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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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의 유작이 되어버린 '풍요의 바다' 시리즈 2권이다. 전권 <봄눈>의 시점 인물은 마쓰에가 가문의 기요아키였다. <달리는 말>에서는 금기시되는 사랑에 정열을 바치고 요절한 주인공의 죽음을 목격한 친구 혼다가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오사카 항소원의 판사가 되어 재등장한다. 기요아키는 죽음 직전에 혼다에게 환생을 암시하는 재회를 약속한다. 



"또 만날 거야. 분명히 만나게 돼. 폭포 밑에서."


혼다는 항소원장을 대신해서 가게 된 신전 봉납 검도 시합에서 빛나는 소년 이사오를 만나게 된다. 혼다는 우연히도 그 소년에게서 기요아키의 표식을 읽게 된다. 검은 점 세 개, 그리고 순수를 향한 무모한 열정. 기요아키의 열정이 사랑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사오의 무모한 열정은 우국으로 향한다. 부정부패에 물들고 타락한 정재계의 거물 인사들을 암살하고 할복 자살하겠다는 청년의 치기는 실제 청년들을 이 기치 하에 규합하고 거사를 결행하려는 음모로 비화된다. 

<달리는 말>은 열아홉 소년의 순수를 향한 무모한 열정, 그 순수성이 현실과 어떻게 충돌하고 어그러지는지 또 그것을 뛰어넘어 어떻게 승화되는지에 대한 미시마 특유의 미문의 거대한 향연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는 결국 아름다움과 젊음에 대한 천착이자 집착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있어 늙고 병들어 죽는 일은 하나의 치욕이었던 것 같다. <봄눈>에서 스무 살에 죽어버리는 기요아키와 <달리는 말>에서 열아홉 이사오로 환생한 친구를 확인하는 중년 혼다의 모습은 은연중 미시마의 그 아름다운 한때에 대한 회한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삶은 덧없고 청춘의 아름다움은 찰나인데 그 찰나에 갇힌 그 무의미의 향연은 미시마의 언어를 통과해서 하나의 예술이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이 유장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너지는 삶의 취약성을 돌아보며 결국 그 시간을 넘어서는 예술에 닿았던 길을 닮았다. 아름다움은 시간 앞에 무력하지만 그 시간을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 예술로 위대해진다. 


아름다움 바로 뒤에 또 다른 아름다움이 오는 일은 이 세상에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우리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달리는 말>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자살만큼이나 다층적이고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신사참배 의식, 신사 검도 대련, 노가쿠, 천황 숭배 등의 묘사는 마치 그 현장에 있는 착시를 일으킬 만큼 생생하고 세밀한 만큼 또 억누르기 힘든 거부감을 자아내는 대목이 있다. 특히 이사오가 일본의 역사적 봉기를 기록한 책을 교본 삼아 또래 청년들을 규합하여 숭모하는 천황 중심 국가 조직을 이루기 위해 지도층을 암살하고 할복 자살하는 혈맹을 맺는다는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를 통과한 우리가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가정이다. 그러나 미시마는 여기에서 단순히 천황에 대한 무모한 충성이나 극단적 우익 사상을 강제 주입하려는 오만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이야기와 고루하고 단편적인 일률적 역사관으로 재단하는 현실에 대한 경계, 심지어 이사오 같은 청년들이 보지 못하는 전체적인 세계상에 대한 안타까움 등에 대한 길항하는 시선을 놓치지 않는 주도면밀함이 놀랍다. 



흰 눈 같은 죽음 이후


대단한 이상을 향해 투신하는 그 행위들이 놓치는 사소하고 작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이야기가 가지는 한계에 대한 암시처럼 보여 인상적이다. 즉, 미시마 유키오는 스스로의 그 유려한 문장들, 탐미주의가 가지는 한계까지도 자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대의, 열혈, 우국, 죽음을 무릅쓴 뜻도 사라지고, 대신에 주변의 것들,옷가지와 일상품, 바늘꽂이, 화장도구 같은 소소하고 아름답고 다정한 것들과 자신이 서로 섞여 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사물과의 친밀함이 생겨났다. 

-pp.421


그의 문장들은 더없이 에로틱하고 신비롭고 환상적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이상화되었던 대의, 열혈, 우국, 죽음 등을 넘어서는 것들은 그보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이 이야기에는 있다. 죽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찾아 헤매는 작가의 도정에서 우리는 의외의 발견을 하게 된다. 작고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재발견이다. 죽음으로 부정했던 삶의 지리멸렬함을 그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다시 긍정하는 모순을 보여줬지만 그 모순 자체가 미시마 유키오다. 


