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가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그 땅을 '삼각 지대'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 이외에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자를 대고 그린 듯한 완전 한 삼각형의 땅이었던 것이다.

나와 그녀는 그러한 땅 위에서 살았다. 1973년인가 1974년 무렵의 이야기다.

'삼각 지대'라고 해도, 이른바 델타 모양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살던 '삼각 지대'는 훨씬 가늘고 길어 쐐기 같은 모양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면, 우선 완전한 사이즈의 둥근 치즈 케이크를 머리에 떠올려 주기 바란다. 그 리고 그것을 칼로 12등분해 주기 바란다. 즉 시계의 문자반 같은 모양으로 잘 라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끝이 뾰족한 부분의 각도가 30도인 케이크 조각 열 두 개가 만들어진다. 그중의 하나를 접시에 담아, 홍차라도 마시면서 차분히 바라봐 주기 바란다. 이것이 ㅡ이 끝이 뾰족하고 기다란 케이크 조각이ㅡ 우리의 '삼각 지대'의 정확한 모양이다.

이야기의 시점은 1973년에서 1974년 사이로 서로 다른 종류의 두 개의 철로가 뻗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땅에 지어진 집에  살게 된 젊은 부부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단락에 '삼각지대'의 지형과 주변 환경을 간결하면서 상세하게 묘사한다.

 현관 문을 열면 눈 앞에 열차가 달리고 있고, 뒤쪽 창문을 열면 거기도 다른 열차가 달리고 있다.

눈앞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승객과 눈이 마주쳐 인사할 수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봐도 지독한 곳이라는 느낌이 든다.

이 단편을 읽을 때면 학부 시절 기숙사 창문을 열면 바로 눈 앞에서 전차가 지나갔던 풍경이 떠오른다.

첫 학기에 살았던 기숙사 시설에 문제가 생겨서 대학 인근 캠퍼스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기숙사에 잠시 살게 되었다.

학기 중에는 기숙사 전 층에 빈 방이 없어서 메이트가 없는 학생이 살고 있는 방으로 이사해야 했다.

갑작스런 이사였지만 단 2주만 머물 예정이여서 트렁크 하나와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길 건너편 기숙사로 이사를 갔다.

당시 내가 머물렀던 층은 그라운드 플로어(ground floor)로 한국에서는 1층이고 영국에서는 2층부터 세컨드 플로어라 부른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귀찮았던 나는  그라운드 플로어(ground floor)층을 선택했다.

관리실에서 열쇠를 받아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에 노크를 하니 일본인 학생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첫 인사를 나누고  트렁크만 덜렁 내려 놓고 급히 수업을 들으러 갔기 때문에 그 방의 상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 온 늦은 시각에 띠링, 띠링 전차가 달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지더니  바닥과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대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굉음이 10분 간격으로 울렸다.

막차가 끝나는 자정을 넘기고 나서야 방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엄청난 소음에 충격을 받은 나에게 일본인 학생이 이 방에서 머무는 동안 아침 알람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말을 했다.

정확히 새벽 5시 30분, 엄청난 굉음 소리를 내는 전차의  바퀴가 내 몸 위를 지나가기 시작했다.

 막차가 지나가 버리면 그 다음은 조용하지 않냐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한다. 나도 실제로 이사를 올 때까지는 그렇게 생각 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막차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객 열차가 새벽 한 시 전에 모든 운행을 끝내 버리면, 다음에는 심야에 운행되는 화물 열차 들이 그 뒤를 이어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새벽녘까지 화물 열차들이 모두 지나가 버린 뒤에는 이튿날의 여객 수송이 시작된다. 이러한 일들이 매일 되풀이 되는 것이다.

아이고 맙소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치즈케이크 모양의 가난> 중에서 

그 방을 나가면서 '딱 2주만 참자. 참자.'라는 말을 되내였지만 수업 도중에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도 귓속에서 굉음이 수시로 진동했다.

친구들에게 방 창문을 열면 전차 바퀴가 보인다고 하자  신기하다며 그 날 모두들 그라운드 플로어에 있는 방으로 몰려 왔다.

친구들은 방 안에 발을 들여 놓자 마자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 친구는 다른 방에 침낭을 놓고 지내지 않으면  이 끔찍한 소음에 자칫 난청에 걸릴 수 있다는 무시 무시한 말을 했다.

"딱 2주만 참으면 돼."라며 나는 고집을 피웠고 매일  막차 시간이 가까워져서야 기숙사로 돌아 왔다.

굉음에 견디기 힘들어 하는 나와 달리 그 방에 살고 있던 일본인 학생은 너무나도 평온한 상태로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알람 없이  첫 차가 달려오는 시각에 일어나는 그 학생은 내 눈이 믿기 힘들 정도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했다.

명상이 끝나면 자그마한 종이를 들고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웠고 이 모든 의식이 끝나면 간단한 요가를 하고 샤워실로 갔다.

입 속에 무언가 넣는 것 조차 힘겨울 정도로 전차가 달릴 때마다 창문의 유리창이 흔들렸고 책상이 흔들렸고 심지어 천장에 붙어 있는 전등까지 깜빡 거렸다.

"곧 무너질 것 같아."

"걱정 마.절대로 무너지지 않아, 빅토리아 시대 때 시공 해서 2차 대전 독일 공중 폭격에도 살아 남은 건물이거든."

 일본인 친구는 모든 소음에 달관 한 듯 다도 용기와 다구를 꺼내 놓고 차를 준비했다.

