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노하우 아우또노미아총서 21
프란시스코 바렐라 지음, 박충식.유권종 옮김 / 갈무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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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더 많이 생각하고 나의 의식의 흐름에 더 집중할수록 더 이기적으로 변해 간다.
타인과 나 중심의 소통을 원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역설적으로 나는 더 불행해진다.
나에게 집중하는 삶이 아닌, 타인의 삶에 연대하는 삶의 만족도가 더 높다는 것은 새로울게 없는 얘기다.
 

인지생물학자인 칠레태생의 프란시스코 J. 바렐라가 이탈리아 볼로냐대학 초청되어 윤리학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실은 이 책은 본문이 백페이지가량 정도밖에 안될 정도로 얇은 책이다.
하지만 쉽지 않다. 기본적으로 인지학, 구성주의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상당부분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금은 불친절한 책이다. 그러니 나 같은 독자는 두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갈 수밖에 없다.
해제도 잘 되어 있고 번역자들도 기본적으로 인접학문을 전공하여 충실한 번역을 하려 애쓴 노고가 돋보이지만
평범한 독자들이 철학과 컴퓨터과학, 뇌과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 눈부시도록 놀라운 바렐라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빛나지만 따올 수는 없는 별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심정이라고 할까. 
조금이라도 쉽게 읽으려면 말미에 실린 역자의 해제와 바렐라의 생애를 역으로 먼저 읽어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바렐라의 이론을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윤리의 노하우는 점진적이고 직접적으로 자아의 가상성과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바렐라는 자아는 허구의 참조점이라고 본다. 바렐라만의 독창적인 이론은 아니지만 자아는 허구의 개념임을
체화하면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자비와 연대가 생겨난다는 주장의 독창성은 놀랍다.
'나'는 없다. 타인과 관계하기 위한 언어, 여러 사회적 활동 사이의 다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타인에 대한 동정은 욕망의 광기로 전염되어 있기 쉽다.
그 어떤 욕망도 끼어들지 않은 공의 상태에서 자비는 충동적으로 일어난다고 한다.
그가 거론한 맹자의 성선설도 이 부분에서 재조명된다. 나는 여즉까지 맹자의 성선설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 머나먼 이국의 학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더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의 만개
라고. 그러니 반드시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훈련이 뒤따라야 한다고. 

모든 인간에게 존재하는 타자에 대한 관심은 보통 자아의 느낌과 뒤섞여 있기 때문인정받고 평가받으려는
열망을 충족하려는 욕구와 혼동
되기 쉽다. p.106 

결국 나를 비울 일이다. 도교, 불교, 유교와 서구과학의 접점에서 타인에 대한 연대의 지도의 참조점을 설명해 준
그는 결국 도덕적 행위란 공리적 윤리체계나 실천적인 강령이 아닌 허구의 자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외치고 있다. 비어있는 나의 허전함은 타인에 대한 참된 돌봄으로 채워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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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2010-01-2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타인에 대한 동정은 욕망의 광기로 전염되어 있기 쉽다..그리고 '나'는 없다..

문득 '자아는 만들어진 자기방어의 정체성'이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블랑카님.나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音과 音사이,사물과 사물사이,나와 너 사이의 여백쯤일까요?)

blanca 2010-01-26 22:26   좋아요 0 | URL
자아라는 개념에 집착할수록 더 불행해진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좀 그런 경향이 있어요--;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사실은 에파타님 말씀하신 것처럼 그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것들이 마냥 나인 것처럼 오해하고 집착하고 속단하고. 정말 만들어진 자기방어의 정체성이라는 표현이 맞네요. 그런데 또 심리학 정신분석에서는 자아를 강화하는게 치료의 첫걸음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어서 참 헷갈립니다. 개념 자체가 서로 다른 건지.

