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호반의 도시 제네바에 살았던 시절, 이 도시를 거쳐 갔던 명사들이 살았던 방을 찾아 다녔다.

어떤 호기심이 발동해서 인지 몰라도 명사가 살았거나 머물렀던 그 방의 분위기를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번역가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녔던 나보코프 부부는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3년 동안 프랑스 시인처럼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한 <롤리타>는 20세기 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만큼 사회적으로 윤리적 논쟁을 일으킨 문제적 작품이 되었지만 대중들의 지대한 관심을 일으키는데 큰 성공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롤리타는 전 세계 언어로 번역되어서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드높아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 수입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부를 축적하게 된 나보코프는 미국 삶을 청산하고 유럽에서 가장 살기 좋은 스위스 몽트뢰에 있는  페어몬트 르 몽트뢰 팰리스(Fairmont Le Montreux Palace) 호텔 6층에서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

나보코프는 페어몬트 르 몽트뢰 팔라스(Fairmont Le Montreux Palace)호텔에서 1961년부터 생을 마감한 1977년까지 머물렀다.

호텔에서 가장 멋진 전망이 보이는 6층에 있는 일명 나보코프의 방은 1년 내내  예약 대기자들이 꽉 차 있는 가장 인기 좋은 방이다.

전망 좋은 호텔 방에서 이른 아침에 눈을 뜬 나보코프는 정오까지  영어로 작품을 썼고 오후에는 아내와 점심 식사를  마치면 호텔 주변을 산책하며 나비를 채집했다.

그리고 하루 해가 저무는 시간에 호텔 방의 테라스에 앉아 아내와  여유로운 저녁 식사를 하고 난 후  늦은 시간까지  체스를 두었다.

나보코프는 이 호텔에 머무는 동안 3편의 장편 소설을 발표 했고 초기 창작 시절에 러시아어로 쓴  작품을 다듬어서 자신이 영어로 다시 써서 출간 했다.

생애 마지막 시기에 접어든 나보코프는  가족들과 러시아에서 살았던 시절을 추억 하는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Speak, Memory)'를 완성했다.








[기억 할 수 있는 가장 먼 과거부터 나는 (찬미하거나 혐오하기보다는 흥미로워하고 즐거워하며) 가벼운 환각들에 사로잡히곤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중에서 

나보코프가 4살이던 1903년부터 1940년까지의 시간을 배경으로 한 독특한 형식의 회고록 <말하라, 기억이여>는 작가가 불연듯 떠오르는 기억을 구술 하듯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매체에 게재됐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의 존재는 두 영원의 어둠 사이 갈라진 틈으로 잠시 새어 나온 빛에 불과 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중에서

암실의 문을 열면 빛이 들이닥치듯 독자들은 <말하라, 기억이여>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나보코프가 펼쳐 보이는 가족, 영어 교육, 첫사랑, 시 창작, 가정교사, 망명의 순간을 마치 환등기에 비춰 보듯 그 빛을 따라가게 된다.

1903년 8월부터 1940년 5월까지 37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나보코프의 기억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은 차르 체제 하에 가족과 함께 살았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대 저택과 시골 별장을 오가며 보냈던 소년 시절이다.

나보코프가 펼쳐 보인 기억 속에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자유주의적인 기운과 가부장적인 흔적, 치명적인 가난과 대를 물려 받은 막대한 부를 가진 계층이 서서히 분열하고 충돌하며 무너지고 붕괴 하는 비극의 현장을 목도 하게 된다.

1914년 7월 사라예보에서 터져 나온 총탄의 비극은 3년 후 1917년 2월 러시아의 피의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 한지 단 몇 일 만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아버지 드미트리는 페테르부르크 임시 정부의 수장이 되지만 이듬해 10월에 발발한 피의 혁명으로 숙청의 칼날이 다가 오자 가족을 데리고 크리미아 반도로 이주 한다.

1918년 혁명군이 나보코프의 아버지에게 현상금을 걸고 추격하자 가족들은 우크라이나 르비우 지역으로 넘어가 지인 소유의 영지에 숨어 살게 된다.

혁명은 곧 끝이 날 것 이라 믿었던 나보코프의 아버지는 크리미아 반도의 법무부 장관 자리에 앉지만 1919년 황제가 이끄는 백군이 혁명군에 대패 하면서 나보코프 가족은 영원히 러시아 땅을 밟지 못한 채 유럽 전역을 떠도는 망명자가 된다.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시린이라는 필명으로 시인과 번역가로 활동 했던 나보코프는 1923년 부유한 유대계 러시아 출신의 베라를 만나 2년 후 결혼한다.

나보코프는 나치의 압박과 추적을 피해 다니며 번역과 작품 활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가 던 중 1937년 독일에서 프랑스로 건너가 <마법사>라는 책을 출간 하며 작품 활동을 펼친다.

1940년 독일 나치가 프랑스 땅을 점령 하자 나보코프는 아내 베라와 아들 드미트리와 함께 미국행 난민선에 겨우 탑승해서 탈출에 성공한다.

1940년 미국 맨해튼에 정착한 나보코프는 자연사 박물관 나비 보존실 자원봉사로 활동하면서 지난 시절에 틈틈이 쓰고 번역했던 원고 뭉치를 정리해 나가기 시작한다.













' 다행히도 러시아 문학에 대한 총 2천 페이지에 달하는 1백 개의 강의록을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웰즐리 대학과 코넬 대학에서 강의하며 보낸 20년 세월은 행복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1940년 5월 나보코프는 미국에 도착한 이후 부터 1941년 스탠퍼드 대학 여름 학기 첫 강의에서 이전 미국 대학 러시아 문학 부에서 어느 누구도 시도 한 적 없는 강의를 펼치기 시작한다.

1941년 웰즐리 대학 러시아어학과 가을 학기 부터 전임 교수로 부임한 나보코프는 러시아 언어와 문법을 가르치며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고찰'이라는 과목을 개설 했다.

1948년 부터 나보코프는 코넬 대학 슬라브학과 부교수로 재직 하면서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쓴 강의 노트를 들고 '유럽 산문의 거장들', '번역으로 읽는 러시아 문학' 과목을 가르치며 1950년대 미국 대학에 러시아 문학 열풍을 일으킨다.

강의와 번역, 저술을 병행 했던 나보코프는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문예지인 <뉴요커>에 틈틈이 단편과 에세이를 기고 하고 독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자 유럽에서 출판 했던 작품을 다듬어 영어로 작품을 발표 하기 시작한다.

1955년 어린 여성의 사랑을 갈구 하는 남자의 욕망을 그린 장편 소설 <롤리타>가 발표 되자 마자 영미권에 찬반 논란을 거세게 불러 일으켰고 이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해서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게 된다.

영화로 제작 되면서 막대한 저작권 수입을 받게 되어 경제적 여유가 생기자 나보코프는 대학 강의를 차츰 줄이고 집필과 나비 채집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보코프는 <말하라, 기억이여> 작품을 15년의 시간에 걸쳐 쓰는 동안 자신의 지나온 삶을 한 뭉치의 원고로 쏟아내기에 부족할 정도로 방대하면서도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동전 몇 닙을 넣을 정도의 작은 호주머니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활절 달걀에서 스며나오던 따스함과 불그스레함, 버섯을 따오는 어머니의 초록빛 감도는 갈색 모직 외투 위에 맺힌 물방울, 가정교사가 앉던 의자에 덧씌워진 천의 무늬까지 새겨 놓은 <말하라, 기억이여>는 독자들에게 형형색색의 감각을 일깨워 준다.


