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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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츠메 소세키의 <열흘 밤의 꿈>은 꿈을 꾼 화자가 [이런 꿈을 꾸었다.]라는 말을 시작하면서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 바라보는 현실의 이야기를 열흘 동안 하나씩 들려준다.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 <열흘 밤의 꿈>을 가장 좋아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날 잠을 통 이루지 못한 상태에 멍하게 앉아 있던 중에 문득 소세키의 이 작품이 떠올랐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잠을 못 잔 지 벌써 십칠 일 째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화자는 이렇다 할 불편을 느끼지 못해서 병원도 찾지 않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매일 치과 의사인 남편을 내조 하며 외동아들을 키우며 일상 생활에 어떤 균열이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녀의 불면증은 대학 시절 부터 시작되었지만 제때 치료나 상담을 받지 않고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은 채 일상 생활에서 불완전한 수면 패턴을 이어 나갔다.

간헐적으로 밀려오는 졸음은 전철 좌석이나 교실 책상이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알게 모르게 풋잠을 자듯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기묘할 정도로 자신의 의식에서 분리된 그림자 같은 존재를 느낄 정도로 온전하게 푹 잠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걷고,마시고, 먹고 자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이런 상태를 가까운 지인이나 가족들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었다.

그녀는 자는 동안 모든 일을 정상적으로 하는 램 수면 상태의 인간으로 시간이 지날 수록 신체의 각 기관이 둔해지고 탁해지면서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세계의 끝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땅으로 그리고 내 육체는 내 의식과 영영 헤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에 단단히 매달리고 싶었다.]


모든 가족들이 깊이 잠든 밤마다 그녀의 정신은 또렷해져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게 된다.

째깍 째깍 시계가 움직이는 소리를 또렷한 정신으로 날이 샐 때까지 들었던 그녀에게 어느 날 아무 전조 없이 느닷없이 까무러칠 정도로 잠이 쏟아져 버린다.

그렇게 하루를 꼬박 넘기고 죽은 듯이 잠을 잤던 그녀는 결혼 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다시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현실 생활에 아무런 문제도 불편을 겪지 않았다.

단지 잠을 자지 못할 뿐이였다.

남편도 아이도 그녀가 잠을 한 숨도 자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친구와 동업으로 치과병원을 경영하고 있는 남편은 점심시간인 12시면 집에서 밥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다.

아침을 준비하고 차리고 남편과 아이가 출근하고 나면 집안을 정리를 마치면 곧 남편이 점심을 먹으로 집으로 오는 시간이 된다.

남편이 점심을 먹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녀는 오후 시간동안 장을 보러 나가고 집으로 돌아 오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 외동 아들의 저녁 밥을 차려 준다.

늦은 밤 남편이 퇴근하고 마지막 저녁을 차려 주고 설거지를 마치고 주변을 정리하면 자정이 가까워진다.

빈틈없이 가족의 생활 패턴에 맞추고 나면 어느덧 늦은밤, 자정을 알리는 시계종이 울리면 그녀는 잠을 자지 못하고 어느 날 깜짝 잠이 들었을 때 악몽에 시달리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잠을 청하면 악몽을 꾸게 될 것 같은 두려움사로잡히자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하고

가능한 긴 소설을 읽어보자고 마음 먹은 그녀는 톨스토이의 대장편 <안나 카레니나>를 읽기 시작한다.

오래전 학창 시절에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의 스토리를 대충 알고 있었던 그녀는 날이 밝을 때까지 온 신경을 그 책 속에 파묻고 나서 일상 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한다.


[매일 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집안일을 재빨리 해치우고 오전 내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책을 내려놓고 남편을 위해 점심을 만들었다.]


그녀는 결혼 생활 동안 눈을 감고 무감동적이게 기계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의무적으로 장을 보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았지만 밤 10시 부터 아침 6시까지 책을 읽고 나서 부터 집 안에 갇혀 있기만 했던 생활 반경을 차츰 넓혀나간다.

차를 몰고 나가 사는 곳 너머 지역을 돌아 당기기도 하며 소소한 일탈을 즐기는 모습을 그녀의 가족 중 어느 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는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처음 잠을 못 잔 것이 지지난 주 화요일, 그러니까 오늘로 딱 십칠 일 째다. 처음 잠을 못 잔 것이 지지난 주 화요일, 그러니까 오늘로 딱 십칠 일째다. 이로써 십칠일동안 한숨도 못잤다].


그렇게 열일곱 번의 낮과 열일 곱 번의 밤 동안 잠을 자지 않은 그녀는 문득 죽음을 떠올리며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 질 수록 일상의 잍탈은 점점 대담해진다.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 잠의 감각을 불러 일으키려 해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각성한 어둠이 존재할 뿐이었다. 각성한 어둠...]

시간별 레인을 따라 맹목적으로 가족들의 삶의 패턴에 자신의 삶을 맞춰 살았던 엄마, 아내, 그리고 한 여자는 이런 삶을 어디에도 소비 되지 않은 무의미한 삶이라 생각했다.

숨을 쉬고 있어도 온전한 정신 상태로 살아 있지 않는 자신을 위한 시간조차 없이 잠을 청하지 못할 정도로 누군가의 삶을 챙겨주고 보듬어 주기 위해서 24시간 깨어 있어야 했던 그녀의 삶에서 한 권의 책은 텅비어 버린 머릿 속에 어디서 언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각성 시키며 기억의 회로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사는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악몽이나 가위 눌림 같은 체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문득 잠이 오지 않는 시간이면 어떤 알람도 도착 하지 않았는데 하염없이 불 꺼진 방에서 스마트 폰을 만지작 거리고 수면을 취하는 동안에도 머리 속 한 구역엔 폰이 보여주는 세상이 자리 잡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작품을 열흘 동안 쓰고 나서 서랍에 넣어두고 몇 달 후 다시 꺼내 읽으면서 문장을 다듬어 나갔다.

작가들 중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하루키는 건강한 정신 상태에서 글을 쓰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에 취침하고 다음 날 같은 시간에 눈을 뜬다.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지속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 어느 겨울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방으로 한기가 파고 들었던 어느 날 불면증이 갑자기 찾아온다.

불면증으로 밤을 지새우며 쓰기 이야기는 원고지로 총 12매로 완성하고 그렇게 탄생한 단편들은 전 세계로 번역 되고 단편과 장편을 종횡무진 창작 하며 세계적인 작가가 된다.

잠을 못 잔다고 일상이 엉망이 되지도 않는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틈틈이 노트에 끄적이거나 책을 읽거나 오전 오후 시간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할 수 있다.

인간은 깨어 있는 동안에도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신체의 모든 기관은 각자가 맡은 역할에 맞춰 질서 있게 움직이고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시간에 조금씩 매일 무언가 하고 있다면 별 볼일 없는 인생이 어제 보다 앞으로 더 나가며 먼 훗날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그렇게 쓴 시간들은 온전히 내 삶을 위한 시간이 될 것이다.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소설을 발표한 이후 부터 하루키는 2024년 지금까지 총 15편의 장편 소설과 16편의 단편집을 출간 했다.

