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마시고 자고 그리고 언급하기 좀 뭣한 그것을 하고 그 다음에도 인간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결국 소통이라는 미명 하에
두 사람 이상만 모이면 항상 시작되는 그 매력적인 화제는 바로 그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뒷담화되겠다. 물론 자제심과 절제의 미덕을 가진 아주 세련된 포장술에 익숙한 이들은 그 뒷담화를 듣기만 함으로써 주동하거나 공모하지 않았다고 합리화한다. 

누구에게나 결핍이 있다. 그 결핍의 상처를 자극하는 기제는 다양하다. 그런 결핍이 과하게 노출된 사람도 그런 결핍 자체가 없는 사람도 결국 비난하고 투사하는 대상이 된다. 우리는 항상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만 온전하게 그럴 수 없는 부분을
남들에 대한 비난 내지 거론으로 갈음하려 한다.  

서머싯 몸은 세속적인 성공과 예술적인 성취를 어느 정도 양립하여 이루어 낸 작가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그의 앙분에 찬 독설의 향연이 그의 여성에 대한 혐오감, 비평가들에 대한 적의, 문장력에 대한 머뭇거림 등과 머물려 아주 질펀하게 펼쳐진다.  

제인 오스틴, 스탕달, 발자크, 찰스 디킨드, 플로베르, 에밀리 브론테, 도스토예프스키, 심지어 톨스토이까지 그 앞에서는 아주 난자하게 해부된다. 온갖 추문과 작품의 허술한 부분이 다 들춰진다. 천재가 가지는 치명적 결함과 별로 도덕적이지 않은 사생활에 대한 얘기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부터 듣는 재미는 또 색다르다. 다만 이 뒷담화에 탐닉하다 보면 결국 내가 좋아했던 바로 그가 가진 가장 큰 결함이 인간에 대한 절망어린 시선과 교묘한 위장술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전염되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다.  결국 서머싯 몸은 이 일단의 불멸의 작가들을 칭송하는 듯 하면서 결론적으로 교묘하게 폄하하고 있는 작업에 성공했다.

 

작가들의 사생활이 출생 배경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각종 고증에 의하여 세세하게 펼쳐지고 다음에는 그 작가들의 대표작의 구리고 허술한 틈새에 가차없이 메스를 들이댄다. 좋아하는 작가라면 조금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방금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을 읽고 도스토예프스키가 도박중독에 빠져 허우적댄 것도 결국 그의 예술적 광기와 유약한 심성 탓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었던 나에게 기실 그는 미천한 계급 출신들을 그 면전에서 면박주고 비하했으며, 하층 계급 여자를 강간한 것을 자랑삼아 떠들고 다녔다는 대목을 들이댄다면 멈칫할 수밖에 없다.  그가 위대한 작가가 된 것은 악덕덕택이고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지배하려는 욕구와 굴종하려는 욕망, 부드러움이 결여된 사랑과 악의에 가득 찬 증오로만 구성되어 있는 단순함의 극치라는 평가에 이르러서는 몸이 주는 것 없이 미운 인간이라고 지목했던 대목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리뷰에서 대화문의 압박이라는 평을 읽고 웃었던 기억이 나는데 여기에서 그 이유가 나온다. 바로 도스토예스프키가 이야기를 장황하게 끌고 가는 버릇을 자기 스스로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대화에 한번 빠졌다 하면 한도 끝도 없이 이어졌단다. 

 

 

 

 

 

 

 

 

그리고 <보봐리 부인>의 플로베르. 무슨 ~부인 시리즈가 주는 끈적한 기대에 기대어 읽었었지만 단조롭고 힘든 독서였다. 몸의 해설 덕택에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몸이 낭만주의자이자 리얼리스트라 칭한 그는 아주 성실한 작가여서 자신의 문체를 다듬고 또 다듬는 데 열성이었다고 하니 원서가 아닌 번역서로 그의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데에는 실질적인 한계에 부닥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몸 자신도 플로베르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며 그 한계를 수긍하고 있다.플로베르에게는 아주 절친한 친구 두 명이 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아주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두 친구 부이예와 뒤 캉은 그가 낭독하는 작품을 며칠에 걸쳐 듣고 함께 토론하고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두 친구가 눈을 지그시 감고 플로베르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바로 그 장면과 며칠에 걸친 그 세 친구의 변주가 막을 내리고 함께 노곤한 잠에 빠져드는 그 순간이 다가와 앉는다.

  

 

 

 

 

  

 

<고리오 영감>의 발자크는 몸이 주저없이 천재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빚독촉에 시달릴 때라만 글 쓸 생각을 했다는 발자크의 땅딸보 체격의 우스꽝스러운 사진과 잠깐 서기로 일했던 법률사무소에서 오늘은 일이 너무 많으니까 사무실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 부분에 이르러서야 몸이 과연 발자크의 천재성을 기탄없이 인정한 까닭을 알게 될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은 현대 로맨스 영화들의 그 밀고 땡기는 도식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아니다. 독신으로 살았던 이 재기발랄한 작가 아가씨에 대한 얘기는 그 자체로 예쁜 칙릿 소설 같다. 언니 카산드라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들은 재치있는 뒷담화들로 가득하다.  

독신녀들이 가난해진다는 무서운 경향이 있어. 이것이 결혼을 추구하는 매우 강력한 이유중 하나야. 