저절로 2010-01-27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정신분석' 아주 순하게 표현하자면 회의적입니다. 조작된 개념으로서의 '정신'은 결코 보편화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더군다나 '강화'라니요(천만에 말씀 만만에 꼬딱지!). 요즘 저는 '無'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blanca 2010-01-27 14:03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도 요즘들어 거부감이 들더라구요. 프로이트씨도 좀 그렇고. 솔직히 잘 알지는 못해요.^^;; 공부가 더 필요한 분야지요. 마음이 약해질 때는 또 솔깃해지고 그러네요.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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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리뷰도 두괄식이 좋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나 직장 출퇴근길에 시간 때우기용으로 이 책을 골랐다면,
그것은 명백한 실수다. 연인의 귀여운 익살도 시한이 촉박한 업무도 갑자기 더없이 진부하고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한 번 펼치면 도저히 내려놓을 수가 없다. 작품성 같은 진지한 얘기는 집어치우더라도
정말 너무 재미있어서 되레 뒷장이 얼마나 남았나 아쉬워하며 자꾸 확인하게 된다. 

에밀 아자르로맹가리다. 자기 자신에 싫증나 있던 위대한 로맹가리가 또다른 분신을 세상에 내어놓고
시침을 뚝 떼고 사후에야 알게 한 것은 세상에 대한 완벽한 조롱이 아니라 다급한 자기 위로였다고 해두자.
그는 사람들이 작가에게 만들어 준 그 얼굴이 그렇게도 싫었다고 하니. 사실 나는 로맹가리를 잘 모른다.
이름이 발음하면 저도 모르게 쫙쫙 달라붙어 건망증을 이길 정도여서 기억해 둔 정도다.
그가 필명 에밀 아자르를 썼다는 것도 주워들은 얘기다. 프랑스 영화, 소설에 대한 묘한 두려움이 있어 그의 책을
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다 이름이 아무리 해도 잊어지지 않아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모모. 창녀의 아이. 로자아줌마. 창녀였다 쇠락하고 외로워서 살찐 육체로 동지(창녀)들의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유태인 여자. 맞다. 그녀는 정말 7층을 힘겹게 오르락내리락하며 고통과 병마에 버려져도 괜찮은 그런 여자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괜찮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안괜찮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둘의 슬프지만 익살스러운 이야기.
성장소설의 구도는 대체로 비슷한 것 같다. 잔망스러운 아이와 그 아이에게 속아주는 서글프고 설익고 늙은 어른과의
특별한 감정들. 그 결 사이로 스며드는 시간에 침식당하며 외로워지는 인생에 대한 통찰들.
그런 도식 속에서도 이 작품이 유독 돌올한 것은 소외된 인간군상에 대한 섬세한 형상화와 생 그 자체에 대한 묘한
애정들이 뿜어내는 웃음들 때문일 거다. 

모모는 프랑스에 사는 아랍아이다. 그의 엄마도 창녀고 그의 아빠는 그녀를 질투로 살해하고 정신병원에 갇힌다.
그녀를 돌보아 주는 로자 아줌마는 독일유태인 수용소에 갇힌 경험이 있는 유태인 노인이다.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그런 그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이웃룰라아줌마는
세네갈 태생에 여장남자다. 모두 세속적인 시선으로 한없이 비난받고 소외받는 자격요건이다.
이방인들. 노인들. 그리고 여장남자. 주류에서 비틀어져 사각지대로 밀려난 그네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사랑은
눈물겹고 아름답다. 그들에게도 행복할 필요가 그럴 권리가 있다는 그 당연한 명제가 불편하게 여겨졌던 그 오만한
관성은 여기에서 무너지고 만다. 그렇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 꽉 끌어안아야 한다. 

