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가수 호란이 인터뷰중 마구 칭찬해 준 덕택에 읽게 되었다. 뉴욕타임즈에서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는 칭호까지 수여받은 그의 냉철하지만 다정다감한 시선이 너무 좋아 닥치는 대로 그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신경외과의사인 그는 주로 환자들의 임상사례를 통해 결함,장애, 질병이 개개인에게 어떻게 역설적으로 창조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갑자기 눈이 멀어도, 반신불수가 되어도, 기억을 잃어버려도 그들의 혹은 우리들의 삶은 비관적인 상상과는 다르게  변화 진보해 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화성의 인류학자'에서도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연장선상에서 임상사례를 통한 그의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꾸려가는 삶에 대한, 명쾌한 긍정은 계속된다. 다만 후자가 약간 임팩트가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색맹의 섬'은 일종의 여행기다. 전색맹과 신경퇴행장애가 풍토병화되어있는 미크로네시아를 두 번 방문한 기록이다. 사적인 감상과 과학적인 성찰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만 양치식물, 소철에 대한 지질학적 이야기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수전 손택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실려있는 해설에 차용된 부분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대중문화계의 퍼스트레이디'(이런 거 보면 미국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관념적이고 선정적인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문화를 즐기고 감상하는 심미가에서 더 나아가 조국인 미국의 패권주의를 용기있게 고백하고 성토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진화했다. 그녀의 문장은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재조합되어 평범하고 무딘 사람들의 감수성을 일깨운다. 어려운 내용일 것도 같은데 그녀의 펜에서는 명쾌하고 간결하게 재해석되어 나온다. 가독성이 좋다. 

일종의 사회 제반 현상에 만연되어 있는 정서에 대한 통찰로 집약되는 내용들이다. '타인의 고통'이 좀더 읽기 쉽지만 이제까지 타인의고통을 은연중 즐기고 있었다는 못된 관음증을 깨닫게 되는 불편한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연민으로 연결되지 않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그 불편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있다.  

'은유로서의 질병'은 사회에서 펼쳐지는 거대 담론의 중심에 도사리고 있는 그 헤게모니를 질병(결핵, 암, 에이즈)에 붙이는 각종 표식들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실제 암투병을 여러 번 하였던 그녀는 암이 생각만큼 무서운 병이 아니라 그 병에 걸린 사람에 낙인을 찍는 사회의 횡포가 더 무서운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후에 그녀의 투병기에서는 이것은 일부 수정된다.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그녀의 죽음 앞에서 펼쳐진 그녀를 둘러싼 풍경과 그녀의 그 처절한 투쟁을 담담하게 회한에 젖은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사실 수전 손택이 절대로 평범해지지 않을거라 절규했던 그 장면이 끊임없이 오버랩되어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추스려야 할 만큼 그녀답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아야 하는 단점이 있다. 그녀는 끝까지 죽음과 불화하다 고통스럽게 죽는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번에 이 책을 집어든 것을 후회한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서 과연 삶을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사는 것과 결국 오고 말 죽음과 화해하고 평화스럽게 가기 위해 조금 덜 집착하고 더 포기하는 것이 나은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데에 만족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렇게나 경멸했던 타인의 고통에 대한 뻔뻔한 연민과 연루되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연결은 우리도 공통의 그 피할 수 없는 종결을 공유하고 있다는 자각의 고리가 있기에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따라온다. 유명인의 최후에 대한 선정적인 보고가 아니라 데면데면해서 더 담백했던 그 모자 관계 만큼 투박하지만 진지하고 특별한 책이다.  

 

기억은 이미 죽은 사람들과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가슴 시리고도 유일한 관계라고 그녀는 말했지. 우리가 그녀를 기억하는 한, 모든 제반 현상의 가운데에 있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책임감 있는 연민을 가졌던 그녀와의 관계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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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결핍이 강하게 느껴질 때 방법론적인 결론을 기대하며 각종 심리책들을 뒤적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심리에 관련된 책을 많이 읽을 때 나는 행복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종종 치유의 효과도 경험한다. 당연한 얘기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인간의 그 미묘하고 비정형적인 영역을 실증적으로 탐구해 가고자 하는 그 무모하지만 뻔하지 않은 시도가 신뢰를 준다. 많이 힘들 때는 타인의 조언을 듣는 것보다 내가 그 상황을 받아들이며 쏟아 내는 감정들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직시하게 되면 그 상황이 내가 감정의 덧칠로 이지러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천개의 공감'은 제목이나 내용이 너무 알려져서 저평가된 책이 아닌가 한다. 작가 자신이 심리전문가는 아니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 번 정신분석을 받은 경험을 토대로 각종 상황에 대한 분석 및 상담을 해주고 있다. 아마추어적인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그 면이 치열한 공부와 진지한 공감으로 빛난다.  