소설을 발표하지 않는 해에는 에세이나 논픽션, 번역서, 여행기 회문집, 그림책, 소설 안내집, 대담집까지 출간 해서 한 개인이 출간한 작품의 수는 벽 한 면을 차지 하고 있는 책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다.

이 정도의 분량을 쓰려면 매일 10매에서 20매 분량의 원고지를 채워야 가능 할 정도로 엄청난 창작력과 이를 뒷 받쳐 주는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1981년 단편집 <꿈에서 만나요>을 시작으로 2020년에 출간한 <일인칭 단수>까지 총 16편의 단편집을 출간한 하루키는 <TV피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들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종종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 FM 무라카미 방송에서 <TV피플> 단편집에 수록된 단편을 종종 읽어준다.


<TV피플>에 수록된 단편들은 총 6편으로 'TV피플'과 '비행기-혹은 그는 어떻게 시를 읽듯 혼잣말을 했나'와 '우리 시대의 포크로어-고도자본주의 전사' 그리고 '잠' 이 네 편은 작가 생활을 시작 한지 10년의 시간이 흐른 1989년에 완성했다.

단편 '잠'은 해외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편 중 하나로 독일의 출판사 듀몬트가 무라카미 측에 독일의 일러스트레이터 카트 멘쉬크가 그린 일러스트를 넣은 책으로 재 출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흔쾌히 이 제안을 받아들인 하루키는 독일에서 독일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 <잠>을 읽고 마음에 들어서 일본어 판으로 단독 출간 할 정도로 그는 자신의 단편 '잠'에 대한 애정이 깊다.


<TV피플>에 수록된 단편들 모두 삼십 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단편들이지만 하루키 초기작에서 맛볼 수 있는 생생한 묘사와 비유,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장이 매 페이지 마다 살아 숨쉰다.

200페이지 분량의 단편들을 다 읽고 나면 다시 맨 앞장으로 돌아가 첫 장을 펼쳐 들고 자정 시간을 넘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된다.

(c)Kat Menschik


["그렇게 해서 나는 잠을 못 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은 없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밤 열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의 시간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루의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그 시간은 지금까지 잠이라는 작업에―'쿨다운 하기 위한 치유 행위'라고 그들은 말한다―소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나만의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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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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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로 무덥고 습한 공기로 가득 찰 때면 꺼내보는 영화가 있다.

눈부시도록 푸른 빛의 하늘, 뜨거운 햇살, 여름의 빛깔을 담은 영화 <call me by your name >

'이 모든 것이 올리버가 우리 집에 온 그해 여름에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에 유행한 곡과 그가 머무는 동안 그리고 떠난 후에 읽은 책들, 뜨거운 날의 로즈메리 냄새부터 오후의 요란한 매미 소리까지 모든 것에 새겨졌다.

여름, 익숙해진 냄새와 소리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었고, 그 여름의 사건들로 영원히 다른 색조를 띠게 되었다.'

- 안드레 애치먼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중에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탈리아 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던 열 일곱살 엘리오 앞에 아버지(고고학자인 펄먼 교수)의 보조 연구원인 스물넷 대학원생 올리버가 나타난다.

이 영화는 눈이 부시도록 뜨거운 햇살과 푸른 바다 색깔의 하늘이 배경 화면을 가득 채운다.

욕망처럼 일렁이는 물결 무릎이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헐렁한 셔츠 그리고 핑크 빛이 맴도는 복숭아

여자친구가 있는 엘리오는 올리버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일부러 거만하게 말을 걸고 그의 약점을 찾으려고 애를 쓰지만 열병처럼 회오리치는 마음을 들켜버린다.

그리고 엘리오는 피아노를 치다 음표를 그렸던 연필로 올리버를 향한 마음을 휘갈기듯 써 내려간다.

"그가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

올리버. 올리버."

"당신이 알아줬으면 해서…"

뜨거운 햇살 아래서 핑크 빛의 복숭아가 익어가는 과수원, 한적한 시골길, 인적이 드문 비밀스러운 강가는 두 남자의 사랑은 한여름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엘리오 엘리오 엘리오 올리버 올리버 올리버."

영화는 줄곧 엘리오의 얼굴을 비추던 것에서 벗어나 잠시 올리버 얼굴을 클로즈업 한다.

깡마른 사지, 당당하면서도 불안한 눈빛의 엘리오와 다르게 차분하며 침착하던 엘리오는 올리버 앞에서 흔들린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푸른 빛이 사랑의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름날 찾아온 손님은 언젠가 떠나버린다.

파란색 옷을 입은 두 남자는 광활한 자연 속으로 들어가 초록빛 들판을 휘젓으며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덧 화면 속에 비친 엘리오의 파란색 옷은 올리버의 파란색보다 더 짙고 푸른빛으로 비쳐진다.

엘리오의 첫사랑, 올리버

올리버가 떠나고 뜨거웠던 여름도 끝나버린다.

시간은 흘러 한여름 뜨거웠던 태양 아래서 무르익었던 과일들 초록빛을 내뿜던 잎사귀들 모두 새 하얀색 눈으로 뒤덮혔다.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준비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때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올리버는 몇년 전 사귀었던 여자와 약혼을 한다는 말을 꺼낸다. 축하한다는 말을 내뱉은 엘리오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온몸을 떨며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모닥불 앞에 앉은 엘리오 시뻘건 불빛에 데어버린 것처럼 눈물을 글썽인다.

엄마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든 엘리오

그제서야 깨닫는다, 겨울, 추운 겨울이 왔다는 것을.....

원작 소설에서는 한겨울 가을 날씨처럼 서늘한 어느 날 대학교수가 된 올리버가 엘리오의 이탈리아 별장에 찾아온다.

세월이 흘러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올리버는 여전히 멋졌다.

청명하게 빛나는 별 빛 아래 두 남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들을 그리워 하며 엘리오는 별장 곳곳에 남아있던 올리버의 흔적을 하나 씩 꺼낸다

그리고 엘리오는 그해 여름에 함께 했던 올리버의 이름을 부른다.

여기 있었고, 잠시 함께 살았고 그리고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올리버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그해 그 여름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고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다면 내일 이곳을 떠나기 전에 자신을 향해 너의 이름을 불러 달라고 말한다.

여전히 올리버의 마음은 엘리오 처럼 푸른 빛이 였을까?

'“사랑 받고 싶어. 우리의 세상에는 마법이 부족하니까.'

-안드레 애치먼의 <여덟 밤> 중에서

사랑의 마법스러운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는 작가 안드레 애치먼은 어느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누구와도 말하기 싫어서 크리스마스 트리 뒤편으로 숨어버린 20대 남녀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여덟 번의 밤의 시간으로 나눠서 두 남녀의 정신 세계를 마치 현미경으로 관찰 하듯 펼쳐 보인다.

