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 어떻게 이런 말을 일기에 쓰니? 동생보고 이런 용어를 쓰고. 너 정말 혼나야 되겠다!" 

초등학교 2학년 나는 담임선생님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다. 일기때문이었다. 갓 태어난 남동생에게 집중되는
관심에서 소외되는 것이 서운해 과격한 용어를(사실 그 의미도 잘 모르면서 주목을 받고 싶은 욕심에) 동원해
동생을 저주하는 일기였던 것 같다. 중년의 넉넉한 체구의 담임선생님은 그 체구에는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며  되바라진 나를 한껏 성토했다. 한참을 야단맞고 돌아선 나는 이미 너무 상처받아서 그 순간을 기억 속에 영원히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울었던 것도 같고 아니었던 것도 같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원했던 반응 대신 돌아온 호된 질책은
여덟살의 가슴에 너무나 깊은 생채기를 냈다는 것이다. 나는 동생을 정말 미워했던 것이 아니고 나도 좀 봐달라고 나도 좀
쓰다듬어 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하는 서툰 표현을 내뱉은 것 뿐이었다. 그 일로 나는 아주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몹쓴 아이처럼 생각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책에 아주 비슷한 사례가 나온다. 다만 그녀의 담임선생은 나의 담임선생과는 백팔십도 달랐다. 초등학교 오학년 부모의 이혼을 경험한 저자는 일기에 온갖 과격한 욕설은 다 동원하여 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토로했다. 신규발령을 받아 부임한 담임선생님은 되레 그 일기장에 꼬박꼬박 상을 주었다고 한다.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은 내가 적었던 그 모든 욕이 실은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은 사랑에 대한 분노'여서, 거칠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그 욕들은 "제발 나를 좀 사랑하고 보살펴줘요"라는 외침이었다.  

만약 그 때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에 대해, 일기 쓰는 방식에 대해 단 한마디라도 야단을 치셨다면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던 그 시절의 나는 그 후 단 한 줄도 일기를 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일기를 쓰지 못했다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쏟아내는 길을 찾지 못해 반항된 행동이나 폭력으로 그 억압들을 분출했을지도 모른다. 험악한 욕으로 점철된 일기장을 묵묵히 지켜봐주시는 선생님의 용인과 격려 속에서 나는 아마도 생각과 감정을 저어함 없이 표현하는 글쓰기 방식을 훈련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 때 그 선생님이 가슴 저리도록 고맙게 느껴지던 순간이 있었다. -김형경 <천 개의 공감> 중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참으로 슬펐다. 물론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어떤 악의적 감정을 가지고 나에게 야단을 친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처지에 있었다고 가정해도 담임선생님 만큼은 아닐지라도 김형경의 담임선생님 같은 묵묵한 관용을 베풀 수 있었을 거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누군가가 특히나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을 여과없이 분출할 때 우리는 과도한 불편함을 느낀다. 그 감정 속에는 우리 자신의 거부하고 싶은 감정들의 찌꺼기와 아이다움에 대한 기대가 붕괴하는 충격적인 순간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에게 그 감정 자체를 부정하라고 그 감정 자체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라고 강요하기 쉽다. 그러나 감정은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부정해야 하는 당위의 대상으로 건져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은 나쁜 것이며 , 그런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과학적 견해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드러난 행위에 대해서는 좋다 나쁘다 판결을 내릴 수 있지만, 마음속의 행위에 대해서는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감정에 대해 판결을 내리거나 , 상상을 검열하는 것은 자유로운 사로와 정신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 하임 G. 기너트 <부모와 아이 사이> 중 

 

수잔 포워드의 <독이 되는 부모>는 자녀 교육서라기 보다는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하나의 심리치료서 같은 느낌이다. 어떤 형태로든 부모에게 과도하게 종속되어 있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한 일보전진을 독려하는 책이다. 알콜중독자, 성적/정서적/육체적으로 학대하는 극단적인 부모유형들의 제시가 가슴깊이 와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부모에 대하여 느끼는 솔직하고 적나라한 감정에 대한 직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인상깊다.누구나 부모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심리적인 억압기제를 발동시키는데 이게 후일 성장하여 대인관계를 맺는 데에 있어 더 무서운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솔직한 것이 미덕이 아닌 사회 속에서 은연중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의 표현을 미리부터 억압하는 어른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참고 감내하고 자신을 속이는 기술을 미리부터 연마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인지. 
 