그랜트연구는 하버드 대학의 성인 발달 연구로 하버드생 268명의 삶을  76년간 종단 연구한 것으로 이 책은 주로 '노화'라는 관점에서 조망한 몇 몇의 삶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 형태를 띠고 있다. 삶 자체가 가지는 그 드라마틱함은 다이나믹한 단편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 마저 들 정도이다. 그 어떤 책보다 삶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책으로 생활 속의 사소한 것들이 주는 자극에서 조금 초연해질 수 있는 통로가 되지 않을까 한다.  

'천 개의 공감'에서 빌려온 책들이다. 정신분석은 사실 유년시절에 묻혀져 있는 수많은 아픈 결핍들을 발굴하는 작업들이다. 두 책 모두 약간 전문적인 임상 사례 중심이라 읽기 쉽지는 않지만 유아들이 주양육자인 엄마와 형성해 가는 애착들의 강도와 양태가 뒤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 지를 찾아가다 보면 안풀리던 매듭이 풀리듯 나의 현 결핍들을 이해해 나갈 수 있다.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며 내가 그래서 이런 거구나, 하고 눈이 번쩍 뜨인다.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들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재미 그 자체만을 놓고 본다면 조금 서운한 책들인 것은 사실. 

 

 

 

'아이의 사생활'이야 EBS에서 방영할 당시의 폭발적 반응이 뒷받침 된 책으로 아이의 발달을 뇌생리학적 측면에서 진지하게 살펴 보고자 한 시도와 또 그 성취가 놀랍다. 더 나아가 남아, 여아의 성 차이가 단순히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나는 여러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 남녀 성차이를 다룬 책이야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위시하여 봇물처럼 밀려들어왔지만 사실 이 책 한 권으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남자가 왜 감정의 표현에 미숙한지, 여자는 슬픔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정작 남자는 어떻게 회사에 출근하여 묵묵하게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는지 그 수수께끼의 해답이 나와 있다. 꼭 아이 교육에 대한 관심이 아니더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나를 미치게 할 때'는 제목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어서 오히려 책 내용이 가라앉는 것 같다. 저자가 직접 딸을 키우면서 가졌던 시행착오의 경험들과 그것을 전체적 맥락에서 재조망할 수 있는 식견을 얻을 수 있다. 제목과는 달리 젠 체하지 않고 엄마이기 전에 감정에 흔들리는 하나의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또 이해해 주는 그녀의 용기와 이해가 번역서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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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여행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 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Nazim Hikmet(1902~1963, 터키) 

이 아름다운 시는 터키의 한 저항시인에 의하여 투옥중에 씌어졌다. 그는 고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스크바 유학 후에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냉전시대 덕택으로 10여년 간 감옥생활을 하다 결국 모스크바로 망명해 폴란드인으로 죽는다. 그의 국적은 빼앗기고 53년이 지나서야 수많은 사람들의 청원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의 글 등을 통해 비로소 회복된다. 터키에서 태어나서 폴란드인으로 러시아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비감어린 삶 속에서 그의 고백은 더 절절하게 공명을 얻는다.  

류시화가 치유시(healig poem)라는 장르 안에 담아 국내에 소개한 이 시는 무언가 지나치게 심각한 효과를 기대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읽는 개개인마다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어루만져준다. 불행한 가운데서도 그럭저럭 살만 하다 싶을 때에도 무언가 더 기대할 최상의 순간들이 아직 앞에 남아 있다는 기대는 우리를 살게 한다. 내일이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죽음으로 뻗어 있는 내일 속 군데군데에 아름다운 순간들이 그것도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최상의 순간들이 숨어 있다는 자각은 누가 일깨워 주기 전에는 쉽사리 할 수 없다. 이 순간  시인은 걸어들어온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상처가 더 심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안온한 느낌에 내일도 일어나 삶으로 뛰어들 용기를 얻게 된다.  

