고통이 사라지고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이다. 이로써 나의 일생의 과업은 달성되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 중요하지 않다.“

폭격기 마피아의 리더 였던 헤이우드 핸셀 장군은 도쿄에 대한 네이팜(소이탄) 공격을 거부하다 경질되었다.

만일 폭격기 마피아의 양심과 신념이 그대로 지켜졌다면 일본은 연합군에 항복 했을까?

1945년 8월 12일 일본은 이미 한국 동해안의 작은 섬에서 소형 원자폭탄을 실험했다. 미국이 7월 16일 최초의 핵실험에 성공한 것보다 불과 3주 뒤로 이 핵실험 성공을 미국측이 알고 있었는지 현재까지 어디에도 확실한 증거는 없다.

1942년 4월 18일 미국이 일본 본토에 첫 공습을 시작하고 1944년부터 전략폭격으로 확대해 나가자 일본은 원폭 프로그램을 한국의 흥남으로 옮겨 버렸다. 따라서 흥남지역에서 일본군이 원자탄 연구를 계속 수행 하는동안 소련 잠수함이 흥남항 주변까지 내려 왔다.

“만일 1945년 8월 15일 나가사키에 B-29 폭격이 아니었다면, 일본이 먼저 미국 본토에 핵폭탄을 떨어뜨려서 미국을 평화협상에 강제로 끌어 당겨 놓고 영원히 한반도와 동아사이 전체를 집어 삼켰을 것이다."

핵폭탄 성공 후 익명의 플루토늄 폭탄 개발 관여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더 ‘나은’ 이 폭탄을 사용하는 것이 몹시 두려웠습니다. 나는 그것이 사용되지 않길 바랐고, 그것이 초래할 파괴를 생각하며 몸서리쳤습니다. 하지만 아주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종류의 폭탄 역시 예상한 대로 작동하는지, 다시 말해서 그 복잡한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몹시 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은 끔찍한 생각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수천 년 동안 지속 된 세상의 모든 전쟁은 서로를 제거 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사람을 투입했다.

인류는 빠른 시간 안에 전투에서 승리 하기 위해 엄청난 파괴력과 정밀한 조준 기술을 갖춘 무기와 폭탄을 개발하는데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1,2차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군용 폭탄, 신관, 독가스,연막 통, 수류탄 같은 폭탄 물을 해체하고 분해 하면서 수백 번의 실험을 거쳐 무엇에 든 달라 붙어 활활 태워 버리는 '네이팜'을 탄생 시킨다.

세상의 어떤 전쟁에서도 민간인들의 피해를 최소화 해서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지 못한다. 거대한 폭탄들이 도시에 떨어지는 순간,사상자의 피해는 막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평화란 선악의 거미줄에 간신히 매달린 비항구적인 긴장 상태에 불과하다.

2022년 부터 불길이 치솟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2024년 중동의 화약고인 가자 지구인 팔레스타인 땅에 무인 폭격기로 온갖 신 무기들이 대량 살상과 학살을 자행 하고 있다.

전쟁광 푸틴은 핵 미사일이 탑재된 항공기로 유럽 전역을 공격할 준비 태세를 하고 있고 이스라엘의 주도 면밀한 폭격과 공격 하마스 군 수뇌부와 수장들을 잇따라 살해 하면서 중동 전역으로 전쟁의 먹구름이 퍼져 나가고 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와 9일 나가사키 이 두 도시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희생된 이들은 대부분 민간인들로 약 15만~24만6000명이 사망 했고 이 사망자 숫자에 조선인도 약 10% 포함 되어 있다.

아시아 전역과 한반도 에서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포함해서 일본은 500만 명의 병력과 죽창부대만 믿고 핵 폭탄이 떨어지고 나서도 일주일을 버텼다.