'저녁이 반 쯤 흘렀을 때, 나는 저녁 전체를 역순으로 재생하게 될 것을 알았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여덟 번의 밤>은 등장 인물들의 역동적인 모습이 아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서술해서 첫 페이지부터 시작 되는 전체 문단의 길이는 다음과 같다.

버스,눈, 작은 비탈길을 올라가던 산책, 내 바로 앞에서 닥쳐오던 대성당, 엘리베이터 안의 낯선 사람, 복닥복닥한 커다란 거실에서 촛불에 밝혀진 얼굴들이 웃음과 예감으로 환히 빛나던 일, 피아노 음악, 걸걸한 목소리의 가수, 어디서나 나던 소나무 냄새, 내가 이 방 저 방을 돌아다니면서 아무래도 오늘 밤 훨씬 일찍 혹은 조금 늦게 도착해야 했다고, 아니면 아예 오질 말아야 했다고 생각하던 일, 적갈색의 고전적 동판화들이 걸린 화장실, 그 옆 벽면의 스윙도어를 열면 이어지던 기다란 복도, 손님용이 아닌 사실로 이어지다가 현관 쪽으로 다시 한번 꺾으면 기적처럼 다시 나타나던 아까와 똑같은 거실, 그곳에 더 많이 모여 있던 사람들, 내가 조용한 구석이라고 생각했던 커다란 크리스마트리 뒤편의 창가, 그곳에서 누군가 내게 돌아서며 한 손을 불쑥 내밀고 말하던 일.

'나 클라라예요.'

-안드레 애치먼의 <여덟 번의 밤> 중에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난 이 십대의 두 남녀 프린츠 오스카르와 클라라 브런슈바이크는 뉴욕 곳곳을 거닐며 함께 영화를 보며 서로 에릭 로메르 감독 작품을 좋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레오파르디의 시구절을 읊으며 일평생 한 번만 찾아 오는 그때의 그 순간의 사랑을 8일 밤에 걸쳐 쌓아 나간다.

차츰 무르익어 갈 것 같은 두 사람의 사랑은 얼룩진 곳이 서서히 희미해지듯 마법 같은 8일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치명적일 정도로 단호하고 도도할 정도로 상대의 말을 일축해버리며 각자의 지난 시절의 연인들을 향한 질투심에 활활 불타오른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만났던 프린츠 오스카르와 클라라 브런슈바이크는 온통 씁쓸함과 지루함으로 가득 찬 일상으로 돌아가 각자 누군가에게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새해 첫 축배'를 든다.

그래서 지금 나는 뭘 해야 하는가? 서서 기다려야 하나?

서서 궁금해 해야 하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작품의 배경은 뉴욕으로 106번가에서 시작된 만남은 브로드웨이가의 길모퉁이에서 남쪽 방향으로 한 블록 내려가 105번가에서 싹이 트고 이 길에서 꺾어지면 나오는 리버사이드 드라이브를 통과 하는 동안 사랑은 무르익어가다 마지막 8일 째 되던 날 밤 106번가로 돌아가면서 끝이 난다.

여덟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두 남녀 사이에는 지고 지순한 사랑이 피어오르지도 않고 미쳐 버릴 정도로 절정에 다다르다 확 불살라 버리는 열정도 없다.

너무 이르고, 너무 급작스럽고, 너무 빠른 틱톡 시대의 사랑은 일상의 매 순간 빠르게 움직이는 전쟁터 같은 도시 속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릴 뿐, 사랑에 시간도 감정도 허비 하지 않는다.


'나는 클라라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맨 첫 번째 밤부터 마지막 밤까지, 심술과 자존심으로 또 그 사이에는 상당량의 두려움과 경고로 지배 되었던 한편, 가장 중요해야 마땅했던 그 하나의 단어는 말없이 남아 있으라는 선고를 받은 단어였다가는 이윽고 그것 역시도 단단하고 빙하 같고 또 바위같이 되어버렸던 일을 생각했다.'


너무 생각이 많으면 상대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이런 상태가 된 이유에는 스마트 폰과 실시간 주고 받는 Sns 메신저 때문일 것이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에 미련이 남은 남자 프린츠 오스카르는 마지막 이렇게 외친다.


'나는 그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지 않았는가? 눈에 다가는 밤에 다가는, 공원의 동상에 다가는, 내 베게에 다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단어를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에 , 내가 당신과 영원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상실 역시도 틀림없는 동반자 이기 때문에...'

지난 세기의 연인들은 죽도록 싸우고 다음 날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그 다음 날 다시 찾아가 죽도록 싸우고 잊어버리고 냉기로 가득 찬 얼음 바닥에 누워서도 서로를 향한 관심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다.

사랑도 감정도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다시 얼어 붙는 사랑, 사랑, 사랑

세기 전의 이런 사랑은 이젠 전시장에 진열된 고미술 작품처럼 지난 시절의 영화에서만 볼 수 있게 되었다.

안녕, 나 오늘 밤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나 당신이랑 있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 친구들이랑. 당신 세상. 당신 집에서. 그리고 모두가 간 다음에도 머물고 싶어요. 당신처럼, 당신으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요. 당신이 은신하고 있다고 할지언정, 내가 은신해 있듯이, 한스가 은신해 있듯이, 베릴과 롤로와 잉키와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이가 산 자든 죽은 자든 난파 된 채, 하자가 있는 채, 원하는 채 은신, 은신, 은신해 있듯이, 당신과 단둘이서만 있어서 끝내 내가 당신 냄새가 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숨 쉬게 되고 싶어요.

-안드레 애치먼의 《여덟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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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 너무 멀리 낯선 곳까지 와버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때껏 누구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보지는 않았을 듯했다. 공기 성분 마저 고향과는 다른 듯한 낯선 느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었다.

-카프카의 <성> 중에서


1919년 노동자 재해보험공사에 다니고 있었던 서른 여섯 살의 카프카는 전체 260여명의 직원 중에서 단 두 명 뿐인 유대인 중 한명으로 그가 맡은 업무는 보험료를 산정하고 노동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무수한 청원에 답변하고 재해 예방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엮은 논문을 쓰는 업무를 담당했다.

체코 보헤미안의 최고 수재들만 들어가는 카렐 대학교 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던 카프카는 체코 최고의 재해 보험 공사에서 성실하고 명석한 직원으로 맡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고객에게는 항상 친절했다.

그의 평판은 체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회사 밖을 나가는 즉시 180센티의 훤칠한 키와 몸에 딱 맞는 깔끔한 슈트와 모자를 쓴 모습에 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사무실에 나가면서 외적으로 나의 직무를 완수하고는 있지만 나의 내적 직무를 완수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완수 되지 않은 직무 하나하나가 사고로 이어지는데 그 피해는 전혀 복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가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서른 여섯 살 카프카는 나날이 심해지는 폐결핵 질환 때문에 밀려드는 업무를 잠시 미뤄 두고 단 2주간의 휴가를 겨우 받아 프라하에서 약 32킬로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보헤미아의 휴양 도시 셸레젠으로 여행을 떠난다.

