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나이가 들면 현실적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 치일수록 더 내 앞의 이 물리적 현실이 허깨비 같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순간 '나'라는 자아를 가진 의식이 출현하여 '너'를 만나 때로 '우리'가 됐다 어긋나 헤어지거나 죽음으로 이별한다. 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과정인가. 한때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시간과 함께 스러져버리는 일이. 화성 탐사가 가능하고 손바닥 만한 전자기기에 세상 전부를 담을 수 있는 순간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이 존재의 부조리 앞에서 사람들은 더 큰 절망을 느낀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폴란드의 전설적인 SF 작가다. 폴란드 최초의 위성은 그의 이름을 본따 만들어졌고 심지어 그의 이름과 작품명으로 명명한 소행성들도 있을 정도다. 몇 차례 영화화된 <솔라리스>의 원작자의 상상력은 이미 그가 2006년에 고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오늘날의 기술 발달과 그것과 충돌하는 인간들의 내적 갈등에 놀라울 정도로 현재적이다. 그가 작품으로 형상화한 미래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현재적이다. 우주 탐사, 컴퓨터, 인공지능의 발달은 마치 스타니스와프 렘의 명령어를 따르기라도 한듯 그의 이야기와 닮았다. SF가 허무맹랑한 우주 탐사나 이물감이 드는 로봇, AI에 대한 피상적 스토리에 불과하다 생각된다면, 이 작가의 작품은 그 편견을 일거에 깨부수는 개미지옥이 될 거라 장담한다.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도 잠시 내려놓고 스타니스와프 렘이 만든 세계의 낮은 허들만 뛰어넘는다면, 작가가 창조한 생생한 유니버스 안에서 내 내면 안 해소되지 않았던 각종 기억, 감정, 고민들이 언어화되어 눈앞에 나타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솔라리스>는 '솔라리스' 행성 정거장에 탐사를 간 심리학자가 십 년 전에 자살한 연인과 조우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한 문장으로 이 SF의 고전을 요약하기는 역부족이다. 솔라리스 행성에는 끊임없이 정형과 비정형의 온갖 형태를 만들어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유동하는 거대한 바다가 있다. 이 바다와 접촉하기 위한 시도는 결국 주인공이 내면의 깊숙한 곳에 가라앉아 있던 온갖 무의식, 기억의 심연과 대면하는 일로 이어진다. 연인과의 재회는 내 기억 속 환상의 순환을 눈앞에서 목격하게 되는 과정의 일환이다. 이 우주 정거장에서 돌아다니는 인간의 외피를 입은 형상들은 실재하지 않는 내 환영일지도 모른다. 우주 탐사를 떠난 인간은 결국 내면 탐사의 지점으로 돌아온다.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모르면서 지구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인간의 자신감은 얼마나 오만한가. 결국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불완전한 실패하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실패하고 또 실패하는 신과 인간이 가지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의 마침표.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분량이나 재미로 볼 때 스타니스와프 렘의 입문서로 괜찮을 것 같다. 역시 미지의 행성 레기스 3에 착륙한 무적호 승무원들이 실종된 우주선 콘도르호를 찾는 과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험 이야기다. <솔라리스>의 바다의 역할을 떠맡은 미지의 형성물은 무생물의 진화로 확장된다. 이것은 인간의 문명에 대한 일종의 아이러니다. 우리는 흔히 생물, 그 중에서도 인간만이 문명을 만들고 진보한다,는 인간 중심설을 기본 대전제로 간주하지만, 죽음의 한계 바깥에서 건재하는 것은 물질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로봇과 물질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때 빚어질 비극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주인공이 마지막 구조자의 임무를 떠안고 마침내 대면하고 마는 그 엄청난 비극의 형상은 거대한 아포칼립스에 실제 고립된 막막함을 추체험하게 한다. 