매년 8월이면 일본 미디어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진 날들에 대한 특집 프로그램을 대대적으로 방송 하며 당시 미국에 의한 원폭 투하가 정당 했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시행 하며원폭의 비인간성과 일본이 지구상 유일한 피폭 국가라는 데 대한 피해자 의식을 상기 시키고 있다.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해 지난 100여 년 동안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숨진 246만6000여명의 위패가 안치 되어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우익들의 성지인 야스쿠니 신사에 전 현직 총리와 관료들이 줄을 지어 전범들에게 참배하는 모습을 전 세계로 생중계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한결 같이 자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만행을 덮어 버리며 교묘한 방법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자국민을 세뇌 시키는데 열을 올리는 동안에도 2024년 79주년 광복절을 맞이 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땅에서 여전히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논란에 서로 불붙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무 정부적이며, 정글의 법칙이 통용되고 있는 냉엄한 국제 사회 현실 속에 앞으로 한반도의 미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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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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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은 꿈을 꾼 화자가 [이런 꿈을 꾸었다.]라는 말을 시작하면서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 바라보는 현실의 이야기를 열흘 동안 하나씩 들려준다.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열흘 밤의 꿈>을 가장 좋아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잠을 통 이루지 못한 상태에 멍하게 앉아 있던 중에 문득 소세키의 이 작품이 떠올랐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잠을 못 잔 지 벌써 십칠 일 째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화자는 이렇다 할 불편을 느끼지 못해서 병원도 찾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일 치과 의사인 남편을 내조 하며 외동아들을 키우며 일상 생활에 어떤 균열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녀의 불면증은 대학 시절 부터 시작되었지만 제때 치료나 상담을 받지 않고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은 채 일상 생활에서 불완전한 수면 패턴을 이어 나갔다.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졸음은 전철 좌석이나 교실 책상이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풋잠을 자듯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기묘할 정도로 자신의 의식에서 분리된 그림자 같은 존재를 느낄 정도로 온전하게 푹 잠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걷고,마시고, 먹고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이런 상태를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그녀는 자는 동안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하는 램 수면 상태의 인간으로 시간이 지날 수록 신체의 각 기관이 둔해지고 탁해지면서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세계의 끝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땅으로 그리고 내 육체는 내 의식과 영영 헤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단단히 매달리고 싶었다.]


모든 가족들이 깊이 잠든 밤마다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져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째깍 째깍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를 또렷한 정신으로 날이 샐 때까지 들었던 그녀에게 어느 날 아무 전조 없이 느닷없이 까무러칠 정도로 잠이 쏟아져 버린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넘기고 죽은 듯이 잠을 잤던 그녀는 결혼 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다시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현실 생활에 아무런 문제도 불편을 겪지 않았다.

단지 잠을 자지 못할 뿐이였다.

남편도 아이도 그녀가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친구와 동업으로 치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남편은 점심시간인 12시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아침을 준비하고 차리고 남편과 아이가 출근하고 나면 집안을 정리를 마치면 곧 남편이 점심을 먹으로 집으로 오는 시간이 된다.

남편이 점심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녀는 오후 시간동안 장을 보러 나가고 집으로 돌아 오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외동 아들의 저녁 밥을 차려 준다.

늦은 밤 남편이 퇴근하고 마지막 저녁을 차려 주고 설거지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면 자정이 가까워진다.

빈틈없이 가족의 생활 패턴에 맞추고 나면 어느덧 늦은밤, 자정을 알리는 시계종이 울리면 그녀는 잠을 자지 못하고 어느 날 깜짝 잠이 들었을 때 악몽에 시달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잠을 청하면 악몽을 꾸게 될 것 같은 두려움사로잡히자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고

가능한 긴 소설을 읽어보자고 마음 먹은 그녀는 톨스토이의 대장편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한다.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의 스토리를 대충 알고 있었던 그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온 신경을 그 책 속에 파묻고 나서 일상 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매일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집안일을 재빨리 해치우고 오전 내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책을 내려놓고 남편을 위해 점심을 만들었다.]


그녀는 결혼 생활 동안 눈을 감고 무감동적이게 기계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무적으로 장을 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았지만 밤 10시 부터 아침 6시까지 책을 읽고 나서 부터 집 안에 갇혀 있기만 했던 생활 반경을 차츰 넓혀나간다.

차를 몰고 나가 사는 곳 너머 지역을 돌아 당기기도 하며 소소한 일탈을 즐기는 모습을 그녀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는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처음 잠을 못 잔 것이 지지난 주 화요일, 그러니까 오늘로 딱 십칠 일 째다. 처음 잠을 못 잔 것이 지지난 주 화요일, 그러니까 오늘로 딱 십칠 일째다. 이로써 십칠일동안 한숨도 못잤다].


그렇게 열일곱 번의 낮과 열일 곱 번의 밤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그녀는 문득 죽음을 떠올리며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 질 수록 일상의 잍탈은 점점 대담해진다.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 잠의 감각을 불러 일으키려 해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각성한 어둠이 존재할 뿐이었다. 각성한 어둠...]