홀더 부인이 돌아가시다니! 불쌍한 사람 같으니, 세상 사람들이 더이상 험담을 늘어놓기 못하게 할 유일한 방법이 그 길뿐이었던 게야. -p.80

 

톨스토이 아내 소냐는 소크라테스의 악처 크산티페처럼 알려져 있다. 귀족 출신 톨스토이가 만년의 물적 소유물들과 각종 저작권들을 사회로 환원하려 했던 시도에 그녀는 반발한다. 그녀에 대한 톨스토이의 미움이 너무 커서 임종시 입회조차 못했다고 들었는데 몸의 얘기는 또 다르다. 여기에서 그가 어느 정도 객관적이려고 노력한 모습이 엿보인다. 그녀와 톨스토이 사이에는 무려 여덟 명의 자녀가 있었고 이들은 다 경제력이 없었다. 무일푼으로 가족들을 방기하려는 의도를 소냐가 납득할 수 없었음은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몸은 톨스토이가 스스로 던진 메시지에 갇혔다고 표현했는데 아주 예리한 지적 같다. 이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톨스토이에게 그들의 비대해진 고상해지고자 하는 욕구를 투사했다. 톨스토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기부하고 성자처럼 살기를 바랐다. 몸은 톨스토이가 주저주저한 것은 그가 충분히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귀족 출신의 세계적으로 추앙받게 된 작가가 가진 모든 것, 심지어 가족까지 내던지고 고결한 가치를 위하여 살아주기를 바랐던 동시대인들 모두가 치사한 공범자 같다. 왜 우리는 할 수 없는 것을 그 누군가에게 잔인하리만치 해 주기를 조르게 되는 걸까.  

그가 아내에게 그 많은 아이들을 다 모유수유하기를 고집했다는 사실은 <안나 카레니나>에서 젖을 주는 여자의 심리와 육체적 변화를 어쩌면 그토록 섬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한 묘한 근거가 된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여자를 이해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하여 그 예리한 눈으로 가차없이 그것에 대한 집착적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농노의 아내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를 자신의 아들의 마부로 부리는 엽기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저질렀다고 한다. 인간의 비루한 품성은 극복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지, 온전히 선하게 타고 나지 못했다고 비하하고 체념할 일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되면 그가 가장 사랑했던 작중 인물인 레빈이 무신경하고 이기적이었던 과거를 회개하고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하여 애정어린 천착을 하는 대목에 압도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결국 톨스토이는 레빈을 통해 회개하고 있다. 몸이 얘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작가의 삶과 그 자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그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은 위대한 작가가 문장력도 겸비한 것은 아니었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 작가에게 있어 특히 소설가에게 문장력은 부수적인 것이다. 그것보다는 인간과 삶에 대한 진지한 통찰력과 이해가 뒤따라야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혐오하기 때문에 그것의 묘사에 성공했던 사례를 몸은 여러 번 제시한다. 몸은 인간과 삶에 대하여 냉소적이고 어느 정도 절망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두운 시선이라고 해서 속살을 드러내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가지고 가고 싶은 얘기들이 어느 정도 있기 마련. 다음과 같은 얘기들은 철학적 식견을 전파하는 소설가로서의 역할을 거부했지만 그 자신이 가장 완벽하게 수행한 것 같다.

만약 타인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거의 없으며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점을 처음부터 깨닫도록 가르칠 수 있다면, 또한 재산 명예 사랑 명성 등 그들이 얻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에 대한 대가를 어떤 식으로든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칠 수 있다면, 그리고 이에 더해 그것이 어떤 것이든 본래의 가치보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도록 하는데 지혜의 대부분을 발휘하도록 가르칠 수 있다면<중략>-P.70

서머싯 몸의 뒷담화를 듣고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인간에 대한 이해다. 누구나 염증스런 부분이 조금씩 있다. 그것이 전체를 압도해서 그 사람 자체를 거부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인내하고 조금 덜 기대해도 된다. 그게 삶이다. 그게 삶에 대한 관용이다. 그러니 이 독서는 참으로 유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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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2-23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겠는데요.. 지금 다시 도전하려고 책을 사놓았지만, 예전에 <카라마조프->를 도전한 적이 있었죠. 한사람이 떠들기 시작하면, 몇페이지는 혼자 이야기 합니다. 그 기억이 떠올라 쿡하고 웃었네요..

뒷담화.. 술자리의 윤활유죠. 그러나 집에 가는 지하철에서 뒷목이 서늘해지며 제가 형편없는 인간이라는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는 후회가 들고는 했습니다. 그걸 공개적으로 책으로까지 낸 서머셋 몸에게 박수를.

blanca 2010-02-23 22:13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저는 몇 번이나 사려고 했는데 리뷰가 좀, 읽기 힘들다는 평이 많아서 나중으로 미루어 뒀어요. 대화문의 압박이 정말 사실이군요 ㅋㅋ 그래도 언젠까는 꼭 읽을 거라고 다짐하고 있답니다.

뒷담화. 아무리 훌륭해 보이는 사람도 결국은 돌려서 완곡하게 아닌 것처럼 다 하더라구요^^;; 저는 사실 서머싯 몸 다시 봤어요. 아주 걸쭉하게 하던걸요. 못생기고 배나왔다는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더라구요. ㅋㅋㅋ

프레이야 2010-02-2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참 좋아요.
담아갑니다. 인간에 대해, 삶에 대해 관용을 베풀 여유를 조금 갖게 될까요?^^

blanca 2010-02-23 22:14   좋아요 0 | URL
아이쿠나.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몸 둘 바를^^;;; 요즘 사람은 다 비슷비슷하고 다 그 나름대로 이해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가고 있는 중입니다. 너무 좋아할 것도 미워할 것도 없더라구요.

stella.K 2010-02-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책 딱 내 꽈군요. 왜 이제야 알았을까요?
서머셋 몸답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0-02-23 22:15   좋아요 0 | URL
저는 이런 책인줄 몰랐는데 읽다보니 포복절도하게 되더라구요. 남의 얘기는 언제나 재미있는 것 같아요.^^

L.SHIN 2010-02-23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군요.^^

blanca 2010-02-23 22:1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참 인상적으로 읽어서 꼭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겠다고 생각했어요.