그 친구가  녹색 가루를 개어낸 물에 가느다란 대나무 솔로  휘저을 때도 전차는 수시로 벨을 울리며 달렸고 차를 마시는 동안에도  바닥과 천장이 요동 쳤다.

 신기하게도 그 친구가 차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 보며 그 차를 함께 마시는 동안 굉음에 개의치 않게 되었고 그 이후로   새벽 첫 차 출발 소리만 들어도 두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방에서 사는 동안 일본인 친구와 나는  열차가 달려 오기 시작하면 대화가 끊어 졌다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모종의 이 방에 사는 규칙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모든 행동이 열차 시간에 맞추게 되었다.

소음을 제외하면, 집의 분위기 자체는 꽤 나쁘지 않았다. 구조는 확실히 고풍스럽고 전체적으로 파손되어 있었지만, 도코노마(일본식 방의 상 좌에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곳. 벽에는 족자를 걸고, 바닥에는 꽃이나 장식물 을 놓아 꾸민다. 보통 객실에 꾸밈)나 덧문 밖의 툇마루 등이 있어 좋은 느낌을 주었다. 창문으로 비쳐 드는 봄의 햇살이, 다다미 위에 작고 네모진 '양지' 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에 살았던 집과 유사했다.

"이 셋집에 들기로 하지. 시끄럽긴 하지만, 곧 익숙해질 거야" 하고 나는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치즈케이크 모양의 가난> 중에서 

실제로 그 기숙사는 바로 앞에 전차가 달리는 것을 제외 하면 주변 환경은 쾌적했다.

길 만 건너면 다양한 꽃들이 만발하는 공원이 펼쳐 졌고 내리막 길을 따라가면 강변으로 갈 수 있어서 걸어서 시내 중심까지 단번에 갈 수 있었다.

" 소음은 잠시 뿐이야. 모든 건 지나가 버려"

기숙사 밖 주변 환경에 막 적응 하기 시작 할 때 쯤에 2주의 시간이 끝났다.

윗 층에 살던 친구들은 드디어 녹물이 나오는 곳에서 해방 되었다며 이른 아침부터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방을 떠나는 날, 그 일본인 친구는 내가 쓰던 책상에 일본 말차와 쪽지를 남겨 놓았다.

몇 해전 그곳을 다시 찾아 갔을 때 기숙사 건물은 그대로 있었지만 열차 선로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자동차들이 줄지어 달려가는 반듯한 도로가 놓여 있었다.

 살아가는 동안  ‘금방 알 수 있는 것’과 ‘곧바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한 번 지나가면 그걸로 충분하지만 곧바로 알 수 없는 것은 마치 열차가  몇 번을 오고 간 뒤에야 서서히 알게 되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 일들이 선명하게 눈 앞에 펼쳐진다.

그 시절엔 오로지 그 방을 선택한 내 자신이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가능한 방에서 머무는 시간을 짧게 하기 위해 굳이 필요 없는 약속을 잡거나 할 일 없이 거리를 배회 하거나 도서관에 앉아 긴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의 말처럼 소음은 잠시 뿐,모든 건 지나가 버린다.

이따금씩 흔들리는 열차를 타고 창밖 풍경을 바라 볼 때나 창틈으로 새어 들어 오는 옅은 풀 냄새를 맡을 때면 지난 시절 온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요동쳤던 그 방이 떠올라 하루키의 단편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가난>은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작품이다.

나에게 잊을 수 없는 하루키의 단편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가난>을 일본어 원서와 영어 원서를 대조 비교 번역하고 편집 그리고 각색하고  배경음악까지 삽입해서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탄생 시켰다.

앞으로 하루키의 작품을 영상으로 만들어서 누구나 공감 할 수 있게 새로운 창작의 세계를 펼쳐 보일 것이다.

[주위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 설사 다른 사람들이 말려도, 모질게 비난을 받아도 내 방식을 변경한 일은 없었다. 그런 사람이 누구를 향해서 무엇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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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 채널을 구독하고 나서 고약한 버릇이 생겼다.

구독 채널을 누르면 밤 사이 새로운 영화와 드라마 예능들이 주르륵 나온다.

이 영화도 보고 싶고 이 드라마 시리즈도 정주행 하고 싶어서 화살표 버튼을 빛의 속도로 누르고 나면 뒤이어 주르륵 나오는 영상물은 재미가 없어 보인다.

다시 앞으로 되돌아가서 영화상을 수상한 작품들,최근 화제성이 높은 드라마,좋아 하는 예능인이 나오는 토크쇼를 차례 차례 클릭 하고 1.25배속에서 1.5배속을 오간다.

1시간을 채 넘기지 않고 드라마 시즌 1을 정주행으로 몰아 보았고 얼마 전에 영화관에 개봉되어 화제가 되었던 영화 엔딩 OST가 흘러 나오는 것 까지 보고 나서 여행 채널을 가장 빠른 속도로 감아 보다 가보고 싶은 장소가 나오면 정상 속도에 맞춰 놓고 본다.

여행지에서 설명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려서 소리를 없애고 자막처리 기능 버튼을 누르자 이국적인  풍경이 더 선명하게 보이니 자막은 거의 읽지 않는다.

프리미엄 구독료를 알차게 소비 하려면 매일 여러 편의 영상물을 가능한 많이  봐야 하기 때문에 가성비에 맞는 시간을 절약 하기 위해서 영상물을 볼 때 마다 1.25배속에서 1.5배속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보는  내가 비 정상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고물가 시대에 무엇이든 효율적으로 알차게 소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 효율을 극대화 해서 합리적인 삶을 영유 할 수 있어야 한다.