시간별 레인을 따라 맹목적으로 가족들의 삶의 패턴에 자신의 삶을 맞춰 살았던 엄마, 아내, 그리고 한 여자는 이런 삶을 어디에도 소비 되지 않은 무의미한 삶이라 생각했다.

숨을 쉬고 있어도 온전한 정신 상태로 살아 있지 않는 자신을 위한 시간조차 없이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의 삶을 챙겨주고 보듬어 주기 위해서 24시간 깨어 있어야 했던 그녀의 삶에서 한 권의 책은 텅비어 버린 머릿 속에 어디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각성 시키며 기억의 회로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사는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악몽이나 가위 눌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문득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면 어떤 알람도 도착 하지 않았는데 하염없이 불 꺼진 방에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고 수면을 취하는 동안에도 머리 속 한 구역엔 폰이 보여주는 세상이 자리 잡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열흘 동안 쓰고 나서 서랍에 넣어두고 몇 달 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문장을 다듬어 나갔다.

작가들 중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하루키는 건강한 정신 상태에서 글을 쓰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에 취침하고 다음 날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지속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 어느 겨울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방으로 한기가 파고 들었던 어느 날 불면증이 갑자기 찾아온다.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며 쓰기 이야기는 원고지로 총 12매로 완성하고 그렇게 탄생한 단편들은 전 세계로 번역 되고 단편과 장편을 종횡무진 창작 하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

잠을 못 잔다고 일상이 엉망이 되지도 않는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틈틈이 노트에 끄적이거나 책을 읽거나 오전 오후 시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

인간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신체의 모든 기관은 각자가 맡은 역할에 맞춰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시간에 조금씩 매일 무언가 하고 있다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어제 보다 앞으로 더 나가며 먼 훗날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렇게 쓴 시간들은 온전히 내 삶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소설을 발표한 이후 부터 하루키는 2024년 지금까지 총 15편의 장편 소설과 16편의 단편집을 출간 했다.

소설을 발표하지 않는 해에는 에세이나 논픽션, 번역서, 여행기 회문집, 그림책, 소설 안내집, 대담집까지 출간 해서 한 개인이 출간한 작품의 수는 벽 한 면을 차지 하고 있는 책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다.

이 정도의 분량을 쓰려면 매일 10매에서 20매 분량의 원고지를 채워야 가능 할 정도로 엄청난 창작력과 이를 뒷 받쳐 주는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1981년 단편집 <꿈에서 만나요>을 시작으로 2020년에 출간한 <일인칭 단수>까지 총 16편의 단편집을 출간한 하루키는 <TV피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종종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FM 무라카미 방송에서 <TV피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을 종종 읽어준다.


<TV피플>에 수록된 단편들은 총 6편으로 'TV피플'과 '비행기-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와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고도자본주의 전사' 그리고 '잠' 이 네 편은 작가 생활을 시작 한지 10년의 시간이 흐른 1989년에 완성했다.

단편 '잠'은 해외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로 독일의 출판사 듀몬트가 무라카미 측에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쉬크가 그린 일러스트를 넣은 책으로 재 출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하루키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 <잠>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일본어 판으로 단독 출간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단편 '잠'에 대한 애정이 깊다.


<TV피플>에 수록된 단편들 모두 삼십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단편들이지만 하루키 초기작에서 맛볼 수 있는 생생한 묘사와 비유,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장이 매 페이지 마다 살아 숨쉰다.

200페이지 분량의 단편들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 첫 장을 펼쳐 들고 자정 시간을 넘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된다.

(c)Kat Menschik


["그렇게 해서 나는 잠을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은 없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밤 열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의 시간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 시간은 지금까지 잠이라는 작업에―'쿨다운 하기 위한 치유 행위'라고 그들은 말한다―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만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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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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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로 무덥고 습한 공기로 가득 찰 때면 꺼내보는 영화가 있다.

눈부시도록 푸른 빛의 하늘, 뜨거운 햇살, 여름의 빛깔을 담은 영화 <call me by your name >

'이 모든 것이 올리버가 우리 집에 온 그해 여름에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에 유행한 곡과 그가 머무는 동안 그리고 떠난 후에 읽은 책들, 뜨거운 날의 로즈메리 냄새부터 오후의 요란한 매미 소리까지 모든 것에 새겨졌다.

여름, 익숙해진 냄새와 소리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고, 그 여름의 사건들로 영원히 다른 색조를 띠게 되었다.'