인생의 여정을 한 편의 소설처럼 살다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모든 것이 풍요롭고 풍족했던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을 지나 혁명과 망명으로 세상을 유랑하다 마지막 전망이 탁 트인 호텔 방에서 생을 마쳤다.

호텔 창 밖 너머 풍경을 바라 보며 오래 전 아내 베라와 함께 저 곳 어딘가를 거닐었던 나보코프를 떠 올려 본다.

길과 나무, 텅 빈 거리, 상점들 그리고 청명한 하늘 위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들..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보이지 않는 시간의 이어짐을 눈으로 바라 본다. 

무엇이든 빠르게 찾고 검색 할 수 있는 시대에  눈꺼풀을 깜빡일 때 마다 지나쳐 버린 수 많은 찰나의 시간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고 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것을 오랫동안 심사 숙고해서 완전히 몸과 마음에 익혀져야 비로소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일개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디지털화, 매개, 초연결, 감시, 알고리즘에 의한 통제가 점점 심각해지는 세상에서 오래도록 한 자리에 머물면서 꾸준히 무언가에 몰두 하는 사람들이 드물어졌다.

각자만의 내면 세계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을 견뎌내고 이따금씩 망상을 꿈꾸며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발견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

인간에게  이런 것들 조차  없다면 우리는 그저 생의 소중한 시간을 빅테크 기업에게 고스란히 갖다 받치는 노예일 뿐이다.

인류는 매 세기마다 과학 발전의 힘으로 하늘과 바다 땅 속 부터 우주까지 뻗어나가면서 무엇이든 더 빨리 더 많은 양을 생산하는 동안 생태계를 지탱 시켜 주고 있는 생명의 줄을 갉아 먹고 있다.

자는 동안 꿈을 꾸며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상상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영장류인 인간에게 모든 만물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 속에서 인간은 먹고 마시고 즐기고 활동하며 기억을 축적해 나가고 있고 그 축적된 기억은  세월이 흐를 수록 시간의 그늘에 서서히 잠식 되어 간다.

시간의 그늘은 사는 동안 어떤 틈새를 비집고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아쉬움, 갈망, 회환과 후회라는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렇게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 기억의 그늘은 인공지능의 기술로 끄집어 낸다 해도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인간이 창조한 활자의 아름다움과 비교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창작의 의미는 인간의 기억의 그늘에서 순간을 포착하는 데 있다.

나비 채집을 사랑했던 나보코프는 돌아 갈 수 없는 고국의 언어를 낯선 미국 땅에서 채집 하듯 기억 저편 속에 잠재 되어 있는 회상을 통해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 냈다.

“나는 문학 창작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 즉 평범한 대상을 미래 시간의 너그러운 거울에 비칠 모습으로 그리는 것, 아득히 먼 미래의 후손들만이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해줄 그 향기로운 유연함을 우리 주위의 대상 속에서 찾아내는 것. 아득히 먼 미래에는 지금 우리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이루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저절로 절묘하고 흥미진진한 것이 될 거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베를린 안내’ 중에서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활자보다 영상에 의존하는 이 시대에 말의 가치는 추락할대로 추락해 버렸고 뜻도 괴상한 문자 조합으로 서로 다른 성별과 세대를 조롱하는 시대에 문학은 영양제를 삼키듯 한 번에 섭취 하면 안된다.

한 장 한 장 음미 하며 작가가 새겨 놓은 활자의 지도를 따라 손으로 잘게 쪼개고 으깨고 빻아서 아삭아삭 씹어서 조각난 상태로 혀 속에서 굴려야 한다.

손바닥의 오목 하게 파인 가운데서 스마트 폰이 아닌 책을 올려 놓고 활자에서 풍겨 나오는 문학의 향을 음미 하는 동안 비로소 위대한 작가가 창조하는 최고의 등장 인물이 독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저런 전쟁터에서 우리 어린 아들(두 살에서 여섯 살 사이 어느 때든)과 함께 그 밑으로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리며 몇 시간이고 서 있던 다리들을 당신과 나는 그 기억을 영원히 지켜낼 것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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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목 박완서 아카이브 에디션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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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조선 미술전에서 유화 작품으로  첫 입선 한 박수근은 4년 뒤에 소묘 작품으로 두 번째 입선을 한다.

제 15회 선전 출품작 <일하는 여인>박수근,1936

당시 심사 위원 중 한 명이였던 일본인 다나베는 박수근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평가를 했다.

'데생 위에 엷은 색채를 칠해 놓고 인물의 특징을 잘 잡았다. 소묘 담채란 이런 것이다.'

일본인 심사 위원 다나베와 달리 한국 심사위원들은 박수근의 작품에 대해 저 마다  혹평을 날렸다.

-어설프게 서양 화풍을 따라 했는지 인물이 화면 중심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어서 안정감이 부족하다.

-흑, 백 색조의 뚜렷한 대비를 시도 했지만 질감이 거칠어서 일관된 색조톤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그리다가 멈춘 듯이 미완성 작품처럼 보인다.

-수채화도 아니고 수묵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급히 완성한 흔적이 보인다. 기본 데생의 기량이 부족해 보인다.

일본인 심사 위원 다나베는 한국인 심사위원들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판화와 사진의 질감을 연상 시키는 박수근의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기법에 후한 점수를 주고 수상작으로 입선 시키지만  한국인 심사위원들은 실력이 부족하다며 사적인 자리에서 화가에게 질책을 가했다.


한국 근대 미술사의 거장들인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화백들이 활동 하던 시기에 미술학도들은 궁핍하지 않은 비교적 넉넉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해서 가족들의 금전적 지원을 받아서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에서 서구 미술을 공부한 유학파들이였다.

따라서 이들이 조선으로 돌아 왔을 때 일본에서 배웠던 서양 기법을 마음껏 발휘 하기 위해 일본 제국 미술 협회 지원 아래서 독립전, 자유전에 작품을 출품하며 미술 시장에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일본 유학파 예술가들의 유일한 꿈은 총독부 주관의 관전에 입선 해서 세계 무대로 나가는 것으로 1930년대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 한 이들은 조선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였다.

유학파들과 달리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농업과 광산업에 종사 했던 부모의 3대 독자로 태어나 서당에서 글을 깨우쳐서 보통 학교에 입학했지만 광산업의 불황과 홍수 피해까지 입게 되면서 집안은 몰락해 버렸다.

교사들의 도움으로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박수근은 미술 학교는 커녕 상급학교 진학의 꿈조차 꾸기 힘들 정도로 가난했다.

그의 재능을 안타깝게 여겼던 미술 교사의 도움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전전하면서도 홀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은 18살 나이에 일본인 심사 위원의 추천으로 조선 미술전에 입선을 한다.

두 번째 역시 일본인 심사위원들의 만장 일치로 입선을 하게 되자 일본 유학을 갔다 온  화가들은 그의 다음번  출품작을 낙선 시켜 버린다.

제대로 된 화구도 없었고 외국산 제품에 귀한 색조 유화 물감은 만져 본 적도 없었던 박수근은 연필과 검은색 물감으로 절구질을 하고 맷돌을 돌리며 일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그렸다.

해방 전까지 박수근이 꾸준히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는 동안 한국인 심사위원들은 '너무 평범한 소재에 단조로운 색조톤에 기술적으로나 구상적으로 논할 바가 못된다.'며 혹평을 날렸지만 일본인들은 서구적 미술사조를 따르지 않고 향토색이 짙은 독특한 구조와 화풍, 거친 질감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그의 독창성이 후대에 가장 독보적인 화가가 될 것임을 예감 했다.

유학파들이 고향과 출신 나이대 별로 그룹전을 열고 서로의 작품을 구매 해주며 똘똘 뭉쳐서 작품 활동을 펼칠 때 박수근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작품을 출품했다.