결국 나를 둘러싼 모든 이야기는 내 내면의 투영이다. 나는 사방에서 내가 비친 거울을 본다. 스타니스와프 렘은 이 거울을 우주 반사경으로 보여주는 스토리 텔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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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3-12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라리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지만 SF 라서 저는 딱히 관심을 두진 않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페이퍼 읽으면서 알게된 솔라리스의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하셨다하지만, 너무나 흥미롭습니다. 저도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명성이 자자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다락방 2025-03-12 10:58   좋아요 1 | URL
지금 땡투 누르고 사려다가 혹시 몰라 검색해봤더니 제가 2022년에 이 책을 샀다고 되어있네요 ㅠㅠ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5-03-12 13: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lanca 2025-03-12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락방님, 충분히 그러실 수 있어요. 워낙 유명한 책이잖아요.
 
자살의 연구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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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자살에 대한 생각과 40대에 자살을 바라보는 시점은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삶조차 나를 제외한 채 무한한 잠재태로 보이는 나이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때로 구조 신호가 된다. 나를 좀 도와달라고, 나를 소외시키는 지금 이 삶에서 나를 좀 구해달라고. 하지만 죽음이 너무나 단호한 결말이고 이 자살이 실패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완전한 절망을 직시해야 하는 중년의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굳이 통계를 가져오지 않아도 가공할 만한 숫자의 사람들이 매일 목숨을 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안다. 이 생이 전부인 것처럼 일상을 사는 우리가 때로는 스스로에게 칼을 겨눈다. 대체 얼마나 큰 절망 앞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 그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걸까. 여기에 그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는 지난한 여정의 역작이 있다. 물론 이미 우리는 그에 대한 딱 떨어지는 답은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저자 앨 앨버레즈는 [옵서버]에 시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실피아 플라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실비아는 이미 시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테드 휴즈와의 결혼 생활이 기대만큼 행복했던 것 같지 않다. 무서운 재능을 가졌던 영재 소녀와 영국의 3대 시인의 공존은 쉽지 않아 보였다. 앨 앨버레즈는 초기에 테드 부부와 함께 어울리기도 하다, 결국 테드가 떠나고 아이들과 남은 실비아가 죽음을 선택하기 직전까지 그녀가 읽어주는 자작시를 듣게 된다. 그는 실비아 플라스의 갑작스런 자살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죽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중략>

-실비아 플라스



앨 앨버레즈는 실비아처럼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난 젊은 여성도 택하고 마는 자살에 대한 설명을 찾아 헤매게 된다. 자살이라는 행위의 배경과 서구의 자살에 대한 역사적 관점의 변화, 문학에서 바라보는 자살, 그리고 그 자신의 체험으로 구성되는 <자살의 연구>는 '자살' 그 자체에 대한 학술적 연구서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자살과 관련한 문학 텍스트 분석과 더불어 그것을 창작하고 자살에 대해 고민하거나 결행한 작가들의 생애 자체를 통한 심리 분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현대에서는 안타까운 비극이나 하나의 사고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자살이 고대 아테네에서는 집정관에게 공식 허가만 받으면 가능했던 사례, 절망의 철학인스토아 학파가 때로 자살을 어떻게 합리화했는지, 중세의 기독교가 어떻게 자살을 자신들의 교리 안에 포섭하거나 배척했는지, 낭만주의가 어떻게 자살을 극화했는지, 그리고 마침내 자살이 삶의 부조리에 어떤 비틀린 출구가 되었는지 역사 속에서 변전하는 자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과 대처가 매우 흥미롭다. 


중간중간 인용되는 셰익스피어, 실비아 플라스, 필립 라킨, 존 던의 죽음에 관련한 시들은 저자의 의도에 의해 삽입된 것이지만 이 책의 번역자 최승자 시인의 시선을 통과한 만큼 또 다른 감동을 준다. 평범한 사람들은 감지해서 표현하기 힘든 남다른 리듬감과 형언하기 힘든 시적 감수성의 체를 통과한 시의 울림이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는 울림을 주는 것은 최승자 시인의 노고가 아닐까. 


