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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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이기적인 사람일까, 이타적인 사람일까? 위선자일까, 정직한 사람일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한때 내가 비교적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명백한 불의에 분노하고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MBTI가 INFJ로 나오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고 별 수 없다, 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직접적인 상황의 압력을 받는다면, 즉 내 이익이 침해되고 내 가족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의로운 사람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 그렇게나 욕하던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의 바깥에서 정의로운 이상주의자가 되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내가 그 상황 속 당사자가 되어 그 역학의 압력과 긴장도 안에서도 그러기란 말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다. 


<산둥수용소>는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사회실험학적 보고서도 이 책처럼 실증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을 지근거리에서 심지어 자신도 그 대상으로 포함시켜 낱낱이 생생하게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가차 없다. 흥미로우면서도 가볍지 않다. 무거운 척하려 위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는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제사에 인용된 것은 우리 인간이 기대만큼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비관적 발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43년 스물네 살의 연경 대학 교사였던 저자 랭던 길키는 일본에 의해 중국 산둥의 위현 민간인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다. 이 수용소는 나치의 그것과는 달리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같은 극단적 상황은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다른 유대인 수용소와 달리 그것을 통제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감자였던 인간 집단에 대한 흔치 않은 관찰기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영국인, 미국인, 네덜란드인, 벨기에인 사업자, 수도자, 선교사, 교사, 은행가 등 다양한 계층, 민족, 연령 층이 하루 아침에 수용소의 통제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앞의 고군분투 적응기이자 극단적 상황 앞에 노출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 보고서다. 



-신속한 적응


절대적인 공간과 물질적 한계 속에서 이루어낸 수용소 집단의 적응 이야기는 놀랍다. 마치 초창기 문명의 개화처럼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맨땅에서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그들의 공동체의 문명을 건설한다. 수의사는 모두를 먹이기 위해 200개의 쿠키를 굽기 시작했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공예품을 만들어 수용소 안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연극 공연을 하고, 사제들은 수용소 안 작은 예배당을 만든다. 랭던 길키는 이러한 인간들의 문명의 놀라운 적응력에 감탄한다. 어떤 상황이든 인간은 적응하여 그들의 일상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역동적인 적응기는 저자가 이야기하려던 수용소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윽고 수용소 전체를 뒤덮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비합리적인 이기심이다.


-무너지는 논리와 공정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pp.179

우리는 홀로코스트 수용소 이야기에서 그 안의 감동적인 인간의 연대나 희생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나누고 심지어 자기 희생에 기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감동의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중론이 아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탐욕스럽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본국에서 보내 온 적십자 구호품을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다 일본군에게 다 압수 당하는 미국 사람들 이야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다. 미국인인 저자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솔직히 기록하며 심지어 적군인 일본군의 개입이 없었으면 이 구호품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났을 거라고 고백한다. 이미 배고픔을 채우고도 남은 물자를 옆의 궁핍한 이웃과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에는 심지어 평소에 이웃 사람을 외쳤던 신실한 신앙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을 더 합리적으로 포장할 줄 알았다고 한다. 즉 일부가 아닌 대다수가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웃의 필요를 폄하하고 남은 물자를 나누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해 직업적이거나 도덕적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이기적 관심이라는 진짜 속내 대신 객관성과 정직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세상에 나간다. 

-pp.214



-수용소 내의 정치


인간이 이렇게도 자신의 안위에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인 이기심을 표출한다면 과연 그 대안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자를 훔치고 거짓말하고 타인을 이용했고 그것을 통제할 방법은 자체 정치 기구의 설립과 그것을 통한 법적인 제약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수용소 안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설립한 정부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집행부였던 랭던 길키는 점차 이 안에서 정치적인 힘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된다. 민주 정부의 힘은 자율적으로 창출되기 어려웠다. 그것조차 권위에 입각한 어떤 힘을 필요로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빵을 굽고 남은 밀가루와 설탕을 훔쳐갔고, 때고 남은 석탄을 마음대로 가져갔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조차 그랬다. 차라리 어떤 한도 안의 재량권을 주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양보조차 곧 유명무실해졌다. 더 가져가고 더 훔쳐갔다. 랭던 길키가 속해 있던 집행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체 규약을 만들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공동체의 도덕성은 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면 그 사회는 영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도덕성은 치트키가 아니었다. 이것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성립된 민주 정부의 권위에 대한 고민과도 닿아 있었다. 가능하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현실과 멀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랭던 길키는 수용소에서 나와서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그의 마지막 결론은 그의 종교 안이라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 생활을 하며 자신과 같은 종교인의 부끄러운 민낯을 목도하고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자성한 대목은 그가 편협한 맹신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오히려 종교가 가지는 맹점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기반으로 삼는다. 