그 때 그 선생님이 " 그래. 지금 당장은 동생이 태어나 너한테 관심이 오지 않아 슬프고 화가 나지? 당연히 그럴 거야. 하지만 그런 화나는 감정을 그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니까 그런 표현은 쓰지 말자. 알았지?" 이렇게만 얘기해 주셨어도 나는 마치 얼음땡 놀이에서 누구도 땡을 해주지 않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추운 데에 그렇게 오래 서있는 듯한 그 무서운 소외감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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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6 16: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05 2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2-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동 관련 서적을 보면 꼭 저를 뒤돌아보게 되요. 지금의 나도 다시 보이고. 그래서 더욱더 탐독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보면, 어른은 하찮게 스쳐지나가는 그 감정들이 아이의 입장에서는 생사가 걸린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도.


그나저나 독이 되는 부모'표지, 정말 무섭습니다. 저 저렇게 무서운 표지는 처음 봐요. 그래서 더더욱 보관함으로.

blanca 2010-02-05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은 저를 바로잡기 위해서^^;; 읽다 보면 저의 어린 시절을 많이 되돌아 보게 되고 뒤로 짚어 나가면서 저를 치유하는 느낌이랄까. 그렇죠. 표지가 조금--;; 자꾸 들여다 보게 되고 야단치는 엄마보다 방관하는 아빠의 차가운 눈빛이 더 가슴아픈 느낌이 드네요. 이 책 표지를 자꾸 딸아이가 유심히 보고 모라고 중얼대는데. 치워놓아야 될 것 같아요.

저절로 2010-02-05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어기요~땡!!!!

blanca 2010-02-05 20:52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의 땡! 고마워요! 지금 생각해도 사실 참 서운해서요. 어지간히 제가 상처를 받긴 받았나 봅니다.

라로 2010-02-05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거 읽으면 뭐해요? 실천이 안되는 一人 여깄습니다.ㅠㅠ

blanca 2010-02-05 20:54   좋아요 0 | URL
저야말로. 이런 책 열심히 읽고 오늘 하루만도 딸아이한테 몇 번이나 소리지르고. 참.... 매일 반성하는 일기라도 적어서 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꿈꾸는섬 2010-02-05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열심히 읽으려고는 하는데 실천을 잘 못해요.ㅠ.ㅠ

blanca 2010-02-06 15:00   좋아요 0 | URL
읽는 동안은 그래도 두 번 화낼거 한번 화내고 그렇게 되긴 하더라구요. 그래서 육아서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5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형경 씨가 팬싸인회에서 "자녀들을 옭아매지 말라"고 말한 것을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그냥 상투적인 효도 타령보다 신선해서 눈에 들어왔어요.

blanca 2010-02-06 15:01   좋아요 0 | URL
대부분 의식하지 못하면서 자녀들을 옭아매게 되는 것 같아요. 장성해서도. 그러지 않으려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되는데 참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한된 공간 안에 넘쳐 나는 책들.
마음 같아서야 나도 신경숙 처럼 드넓은 서재 안에 나름대로의 분류철칙까지 세워 가며 책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지만, 실상은 다 옆으로 구겨넣고 심지어 바닥에 층층탑을 만들고. 

그러니 처분을 해야 했다.
결혼하기 전에 구입한 책들은 친정에 모셔놓고(그러나 아버지가 자의적으로 처분하셨다. 대체 처분의 기준이 뭔지.)
이사 오기 전에는 한 박스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에도 한 박스 팔고
한동안은 도서관을 이용하다 다시 책꽂이 칸막이 위 틈에 불쌍하게 누워서 앙앙거리는 책들 신세도 처량하고
내가 박대하는 책이 누군가에게는 보물이 될 수도 있기에 직접 거래에 나서게 됐다.(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최대한 좋은 상태의 책들만 올려 놓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집에 있던 허접한 상자들로
성의없는 포장을 한 후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한편 나도 중고책들을 사보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 몇 가지 감동받은 사례들을 가지게 되었다. 