우리는 누군가의 자살을 예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누군가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앨 앨버레스의 생각은 비관적이다. 그는 자살이 "도덕을 초월한 문제인 것과 똑같이 사회적.심리적 예방을 초월한 문제"라고 본다. 그는 이 자살 충동이 심지어 인간에 내재한 하나의 특성에 해당된다는 의견에 공감한다. 즉, 앨 앨버레즈는 완벽한 사회조차 한 사람에 내재한 자살 충동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본다. 프로이트가 죽음의 본능과 생의 본능이 길항하며 우리 삶을 지탱한다고 봤던 시각은 키르케고르의 삶과 죽음 사이의 통로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이야기했던 것만큼 진실이다.


프롤로그에서의 실비아 플라스의 죽음만큼이나 에필로그의 저자의 자살 미수 경험은 충격적이다. 실패한 결혼과 알콜 중독 등으로 자살 시도 끝에 거의 3일만에 깨어난 저자는 죽음이 삶의 출구나 단호한 결론이 될 수 없음을 실감하고 다시 태어난다. 삶이 고통스러운 만큼 자살에는 더 큰 공허가 개입되어 있었다. 서른한 살 때의 자살 시도 이후 그는 아흔 살까지 장수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이야기인가. <자살의 연구>에서 자살의 그 복잡다단하고 모호한 지점을 천착했던 작가의 생애 그 자체가 이 책에 하나의 텍스트를 덧붙인다. 


"생이란, 아무도 거절해서는 안 되는 선물이다."

어쩌면 이 카뮈의 이 냉소적 경구가 이 모호하고 예민한 주제에 대한 그나마 가장 명쾌한 답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을 가지고 어차피 정해진 종착역까지 견디며 가는 것. 자살은 결국 가장 단호하고 번복할 수 없는 죽음으로 향하는 하나의 경로가 되기에 생을 다시 되찾을 도리가 없는 그 결단에 대한 우리에 내재한 충동이 있더라고 그 충동과 결국 싸워 이겨나가며 다시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이 아이러니를 우리는 도저히 거부할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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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3-0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일 40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보도가 있던데 참 한숨이 나오더군요. 이책이 뭔가 해답이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참 잘 살았네요.^^

blanca 2025-03-04 11:56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내내 기분이 많이 다운되더라고요. 산다는 게 대체 뭔가 싶기도 하고요. 책 안의 시들이 참 좋았어요. 마지막 장 작가 자신의 자살 시도에 대한 부분이 정말 너무 슬퍼서 어떻게 됐나 찾아보고 죽은 나이 계산까지 해봤네요.

다락방 2025-03-04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저 역시 기분이 다운될거라 생각하지만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습니다. 죽음은 두려운만큼 그래서 더 알고 싶어지거든요. 알면 두려움이 덜할까하여. 자살에 대해서라면 저 역시 너무나 모르는만큼 이 책을 읽어보도록 할게요.

blanca 2025-03-04 12:34   좋아요 1 | URL
이 책을 번역하며 최승자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외국시는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 원작자의 의도가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최승자 시인이 번역한 시들은 말 그대로 훅 빨려든다,는 게 뭔지 알겠더라고요. 진짜 숨을 멈추게 되더라고요. 읽는 과정이 참 쉽지 않았어요. 우울의 늪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크게 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이 책 읽고 솔직히 한 뼘쯤 더 비관적이 된 건 사실이에요. 흑.

