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슐러 K. 르 귄의 작품은 애석하게도 아직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기대 이상의 에세이집을 읽고 나니 그녀의 소설들이 궁금해졌다. 여든이 넘은 작가가 노년과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사회의 각종 현안과 폐미니즘과 개인적인 경험을 너무 진지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게 그렇다고 개인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읽는 즐거움까지 함께 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단 한 편의 글도 가볍거나 지면을 낭비한 감이 없다. 위대한 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p.23


그 어떤 작가보다 그녀의 노녀에 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고 적나라한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의 빈약한 논리, 노년을 부정하려는 시류에 대한 따끔한 지적, 그것은 "존재의 상태"이기에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나날이 허물어지고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우울하지만은 않은 게 그녀 특유의 위트가 가득한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어떤 어두운 이야기도 그녀에게서 나오면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얻는다.


반려묘 파드에 대한 이야기는 파드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단편 소설 같다. 독특하고 득의양양한 고양이의 모습이 눈앞인 듯 그려질 정도다. "나쁜 발을 가진 착한 고양이"라니,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가 연상된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아주 오래된 남성적 기관들에 점점 많은 여성들이 진출해 왔다는 사실은 매우 훌륭한 변화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가까스로 자신들을 배척하는 기관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십중팔구 남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남성적 가치를 강화하도록 강요받는다. 

-p.160~161

콕 집어 언어화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진실의 적확한 표현이다. 여성들이 단지 남성적 기관에 많이 진출하는 게 성평등으로 향한 진보이자 발전이라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녀들이 거기에서 어떤 가치를 강화하도록 독려받고 때로는 강요받는지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뒤따라와야 할 것이다. 여전히 남성적 가치, 가부장적 조직 문화에 동화하고 때로는 보조 역할을 하도록 저도 모르게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이야기. 


'내면의 아이'에 모든 힘든 일들의 원인을 귀결시키는 것의 태만함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그것이 결국 게으름이 아니겠는가, 하는 그녀의 반문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한편 그럴지도 모른다는 설득력을 갖는다. 


어슐러 K. 르 귄은 어느 하나 허술하게 보아 넘기지 않는 것 같고 일단 의심하고 두드려 보며 인식과 지각의 지평을 넓힌다. 무조건적 맹종, 맹신, 무비판적인 수용을 그녀는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대목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렇게도 솔직하다니. 같은 직업군의 다른 이들을 시기한다고 때려주고 싶다고 이가 갈린다고 대놓고 얘기할 수 있는 그녀의 건강한 마음이 부럽다. 


질투는 노랑과 초록이 쌓인 그 더러운 코를 주로 작가로서의 내 삶에 들이댄다. 나는 찬사의 날개를 달고 성공을 향해 비상하는 다른 작가들을 시기한다. 그들의 작품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는 그들과 그들을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분노를 느낀다. 허세 부리지 않아도 성공할 만한 재능을 가진 헤밍웨이를 걷어 찰 수 있으면 좋겠다. 허세 부리고 가식을 떤 대가로 말이다. 끝을 모르고 과대평가 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은 뭐든지 이가 갈린다. 필립 로스의 안치소를 보면 화가 다 치솟는다. 

-p.219


그녀가 다음 주면 여든하나가 되기에 남겨둘 시간이 없다던 고백은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여든하나의 그녀가 하는 이 솔직하고 대담한 고백들은 단순히 사적인 차원이 공적인 메시지가 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좋은 에세이들이 가지는 힘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0-08-07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브랑카님 노년에 대해 관심 많잖아요. 정말 흠뻑 빠져서 읽으셨겠는데요?
저도 르 귄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입니다.
이책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게 아쉬워요.

blanca 2020-08-08 09:50   좋아요 1 | URL
ㅋㅋ 스텔라님, 맞아요. 글을 진짜 잘 쓰더라고요. 저는 그냥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뭐랄까, 대가의 느낌이 물씬 나는 에세이들이었어요.
 