셸레젠이라는 도시에 도착한 카프카는 치료를 받는 환자들만 머무는 하숙집을 숙소로 잡는다.

몇 시간 후, 그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가 찾아 왔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던 카프카는 친구 막스 손에 들려진 종이 뭉치가 자신이 아버지에게 쓴 수 백장의 편지라는 걸 알아차린다.


'친구, 전부 태워 주게.'


친구 막스가 대답을 하지 않자, 카프카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렇게 읊조린다.


'나에게는 조상도 없고 아내도 없고 후손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어떤 신앙과도 관계 없는 인간이다.

내가 종족으로서의 유대인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나 자신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2주 후 회사로 복귀한 카프카는 하루 하루 수척 해져 갔고 말을 하거나 삼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기관지 상태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죽도록 멎지 않는 기침을 해 댔던 카프카는 마치 거대한 공장 기계가 기름칠을 하지 않아 쇳소리를 대는 기계처럼 마지막 연인 도라 디아만트와 담당 주치의에게 보낼 편지를 쓴다.


살아 있는 동안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운명에 대한 비관을 약간이 나마 막아낼 손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손으로는 그 폐허 밑으로 보이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 남들과 다른 것을 그리고 남들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 있다.

아직 안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카프카, 1921년 10월 19일


침상에 누운 카프카는 자신의 마지막 단편집이자 더없이 냉엄한 내용으로 채워진 단편<단식 광대>의 교정쇄를 검토 했다.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건네 받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달려가 하루 라도 빨리 출간 일정을 앞당기라고 재촉하고 연인의 작품을 체코어로 가장 먼저 번역한 멜레나 에센스카는 완성된 원고를 받자 마자 매일 밤 타자기를 두드려 체코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완성된 번역판과 최종 출간 본을 받아 든 카프카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감하고 친구 브로트에게 두 개의 원고를 돌려 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는 것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두렵네. 그건 내가 아직 삶을 덜 경험했기 때문이겠지.'


마흔 한 살의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이 세상에 남긴 모든 글이 미완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치고 수정하고 다시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빈 외곽의 열 두 개의 병실이 있는 사설 요양원에 입원하기 전 친구 브로트에게 자신이 남긴 모든 걸 불살라 버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로 부터 일주일 후 1924년 6월 11일 수요일 오후 4시 마흔 한 살의 프란츠 카프카는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사흘 후 프라하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힌다.

친구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 보았던 막스 브로트는 장례식을 마치고 난 후에 친구 카프카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시각인 오후 4시에 자신의 시계 촛침을 맞추어 놓았다.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카프카의 부모는 친구 막스 브로트를 집으로 불러 아들 프란츠의 사유물 관리자로 지정하는 계약서를 내민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남긴 책상 전체를 뒤집어서 심이 부러진 연필과 목깃이 뜯겨져 나간 단추들, 구슬들, 휴양지와 온천지에서 구입한 기념품들, 문진들 공책들, 미완성 초고들, 일기들 그리고 휴지 조각까지 전부 모아서 커다란 가죽 트렁크 속에 전부 때려 넣었다.

그는 친구 카프카가 살아 생전에 입었던 옷들의 주머니까지 전부 뒤져서 작은 종이 쪽지까지 전부 찾아 냈고 심지어 방 벽지에 낙서한 부분을 칼로 도려내서 떼어낼 정도로 카프카의 흔적이 남은 모든 걸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전부 모으고 모았다.

부모가 마지막 열쇠가 채워진 서랍장을 열자 펜으로 쓴 쪽지 한 장과 연필로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된다.

막스 브로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지막 찾아낸 쪽지에 적힌 카프카의 글을 읽었다.

가장 친애하는 막스에게

내 마지막 부탁이네. 내가 남기고 가는 것 중에 공책과 원고와 편지 그리고 스케치 등등은 절대로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 없애 주기 바라네. 더불어 자네가 갖고 있는 글과 그림 전부, 그리고 내 지인들이 갖고 있는 글과 그림 전부를 찾아내서 전부 태워주길 바라네.

설사 여건 상 서로 만나지 못한 다면 상대에게 태워 달라고 부탁하길 바라네

-프란츠 카프카가

카프카가 친구 막스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막스에게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기가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네. 폐열 증상이 한 달 째 이어지니 무슨 힘이 나서 글을 쓸 수 있겠나? 설령 쓸 수 있다 해도 그 글에는 생명력이 없는 거네.

그런 연유로 이제 내가 쓴 글 전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면 '판결', '화부', '변신', '유형지', '시골의사' 단편으로는 '단식광대' 뿐으로 이것 들 외에 내가 쓴 것들 현재 집안 어딘가에 남겨 있는 것들을 전부 찾아 내서 불태워 주길 바라네.

나의 마지막 부탁이니 당장 그렇게 해주리라 자네를 믿겠네.

-프란츠 카프카

1939년 3월 14일 화요일,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집을 나선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검은 색 가죽 트렁크를 챙겨서 아내 엘자의 손을 잡고 황급히 프라하의 윌슨역으로 출발한다.

만일 이 역에서 오후 9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지 못하면 막스와 그의 아내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운명이였다.

아내 엘자의 미국 친척이 보내준 영국발 팔레스타인행 이민비자를 갖고 있었던 막스는 열종대열에 맞춰 유대인 추방 구호를 외치는 나치 청년들이 역 밖을 에워싸고 있는 광경을 숨 죽이며 지켜 보았다.

마침내 프라하의 팔레스타인 공관 책임자와 유대인 원조 단체 위원장의 보호를 받은 기차가 역에서 출발했다.

기차에 올라탄 아내 엘자가 좌석에 앉자 마자 막스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가죽 트렁크를 소중하게 좌석에 올려 놓았다.

두 부부가 영국 땅에 도착 했을 때 신고할 물품은 달랑 가방 한 개 뿐 정작 자신들의 소지품이 담겨진 가방은 단 한 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먼지와 바람만 휘날리는 황량한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한 막스 브로트의 여권엔 54세/ 남자/ 난민 이라는 굵은 글씨가 새겨진다.

팔레스타인의 난민들끼리 모여 있는 허름한 하숙촌에 방을 겨우 구한 막스는 가방 속에서 친구 카프카의 원고 뭉치를 꺼내기 시작한다.


아멜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슬픈 미소이기는 했지만 어둡게 구겨진 얼굴을 환하게 펴주는 미소,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들려주는 미소, 전혀 모르겠는 낯선 것을 알려주는 미소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 중에서

1939년 나치가 유럽의 문을 폐쇄하기 직전 프라하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탄 막스 브로트는 오로지 친구 카프카가 남긴 것들만 챙겨왔다.

54세의 빈털털이였던 브로트는 텔아비브에서 출판인들과 편집인들 문학가들을 전부 끌어 모아 친구 카프카가 남긴 유언을 거슬러서 미완성 원고였던 ‘성’, ‘소송’, ‘아메리카’를 비롯해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를 전부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자신을 카프카의 유일한 절친으로 자칭하며 직접 카프카의 전기를 쓰고 출간 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강연에 나섰다.