이 시의 저자인 Nazim Hikmet 의 시집을 읽고 싶지만 구할 길이 없다. 국내에 번역본이 없다. 김연수가 인터뷰때 시의 치유 능력과 함께 자주 언급하는 시인 메리 올리버의 시집도 구할 수 없다. 시가 안 팔리는 시대다. 구태여 외국시를 번역하여 내놓을 필요성을 못느낄 만치 그 시장이 열악하고 협소하다. 치유받고 싶어도 치유받을 수 없는 시간들 속에 우리는 산다. 누가 건드려 일깨우기 전에는 절대 보고 듣고 알 수 없는 것들은 그렇게 우리 앞에 죽은 듯이 엎드려 삶을 더 고달픈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사물의 그 내밀한 곳을 관통하는 예리하지만 다정다감한 그 시선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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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14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꼭 씹고 싶은 시네요. 들어가는 문단은 낯익어요.
http://www.poemhunter.com/nazim-hikmet/
이사람 시가 모여 있는 사이트를 찾았어요. 하나씩 꺼내 읽어봐야겠어요. ^^

blanca 2009-12-14 22:11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이랑 저는 들어오는 시간이 비슷한듯.^^ 어이구, 이런 귀한 곳을. 어떻게 찾으셨나요? 사실 아마존에 주문해 보고 싶은데 버벅거릴까 귀찮을까 싶어 기냥 말고 외국 나가는 사람 있음 함 구해 볼라구요. 사실 제가 요즘 무엇을 해야 할 지 더이상 알 수 없는 상태라서 ㅋㅋㅋ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랐답니다

하이드 2009-12-1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위의 사이트에 이 사람의 시가 21개 정도 있는데요, (영어번역으로요) 이 사이트 보니, 옆에 이 시들을 pdf로 다운 받을 수도 있더라구요. 일단 그냥 프린트해서 보시는 것도 괜찮을듯.
저 요즘 blanca님 글들을 재발견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담스럽죠? ㅎ

blanca 2009-12-14 22:27   좋아요 0 | URL
프린트해야겠습니다. 진짜 고마워용.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서워요 ㅋㅋㅋ 인정받는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우하하!
 

한동안 마지막 장을 덮으면 금세 다 죽어버리는 등장인물들의 가벼운 무게가 싫어 소설을 안읽다 올해는 다시 그 허구 속에
녹아 있는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이 좋아 소설을 읽게 되었다.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김연수의 발견. 물론 아쉬운 점도 많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체험과 맞물리지 않아 공허한 대목들이 있고, 지나치게 쿨하고 감각적인 분위기에 치중하여 정작 인물들이 가끔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그 섬세하고 오감을 일일이 깨우는 것 같은 예쁜 문체와 독자들이 무엇을 듣고 싶어하는지,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지를 예리하게 파악하는 명민함은 그의 소설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진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상쾌하다. 지금보다는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재미있게 멋지게 잘 쓰는 문장들이 좋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강추했기에 언젠가는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던 그의 책들이 그 두께 때문에 오늘에서야 나에게 왔다. 아프가니스탄은 매일 폭탄테러나 터지고 사랑, 추억, 아름다운 풍속 등과는 전혀 관련없는 곳인줄 알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람이 살고 사랑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계승하는 공간임을 일깨워준 책이다. 스토리의 큰 스케일이 주는 다이나믹한 재미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어떤 홍보물보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제대로 된 시각과 연민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정말 좋은 책인 것 같다.  

사건들의 전개가 시원시원하고 등장인물들이 전형성과 개성이 교과서처럼 잘 어우러져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다큐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자아낸다. 후속작이 없음이 안타깝다.  

 


수전 손택이 극찬했던 작품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보석 같은 작품이다. 작품성이나 재미에 비하여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정도다. 픽션과 다큐의 경계에 있는 작품으로 화자가 도스토예스프키의 독일 바덴바덴에서의 시절을 추적해 가는 소설에 대한 소설 형식을 띠고 있다.   