불안정한 삶을 경험하면서 배운 가장 기묘한 교훈은, 원하지 않던 상황이 파괴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오히려 창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위현 수용소에 오고 싶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거부하고 싶고 혐오스러웠던 경험 안에는 새로운 통찰력이라는 씨앗이 있어서, 우리 중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너무도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더욱 창조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pp.472


생존 앞에서 도덕성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반 그 자체였다. 도덕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 도덕성은 빛을 발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이웃의 필요를 간과할 때 나의 생존은 더욱 더 위협 받았다. 타인을 믿을 수 없을 때 그곳에 지옥이 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궁핍 속에서도 내 옆의 이웃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그 궁핍은 채워짐으로 보답 받았다. 인간의 적나라한 이기심은 결국 이런 교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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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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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을 예비한 하나의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상대라는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죽음과도 닮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내 뒤에서 외도를 일삼았던 남편을 잃은 에스코가 한큐 백화점에서 남자 양말 두 켤레를 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언뜻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가림막으로 드리운 채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이 여인이 남편을 잃고 들어간 시가에서 시아버지와 맺은 부정과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하인 사부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저류를 통과할 때는 모든 사소한 행동들이 다른 의미로 확장, 심화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은 이들을 둘러싼 전원의 그 어떤 풍경에 대한 사소한 묘사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모든 언어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도사리고 있다. 


여자의 발소리처럼 가볍지도 않고, 중년 남자의 발소리처럼 침울하지도 않다. 발바닥에 젊음의 뜨거운 무게가 실려 있어, 이 어두운 밤 복도의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마치 신음처럼 듣게 했다.

-pp.34


시아버지 야키치와 바둑을 두는 에쓰코가 듣는 사부로의 발소리에 대한 묘사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에스코의 사부로에 대한 은밀한 마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시들어가는, 퇴락해 가는 이 가문을 뚫고 들어온 단 하나의 희망, 미래, 청춘에 대한 예감이다. 그러나 물론 에스코와 사부로가 극복해야 할 수많은 난관은 간단치 않다. 신분, 연령 차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에쓰코는 사별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녀의 생존은 거기에 기대어 있다. 만담가 같은 큰형 부부, 에쓰코를 감시하며 때로는 개입하고 방관하며 그녀의 삶에 끼어드는 야키치, 사부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하녀 미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을 사치스러운 잉여의 감정으로만 인식하는 어린 사부로. 사부로는 에쓰코의 상대로서 더없이 부적절했다. 아니, 결국 그녀가 밟고 지나가고 말아야 했던 하나의 통과의례, 희생양, 제물로서 거기 필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의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pp.117


에쓰코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의미는 불행히도 가설적으로 소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 죽음과 대면하게 되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비참한 상황은 어떻게든 결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기력함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비치기도 한다. 처절하게 아름답지만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결말에서도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들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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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6-30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오감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저런 묘사를 할 생각이 들었을까요? 악상처럼 막 떠오르는 걸까요? 만약 글을 쓰는 게 업이었다면 그의 재능이 너무나 질투났을 것 같아요.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나더 레벨의 감각. ㅠㅠ

blanca 2024-06-30 11:38   좋아요 2 | URL
천재적이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사상적으로 논란이 많은 작가지만 감각적 표현력 측면에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어떤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발화 자체가 공적 의미를 지닌다. 신변잡기라 할지라도 화자의 내면에 침잠했던 자신의 체험이 오랜 시간 숙고와 그 나름의 의미망을 통과하면 그 경험과 떨어져 있는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그게 바로 좋은 에세이의 숙성에 관한 이야기일까. 엄청난 스케일의 서사가 없어도 이런 이야기들은 이미 말하여지는 그 행위 그 자체로 이미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을 매혹한다. 최근 읽은 세 이야기가 그랬다. 

















여든을 훌쩍 넘긴 비비언 고닉의 최신작이다. "인생 초년에 중요했던 책을 다시 읽다보면"의 그녀의 여정에 동참하는 읽기다. D.H의 <아들과 연인>, 뒤라스의 <연인>이 비비언 고닉의 개인적 삶의 역사, 예리하게 벼려진 언어의 체를 통과하면 어느덧 겉핥기식이 아닌 그 작가의 그 작품의 심해로 함께 뛰어드는 듯한 심오한 추체험을 하게 되는 마법적인 책이다. "외로움은 규준이고, 연결은 이상이라는 것."이라는 그녀의 냉소의 첨언에도 우리는 읽기 체험에서만큼은 그 마법적인 연결의 순간을 비비언 고닉 그녀 본인을 통해 경험하게 된다. 그녀의 "끝나지 않은 일"은 바로 이런 마법적인 공감의 순간을 지치지도 않고 자아내는 것이리라.

