소년 이사오가 간직했던 역사 속 이야기 소년들은 "올해의 벚꽃은 마지막 벚꽃"이라 노래했다. 그 노래의 후렴구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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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08-22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저도 읽어야겠어요. 어휴 좋네요.

blanca 2024-08-22 13:34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 <봄눈> 아직 읽으시기 전이라면 연이어 읽으시길 추천드려요. 저는 앞의 내용을 다 잊어버려서 둘이 같이 펼쳐 놓고 보게 되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참 드러내어 놓고 좋다,고 말하기 민감한 작가지만 예술적 묘사력만큼은 진짜 압권인 것 같아요.

은하수 2024-08-22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너무 좋네요^^
모든 외부적 요소를 제외하고 읽고 싶을만큼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은 너무 아름답고 또 아름답죠!
<봄눈> 읽고 도서관에 신청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나 올까요. 여세를 몰아 얼른 읽고 싶은데 안될 거 같아요 ㅠ.ㅠ
작품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거부감은 또 어쩔 수가 없네요. 이 딜레마를 어째야 할까요

blanca 2024-08-22 19:17   좋아요 1 | URL
미시마 유키오가 그래요. 누가 어떤 작가 좋아하냐, 고 물어볼 때 자신감 있게 얘기하기 힘든 작가죠. 그리고 이야기도 그래요. 일본 제국주의, 극단적 우익 사상 등을 작가의 미문으로 읽을 때는 참...마음이 힘들어요. 그런데 좀 문제가 있다,고 발끈하다가도 슬며시 이 작가는 자신의 사상 자체를 흔드는 통찰을 또 보여줘요. 이런 생각을 하지만, 이건 좀. 이런 식의 흔들림이요.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다가도 예술은 작가의 삶을 뛰어넘는 건가, 이러다가 참 어지러운 작품이에요. 아주 뛰어난 작품인 것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놀라울 정도예요.

은하수 2024-08-22 23:12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인정이요.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글을 쓴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그래서 앞으로 계속 읽게 될 거 같아요.
이왕 읽는거 기쁘게 읽겠습니다. 놀라울 정도란 말씀어ㅣ 더더 얼른 읽고 싶네요^^
 

나이듦은 상실의 누적이다. 매일이 평온하고 모두가 영원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런 일은 없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이제 잘 기억하려 한다. 이 만남이 언젠가 결국 끝나고 만다는 사실을 이젠 상기한다. 나는 애도의 주체가 되겠지만, 그 대상이 되는 날도 결국 맞아야 한다. 깊이 생각하다 보면 두렵고 서럽다. 답이 없는 문제다. 명쾌한 해결책도 없다. 자꾸 잊으려 하지만. 하루하루가 결국 그런 날들을 향해 가는 그 자체를 막을 도리가 없다. 어린 사람들의 해맑음을 되찾을 수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상실과 발견>의 저자 캐스린 슐츠의 책은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버지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는 많다. 그러나 이 책이 다른 점은 그 상실과 대구를 이루어 평생의 반려자를 발견하는 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잃어가며 사랑을 시작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그러나 인생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렇지 않을까. 레이먼드 카버 또한 그랬다고 한다. 아버지가 죽어가는 바로 그 병원에서 아이의 탄생을 맞았다. 저자가 발견의 장을 상실의 장 뒤에 둔 것은 섣불리 사라짐에 관련한 절망으로 마침표를 맺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을까. 삶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찰나와 같음에도 여전히 빛나는 유의미한 무언가가 있다는 그 희망을 꿈꾸는 어려운 길에 대해 나는 여전히 매혹을 느낀다.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다. 한데 사랑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히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가 결국 그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가이다. 

-캐스린 슐츠 <상실과 발견>



















이 이야기 또한 필멸자로서의 인간의 근원적 유한함에 대하여 다룬다. 다만 더 과학적으로. 저자 마리라 마르티논 토레스는 의사이자 고인류학자다. 우리 인간 종의 "병력전기학"에 대해 다룬다. 죽음, 늙음, 두려움과 불안, 수면장애, 암, 감염, 사춘기, 음식, 알레르기, 폭력, 죽음의 의식에 대해 과학적인 정보들과 더불어 저자 자신의 성찰과 문학적 식견을 안내자로 동행한다. 흥미롭고 감동적인 책이다.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한계, 폭력성, 이기심에 대하여 언급하지만 그 한계 속에서 자신의 필멸을 의식하며 집단에 기억을 남기고 기여하는 방향에 대하여 고민하는 본성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이렇게도 나약한데 그렇게 위대해질 수 있는 우리 인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듣는 순간, 상실을 애도하고 사랑을 발견하는 길을 찾아 떠나는 <상실과 발견>의 저자와 다시 만나는 느낌이다. 


