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돌아가다 -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리고 어머니에 관하여
필립 케니콧 지음, 정영목 옮김 / 위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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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연말, 아이슬란드의 피아니스트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골드베르크 협주곡 리사이틀을 직관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바흐를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내가 피아노를 결정적으로 그만두게 된 계기가 '바흐인벤션'이기 때문에 바흐를 원망하는 면이 있지만, 그의 음악을 들으면 설명하기 힘든 치유력을 느끼기에 그 점은 내가 또 바흐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골드베르크 협주곡은 이미 굴드의 해석으로 여러 번 들었지만 제대로 그 음악을 알고 있다기엔 부족한 채로 인터미션 없는 한 시간 삼십분 가량의 연주를 들었다. 큰 기대도 정보도 없이 들어 그런지 중간은 약간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피아니스트가 이 다성부의 정교한 음악을 어떻게 해석하고 해체하고 재조립하여 자신만의 그것으로 재정의했는지 그 지난한 노력의 과정이 여실히 그대로 전해져 올 정도로 압도적인 연주였다. 귀에 익은 아리아에서 다시 아리아로 돌아오는 과정, 그 중간 휴지기 관객석의 엄청난 침묵은 그 감동에 모두가 동참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리 모두 이제 출발한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공명했다. 그건 마치 인생의 은유 같았다. 우리는 출발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그건 처음과 같은 끝의 반복이 아니다. 그 엄청난 여정의 끝에 우리는 변화한 모습으로 안착한다. 그리고 그건 비극적인 종점, 죽음과도 맞닿아 있다.


이 책을 그 연주 전에 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무척 아쉽게 만들 만큼 정말 압도적으로 좋은 책이었다. <피아노로 돌아가다>는 퓰리처상을 수상한 저자 필립 케이콧이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 자신이 직접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피아노로 연습하며 어머니의 애도 과정, 중년의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이야기다. 이렇게 이 책을 요약한다면 이 책의 반의 반도 제대로 소개하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런 책은 지금도 수십 권이 매해 나온다. 부모의 죽음의 애도 과정에 얽힌 나의 유년, 나의 지금에 대한 사적 고백. 그런 사적인 이야기들은 피곤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다르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핵심은 부모와의 작별이 아니다. 그보다는 저자가 왜 갑자기 오십이 넘어 다시 바흐의 골드베르크로 하필 돌아와 그것을 피아노로 연습하는데 골몰하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내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느가,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이 여정은 그것을 읽는 이들 모두를 끌어들이고 기꺼이 공명하게 한다. 심지어 음악에 관심이 없어도, 골드베르크를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한번 이 바흐의 역작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걸 들으면 내가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이 좀 잠재워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그의 어머니는 특이하다. 모성애가 풍부하거나 한없는 그리움을 일으키는 그런 전형적 어머니상이 아니다. 통제적이고 변덕이 심하고 자신이 어머니인 것을 싫어했다. 겉으로 보이면 모두 잘 자란 네 자녀의 어머니였고, 경제적 빈곤을 경험한 적도 없는 이 여인은 내도록 불행했고 또 불행한 채로 죽는다. 자신이 그만둬버린 바이올린 대신 저자인 아들의 피아노 레슨에 열성이었던 그녀는 생애 내내 아이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어머니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했는지, 자신이 지금 얼마나 불행한지를 강론한다. 이런 어머니의 강압적이고 때로는 폭력적인 양육으로 고통 받았던 저자는 다행히 진정한 스승 조를 만난다. 그가 어린 시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는 이 사십년 전 스승이 유일하다. 조가 다른 교사들과 달랐던 점은 제자가 스스로가 되어 나아갈 자유를 줬기 때문이다. 


너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라. 할 일을 해라. 자유롭게 앞으로 나아가 너 자신이 되어라.

-pp.261


이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주는 제언이기도 하다. 저자의 기획은 어머니의 상실에 대한 애도이자 삶을 재발견하고 죽음을 재정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무의미한 종지를 향해 줄달음치는 우리의 인생이 허무해보이리지라도 결국 움직여 전진해야 함을 몸으로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말마따나 중년에 바흐의 골드베르크를 다시 제대로 친다고 해도 그게 과연 무슨 거대한 의미를 창출하겠는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고 삶의 커다란 비의를 각성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자신이 될 자유를 다시 재확인하며 우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미친 기획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 허무하고 겸손한 결론은 그것을 넘어서는 울림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완성하기 위해 그토록 노력하는 일 그 자체가 삶이라는 것. 그 도돌이표 앞에서 다시 바흐로 돌아오는 저자의 여정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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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1-02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저도 바흐 너무 재미없어서 피아노칠때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ㅋㅋㅋㅋ그래서 지금도 싫어요ㅜㅜ근데 이 책은 읽고싶어요^^

blanca 2024-01-02 19:35   좋아요 1 | URL
저는 바흐를 치면서 난 안되는구나, 이만 접자, 필이 딱 왔어요. ㅋㅋ 피아니스트들 보니 왼손 타건 힘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평범한 저 같은 사람과의 경계가 딱 드러나는 게 왼손의 힘인 것 같아요. 바흐인벤션 집어 던지고 제 피아노 교습은 끝났던 기억이 나네요. ^^ 아, 이 책 완전 강추드립니다.