- 안드레 애치먼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중에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탈리아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던 열 일곱살 엘리오 앞에 아버지(고고학자인 펄먼 교수)의 보조 연구원인 스물넷 대학원생 올리버가 나타난다.

이 영화는 눈이 부시도록 뜨거운 햇살과 푸른 바다 색깔의 하늘이 배경 화면을 가득 채운다.

욕망처럼 일렁이는 물결 무릎이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헐렁한 셔츠 그리고 핑크 빛이 맴도는 복숭아

여자친구가 있는 엘리오는 올리버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일부러 거만하게 말을 걸고 그의 약점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열병처럼 회오리치는 마음을 들켜버린다.

그리고 엘리오는 피아노를 치다 음표를 그렸던 연필로 올리버를 향한 마음을 휘갈기듯 써 내려간다.

"그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올리버. 올리버."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

뜨거운 햇살 아래서 핑크 빛의 복숭아가 익어가는 과수원, 한적한 시골길, 인적이 드문 비밀스러운 강가는 두 남자의 사랑은 한여름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올리버 올리버 올리버."

영화는 줄곧 엘리오의 얼굴을 비추던 것에서 벗어나 잠시 올리버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깡마른 사지, 당당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의 엘리오와 다르게 차분하며 침착하던 엘리오는 올리버 앞에서 흔들린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푸른 빛이 사랑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름날 찾아온 손님은 언젠가 떠나버린다.

파란색 옷을 입은 두 남자는 광활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 초록빛 들판을 휘젓으며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덧 화면 속에 비친 엘리오의 파란색 옷은 올리버의 파란색보다 더 짙고 푸른빛으로 비쳐진다.

엘리오의 첫사랑, 올리버

올리버가 떠나고 뜨거웠던 여름도 끝나버린다.

시간은 흘러 한여름 뜨거웠던 태양 아래서 무르익었던 과일들 초록빛을 내뿜던 잎사귀들 모두 새 하얀색 눈으로 뒤덮혔다.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올리버는 몇년 전 사귀었던 여자와 약혼을 한다는 말을 꺼낸다. 축하한다는 말을 내뱉은 엘리오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온몸을 떨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모닥불 앞에 앉은 엘리오 시뻘건 불빛에 데어버린 것처럼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든 엘리오

그제서야 깨닫는다, 겨울, 추운 겨울이 왔다는 것을.....

원작 소설에서는 한겨울 가을 날씨처럼 서늘한 어느 날 대학교수가 된 올리버가 엘리오의 이탈리아 별장에 찾아온다.

세월이 흘러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올리버는 여전히 멋졌다.

청명하게 빛나는 별 빛 아래 두 남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그리워 하며 엘리오는 별장 곳곳에 남아있던 올리버의 흔적을 하나 씩 꺼낸다

그리고 엘리오는 그해 여름에 함께 했던 올리버의 이름을 부른다.

여기 있었고, 잠시 함께 살았고 그리고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올리버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그해 그 여름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고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다면 내일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향해 너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한다.

여전히 올리버의 마음은 엘리오 처럼 푸른 빛이 였을까?

'“사랑 받고 싶어. 우리의 세상에는 마법이 부족하니까.'

-안드레 애치먼의 <여덟 밤> 중에서

사랑의 마법스러운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는 작가 안드레 애치먼은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누구와도 말하기 싫어서 크리스마스 트리 뒤편으로 숨어버린 20대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여덟 번의 밤의 시간으로 나눠서 두 남녀의 정신 세계를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 하듯 펼쳐 보인다.

'저녁이 반 쯤 흘렀을 때, 나는 저녁 전체를 역순으로 재생하게 될 것을 알았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여덟 번의 밤>은 등장 인물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아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서술해서 첫 페이지부터 시작 되는 전체 문단의 길이는 다음과 같다.