비로그인 2010-02-23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히터의 자서전이 생각나는군요. 무지막지하게, 거침없이, 주변 동료들 이야기를 했지요. 뒷이야기를요. 문제는 그 동료들이 하나같이 우리가 우러러보는 거장-이를테면 카라얀 포함-이라는 것.
어지간하면 요즘은 빌려 읽는데,(도서관) 이 책은 사서 읽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저랬다니 저랬다니 저랬다니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blanca 2010-02-23 22:18   좋아요 0 | URL
도스토예프스키 부분은 저도 충격받았답니다. 완전 욕을 바가지로 하고 있더라구요. 심지어 그의 작품까지도. 그래놓고 그래도 위대한 작품이라고 덧붙여 주는 센스까지 ㅋㅋㅋ 사실 욕먹는 사람보다 욕하는 사람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놀라움이 더 크더라구요. 예전의 피아노 선생님이 카라얀을 존경한다고 하셨는데....사람을 욕하려고 들면 소재가 무궁무궁하지요.

순오기 2010-02-2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뒷담화는 국경과 세대를 초월하는군요.ㅋㅋ
도스토옙스키를 톨스토이와 비교한 책도 있는데, 그는 여러가지로 썩 괜찮은 인간은 아니었어요.
다만 그의 작품이 썩 괜찮은 것이지요. 돈이 필요할때면 순식간에 휘갈겨 썼다니, 그는 확실히 천재영역에 속한 사람 같아요.

blanca 2010-02-24 14:41   좋아요 0 | URL
무릎팍 도사에서 윤여정씨가 나와서도 돈이 급할 때 가장 연기가 잘 된다고 하더라구요. 무언가를 아주 대단하게 잘 하는 사람이 그럴 듯한 명분으로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아요.

후애(厚愛) 2010-02-24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작년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 책들을 보관함에 담아 두었다가 삭제를 했었는데 다시 보관함에 담아 두어야겠어요. ㅎㅎ 그리고 <마담 보바리>도요.ㅎㅎ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종종 놀러 오겠습니다.^^

blanca 2010-02-24 14:42   좋아요 0 | URL
후애님! 오셨군요. 보봐리 부인은 재미는 없더라구요--;; 하지만 민음사 번역본이 정말 훌륭하다고 하니 다시 읽어 볼까 생각중입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저절로 2010-02-24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르고 싶은건 질러줘야 한다. 고로, 시방 지릅니다요.

blanca 2010-02-24 14:43   좋아요 0 | URL
책은 좀 질러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저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불쌍한 인간 두 종류가 있다. 무언가에 절대 취할 수 없는 사람, 무언가에 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
나는 후자다. 커피와 책에 취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가 없다.  

일단 커피 얘기. 커피는 늦게 배웠다. 재수시절 등원 후 아침 문제풀이 비디오 끝에 머라이어 캐리의  Hero 뮤직비디오의
가사와 함께 사탕처럼 머금은 자판기 커피의 달콤함은 그 생활을 나름 견딜만할 것으로 때로는 즐길 수도 있게 만들어 주었다.
단 한 잔. 그것도 아침의 자판기 커피. 그걸로 하루를 유쾌하게 열고 기분좋은 노곤함으로 닫을 수 있었다.
대학교에 가서는 커피를 마실 필요가 없을 만큼 삶을 때로는 즐길 수 있었다.
카페인에 취하지 않고 명료하게 응시하는 세상은 헛된 기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정말 힘들지만 견디지 못할 만큼은 아닐 거라는 취업 담당자의 입사 축하 메일의 냉정한 고언은
직장 생활이 딱 그 만큼의 기대하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예고한 것이었다. 사람과 돈을 상대하면서 나는 아주 자주
견딜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카페인을 들이켰다. 명료해지는 듯하지만 기실 메가리가 없어지는
그 환각에 기대어 마시고 또 마셨다. 남자들은 담배를 피고 그 옆에서 나는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이제는 비대한 기대 대신 과도한 체념이 버거워 커피를 마신다. 두 잔, 세 잔. 속이 쓰리고 뾰루지가
올라오고 사소한 지출이 쌓여 제법 존재감을 드러내고 그리고 또 그것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그 치사한 착취구조에 대한
찝찝한 느낌까지 더해졌을 때 나는 이제 카페인에 끌려가지 않고 그것을 절제하고 지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서 읽고 싶은 글들이 있다. 커피 끊기 성공 수기 같은. 그러나 과정이나 의욕을 기록한 글은 많지만 성공했다는 훌륭한
글은 없고 그것을 찾아 헤매다 보니 더 비참한 기분이 들고. 마침내 내가 발견한 것은 '생로병사의 비밀'!
커피야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그저 자신의 몸에 대한 대우와 예우를 강조하는 그 분위기가 왠지 상큼하다.
어제는 그 효과로 두 잔만 마셨을 뿐이고 ^^;; 브로컬리도 열심히 먹고 그래서 몸이 좀 가벼워진 것 같다고 괜히 합리화도 하고.
커피로 시간의 구획을 짓지 않으면 한없이 엿가락처럼 배배 꼬여 늘어질 것만 같은
그 묘한 두려움을 조금은 희석시켜 갈 수 있을 것 같지만 방금도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들어왔다는 사실.
발자크는 하루에 백잔을 마셨다니 좀 위안을 가져본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책 중독은 관대하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니 오히려 권장되기도. 하지만 이것도 분명 시간과
돈과 그리고 실재를 양보, 또는 소비해야 된다. 우리는 아니 나는 책을 읽으며 종종 많은 것들을 방치, 회피한다.
 

나의 실제 삶을 살아가는 대신, 수많은 타인의 삶을 관찰, 엿보고 그들의 삶에 경도되거나 염증을 느끼거나 하며 그것에
취해있는 것도 일종의 회피에 대한 열정이다. 그러니 조금씩 쉬어갈 필요가 있다. 나를, 나의 삶을 돌아볼.
 

요즈음 심하게 책의 구입에 취해 있다. 나름대로 한 달에 오만원을 넘지 않고 다 읽지 않고는 추가 구입하지 않는다는
속이 빤한 원칙을 세웠지만 이미 무너지고 있다.  고작 20일인데. 아직 말일도 아닌데. 책이 주욱 밀려 있다.
중고서점도 원망스럽다. 꼭 지금 주문하지 않으면 누군가 휙 낚아 채 갈 것 같다.  <의사소통장애>는 반값에 나와 있어
충동 구매했는데 읽을 것 같지 않다.-..- 왜 이런 책을 주문한 거지?