hnine 2024-01-02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바흐를 재미있어 하며 친 기억 가지고 있는 사람 있을까요? 바흐 인벤션에 이어 3성, 4성, 조곡...
어른이 되어서도 잘 모르겠더니, 바흐 음악은 다른 작곡가의 음악과 다른 차원에서 사람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 느낀 날이 있었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어요.

blanca 2024-01-02 19:36   좋아요 0 | URL
아, 이 작가가 정확히 그 지점을 간파했더라고요. 대충이 통하지 않는 지점에 바흐가 있다는...너무 좋아서 소장하기로 했어요. 퓰리처상 타는 작가는 사적 에세이도 공적으로 승화시키는 지점을 기가 막히게 아는 것 같아요. 정말 문장이 말도 못하게 탁월하더라고요.
 
어느 작가의 오후 - 피츠제럴드 후기 작품집 (무라카미 하루키 해설 및 후기 수록)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무라카미 하루키 엮음, 서창렬 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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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향기가 묻은 피츠제럴드. 하루키가 선택하고 하루키가 해설했다. 왜 하필 이 작품이어야 하는지 그 설득력은 이미 획득된 작품들을 이제는 내가 읽고 느낄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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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12-12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으신건가요? 하루키 팬이라 읽고 싶은 책이네요ㅎ

blanca 2023-12-13 12:06   좋아요 2 | URL
읽었어요. 피츠제럴드 편차가 있는 작품들이 모여 있더라고요. 아주 좋은 작품도 있고, 아닌 작품도 있어요. 하루키 해설이 좋았어요. 짧아 아쉬웠어요. 저도 하루키 팬이라서요.

루피닷 2024-01-01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24-01-02 11:1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루피닷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 카를로 로벨리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양자 물리학
카를로 로벨리 지음, 김정훈 옮김, 이중원 감수 / 쌤앤파커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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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과학 관련으로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가볍지 않고, 문학적인 아름다움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책이 없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권하겠다. 그는 주로 시간과 양자 이론에 관련한 책들을 집필했고 그의 저작 대부분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렇다고 그가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자기 연구에 소흘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 곤란하다.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지만 카를로 로벨리는 아마 양자역학 연구의 최전선에 서서 그것을 가장 깊이 넓게 이해한 학자가 아닌가 한다.


스물세 살, 하이델베르크의 새벽 세 시의 발견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에르빈 슈뢰딩거의 확률의 이야기로 확장되어 세계의 입자성, 양자의 중첩을 지나 결국 불확정성으로 귀결된다.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실재는 결국 실재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고전 물리학과 실재의 확실성은 해체되고 결국 우리 눈앞에 남는 것은 '관계의 맥락'이다. 의심하고 회의하고 삭제하고 다시 수정하고 재정립하고 또 해체하는 과정이 삶이듯이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론 또한 그러하다. 양자역학이 삶의 역학을 재현하는 듯한 환각이 드는 것은 결국 우리가 탐구하고 희구하는 그 어떤 결정적인 사물의 실재가 부재하는 그곳에 남는 나와 너의 관계의 매듭이 묶이고 풀어지는 현장이 생명이자 삶의 터전이기 때문일 것이다. 로벨리가 2,3 세기의 나가르주나를 데리고 오고 불교의 공사상을 대입한 것은 어쩌면 이런 양자역학의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얘야, 너 몹시 심란한 얼굴이구나,

당황했나 보구나. 자, 기울 차려라.

여흥은 이제 끝났어. 여기 있는 배우들은

이미 말했듯, 모두 요정이었고

공기 속으로, 옅은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지지.

그리고 주춧돌도 없이 지어진 환영처런

구름 걸린 탑도, 화려한 궁전도

장엄한 사원도 거대한 지구 그 자체도

그래, 그 안의 모든 것도 녹아내려

이 실체 없는 광경이 사라지듯, 

구름 한 조각 남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꿈을 만드는 재료, 우리 짧은 인생은

잠으로 끝맺는 것.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 4막 1장의 대사를 인용하며 카를로 로벨리의 양자역학의 대여정은 막을 내린다. 결국 실재를 찾아, 나를 찾아 헤매는 그 긴 여로는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과 내가 그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나라는 존재가 홀로 고고하게 우뚝 설 수 있다는 오만의 벽을 해체하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만 남는 것은 서로의 얽힘과 서로를 반영하며 확인했던 이미지의 환각일 뿐이다. 양자역학을 읽으며 무너지는 확신과 진리의 해체가 무의미하게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서로의 관계의 맥락에 대한 재점화 때문일 것이다. 