값비싼 재료들로 덧칠한 유학파들 작품 속에서 박수근 작품은 도드라졌고 어김없이 일본인 심사위원들은 그의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어서 유학파들을 제쳐 버리게 만든다.

불행하게도 화가로서 기량을 막 펼쳐볼 시기에 해방을 맞이하고 6,25전쟁 발발로 피난 살이가 시작 되고 박수군이 군산 피난지 부둣가에서 가족들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할 때 유학파 예술가들은 통영과 부산, 진주 등지에서 서로의 작품 전시를 열며 부자들의 지갑을 열게 만든다.

 1953년  박수근은 미8군 CID(범죄수사대) 매점(PX) 초상화부에서  화가를 구한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로 올라간다.

1953년 서울 수복 후 재개된 국전에 박수근은 두 점의 작품을 출품한다.

이마를 간신히 덮을 정도로 짧게 머리를 자른 소녀가 등에 강보에 싼 갓난 아기를  업고 있다.

누이 또는 언니의 등에 얼굴을 묻은 잠든 아기를 업은 소녀는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아비나 어미를 기다리는지  옆 모습에서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전쟁과 피난, 가족과 친지의 죽음을 겪으며 배고픔을 견뎌 내며 살아 남은 한국인들에게 박수근의 그림은 외면하고 싶은 슬픔이였고 잊어 버리고 싶은 과거 였다.

하지만 미군 피엑스를 통해 박수근의 작품을 꾸준하게 구매 했던 미군 상사들의 부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그의 작품을 구입했고 한국에서 구하기 힘든 화구와 물감을 보내 주었다.

전쟁통에 뇌막염으로 큰 아들을 잃고 피난 살이 때 셋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난 아픔을 겪었던 박수근은  여색을 탐한 적 없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다정 다감한 사람이였고 길을 가다 노상을 하는 상인들을 만나면 갖고 있는 돈을 전부 털어서 좌판에 있는 것들을 구입했다.

박수근은 여타 다른 화가들 처럼 개인 화실도 없었고 재대로 된 화구를 갖춰 놓고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는 일평생 툇마루에서 그림을 그리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 오면 함께 숙제를 봐주었고 아내가 상을 차리면 함께 먹고 나서 가족들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멈췄던 그림 작업을 이어나갔다.

박수근이 살던 집이 마을 구역 계획으로 도로 공사 지역으로 지정되고 툇마루 땅 마저 잘려 나갔을 때 그는 아이들 방으로 들어가 아이들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잠든 후에야 그림을 그렸다.

박수근의 작품의 중심은 전부 평범한 우리 일상의 모습들이다.

 어린 누나가 갓난 쟁이 동생을 업고 있고, 이웃 아주머니들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아기를 업은 어머니가 걸음마를 하는 아이의 손을 잡고 고갯길을 걸어 가거나, 시장 좌판에서 물건을 놓고 파는 여인들까지 그의 모든 예술 속 주인공들은 모질고 고된 삶을 견뎌냈던 우리 어머니들이였다.

양말 조차 신지 않은 채 검정 고무신을 신은 여인이 힘껏 절구질을 하는 모습이 화강암처럼 단단한 삶의 의지로 표현 되었다.

1952년 새해 첫 달, 피난 살이 당시 두 아이를 잃은 박수근이  부둣가에서 받은 품삯으로 겨우 감자 한 자루를 구해 온다.

도마 위에 아무렇게나 늘어 놓은 감자 알들 사이에 기다란 칼이 놓여 있다. 피난 살이 중에 겨우 감자로 끼니를 때워야 했던 상황을 보여 준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올라온 박수근은  미군 상사의 아내들이 작품을 구입해 주어서 피난 중에서 먹어 본 적이 없었던 귀한 음식을 구해 온다.

1950년대 중서부 지역 중에서 부잣집들만 먹을 수 있었던 굴비가 박수근 집의 밥상에 올라가 있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불후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기를 보냈던 박수근은 동시대 부유한 지주와 대상인 집안의 유학파 출신들보다 불평등한 위치에서 출발했다.

박수근이 예술가의 삶을 살았던 시대는 193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로  파란만장한 삶의 파고 때문에 그의 건강은 1950년대 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간경화와 신장염이 악화 되어 백내장의 후유증을 겪었던 박수근은 예술가로 활짝 날개를 펴기 시작할 무렵에 한 쪽 눈을 실명한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박수근은 한 쪽 눈으로 고향땅 양구에서 행상을 나가는 어미의 손을 잡고 마을에서 가장 큰 나무 옆을 지나갔던  지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지막 붓을 든다.

1960년에 완성한 <귀로> 작품은 마치 세월의 흔적으로 낡고 헤진  흑백 사진을 연상 시키며   지나간 시간의 아련한 감정의 잔흔 처럼 거친 물감의 질감이 화폭에 새겨져 있다.

49세 되던 해 백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던 박수근은  51세 되던 해에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박수근이 떠난 1965년. 그 해 10월 유작전이 열리고 그의 작품 앞에 어느 중년 여인이 전시된 그의  작품들을 보고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던 1․4 후퇴 후 텅 빈 최전방 도시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않고, 화필도 놓지 않은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을 증언하고 싶었다.

-박완서의 <나목> 중에서 


 평생 여성과 나무를 즐겨 그렸던 박수근은  생계를 위해 아이를 위해 팔을 들어 올린 여인들의 따스함과 강인한 생명력을 산이 갖고 있지 않는 나무의 곧고 강직한 모습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했다.


나목(裸木) 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겨울 나무를 의미한다.



나무는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곧게 자라지 못한다. 그렇다고 수직으로 늘씬하게 쭉쭉 뻗은 나무 만이 치열한 경쟁의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 남지 못한다.

 굴절되고 절단된 가지, 바로 갈등과 궁핍의 상징이다.

모두가 굶주리고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 박수근은 아이들이 쓰다 버린 몽당 연필로 올곧게 성장하지 못한 채 잎사귀 하나 없이 처절할 정도로 앙상하게 가지만 남겨진 나무들만 그렸다.

어려움 속에서도 끝내 불멸의 작품들을 만들어낸 박수근이 그러 했고 그의 작품을 활자로 완성한 박완서 작가도 봄을 기다렸다.

2026년 매서운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 오고 사회 곳곳은 저마다 분열과 갈등으로 앞으로 저마다 각기 다른 목소리로 투쟁을 외치고 있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고민과 아픔 어려움을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살아 가고 있다.

겨울을 맞은 나무는 가지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곧 따스한 바람이 불고 태양의 길이가 길어지는  봄이 오면 새 잎이 돋고 새로운 꽃을 피우듯 2026년 봄을 기다린다.

내가 지난 날, 어두운 단칸방에서 본 한 밭 속의 고목,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웬일인지 그게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

그것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달랐다.

김장철 소스리 바람에 떠는 나목, 이제 막 마지막 낙엽을 끝낸 김장철 나목이기에 봄은 아직 멀건만 그의 수심엔 봄에의 향기가 애닮도록 절실하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박완서의 <나목> 중에서 

‘강변’(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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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에만 나오는 제철 음식과 제철 간식이 있듯이 2025년 한 해의 끝자락에 펼쳐 든 책이 있다.