2차 세계 대전 전쟁의 포화 속에 파묻혀 있었던 세계는 그를 카프카의 전문가로 칭송 하며 그가 편집하고 출간하는 카프카의 모든 저작물을 신뢰했다.

막스 브로트는 친구의 원고를 출간하는 동안 차곡 차곡 쌓여 가는 저작권 비용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자동차에 운전기사까지 고용하고 그리고 친구의 방대한 원고 편집 작업을 위해서 프라하 난민 출신의 에스테르 호페라는 여성을 비서로 고용한다.

1952년 어느 봄 날 아침, 막스 브로트는 10년 동안 자신의 곁에서 충실한 비서 일을 한 에스테르 호페를 서재로 불러 서랍에서 편지지 한 장을 꺼내 그녀가 지켜 보는 앞에서 증서를 작성해 나간다.


'친애하는 에스테르 에게 나는 나의 소유물인 카프카의 원고 및 서신 일체를 1945년에 당신에게 증여 했다.'

-베냐민 발린트의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중에서


치밀하게 증여한 년도를 1945년으로 적은 막스 브로트는 1924년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걸 담은 검은색 트렁크 안에 담긴 모든 원고와 일기, 편지, 쪽지들 그림들 사진들까지 전부 비서 에스테르와 함께 공동 금고에 맡기고 비서에게 모든 걸 증여한다.

16년의 세월이 흘러 20세기 최고의 문학가 자리에 오른 프란츠 카프카의 책이 전 세계 언어로 번역 되었던 시기인 1968년 12월 20일, 85세의 막스 브로트는 자신의 전 재산과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걸 비서 에스테르 호페에게 상속하고 생일을 몇 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나치에 의해 카프카의 세 여동생과 친지들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고 막내 여동생 오틀라의 딸만 유일하게 살아 남아 영국으로 이주 했다.

이스라엘과 독일 양국가가 카프카의 원고 소유를 놓고 다투고 있는 동안 카프카의 조카는 모든 의사를 국가간의 문제로 양도하고 자신들은 카프카가 남긴 어떤 유산을 사적으로 취득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 막스 브로트의 비서 에스테르 호페는 1988년 카프카의 ‘소송’ 원본 원고를 200만달러에 독일 마르바흐 아카이브에 팔며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카프카의 원고를 하나 둘 씩 꺼내면서 전 세계 부유한 수집가들의 귀와 눈을 홀리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이미 30여 년 전, 막스 브로트가 사망한지 5년 뒤인 1973년 비서 에스테르 호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 했다.

당시 이 소송을 맡았던 판사는 막스 브로트의 최종 유언장에 따르면 비서 에스테르 호페가 브로트의 유산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며 이스라엘 정부가 아닌 에스테르 호페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7년 에스테르 호페마저 사망하자, 두 딸 에바와 언니 루트 호페가 상속 절차를 밟으려 할 때 이스라엘 정부가 또다시 소송을 제기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국립도서관을 앞세워 텔아비브에 사는 브로트의 비서 딸인 73세의 에바 호페에게 카프카와 브로트의 원고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 하고 약 9년에 걸쳐서 카프카가 남긴 원고 그리고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남긴 유언을 둘러싼 세기의 재판이 시작된다.

“이것이 줄다리기 시합이라면, 나에게는 아무 승산도 없겠지. 엄청나게, 엄청나게 강한 상대들과 싸워야 하잖아.”

브로트의 비서였던 엄마 에스테르 호페의 유언을 공증 받기 위해서 상속 등기소에 유언 공증을 신청했다가 난데없이 거대한 소송에 휘말린 에바에게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측은 막스 브로트가 비서 호퍼 에게 유산을 넘긴 것은 증여가 아니라 신탁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어가 아닌 오로지 독일어로만 글을 썼지만 어디에서도 독일인으로도 유대인으로도 체코인으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만난 연인 도라의 권유로 시오니즘과 유대교에 대해 공부하고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것이였지 그는 명시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 한 적이 없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독일이 천천히 자기 방식대로 가지게 되었을 것들을 독일에 강요했고 독일은 이방인들에게서 온 것들이라는 이유에서 그것들을 반대 했다.

-1920년,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막스 브로트가 비서에게 넘긴 것은 유산을 어떤 조건으로 어떤 기관에 넘길지를 선택할 권한일 뿐, 그녀의 딸들에게 물려줄 권한을 준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카프카가 명시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문학 유산은 유대 민족의 문화재로서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정부가 소유해야 마땅하다고 강변했다.

소송은 텔아비브 가정법원(2007~2012년)과 지방법원(2012~2015년)을 거쳐 2016년 이스라엘 대법원까지이어졌고 가정법원에 이어 지방법원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승리로 끝났고, 2016년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도 이스라엘 정부의 승소가 확정됐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에바 호페는 카프카 원고를 포함한 막스 브로트 유산 전부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양도해야 할 것이며 단돈 1셰켈의 양도 보상금도 없을 것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어느 날 아침에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에바 호페는 자기가 상속권을 박탈 당한 상속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에바 호페











20년 가까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던 에바는 카프카 원고 인도가 한창 진행되던 2018년 분노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막스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1939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유대인 절멸을 시도한 나치로부터 카프카의 원고를 지켜낸 막스 브로트는 배신자 일까?

그는 85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까지 오로지 카프카의 원고와 편지를 출판하는데 모든 걸 바쳤다.

그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살아 생전 무명이었던 카프카가 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세기 마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문학가들이 있다.

이탈리아는 단테가 있고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은 괴테가 있다.

그렇다면 세기의 불후한 천재 프란츠 카프카는 어느 국가에 속한 작가인 것인가?

막스 브로트가 마지막 눈을 감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원고가 있다.

친구 프란츠 카프카가 종이에 끄적였던 어느 문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그들에게 왕이 되거나 왕의 전령이 되는 선택이 주어졌다. 모두가 아이들처럼 전령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렇게 전령들밖에 없는 것이고 이렇게 급하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큰소리로 메시지를 왕이 없으니 무의미해진 그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유랑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면서도 충성을 맹세했으니 차마 그러지 못한다.

-프란츠 카프카, 1924년 9월

프란츠 카프카가 세상에 잠든지 딱 100년이 되었다.

소송은 끝났고 그의 원고를 지켜내고 세상에 알리고 그 모든 혜택을 누렸던 이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는 평생 동안 자신의 모든 것들로 부터 자립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투쟁했다.

그의 소설엔 정확한 지명도 없고 정확한 이름도 없고 신도 없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은 '문학'이라는 무한한 상상력,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되고 되살아나는 불멸의 언어를 남겼다.