끼니를 해결하는 음식도  조리의 간편함과 함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가성비 대비 가격이 합리적인 것을 선호 하게 되었고 자동차를 몰거나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대형 쇼핑몰에서 필요한 것을 구매 하느라 하루 반나절을 소비 하지 않아도 쇼핑앱 클릭 하나 만으로도 필요한 소비를 모두 해결 할 수 있는 시대다.

드라마나 영화, 미술 같이 시간을 들여서 감상 했던  문화가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으로 접속만 하면 어떤 영상물이나 작품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볼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 양이 폭발적이게 늘어났다.

릴스나 숏폼, 틱톡 같이 1분 남짓한 영상만 봐도 필요한  정보를 흡입 할 수 있는 시대에 유튜브의 영상 시청 시간은  8분이 마지노선이 되었다.

넷플릭스의 ‘1.5배속’ 조절 기능이 2020년 7월 출시되자 마자 영화계와 드라마 제작사 측은 콘텐츠의 작품성을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큰 논란이 되었지만 2000년대 부터 쏟아지는 다양한 영상물을 흡입하며 일찌감치 빨리 보기 기능을 선호 하게 된 소비자들은 이 기능에 대 환영했다.

제작자들과 창작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연극, 혹은 영상 '작품'이 한 조각이 되는 '콘텐츠'로 대치 되고, '감상'이라는 제법 그럴듯한 단어가  '소비'라는 일상의 것으로 치환되었다.

본래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에서  소비자들이 한 끼 식사 비용을 지불하고 비싼 영사기와 최신식 스테레오가 틀어주는 영상과 소리를  긴 시간 동안  봐야 하는 수동적 콘텐츠였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변해 버린 여러 일상들이  콘텐츠를 능동적으로 '찾아보는' 방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따라서  영화를 잘게 편집해 10~20분 내외의 요약 콘텐츠를 보고 전체를 감상할 영화나 드라마를 골라 보다가 생각 보다 재미가 없다고 느끼면  건너뛰거나 빨리 감아 보는 일은 일상이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지나고 나서  영화관에서 부동 자세로 2시간을 앉아서 영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이 대폭 줄어 들고 있다.

이는 인내심이 부족 하기 때문이 아니다. 업무처리 부터 일상의 모든 것을 스마트 폰으로 해결하고 확인하고 주문하는 시대에 2시간 동안 새 알람을 체크 하지 못하게 된다면 일과 가정 그리고 학교에 문제가 발생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초초감을 달고 살기 때문이다.

현 시대 사회 변화는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숙성 시키기 보다 매 시간을 빈틈과 완충 지역 없이 빡빡하게 설계 해서 다량의 자극적인 콘텐츠 소비물을 쏟아내어 영화표 한 장 가격에 무제한으로 영상물을 소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세상의 콘텐츠가  '헐값'이 된 지 오래다. 

한 달에 만 원도 안 되는 비용으로 평생 보아도 다 볼 수 없는 콘텐츠를 스트리밍 하는 OTT를 구독할 수 있기 때문에  '가성비'는 '품질'의 문제가 아닌 지불한 가격 만큼의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볼 수 있는 영상물을  많이 봐야 시간 대비 성과까지 챙기며  남들보다 '빠르게 정보를 취득'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추세는 영화나 드라마의 콘텐츠의 미학적 질도 저하 시키게 되었지만 어쨌든 만 원 한 장이면 두툼한 세계사 책을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게 되었고 죽기 전에 봐야 하는 100편의 명작 영화도 빨리 감기로 봐서 이 전 보다 더 많은 영화의 이름과 스토리를 대충 알 수 있게 되었다.

오래 세월의 먼지가 쌓인 묵직한 고전 보다 단순한 스토리 전개, 통속적인 스토리, 손 끝 터치 하나 만으로 소설 한 편을 뚝딱 읽을 수 있고 종이책 여러 권을 탑처럼 쌓아 놓지 않아도 손으로 넘겨 보지 않아도 다양한 장르의 만화와 웹툰을 볼 수 있는 시대에 나는 더 이상 방구석에서 글만 쓰는 글쟁이 무명의 창작자가 아닌 나만의 영상 채널을 펼쳐 보이기 시작 했다.

[뇌는 무언가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다. 심지어 새로운 물건을 소유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다만 새로운 대상을 갈망하고 이를 손에 넣는 ‘과정’을 즐길 뿐이다.]

-모건 하우절의 <돈의 방정식> 중에서

2026년 1월 27일 부터 시작한 첫 번째 채널 

https://www.youtube.com/@moveablefeast-scott

'moveablefeast-scott' 채널은 예술과 문학, 일상의 '라이프 스타일에 녹아든 예술'의 과정을 탐구 하고 있다.

두번째 채널 아티스트 웨이 https://www.youtube.com/@loving-scott

두 번째 채널 아티스트웨이는 창작의 결과물이 우리 식탁과 반려 동물, 일상에 어떻게 변주 되어 일상의 예술을 구현 할 수 있는 지를 탐구하는 영상에 집중하고 있다.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 브레이밍을 하고 스크립트를 구상하고 각본과 시나리오를 쓰기 까지 많은 고심을 했다.

온갖 영상 채널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누가 내가 만든 영상을 보게 될까?라는 걱정을 하면서도 하루의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영상을 제작해서 올리고 있다.