일단 2주이상 지연되어 책을 발송하는 판매자도 있었고,
받아 보니 책전체에서 시큼한 냄새가 물씬 풍긴 경우도 있었고(대체 정체가 뭔지 지금도 의문)
표지가 헌책이라고 온몸으로 호소하는 책, 책 속에 온갖 메모가 즐비한 책 등 기분좋지 않은 사례도 있었지만
총알배송에 꽤 된 책인데도 도저히 헌 책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책(감사)도 많았다. 

이왕 받고 나서 기분좋은 거래가 되었으면 했고
골드셀러분들은 무언가 달라도 항상 달랐다는 데에서 나는 투지를 불태우게 되었다.
총알배송. ㅋㅋㅋ 그리고 포장재까지 구입했다. 남편의 와이셔츠를 다리면서 입구를 다리미로 눌러주어
정말 알라딘에서 배송하는 것처럼 봉해서 띠지까지 넣어 보냈다.(웬 정성?) 그러고 괜히 좋아서 괜히 상쾌해서 막 웃었다.
이러면 한 몇 십권 팔아치운 고수처럼 보일 테지만 열 권도 등록 안하고 한 여덟권 팔았나? 

중고거래라는게 생각보다 사람 간의 기본 예의가 드러나는 지점이 있다.
처음 중고거래를 한 것은 반값에 나온 아이의 자연관찰 전집이었다.
판매자의 그 예의바른 목소리, 꼼꼼한 포장, 깨끗한 책의 상태로 두고두고 고마움을 느끼게 됐다.
그 분은 나에게 하나의 선례를 남겼다. 사실 상태가 좋지 못한 각종 육아 물품을 염가로 중고시장에 내어 놓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건 예의도 아니고 경우도 아니라는 생각을 품게 된 것도 나의 첫 중고거래 덕택이었다.
만약 상태도 좋지 않고 배송도 느린 경험을 했더라면 그리 중고거래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친절과 배려를 베푸는 일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 작고 섬세한 배려가 더 많은 배려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성의없이 포장한 책 받으신 몇 분들께는 정말로 죄송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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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아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3
기 드 모파상 지음, 송덕호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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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야망이 빈약한 배경과 만났을 때 인간은 때로 극단적으로 잔인해질 수 있다.
재능과 야망에 성적매력까지 가진 남자가 출세를 위하여 상류층 부인들의 속되고 무른 감정을 희롱하고 이용하는 이야기.
게다가 해피엔딩이기까지 하다. 

모파상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갈라져 있다. 유려한 묘사도 섬세한 감정의 속살의 드러냄도 없는
그저 툭툭 거친 붓으로 캔버스에 보이는 대로 단조롭게 그려갈 뿐이다. 
솔직히 이 점이 나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의 인물들은 지나치게 전형적이다.
처음부터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쁜 놈이다. 그리고 그 나쁜 놈을 훑고 가는 수많은 단상도 다 같은 색깔로 도열하고 있다.
인간의 그 연약한 가변성과 복합적인 감정의 다채로운 층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가 뛰어드는 언론계의 추악함도 그 부정성이 지나치게 비대하게 부푼 느낌이다. 
 

인간이 이용가치로만 저울질당하고 애정도 하나의 약점으로서만 작용하는 그 세계가 거북해서인지
아니면 그런 현실을 눈감아버리고 싶어만지는 나의 미성숙함때문인지 재미있고 술술 읽혔던 소설의
해피엔딩이 자못 거슬린다. 인간의 비열함과 비루함이 심판받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해피엔딩으로
읽히는 기괴함이 있다. 권선징악적인 그 위선적이고 단순유치한 도식에도 손을 들어줄 수 없지만
결국 인간과 삶을 긍정할 수 없는 그 결말에도 찝찝한 뒷맛이 과히 좋지 않다. 

모파상의 견고한 현실은 긍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빡빡했다.
대작가이지만 당시의 자연주의적 사조는 사실주의적 배경에 과장된 인간형이 얽혀 있는 형국으로 보인다.  