그가 남긴 무수히 많은 글들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빛처럼 세기를 지나 어디든 우리 곁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얼어 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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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7-08 23: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카프카 소송 읽었어요. 다음엔 성 읽으려고 책 사놨고요.
카프카 얘기들 읽으면서 저 막스 브로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많이 궁금하더라구요. 스콧님 글 읽으니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기의 천재의 글을 알아본 안목. 그것을 버릴 수 없었던 마음. 그러나 친구의 유언을 무시하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었던 것 같은 그의 삶 - 어떻게 보면 카프카가 소설속에서 그렸던 사람들 같기도 해요.
카프카의 작품은 인류의 것이지만 굳이 소유권을 따진다면 체코 아닌가요? 제 생각은 그렇네요. ^^
오랫만에 스콧님의 훌륭한 글을 읽으니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밤입니다. ^^

2024-08-13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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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일본 열도 전역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이 일시 정지 되었다.

동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지역 하청회사에서 25년 동안 근무 했던 다쓰로는 원자력 규제 위원회에서 새로운 규제 기준을 통과 시키며 일본 열도 전역의 원자력이 재 가동이 되었다.

다쓰로는 원자력의 위험성과 심각성이 완전히 해소 되지 않은 시기에 더구나 폐원전 처리 문제도 해결 되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원자력을 재 가동 시키는 정책에 큰 불만을 품고 회사를 그만둔다.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원자로 일을 하겠다며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해서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후쿠시마를 찾아간다.

지진 발생이 후 단 한번도 후쿠시마 땅을 가본 적이 없었던 다쓰로는 해변에 날아드는 연의 방향에 이끌려서 차에서 내리고 연이 날리는 방향을 쫓아간다.

[100미터 정도 앞에서 나이 든 남자가 연줄을 당기고 있다. 몇 명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달랑 한 사람뿐이었다. 연은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바다 위에 떠 있다. 겨울의 전조처럼 서늘한, 북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서풍이다.]

-10만년 뒤의 서풍 중에서


연이 날리는 방향으로 따라간 다쓰로는 연을 날리는 남자를 만나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연을 날렸던 미국산 '게일러 카이트'연이라는 걸 알고 친근감을 보인다.

후쿠시마 해변가에서 연을 날리는 남자의 이름은 다키구치, 그는 쓰쿠바 기상청 기상 연구소에서 일하다 퇴직한 후 취미로 연을 날리면서 습관처럼 기상을 관측하고 있었다.

다키구치는 기상청 근무 당시 고층 기상 관측 전문가로 라디오존데라는 관측 장치를 기구에 달아서 상공으로 띄워 넣고 예보에 사용할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했었다.

기상 관측 연구가인 다키구치는 1930년대에는 연에 온도계를 달고 기상을 예측하는데 이용했다며 다쓰로 앞에서 직접 시연을 해 보인다.

그는 매일 해변에서 연을 날리며 레이더도 기구도 드론 같은 최첨단 기상 관측 기기가 아닌 연 줄을 타고 손으로 느껴지는 상공 공기의 감촉과 온도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예측하고 습관처럼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다.

다쓰로는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연을 날리며 기상을 관측하는 다키구치가 동일본 후쿠시마 지역에서 원전이 있었던 도미오카마치를 갈 예정이라는 말에 원전 회사에 다녔었다는 말을 꺼낸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해에 다쓰로는 보수관리과 과장으로 승진해서 9월 말에 발생 했던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격납시설에 문제가 생겼는지 점검을 나섰다.

진도 4지진 발생으로 원자로의 안전 장치 역할을 하는 필터 벨트에 뒤틀림을 발견한 다쓰로 팀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부장은 새로운 규제 기준에 근거해서 진도 4정도로 배관이 손상되었다는 건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니 보고서를 수정하라고 지시하고 문제가 발생했던 원자로의 일시 가동 중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원자로 전력회사의 하청 회사에 소속된 다쓰로는 상사의 지시로 보고서를 수정한다.

그렇게 보고서를 수정하고 나서 리히터 규모 7.3 의 지진과 지진 해일로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1-4호기에서 누출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는 분명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언젠가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뒤바뀐 치명적인 인재 사고 였다.

다쓰로는 폐암 투병 중인 아버지가 평생 동안 자랑스러워 했던 2호기 필터벨트의 뒤틀림 보고서를 수정한 직원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족이 사회로 부터 받을 막대한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원전 사고 이후 폐원자로 처리 시설회사 일을 시작한 다쓰로는 원전 사고 유출 발생 지점 근처에서 날리던 연을 따라 서풍으로 이동해서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대가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 전선에 날릴 계획을 세웠던 풍선 폭탄의 이야기까지 흘러 간다.

수소 가스를 채운 직경 10미터 짜리 기구에 소이탄과 폭탄을 매달아 지상의 기지에 띄워서 기구가 상공에 강한 편서풍을 타고 이틀 밤 낮으로 날아 미국 본토 서해안에 자동적으로 폭탄을 투하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3년 일본 군부대 소속 노보리토 연구소는 300여명이 매달려서 기압계를 탑재한 정밀한 고도 유지 장치, 영하 50도에 달하는 상층 공기를 견딜 수 있는 내한 전지를 풍선 기구에 설치 해서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군수품 제조 공장과 극장, 학교에서 학생들을 끌어다 놓고 풍선 폭탄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44년 11월 편서풍이 불기 시작했던 날 일본 군부대는 풍선 폭탄을 날려 버릴 기지를 태평양에 면한 해안 세 곳에 설치한다.

후쿠시마현의 나코소, 지바현의 이치노미야 그리고 이바라키 현의 오쓰에서 1945년 4월까지 미국 본토를 겨냥한 풍선 폭탄 기구를 발사한다.

당시 발사된 풍선 기구는 총 1만 발로 약 천 개의 풍선 기구가 미국 본토까지 다다랐다.

일본 군이 날린 풍선 폭탄은 미국 오리건주 마을의 숲과 공원에 떨어져서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군부대 소속 노보리토 연구소의 생물 병기 부서에서는 탄저균과 적리균, 우역 바이러스를 풍선 기구에 매달아서 미국 본토로 날려 버린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기상학자 아라카와 히데토시는 기구를 발사하는 고도와 적절한 계절과 바람 ,발사 지역 그리고 미국 본토까지 다다를 시간과 확률을 계산한다.

1944년 10월 말 오전 3시 풍선 폭탄에 세균을 장착한 기구를 날릴 준비를 갖추고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난 오전 5시 소대장이 '발사' 명령을 내리는 순간 풍선 폭탄은 날아 오르지 못하고 지면에서 폭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풍선 폭탄 사고로 고층 기상대 데이터를 계산하는 중앙 기상대 기수들이 사망한다.

풍선 희생자들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서 다쓰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연락을 해 지난 시절 아버지와 함께 날렸던 연 세트(게일러 카르트)를 구매 했다고 말한다.

원자력 발전 폐기물은 지하 500미터까지 갱도를 파서 사용 완료된 핵원료를 특수한 재료로 덮어 묻는다. 이런 핵폐기물 처리는 인간이 고안해 낸 방법 중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10만년 동안 폐기물이 지상으로 올라 올 경우가 없다며 원자로 가동에서 나오는 모든 핵 폐기물 처리는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

기후 이상 변화로 지구는 나날이 뜨거워 지고 있고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빠른 속도로 녹아서 바닷물 수위는 올라가고 있다.