한 사 년 전이었나 보다. 집 근처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면 있는 도서관은 좀 외진 주택가를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공원에 폭 안긴 폼이라 사방의 유리창으로 키 큰 나무들과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근사한 곳이었다. 게다가 부지런한 사서는 한국 문학 신간을 부지런히 넉넉하게 채워넣어 그 서가에서 그 책들을 한 아름 안고 나오는 길은 세상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백수린, 김금희, 최은영을 만났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정서들을 공유하는 짧은 이야기들이 당시에 참 신선하고 좋았다. 여러 가지 일신상의 변화로 그 도서관을 떠나게 된 것이 참 아쉽다. 요 근래에 다시 그 작가들과 재회했다. 특히 정세랑의 발견. 대학병원이라는 장소를 둘러싼 <피프티 피플>의 이야기를 모처럼 즐겁게 읽었다. 장편소설이지만 오십 명 남짓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름 아래 개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어 차례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잡으며 읽을 필요는 없다. 환자, 의사, 방사선사, 안전요원, 홍보부 직원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유형들이다. 서로는 알게 모르게 얽혀 있어 뜻하지 않은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회하게 된다. 지나치게 촘촘하거나 치밀한 구성은 아니지만 그러한 느슨한 연결이 더 현실과 닮아 있어 몰입이 됐다. 특히 세대 간의 만남과 소통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묘사한 대목이 좋았다. 섣불리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 들지 않는 잘 늙은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분주하고 다사다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기분이 데워지는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장소에서 그 장소를 중심으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이야기.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정세랑 <피프티 피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상황과 너무나 많은 감정의 진폭들은 때로 모두를 덜 예의바르게 만든다. 노력할 일이다.



백수린의 문장와 이야기는 결이 곱고 섬세하다. 예민한 현을 건드리는 재능이 뛰어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빌라>도 예전의 인상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특히 손녀가 추적하는 할머니의 이국에서의 로맨스를 그린 <흑설탕 캔디>와 선량한 인간의 내밀한 이중적인 마음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던 <아주 잠깐 동안에>가 좋았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복합적인 마음에 대한 포착에 대한 여운이 긴 이야기들. 제목처럼 참 싱그러웠다.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백수린 <흑설탕 캔디>

"아무짝에 쓸모없는..."이라는 말이 언제나 가슴을 파고든다. '쓸모'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쓸모없음'의 가치에 주목하는 일이 결국 읽고 쓰는 일일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7-27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8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소설의 흡인력은  이미 비교적 쉽게 획득한 핍진성보다는 사실들의 행간의 맥락, 인물의 내면의 심리의 묘사력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이미 벌어진 일들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독자가 그러한 사태와 상황 속의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전제일 것이다. 시공간의 낙차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러한 내면의 묘사가 가지는 공감의 힘이다. 


그러한 면에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배교자들은 비겁해 보이지 않는다. 17세기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포르투칼 로드리고 신부의 수난의 과정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굴복해 배교한 과정은 결국 제자인 '나'의 여정에서 비로소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고 재조명될 것이다. 기적도 극적인 해피엔딩도 없이 건조하고 어쩌면 외형적으로는 패배의 여정이라 할 만한 그 처절하고 사실적인 선교 과정의 묘사는 실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하고 감동 받을 만한 것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우리가 삶에서 청춘일 때 인생에 기대하는 어떤 열정, 이상과 합치하지 않는 생의 간극에서 가지게 되는 회의의 정경에서 흔들리는 대목을 그래도 체현하고 있다. 비겁자 스승의 발자취를 좇으며 그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들은 비단 종교적인 것들만이 아니다.


