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에 연루된다는 일은 솔직히 피곤한 일이다. 담백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삶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다. 끊임없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 좌표는 이동한다. 대문자 J에게 가장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딜레마가 있고, 갈등이 있다. 고민 끝에 당시에는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던 일이 현재에 와서는 깊은 회한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모든 자유 의지에 대한 생각이 모두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온다. 내가 선택이라는 걸 감히 할 수는 있는 걸까? 그냥 삶이란 이미 죽 그어진 경로고 나는 무력하게 그 경로에 놓인 하나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 걸까?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만남. '윤리적 딜레마'라는 공통 주제에 소환된 두 작가의 이야기 끝에는 대담이 실려 있다. 김연수의 작품 < 근접한 세계>에는 국정 농단 사태의 폭로에 연루된 손동하라는 사람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에는 고인이 된 사진 작가의 전시회를 준비하다 우연히 마주친 작가의 성적 일탈로 인한 그의 전시를 기획한 미술관 큐레이터의 번뇌의 사연이 나온다. 김연수의 이야기는 맑고 찰랑이는 물 같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목소리는 뜨거운 불을 닮았지만, 그 둘은 묘하게 서로 공명한다. 소설이란 결국 존재가 현실과 부딪혀 자아내는 어떤 균열을 서사화하는 일이기에 서로 멀어질 수 없어서일까. 손동하의 소년 시절 만난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가스미가 생전 존경했던 작가와의 관계의 붕괴와 오버랩되는 지점도 그럴지 모른다. 우리가 보는 타인의 세계는 얼마나 진실한가. 그 사람이 내게 보이는 얼굴은 그 사람의 지극히 미분화된 조각이 시간의 구획 안에 스며든 것이다. 내가 지나가는 시간과 상대가 통과하는 시간이 만나 파열음을 낼 때 그 만남을 품은 과거의 이야기는 다른 측면에서 조망된다. 이미 헤어질 것을 알고 만나는 것과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은 그래서 닮아 있다. 우리는 종내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산다.


이미 부서질 것을 알고도 인연을 맺고,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돌아가 다시 듣는다. 김연수 작가는 그 향수어린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며 천천히 읽는 이들의 과거를 환기하는 시간을,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당면하게 되는 숱한 딜레마들을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영리하게 소환한다. 덧붙여 두 작가의 대화는 그 둘의 이야기만큼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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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지움 2026-03-04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루라는 말이 와 닿네요~~

blanca 2026-03-04 12:5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연결과는 또 다른 어감이죠.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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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인생은 나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가족 관계의 서사 또한 그렇다. 특히나 부모와의 관계는 그 특유의 긴장, 갈등, 애증이 교차되는 드라마의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모녀, 모자, 부녀, 부자 관계의 이야기가 고대부터 거듭 서사화되고 가장 많은 에세이의 소재로도 소환된 이유다.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읽는 이의 공감이나 감동을 얻어내기는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진부해지기 쉽고, 지나치게 극화되기 쉽다. 삐끗하면 함정으로 미끄러지기 쉬운 글감이다. 이제 내가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귀 기울여주는 시대는 아니다. 비비언 고닉은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다시 시도한 셈이다.


<사나운 애착>은 중년의 딸과 노년의 어머니가 뉴욕 거리를 함께 걷는 현재와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에서 보낸 십오 년 유소년기의 세월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야기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유대인 공산주의자 어머니의 딸에 대한 애착은 끈적끈적하고 사납다. 어머니는 교과서 같은 결혼생활의 버팀목이 됐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 애도의 세월, 영리하고 조숙한 딸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보다 더 내밀한 친밀함을 교환했던 이웃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질투를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 비비언 고닉은 그런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하면서도 반복해서 곁으로 돌아간다.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나도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 진부한 선언은 사실 나만의 것이 아니다. 엄마의 내게 특별하게 좋았고, 특이하게 나빴다, 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이 비비언 고닉의 목소리로 제대로 묘사됐다. 즉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었던 거다.  비비언 고닉처럼 나도 어느새 엄마를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다. 내가 실패라 여겼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생의 각인에 불과했다는 앎 또한 내가 특별히 뛰어난 선각자라서가 아니라 생의 주기가 몰고 온 자연스러운 교훈에 불과하다는 걸 매일 체감한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실패하다 스러져갈 수밖에 없다.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알잖아."