허무하지만 그 허무로 뻗은 길에 기꺼이 오르게 만드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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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5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05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모르지만
김수이 지음 / 유어마인드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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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책은 많았지만,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저자가 얘기하는 죽음은 실무적인데 그 어떤 책보다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을 주는 이야기. 적절한 거리감과 정갈한 문장이 역설적으로 울림이 더 크다. 내 경험을 어떻게 확장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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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가지는 일에 흔히 연상되는 이미지는 귀여운 아기다. 임신하기 이전에 내가 아픈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거나 극심한 사춘기 반항아를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비단 임신, 출산뿐만은 아니다. 완벽한 인생의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현재 내가 겪는 일들을 비정상적인 것이나, 과도기적인 측면으로만 폄하하게 한다. 이 어려움만 지나가면, 다음에는 완벽한 이상향의 시기가 올 거야, 와야 마땅해 같은 생각. SNS에 수시로 업데이트되는 타인들의 찰나의 이미지는 행복한 장면들 뿐이다. 인생은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은 더 강화된다. 


아이를 낳았다. 귀엽기야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아이를 낳으면 두 시간마다 일어나서 아이에게 수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잠이 들 만하면 다시 반사적으로 일어나 아이의 배고픔을 달래줘야 한다. 이 시기만 끝나면 평화로울 거야. 그러나 이후 아이가 걷기 시작하며 사방의 모든 것을 입안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잠시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굴러 떨어지는 일도 다반사였다. 이제 유치원에만 가면 나에게도 자유가 올 거야. 기관에 가면 평화로운 시간은 막간에 아주 잠깐뿐, 끊임없이 각종 집단생활 때문에 감염병에 걸려온다. 뭔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중요한 약속도 잡지 못한다. 아이가 드디어 학교에 간다. 드디어 본게임 시작이다. 사교육을 시켜도 시키지 않아도 온전히 그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렇게 비장하지 않아도 괜찮았겠지만, 그러나 내 아이 앞에서 완벽하게 쿨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드디어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사.춘. 기. 내 생살 같았던 아이를 떼어 놓으려면 이 시기의 혼란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언제까지나 엄마가 세상의 전부고 엄마 말이 전부라면 그 아이는 영원히 성장할 수 없다. 반항도 하고 거부도 하고 나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말만 쉽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 세상의 불완전함과 불합리함, 삶의 부조리를 가장 실시간으로 농축하여 체험하는 일이다. 노력한다고 선의를 가진다고 다 제대로 풀리지는 않는다. 


















이 세 책에는 우리가 부모가 되는 일에서 감히 상상하지 못할 반경을 넘어 성장한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공통점은 이 세 아이들이 아프기 전 모두 부모에게 기쁨을 주던 빛나던 사랑스러운 아이였다는 점과 이들을 그 누구보다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키우려 노력했던 부모들이 뒤에 있었다는 점이다. 바깥에서는 비난할 수도 있는 아이들의 모습 안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부모의 헌신과 사랑이 있었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자기 아이가 자라나 다른 아이를 가해하거나 약물에 중독되거나 양극성 질환을 앓게 될 거라 상상하거나 생각하며 아이를 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일은 우발적 사고처럼 일어난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인생에서 가장 취약한 우발적 사건, 사고에 내 생살을 내어놓는 일과 다름 아니니까.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되거나 피해자가 되거나 아플 수 있다. 언제나 건강하고 언제나 나를 으쓱하게 해줄 훈장으로 아이를 여기게 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나의 에고는 아이로 인해 부풀어 오를 것이고 인생의 본질적 취약성,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나의 성취를 나에게서 쉽게 떼어 놓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분리는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세 책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아이들이 정신적으로 아팠다는 점이다. 바깥으로 드러내어 놓지 않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은 사춘기를 만나 발현된 아이들의 질환에 대한 대처 또한 어렵게 했다. 사람들은 비난하고 쉽게 비판한다. 때로는 심지어 예비 범죄자로 아픈 아이들을 대한다. 최근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들로 이런 편견들은 더 강화되고 있다. 정신질환자의 범죄에 대한 부모의 책임론에 대한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쉽게 이야기할 대목이 아니다. 내 품에서 벗어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하여 그 임계점을 상정하는 건, 가장 가깝지만 가장 멀어지는 그 부모, 자식 관계의 아이러니에서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처럼 자유로운 존재이고 부모에게는 그 화살의 경로를 강제로 수정할 어떤 권리도 힘도 없다. 아이가 질병을 얻어 방황하거나 심지어는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도 인간사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 사실을 인식하고 아이가 준 행복했던 기억들은 이따금씩 열어보는 보물상자로 간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김현아


아이 대신 삶을 대입해도 말이 된다. 세 부모가 예상치 않았던 경로로 틀었던 아이들과의 시간을 통해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의 성장과 도약이 때로는 우리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이루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그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난 자리에 남는 심오한 깨달음을 공유하게 해주어 저자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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