 

 

 

 

 

 

 

 

 

지금 읽고 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엄청 까대고 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란 대목에서 포복절도했다. 몸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다. 여러 작가의 사생활, 그리고 대표작들을 신랄하게 칭찬할 것 해주고 욕하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고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읽고 싶지 않아졌다.
치프킨이 도스토에프스키의 바덴바덴 도박기행을 소설화한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은 상당 부분 그에 대한 이해와 체념적 미화가 있는데 대비된다. 참 인상깊고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강추 강추!

 

 

 

 

 

  그리고 완전 낚였다. 보통 군한테. 대머리 보통 군이 얄미워졌다.  

 

커피 마시러 나가 영풍문고에서 스테디셀러 세일 30%에 광분하여 또 잊고 있었던 적립금 천원까지 써가며 모처럼 알찬 소비를 했다고 자부하며 게다가 이런 나중에 반전의 피박을 뒤집어쓸 고언까지 옆지기한테까지 해주며 

"그게 말이얌. 사람들이 무조건 인터넷이 싸다고 생각하는데 아닌 경우가 많아. 오프가 더 쌀 때도 많다니까. 뿌듯하다. 뿌듯해!" 

집에 와서 알라딘에 확인해 보니 반값행사하고 있다. 완전 떡실신했다. 

 

그러니까 책과 커피에 취해서는 어떻게든 고것들의 비어져 나온 살을 코르셋으로 감추고 합리화해 보려고 참 무던히도 애를 쓰다 또 고것들한테 농락당하고 있다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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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02-2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지금 막 반값행사라고 얘기해주려고 했는데, 이미 아셨군요. ㅎ
교보에서 스테디셀러 반값행사 하고 있는데 쏠쏠해요. 이레는 보통을 반값에 팔아먹는다는 쳇

제가 사려고 사려고 며칠을 며칠을 고민했던 닻무늬가 있는 예쁜 신발이 있거든요. 진짜 고민하다 어제 속상한 일 있어서 냅다 질렀는데 (그러면 안 되지만요) 책값 5-6만원은 별 고민도 안 하고 (그러니깐, 5만원 넘겨서 2천마일리지 넘길 고민과 6만원 넘겨서 알사탕 천개 받을 고민 정도나 하고) 별로 비싸게 여겨지지도 않는데,

그 비슷한 가격의 신발은 왜 그렇게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요.

7천원짜리 '아이 깨끗해' 레몬 거품 핸드워시를 왜 몇주째 못 사고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 걸까요! 철푸덕-

오늘만 해도, 알라딘에서 제가 좋아하는 맨소래담 브랜드의 폼워시 1+1 행사 하는거 보고 아싸, 하고 지르며 가볍게 책 두 권을 아무 생각 없이 끼워넣고 말이죠.

커피는...
커피 끊을 생각 하지 마세요. 커피 많이 마셔야 이태리 남자들처럼 멋있어져요. ...응? 하하 ^^

저에게 가끔 '영혼을 팔아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절실한 느낌을 주는 것이 바로 '커피'에요. 온니 커피에요. 이건 과장없이 정말.

오늘 10년 다이어리도 도착했겠다. 다이어리에 쓰는 것들은 다 이루어지게 할 꺼에요. 그러니깐, 전 정말 책을 덜 살지도.. 하지만 전 감히 커피를 줄이거나 끊을 생각 같은건 하지 않아요.

blanca 2010-02-20 22:01   좋아요 0 | URL
이런 긴 댓글이라니. 너무 고맙군요^^ 커피 많이 마시면 이태리 여자가 아니라 남자처럼 되는 건가요?ㅋㅋㅋ 그죠. 진짜 영혼을 팔린 기분이라니까요. 맨소래담 폼워시도 나와요? 또 솔깃^^;; 10년 다이어리는 꼭 페이퍼에 올려주세요. 이런 거 무자게 관심많고 호기심도 많아서요.

그런데 책은 한꺼번에 주문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찔금찔금 삼만원너치씩 주문하고 마일리지 혜택도 못받고 바보 같다니까요. 커피는 흑 저도 줄이고 싶지 않은데 속이 쓰려서요-..-

노이에자이트 2010-02-2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몸의 저 책 뭔가 했더니 예전의 <세계 10대 소설과 작가>를 새로 냈군요.상당히 재밌죠? 필딩의 <톰 존스>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아직도 못 읽고 있어요.그런데 몸의 사생활도 결코 도스토예프스키를 욕할 처지가 아니죠.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노자님 몸의 사생활이라니 완전 솔깃한데요. 저는 도스토예스프스키가 강간까지 했다고 언급하는 대목에서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져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읽지 않을 거라고 결심까지 했다는^^;;

근데 이 책 완전 재미나네요. 진짜 완소입니다. 그런데 모옴이 어쨌는데요? 네? 궁금해서 잠 못자겠다.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10-02-21 15:57   좋아요 0 | URL
몸의 번역본에는 해설 쪽에 다 나올 걸요.제가 작가의 생애에도 관심이 많아서 그런 글을 정독하는 편이죠.블랑카 님도 몸의 책 읽어보면 작가소개란 따위에 나올 거에요.

그리고 <카라마조프의 형제>에 부자지간에 여자 두고 싸우잖아요.문학에서 콩가루 집안 안 다루면 이야기가 안 되나 생각이 들 정도로 막장이지요.하지만 소설가더러 건전한 새마을 드라마 만들어라 할 수도 없고...유명한 고전작품 중에 막장스런 장면이 의외로 많잖아요.모파상의 <벨아미>도 그렇고...