글을 쓰고 영상을 편집해서 개인 채널을 운영 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나의 우상 중 한 명인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이다.

1991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객원교수로 초빙 받은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1년 뉴욕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1년 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참가 하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강의 준비-번역/잡지에 기고하며 에세이 쓰기-달리기로 시간을 배분하고 차근 차근 몸 만들기 준비를 해나갔다.

1991년 11월 3일에 뉴욕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3시간 31분 26초의 기록으로  완주 했고 1년의 시간이 지나 199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3시간 38분 20초 기록을 세웠다.

하루키는 50세가 되던 해인 2000년 부터 풀 마라톤 코스에서 4시간을 넘겼고 2012년 60세를 넘겼을 때부터는 5시간을 넘기며 1991년에 기록한 3시간 완주 시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2015년 70세에 들어서서는 6시간을 넘겼고 2022년 하와이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에서는 6시간 59분을 기록하며 7시간 대로 진입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을 수록  하루키는 40대 시절에 세운 기록을 넘어 서지 못하고 있지만 마라톤을 시작 한 이래로  2년에 한 번씩 보스턴 마라톤 대회와 3년에 한 번 뉴욕 마라톤 대회 그리고 1년에 한번 하와이 마라톤 대회에서 꾸준히 달리며 날씨가 궂은 날에는 집과 전용 스포츠 센터에서 몸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하루키가 70대에 들어섰을 때 오랜 투병을 하셨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고 그 다음 해에 가장 절친했던 동료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 시기에 하루키는 라디오 방송을 집에서 방송했고 레이먼드 챈들러, 카포티, 재즈 평론가, 피츠제럴드의 후기 단편 모음집을 번역했고 단편과 장편 소설도 완성했다.

이렇게 왕성하게 집필과 번역, 라디오 진행과 여러 대외 활동을 하는 동안 하루키의 동년배들이 노환으로  요양원에 가거나 심각한 질환 판정을 받아 병원에 장기 입원을 했다.

 갓 60대에 접어든 하루키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프로듀서가 지난해 갑작스럽게 떠난 지 몇 달 후 하루키도 병원에 입원했다.

어린 시절부터 감기나 몸살, 골절 같은 자잘한 부상이나 질병을 앓지 않았던 하루키는 타고난 건강한 체질을 자부해 왔지만 지난해 몸무게가 무려 18킬로나 빠질 정도로 크게 앓았다.

건강을 회복한 하루키는 2024년 부터 쓰기 시작했던 새 단편 <카호>를 2025년 12월에 완성해서 이번 여름 출간을 예정하고 있다.

[실제 인생에 있어서는 만사가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필요에 쫓겨 명쾌한 결론 같은 것을 구할 때, 자신의 집 현관문을 똑똑똑 노크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나쁜 소식을 손에 든 배달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중에서

하루키는 더 이상 마라톤 대회에 출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크게 아프고 나서 비로소 더 깊은 창작의 심연에 빠질 수 있다고 고백했다.

단  한 번도 소설가를 꿈꾼 적이 없었던  무라카미 하루키는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적인 작가라는 타이틀에 안주 하지 않고  여전히 글을 쓰며 창작 하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하루키가 창작의 길을 멈추지 않고 달리는 동안 나 역시 창작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직접 연출 각색하고 편집한 하루키에 관한 영상이 'moveablefeast-scott' 채널에서 볼 수 있다.

https://youtube.com/shorts/jsCXcIF40FQ?si=J6e65qajEn_IgExD

https://youtu.be/zLHZVjkKlYA?si=wro0XeQiKZPSvV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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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6-02-19 07: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scott님께서 유튜브를 시작하셨다니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구독하고 자주 시청 할께요. 믿고 보는 채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새해에 복된 일 많이 생기시고 하시는 모든 일 원만하게 이루어지길 바라겠습니다!

scott 2026-02-19 10:2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마힐님의 응원 진심으로 많은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첫번째 채널
https://www.youtube.com/@moveablefeast-scott

‘moveablefeast-scott‘에는 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스크립트를 작성해서 영상과 애니를 제작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아직 많이 미흡하지만 영상 편집 음성 녹음을 해서 올리고 있습니다.
두번째 채널 아티스트 웨이는 https://www.youtube.com/@loving-scott
제가 직접 가 본 도시와 살았던 나라의 주요 명소와 풍경을 직접 찍은 영상을 올리고 있고 좋아하는 것들 레고-편의점 같은 놀고 만지고 먹는 것들 그리고 명화 작품에서 영감 받은 것을 접시 위의 예술로 펼치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제법 추위가 풀려서 햇살도 따스한 2월입니다
마힐님 계신 북경에서 건강 잘 챙기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

루피닷 2026-02-19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개 채널 다 구독했어요
화이팅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cott님

scott 2026-02-20 00:19   좋아요 0 | URL
오랫만이에오 루피닷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북플 피드백에서 글 잘 보고 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
 
요리를 한다는 것
최강록 지음 / 클 / 202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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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시즌 마다 쏟아져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의 장르 중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것들 모두 "서바이벌' 장르다.

몸 근육을 쓰는 것 부터 노래를 부르는 오디션 프로그램들까지 모두 다 경쟁하는 한국인들에게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마치 내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생존 경쟁을 담은 서바이벌 서사에 열광한다.

전 세계적인 열풍을 몰고 왔던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1에 이어서 시작된 시즌 2는 특이하게도 결승에서 만난 백수저 최강록과 흑수저 이하성의  수저 색깔이 뒤바뀐 것처럼 보였다.