로자 아주머니의 곁에서 그녀가 숨을 멈추고도 사흘을 함께 지냈던 모모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말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p.307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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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24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에밀 아자르는 우리 고딩때 굉장했어요~ 서로 돌아가며 순서를 기다려서 봤지요.
자기 앞의 생과 회색노우트가 있었지요.
자기 앞의 생은 우리 큰딸 보라고 작년에 사줬는데 안 보더라고요.ㅠㅠ

blanca 2010-01-25 08:59   좋아요 0 | URL
이 재미있는 책을 왜 이제서야 봤는지 참 아쉽더라구요. 역시 순오기님은 문학소녀셨군요^^ 서로 돌아가며 순서 ㅋㅋㅋ 저희땐 염상섭의 삼대를 강제로 읽어야 되서 제가 샀더니 반아이들이 다 안사고 기다리더라구요. 결국 실종되고 말았답니다. 큰따님한테 한 번 다시 권해 보세요.^^

2010-01-25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anca 2010-01-25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다니까요. 채만식이랑 염상섭이랑 짬뽕해서 잘못 알고 있었더라구요.^^;;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당~삼대는 두 권인가 세 권. ㅋㅋㅋ 우리는 무조건 읽으라고 해서 수학시간에도 깔고 보고 했어요. 그러다가 친구들끼리 거기 대사가 유행했었죠. 너 따위를 두기가 불찰이다! 맨날 그러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데면데면하게 지냈던 과동기 두 명이 오월 축제의 그 달보드레한 분위기 속에서 정작 열광한 것은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였다. 무언가를 기다렸던 그 긴 줄 속에서 그 두 명이 남기고 간 호들갑스러운 헌사들을
들고 온 손 끝으로 나는 이미 그 영화의 비디오 테잎을 플레이어에 밀어넣고 있었다.
연년생 여동생은 지루하다,를 남발하며 몇 번이고 왔다 갔다 하다 조금 울기도 하고,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면서
나를 들쑤셔 댔지만 그렇게라도 마치고 난 영화의 끝 자막이 올라가는 자리에서 우리 둘은
같이 숙연해졌다. 그런 영화였다. 십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그 영화의 몇 장면을 생각하면
가슴 한 곳에서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그 애상어린 감정들을 추스리기가 뭣하다.  
97년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잘 만들어진 영화가
남기는 잔상이 얼마나 깊고 길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마냥 내 깊은 곳에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의 궤적을 따라 지도를 그리는 영화다. 그 지도는 사막에서도 이탈리아의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도 그려진다.
온몸을 사프란빛 화상으로 뒤덮은 영국인 환자 알마시(랄프 파인즈)와 그의 곁에 남아 간호하는 캐나다인 간호사 해나(줄리엣 비노쉬), 인도인 용병 킵, 그리고 연합군 스파이로 활동한 카라바지오가 이탈리아에서 기이한 동거를 하며 펼쳐나가는 이야기는 영국인 환자 알마시가 사막 탐사를 하며 끼워넣게 되는 한 여인과의 비감어린 사랑얘기와 어우러진다. 

캐서린은 사막의 탐사팀에 뒤늦게 합류한 이의 아내였으니 진부한 불륜의 도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알마시와 그녀가
대저택의 후미진 곳에서 벌이는 은밀하고 암시가 가득한 정사장면. 인도인 용병 킵이 간호사 해나를 도르래에 태워 번쩍
날아오르게 하여 교회의 성스러운 벽화를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장면. 비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야외에 전신화상으로 옴쭉달싹할 수 없었던 달마시를 들것에 태워 나가 킵, 해나. 카라바지오가 함께 비를 맞으며 그들만의 축제를 열며 열광하는 장면. 지금도 현현한 이 영상들은 나의 눈에 붙어서 나의 내밀하고 여린 부분에 붙어서 같이 숨쉬고 있다. 

영화의 구성은 아무리 치밀하다고 해도 영상안에 담아내려는 온전한 시도들을 위하여 허술한 공간을 제공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의도적이기도 하다. 그 틈에 관객들의 상상력이, 때로는 습관화된 경멸이 스며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안심하고 그 영화를 주변에 권해주기도 한다. 적어도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원작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심증을 굳어지게 했다. 영화의 짜임새가 불친절하면서도 아주 예민했기 때문이다. 반드시 글로써 파고 들어간 부분이 있으리라는 예상이 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고 말아버렸다. 