‘세계 최초 시 서바이벌 오디션이 시작됐습니다./ 지금 바로 투표해주세요’ 상상은 뻗어 나간다. ‘“자 이번엔 금지어 미션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린 단어는 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습작생들은 탄식했다 심하게 좌절한 습작생의 경우 상담 치료를 신청하기도 했다…”
-고선경의 ‘스트릿 문학 파이터’. 중에서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서 이듬해 10월 첫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를 펴낸 고선경 시인은 지금까지 16쇄(3만부)를 찍어낸 문단의 아이돌이다.
등단 때부터 ‘시적 패기’가 돋보였던 고선경 시인은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되면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 막연한 생각을 품었었다.
현실이라는 냉정한 세상에서 시인은 많이 미끄러지고 실망하고 상처 받으며 앞을 향해 나아갔고 그렇게 끄적인 시들은 독자들에게 ‘힙한’(멋진) 것으로 소비하는 ‘텍스트힙’이 되어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서른 살을 앞둔 고선경 시인은 우울이나 침울한 감정은 거둬 내고 어떻게 해야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는 지를 궁리하며 독자들에게 한결같이 더 많이 사랑하고 사랑 받을 묘책을 꾸민다.

가슴 떨리게 설렜던, 손에 땀을 쥐도록 긴장하느라 자주 우스워졌던, 수도 없이 흔들리느라 내내 멀미를 느꼈던, 0.1을 뺀 나머지만큼 사랑했던 나의 이십대.

-고선경의 29.9세「나 여기 살아」중에서


난다의 ‘시의적절’ 시리즈의 2025년 한 해의 마지막 12월의 작가 고선경 시인은 스물아홉의 겨울날 겪는 두근거림과 불안, 아픔과 설렘을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시적인 패기로 펼쳐 보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무슨 일을 벌릴 것 만 같이 통통 튀다가 독자에게만 비밀스러운 쪽지를 슬쩍 보여 줄듯 말듯 밀당을 하기도 한다.

짝사랑을 하다 너덜 너덜해진 가슴을 부여 잡다가도 돌연 구체적인 사랑을 위한 계획을 세우며 아직 만나지 못한 상대를 향한 연서를 쓰기도 한다.

좋아하는 간식을 먹으며 사랑의 모양이 느껴지는 순간을 상상하는 시인의 엉뚱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기다가 청포도 맛 사탕을 입 속에 넣은 시인이 사람의 감정은 어떤 포장지나 사탕의 껍질로 감쌀 수 없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시인이 빚어낸 시어들을 읽는 동안 마치 서로 대화 하듯 시인이 따라 주는 콜라를 나눠 마시며 시인이 읽고 있는 시를 찾아 읽다 보면 어느 새 시인의 나이 29.9세에 다다라서 함께 손을 맞잡고 서른의 문턱을 향해 간다.

매일 쓰지 않더라도 매일 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은 독자에게 이런 비밀을 털어 놓는다.


네 미래의 시는 아마 너를 기대하고 있을 거야


시대를 막론하고 시는 대중들에게 잘 읽혀지지도 않고 잘 쓰이지도 않는다.

무엇이 시를 시이게끔 하는지, 시인조차 알 수 없는 시대에 시를 읽는다고 앞 날이 밝게 빛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두 눈을 번쩍이다 입가에 미소를 띄우게 된다.

오늘의 운세 따위를 믿는 건 아니지만

머릿속이 답답하니 주변을 정리하라길래 창문을 열고 쓸고 닦고 방 청소를 했다.

창밖은 건물뿐이지만

잘 보면 사다리꼴 모양의 하늘이 빼꼼 청명함을 드러냈다.

책상 서랍 속에는 찢어진 노트 한 장

뒤집어 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끝내주는 인생이 남아 있다"

그게 꼭 부적 같아서

바깥만 나가면 하늘이 드넓다는 걸 알게 되어서

바깥을 씩씩하게 걸었다.

하늘색이 행운의 색깔이라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다.

나도 부적 하나 써 줄게

만사 형통이나 만사대길 말고

남을 돕는 팔자를 가진 이의 이름 하나 적어 줄게

그러니까 이 시 꼭 사서 간직해

알았지?

-고선경 <신년 운세> 중에서


뒷통수를 후려 치고 싶은 일들 그리고 원통하고 후회하며 미련이 남은 일들로 가득 차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 되면 운이 트일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품고 신년 운세를 보러 가서 마뜩 잖은 점괘를 받았을지라도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자연 세계에서도 너무 멋지면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있지 않은가?

2025년 한 해 동안 많이 후회하고 많이 슬퍼했을 지라도 추운 겨울을 견뎌낸 나무에서 푸르른 잎사귀가 돋아나듯 온갖 세파와 풍파를 견뎌내는 동안 어느 순간엔 반짝 반짝 빛이 나는 날이 찾아 올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먹고사는 건 흔히 주어지지 않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매일이 벅차고 눈부신 건 아니다. 때로는 이 일이 나를 지치게도 하고 내가 이 일을 의심하게도 만든다. 하지만 이 일을 하는 한, 일의 어려움에 대한 불평은 함부로 입 밖에 내고 싶지 않다. 원래 사랑이란 언제나 경이로움과 피로감이 동반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여전히 이 일을 오래오래 사랑할 궁리를 하고 있다.

―고선경, 12월 16일 산문, 「29.9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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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5-12-31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새해에도 멋진 나뭇가지에 푸릇푸릇 풍성한 잎이 나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scott 2026-01-01 00:43   좋아요 1 | URL
망고님 병오년 붉은 말 처럼 힘찬 한해 되시길 바랍니다 ^^

2026-01-0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2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金慶子 2026-01-04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의 리뷰 잘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저는 ‘멍청해지기 전에 읽는 뇌 과학‘ 책을 읽고 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cott 2026-01-05 00:25   좋아요 0 | URL
金慶子님 새해 좋은일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감사합니다 ^^
 
더 어두운 걸 좋아하십니까 세트 - 전2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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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심가 건널목에 서 있을 때면 낯선 이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 '복이 많게 생기셨네요.', '곧 귀인이 찾아 오겠습니다.'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잘 안 풀리죠?"라며 다가와 사주 관상을 봐준다며 따라 붙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부딪칠 때면  가던 길을 가버리거나 무시하면 그만 이지만 마음의 근심 걱정이 가득 할 때나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상태 일 때 맞닥뜨리게 될 경우 피싱 문자에 걸려 들듯 ,무엇에 홀려 버린 듯 사주 관상을 봐주겠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그 낯선 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 맞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는 순간 그가 내 인생의 막힌 부분을 속 시원하게 해 줄 [앤서 맨]이 아닐 까라는 생각을 하며 지갑에서 지폐를 불쑥 꺼낸다.

여기,  한 청년이 자신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고민 하던 중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서 자신의 발로 직접  앤서 맨을 만나러 간 남자가 있다.

1937년 10월, 법과 대학원을 갓 졸업한 스물 다섯 살의 필 파커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에 전도 유망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게 결정 된 것들이 없었다.

 법학 대학원 졸업장만 달랑 쥔 필은 결혼과 취직 사이에 고민 하던 중   잠시 머리를 식히기 위해  부모님의 여름 별장이 있는 뉴햄프셔의 작은 마을에 찾아 간다.

차를 몰고 가던 필은 손 글씨로  “앤서 맨까지 3㎞.” 라는 팻말을 발견한다.

손 글씨로 쓰여진 이 팻말을 처음 보았을 때 필은 코웃음을 쳤지만 언덕을 넘어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두 번째 팻말에 ‘앤서 맨까지 1.5㎞’라는 것을 발견하자 잠시 머뭇거리다 운전대를 돌려 앤서 맨이  있다는 그 곳을 찾아 간다.

필은 파라솔 그늘 아래  흰색 셔츠에 회색 바지를 입고 검은색 신발을 신은 앤서 맨을 발견한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앤서 맨의 나이는 대략 50살 쯤 보였고   발치에 왕진 가방처럼 생긴 가방이 놓여 있었다.

대형 로펌의 중간 간부 같은 지적인 그의  분위기에 호기심이 발동한 필은  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 보기 위해 자리에 앉는다.