숱한 상실들로 인간들은 불완전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발견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우리 종이 비천해지지 않고 스러지지 않는 이유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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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바른 토너로 얼굴 전체에 트러블이 확 일어났다. 내 피부는 민감성도 아니고 그 토너는 처음으로 쓴 것도 아닌데. 

저는 민감성이 아닌데 왜 갑자기 이렇죠?

원래 그런 거예요. 사람이 평생 건강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기사, 그렇네요.


가슴 아픈 일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다. 아름다움 또한 그렇다. 이야기에 질리지 않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일 터다. 
















미시마 유키오의 유려한 문장은 서사를 압도한다. 아니, 서사를 구축한다는 말이 맞겠다. 문장 자체가 주인공의 성장, 주인공의 삶 그 자체를 닮아 아름답고 빛나고 허무하고 때론 폭력적이다. 이런 문장.


나는 잃어버린 낮, 잃어버린 빛, 잃어버린 여름 때문에 울었다.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아버지의 유언대로 교토의 금각사의 도제가 된 소년은 절대적인 미의 상징과도 같은 금각사 앞에서 끊임없이 절망한다. 그건 닿을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실재의 현현으로 마치 약올리듯 가까워질듯 가까워지다가도 저만치 멀어져만 갔다. "한 손으로 영원을 만지면서 다른 한 손으로 인생을 만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어른의 문지방을 넘어가며 소년이 이루어 낸 성장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하나의 장례 절차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은 언제나 그렇듯 아름답고 허무하다. 그는 어떤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다. 다만 본인이 상정한 절대미에 근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질 뿐이다. 거기엔 커다란 맹점이 있다. 그에게는 윤리가 없다. 선이 빠져 있다. 아름다움을 위해 그는 그러한 가치들을 방기한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래서 혼란스럽다. 내가 이런 글에 감동해도 되는 걸까.



















김애란, 김연수, 윤성희, 은희경, 편혜영이라니. 미처 기대하지 않았던 좋아했던,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반가운 해후 같은 작품집. 음악이라는 하나의 테마로 뭉쳤다지만 역시나 고수들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색깔들로 울림을 주는 이야기들을 기꺼이 만들어냈다. 원래는 어떤 테마로 청탁 받은 이야기들의 작위성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소설집>은 그런 우려를 불식시킬 만큼 좋았다.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에는 화상 영어로 만나는 현업에서 은퇴한 원어민 교사와 중년 여성의 시간이 나온다. 아버지를, 어머니를 잃고 삶의 전장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시간도 이미 지나온 그들의 외국어 수업이라는 체를 통과한 한계를 가진 미약한 소통은 그들의 상실의 시간들의 교감과 기대할 것이 많지 않은 남은 시간들에 대한 작은 기대들을 한데 불러온다. "이미 많은 걸 잃었다 여겼는데 여전히 잃을 게 남은 삶 속에서" 잠시잠깐 빛이 쨍하고 나는 그 시간의 마침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결말까지도 상세히 축조된 김애란 작가의 문장들이 참 좋았다. 


김연수가 의도한 사나운 어머니의 모습이 <수면 위에서>는 여전히 잔잔하고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무조건 희생하고 감내하고 묵묵히 가족을 위한 시간을 통과하는 전형성을 탈피한 지점에는 삶이 있었다. 우리 여기 지금에서의 삶들이 가질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작가의 심오한 탐구는 여전히 울림이 크다. 나는 언제나 그의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윤성희의 <자장가>이 십대 여고생 화자의 이야기는 내도록 슬펐다. 과거의 어느 시점 내가 어딘가에 두고 온 내 여고생 시절의 모습을 환기하는 그 지점 때문일까. 우리는 부모가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거꾸로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내가 아직 덜 컸다는 사실을 항상 환기한다. 


은희경의 <웨더링>은 궁금증을 남겼다. 기차의 서로 마주 보는 4인석에서 처음 만났다고 생각했던 그 낯선 이들의 조합은 정말 처음이었을까. 옆자리의 노인이 주인공에게 양보한 우산이 가지는 여운이 길었다. 