마이클 온다치라는 이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성을 가진 작가가 뒤에 있었다. 부커상을 수상한 것은 차라리 애교로 보일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는 것은 일장일단이 있다. 영상의 틀 안에서 굳어져 버린 인물의 이미지를 습관적으로 투영하게 되기 때문에 원작의 인물을 왜곡해서 해석할 우려가 있지만, 적어도 죽어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말 그 수많은 어쩌면 지루할 수도 있는 묘사를 눈 앞에서 마술처럼 즉시 생생하게 재생할 수 있는 기막힌 특혜도 누릴 수 있다. 

일단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달마시는 완벽했다. 그 달마시를 알지 못했더라면 차라리 원작 속의 달마시도 불가해하게만 여겨졌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필사본을 다이어리처럼 들고 다니는 남자. 모든 것을 본능적으로 지도화하는 남자. 사막의 문맥 속에 항상 물기 속에 행복해했던 여인 캐서린을 끼워 넣으며 고심했던 남자. 그러나 소유권을 주장하지도 주장당하는 것도 주저했기 때문에 잔인하게 사랑의 마침표를 찍고 만 사람. 캐서린이 결국 남편의 질투로 인한 의도적인 비행사고로 거의 죽게 되자 동굴 속에 그녀를 안고 가 정성어리게 그녀의 몸에 마지막 책을 쓴 사내. 캐서린이 달마시보다 열여섯살이나 연하로 설정된 것은 영화에서 거의 같은 연배로 보였던 여배우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틀어진 것이었지만.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해나는 세상에, 스무살이었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던 그런 원숙하면서도 들까부는 여인이 아니라 완전히 미성숙하면서도 묘한 체념의 무게를 가진 여자애였다. 그녀와 사랑에 빠진 인도인 공병도 이십대였고 그가 해나에게 해 주었던 그 벽화 감상 기행은 원작에서는 중세를 연구하는 노학자에게 준 선물이었다. 원작과는 조금씩 다른 부분이지만 원작을 왜곡했다는 생각보다는 영상으로 가동했을 때의 그 극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의도적인 수정 정도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이 책. 이 책. 진부하고 또 진부하지만 나는 이 책에 별 다섯 개가 아닌 온 지구상의 별을 아니 온 태양계의 별을 다 그러모아 붙여주고 싶다.(과장이 심한가?--;) 번역한 책의 행간을 연필로 그어 더럽혀 보기는 처음이다. 너무나 아름다운 문장들. 비선형적 시간을 넘나들고 등장인물 사이를 마음대로 미끄러져 오고 가는 그 수많은 아름답고 명징한 단어들. 어구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라는 시카고 트리뷴의 찬사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그녀가 그의 머리카락을 풀어 내리는 밤이면, 그는 다시 또다른 별자리가 된다. 그는 천 개의 적도로 이루어진 팔을 베개 위에 올려놓고 , 포옹하며 잠들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파도가 친다. -p.282 

사랑은 참으로 작아 바늘귀도 들어갈 수 있다.-p.380 

게다가 이러한 시인의 심장은 2차 세계대전이 떨치고 간 그 수많은 불합리와 그 비이성에 대한 준엄한 심판과 더불어 인간 자체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감싸여 더 세차게 고동친다. 폭탄해체를 위해 투입된 인도인 용병 킵의 인생 그 자체가 작가가 전쟁이 남기고 가는 그 수많은 상흔들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소설이 단순한 로맨스가 아닌 사회소설로서의 가치를 부여받는 대목도 이 곳이다. 

이제. 스리랑카 태생의 미국인. 영원한 이방인의 슬픔을 머금고 걸어갈 수밖에 없는  작가 마이클 온다치와 이 소설의 영화화 작업을 아주 매혹적이고 도전적이었다고 즐겁게 회상했던 고인이 된 앤서니 밍겔라 감독에게 작별인사와 더불어 그들의 그 이름들을, 달마시가 끝내 사막에서 잃어버리고 만 그 이름들을 내 손 안에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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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0-01-23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파인즈는 저 영화이후론 별 신통치가 않아요,,,아쉽게도,,,쩝
저는 아직도 저 영화를 보면 무너집니다,,,그래서 책은 읽지 않고 있어요,,,,
멋진 페이퍼에요~.^^