바람돌이 2025-03-04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00페이지에 달하는 자살에 관한 이야기라니.... 기 빨려요. 자살 충동을 느끼고 자해를 하는 아이들을 가끔 보면서 어찌해야 될지 모르는 저에겐 이 책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blanca님 글은 너무 좋아서 두고 두고 읽고싶어집니다.

blanca 2025-03-05 09:45   좋아요 1 | URL
제가 이십 대에는 솔직히 자살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힘들다,는 표현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기도 했거든요. 그건 일종의 도와달라,는 구조 신호였다는 걸 깨달았어요. 실제 정말 그걸 결행하는 사람들의 절망, 그걸 이해하고 공감하는 과정이 참 힘들긴 하더라고요. 문장과 인용한 시들이 너무 좋아서 그건 그대로 또 좋았고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수윤 옮김 / 북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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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쉰 살이 되었는데,"로 시작하는 <소년>의 이야기다. 연대나 각종 기록이 가와바타 야스나리 본인의 것과 많이 겹쳐 자전적 이야기라는 짐작이 간다. 쉰 살이 된 소설가가 전집을 간행하며 우연히 소년 시절의 일기와 보낸 편지, 받은 편지를 발견하며 소개하는 구성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진부한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릴 정도로 설명하기 힘든 매력과 흡인력이 있는 작품이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바로 이 <소년>은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읽는 우리 모두의 사춘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보편적 공감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기숙사 방장이었던 화자는 후배 세이노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 사랑이 동성 간의 일이라 해서 띄는 색채는 주된 기조가 아니다. 세이노가 소녀였어도 이 이야기는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 않다. 에로틱한 정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 그건 어린 시절 우리가 기대했던 그 순전함과 이상에 대한 결국 실패하고 말 지향과 숭배, 믿음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환기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었고, 사람을 믿었던 단 한 시절의 이야기가 초로에 접어든 주인공이 지금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더라도 그가 발을 딛고 선 그 시점의 황량함과 쓸쓸함을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은 공명한다. 누구나 그런 한때를 가슴에 품고 있지 않았을까. 잊고 있던 그 시절을 환기해 내며 '맞아, 그런 때가 있었어.' 하게 만드는. 


다시 돌아온 현실은 쓸쓸하다. 한때는 전부였던 서로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재회의 기회도 마다한다. 세이노는 끊임없이 화자에게 자신을 만나러 오라 권하지만, 그 채근이 무용하고 결국 그 둘은 재회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그가 이상화했던 선배 대신 빠져든 언뜻 사이비 같은 종교도. 그 시절의 인연은 그 시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추억을 간직한 채 두 번은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가타이

시절은 흐르고 있다.

흐르는 시간 소리가 분명히

느껴진다.

저 소리다.

저 소리다.


흐르는 시간 소리를 듣게 하는 작품을 읽고 우리가 결국 닿게 될 그 지점이 어딘가 고민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이 이 모든 오래된 일기와 편지를 소각하게 되는 마지막 문장의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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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7 23: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문장이 정말 좋아요. 인용하신 문장에서는 정말 시간이 강처럼 흘러가는 것 같네요. 앗 그리고 블랑카님 페소아 글 읽다가 포르투갈 작년에 갔다온거 생각나서 포스팅 하나 올렸어요. ^^

blanca 2025-02-28 09:25   좋아요 1 | URL
와, 바람돌이님 포르투칼 가셨군요! 한번씩 비행편 검색해 보니 직항도 잘 없더라고요. 언젠가 저도 갈 수 있을까요? 빨리 가서 읽어보겠습니다.
 
소년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수윤 옮김 / 북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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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은 없는 단 한 번의 그때, 단 번의 유일한 사랑이 가능했던 소년 시절의 복원은 역시나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답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시절의 진혼곡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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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는 내가 너무나 많아~"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의 가사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수많은 이명에 가장 직관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종류의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고 그 이명들을 마치 나름 실재하는 사람들처럼 캐릭터로 만들고 가상의 삶을 발명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그의 내면에만 존재하는 허구의 존재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인격체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에 가장 잘 알려진 <불안의 서>도 페소아의 이름이 아닌 그의 이명 베르나르두 소아레스로 발표했다. 그는 그들을 페소아의 필명이 아니라 일종의 "고안된 인간들"이라고 얘기한다. 페소아를 읽는 일은 이런 이명의 캐릭터를 기꺼이 실존하는 인물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다름 아니며, 우리 내면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경이로운 체험이기도 하다. 그의 기행은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의 한 표현이다. 

