드라마틱한 기적도 신의 응답도 실종된 침묵의 현장에서 고통받으며 순교하는 무고한 신도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성화를 밟고 배교하기를 강요 당하는 고문의 현장에 선 로드리고 신부의 고통의 묘사가 절절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대체 이 머나먼 이국으로 와 응답이 없는 신을 위해 이 생에서도 굶주리고 위정자들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고문에 몸부림치며 죽어가야 하나, 라는 회의론적 의문은 치열하게 그를 압박한다. 모든 흔들리는 희미한 질문들을 엔도 슈사쿠는 피하지 않는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변형되어 아예 실체조차 불확실한 종교의 변용에 대한 회의도 비록 일본인의 입을 빌렸지만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신부는 벽을 향하고 앉아 소리를 내어 웃었다.

-p.215


유다처럼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팔아 넘기고 부인하고 도망치지만 끝내 그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기치지로라는 인물도 어쩐지 눈물겹다. 약한 본성과 엄혹한 상황에 몰려 계속 자신의 신앙을 부정해야 했던 그지만 그럼에도 반복해서 돌아오고 신부 곁을 맴도는 그의 현실은 신앙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용감한 신도들의 모습보다 더 현실적이다. 엔도 슈사쿠의 인물들은 고정적이고 용감하고 이상주의적인 대신 현실적이고 유동적이고 회의하고 모순적이라 우리의 삶과 더 가깝다. 그 모두의 변심과 배교는 그래서 미약한 마침표가 아니다. 수많은 질문들과 실종된 답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다. 그는 감히 답하거나 설명하지 않은 채 마친다.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고 최대치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가 공인인증서 갱신을 제대로 못 하여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볼 때 작은 충격을 느꼈다. 점점 부모의 그늘에서 나는 밀려나고 오히려 연로해지시는 부모님의 보호자 역할을 담당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실감은 머리보다 마음으로 오는 것이었다. 언제나 나보다 크고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할 수 있는 것이 많았던 부모님과의 시간은 가끔 정말이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든다. "내가 아이였을 때"가 진짜 있었을까? 끊임없이 다시 고쳐쓰는 기억들. 그 일은 정말로 있었을까? 내가 기억하고 만들어 나가는 나의 삶의 총체적 서사의 기반은 너무 빈약한 것이 아닐까? 기억들의 집은 어느 허술한 곳을 툭 치면 그대로 무너지는 게 아닐까? 나는 모두 자신의 과거 추억들을 회상하고 그 이야기들을 현재에 통합하며 살아 나가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심지어 과거를 거의 회상하지 않고 미래에도 기대지 않으며 오직 '지금'만을 응시하는 삶도 있다는 것.


사람들은 명확하고 구체적인 서사를 숙고하지 않고도 가치있는 방식으로 발전하고 심화할 수 있다. 잘 사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비서사적인 프로젝트다.

-갈렌 스트로슨 <불면의 이유>
















철학자 저자인 스트로슨은 '자유의지'와 '삶의 서사성'을 부정한다. 신의 이야기나 우주의 섭리까지 접근하여 결정론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더 커다란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차원에서의 내려다보는 인간 개개의 삶의 파편을 냉정하게 응시한다.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들,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들도 많았지만 그가 인용하는 카뮈, 아이리스 머독은 그가 부정하는 삶의 서사성보다 왠지 더 문학적인 것 같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끊임없이 느끼는 괴로움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어서 의미 있는 읽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의미를 찾아 헤매고 어떤 빈약한 인과관계를 찾아 헤매려는 그 무용한 시도를 그칠 수 있었다고 할까. 죽음도 인간의 기억도 자유의지도 자아도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집착해야 할 실체를 지닌 것은 아닌 것이라는 이야기는 오히려 위로가 된다.

