열을 감지한 지변이 흔들리고 계절의 순환은 뜨거운 여름이 지속 되어 강렬한 햇볕과 장기간 무서운 양으로 내리는 비의 양으로 인간들이 파 묻어 놓은 핵폐기물 시설이 10만년을 버텨 낼 것 같지 않다.


고베 대학에서 지구 과학을 전공하고 도쿄 대학에서 지구 행성물리학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이요하라 신은 1998년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단편으로 네뷸러 상을 수상한 컴퓨터 전문가 테드 창의 작품을 읽고 대중들의 시선에 맞는 픽션같은 과학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2003년 부터 도야마 대학 이학부 조교로 근무하면서 안정적인 일을 하게 된 이요하라 신은 2008년 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1년 만에 완성한 첫 번째 소설< 두번째 보름달>로 에도가와 란포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 마다 우리 일상에서 발생하고 마주 할 수 있는 과학적 현상과 기술을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과 연결 시키며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작가와 평론가 그리고 서점 직원들의 추천서에 이름을 올리는 인기 작가가 된다.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마치 과학자가 일련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가이드처럼 대화로 묘사로 풀어나가는 이요하라 신의 작품들은 SF장르에 속하지 않고 미스터리로 분류 된다.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은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인 현상과 자연의 변화를 정확한 명칭과 장소를 제시 하며 마치 과학 잡지에 실리는 개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듯 서정적인 문체로 펼쳐 보인다.

과학자인 이요하라 신은 소설을 쓸 때면 '과학자가 보고 있는 풍경 그리고 세계의 모습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우연히 들여다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화두를 던져 놓고 글을 쓴다.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에 맨 마지막 장에는 이요하라 신이 작품 집필에 참고한 문헌과 인터넷 사이트 주소가 빼곡하게 수록되어서 작가의 소설적 상상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 실제 우리 눈 앞에서 발생했거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요하라 신은 <팔월의 은빛 눈>에서 팔월에 은빛 눈이 내릴 수 있다는 가설을 이렇게 정의 했다.


[내핵은 지구의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별로 크기는 달의 3분의 2 정도로 열방사 빛을 제거하면 은색으로 빛나는 별이다. 그것이 액체의 외핵에 싸여서 떠 있는데 그 별 표면은 전부 빽빽한 은빛 숲으로 높이 100미터나 되는 철로 된 나무 숲이다. 실제 그 정체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은 철 결정으로 외핵 밑 부분에서 액체 철이 얼면 내핵 표면으로 은빛 가루가 천천히 눈가루 처럼 흩날린다.]

-8월의 은빛 눈 중에서


은빛 숲에서 내리는 은빛 눈의 소리, 무덥고 습한 7월의 이요하라 신의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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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6-30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던 작가인데 너무 매력적인 리뷰네요. 저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scott 2024-06-30 12:39   좋아요 2 | URL
이 단편집 정말 좋습니다
과학적 현상을 이토록 현실감 넘치게 묘사한 작가의 문체가 너무 유연하고 탄탄해서
대단하다는 생각만이 ^^
 















[열한 번째로 본 아파트는 벽장은 하나뿐이었지만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조그만 발코니로 나갈 수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니 10월인데도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바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가 길 건너편에 보였다. 윌럼이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남자는 인사하지 않았다. ]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 중에서


(c)Todd Hido: 3878, from Interiors/Motels (2005). Photograph: Courtesy the artist



여러 도시를 순회하고 취재를 마친 어느 날 모텔로 돌아 온 한야 야나기하라는 노트북 모니터 화면의 배경 사진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나서 첫 문장을 적기 시작한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혈액학자이자 암 연구자인 아버지가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어린 한야는 엄마와 동생과 모텔에 머물렀다.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하는 삶에 익숙했던 한야는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 하자 마자 여행 잡지를 발행하는 회사에 들어가 마땅한 거주지 없이 계절을 앞서 발행하는 잡지 기사를 위해 매일 밤 낯선 도시, 낯선 공간에서 삶을 꾸려 나갔다.

1년 만에 승진한 한야는 뉴욕 본사로 발령이 나고 어렵게 구한 월세 방에 들어 가는 순간 머릿 속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스쳐 지나간다.

수도 없이 즐비한 이상한 복도들을 따라가다 보면 쓰지도 않는 괴상한 모양새의 막다른 구석과 마감 안 된 어정쩡한 공간들 공사 도중 버려진 석고판들이 굴러 다니는 그곳 , 잘 팔리지도 않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형편 없어 보이는 것들을 끈질기게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 그곳, 뉴욕 땅의 한 구역에서 한야는 초록색 테이프로 4구역을 정확하게 나눠 놓고 낯선 월세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기 시작한다.

도시와 도시 공간을 취재하며 이 모텔과 저 모텔에 머물며 취재 기사 편집을 마치고 나면 한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드-헤럴드-제이비-윌럼- 앤디


다섯 명의 남자들의 삶을 조각 조각 써나갔던 한야는 마지막 문장을 찍고 나서 페이지 수를 확인했다.

천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받아 든 담당 편집자는 반 이상 덜어내라고 원고를 한야에게 돌려 보내자 그녀는 단번에 '싫다!'고 거절하고 천 페이지를 고집한다.

편집자는 주드 분량을 줄이라고 두 번째 원고를 반송하고 한야는 고심 끝에 몇 몇 부분을 다듬어서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700페이지 분량으로 최종 원고를 완성한다.

70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받은 편집자는 이메일을 통해 스티븐 킹이나 해리포터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벽돌 부피의 현대 문학을 독자들은 외면 할 것이라며 분량을 더 덜어낼 것을 요구하자 한야는 거세게 항의한다.

마지막 편집부로 부터 승인을 받은 한야는 처음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머릿 속에 떠올랐던 사진 한 장을 보내며 반드시 이 사진을 북 커버로 써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Peter Hujar, Orgasmic Man, 1969,© The Peter Hujar Archive


한 남자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벅차오르는 슬픔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의 이 사진은 사진가 피터 후자(Peter Hujar 1934-1987)의 '절정에 달한 남자(Orgasmic Man)'다.

이 사진을 처음 본 담당 편집자가 커버로 쓸지 망설이자 한야는 “이 사진 속의 가차 없고 무력한 어떤 것이 내 소설 속 인물인 주드와 윌럼을 떠올리게 했다”는 말로 설득하고 “사진 속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의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자는 말에 편집자는 흔쾌히 동의하고 출간을 한다.

잡지사 일을 하는 동안 18개월 만에 완성한 두툼한 벽돌 부피의 <리틀 라이프>는 2015년 출간 즉시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랐지만 미국 문학계에 큰 돌풍은 일으키지 않았다.

돌풍의 시작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그 해 맨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며 영국의 주요 매체와 언론들의 극찬 세례가 이어지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서 영국 문학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라간다.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는 안타깝게도 문학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독자들 사이에서 청춘들의 어두운 부분을 현실감 있게 그려 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생 책 베스트에 올라간다.