blanca 2010-01-23 13:54   좋아요 0 | URL
우와! 나비님이당! 맞아요--;; 랄프 파인즈 이 영화보고 완전 빠졌었는데 도통 좋은 영화가 안나오네요. 열입곱 연상 여인네랑 살림 차렸다는 얘기까지만 기억하고 있어요. 저도 이 영화 보면 수시로 무너집니다. 원래 영화랑 원작 있으면 둘 중 하나는 기울기 마련인데 책보면 더 무너집니다. 이 책은 일상에서 좀 떠나 한적한 곳으로 여행가서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빠져 있다가 일상을 돌아보면 괜히 신경질이 나서-..-

순오기 2010-01-2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랄프 파인즈, 더 리더의 그 남자였지요?


blanca 2010-01-23 14:22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저는 더 리더를 안봐서^^;; 더리더에 나왔나 검색들어가 봅니당!

blanca 2010-01-23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네요. 저 몰랐어용!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0-01-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만 봤지요. 생각만해도 두근거려지는 영화에요.
역시 원작의 저렇게나 아름다운 문장이 영상으로 표현되기엔 한계가 있겠어요.
원작을 읽고싶어집니다. 시인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라 칭송 받다니요.

blanca 2010-01-24 20:28   좋아요 0 | URL
솔직히 원작이 많이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상당부분이 이미지로 얘기되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서. 그런데 아. 정말 대단한 작가더라구요. 친절하지는 않지만 그 수많은 분위기와 이미지를 그렇게나 잘 표현해 놓다니.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질 만큼요.
 

싸이에 한창 열을 올리다 의식적으로 안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사는 친구들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하여 안하다 하기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결국 열중할수록 더 외로워지고 더 불소통이 되는 것 같은 그 의외의 막막함이 너무 싫었다.
그리고 친구의 사생활을 안부를 궁금해하는 용도가 아닌 끈적끈적한 호기심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그 변질이 점점 역겨워졌다. 온라인으로 하는 소통이 그 시간적 간격을 두고 감정의 정리 및 포장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뒤늦게 상대를 향한 것이 아닌,
어느새 내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메아리가 되는 것 같은 한계에 부닥쳤을 때 나는 반문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열심히 칭찬의 댓글을 인사치례의 댓글을 주고 받았던 우리는, 과연 서로의 목소리와 서로의 눈동자를 의도적으로 무시한 것은 아닐까? 신기하게 싸이로 친밀감을 더해갔다고 생각하는 관계가 정작 전화선 너머에서는 심지어 얼굴을 사이에 둔 탁자 너머에서는 그렇게 데면데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는 자꾸 객관적인 척 중립적인 척 마치 온라인에서 우리의 관계는 재탄생한 듯 무덤덤하고 치기어린 조언을 남발해대고 있었다. 여기서 중지하지 않으면 관계가 아주 묘하게 꼬여 갈 것 같은 두려움에 담배 끊듯 힘겹게 싸이를 끊어가고 있다.  

거의 10여 년을 활동하는 까페가 하나 있다. (여기서 활동은 가입후 글 열람 및 댓글 달기) 원래는 재테크 까페인데 하나의 작은 사회 같다. 익명에 기대어 물론 닉네임이 있지만 자신의 옆사람에도 털어놓지 못할 많은 얘기들을 털어놓고 서로 의논하고 조언해 주고 울어준다. 실제 글을 읽다 너무 감정이입이 되 펑펑 운 적도 있고, 정말 힘든 순간 울먹이며 올린 글들에 달린 댓글들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거리기도 했다. 나름대로 중차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순간 익명 게시판에 올린 글들에 툭툭 달린 불친절한 댓글들이 되레 나의 결단을 만들기도 했다.  나의 취향에 맞는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일상을 마치 친구의 일상처럼 찬찬히 들여다 보며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까지 하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소통. 진정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또다른 영역의 진일보한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치부를, 나의 고민을, 지인들에게는 때로는 자존심때문에 때로는 망설임때문에 털어놓을 수 없었던 그것들을 나를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관계 속에 투영되는 각종 끈적끈적한 선입견과 암시,조종 등을 피해 얘기할 수 있다. 물론 우리들은 눈도 마주치지지도 손도 잡을 수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솔직할 수 있다. 더 대담해질 수 있다. 그 이상의 관계의 진전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실망도 없다. 때때로 악플이 달려도 그 사람은 나의 전체를 보고 판단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글의 몸체 속에 가두어 놓은 그 찰나의 상황들로 미루어 짐작한 것이기 때문에 썩 기분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는 친구가 내가 올린 사진에 묘한 늬앙스를 풍기를 댓글을 달아놓았을 때, 혹은 내가 아무 생각없이 달아놓은 댓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서로가 아주 강도가 강한 당혹감에 휩싸인다. 