내가 이 세상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없다. 내가 만들거나 건축한 것의 4분의 3은 도시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다. 이곳저곳에 유용한 역할을 한 적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해로운 영향도 미친 것이다. 내가 굳게 믿던 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끔찍이 아끼던 것도 나중에 알고 보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완벽에 관하여> 마크 엘리슨


자신의 일에 대해 쓰면서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를 난 본 적이 없다. 내 일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온생애를 합리화하는 일에 많은 회고적 쓰기가 동원되는 현실이다. 여러 셀럽의 휘황찬란한 대저택의 건축 및 개축에 중추적 역할을 한 뉴욕의 유명한 목수가 자신의 일이 가지는 결론적 무의미를 자인하는 대목은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감동적이다. 그 누구의 삶도 대단한 유의미와 대단한 기여에 일조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 삶의 냉철한 직시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영위하는 일상의 가치를 끌어올린다. 인생은 대단한 그 무엇을 위해 동원되는 것이 아니다. <완벽에 관하여>는 그 완벽이라는 이상 자체의 허울을 벗겨내는 일이다. 전문적 작가가 아닌 한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생애를 자신의 일과 관련지어 언어화하고 읽는 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이 소박한 글쓰기는 방증한다. 솔직하되 그 솔직함이 전시적이면 안된다. 언어적 증류가 삶을 대하는 태도만큼 치열해야 한다. 그 치열함조차 그것에 취하면 안된다. 그 어디쯤의 가장 적절한 지점에서 글쓰기는 시작되고 끝난다. 


















작가 히샴 마타르의 고향은 리비아다. 그러나 그곳을 떠난 지 벌써 삼십 년이다. 게다가 이 글은 리비아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이탈리아의 시에나에서의 한 달, 시에나 화파의 그림을 보며 그 도시에서 생활하는  이야기다. 이 작은 책에는 그러나 작가 인생의 전부가 농축되어 있다. 카다피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가족과 이집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납치되어 생사불명 상태로 연락이 끊긴다. 작가는 이 이야기 <귀환>을 써서 퓰리처상을 받는다. 


생이 계속될 수 없다는 증거, 어떤 갑옷을 두르든 예외 없이 모든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대면하고도, 우리는 얼마나 용감하고 영웅적인가.

이 도시의 알레고리는 작가의 삶의 서사 자체를 지휘한다. 이 도시 안의 그림들은 아버지의 상실을 딛고 작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다만 그 저류의 그 쉬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떠오르는 강력한 의지적 희망을 적시한다. 조반니 디 파올로의 <낙원> 그림에서의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재회는 그래서 마침표를 찍기에 더없이 적절한 큐레이션이다. 결국에는 사랑하는 모든 이와 헤어져야 하는 우리 인간의 그 처절할 정도로 슬픈 삶의 기본 전제를 확인하며 그럼에도 그들과의 재회를 꿈꾸는 그 지지 않는 마음에 대한 직시는 뭉클하다. 


모두의 삶은 상실을 품고 있다. 그 상실을 품고 나아가는 지점에서 읽고 쓰는 일에서 만나는 일은 언제나 공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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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6-24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삶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듯 상실을 향해서 가는 여정 같습니다..^^

blanca 2024-06-25 09:18   좋아요 0 | URL
이제 점점 더 실감이 나서 마음이 무거워요.
 

폴 오스터가 77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나는 그의 팬도 아니고 그의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는데 급작스런 소식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그의 이름이 문학에 가지는 의미와 무게가 남달라서가 아닐까. 충격이다. 한 시대가 저무는 느낌이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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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5-01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런가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blanca 2024-05-01 19:51   좋아요 0 | URL
폴 오스터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뭔가 청춘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어서 더 갑작스럽게 들리더라고요.