정희진의 책은 처음이다. 게다가 <정희진의 글쓰기2>로 순서도 지키지 못했다. 여성학 연구자의 읽기는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여러 현상들을 멈추어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시간을 주었다. 여성주의 독법은 부가적인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성차가 어떤 위계의 시선과 영원히 결별하지 않는한 근본적인 인식의 여과체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은 놀라운 것이었다. 호흡이 짧은 글들임에도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치열한 글쓰기는 필력이 아니라 사유에서 나온다는 근본적인 명제를 다시 보여준 책이다. 그녀가 스스로를 알기 위해 쓴 글들은 때로 읽는 자들의 지축을 흔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당 깊은 집 문지클래식 2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렸을 때의 소설 읽기는 완벽한 안전 거리 너머 그 세계로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정도였다면, 성인 이후의 읽기는 그 세계에 잡념 없이 몰입하는 건 쉽지 않지만 오히려 인물들에 너무 이입이 되어 거리두기가 쉽지 않다. 지나치게 고통스럽거나 힘든 삶을 사는 주인공들의 삶이 소설적이라기보다 이제 인생사 자체가 누구에게나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는 깨달음의 연속이다 보니 주인공이 아프면 그 진통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아 힘들다.


<마당 깊은 집>을 읽는 내내 1954년 열네 살의 소년 길남이의 간난스런 하루하루가 너무 생생해서 담담해지기 힘들었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장자라는 이유로 일찍이 돈벌이로 신문배달일에 나서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거리를 헤매어 다니는 모습이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실제 그 시대를 통과한 많은 소년소녀들의 삶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실제 대구시 장관동의 '마당 깊은 집'에 사글세를 살았던 작가 김원일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은 이야기다. 이념의 골을 둘러싼 엄혹한 시대의 잔재들과 휴전 이후가족과 생이별하고 정든 옛집을 떠나야 했던 많은 이웃들의 삶이 오롯이 '마당 깊은 집'을 채우고 있다. 하루하루 생존 자체가 투쟁이어야 했던 그 처절한 풍경은 소년이 그 나이에 맞는 성장의 단계를 겪는 대신 어른들의 절망, 학습된 무력감을 이미 습득해버리고 마는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삯바느질로 네남매를 홀로 건사해야 했던 길남의 어머니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자못 냉담하고 때로 잔인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소년이 어머니에 대하여 양가감정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실제 작가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도 많이 투영되어 있다고 한다. 현실이 얼마나 냉혹한지를 아는 어머니는 소년이 강인해지고 자립심을 키우기를 독려한다. 장난을 치거나 응석을 부리거나 포기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 소년의 성장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거대한 압력으로 뒤틀린다. 잃어버린 부성의 자리는 뒤틀리고 짓이겨진다. 그러나 그렇게 소년은 결국 어머니가 그렇게도 소원했던 어엿한 독립적인 하나의 어른이 된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아기자기한 사람 사는 재미는 사방에 마치 그 이웃들이 생동하는 듯한 실감을 자아낼 정도다. 남의 집 일에 주제넘게 나서기 좋아하는 경기댁,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주인집 아들, 넉살 좋게 집안 일 거들며 인심을 얻는 일꾼, 어린 나이에 아픈 엄마와 어린 동생을 먹여살려야 함에도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는 친구 한주. 모두 허룩한 구석이 있으면서도 왠지 정이 가는 사람들이다. 삼십 년 뒤에 그 시절을 회고하는 화자는 이들이 자신에게 주었던 사라지지 않을 흔적들을 찬란하게 복기한다. 어머니가 툭하면 '더러운 세월'이라 폄하했던 시간들이 더럽게만 추억되지 않는 이유다. 다 같이 배고팠지만 그래서 때로 서로에게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주고받았던 세월들이었지만 그럼에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었던 시간들. 은결든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간들이 결국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의 시대와 연결된다는 것에 묘한 먹먹함이 밀려온다. 하루에 한 끼도 먹기 힘들었던 시간들, 주인집의 화려한 파티를 엿보며 패배감으로 울었던 시간들이 지나고 소년은 성장하고 어머니는 늙고 화로처럼 껴안고 자곤 했던 어리숙한 동생은 약 한번 못 먹어보고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섯 딸과 막내 아들을 낳고 삼 년이 채 되지 않아 홀로 가족을 건사해야 했던 대구의 할머니가 생각나서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던 이야기의 뒤끝이 유난히 아픈 이야기. 얼마나 막막하고 두렵고 힘들었을까 차마 물어볼 수도 물어보지도 못했던 그래서 포원이 지는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