302moon 2010-02-20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또한 무언가에 취해 있곤 하는데(주위에서 그렇게 말해줍니다./), 그 아이템이 여러 가지랍니다. 책과 커피는 물론이고, 음악(듣기와 부르기), 미술(드로잉과 디자인 등)에 흠뻑 빠져있지요. 어릴 적부터 줄곧.(커피는 고등학생 때부터 마시기 시작했어요.) 요즈음은, 꽹과리를 쳐볼까 하고 구입 계획에 있습니다. 그렇죠, 책은 사도 또 사고 싶어지는 거 같아요. 신간 나오면 괜히 흘깃거리고 들춰보고. (웃음)
오랜만이에요. ^^

blanca 2010-02-21 13:42   좋아요 0 | URL
302moon님 진짜 오랜만이에요.^^ 책중독이야 알라딘 이웃분들이란 가장 큰 공감대니까요. 그리고 님은 어떻게 노래 솜씨와 그림 솜씨까지 겸비하셨나요? 저는 예체능이라면 흑흑 유명했답니다. 못하기로 ㅋㅋㅋ 괭과리! 좋죠. 저는 해금이랑 가야금에 관심있어서 올해 말에 기회가 되면 좀 배워보려고 생각중이랍니다. 언제 한 번 협연을...^^;;

순오기 2010-02-21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아침밥을 꼭, 반드시 먹는 아줌마였는데~ 작년에 혈압도 높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아서 과감히 끊었어요. 하지만 독서모임이나 외출하면 간혹 마시긴 하지요. 그것도 절제한다면 못 살지도 모르니까.ㅋㅋ
화가는 그림으로, 작가는 작품으로 평가하자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꼭,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요. 제발 도스토옙스키를 읽어주세요, 녜~ !!^^

2010-02-21 0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2-21 08:55   좋아요 0 | URL
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민음사 세권짜리 과감하게 사놓고, 아직도 못 읽었어요.. 순오기님의 댓글을 보고 지금 반성 중 입니다. ㅠㅠ

blanca 2010-02-21 13:4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그 어렵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도 읽으셨어요? 저는 다 읽었다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어서 정말 대단하게 느껴져요. 그리고 필독서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이 너무 거하게 욕해 놓아서 좀 망설여지기도^^;; 언젠가는 읽어야겠죠? 그리고 저의 문제는 빈 속에 커피를 마신다는 겁니다.흑흑.

순오기 2010-02-22 21:45   좋아요 0 | URL
아웅~ 빈속에 커피는 정말 안 좋아요. 위 때문에 고생을 안해보셨군요.
저는 스무살때 좀 고생을 해서, 빈 속에는 콜라도 안 마십니다. 물론 커피나 술도 안 먹고요.
어쩌면 그런 기본적인 건강관리가 자칭 에너지 여사로 살게 하는지도 몰라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2002년 8월 초등독서회 토론도서라서 열린책들 것으로 봤어요.
상권은 2002. 8.13~18일까지, 하권 8.19~22일 읽은날짜가 적혀 있네요.
우리도 쉽지 않았지만, 그걸 읽었다는 뿌듯함은 하늘을 찔렀다지요.^^

마녀고양이 2010-02-21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커피와 책에 미쳐 있습니다. 둘 다 중독이 너무 강해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원두알 갈아서 커피를 한주전자 내립니다. 그리고 하루종일 마시지요.. 회사 다닐 때는 아침에 큰거 한잔 사들고 출근했었습니다. 책은... 아... 읽기가 아니라 사는데 미쳐있는게 문제랍니다. ㅋ

blanca 2010-02-21 13:46   좋아요 0 | URL
그런데 결국 책은 사는데 미치는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안 그럴줄 알았는데 지금 안 읽은 책 쌓아 놓으니 탑이네요.^^;; 목표는 우야든동 3월까지는 책구입을 안하고 있는 책 다 정독하기입니다. 참, 그리고 원두 내려서 마시는 거는 건강에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저는 믹스를 많이 마셔서 고민이랍니다. 건강에 진짜 안좋다고 해서요.

프레이야 2010-02-21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와 책, 저도 밀쳐낼 수 없어요. 그러고 싶지도 않구요.
님의 중독은 지독한 사랑 같아요.
전 하나 더 영화요^^
인생의 베일, 참 좋았어요. 원작으로 한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못 보고 지나갔는데
문득, 다시 찾아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행복한 일요일 보내세요^^

blanca 2010-02-21 13:47   좋아요 0 | URL
영화~ 프레이야님 저도 영화를 너무 사랑했답니다. 빨리 육아에서 해방되어 신작 다 챙겨보고 싶어요. 인생의 베일이 좋다니 너무 기대되요. 안그래도 지금 옆에 있거든요. 아껴서 읽을까봐요.^^

마녀고양이 2010-02-22 15:02   좋아요 0 | URL
페인티드 베일 너무 좋아요.. 전 영화 때문에 거꾸로 인생의 베일을 샀어요. 영화의 풍광 사진이 얼마나 근사하고 잔잔하던지. 그리고 주인공인 에드워드 노튼과 나오미 왓츠가 표현을 아름답게 해서 참 좋았어요. 엔딩 음악의 애절한 음조는.. 아.. 다시 보고 싶다..

저절로 2010-02-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고싶은건 먹어줘야 한다.
보고싶은건 봐줘야 한다.
사고치고 싶을땐 사고도 쳐줘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지.(헤~)

blanca 2010-02-24 14:25   좋아요 0 | URL
저의 문제는 너무 그런다는 겁니다.-..- 사고를 못 쳐서 그런 걸까요?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 ㅋㅋㅋ
 