대학을 중퇴한 최강록 셰프는  군 제대 후 음식점 알바를 하다 ‘미스터 초밥왕’이라는 요리 만화에 빠져  요리를 시작했지만  창업과 실패를 반복하다 서른이 다 돼 가게를 접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리사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귀국해서 시작한 가게 적자로 폐업하고 생계를 위해 참치 무역 회사에 들어가 회사원으로 일하다 술김에 지원서를 낸 ‘마스터 셰프 코리아2’에서 우승을 차지 하면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다. 

자신의 요리 인생을 '척하며 살아온 세월'이라고 말하는 최강록 셰프는 술김에 던진 지원서 한 장으로<마스터셰프 코리아 2> 우승자가 되었고 13년의 세월이 흘러  흐른 2026년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시즌 2의 '히든 백수저'로 돌아와 최종 우승자 자리에 올라섰다.

 온갖 양념과 현란한 조리 기술 대신 "사실은 잘하는 척하며 살아왔다"라고 말하는 겸손함에 시청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최강록 셰프는 우승의 환호성 열차에 올라타서 온갖 예능 무대에 얼굴을 내밀거나 재간 넘치는 말솜씨와 개그가 섞인 요리 솜씨를 뽐내지 않는다.

우승의 기쁨을 맘껏 누리며 초고속도로 올라가는 인기 코인에 올라타지 않은 최강록 셰프는 인터뷰 자리마다  요리를 하는 매 순간 마다  무섭고 떨린다고 토로 한다.

음식을 향한 고집스러운 순정이 배어 나오는 그의 느릿한 말투에 듣는 이의 애간장을 다 태우는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경연에서 최종 우승자로 대중의 엄청난 주목과 관심을 받아도 외부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가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음식을 완성하고 탈락을 피하기 위해 촌각을 다투는 요리 서바이벌의 살벌한 전쟁터에서 맷돌에 재료를 넣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곱게 갈아내듯 조리한 최강록 셰프의 요리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하면서도 조리고 조려서 국물을 다 날려 보내고 마지막까지 남은 재료에 깊은 맛을 더해  끝내 살아남은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해준 음식으로 완성 시켰다.

남들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화려한 스펙을 쌓기 위해 미친듯이 몰두 하고 질주 하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아는 척, 있는 척, 잘 하는 척하며 사는 이들이 많다.

모두가 질주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경쟁 속에서  마음을 조리면서도 책망하거나 안달 복달 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 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경쟁이 아닌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한 최강록 셰프는 단 하나의 요리에 3시간의 정성을 다 쏟아부어 자신의 눈물과 땀이 배어 있는 인생 요리를 완성 했다.

인간에게 먹는 행위는 단순하기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입안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동안 그 시간은 하루 중 최고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한번 칼이 지나간 자리는 다시 붙일 수 없다는 건 생선회를 조리 하는 데도 필요한 말이지만, 우리가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도 좋은 말인 것 같다. 진지하되 두려워하지 말 것. 장난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될 테니까.

-최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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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6-02-05 0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자기 속도대로 살기 어려운 시대기는 해도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게 좋을 듯해요 요리도 경쟁하는 시대군요 예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한 때 호반의 도시 제네바에 살았던 시절, 이 도시를 거쳐 갔던 명사들이 살았던 방을 찾아 다녔다.

어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인지 몰라도 명사가 살았거나 머물렀던 그 방의 분위기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번역가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녔던 나보코프 부부는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3년 동안 프랑스 시인처럼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한 <롤리타>는 20세기 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만큼 사회적으로 윤리적 논쟁을 일으킨 문제적 작품이 되었지만 대중들의 지대한 관심을 일으키는데 큰 성공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롤리타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부를 축적하게 된 나보코프는 미국 삶을 청산하고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페어몬트 르 몽트뢰 팰리스(Fairmont Le Montreux Palace) 호텔 6층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나보코프는 페어몬트 르 몽트뢰 팔라스(Fairmont Le Montreux Palace)호텔에서 1961년부터 생을 마감한 1977년까지 머물렀다.

호텔에서 가장 멋진 전망이 보이는 6층에 있는 일명 나보코프의 방은 1년 내내  예약 대기자들이 꽉 차 있는 가장 인기 좋은 방이다.

전망 좋은 호텔 방에서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나보코프는 정오까지  영어로 작품을 썼고 오후에는 아내와 점심 식사를  마치면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나비를 채집했다.

그리고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에 호텔 방의 테라스에 앉아 아내와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  늦은 시간까지  체스를 두었다.

나보코프는 이 호텔에 머무는 동안 3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 했고 초기 창작 시절에 러시아어로 쓴  작품을 다듬어서 자신이 영어로 다시 써서 출간 했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 접어든 나보코프는  가족들과 러시아에서 살았던 시절을 추억 하는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Speak, Memory)'를 완성했다.








[기억 할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부터 나는 (찬미하거나 혐오하기보다는 흥미로워하고 즐거워하며) 가벼운 환각들에 사로잡히곤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중에서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형식의 회고록 <말하라, 기억이여>는 작가가 불연듯 떠오르는 기억을 구술 하듯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존재는 두 영원의 어둠 사이 갈라진 틈으로 잠시 새어 나온 빛에 불과 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중에서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독자들은 <말하라, 기억이여>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나보코프가 펼쳐 보이는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의 순간을 마치 환등기에 비춰 보듯 그 빛을 따라가게 된다.