그래서 <벨아미>를 닫고 나오는 길은 조금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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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03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아미는 못 읽은 책이라 모르겠고,
적과 흑, 위대한 개츠비~ 도 같은 부류의 책이 아닐런지...

blanca 2010-02-03 15:31   좋아요 0 | URL
다 비슷 비슷한 부류 같아요. 개츠비만 사랑을 위해 출세를 이용했고. 저는 자꾸 청춘의 덫의 이종원 생각이 나서 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2-0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파상의 소설은 인간을 너무 적나라하고 비관적으로 그려서 싫다는 사람이 많아요.이문열 씨도 <비계 덩어리>에 대한 감상을 그렇게 쓴 적이 있지요.그런데 저는 모파상,특히 비계덩어리는 몇 년에 한 번씩 꼭 반복해 읽어요.굳이 표현을 찾자면 섬뜩한 유머라고나 할까요.블랙 코미디라는 단어로 부족하니까요.

blanca 2010-02-06 15:03   좋아요 0 | URL
아....제가 놀란 건 결말부분이었어요. 벨아미를 냉소하는 건지 옹호하는 건지 모호하게 그의 마음 속을 지나가는 생각들을 마치 당연한 상념들인마냥 나열해 놓고 끝내버려서. 참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보통 이런 인물들에 대한 냉소가 없어 좀 거북했나 봐요. 비계 덩어리 읽어봐야겠어요.
 
유혹하는 글쓰기 - 스티븐 킹의 창작론
스티븐 킹 지음, 김진준 옮김 / 김영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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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태인 수용소에서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그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나의 놀이로 제안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처연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삶의 고통의 격자 속 틈바구니에 유머를 불어넣는 것은 가볍고 경망스러운 것이 아니라 삶과 인간자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스티븐 킹은 소위 잘 팔리는 작가다. 잘 팔린다는 말만으로는 어쩌면 그의 상업적 성공의 폭을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을 만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저리>,<쇼생크탈출>,<스탠 바이 미> 등 영화화되어 이중의 성공을 거둔 작품만도 상당하다.
이런 잘 팔리는 작가가 글쓰기에 관련한 책을 낸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자
지극히 상업적인 계산에서였을 공산이 크다는 단정은 아무리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극찬을 해대도 거부감만 더해갔다.
그러다 갑자기 정말 욱해서 시작한 독서는 이 책이 단조롭고 그저그런 창작법 강론이 아니라 그의 미니자서전이고
오늘날 소설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정찬에 인생 전체를 관조하고 때로는 그것에 대한 깨달음들이
묻혀 있는 작은 철학서이도 했다는 깨달음으로 잠시 숙연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뻥' 터지는 책이라는 데에
무조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마구 강요하고 싶어진다. 



자, 그저 놀겠다는 일념으로 동생의 배설욕구를 존중해 주지 않았던 형 덕택에 덩굴옻나무로 밑을 닦아 녹말물에 6주를 좌욕해야 했고, 킹왕짱 전자석을 만들겠다고 의기충천한 형을 뒷받침해주다
건물전체 전기가 나가 경찰이 출동하고 자동차전용극장에 가 있다 "스티븐 킹, 부인이 진통중입니다!"라는 방송을
들어야 했던 사내의 이야기들 앞에 진지한 척 터지려는 웃음을 꾹꾹 누르지는 마시라. 그리고 '그게 전부다'라고 섣불리
단정짓지도 말고. 가출한 아버지 덕택에 청소 일을 해서 두 아들을 키워낸 엄마 밑에서도 유머와 익살을 소중한 보석처럼
그러안고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낳을 수 있었던 그의 얘기는 그 자체로 하나의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장담한다.
'톰 오소여의 모험' 보다 더 재미있다.

어린 아들이 표절한(^^) 만화를 보고 직접 이야기를 만들어 보라고 독려하고 실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자매들에게
돌려 읽게 한 엄마의 사려깊은 배려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지 않았을까. 이 사랑스러운 개구쟁이 형제가 장성하여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이 대목에서는 스티븐 킹의 감정표현이 전혀 없다. 그저 그날의 정경과 그날의 행동을 담담하게 얘기하고 있을 뿐. 

어머니의 눈길이 데이브(형)와 나, 데이브와 나, 데이브와 나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72㎏이던 어머니의 체중이 40㎏으로 줄어 있었다. <중략> 우리는 번갈아가며 어머니께 담배를 물려드렸다.
"내 새끼들." 