체호프 단편선은 일단 정말 재미있다. 분량은 대체로 짧은 편인데 번역도 유려하고 짧은 단막극들을 보는 것 같은 재미가 쏠쏠하다. 사실 현대의 단편 소설 작가들의 작품들이 상당부분 체호프의 오마주라고도 하니 여차저차 읽어야 할 명분만 한보따리인 작품이다. 서둘러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의 작가들은 솔제니친도 그렇고 대체로 심리묘사보다는 배경과 인물묘사에 치중하여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다. 이 점은 대부분의 작품의 가독성을 높이고 재미를 더하는 데 일조를 담당해 적어도 너무 재미없어서 책을 읽다 그만두는 불상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 물론 또 반전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겠지만.   

 

김훈의 소설이야 그 문체의 담백함과 사물과 사건에 대한 예리한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은 항상 긴 기사를 읽고 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전직은 못속이나 보다. 거북할 수도 있지만 감정의 과잉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깔끔하다. 논픽션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환호할 것 같다. 닮고 싶은 문체다.  

신경숙의 '외딴방'은 그저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뒤늦게야 접하고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엄마를 부탁해'보다 오히려 더 그녀다워 보여 좋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많이 쓸고 닦아 반질반질한 바닥에 궁둥이를 디미는 느낌. 그래서 괜히 한없이 미안해지는 느낌. 그녀에게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들은 다른 책보다 이 책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갔다.  

오정희의 '유년의 뜰'은 연작소설 같이 여러 편의 단편을 주인공의 연령 순으로 묶은 작품이다. 처음 읽는데도 자꾸 두 번 세 번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만큼 이 작품이 문학사에서 여러 번 재생되었다는 방증이다. 수많은 유년소설들이 이 작품에 빚진 바가 많다고 하니 그런 느낌도 무리는 아닐 것 같다. 문장 하나 하나를 베껴 써보고 싶을 정도로 빛난다.  

                                                                                

일단 이 두 작품은 아주 재미있어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며칠에 나누어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 '눈먼 자들의 도시'는 인간세계에 대한 통찰과 인간에 대한 그 예리한 시선이 놀랍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다 눈이 멀어버리는 그 백색공포의 세계를 재현하는 작가의 능력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 숨죽이며 결말을 기다리는 독자의 초조함은 마치 작가에게 감정을 통째로 저당잡힌 것 같아 불편할 정도다. 

'허삼관 매혈기'는 그야말로 울다 웃다 남사스러울 정도이니 혼자 구석에서 읽는 것이 좋지 않을까. 매혈로 생계를 이어가는 그 처절한 스토리가 어떻게 희화화될 수 있는지를 살피다 보면 결국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가능해질 수 있는 작품이다. 인생이란 어차피 머리로 보면 희극이고 마음으로 보면 비극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너무 늦게 만났지만 지금 만났기에 더 의미있는 독서가 될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빨치산을 뿔달린 도깨비가 아니라 숨쉬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게 한 책. 우리나라의 그 비극적인 역사 속에 함몰되어 있던 수많은 민중들을 일으켜 세운 책.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우리나라 국민이라는 것에 대하여 우리 민족이라는 것에 대해 애틋한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책. 옆자리의 사람의 사소한 사연들에 공명할 수 있게 하는 책.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2009년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그 꼬리를 붙잡고 있음에도 덜 허무할 수 있었다고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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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마 2009-12-17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랑 취향이 비슷하신가봐요. ^^ 김연수, 저도 처음엔 별로였다가 전 <여행할 권리> 읽고 읽기 시작했거든요. 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블랑카 님보다는 조금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네요. ㅎㅎ 의외다, 참 좋네, 했거든요. 김연수 문장, 참 단정하다는 생각 안하세요? 이건 제 병통이기도 할텐데, 아마 번역을 많이한 작가의 이력이 문장을 이렇게 단정하게 다듬어주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 하곤 하는데. 작가 이력 찾아서 얘는 이러저러해서 이런 글을 쓰는 구나 라는 상상하길 좋아하는 건 확실히 좀. ㅎㅎ
태백산맥은 이후의 작가들에게 길을 열어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박경리 선생님 토지를 우뚝한 봉우리라고 가정한다면, 태백산맥은 산 아래 등산로 매표소의 느낌이랄까. 물론 굉장히 좋지만 이 분야에서 더 많은 작품이 나와야 하고 나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blanca 2009-12-18 00:15   좋아요 0 | URL
김연수...참 묘한 흡입력이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번역. 저도 작가의 이력 추적에 밤을 샌답니다. 작품보다 작가의 사생활에 더 관심이 많다니까요. 님은 어찌 제가 다 읽고 싶은 책을 미리 다 읽으셨답니까. 저는 대하 소설은 한 번 잡으니까 너무 병폐가 많아서 조심하고 있어요. 자꾸 딸내미를 방치하게 되서. 참으려구요. 원래 내년 초에 아리랑을 읽으려고 했는데 님 얘기듣고 혼불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참 세트가 없네요. 한 권씩 질러야 하는 건지...님이 쓴 글 읽고 깜짝 깜짝 놀랍니다. 진짜로 취향이 너무 비슷해서....기분 좋네요^^
 