1903년 8월부터 1940년 5월까지 37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나보코프의 기억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차르 체제 하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대 저택과 시골 별장을 오가며 보냈던 소년 시절이다.

나보코프가 펼쳐 보인 기억 속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유주의적인 기운과 가부장적인 흔적, 치명적인 가난과 대를 물려 받은 막대한 부를 가진 계층이 서서히 분열하고 충돌하며 무너지고 붕괴 하는 비극의 현장을 목도 하게 된다.

1914년 7월 사라예보에서 터져 나온 총탄의 비극은 3년 후 1917년 2월 러시아의 피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 한지 단 몇 일 만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 드미트리는 페테르부르크 임시 정부의 수장이 되지만 이듬해 10월에 발발한 피의 혁명으로 숙청의 칼날이 다가 오자 가족을 데리고 크리미아 반도로 이주 한다.

1918년 혁명군이 나보코프의 아버지에게 현상금을 걸고 추격하자 가족들은 우크라이나 르비우 지역으로 넘어가 지인 소유의 영지에 숨어 살게 된다.

혁명은 곧 끝이 날 것 이라 믿었던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크리미아 반도의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지만 1919년 황제가 이끄는 백군이 혁명군에 대패 하면서 나보코프 가족은 영원히 러시아 땅을 밟지 못한 채 유럽 전역을 떠도는 망명자가 된다.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번역가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보코프는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니며 번역과 작품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 던 중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나보코프는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1940년 미국 맨해튼에 정착한 나보코프는 자연사 박물관 나비 보존실 자원봉사로 활동하면서 지난 시절에 틈틈이 쓰고 번역했던 원고 뭉치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 다행히도 러시아 문학에 대한 총 2천 페이지에 달하는 1백 개의 강의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웰즐리 대학과 코넬 대학에서 강의하며 보낸 20년 세월은 행복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940년 5월 나보코프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부터 1941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 첫 강의에서 이전 미국 대학 러시아 문학 부에서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 없는 강의를 펼치기 시작한다.

1941년 웰즐리 대학 러시아어학과 가을 학기 부터 전임 교수로 부임한 나보코프는 러시아 언어와 문법을 가르치며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고찰'이라는 과목을 개설 했다.

1948년 부터 나보코프는 코넬 대학 슬라브학과 부교수로 재직 하면서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쓴 강의 노트를 들고 '유럽 산문의 거장들',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과목을 가르치며 1950년대 미국 대학에 러시아 문학 열풍을 일으킨다.

강의와 번역, 저술을 병행 했던 나보코프는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문예지인 <뉴요커>에 틈틈이 단편과 에세이를 기고 하고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자 유럽에서 출판 했던 작품을 다듬어 영어로 작품을 발표 하기 시작한다.

1955년 어린 여성의 사랑을 갈구 하는 남자의 욕망을 그린 장편 소설 <롤리타>가 발표 되자 마자 영미권에 찬반 논란을 거세게 불러 일으켰고 이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게 된다.

영화로 제작 되면서 막대한 저작권 수입을 받게 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나보코프는 대학 강의를 차츰 줄이고 집필과 나비 채집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보코프는 <말하라, 기억이여> 작품을 15년의 시간에 걸쳐 쓰는 동안 자신의 지나온 삶을 한 뭉치의 원고로 쏟아내기에 부족할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동전 몇 닙을 넣을 정도의 작은 호주머니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활절 달걀에서 스며나오던 따스함과 불그스레함, 버섯을 따오는 어머니의 초록빛 감도는 갈색 모직 외투 위에 맺힌 물방울, 가정교사가 앉던 의자에 덧씌워진 천의 무늬까지 새겨 놓은 <말하라, 기억이여>는 독자들에게 형형색색의 감각을 일깨워 준다.


인생의 여정을 한 편의 소설처럼 살다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족했던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을 지나 혁명과 망명으로 세상을 유랑하다 마지막 전망이 탁 트인 호텔 방에서 생을 마쳤다.

호텔 창 밖 너머 풍경을 바라 보며 오래 전 아내 베라와 함께 저 곳 어딘가를 거닐었던 나보코프를 떠 올려 본다.

길과 나무, 텅 빈 거리, 상점들 그리고 청명한 하늘 위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들..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이어짐을 눈으로 바라 본다. 

무엇이든 빠르게 찾고 검색 할 수 있는 시대에  눈꺼풀을 깜빡일 때 마다 지나쳐 버린 수 많은 찰나의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을 오랫동안 심사 숙고해서 완전히 몸과 마음에 익혀져야 비로소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일개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디지털화, 매개, 초연결, 감시,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세상에서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면서 꾸준히 무언가에 몰두 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각자만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을 견뎌내고 이따금씩 망상을 꿈꾸며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발견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인간에게  이런 것들 조차  없다면 우리는 그저 생의 소중한 시간을 빅테크 기업에게 고스란히 갖다 받치는 노예일 뿐이다.

인류는 매 세기마다 과학 발전의 힘으로 하늘과 바다 땅 속 부터 우주까지 뻗어나가면서 무엇이든 더 빨리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동안 생태계를 지탱 시켜 주고 있는 생명의 줄을 갉아 먹고 있다.

자는 동안 꿈을 꾸며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영장류인 인간에게 모든 만물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활동하며 기억을 축적해 나가고 있고 그 축적된 기억은  세월이 흐를 수록 시간의 그늘에 서서히 잠식 되어 간다.