앤서맨에게 질문을 하려면 몇 가지 주의 사항이 있었다.

-5분 당 25달러

-처음 두 개는 무료.

- “앞으로의 행보”는 묻지 말 것.

접이식 캠핑용 의자에 앉은 필이 팻말에 적혀 있는 주의사항을 물어 보자 앤서맨은 이렇게 대답한다.

"똑똑해 보이는 청년이로군요. 자동차 안테나에 달린 페던트를 보니 대학 공부를 한 청년이에요. 그것도 무려 하버드를 '!

자신이 누구인지 단번에 꿰뚫어 보는 앤서 맨을 신뢰 하게 된 필은   단 5분 동안 25달러를 지불하는 것이 너무 비싸다고 푸념하자 앤서 맨은 필이 자신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알아 보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린다.

앤서 맨과 밀고 당기는 질문을 하던 필은 “당신의 답이 정답이라는 걸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죠?”라고 묻자 그는 “지금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라고 모호하게 대답해 버린다.

스물 다섯 살의 필이 앤서 맨에게 5분 동안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 여자 친구의 이름은 뭐죠?

-그녀가 청혼을 받아 줄까요?

-우리는 행복하게 살까요?

-우리 아버지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말해보세요.

-내 경력이 예상하는 것 만큼 승승장구 할까요?

-내 여자친구의 부모는 제 의견을 존중하게 될까요?

-전쟁이 벌어진다면 미국이 참전하나요?

-저도 참전하나요?

-부상을 당하나요?

-제가 전쟁터에서 전사하나요?

5분 동안 속사포 처럼 쏟아낸 필의 질문에 앤서 맨은 이름, 태어난 장소, 인간 관계, 앞으로 발생할 일을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앤서맨을 만나고 나서 필은 과연 사회 초년생에게 작지 않은 돈의 가치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을 품었지만 그의 인생의 방향은 뜻밖에도 앤서 맨이 예견한 대답처럼 흘러갔다.

약혼녀와 결혼을 하고 장인 장모에게도 인정을 받고 변호사 경력도 원하는 대로 승승장구 하다 미국이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앤서 맨이 대답한 대로   필은 지상군에 파견 된다.

치열한 교전 속에서도 필은  앤서 맨의 예견대로 전사 하지 않고 살아서 가족 품으로 돌아간다.

1937년 10월,  스물 다섯 살에  앤서 맨을 처음 만났던 필은 무사히 전장에서 돌아와 사랑하는 아내 사이에서 첫 아들이 태어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 무렵인  1951년 10월, 서른 아홉 살에 두 번째 앤서 맨을 찾아간다.

어느 덧 중년의 나이가 된 필과 달리 앤서 맨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함 없는 모습이였지만 처음 두 개는 무료에 5분에 25달러였던 가격이 3분에 50달러, 무료 질문은 한 개로 질문의 규칙이 바뀌어 있었다.

 과거 사회 초년생 시절과 달리 변호사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필은 단번에  50달러 지폐를  척 꺼내서 앤서 맨에게 질문을 던진다.

-제가 상원 의원에 출마하게 될까요?

-우리 아들은 프로야구 선수가 될까요?

-다른 종목은 요?

-대학 야구는 요?

-우리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죠?

두 번째 만난 앤서 맨은  스스로 규칙을  깨 버리고 갑자기 필에게  3분에 200달러로 훌쩍 비용을 올리더니  아들에 관한 질문이 이어지자 대답을 멈춰 버리고 자리를 떠난다.

두 번째 앤서 맨을 만나고 나서 부터 필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가장 소중하고 사랑했던 아들과 아내를  잃고 나서 필은 자신의 삶에 찾아 온 불행을 원망하고 저주 하지만 잃어 버리고 사라지고 떠나 버린 것들은 두 번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우울과 분노에 사로 잡혀 살던 필의 인생에  승소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의뢰인이 방문하면서 그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인생의 한 축이 무너지고 나서 찾아 온 행운을 덥석 쥐게 된 필은 가족의 상실과 아픔을 잊어 버리고 일에 몰두 하고 마침내 인생의 황혼기에 다다라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장학 재단을 세우며 자신이 이룬 성공과 부를 지역 사회에 환원 하는 나날을 보낸다.

주변의 지인들이 차례 차례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가족으로 곁을 지켰던 반려견을 땅에 뭍은 필은 1995년 10월, 마지막 세 번째 앤서 맨을 찾아간다.

세 번째 만나게 된  앤서 맨은 뜻밖에도 필에게 무료 이벤트라며  시간 제한이 없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늙고 병든 필은 앞으로 남겨진 자신의 삶에 대한 궁금증도 사라져서  딱히 앤서 맨에게  물어 보고 싶은 질문이 없었다.

 필은 시간 제한도 없고 무료이니 생각 나는 대로 앤서 맨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 하나요?

-우리가 가는 곳은 천국인가요? 지옥인가요? 환생 인가요?

-우리는 야전히 우리로 남을까요?

-과거를 기억할까요?

-나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게 될까요?

-좋을까요? 끔찍할까요?

-거기서 꿈도 꾸나요?

-거기서 슬픔이나 기쁨이나 다른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앤서 맨은 필의 모든 질문에 '네'라고 답했다.

맨 처음 필이 앤서맨을 만났을 때 그가 사기꾼인지 알아보기 위해  “당신의 답이 정답이라는 걸 내가 무슨 수로 알 수 있죠?”라고 물으니 앤서 맨이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필이 살아 온 인생의 추이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신이 그의 인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조종하듯이  앤서 맨의 대답대로 흘러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만일 필이 그 날 앤서 맨의 손 글씨 팻말을 지나쳐 버렸다면 그의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을까?

첫 번째 필이  앤서 맨을 만났을 때  하버드 법학 대학원을 졸업한 자신을 의심하자 그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이 일을 한 지 워낙 오래됐으니 도움이 안 되는 질문을 하는 똑똑한 사람들을 겪을 대로 겪어 봤는데도 여전히 놀랍네요. 다들 너무 흐리멍덩해요. 너무 게을러요. 똑똑한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찾으려는 답이 뭔지 정말 알고 있을까 싶을 때가 많아요. 그냥 자부심이라는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니며 틀릴때가 많은 추측을 남발하는 건 아닌지. 나로서는 그들이 그렇게 무능한 질문을 하는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네요.

-스티븐 킹의 <앤서 맨 > 중에서 

누구나 살아가면서 한 번 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면 누군가 내게 인생의 정답을 알려주면 훨씬 더 멋지고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대신 아파 줄 수 없듯이 살아가는 동안 부딪치는 숱한 것에 대한 정답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는 순간 생-노-병-사라는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인간이  태어나 성장하는 동안 부딪치게 되는 숱한 고난과 고비, 불운과 행운의 순간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 지에 따라  인생의 결이 달라 질 뿐 앤서 맨에게 앞날의 일을 물어 본다 해도 생-노-병-사라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 살 수 없다.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이 승승장구 하길 바라지만 이 세상은 무엇 하나 누군가의 의지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길을 돌아서 갈 지라도 벽을 넘지 못하면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듯이 사는 동안 겪게 되는 고난과 고통, 실패와 좌절의 과정 없이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과정과 인내의 시간의 길이가 각자 다를 뿐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건 앤서 맨이나 점술가. 인공지능도 아닌 자기 자신 뿐이다.

어떤 선택으로 인생의 방향이 의도 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버릴 때도 있지만 어제와 오늘이 쌓여서 앞으로 내달리는 동안 불운과 고난, 역경을 스스로 극복 해 나가야 한다.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 있지만  그 선택이 나와 우리를 만들며 그 선택으로 인해  문화가 되고 역사가 된다. 