편혜영의 <초록 스웨터>는 좀 의외였다.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작품을 편혜영 작가가 썼다고? 나는 그녀의 문장이 가지는 긴장감과 그 절제된 어두움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죽은 어머니의 친구들을 이모라 부르며 그녀들과 교감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에 기대보다 더 너무나 쉽게 빠져들었다. 받아야 할 돈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 아니 못하는 그 어처구니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얽히는 일은 수많은 결들이 차곡차곡 쌓여 누적되는 일이니까. 깔끔하게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우리의 역사를 압축하기는 어려우니까. 그 행간에서 작가는 독자와 소통한다. 


얼굴의 피부염은 얼추 가라앉았다. 그런데 또 그럴까봐 무서워서 뭔가를 다시 얼굴에 얹는 일이 망설여진다. 마치 겁쟁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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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4-07-16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의문의 두드러기로 몸고생 맘고생이 말이 아니에요. ㅠㅠ 전에 없던 일이 자꾸 몸에 일어나는 것 보니까 나이가 많이 들어서 그런 거 같아서 더 슬퍼요. 지금 여행왔는데 예전과 달리 햇빛을 피하고 있으려니 더 슬프네요. 암튼 <음악소설집> 담습니다. 많이 좋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겁쟁이처럼 망설이는 마음 아주 잘 알아요. 그래도 용기 내시길. 화이팅!!

blanca 2024-07-17 09:28   좋아요 0 | URL
라로님도요? 제 친구도 그러더라고요. 피부가 진짜 묘한 것 같아요. 쉽게 생각했는데...저는 최근 화장품에 자꾸 알레르기가 생겨서 선블럭도 못 발라요. 와우, 모처럼 편안한 휴식, 즐거운 여행 되기를 바라요.

2024-07-17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17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ansient-guest 2024-07-24 0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부엔 둔감해서 잘 모르지만 뭔가 잘 나는 것 같아요. 제 경우엔 늘 어딘가 아프고 뒤틀린 느낌이라서 그게 갈수록 신경이 많이 쓰입니다.ㅎㅎ 나이를 먹어가고 있어요. 아마 제 서친님들 중 높은 연령대에 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ㅎㅎ 이제는요....

blanca 2024-07-24 12:48   좋아요 1 | URL
올해 나이듦을 여실히 느껴요. 인생의 유한함도 실감하고요. 컨디션이 완벽한 나날이 줄어가는 느낌 뭔지 정말 알아요..삼십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삼십대의 그 강건한 신체 컨디션은 눈물나도록 그립습니다.

2024-09-03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03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산둥 수용소 - 인간의 본성, 욕망,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실존적 보고서, 개정판
랭던 길키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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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이기적인 사람일까, 이타적인 사람일까? 위선자일까, 정직한 사람일까?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한때 내가 비교적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명백한 불의에 분노하고 약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MBTI가 INFJ로 나오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라고 별 수 없다, 는 생각이 든다. 어떤 직접적인 상황의 압력을 받는다면, 즉 내 이익이 침해되고 내 가족이 피해를 받는 상황이 온다면, 그 안에서도 나는 여전히 정의로운 사람으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을까? 그렇게나 욕하던 파렴치하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의 바깥에서 정의로운 이상주의자가 되기란 너무 쉬운 일이지만, 내가 그 상황 속 당사자가 되어 그 역학의 압력과 긴장도 안에서도 그러기란 말처럼 쉬운 노릇이 아니다. 


<산둥수용소>는 한 마디로 경이로운 책이다. 사회실험학적 보고서도 이 책처럼 실증적이고 현실적인 인간 군상의 천태만상을 지근거리에서 심지어 자신도 그 대상으로 포함시켜 낱낱이 생생하게 이야기하진 못할 것이다. 가차 없다. 흥미로우면서도 가볍지 않다. 무거운 척하려 위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성자 같은 사람도 식사다운 식사를 못하면 죄인처럼 행동할 것이다."는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제사에 인용된 것은 우리 인간이 기대만큼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는 비관적 발견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43년 스물네 살의 연경 대학 교사였던 저자 랭던 길키는 일본에 의해 중국 산둥의 위현 민간인 포로 수용소에 수감된다. 이 수용소는 나치의 그것과는 달리 육체적인 고문이나 굶주림 같은 극단적 상황은 없었다. 따라서 이 책은 다른 유대인 수용소와 달리 그것을 통제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감자였던 인간 집단에 대한 흔치 않은 관찰기다.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영국인, 미국인, 네덜란드인, 벨기에인 사업자, 수도자, 선교사, 교사, 은행가 등 다양한 계층, 민족, 연령 층이 하루 아침에 수용소의 통제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앞의 고군분투 적응기이자 극단적 상황 앞에 노출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심층적인 탐구 보고서다. 