만들어진 모성 동녘선서 102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심성은 옮김 / 동녘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극심한 산고 속에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고 나는 안도했다. 진통이 더이상 내가 감내할 수 없는 수준임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에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그 몸서리쳐지는 고통의 마침표를 함께 챙겨서
가지고 가야 했다. 그리고 엔딩.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한쪽 눈을 가까스로 뜨고 나처럼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그 무력한, 그 속수무책의 생명체에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진통의 와중에도 지르지 않았던 비명을 나의 아기와 마주하며 지르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여기까지. 나의 모성애는 어쩌면 여기까지였나 보다. 딸내미가 돌까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안기지 않고
두 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깨고 악을 쓰며 울어대는 저력을 과시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모성애가 얼마나 허위적인 개념이고 얼마나 불완전하며 불확실한 것인지. 그리고 비교적 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던 나의 성격이 얼마나 치사하고 다혈질인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기에는 모두가 너무 힘들고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다 스스로가 모성애가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에 압도되어 상대의 고통을
귀담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육아서적들. 한 권을 끝내는 그 동안 만큼은 참고 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육아서적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초기 삼사 년 간 어머니의 역할이 한 인간의 전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영유아기의 어머니는
자신의 그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지하고 그저 무조건 인내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러니 나는 또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의 수면습관을 잡아 보겠다고 일지까지 기록해 가며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이 된 지금 나는 깨달았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그 수많은 육아서들의 맹점이 기실은 엄마들의 죄책감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
을. 유아기 때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주양육자의 희생의 강도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은 더 증대된다.
아이를 전업으로 돌보든,  조부모에게나 기관에 맡기든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아킬레스건은 다 있기 마련이다. 조기교육이
각광받고 유아기 때의 정서적 지적 자극에 대한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음지는 어쩌면 결정론적인 사고를 조장하여 초중등 자녀를 둔 부모의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유아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파리 이공과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프랑스 전법무장관의 아내로 세 아이를 둔 어머니다. 그녀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상보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 책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성에 대한 모성애의 강요가 어떤 허점과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프랑스의 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통해
조망한다. 중상류증의 다른집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던 하층민 출신 유모들에 대한 얘기는 사교계의 장식품 역할이 주는 환각에 취해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그 유모들에게 맡기고 돌아보지 않은 상류층 부인들의 얘기와 맞물려 비감어리다. 특히나 에밀의 <루소>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여성성의 올가미를 만들고 집 안에 여성들을 유폐시키기 위해 활용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다. 어제는 <만들어진 우울증>에서 박수받고 오늘은 <만들어진 모성>에서 비난받는 프로이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발자크의 문학작품들, 각종 사회통계 자료들을 적시에 인용하여 시대순으로 모성애에 대한 관념 및 풍조를 고찰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놀랍다. 다만 팔십년 대에 초판이 나온 만큼 현 상황에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느끼는 위화감, 부성애를 촉구하는 이상주의적이고 뒷심이 부족한 듯한 결론에 약간의 아쉬움을 가져본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무력하고 연약한 생명체에 전적으로 희생하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다만 모성애도 불완전하고 불안한 감정일 수 있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양육의 책무와 결과론적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맡기지는 말아달라는 것. 또 나쁜 엄마, 혹은 무책임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재단하며 자신의 욕망을 체념하는 데에 익숙해지지 말 것. 이런 전언들은 결국 나에게 가서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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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2-2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며 리뷰 잘 봤습니다. 다시한번 어머니의 위대함과 당신에 대한 미안함,고마움을 느낍니다.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이 저를 더 감동시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니 완전 위로됩니다.^^
 

M의류몰. 길쯤한 팔다리에 마론인형처럼 요요하고 무심한 얼굴의 모델이 베이지색 가디건에 심하게 타이트한 스키니진을 입고 길가에서 택시를 잡고 있다.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설명은 하나의 첨언 같다. blanca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펑키하고 빈티지한 스키니진을 입고 만날 사람과 갈 장소가 있는지를. 단조로운 일상에서 사이다캔의 뚜껑을 따면 뿜어져 나올
탄산의 그 톡 쏘는 상큼한 첫맛을 그 펑키하고 빈티지하다는 스키니진은 가지고 있을 것만 같다. 그녀는 이윽고 기다린다. 

무 엇 을. 택배 아저씨를. 그를 기다리는 시간들은 특별한 설레임으로 채워진다. 그 스키니진은 blanca의 그 날이 그 날 같은
빈곤한 서사의 삶에 다채로운 이벤트를 만들어 줄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인터넷 쇼핑에서 얻은 주된 기쁨은 서사의 환각이다. 그 스키니진을 입는다고 해서 그녀의 삶이 통째로 개조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콕 집어 말하기 힘든 이야기로의
전진에 대한 기대로 그녀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생활들에 대한 선망을 포착해 낸 의류몰의 사진작가에게 포섭되고 만다. 
 

다음에는 어쩌면 그녀는 드레시한 미니원피스를 입은 그 마론 인형 같은 모델에 또 굴복해 장바구니를 두둑하게 채울지도
모를 일이다. T.P.O에 맞는 의복을 입으라는 그 주문은 어쩌면 선후가 전복된 음모일 수도 있다. 먼저 옷을 소비하고
그 옷을 입고 갈 적소를 만들어 내라는.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젊은 여자들의 적소를 찾아내지
못한 그 옷들에는 언젠가는 그 거죽만으로 주인의 매력을 극대화할 수도 있다는 그 헛된 망상 속에 선택되어지기를 기다리며
먼지가 쌓여가고 있다. 

 

꿉꿉양은 매일 퇴근후 친구들 미니홈피들을 순례하며 그녀들이 업데이트한 사진들 밑에 의례적인 경탄을 두서없이 주워섬기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데 로그아웃후 느끼는 그녀의 비애감과 새로운 욕망들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남편이 사준 물품들을 하루 걸러 전시하는 것이 낙인 친구 나공주가 자랑했던 아이폰은 원래 가지고 싶었던 것인데 생각난 김에 내일 점심시간에 질러야 겠다고 결심하고 나공주의 그닥 이쁘지 않은 사내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크는 것을 보니 결혼 얘기를 무슨 금기어의 주변부에 있는 것 마냥 부담스러워하는 뚝뚝군에게 하루바삐 결혼에 대한 확답을 받아둬야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여기에 오니 갑자기 신경질이 스멀스멀 치밀어 오른다. 나공주는 나보다 얼굴도 못나고 공부도 뒤졌는데 치기로 지원한 과가 하필 미달이었던 바람에 쉽게 합격하고 난 그 다음에는 인생이 무슨 반전 드라마를 보여주려고 작심한 마냥 착착 풀려댄다. 분명 친구인 것은 맞는데 잘 되면 한마디로 심하게 배가 아프다. 어찌 됐든 꿉꿉양은 내일 아이폰을 사고 저녁에 뚝뚝군을
만나 신경을 긁어대는 것으로 지금의 불쾌감을 좀 희석시켜야 겠다고 결심하고 이런저런 상념의 아퀴를 짓는다.  