2018년 <리틀 라이프>의 눈물의 간증 고백 리뷰가 틱톡과 숏폼 영상에 올라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몰며 각 국가 마다 절판 된 책을 다시 찍어내기 시작한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에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비평가들로 부터 “잔인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리틀 라이프>는 어린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와 폭력의 트라우마가 성장 하는 동안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인류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최첨단 기술이 정점에 다다랐지만 인간 이하의 야만성이 공존하고 있는 모순된 이 시대의 예술과 우정과 그리고 죽음을 청춘 남자들의 삶을 통해 펼쳐 보인다.
















[패트릭은 포도즙 압착기 위에 이르자 아래를 보았다. 두 개의 강철 롤러가 맞물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포도즙으로 얼룩진 롤러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포도를 압착했다. 공중 통로 난간의 하단은 겨우 패트릭의 턱 높이였다. 무척 가까이 느껴지는 압착기를 내려다보며 사람 눈도 반투명의 무른 젤리로 이루어진 포도송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얼굴에서 눈이 떨어져 나가 압착기 롤러에 으깨질 것만 같았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의 '패트릭 멜로즈' 중에서]


명망 높은 귀족의 작위를 갖고 있는 의사 아버지 데이비드는 다섯 살 아들 패트릭 멜로즈를 10여년 동안 성폭행을 하며 신체적 학대를 자행한다.

드넓은 영지를 마음껏 뛰어놀던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부심이 강했던 소년 패트릭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성적 폭력과 가족의 무관심 속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덜 너덜한 상태가 되어 10대 부터 독한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약에 의지 하고 있을 때도 약에서 손을 때는 순간에도 반드시 잠들기 전에 책 한 권을 머리 맡에 두고 잠이 들었던 작가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20 여 년의 세월 동안 총 다섯 권의 자전적 소설을 써 나간다.


[패트릭은 이에 찢긴 아버지의 아랫입술 상처를 종잇조각처럼 죽 찢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패트릭은 그런 생각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커튼 봉 위로 넘어가 달아났던 그 터무니없는 필요. 그건 아니야, 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패트릭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개자식.

패트릭은 악문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버지더러 의식을 되찾으라고 주먹으로 관 옆을 쳤다. 인생의 영화에서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패트릭은 자세를 바로잡고 경멸의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리도 지독히 슬픈 사람이었는데, 이젠 나도 슬픈 사람으로 만들려는군요.” 지나치게 감상적인 미국 사람 어투였다. 패트릭은 가식적으로 목이 메었다. “어유, 안되셨어.” ]

패트릭 멜로즈는 술에 손을 대고 약물 없이는 행동과 사고를 통제하지 못하고 입원과 치료를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일관 했던 고통스러웠던 유년기의 악몽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한다.

어린 영혼의 상처는 10대 부터 시작된 마약과 술에 찌들어서 40대에 들어서서 겨우 중독에서 벗어나 닥치는 데로 책을 읽으며 자기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찾기 위한 글쓰기 탐구 여정을 시작한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나서 마침내 다섯 권의 책으로 완성한 작가는 자신의 정신 상태가 ‘유아기의 의식에서 오래 침전된 미 성숙한 어른'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린다.

그렇게 진단을 내리고 나서 비로소 짐승 같은 행동과 폭력을 서슴치 않았던 아버지와 귀족의 작위와 명예를 목숨 같이 여기며 오로지 사회적 체면만 내세웠던 어머니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들 부모도 조부모에게 비슷한 성적 학대를 당했고 그 조부모들도 부모에게 받은 이 끔찍한 대물림에 대해 작가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네 인생 최고의 사건이지 아니, 아버지의 죽음 다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편견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앤드류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는 게이, 청각 장애인, 소인, 다운 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신동,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 범죄자가 된 아이, 트랜스젠더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탐구한 작가 앤드류 솔로몬은 300가구가 넘는 가족들을 상대로 4만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예외적인 정체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 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에 학대와 폭력을 당한 상처로 인해 부서지고 피폐된 영혼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작가 앤드류 솔로몬은 남들과 다른 재능과 특징을 타고 태어난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부모들 역시, 성장 과정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었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에게 정상인의 신체를 갖기 위해 무시 무시한 수술을 감행하는 부모들 역시 아이의 삶보다 자신들의 삶이 우선이였다는 것을 여러 가족의 사례를 통해 펼쳐 보인다.


한야의 작품 커버를 찍은 사진가 피터 후자는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어머니가 뱃속에서 육개월 때 생부에게 버림받는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카메라 한 대만 달랑 손에 들고 뉴욕에 정착해서 독학으로 상업 사진계로 진출하고 닥치는 대로 동물, 사람들의 초상화를 날것 그대로 렌즈에 담아 1960년대 뉴욕이라는 거대한 인종의 용광로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시선과 영혼을 사로잡는다.

(c) Susan Sontag Peter Hujar American 1975


수전 손택은 사진가 피터 후자의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피터 후자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사람들은 온전하게 드러나 있는

살갗 위로 촉촉하게 스며 올라온 슬픔이 보인다.'

-수전 손택

재능이 있는 것과 장애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를 놀라게 하거나 겁에 질리게 해서 걱정스럽게 만든다.

이 세상의 수 많은 예비 부모들은 곧 태어날 아이가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지, 재능을 타고 나는 건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자신의 아이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기를 바란다.

한야의 소설 <리틀 라이프>에서 주드는 교수의 격려와 지원을 받아 판사의 재판 과정을 돕는 연구원이 되지만 어린 시절에 수도원에 버려진 상처를 끝내 극복 하지 못한다.

아들 패트릭 멜로즈의 몸에 굳은 살이 박혀 버릴 정도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한 아버지 데이비드는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의사로 세상의 모든 천박함을 경멸하는 삐뚤어진 자아를 가졌던 병든 인간이였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지금의 자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애초에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은 부모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선물로 설령 장애가 있어도, 잘못을 저질러도, 상처를 주어도, 심지어 먼저 세상을 먼저 떠나도 자식은 부모의 삶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끊고 싶어도 끊어 버릴 수 없는 천륜이 된다.

사진가 피터 후자와 어머니 로즈


이 세상에 모든 걸 주는 관계란 존재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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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24-06-28 14: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목록의 가장 우선 순위에 둔 작품들이 이 페이퍼에 한꺼번에 있으니... 너무 놀라워요. ^^
잠깐 잊고 있다가 다시 상기하게 되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2024-06-28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깨비 2024-06-28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틀 라이프... 살까말까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캇님까지 등판하셨으니 이제 사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2024-06-28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6-29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가 가장 쉽게 망가뜨리는 게 바로 자식이 아닌가 싶네요 그렇게 하는 부모도 자기 부모한테 비슷한 일을 당했을지도... 꼭 그런 게 대물림 되지는 않기도 하겠지요 부모와 다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많지 않을지 몰라도...


희선

2024-06-3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