 지금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시대, 혼돈의 시대에 서 있다.

2026년 병오년(丙午年) 새해를 앞두고 병오년 1년 운세를 ‘예측’하는 역술인들의 글과 영상들이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다.

“앞으로의 행보”는 묻지 말아야 한다는 앤서 맨의 규칙이 없는 인공지능은 과연  2026년 새해 재물운·애정운·승진운·사업운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질문을 던진  자기 자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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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힐 2025-12-30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겁니다˝ 라는 앤서 맨의 답은 scott 님 말씀처럼 우리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데 동의 합니다.
현재를 살면서 항상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니까 지금은 여전히 모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미래는 예측이 아니라 현재가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요.
미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결과는 늘 현재죠.
어쩌면 시간은 과거-현재-미래가 아니라 과거- 미래- 현재일 수도... ^^
scott 님, 얼마 안 남은 2025년 마무리 잘 하시고, 병오년 새해엔 항상 좋은 일만 생길 꺼예요. ㅎㅎ

2025-12-31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합동 제국이 되기 전 헝가리는  크로아티아 왕국과 트란실바니아공국까지 지배 하면서 중부 유럽에서 강력한 왕국으로 군림 하고 있었다.

헝가리의 강한 통치력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패막이가 되어서  루마니아의 중심부가 되는 왈라키아-몰다비아공국과 보스니아, 루멜리아, 실리스트르 지역(이 지방은 1차 대전 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세르비아,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불가리아가 되었다)을   통치했던 오스만 제국이 유럽 중심으로 진격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은 중세시대 부터 존재 했던  불가리아왕국, 세르비아왕국, 보스니아 왕국의 땅을 차지 하면서 거친 산악 지대 위에 세워진 몬테네그로 까지 통치 하고 있었지만 이들 왕국에 대해 강한 통치를 하지 않고 세금만 거둬 들였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왕국인 헝가리와의 전쟁에 용병으로 나선 이들에게는 토지권을 주는  유화 정책을 펼쳤다.

자잘하게 쪼개져 있는 남부 유럽 국가의 자원 용병에 힘을 얻은 오스만제국은 1526년부터 1680년대까지 중부 헝가리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고, 여기를 발판으로 북쪽의 합스부르크 영토를 침입했지만 성벽에 둘러 싸인 요새 도시 빈을 함락하는데 실패 한다.

서유럽 정복 전쟁에서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몬테네그로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 군대의 제복을 입고 싸웠지만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대한 존경심이나 제국을 향한 애국심은 눈곱 만치도 없었고 이슬람으로 종교를 개종한 이들은 단 한 명도 존재 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만 군대에서 받은 돈을 받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예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이 지역의 통합성의 뿌리는 서유럽의 종교나 민족성에 영향을 받아도 근본적인 민족과 종교를 바꾸지 못했다.

여러 세기에 걸쳐 로마 시대를 제외 하고  단 한 번도 통합된 적이 없었고 1000년 경에 도래한 기독교는 라틴 기독교와 그리스 기독교 두 형태로 나눠져서 민족의 토속 신앙과 결합한 독특한 종교로 발전 되었다.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동유럽은 서유럽의 문화나 종교에 뒤섞이지 않은  변방 지역의  미지의 땅으로  오랜 전쟁으로 인구 이동의 물결이 일어나서 한 집안에 기독교와 정교회 교인, 유대교, 무슬림교가 뒤섞여 있는 다종교 사회 구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1880년 유럽 중동부 지역에는  네 개의 국가만 존재 했다.

 러시아제국, 오스만제국, 프로이센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 네 개의 국가들 영토 내에서 과거의 정치적 경계를 나눠보면  북쪽에는 1795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분할로 소멸된 폴란드-리투아니아연합왕국이 있었다.

 남쪽에는 1526년부터 합스부르크 왕가 소유가 된 헝가리 왕국과 보헤미아왕국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남부 유럽 지역의 사람들의 운명을  완전히 통제 했던 국가는 없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합동 제국으로 거대한 영토를 차지 하면서 지난 세기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던 보스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가 행정 자치 구역이 되어 간접 통치를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제국이 남부 유럽 지역을 하나로 통합 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하는 사이에 경제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낙후된 남부 유럽 지역에 주변국 종교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했고 종교와 메시아 전통에 익숙했던 시민들은 종교적 믿음을 통해 세속적인 해방을 갈망 했다.

남부 유럽의 혁명가들이 시민들에게  제국들 보다  가난하고 낙후된 경제 상황을 위협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며  독립을 향한 투쟁 만이 부유하게 살길 이라며 선동을 하는 동안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지하철을 타고 움직였고 집집마다 정제된 깨끗한 수도물이 쏟아지는 수도관이 설치 되었고 거리마다 환한 조명등이 켜졌다.

제국이 밝힌 조명등은 멀리 떨어진 통치 지역인 르비우의 집집마다 등유 램프가 설치 되었고 루마니아 땅은 전기로 불을 밝히는 유럽의 첫 국가가 되었다.

철로가 유럽 대륙을 종횡 무진 달리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된 곡물이 유럽 전역으로 팔려 나갔고 리투아니아의 삼림지대에서 벌목된 목재가 바다 건너 영국의 건설 붐을 일으키게 된다.

목재업으로 곡물업으로 벼락 부자가 된 이들이 남부 유럽 지역에 등장 하면서 금융 시장에 대 호황이 이어지는 동안  남부 유럽의 혁명가들은 시민들에게  제국들 보다  가난하고 낙후된 경제 상황을 위협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며  독립을 향한 투쟁 만이 부유하게 살길 이라며 선동하며  민족들 사이를 이간질 하며 분열 시켰다.

민족의 분열은 테러범을 양성해서  이들이 저지르는 살인은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대의로 둔갑했다.

20세기  유럽이 눈부신  과학발전과 기술 혁명으로  빈과 부다페스트에 일급 호텔과 경마장, 무도회장 ,카지노들이 들어서는 동안 남부 유럽에  온갖 종교인들과 사상가들 혁명가들이 몰려 들었다.

 그 결과 파시즘과 공산주의, 민족주의가 움트는 토양이 되어 폭력적인 방법으로 평화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거대한 제국에 맞서는 테러범들을 양성 했다.

다인종, 다종교의 조각보처럼 꿰 맞춰진 이 지역은 20세기에 불어 닥친 변혁의 폭풍으로 인해 가장 밑바닥부터 파괴 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이념에 사로잡힌 이들이 모이자 강력한 집단 정체성이 종교보다 더 강한 민족주의를 일으키며  제국의 운명을 뒤 흔들었다.

만일 타임 머신을 타고 1914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게 된다면 중앙역에서 출발하는 전차에 올라타서 1번지부터 19번지를 지나는 정거장 마다 역사적인 인물들이 살고 있는 곳을 지나칠 수 있다. 

가장 먼저 제국의 최고위 공무원이자 통치자인  황제 요제프의 집무실이 있는 호프부르크 궁을  시작으로 베르크가세에 있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 집에 도착한 후 길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면 20세기 세계 대전 발발에 큰 기여를 한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이 격론을 벌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카페를 나와 거리를 걷다가 서부역으로 향하는 전차에 올라타면 그루지아 출신의 농노 스탈린이 은신하고 있는 주택지구를 지나 레온 브론슈타인이라는 가명으로 러시아 사회주의 신문을 발행하고 있는 레프 트로츠키가 살고 있는 부촌 지역인 슐로스스트라세에 다다르면 황족들과 황실 가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쇤부룬 지구까지  탐방 할 수 있다.