자, 이 모든 욕망들. 시기들. 이건 온전히 꿉꿉양의 것일까?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는 세 딸이 각자의 욕망의 기준을 따라 혹은 그것에 휩쓸려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어떻게 뒤틀려 가는지를 아버지의 눈을 통해 보여준다. 기실 욕망의 스펙트럼은 아버지의 그것에 의해서도 뒤틀려 굴절된다. 낭만적인 연애에 대한 환상으로 덧씌어진 미완의 동화를 아버지는 딸들을 통하여 완성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맞이하는 충격적인 결말이 남기는 그 지독한 공허를 채워주는 것은 뜻밖에도 해설이다. 말줄임표의 소설에 간결하게 마침표를 찍어주는 그 명쾌한 해설 안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구원처럼 날아와 앉는다.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허위와 소설적 진실>에서 날카롭게 지적한 대로 인간 욕망은 많은 경우 경쟁자의 욕망을 모방한 것이다. <중략> 우리가 자신의 것이라 믿고 있는 우리의 욕망이 이처럼 모방된 가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 욕망에 의해 구축된 우리의 삶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휘청거리는 오후> 정호웅의 해설 중  

철저하게 나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고 믿고 매달렸던 욕망마저 나만의 것이 아니라니. 결국 우리는 누군가가 또 누군가에게서 복제해 온 가짜 욕망의 달성을 향하여 질주하고 시달리고 좌절하며 살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물질을 소비함으로써 소통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소통의 장과 내러티브를 창출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더 나아가 누군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하는 그 욕망의 발로에 이르기까지 그 허술한 착각과 환각의 세계에서 우리는 온전하게 나만의 것을 찾아낼 수 없다. 찾아내었다고 믿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도리질까지 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슬픈 마리오네트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자명한 대답이라도 듣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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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7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02-17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랑 상관없이, 요즘 TV나 잡지, 지하철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젊은 아가씨들을 보면 '나랑 인종이 다른가 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다리는 그리 길고, 머리는 조그마할 수가 있는거죠? 공중 화장실 거울 너머로 내 머리 위에 조그마한 얼굴이 하나 쏙 보이면, 진짜 승질납니다... ㅎㅎ

blanca 2010-02-17 22: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보니까요. 요즘 태어나는 아기들부터가 두상이 작더라구요. 제 딸은 해당사항없지만-..-

마녀고양이 2010-02-17 22:29   좋아요 0 | URL
제 딸두 해당 사항이 없어요.. 요즘은 저보다 얼굴이 더 커염.. ㅠㅠ (울 딸이 이 댓글 볼라.. 그럼 저 한대 맞아여!)

blanca 2010-02-18 13:24   좋아요 0 | URL
ㅋㅋ 마녀 고양이님 따님은 몇 살이에요? 이 댓글을 확인할 가능성이 있다니. 생각만 해도 귀여워요^^ 저는 커가면서 작아지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0-02-18 14:33   좋아요 0 | URL
저희딸 11살이여,, 알거 다 아는 무서운 딸네미져! ^^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휘청거리는 오후>를 영화화했을 때 아버지 역의 최불암은 당시 마흔도 안 되었어요.정말 노인역 전문배우.드라마 전원일기도 사십대 초반에 시작했는데...

blanca 2010-02-17 18:17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어떻게 그런 영화랑 드라마를 다 기억하세요? 우와. 그러고 보니 박완서 작품은 대부분 영상화되었군요. 최불암 ㅋㅋㅋ 할아버지로 태어나신 분 같아요. 그래서 장수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2   좋아요 0 | URL
제가 직접 볼 수는 없겠죠.연령상...저는 팝송이나 가요,영화 뒷이야기 같은 걸 좋아해서 그런 걸 관심있게 기억하는 편이죠.그리고 인터넷에서 신기한 정보를 많이 구하지요.또 70년대 80년대 시사잡지나 주간지도 집에 있구요.

아시마 2010-02-17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페이퍼 진짜 최고예요.

blanca 2010-02-18 13:23   좋아요 0 | URL
이런 칭찬에는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아시마님, 저 박완서의 책 찔끔찔끔 사모으다 보니 결국 세계사에서 할인받아 전집 살걸,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드네요. 뒤늦게 완전 중독되서 읽었던 것도 또 읽고. 이제 여든이 되셨다니 새로운 장편은 기대할 수 없는 건지. 박완서샘 직접 꼭 뵙고 싶어요.

순오기 2010-02-18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뒤늦게 보는 페이퍼, 휘청거리는 오후는 신문에 연재되는 걸 봤었죠.
드라마는 두어번 보고 안 봤던가 못 봤던가 그랬고요.
박완서샘은 평사리에 토지의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토지문학상 시상식에 박경리샘과 같이 오셔서 뵜어요.
정답게 사진도 찍었고요~ 자랑할 거 없으니 이거라도 자랑해야지.ㅋㅋ

2010-02-18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2-18 23:0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박완서샘이랑 사진까지 찍으셨다니요. 흑흑. 부럽습니다. 그리고 자랑할 거 많으시잖아요~ 삼남매, 그리고 문학적 조예, 구순한 이웃들, 게다가 아이들까지 가르치고 계시고. 쓰다 보니 한층 더 부러워집니다.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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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되었다. 완전히. 정말 완벽하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면도날>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읽은 <달과 6펜스> 얘기다.
고갱을 모델로 한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슬퍼서가 아니라 그 웅혼한 작품성에 완전히 압도되어 울었다.
눈이 멀고 문둥병까지 걸려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 사내의 그 무모한 열정과 이상주의적 삶에 대한 치기가 속물 근성의
그 연약한 거죽을 통째로 벗겨 버린 듯한 착각. 이 한 권의 책이 서머싯 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의 절대적인
기반이 되었다.  