그런데 이런 익명의 소통은 사람의 직접 대면에 대한 두려움과 관계맺기의 서투름때문에 더 조장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현실의 친구들을 덜 만날수록 나는 이 까페에서 더 오래도록 머물고 더 많은 댓글을 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외로웠다. 내가 던진 말들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응답받을 수 있고 우리의 관계는 그 댓글의 주고받음으로 마침표를 찍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성친구를 소개시키듯 자기의 글들을 만나게 하고 그리고 손털고 나와 버린다.

눈동자를 마주친 사람들을 익명의 관계로 재설정하는 것. 정이현 작가가 얘기했던 것처럼 친구가 여기에 갔었구나, 제를 만났구나를 그애의 목소리가 아닌 하나의 사진과 설명으로 알아야 할 때 느끼는 그 약간의 배신감과 서먹서먹함이 던져주는 아득함. 그건 소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닉네임으로 나에게 표식을 지우고 둥둥 떠다니는 그 관계에서도 결국 남고마는 이 아쉬움은 또 어떻게 추스릴 것인가. 죽을 때까지 소통을 갈구하지만 결국 인간은 혼자서 중얼중얼하다 산화하고 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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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19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공감합니다.
요즘에 제 서재가 방문자 폭주라 인터넷의 위력과 더불어 공포를 실감하는 중이거든요.ㅜㅜ

blanca 2010-01-19 14:28   좋아요 0 | URL
아..진짜 순오기님 방문자 수 보니까 이제 천단위는 가뿐하게 넘기더라구요. 이 정도면 공인으로 대우받으셔도 될 듯. 그런데 저도 우연히 순오기님 서재에 방문했다 하도 재미있어서 며칠간 아주 옛날글부터 찬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만큼 인기도 많고 공감도 많이 받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라로 2010-01-19 1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백배 공감,,,늘 염려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blanca 2010-01-19 14:30   좋아요 0 | URL
nabee님 반가워용^^ 사진이 하도 예뻐서 한참을 들여다봤답니다. 알라딘 서재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도 같이 되잖아요. nabee님의 귀여운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2010-01-19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0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19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곳에 거의 5년 정도를 있었던 듯 해요. 친구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여기서는 하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내 속마음의 패악을 이 곳에 털어놓고, 그러면서 책 이야기를 하고, 어떤 이들은 실제 얼굴을 보고 만나보기도 했지요. 처음 보는 이들인데, 낯설지가 않았어요. 요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책을 읽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상대에 따라 설정되기 마련인데 이 곳에는 필터링을 하질 않으니까, 이들은 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만나게 된 것이어서 그런 걸까, 혹은 책이라는 매개체가 중간에 중매쟁이처럼 끼어 있어서 그런 걸까, 생각을 했어요.

싸이는, 아, `나 이런 곳에 와봤소' `나 이런 것 먹었소' '나 이런 것 사들였소' 그런 느낌 탓에 오래 가질 못하고 있습니다.(제 싸이는 저도 안가요) 공간에 따라 느낌이 다르지만, 이 공간은 제겐 무척 각별하답니다.

blanca 2010-01-19 22:27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은 무언가 좀 다른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가열차게 리뷰들을 올리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근 6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는데 Jude님의 5년의 시간이 참 부럽네요. 오히려 알라딘에서 더 많은 나의 모습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요. 싸이 ㅋㅋㅋ 극렬하게 동의합니다. 제 싸이 제가 보고 막 긁습니다.