이 대목.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고 싶다. 남편 없이 밑바닥 육체 노동으로 키워낸 아들들. 그리고 그 옆에서 맞이하는 죽음.
"내 새끼들."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편 그의 성공가도에서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던 알콜과 마약 중독이 유유히 걸어나온다. 그 와중에도 우리의 스티븐 아저씨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알콜 중독자에게 술을 참으라고 하는 것은 설사병 걸린 사람에게 똥을 참으라는 얘기라고. 그가 인생에서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 잘 나가는 사람이 이런 느낌을) 속에서 걸어나오기까지의 작품들 속에는 술과 코카인에 대한 은유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우리가 무심코 흘려보낸 암시들 속에 그의 고통에 대한 상념이 절절히 배어 있었던 것이다. 

창작론 대목도 참 유쾌하고 재미있다. 인위적인 플롯의 도식과 주제를 향한 전진배치 대신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얘기의 선호는 당연하게 대중들의 호응을 끌어내었다. 특히나 부사,대명사,수동태를 혐오하는 장면은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 귀기울여봄직하다. 평이하고 직설적인 표현을 강조하며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의식을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닐런지.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덮여 있을 거라고 방방 뛰며 흥분하는 대목에서는 절로 웃게 된다. 갑자기 김훈의 <공무도하>에서 여주인공 노목희의 출판사에서 부사와 형용사의 용례사전을 간행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출판사는 음. 

요즘 드는 생각이 한 가지 있는데 글을 잘 쓴다는 것. 특히나 소설가의 역량의 핵심은 그럴듯한 문장 수사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풍요로운 상상의 지도를 그려보이는 것에 있지 않나 싶다.  문장을 현란하게 포장하는 기술이야 연마가 가능하지만 그 문장 속에 진실의 핵이 박혀 있는 이야기를 불어넣는 작업은 직관에게 인도받지 않으면 힘든 일이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만난 스티븐 킹의 창작론은 반가웠지만 그래서 씁쓸하기도 했다. 결국 뛰어난 소설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이 책 집필중에 당한 대형 교통사고가 말미를 장식한다. 이 책이 단순한 창작론으로 매듭을 짓지 않게 된 우연이기도 하다.
쾌감때문에 글을 쓴다는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 그 노고를 금전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건강으로도 치하받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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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10-02-01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안 그래도 보고 싶었는데, 더 보고 싶어지네요 :)

blanca 2010-02-01 22:49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 저도 안볼라다가 슬쩍 본 책인데 대박입니다. 꼭 보세요~

라로 2010-02-02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래서 스티븐 킹의 이 책만 읽고 그의 다른 책은 안 읽었어요~.^^;;;
사실 그의 책들이 제가 좋아하는 쟝르도 아니긴 하지만 말이지요,,,,,

blanca 2010-02-02 21:46   좋아요 0 | URL
nabee님 저도 이 책만 읽고 그의 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닙니다. 이런 책 읽으면 왠지 그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줘야 할 것만 같은 부책감이 막 들어요--;;

순오기 2010-02-03 11:56   좋아요 0 | URL
나도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만 읽었지만, 우리 애들이 좋아해서 사주거나 도서관에서 빌려다 줬어요. 샤이닝은 아들녀석이 친구 빌려줬더니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가져 가 버렸어요.ㅠㅠ

302moon 2010-02-02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4년에 구입하고 읽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는.
스티븐 킹의 소설보다는, 그의 창작론이 더 끌리더라고요. :)
애초에 소설을 읽으려 시도도 안 했지만/
친구가 좋아한다고 해서,
미저리는 언젠가 읽으려 계획했다가 아직도=_=

blanca 2010-02-02 23:54   좋아요 0 | URL
저를 비롯 이 책만 읽으신 분들이 많군요^^ 저도 시도도 안했고 솔직히ㅋㅋㅋ 계획도 없답니다. 미저리. 진짜 그 포스가 대단하죠. 그런데 또 원작은 안읽게 되네요.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아주 단순한 성격이고 신도 금방 나는 타입인데 요새는 계속 꾸준히 침울하다.
달라진 정황도 크게 없고 나를 크게 고통스럽게 할 외부적 요인도 없는데 이런게 우울증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치고 내려갈 때는 참 답답하다.
 