-신속한 적응


절대적인 공간과 물질적 한계 속에서 이루어낸 수용소 집단의 적응 이야기는 놀랍다. 마치 초창기 문명의 개화처럼 사람들은 팔을 걷어 부치고 맨땅에서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근차근 그들의 공동체의 문명을 건설한다. 수의사는 모두를 먹이기 위해 200개의 쿠키를 굽기 시작했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공예품을 만들어 수용소 안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고, 연극 공연을 하고, 사제들은 수용소 안 작은 예배당을 만든다. 랭던 길키는 이러한 인간들의 문명의 놀라운 적응력에 감탄한다. 어떤 상황이든 인간은 적응하여 그들의 일상화를 이뤄냈다. 그러나 초기의 이런 역동적인 적응기는 저자가 이야기하려던 수용소 이야기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윽고 수용소 전체를 뒤덮는 도덕적 위기의 문제에 당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비합리적인 이기심이다.


-무너지는 논리와 공정


일반적으로 사람들은(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다.

-pp.179

우리는 홀로코스트 수용소 이야기에서 그 안의 감동적인 인간의 연대나 희생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들었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을 나누고 심지어 자기 희생에 기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보여주는 드라마틱한 감동의 장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중론이 아니다. 오히려 놀랍도록 탐욕스럽고 비합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본국에서 보내 온 적십자 구호품을 다른 가난한 나라 사람들과 나누지 않으려다 일본군에게 다 압수 당하는 미국 사람들 이야기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정도다. 미국인인 저자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솔직히 기록하며 심지어 적군인 일본군의 개입이 없었으면 이 구호품을 둘러싼 내전이 일어났을 거라고 고백한다. 이미 배고픔을 채우고도 남은 물자를 옆의 궁핍한 이웃과 나누지 않으려는 사람들에는 심지어 평소에 이웃 사람을 외쳤던 신실한 신앙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이기심을 더 합리적으로 포장할 줄 알았다고 한다. 즉 일부가 아닌 대다수가 극도로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이었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웃의 필요를 폄하하고 남은 물자를 나누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자신의 진짜 욕망과 욕구를 스스로에게 감추기 위해 직업적이거나 도덕적인 옷을 입는다. 그러고는 이기적 관심이라는 진짜 속내 대신 객관성과 정직이라는 겉옷을 걸치고 세상에 나간다. 

-pp.214



-수용소 내의 정치


인간이 이렇게도 자신의 안위에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비합리적인 이기심을 표출한다면 과연 그 대안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물자를 훔치고 거짓말하고 타인을 이용했고 그것을 통제할 방법은 자체 정치 기구의 설립과 그것을 통한 법적인 제약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수용소 안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설립한 정부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집행부였던 랭던 길키는 점차 이 안에서 정치적인 힘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된다. 민주 정부의 힘은 자율적으로 창출되기 어려웠다. 그것조차 권위에 입각한 어떤 힘을 필요로 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빵을 굽고 남은 밀가루와 설탕을 훔쳐갔고, 때고 남은 석탄을 마음대로 가져갔다.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조차 그랬다. 차라리 어떤 한도 안의 재량권을 주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양보조차 곧 유명무실해졌다. 더 가져가고 더 훔쳐갔다. 랭던 길키가 속해 있던 집행부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체 규약을 만들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공동체의 도덕성은 공동체의 유지에 필수적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의심해야 한다면 그 사회는 영속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도덕성은 치트키가 아니었다. 이것은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성립된 민주 정부의 권위에 대한 고민과도 닿아 있었다. 가능하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그 의도가 선하더라도 현실과 멀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랭던 길키는 수용소에서 나와서 신학자의 길을 걷게 된다. 따라서 그의 마지막 결론은 그의 종교 안이라는 한계를 노출한다. 그러나 그가 수용소 생활을 하며 자신과 같은 종교인의 부끄러운 민낯을 목도하고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자성한 대목은 그가 편협한 맹신주의자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오히려 종교가 가지는 맹점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던 경험을 잊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기반으로 삼는다. 