 

 

 

 

 

 

   

역사서라고는 하지만 거의 이덕일의 것이라 편중된 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위의 네 권은 학계에서의 논란과는 별개로
역사 속 인물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현재화하는 과정에서 이룩한 성취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물 중심의
책들이어서 그런지 다 한 편의 장중한 소설들을 읽어 낸 듯한 여운을 남긴다. 드라마틱한 재미가 커서 역사 관련물이라면
고루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예단을 사정없이 깨어준다. 특히나 '사도세자의 고백'에서 영조가 임종을 맞으며 정조에게
옥쇄를 물려주는 장면,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에서 송시열이 효종의 관을 덧댄 것에 대한 회한으로 자신의 관도 덧댄 널빤지를 사용할 것을 유언하는 장면 등은 그 역사적 사실의 드라마틱함을 떠나 이덕일의 묘사 자체가 가지는 미학이 극치에 이른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야 한비야의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이미 최고의 찬사를 받은 전력이 있다. 비단 정약용 가문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의 개화 및 개혁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 한계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어 추천한다.  

이 책은 위의 이덕일 저서들과 맞물릴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덕일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한 '조선왕 독살사건'을 위시하여 그가 끊임없이 제기하여 온 정조 독살설에 배치되는 사료라고 주장하는 의견들이 일제히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결국 죽게 만든(사실 이 뒤주설도 논란이 많긴 하다) 노론 벽파계의 수장 심환지와의 밀담을 나눈 서찰이 발굴된 것은 그 자체만으로 노론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하는데 유리하지 않은 정황이라는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하여 갑론을박이 많은 것은 사실 노론사관이 식민사관과 맞물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과 미묘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런 것 같다. 나의 입장은 단지 밀담을 정답게 나누는 서찰이 나온 것으로 독살설 그 자체를 전복할 합당한 근거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약이라는 생각이다.  

한자어가 난무하고 아무래도 시간적 한계 때문에 그랬는지 주석이 충분하지 않아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조선후기 역사나 정조 자체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책이다. 헛소문 퍼뜨리는 신하들에게 뒤에서 욕설을 내뱉는  정조의 모습은 지금까지 각종 사극에서 형상화했던, 또 우리가 기대했던 정조의 모습과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오랜 가뭄끝에 비가 오자  너무 좋아하면 일을 그르칠까 억누르는 그의 모습과 답장 안 준다고 기다리는 모습 등은 더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그를 느끼게 한다. 한자실력이 좀되는 분들은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사서라고는 하지만 다시 인물 중심, 저자 중심의 편중된 독서였던 것과 계속 영정조 시대만 맴돌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또 아무래도 한자실력이 안따르다 보니 인용부분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가 어려웠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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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12-13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책읽는거 부러워요. 목적이 분명한 독서같이 보여요. 제가 읽어치우는 것에 비해서요 ^^;

blanca 2009-12-13 22:29   좋아요 0 | URL
ㅋㅋ페이퍼 작성하는데 댓글이 달리네요. 목적 전혀 없어요. 그냥 있는 척 하는 거지요 ㅋㅋㅋ 하이드님이 감히 저 같은 것을 부러워하다니. 하이드님은 그 자체로 알라딘의 아이콘 아니신가요? 그런데 오늘 계속 하이드님 서재만 안들어가져서 심히 절망하고 있답니다. 자꾸 에러가 나네요. 올린 동영상 때문에 그런 것인지.

하이드 2009-12-1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안 들어가졌어요 -_-;; 동영상 때문이었나봐요. 이느무 ㅅㅂㅅ 당장 지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