302moon 2010-01-1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엔 알라딘에 둥지를 틀었던 기간이 짧았었는데, 올해는 힘차게 달리려 해요. 함께 해요. ^^ 제가 요사이 싸이를 멀리하는 이유이기도 해서, 공감하게 돼요. 가까운 친구들이 통 하지 않는 탓도 있고, 속내를 드러내기 뭣한 상황도 오고 그래요. 책으로 맺어지지 않은 일촌들도 수두룩해서 그럴까요. 그들은 그들만의 잣대로 저를 보려 함을 서서히 깨닫고,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그럼에도, 간혹 싸이로 연락해오는 친구들이 있어서, 끊지는 않고, 가끔 ‘나 살아 있음’을 알리는 용도로 슬쩍 들르는 공간이 되었어요. 알라딘에는 멀리 사는 책 친구들이 많지만, 가까이 있는 듯 친근해요. 책으로 맺어진 인연이라 진솔하고 더 차진 사이가 된! 주저리가 길어졌어요. 편안한 밤 시간을 보내고 계셨으면 해요. :)

blanca 2010-01-20 13:42   좋아요 0 | URL
아.302moon님, 정말 그래요. 또 완전히 끊어버리면 그걸로 연락을 전담하는 애들이 있어서. 아쉽고. 또 들어가면 어느새 집중하다 실망하고. 벌써 오후가 기울어 응답하네요. 빗소리가 넘 좋은데. 행복한 오후가 되기를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0-01-20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문글이 공감되어요. 이 페이퍼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구요.
어느 정도의 선은 중요할 것 같아요. 그래도 눈을 보면 그냥 좋은 분들이 있더군요.
글로 느껴지는 부분이 대개는 맞구요. ^^ (그것도 대상에게서 제가 바라는 이미지일까요?)

blanca 2010-01-20 13:46   좋아요 0 | URL
대문글. 지금 다시 읽어보니 저도 또 공감되네요^^;; 맞아요. 사람에도 느낌이라는 게 맞아들어가더라구요. 어느 정도의 선. 유념해야 될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래 가려면 약간 아쉬운 듯 유지해야겠지요. 프레이야님,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절로 2010-01-2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소통되는 부분이 있지만 안 되는 부분이 많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규범과 법질서, 이런 기본 프레임을 통한 소통밖에는 안 된다. 심오한 소통은 순전히 개인의 몫인데.....나는 회의적이다...김훈, 그의 말이다. 저도 그에게 한표 던집니다. 몰래 훔쳐만 보다가 그만 '세'를 내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었어요.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강력한 이유 '소통'이 칼날을 제대로 겨누며 말합니다. 너 외롭지..오늘은 간만에 비가 오네요..사람보다 비가 따뜻.

blanca 2010-01-20 13:50   좋아요 0 | URL
저도 소통이라는게 결국 나한테 던지는 독백을 좀더 크게 내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김훈 얘기가 참으로 와닿네요.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빗소리가 진짜 좋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3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격투기 토론방이란 데가 있는데 댓글이 육두문자가 섞이는 건 기본이고 진짜 대단하지요.그런 데도 저는 그런 거친 게 더 낫더라구요.알라딘에서는 댓글이 사실 굉장히 점잖은 것 같으면서도 어쩌다 논쟁이 사실상 싸움으로 번질 때 보면 날이 서있어서 섬뜩할 때가 있어서 굉장히 조심하게 됩니다.