불안정한 삶을 경험하면서 배운 가장 기묘한 교훈은, 원하지 않던 상황이 파괴적인 역할을 하기보다 오히려 창조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위현 수용소에 오고 싶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거부하고 싶고 혐오스러웠던 경험 안에는 새로운 통찰력이라는 씨앗이 있어서, 우리 중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너무도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지루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이 삶을 더욱 창조적으로 헤쳐나갈 수 있었다. 

-pp.472


생존 앞에서 도덕성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반 그 자체였다. 도덕적이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 도덕성은 빛을 발했다.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이웃의 필요를 간과할 때 나의 생존은 더욱 더 위협 받았다. 타인을 믿을 수 없을 때 그곳에 지옥이 있었다. 하지만 극단적인 궁핍 속에서도 내 옆의 이웃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그 궁핍은 채워짐으로 보답 받았다. 인간의 적나라한 이기심은 결국 이런 교훈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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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갈증 페이지터너스
미시마 유키오 지음, 이수미 옮김 / 빛소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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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을 예비한 하나의 무모한 열정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상대라는 매개체를 필요로 할 뿐, 반드시 그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죽음과도 닮았다. 그것이 오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없다.


아내 뒤에서 외도를 일삼았던 남편을 잃은 에스코가 한큐 백화점에서 남자 양말 두 켤레를 사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언뜻 단조롭고 평화로운 일상을 가림막으로 드리운 채 펼쳐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이 여인이 남편을 잃고 들어간 시가에서 시아버지와 맺은 부정과 청년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하인 사부로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는 저류를 통과할 때는 모든 사소한 행동들이 다른 의미로 확장, 심화된다. 미시마 유키오의 미문은 이들을 둘러싼 전원의 그 어떤 풍경에 대한 사소한 묘사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통과한 모든 언어에는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도사리고 있다. 


여자의 발소리처럼 가볍지도 않고, 중년 남자의 발소리처럼 침울하지도 않다. 발바닥에 젊음의 뜨거운 무게가 실려 있어, 이 어두운 밤 복도의 판자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마치 신음처럼 듣게 했다.

-pp.34


시아버지 야키치와 바둑을 두는 에쓰코가 듣는 사부로의 발소리에 대한 묘사다. 이 대목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에스코의 사부로에 대한 은밀한 마음을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시들어가는, 퇴락해 가는 이 가문을 뚫고 들어온 단 하나의 희망, 미래, 청춘에 대한 예감이다. 그러나 물론 에스코와 사부로가 극복해야 할 수많은 난관은 간단치 않다. 신분, 연령 차 같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에쓰코는 사별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산다. 여기에는 보이는 것 이상의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녀의 생존은 거기에 기대어 있다. 만담가 같은 큰형 부부, 에쓰코를 감시하며 때로는 개입하고 방관하며 그녀의 삶에 끼어드는 야키치, 사부로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하녀 미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사랑을 사치스러운 잉여의 감정으로만 인식하는 어린 사부로. 사부로는 에쓰코의 상대로서 더없이 부적절했다. 아니, 결국 그녀가 밟고 지나가고 말아야 했던 하나의 통과의례, 희생양, 제물로서 거기 필연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즉, 우리는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 아직 그것을 구하지 못한 동안에도 어쨌든 살아가고 있다. 찾아낸 삶의 의미를 소급함으로써 이 삶의 이중성을 통일하려는 욕망의 우리 삶의 실체라고 한다면, 삶의 보람이란 끊임없이 발현되는 이 통일의 환각, 아직은 소급할 수 없는 생의 의미를 가설적으로 소급해 보는 데서 생기는 환각에 지나지 않는다.

-pp.117


에쓰코가 마침내 찾아낸 삶의 의미는 불행히도 가설적으로 소급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 죽음과 대면하게 되니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그녀의 비참한 상황은 어떻게든 결국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의 무기력함에 대한 거대한 은유로 비치기도 한다. 처절하게 아름답지만 전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결말에서도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들은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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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24-06-30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아. 오감을 일깨우는 표현입니다. 어떻게 저런 묘사를 할 생각이 들었을까요? 악상처럼 막 떠오르는 걸까요? 만약 글을 쓰는 게 업이었다면 그의 재능이 너무나 질투났을 것 같아요. 노력만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어나더 레벨의 감각. ㅠㅠ

blanca 2024-06-30 11:38   좋아요 2 | URL
천재적이더라고요. 미시마 유키오는 사상적으로 논란이 많은 작가지만 감각적 표현력 측면에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