왜 그런고 짚어보니 가까운 데는 나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없고(왜 책을 사서 읽냐, 책읽을 시간이 있냐. 이런 이야기들)
무언가 새로운 공부를 해보고자 했는데 옆지기의 시니컬한 반응과 녹록지 않은 현실들.
현모양처 운운하며 올가미를 옭아매는 사람들. 속물근성이야 인간의 본질이지만 그것을 자랑처럼
떠벌여 대는 인간들. 낮잠을 생략해주려 하시는 따님. 따위의 이유거리들이 떠올랐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본능적으로 우울로 기우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긍정적인 정서는
의지로 만드는 거라 했다지만 그 의지를 끄집어낼 힘도 없을 정도다. 

지금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알라딘 서재와^^;; 자비로 책을 출간하라고 부추기고 대학을 한 번 더 같이 가자고(그럼 도합 세번인데 이건 좀) 바람넣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이쁜이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배 속에 천원을 끼고 날라온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처음 받아봤을 때는 기대보다 더 헐어 있고 낙서 자국도 있어 좀 뜨악했지만 판매자의 천원과 사과메모를 꾸욱꾸욱 작성하여 넣어주신 그 귀염성과 익살에 압도당해 기분이 괜찮아졌다. 

이 무식쟁이는 스티븐 킹이 <미저리> 작가인 줄도 몰랐다는. 

지금 자서전격인 이력서 부분을 막 다 읽었는데 나를 우울의 늪에서 완전히 끌어내어 줬다. 진짜 정말 우와 진짜 너무 웃기다. 읽다가 뿜다가 이런 식이다. 이거 이거 이태준의 <문장강화> 같은 책 절대 아니다.  내가 다  못읽은 몇안되는 책. 내용은 좋다지만 지루했던 <문장강화> 스티븐 킹의 창작론이라지만 그 부분까지는 미처 못갔고 어린 시절의 기억들, 유명작가가 되기까지의 그 신산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았던 과거사에 푸욱 젖어 있다. 특히 유년시절 얘기들은 티비 개그프로 한 다섯 편은 봐야 쏟아낼 수 있는 깔깔거림이 일시에 터져 나올 정도다. 

그리고 그가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나서의 반전. 알코올과 마약 중독을 고백하는 대목은 그 자체로 나를 어루만져주었다. 더이상 아내가 던킨도너츠에서 일하지 않아도 되고 그 자신 세탁소에서 구더기 끓는 시트를 세탁기에 디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그 시점에서 빠진 중독들. 그 속에서 인생이 자신을 따돌리는 듯했다고 고백하는 대목. 킹 아저씨. 지금은 아픈 사람 모두가 행복한 사람들보다 더 가까이 느껴지는 지금은 당신의 손을 잡고 싶군요.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벌써 저는 당신에게 완전히 매혹당했답니다. 그게 중독자들의 특징이라고 하셨지만. 

요즘들어 대중이 원하는 작가는 그리고 시장이 필요로 하는 작가는 예전처럼 문장을 추상성과 기교로 감치고 서사의 속살은 거칠한 고상한 작가가 아니라 속어와 은어도 적당히 기지있게 활용하고 문장 그자체의 완성도는 좀 미숙하더라도 넘치는 상상력과 다이나믹한 서사의 속살을 드러낼 수 있는 스토리지향적인 작가가 아닌가 한다. 

이제 모든 서사는 문자로보다는 이미지를 통한 즉물적인 형상화로 몸전체로 느낄 수 있어야 하는 지점으로까지 와버렸다.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시장의 흐름은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작가들의 판도도 뒤바뀌어질 수밖에 없다. 스티븐 킹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그의 넘치는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좀 무엄할 수도 있는 문장들이 빚어낸 단상들이다.  

상상의 여지가 많을수록 더 부담스러워하고 그 상상력으로 그릴 수 있는 지도까지 아예 통째로 들고나와주기를 바라는
상상하기를 두려워하는 요즘 아이들에게는  차근차근 상상력이 들이밀 수 있는 행간을 만들어 주는 지루한 작가보다는
그저 하나하나 도달할 수 있는 상상력의 천장까지 닦아서 만들어 주는 친절한 작가에 흥분할 수밖에. 