<면도날>을 읽고 나는 알라딘의 리뷰어들에게 감사했다. 칭찬일색의 그 리뷰들이 이 책을 챙기게 했고 오백여 페이지의
그 책을 다 읽고 난 새벽 한 시경 나는 예전 그 때와는 또다른 감동으로 한참을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됐다. 서머싯 몸은
흔히 대중적인 작가로 불리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소설은 여하튼 재밌기 때문이다.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며
일으키는 그 가벼운 바람은 진중한 작품성도 왠지 가벼운 것으로 치환해 버린다. 재밌기 때문에 되레 그의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사려깊은 성찰은 천덕꾸러기처럼 돼 버렸던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나도 진부한 칭찬으로
이 책의 지름신을 강림케 하련다. 작품성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소설이니 얼른 읽으라고.  

1차 세계대전에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중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귀환한 래리 대럴이라는 젊은이가 삶과 신의
의미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여정을 중심으로 사교계의 노회한 신사이자 대단한 속물이지만
비열한 사람은 아니라고 몸이 변호한 엘리엇 템플턴, 그의 조카이자 래리의 약혼녀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물신주의에 경도되어 래리를 떠나 안온하고 부유한 결혼생활을 택하는 이사벨 등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인상적인 것은 작중 화자가 대놓고 서머싯 몸 자신임을 밝히고 등장인물들을 때로는 관조하고 때로는 다둑이고 때로는 비난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논픽션인 것같은 효과와 더불어 서머싯 몸 자신의 이야기들도 다소 들어볼 수 있는 아주 유쾌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그는 못생긴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절대 익숙해지지 않으며 작가는 열과 성을
다해 몇 달에 걸쳐 완성해 놓은 책을 독자는 이 세상이 하나도 할 일이 없어질 때까지 아무 데나 놓아둔다는 생각에
몹시 우울해진단다.

주인공 래리 대럴이 사랑과 세속적인 부를 모두 놓아두고 떠나는 그 구도의 여정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대척점에 서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엘리엇의 얘기가 그것을 중화해 준다. 엘리엇은 지극히 리얼하고
지극히 유쾌하고 지극히 속물이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관심을 계속 기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주변 사람이다.
미국인으로서 프랑스의 상류층에 입성한 그는 파티를 숨구멍처럼 여기며 사교계를 그의 삶전체의 무대로 간주한다.
그런 그가 죽어가면서까지 공작 부인이 여는 가장 무도회에 초대장을 받지 못한 것에 격분하다 몸이 재치있게 공작부인의
비서를 사주해 만들어낸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지 못함을 애석해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무언가에
끝까지 전체를 걸 수 있는 그 순진하고 정열적인 무모함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언은 정말 귀엽지 않은가?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이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p.397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중략>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p.459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차 차창으로 뒷걸음치던 풍경마냥 자꾸만 스러져 가는 그 수많은 추억들의 덧없음과 비례하는
생생하고 절절한 기억들의 무게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우두망찰하는 요즈음 나에게 래리 대럴은 얘기한다.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거라고. 구도의 여정을 밤을 새워 들려주고 난 래리는 작중 화자이자 작가 서머싯 몸과 함께 아침에 갓 배달된 바삭바삭한 크루아상과 카페오레로 아침 식사를 한다. 래리의 얘기와
몸의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추임새가 엮어낸 하룻밤을 마감하는 그 아침의 크루아상과 카페오레의 그 아늑하고
그리운 냄새들이 나의 코앞에 와서 당도했다. 나도 그들과 밤을 지새운 듯한 피곤함과 또 래리의 구도의 여정 끝에
함께 당도한 듯한 그 아름다운 지향의 웅장한 아름다움(착각일지라도)이 뒤섞여 그 밤 나는 잠을 설쳤다.  

그리고 구정 전날 제사 일손을 거들면서 어머님의 주름 속에 알알이 박힌 그 수많은 추억들과 고단함에 진정한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아주 짧은 시간만 유효한 사이비 약발일지라도 나는 몸에게 숭배를, 감사를 바칠 수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의 고장에 가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정보국의 무리한 비밀 첩보 임무를 맡았다는 그런 사람에게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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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셋 몸 작품 중 못 읽은 책이네요... 서머샛 몸 작품 무척 좋아하는데. 캡쳐하신 글 와닸네요. 찰나와 영원. 영원한 기쁨은 없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찰나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blanca 2010-02-16 14:0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명절 잘 치르셨는지요? 이 책은 피곤한 와중에도 열심히 읽었답니다. 무엇보다 몸 책은 재미있으니까요. 분량이 좀 있어서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금방금방 넘어가더라구요. 다음에는 '인생의 베일'을 읽어볼까 하고 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모옴의 중단편집도 재미있으니 하나하나 독파해 보세요.그런데 계속 읽다 보면 모파상의 인물묘사를 연상케 하지요.모옴도 모파상의 작품을 좋아했으니까요.결국은 읽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어요.그런 걸 극복하지 않으면 독서가 독이 될 수도 있죠.

blanca 2010-02-17 18:19   좋아요 0 | URL
모옴의 중단편집이 재미있군요. 그런데 모옴은 어떤 이상적인 인간을 꼭 대척점에 놓아 두는 것 같아요. 이게 조금 작위적이기는 한데. 맞아요. 박완서. 모파상. 모옴. 인간 속의 잔인하고 절망적인 속성을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읽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츱츱해지는 단점이 있더라구요. 노자님의 고언을 들어야 이들의 독서가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0   좋아요 0 | URL
하긴 박완서도 우리 마음 속 누구나가 갖고 있는 속물근성을 잘 끄집어 내지요.특히 모옴의 성격묘사를 보면 아주 악랄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착한 사람이 남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당하는 이야기를 통쾌하다는 듯이 그리거든요.달과 6펜스에도 그런 인물이 나오죠.마누라를 뺏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