시간의 그늘은 사는 동안 어떤 틈새를 비집고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아쉬움, 갈망, 회환과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게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 기억의 그늘은 인공지능의 기술로 끄집어 낸다 해도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인간이 창조한 활자의 아름다움과 비교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창작의 의미는 인간의 기억의 그늘에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있다.

나비 채집을 사랑했던 나보코프는 돌아 갈 수 없는 고국의 언어를 낯선 미국 땅에서 채집 하듯 기억 저편 속에 잠재 되어 있는 회상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냈다.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아득히 먼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루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저절로 절묘하고 흥미진진한 것이 될 거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베를린 안내’ 중에서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활자보다 영상에 의존하는 이 시대에 말의 가치는 추락할대로 추락해 버렸고 뜻도 괴상한 문자 조합으로 서로 다른 성별과 세대를 조롱하는 시대에 문학은 영양제를 삼키듯 한 번에 섭취 하면 안된다.

한 장 한 장 음미 하며 작가가 새겨 놓은 활자의 지도를 따라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서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손바닥의 오목 하게 파인 가운데서 스마트 폰이 아닌 책을 올려 놓고 활자에서 풍겨 나오는 문학의 향을 음미 하는 동안 비로소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 인물이 독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전쟁터에서 우리 어린 아들(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 어느 때든)과 함께 그 밑으로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몇 시간이고 서 있던 다리들을 당신과 나는 그 기억을 영원히 지켜낼 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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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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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조선 미술전에서 유화 작품으로  첫 입선 한 박수근은 4년 뒤에 소묘 작품으로 두 번째 입선을 한다.

제 15회 선전 출품작 <일하는 여인>박수근,1936

당시 심사 위원 중 한 명이였던 일본인 다나베는 박수근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했다.

'데생 위에 엷은 색채를 칠해 놓고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았다. 소묘 담채란 이런 것이다.'

일본인 심사 위원 다나베와 달리 한국 심사위원들은 박수근의 작품에 대해 저 마다  혹평을 날렸다.

-어설프게 서양 화풍을 따라 했는지 인물이 화면 중심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안정감이 부족하다.

-흑, 백 색조의 뚜렷한 대비를 시도 했지만 질감이 거칠어서 일관된 색조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그리다가 멈춘 듯이 미완성 작품처럼 보인다.

-수채화도 아니고 수묵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급히 완성한 흔적이 보인다. 기본 데생의 기량이 부족해 보인다.

일본인 심사 위원 다나베는 한국인 심사위원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판화와 사진의 질감을 연상 시키는 박수근의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기법에 후한 점수를 주고 수상작으로 입선 시키지만  한국인 심사위원들은 실력이 부족하다며 사적인 자리에서 화가에게 질책을 가했다.


한국 근대 미술사의 거장들인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화백들이 활동 하던 시기에 미술학도들은 궁핍하지 않은 비교적 넉넉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해서 가족들의 금전적 지원을 받아서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서구 미술을 공부한 유학파들이였다.

따라서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 왔을 때 일본에서 배웠던 서양 기법을 마음껏 발휘 하기 위해 일본 제국 미술 협회 지원 아래서 독립전, 자유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미술 시장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일본 유학파 예술가들의 유일한 꿈은 총독부 주관의 관전에 입선 해서 세계 무대로 나가는 것으로 1930년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 한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였다.

유학파들과 달리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농업과 광산업에 종사 했던 부모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서당에서 글을 깨우쳐서 보통 학교에 입학했지만 광산업의 불황과 홍수 피해까지 입게 되면서 집안은 몰락해 버렸다.

교사들의 도움으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박수근은 미술 학교는 커녕 상급학교 진학의 꿈조차 꾸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그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겼던 미술 교사의 도움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면서도 홀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은 18살 나이에 일본인 심사 위원의 추천으로 조선 미술전에 입선을 한다.

두 번째 역시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만장 일치로 입선을 하게 되자 일본 유학을 갔다 온  화가들은 그의 다음번  출품작을 낙선 시켜 버린다.

제대로 된 화구도 없었고 외국산 제품에 귀한 색조 유화 물감은 만져 본 적도 없었던 박수근은 연필과 검은색 물감으로 절구질을 하고 맷돌을 돌리며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해방 전까지 박수근이 꾸준히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동안 한국인 심사위원들은 '너무 평범한 소재에 단조로운 색조톤에 기술적으로나 구상적으로 논할 바가 못된다.'며 혹평을 날렸지만 일본인들은 서구적 미술사조를 따르지 않고 향토색이 짙은 독특한 구조와 화풍, 거친 질감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그의 독창성이 후대에 가장 독보적인 화가가 될 것임을 예감 했다.

유학파들이 고향과 출신 나이대 별로 그룹전을 열고 서로의 작품을 구매 해주며 똘똘 뭉쳐서 작품 활동을 펼칠 때 박수근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다.

값비싼 재료들로 덧칠한 유학파들 작품 속에서 박수근 작품은 도드라졌고 어김없이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그의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어서 유학파들을 제쳐 버리게 만든다.

불행하게도 화가로서 기량을 막 펼쳐볼 시기에 해방을 맞이하고 6,25전쟁 발발로 피난 살이가 시작 되고 박수군이 군산 피난지 부둣가에서 가족들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할 때 유학파 예술가들은 통영과 부산, 진주 등지에서 서로의 작품 전시를 열며 부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1953년  박수근은 미8군 CID(범죄수사대) 매점(PX) 초상화부에서  화가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로 올라간다.