쇤부룬 지구에는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출신 청년의 총에 맞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세계 1차 대전 발발의 불씨를 터지게 만든  합스부르크 제국의 2인자 황태자 페르디난트의 집무실이 있는 벨베데레 궁을 지나 거대한 궁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공원을 가로 질러 가면 군대에 징집 되지 않으려고 친척집 지하에 은신하고 있는 스물 넷의 화가 지망생 아돌프 히틀러를 만날 수 있다.

1900년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과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 20세기는 심리학의 세기 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의학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심리를 정밀하게 측정한 작업을 시도 하며 여러 임상 실험을 통해  인간의 사고와 행동 발달의 추이를 심리학적으로 치료하면서 인간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통해 지각과 감각, 주의력, 기억, 의사 결정을 포괄적인 연구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데이터를 구축해 나갔다.

20세기 세계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던 세기의 인물들을 일렬로 늘어 놓고 그들이 남긴 흔적과 유산을 하나의 선으로 이어 보면 놀랍도록 21세기 현재 시대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00년전의  유럽은  어제 마차에 탔던 이들이 오늘은 전차를 타고 출근 했고 휴가 때는 기차를 타고 다른 도시를 여행했고 전화선이 연결 되어 밖을 나가지 않고도 편지를 주고 받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를 듣고 연락 할 수 있었다.

중부 유럽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헝가리는 유럽에서 가장 드넓은 영토를 차지 하고 있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에 여러 차례 맞서 혁명과 봉기를 일으켰지만 전장터의 수장들이 차례 차례 참수형을 당하고 나서 굴욕적인 타협 끝에  제국의 형제가 되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잠재적 봉기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 보다 먼저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지하철을 개통 시켰고 독일에 맞먹을 정도로 열차선을 건설할 수 있게 했다.

헝가리의 산업 혁명을 주도 했던 지식인들과 엘리트 가문들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의과 대학과 건축 대학을 설립해서 도시의 산업화를 앞당겼다.

1890년대부터  부다페스트에는 환자 긴급구호차가 출동했고 소방차도 프랑스, 독일 보다 앞선 시스템을 도입하고 운행 하며 도시의 안전을 책임졌다.

1900년대부터 수도에 전화 케이블 선이 깔렸고 도나우 강물은 전 지역에 깔린 수도 공급용 파이프를 타고 흘러 들어갔고 배관으로 공급하는 가스로 시민들은 집에서 손쉽게 요리 할 수 있게 되었다.

도로가 정비 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생생 달리는 자동차가 운행 되고 전차선이 들어서고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전보와 우편을 받아 보고, 전화로 소식을 전달할 수 있게 된 시대는 스마트 폰 하나로 연결 된 지금의 시대 만큼 매일 매일 놀라움으로 가득 찬 기대감으로 넘쳤다.

하루 아침에 말이 모는 마차에서 디젤 엔진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타고 등유가 아닌 전기 불로 어둠을 밝히며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었던 20세기는 눈부신 기술 과학 혁명의 시대였다.

하지만 인공 지능과 함께 공존하고 있는 현 시대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 유럽 대륙에 가본다면 가장 먼저 낯선 언어와 방언에 의사 소통에 불편함을 겪게 될 것이고 지금과 판이하게 다른 지정학적 질서와 사회 제도와 규범에 놀라게 될 것이고 현재와 너무나도 차이가 큰 기술과 의학 수준에  큰 충격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환경 적응에 탁월한 인간은 어느 시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

그 이유는 문명의 발달과 눈부신 과학 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원초적 욕구인 식욕과 성욕 그리고 탐욕은 어느 시대에 어떤 세대 모두의 DNA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역시  탐욕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과거의 인물들이 그랬듯이 국가와 사회, 개개인의  리스크에 영향을 받아,시기심에 휩싸이며 사소한 분쟁이 지역과 민족, 인종갈등으로 번져서 국가간의 무력 충돌이 빈번했다.

현 시대와 전혀 다른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었던 유럽 대륙에서 21세기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신 인류의 눈에 집단 소속감을 중시하는  20세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고 그들의 지나친 자신감과 근시안적 태도 역시 현재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수구 시설이나 공공 시설 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에 살았던 최하층민들도 탄압과 박해를 피해 살아 남기 위해 제국의 난민 생활을 했던 떠돌이 이민자들 모두 단 하나의 인생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래의 희망을 품고 굶지 않고 끼니를 채울 수 있는 일상의  행복이여서 불확실한 현실에서 내일을 위해 살아갔다.

타임머신을 타고 20세기 세상을 둘러 보면 지금과는 모든 것이 다른 낯선 세상임에도,  그들의 사는 모습을 지켜본 뒤 입에서 절로 이런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똑같네, 똑같아. 지금과 전혀 변한 게 없구나.”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에서 독자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가?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독자들에게 던진 위의 질문은 유럽이 전쟁으로 어제의 세계가 무너지기 직전이나 직후 그리고 21세기 현 시대까지 관통하는 세기의 질문이다.

 사람이 살아 가려면 최소한 것들 인간 답게 살 수 있는 환경과 이를 뒷받침 해줄 탄탄한 법과 사회 제도와 질서가 필요 하다. 하지만 살아 가는 동안 여전히 뜻하는데로 가질 수 없는데도 무리 할 정도로 소유 하고  더 소유 하기 위해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의 굴레에 갇혀 버린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900년 심리학으로 20세기로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나서 세계 곳곳에서 한 목소리로 외친 것은  변화였다.

변화는 우리의 주의와 호기심을 끌어당긴다. 새롭고 놀랍고 흥미롭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인민의 삶과 정신을 지배 하고자 했던 레닌과 그의 동지들인 트로이츠키, 스탈린 모두 세상을 전복 시켜서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데 앞장 섰다.

레닌이 창당한 당에 가입하고 그가 인민을 향해 외친 선언문에 깊은 감동을 받아 기존의 사회 질서를 전복 시키는데 동조 하고 협력했던 세대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불러 일으킬 파장이 전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동안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한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접촉이나 별생각 없이 무심코 내린 결정 때문에 일어났다.

그 결정은 때로는 경이로운 결과를 낳기도 하고, 끔직한 비극을 불러오기도 했다. 


2024년 2월 1일 부터 연재 하고 있는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의 역사적 배경은 60여 년 동안 제국의 황제로 군림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통치 하던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다.

-굿바이, 부다페스트

https://tobe.aladin.co.kr/s/9373

역사적 사실과 실존 인물 그리고 내가 창작한 허구의 인물이 뒤섞여 있다.

공통의 언어나 종교, 역사가 없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하나의  국가라기 보다 필요한 곳에 적정하게  설치된 미니어쳐 같은 거대한 허상의 국가로 황제의 명을 받아 움직이며 똑같은 멜로디를 들려주는 오르골 같은 국가 였다.

19세기 말 부터 시작된 민족주의의 열풍이 20세기에 들어서서 계급의 차별과 부의 불균형으로 인해 붕괴 직전의 위기에 처한다.

제국의 제 1공무원 자리를 60여년의 세월이 넘도록 지키고 있던 황제 요제프 1세는 자신의 임무는 헌신적으로 지치지 않게 성실하게 수행 하는 것이라 믿었다.

반면에  제 2 공무원 자리에 있었던 제국의 후계자인 황태자 페르디난트는 낡고 오래된 제국의 관행과 관습을 전부 뜯어 고치고 싶었다.

이중 제국의 지위에 있었던 헝가리는 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최악의 규율 준수자이자 강요자로 이루말 할 수 없이 멍청했다.'

몇 세기 동안 군림했던 제국이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지 않는다.

 변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 할 때 국가의 최고 권력자들이 어떤 통치력으로 국가를 이끌고 가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한 순간에 바뀌어 버린다.