2010-01-24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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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지 이틀이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상품 준비중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의 한자 실력은 늘어간다.
잘하면 교육용 한자(--;;) 1,800자를 몇 달 안에 습득하고 3급 시험을 치러 갈 수 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치기를 한 번 부려 1급을 시도해 볼까 싶기도. 명함의 한자를 못읽어 전전긍긍하며 웅크리고 열심히 인터넷으로 검색하다 들켰던 기억이 아프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하이드님 덕분에. 그 몽화적인 불륜(--;)의 잔영 만큼 표지도 너무 매혹적이다. 영화가 참 좋았지만
서사의 긴박감 대신 등장인물들의 심리변화를 따라가는 나른한 전개 때문에 은근히 지루한 맛(이상하게 이영화는 지루한게 제격으로 보인다.)이 있었는데 책도 약간 지루하다는 평이 올라와서 다소 겁난다. 이외수재미없는 책은 재수없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재미도 주관적인 기준에 디룽디룽 매달리지만 그래도 사랑했지만 지루했던 영화는 영상미로 버텼다지만
책은, 음. 상당히 곤란하다. 재미없으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바렐라의 <윤리적 노하우>는 너무 소설만 읽어대는 것 같아서 균형 차원에서.특히 자아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라는 그의 논리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로쟈님의 서평을 재미있게 읽었다. 언니 아기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되레 사람들이 멀거니 구경했던 모습을 보고 난 후 측은지심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대체 윤리적 행위라는 게 본질적 경향성이라고 믿게 된 것은 교육 탓인가, 언론 탓인가. 의인은 드물기 때문에 화제가 되는 것이겠지. <설득의 심리학>에서 백주대낮에 거리에서 강도한테 칼에 찔려 허우적대는 여인을 아무도 돕지 않고 구경하고 있는 잔인한 광경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건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 사례가 아니라, 나, 아닌 누군가가 해주겠지,라는 대중에의 함몰이라는 근거로 설명된 것으로 기억된다.  인간에 대한 기대로 붕붕 떠다니는 것도 안타까워 보이지만 불신과 악의적 단정 하에 침울한 사람의 
모습은 더 불쾌하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하여 책을 읽는다.

<롤리타>는 영화 호평에 기대어 뒤늦게 그리고 어둠의 통로로 보려 했던 시도가 좌절로 끝난 오기 덕택에.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늦지 싶다. 뒤늦게 품절이라고 할 듯. 왠지 예감에. 

그리고 갑자기 읽고 싶어 온몸을 긁게 되는 책들. 배송이 밀리니 뛰쳐 나가 사야 하나. 

 

 

 

 

 

 

 

 

<벨아미>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여자들을 유린하는(적절한 표현인지) 스토리라고 한다. <면도날>은 재미를 보장하는 서머셋 몸이기에 주저없이 선택한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는 얼마나 재미있는지 읽으면서 깜짝 깜짝 놀란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들은  단조로운 얘기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독성 있게 감쳐 보여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 같다.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주인공이 하느적 하느적 걸어다니는 타입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았는데 그 허구의 공허함 속에 인생에 대한 인간에 대한 통찰이 파고들어가 움찔움찔하게 되는 재미를 알아 버렸다. 거짓말이 다가 아니라, 그 거짓말 속에 녹아 있는 작가의 인생관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분석의 향연이 결국 작가의 자서전 내지 일기를 읽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끊임없이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한다. 교묘한 위장술 아래 자신을 숨겨놓는 작가들의 그 트릭을 발견하는 쾌감, 그게 중독성이 아주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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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1-1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벨아미...저는 이 책이 한동안 번역이 안 되길래 안타까웠어요.40년전 정음사 번역본을 읽었거든요.출세하려고 온갖 추한 짓은 다하는 젊은 놈이 등장하지요.게다가 직업이 기자! 여하튼 소설가들은 기자를 싫어하나 보다...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일단 읽어보세요.모파상 특유의 인간묘사가 적나라합니다.

blanca 2010-01-18 13:51   좋아요 0 | URL
40년 전에 읽으셨다는 얘긴 아니시죠?ㅋㅋㅋ 직업이 기자군요. 더 흥미가 갑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18 16:19   좋아요 0 | URL
'40년전의 정음사 번역본'으로 써야 하는데...추잡한 기자를 모델로 한 소설은 우리나라에도 있죠.

2010-01-18 17: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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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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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9 0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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