이 책은 페소아가 문학과 예술에 관련하여 쓴  에세이들 선집이다. 어떤 에세이는 채 반 장이 되지 않는 분량이다. 인간의 고정관념, 편견, 우리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의 허점과 빈약함을 가차없이 해체하고 전복하는 그의 글은 문장 하나하나가 시를 닮았다.  그 자신이 "이 지구의 시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장담한다. 그의 시는 가볍거나 호화롭지 않다. 간소하고 직설적이고 때로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일종의 반어법인가 싶어 보면 페소아는 분명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제대로 이야기했다. 


<삶의 법칙>

자신감은 최소한으로 가져라.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지만, 가진다면 가짜 자신감이나 흐릿한 자신감을 가져라.


오늘날 자기계발서나 라이프코치들한테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야기다. 자신감을 아예 갖지 않는 편이 낫다니, 이 얼마나 전복적인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가 삶에 대해서 무엇보다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내 자신이라는 허구적 개념이 얼마나 빈약하고 가짜인지를 깨닫는 순간, 해방이 오며 더 감각과 순간에 충실한 지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밤과 혼돈, 꿈과 오류가 더 진짜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의 대립항에 페소하의 철학과 시와 글이 있다. 

















산문도 모조리 시로 만들어버리는 화력을 가진 페소아의 진짜 시가 읽고 싶었다. 그의 시는 쉽고 길고 잘 읽히고 신비롭고 아름답다. 이 모든 수사를 다 갖다 붙여도 페소아의 시를 제대로 설명한 것 같지 않은 미진함이 드는 건 이 시들에 이 시집의 제목처럼 페소아의 존재 방식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단어 하나에도 우주적 성찰의 무게가 담겨 있다. 삶이나 예술에 대한 큰 기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걸 함부로 포기하지도 않는 그 태도는 자칫 냉소와 오만으로 얼룩지기 쉬운 개인의 철학을 보편적인 신비로 승화시킨다. 아마도 이런 문장들.


그리고 죽을 때가 되면, 하루도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것,

노을이 아름답고, 남는 밤도 아름답다는 걸......

그런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양 떼를 지키는 사람/알베르 카에이루


물론 이런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를 쓴 시인 알베르 카에이루는 페소아의 필명이 아닌, 페소아가 만든 또 다른 하나의 엄연한 인간이다. 시골에 살며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않은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라는 페소아의 설명. 이 인격도 페소아의 자아에 있는 혹은 그 자아에 의해 페소아가 함께 한다고 느끼는 또 다른 페소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페소아는 이런 목가적인 풍경과 정서의 시는 그 시를 쓴 사람 자체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믿은 듯, 시인 자체를 고안해 낸다. 그는 목소리를 빌려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그 목소리를 만든다. 그 목소리는 무에서 그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품고 있던 수많은 자아들 중 하나의 발명이기도 하다. 


수많은 이명을 거느리고 나타나 이런 시를 쓴 페소아가 백 년도 훌쩍 지나 오늘 내가 누리는 하루를 가능케 한 것. 페소아는 자신의 시를 읽는 이들에게 모자를 들어 인사한다. "위대한 무심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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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2-25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많은 이명의 인간들을 자신 안에 품고 산 페소아는 대단한 정신력이듯요. 저는 나 하나의 영혼도 감당하기 힘든데 말이죠. 그러다가 또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창조하고 그 삶을 표현한다는게 본연의 페소아 자신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기도 하더라구요.

blanca 2025-02-26 09:55   좋아요 1 | URL
그 이명마다 캐릭터와 서사를 부여한 것도 대단한 것 같아요.

다락방 2025-02-26 1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이 글이 한 편의 시 같네요!

blanca 2025-02-26 15:39   좋아요 0 | URL
ㅋㅋ 페소아 책 자체가 시거든요. 어떻게 에세이 문장 하나하나가 시어 같은지.. 페소아 열풍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포르투칼 너무 가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