유부만두 2024-05-01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321 .. 을 쳐다보고 있어요

blanca 2024-05-01 19:51   좋아요 0 | URL
낭독회 영상을 한동안 봤었는데 먹먹합니다.

cyrus 2024-05-01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대 때부터 폴 오스터의 책 대표작이라도 읽어야겠다고 마음만 여러 번 다짐했는데, 결국 책 한 권 읽지 못했어요. 제가 참석했던 서울의 독서 모임 이름이 <달의 궁전>이에요. 지금 독서 모임 멤버들이 작가의 부고에 슬퍼하고 있어요.

blanca 2024-05-02 10:00   좋아요 0 | URL
기억해요. 저는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단편을 몇 편 읽은 정도인데 인터뷰가 좋아서 많이 찾아봤던 작가라 친밀감이 들더라고요.
 

인생 네 권의 목록은 끊임없이 갱신되는 게 좋다. 지금 나를 뒤흔드는 좋은 책보다 더더 계속해서 좋은 책이 나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럼에도 여전히 절대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 절대반지 같은 책들이 있다. 고전 읽기의 재미를 알게 해준 신호탄 같은 책이 운좋게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문학동네가 2009년 12월 흑백의 모던한 표지의 세계문학전집 1권으로 출간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아이를 낳은 지 만 이 년째 되던 해였다. 나는 한동안 육아로 지쳐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의 주인공이 안나 카레니나라고 생각했고 그녀의 자살이 결말일 거라 여기며 책을 펴들었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가장 많이 투영된 화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한 인물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톨스토이가 가장 천착했던 주제인 생의 유한함과 시간의 무자비함이 끌고 가는 이야기다. 추상적이고 거대한 주제를 장대하고 아름답고 떡밥 많은 스토리로 끌고 가는 힘은 톨스토이 정도의 거장이 아니고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름도 어려운 수많은 인물들은 제각각 성격도 가치관도 다르지만 우리는 그들 모두에게 공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수많은 모순적 충돌을 일으키는 탐욕, 무모함, 현명함, 쩨쩨함, 비겁함, 용기, 선의를 섬세하게 인생의 파도와 엮어 낸다. 그의 인물 중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안쓰럽지 않은 인물도 없다. <안나 카레니나>는 거리두기가 힘든 독서의 체험을 준다. 다 읽고 나면 진이 빠진다. 그러나 이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라지는 체험을 선사한다. 이 세상에는 '절대'라는 절대적인 부사어를 붙일 일이 가히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만큼 시간 그 자체가 견인하는 이야기가 있을까? 프루스트는 이 이야기를 읽는 체험 그 자체가 독자의 인생 그 자체가 되기를 바랐다. 10년간 총 5704쪽의 이야기를 번역해 낸 역자의 시간은 원작자의 그것에 감히 비견될 만하다. 마르셀이 젊은 시절 그렇게 선망해마지 않았던 귀족들이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자신이 그렇게나 간절하게 매달렸던 사랑도 스러지는 정경은 쓸쓸하지만 거기에서 건져낸 미학의 미덕은 울림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술에 감동하고 아름다움에 압도당하고 이것은 무의미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길고 또 길어야 마땅하다. 


하루키의 1Q84를 나는 작년에야 읽었다. 아오마메가 하늘에서 두 개의 달을 보며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나도 하늘에서 또 하나의 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흔적을 찾아 헤맸다. 이 평행 우주적 세계 안의 환상적 이야기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세계는 이대로 합당한가? 비단 이 세계가 전부인가? 접안과 피안 사이에서 작가는 치열하게 자신의 인물들 내면의 심연을 길어오르며 독자의 그것을 발굴한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다. 그가 파고드는 이야기는 으스스한 판타지인데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는 현실을 잊기 위해 그의 이야기를 읽지만 일단 그의 월드에 입성하면 절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그런 면에서 그의 리얼리티는 감히 최고다.


<면도날>은 삶의 그 허위가 숨기고 있는 삶의 그 연약한 속살에 가닿으려는 작가의 기민한 시선에 찔리는 이야기다. 모옴은 이런 일에 천부적이다. 누구나에게 숨겨진 그 욕망이 삶을 끌고 달릴 때 놓치는 것들. 우리는 단지 그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 현실도 이상도 전적으로 전부가 될 수는 없다. 다 늙어 파티에 초대받지 못함에도 끝까지 그 초대를 기다리는 엘리엇의 초라한 모습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자 오늘일지도 모른다.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하며 나는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항변한다 해도 결국 인생 그 자체가 우리를 외면하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 사는 일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 면도날 위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직 내 인생의 네 권은 완결된 게 아니다. 이 목록이 한번 뒤집혔으면 좋겠다. 그만큼 좋은 책은 끊임없이 태어난다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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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2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 카레니나>를 크게 인상 깊게 읽지 못했던 저는 블랑카 님 이 페이퍼를 읽으니 이 나이에 한번 다시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지네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다락방 2024-04-25 11:04   좋아요 0 | URL
오 찌찌뽕~
저는 [안나 카레니나]를 아주 감탄하며 읽었는데 이 페이퍼를 보니 다시 읽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21   좋아요 0 | URL
잠자냥님, 마음이 내키실 때 천천히 다시 읽으시면 또 새로운 느낌이 옵니다. 이 목록엔 없지만 저는 <죄와 벌> 정말 지루하고 싫다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근 다시 읽으니 정말 완전 새롭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독서에도 어떤 타이밍이 있는 것 같아요.