1953년 서울 수복 후 재개된 국전에 박수근은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한다.

이마를 간신히 덮을 정도로 짧게 머리를 자른 소녀가 등에 강보에 싼 갓난 아기를  업고 있다.

누이 또는 언니의 등에 얼굴을 묻은 잠든 아기를 업은 소녀는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아비나 어미를 기다리는지  옆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전쟁과 피난, 가족과 친지의 죽음을 겪으며 배고픔을 견뎌 내며 살아 남은 한국인들에게 박수근의 그림은 외면하고 싶은 슬픔이였고 잊어 버리고 싶은 과거 였다.

하지만 미군 피엑스를 통해 박수근의 작품을 꾸준하게 구매 했던 미군 상사들의 부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그의 작품을 구입했고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화구와 물감을 보내 주었다.

전쟁통에 뇌막염으로 큰 아들을 잃고 피난 살이 때 셋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난 아픔을 겪었던 박수근은  여색을 탐한 적 없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다정 다감한 사람이였고 길을 가다 노상을 하는 상인들을 만나면 갖고 있는 돈을 전부 털어서 좌판에 있는 것들을 구입했다.

박수근은 여타 다른 화가들 처럼 개인 화실도 없었고 재대로 된 화구를 갖춰 놓고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는 일평생 툇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 오면 함께 숙제를 봐주었고 아내가 상을 차리면 함께 먹고 나서 가족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멈췄던 그림 작업을 이어나갔다.

박수근이 살던 집이 마을 구역 계획으로 도로 공사 지역으로 지정되고 툇마루 땅 마저 잘려 나갔을 때 그는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든 후에야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의 작품의 중심은 전부 평범한 우리 일상의 모습들이다.

 어린 누나가 갓난 쟁이 동생을 업고 있고, 이웃 아주머니들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걸음마를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갯길을 걸어 가거나, 시장 좌판에서 물건을 놓고 파는 여인들까지 그의 모든 예술 속 주인공들은 모질고 고된 삶을 견뎌냈던 우리 어머니들이였다.

양말 조차 신지 않은 채 검정 고무신을 신은 여인이 힘껏 절구질을 하는 모습이 화강암처럼 단단한 삶의 의지로 표현 되었다.

1952년 새해 첫 달, 피난 살이 당시 두 아이를 잃은 박수근이  부둣가에서 받은 품삯으로 겨우 감자 한 자루를 구해 온다.

도마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 놓은 감자 알들 사이에 기다란 칼이 놓여 있다. 피난 살이 중에 겨우 감자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상황을 보여 준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온 박수근은  미군 상사의 아내들이 작품을 구입해 주어서 피난 중에서 먹어 본 적이 없었던 귀한 음식을 구해 온다.

1950년대 중서부 지역 중에서 부잣집들만 먹을 수 있었던 굴비가 박수근 집의 밥상에 올라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불후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박수근은 동시대 부유한 지주와 대상인 집안의 유학파 출신들보다 불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했다.

박수근이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시대는 193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로  파란만장한 삶의 파고 때문에 그의 건강은 1950년대 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간경화와 신장염이 악화 되어 백내장의 후유증을 겪었던 박수근은 예술가로 활짝 날개를 펴기 시작할 무렵에 한 쪽 눈을 실명한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박수근은 한 쪽 눈으로 고향땅 양구에서 행상을 나가는 어미의 손을 잡고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 옆을 지나갔던  지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막 붓을 든다.

1960년에 완성한 <귀로> 작품은 마치 세월의 흔적으로 낡고 헤진  흑백 사진을 연상 시키며   지나간 시간의 아련한 감정의 잔흔 처럼 거친 물감의 질감이 화폭에 새겨져 있다.

49세 되던 해 백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은  51세 되던 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이 떠난 1965년. 그 해 10월 유작전이 열리고 그의 작품 앞에 어느 중년 여인이 전시된 그의  작품들을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 후퇴 후 텅 빈 최전방 도시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은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고 싶었다.

-박완서의 <나목> 중에서 


 평생 여성과 나무를 즐겨 그렸던 박수근은  생계를 위해 아이를 위해 팔을 들어 올린 여인들의 따스함과 강인한 생명력을 산이 갖고 있지 않는 나무의 곧고 강직한 모습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나목(裸木) 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 나무를 의미한다.



나무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곧게 자라지 못한다. 그렇다고 수직으로 늘씬하게 쭉쭉 뻗은 나무 만이 치열한 경쟁의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

 굴절되고 절단된 가지, 바로 갈등과 궁핍의 상징이다.

모두가 굶주리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 박수근은 아이들이 쓰다 버린 몽당 연필로 올곧게 성장하지 못한 채 잎사귀 하나 없이 처절할 정도로 앙상하게 가지만 남겨진 나무들만 그렸다.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불멸의 작품들을 만들어낸 박수근이 그러 했고 그의 작품을 활자로 완성한 박완서 작가도 봄을 기다렸다.

2026년 매서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 오고 사회 곳곳은 저마다 분열과 갈등으로 앞으로 저마다 각기 다른 목소리로 투쟁을 외치고 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 어려움을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살아 가고 있다.

겨울을 맞은 나무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곧 따스한 바람이 불고 태양의 길이가 길어지는  봄이 오면 새 잎이 돋고 새로운 꽃을 피우듯 2026년 봄을 기다린다.

내가 지난 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 밭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닮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박완서의 <나목> 중에서 

‘강변’(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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