주저리주저리 우울하다는 얘기로 시작해서 참 엉뚱한 길로 잘도 비약해서 오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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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0-01-3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6월달에 사려고 했는데(그러니까 제가 6월까지는 책 구매를 멈추려 했거든요) 이 페이퍼를 보고나니 당장 질러야 하는걸까 하는 생각에 마구 마음이 급해져요. 아 어쩌죠 ㅠㅠ

blanca 2010-01-31 23:4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유월달까지. 우와! 일단 그만큼 재고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얘기겠죠? 저는 일단 한달에 오만원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이번 달은 칠천원으로 끝났음을, 그리고 오늘은 31일이라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답니다. 되도록 책을 팔고 중고책으로 구입하기로 했지만 역시 장바구니는 두둑하네요. 그리고 지금 거의 다 읽어가고 있는데 정말 강추합니다. 무엇보다 울트라 캡숑 재미있걸랑요~ (마구 부추김)

꿈꾸는섬 2010-02-01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유혹적인 책이네요.ㅎㅎ

blanca 2010-02-01 13:05   좋아요 0 | URL
이 사람 자체도 매혹적인 것 같아요. 정말 재기발랄한. 이 책을 닫고 나오면서 우울의 늪에서 어느정도 탈출을 했답니다. 꿈꾸는 섬님도 힘차고 즐거운 한 주 시작하기를 바랍니당^^

기억의집 2010-02-01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읽고 웃겨서 뒤집어 진적이 두 번 있었는데 한번은 저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였고요 두번째는 <아즈망가 대왕>이었어요. 저는 킹을 좋아해서 대체로 작품을 거진 다 읽었는데, 그가 저렇게 웃기게 글을 쓰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생각한 책이 바로 <유혹하는 글쓰기>였어요. 삶을 참 유쾌하게 사는 작가죠!

인생은 여러 굴곡을 거쳐야하나봐요. 남 부러울 것없는 킹도 약물중독이었던 보면....^^
여러 사람이 있겠지만 킹이 바람 안 피운 것은 참 신기하게 생각했어요. 하핫!

blanca 2010-02-01 13:07   좋아요 0 | URL
기억의 집님 그렇죠! 저도 책 읽다 뒤집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은 킹 어린시절에 형이랑 사고쳐서 경찰출동하는 장면에서 완전 엎어졌답니다.ㅋㅋㅋㅋ 보통 미국식 유머가 우리나라 사람이 읽으면 그닥 재미없는데 킹은 유머가 아니라 삶자체가 참^^;; 저도 아내 사랑이 대단한 거 보고 참 부럽고 의외고 그랬어요.

예...진짜 인생굴곡없는 사람은 없나봐요. 이렇게 재능있고 잘나가는 작가도 결국 마약과 술, 교통사고로 위기를 겪는 걸 보면...

아시마 2010-02-0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전 사다 책장에 꽂아둔지 한 5-6년 될걸요. 아직도 안읽고 있어요. ㅎㅎㅎ 정말 좋다는 극찬을 몇번이나 들었던지라 맛난거 아껴먹는 심정으루다... 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맨날 뭐. ^^;;;
울트라 캡숑 재미있다면, 읽던 소설 던져두고 먼저 잡아볼랍니다.

그리고 블랑카님, 우울해하지 마세요. 아이는 곧 자라고, 조금만 기다리면 이제 어린이집도 가고 할텐데요. 인생, 길게 보자구요. 책이 썩는것도 아니고. (이런 말들로 저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중....)

blanca 2010-02-01 13:08   좋아요 0 | URL
우와! 아시마님. 한동안 서재에 안보이셔서 기다렸었는데. 진짜 잼나요. 진짜루다가! 다른책 좀 치워두시고 함 읽어 보시면 진짜 포복절도하실 겁니다. 어린이집. 안그래도 그치만 또 언젠가 둘째가. 으윽. 아시마님이 부러워요. 첫째 어느 정도 크고 둘째 숙제도 하시고. 이제 자유로워질 일만 남았잖아요. 저는 갈길이 너무 너무 멀어서. 위로 감사해요!

순오기 2010-02-01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저 때문에 산 분들도 있었죠.^^
킹 아저씨 유머는 그 누구도 못 따라갈 듯. 뿡야~ ㅋㅋㅋ

blanca 2010-02-01 14:54   좋아요 0 | URL
뿡야 ㅋㅋㅋㅋ 순오기님은 역시 센스쟁이이신듯.

저절로 2010-02-02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저 지금 지르러갑니다요.

blanca 2010-02-02 21:47   좋아요 0 | URL
에파타님 자꾸 지름신을 강림하게 해서 괜찮을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