은하수 2024-04-25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아하는 작가, 작품들이라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잃ㆍ시를 꼭 완독해야겠단 결의를 다지게 됩니다!^^

blanca 2024-04-25 12:30   좋아요 1 | URL
마지막 권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성취감과 감동이 오더라고요. 여기까지 오느라 그렇게 프루스트가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했구나 싶었어요. ^^;;

다락방 2024-04-2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 ㅑ ~ 정말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글입니다, 블랑카 님.
인생 네권 중 저랑 겹치는 건 없지만 블랑카 님의 목록은 그 자체로 너무 좋네요.
[안나 카레니나]야 말로 책의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알게 해주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나 안나 카레니나가 불륜을 저질러 자살한 이야기로 알테지만, 그러나 이 책을 직접 펼쳐 들고 읽는다면 그게 그게 아니잖아요. 안나도 안나지만 레빈의 이야기도 그렇고 저는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심지어 사냥개의 입장이 되어서도 글을 써내는 천재라고 생각했더랬어요.

그리고 아오마메를 좋아합니다.

blanca 2024-04-25 12:32   좋아요 0 | URL
톨스토이도 그렇고요, 하루키도 그렇고요. 여자에 빙의하는 순간이 있어요. 남자 작가로서 여자를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되는 순간.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건 아니지만, 이게 가능한 작가는 정말 극소수라고 생각해요. 인생 네 권 재미있네요. ^^

은하수 2024-04-25 21:02   좋아요 0 | URL
저도요~~
저도 아오마메 좋아요
또 만나고 싶어요
전 다음권 나오는 줄 알고 한동안 계속 기다렸잖아요. 끝인게 믿기지 않는 작품이었죠!

stella.K 2024-04-25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랑카님의 이 글 읽고 읽다가 밀어뒀던 안나를 다시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그러는 줄 알았거든요. ㅋ
근데 따님이 벌써 그렇게 자랐군요. 크니까 좋지 않나요? 대화도 잘 통하고 친구같고. 브랑카님 닮았으면 분명 미인이겠어요. 전엔 가끔 따님 얘기도 들려주시곤 했는데 말이어요. ^^

blanca 2024-04-26 09:19   좋아요 1 | URL
스텔라님, 벌써 열일곱이 되었답니다. 세월 빠르죠? 딸은 크고 저는 늙네요. ^^;; 기억해주셔서 감사해요. 벌써 알라딘에 머무른 지도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여전히 그런 추억들을 나눌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인 것 같아요.

새파랑 2024-04-26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인생네권인데 선택하신 권수는 20권인데요? ㅋ 1.2.3 완전 동의합니다~!!!

면도날 고르신 분들이 많더라구요. 궁금합니다~!!

blanca 2024-04-26 14:37   좋아요 1 | URL
ㅋㅋㅋ 그렇네요. 무려 20권. 일단 아주 흥미진진합니다. 서머싯 몸 소설은 대체로 서사 장악력이 좋아 대부분이 영화화됐더라고요.

그레이스 2024-04-26 2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못 고르겠어요ㅠㅠ

blanca 2024-04-28 08:44   좋아요 0 | URL
^^ 저도 쓰고 나니 또 생각 났어요.

페크pek0501 2024-04-28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나카레니나를 오디오북으로 듣는 중에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오디오북이랑 같은 출판사의 책을(더클래식) 사야 되나 제가 좋아하는 민음사 책으로 사야 되나 고민이 됩니다. 면도날은 저도 좋았던 책입니다. 서머싯 몸은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네요.
잃어버린~ 시리즈는 저로선 엄두를 못 낼 독서입니다. 뿌듯하실 것 같네요. 완독을 축하합니다.^^

blanca 2024-04-28 12:57   좋아요 1 | URL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더 생생하게 장면이 그려질 것 같아요. 서머싯 몸은 심지어 에세이도 재미있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