20세기에 불어 닥친 변혁의 폭풍은 오랜 시간 유지되어 왔던 제국의 표층을 서서히 침식 시키고 파괴했다.

역사의 한 순간도 단 하나의 사건 때문에 발발 한 것이 아니라 앞서 발생했던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이 점과 점으로 이어져서 여기 저기 실타래처럼 엉켜진 것이 특정한 시기에 분출 되고 발발하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아름다운 시절을 회고했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런 글을 남겼다.








1910년 부터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거의 똑같은 정도로 느낄 수 있었던 갑작스러운 융성이 시작 되었다. 도시는 해를 거듭할수록 한층 더 아름다워졌고 인구도 증가해 갔다. 1914년의 부다페스트는 1900년에 살고 있었던 그곳이 아니였다. 일국의 수도에서 세계적인 도시로 변모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 파리, 베를린, 암스테르담에 부호들이 부다페스트로 몰려와 저마다 화려한 저택과 호텔에 둥지를 틀었다. 거리는 화려한 가게들로 즐비했고 웅장한 건물마다 멋지게 차려 입은 이들이 드나들었고 매일  도서관, 극장, 박물관에서 지식을 쌓고 여가를 즐겼다. 이전에는 소수의 상류층만 누렸던 특권이 일반인들도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노동 시간이 단축되어 여행도 즐기며 한 채의 집과 그림, 자동차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든 일에서 부의 증대와 파급을 느꼈고 점점 더 새로움을 추구 하며 우리 앞에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 확신했다. 젊은 세대, 늙은 세대들 모두 흔히 그랬던 것처럼 '옛날에는 참 좋았지.'라며 어제의 시간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슈테판 츠바이크

 1914년 세대는 지금의 세대보다 더 행복했을까?

평생 동안 진리를 추구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진리의 한계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20세기 천재 중 한 명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00퍼센트 알콜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100퍼센트 진리도 없고 100퍼센트 행복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

1차 대전의 화마가 발발하기 직전  1914년 세상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며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지상의 새로움이 건설되고 창조 되었던 시대였다.

역사를 보면 세상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곳인지 깨닫게 된다.

 20세기 최악의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의 그 시절의 세상을 지난 2년 동안  <굿바이, 부다페스트>에 100회에 걸쳐 펼쳐 보였다. 

글을 쓸 때 마다 매번 한계에 부딪친다. 특히 누군가에게 읽혀지는 글을 쓴다는 건 단순히[ 나는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갔다. 지하철 역까지 걸어갔다]. 라는 문장 만으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 되지 않는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하루를 마감하는 날에 다음날에 해야 할 목록의 우선 순위를 세워 놓을 때면  제 1순위에 <창작>을 적었다.

그렇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창작>  안에는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여행을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든 어떤 식으로든  내 스스로 무언가 만들고 창조 하는 작업을 의미 했다. 

따라서 내 삶의 버킷 리스트의 1위 자리에 항상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창작>이다.

투비에 소설을 쓰고 연재 하는 동안 하루의 시간을 배분하며 일의 우선 순위에 맞춘 생활 습관을 바꾸게 되었다. 

가장 먼저 독서의 양과 범위를 이전 보다 더 폭 넓혀졌다.

창작 소설을 집필하기 이전과 이후로 독서의 양과 종류를 비교 해 보면 나의 독서량은 살아온 생애 주기 중에 현재 최정점을 찍고 있다.

글을 쓰면서 책을 읽게 되자,  단순히 읽기 위한 독서가 아니라 쓰기 위한 독서가 되었다.

러시아의 망명객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던 블라디미르 나보코브가 매번 새 작품의 원고를 담당 편집자에게 넘겨 줄 때 마다 들었던 소리는 바로 '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쓸 수 있는 원고 분량이 정해져 있다.'라는 말이였다.  

특정 직업이나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하루에 우리가 내뱉고 사용하는 언어의 양은 정해져 있다. 문자와 톡 메시지가 아닌 한 페이지 이상을 오로지 문장으로 가득 채운다는 건 그리 쉽지 않다.

 200여페이지의 단행본 분량을 채우는 글자 수는 대략 150,000자 정도로 이 숫자를 쌀로 환산 하면 27가마니 정도 분량이다.

“소설을 쓰는 데는 세 가지 원칙이 있으나 불행하게도 그 원칙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윌리엄 서머싯 몸의 말처럼, 글쓰기는 운동과 악기를 배우고 일련의 전문 기술을 배우는 것과 달리  정해진 원칙도 기술을 갈고 닦을 교재도 없다.

 2024년 2월 1일 부터 쓰기 시작한 창작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가 100회 완결을 목표로 지난  2년 동안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에 한 회 씩 투비컨티뉴드에 올려서 2025년 12월 25일 마침내 100회 완결에 다다랐다.

지난 2년 동안  창작 소설 <굿바이, 부다페스트>를 쓰기 위해 내 안의 지식과 창조적 감각을 일깨우기 위해 읽은 책은 영하의 추위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책 탑을 쌓아 올릴 수 있다.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져 보면 

-내 안에 무엇이 있는가?

-나에게 무엇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2025년의 시간도 딱 5일 남겨 두고 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무언가 이룩하고 창조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의 끝은 단 하나다. 

결국엔 우리 모두 죽는다. 사랑하는 이들, 미워 하는 이들 모두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것이고 이 땅의 행성도 엔트로피가 최대가 되는 열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우주 속 먼지가루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이 모든 것이 사라져서 텅 빈 공 空의 상태가 될 것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요란을 떨 정도로 열심히 오만하게 살았던 생명체들 모두 무無로 존재 하지 않은 상태, 모두가 0의 지점에서 끝이 난다. 이런 진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듯, 끝이 죽음이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바쁘게 하루 하루 일분 일초를 낭비하지 않고 살아도 텅 빈 공 空의 상태는 채워지지도 않고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이 텅 빈 공 空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순간 허무와 우울 그리고 모든 것이 헛되어 보이고 커다란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이런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살아 온 모습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기도 하고 무언가에 몰두하고 열의를 쏟아 부으며 견디고 극복한다.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될까?

 언제 비로소 이 세상에 어른 같은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어떤 권력이나 위세를 행세 하지 못하는 미약한 어른으로 하루 하루 성실하게 일해서 꼬박 꼬박 세금이 털려나가는 유리 지갑을 갖고 있다. 

만일 권력을 갖고 있다면 한번 쯤 위세나 가식을 떨며 모순투성이의 나라는 결점을 세상에 숨기게 될지 모른다.

 나에게 세상을 향한 권력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새로운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내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끊임없이 읽고 쓰고 있다.

어쩌면 책을 읽는 시간은 가장 헛된 시간일지 모르고 삶에 그리 큰 교훈이나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 생을 단 한 단어로 줄이면 [이야기] 즉,서로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살아 온 세월은 이야기의 연속이고 인생 자체가 이야기 보따리다. 

따라서 책을 읽는 동안 허구의 인물들의 시선으로 두 번의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2025년 한 해 동안 모두가 어렵고 힘겨운 시기를 무사히 견뎌 내고 12월 25일 행복한 성탄절을 맞이하는 오늘 무명의 작가가 2년 동안 써온 기나긴 대 장편 <굿바이, 부다페스트>이  오늘 마지막 100회가 시작된다.

해피 메리 크리스마스 ‪꙳⋆🎅🏻 ࣪⊹ 𝙼𝚎𝚛𝚛𝚢 𝚇𝚖𝚊𝚜  ·🌲


-굿바이, 부다페스트 100회.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완결)

https://tobe.aladin.co.kr/n/54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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