버스,눈, 작은 비탈길을 올라가던 산책, 내 바로 앞에서 닥쳐오던 대성당, 엘리베이터 안의 낯선 사람, 복닥복닥한 커다란 거실에서 촛불에 밝혀진 얼굴들이 웃음과 예감으로 환히 빛나던 일, 피아노 음악, 걸걸한 목소리의 가수, 어디서나 나던 소나무 냄새, 내가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아무래도 오늘 밤 훨씬 일찍 혹은 조금 늦게 도착해야 했다고, 아니면 아예 오질 말아야 했다고 생각하던 일, 적갈색의 고전적 동판화들이 걸린 화장실, 그 옆 벽면의 스윙도어를 열면 이어지던 기다란 복도, 손님용이 아닌 사실로 이어지다가 현관 쪽으로 다시 한번 꺾으면 기적처럼 다시 나타나던 아까와 똑같은 거실, 그곳에 더 많이 모여 있던 사람들, 내가 조용한 구석이라고 생각했던 커다란 크리스마트리 뒤편의 창가, 그곳에서 누군가 내게 돌아서며 한 손을 불쑥 내밀고 말하던 일.

'나 클라라예요.'

-안드레 애치먼의 <여덟 번의 밤> 중에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난 이 십대의 두 남녀 프린츠 오스카르와 클라라 브런슈바이크는 뉴욕 곳곳을 거닐며 함께 영화를 보며 서로 에릭 로메르 감독 작품을 좋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레오파르디의 시구절을 읊으며 일평생 한 번만 찾아 오는 그때의 그 순간의 사랑을 8일 밤에 걸쳐 쌓아 나간다.

차츰 무르익어 갈 것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은 얼룩진 곳이 서서히 희미해지듯 마법 같은 8일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치명적일 정도로 단호하고 도도할 정도로 상대의 말을 일축해버리며 각자의 지난 시절의 연인들을 향한 질투심에 활활 불타오른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났던 프린츠 오스카르와 클라라 브런슈바이크는 온통 씁쓸함과 지루함으로 가득 찬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 누군가에게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새해 첫 축배'를 든다.

그래서 지금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서서 기다려야 하나?

서서 궁금해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작품의 배경은 뉴욕으로 106번가에서 시작된 만남은 브로드웨이가의 길모퉁이에서 남쪽 방향으로 한 블록 내려가 105번가에서 싹이 트고 이 길에서 꺾어지면 나오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를 통과 하는 동안 사랑은 무르익어가다 마지막 8일 째 되던 날 밤 106번가로 돌아가면서 끝이 난다.

여덟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두 남녀 사이에는 지고 지순한 사랑이 피어오르지도 않고 미쳐 버릴 정도로 절정에 다다르다 확 불살라 버리는 열정도 없다.

너무 이르고, 너무 급작스럽고, 너무 빠른 틱톡 시대의 사랑은 일상의 매 순간 빠르게 움직이는 전쟁터 같은 도시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릴 뿐, 사랑에 시간도 감정도 허비 하지 않는다.


'나는 클라라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맨 첫 번째 밤부터 마지막 밤까지, 심술과 자존심으로 또 그 사이에는 상당량의 두려움과 경고로 지배 되었던 한편, 가장 중요해야 마땅했던 그 하나의 단어는 말없이 남아 있으라는 선고를 받은 단어였다가는 이윽고 그것 역시도 단단하고 빙하 같고 또 바위같이 되어버렸던 일을 생각했다.'


너무 생각이 많으면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이런 상태가 된 이유에는 스마트 폰과 실시간 주고 받는 Sns 메신저 때문일 것이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에 미련이 남은 남자 프린츠 오스카르는 마지막 이렇게 외친다.


'나는 그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지 않았는가? 눈에 다가는 밤에 다가는, 공원의 동상에 다가는, 내 베게에 다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단어를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 내가 당신과 영원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상실 역시도 틀림없는 동반자 이기 때문에...'

지난 세기의 연인들은 죽도록 싸우고 다음 날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찾아가 죽도록 싸우고 잊어버리고 냉기로 가득 찬 얼음 바닥에 누워서도 서로를 향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다.

사랑도 감정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다시 얼어 붙는 사랑, 사랑, 사랑

세기 전의 이런 사랑은 이젠 전시장에 진열된 고미술 작품처럼 지난 시절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녕, 나 오늘 밤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 친구들이랑. 당신 세상. 당신 집에서. 그리고 모두가 간 다음에도 머물고 싶어요. 당신처럼, 당신으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이 은신하고 있다고 할지언정, 내가 은신해 있듯이, 한스가 은신해 있듯이, 베릴과 롤로와 잉키와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이가 산 자든 죽은 자든 난파 된 채, 하자가 있는 채, 원하는 채 은신, 은신, 은신해 있듯이, 당신과 단둘이서만 있어서 끝내 내가 당신 냄새가 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숨 쉬게 되고 싶어요.

-안드레 애치먼의 《여덟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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