비비언 고닉이 어머니와 나누는 맛깔스러운 대화들은 인생의 투명한 유리창을 통과한 아포리즘이다. 모녀가 마침내 확인하고 타협한 적절한 거리를 오고가는 말들. 


"인생은 어렵다."


그 어려운 인생에서 함께 있는 그 찰나 같은 시간들이 직조한 이야기를 제대로 잘하는 게 얼마나 큰 교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그 둘의 인생 저장소의 문을 닫고 나오는 마음이 감동으로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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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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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관계, 유년의 기억, 연애사, 이 진부한 소재들로 어떻게 가장 특별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 같은 작품. 사적 에세이가 심오한 자서전이자 고전 소설 같은 묵직한 감동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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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휴가 - 미시마 유키오 에세이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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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트일 것 같은 미시마의 가장 나르시시트와 거리가 먼 글들의 향연. 결국 예술의 성취란 ‘자기‘를 뛰어넘을 때 가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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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뭔가 주저주저할 때가 있다. 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며, 그 작가의 문체, 때로는 그 작가의 철학까지 긍정하게 되면, 마치 그 작가 생전의 기행, 편향된 사상, 정치관까지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런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 자위대의 궐기를 주장하며 할복 자살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이 대목은 더없이 거북하다. 그의 극도의 탐미주의가 아슬아슬하게 횡단하는 윤리의 경계 부분도 그러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고의 가치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작가의 윤리관, 가치관에 의심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금각사>를 불태우는 이 천재 작가에 대한 연상들은 반쯤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갈수록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을 우리는 철저히 오해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떨칠 수 없다. 하루키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대하고는 자신이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오해하지만 실은 지극히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충실히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한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도 세상 사람들의 오해로 규정되는 캐릭터를 강제로 부여받은 게 아닐까. 실제 그의 에세이나, 소설들에 우경화된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적 시각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미시마는 자신을 천재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극우라고 정치적 입장을 작품 속에 표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떤 고정된 가치관에 유보적이고, 퇴폐미와 유미주의에 대해서도 한 발 물러서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마지막 죽음의 어처구니 없는 전시에 대해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비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솔직한 고백록이다. 당연히 문장들은 아름답고, 묘사력 또한 출중하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자신 없어하는 머뭇거림들이다. 흔히 일본 작가들의 사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비대한 자아 따위는 없다. 그는 작중 캐릭터와 작가 자신을 혼동하는 다자이 오사무가 싫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세상에서 유리된 듯 하지만 그 현실에 우뚝 서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좋다고 거듭 고백한다. 여기에 우리가 미시마 유키오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미친 천재 작가는 없다. 십대의 치기, 자기 중심주의에 대한 철저한 해체, 반성의 대목도 그렇다. 


지금 내가 빨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스물다섯 살의 나는 하양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마흔 살의 나는 그것을 초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소설을 쓰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현실이 확정되는 순간, 그것은 소설가에게 죽음일 것이다.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 <소설가의 휴가>


마지막에 실린 <팽이>는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어느 날, 집앞에서 하염없이 이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젊은 작가를 기다리던 십대 소년에게 미시마 유키오가 허용했던 단 하나의 질문. 그건 바로 "선생님은 언제 죽습니까?"였다. 십대의 어느 순간, 돌던 팽이가 돌연 투명해지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게 되는 그 유일한 순간에 대해 미시마 유키오는 이야기한다. 진짜가 출몰하는 그 찰나에 대하여.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다. 자신을 추앙하는 무리들에게서 온갖 찬사를 받던 이 작가는 이 엉뚱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자신의 삶이 어떤 죽음으로 마감될지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예술로서 다 용인될 수 있는가, 에 대한 거대한 질문에 온몸으로 답한 한 작가의 생애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에세이를 읽는 일이 의미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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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2-15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얼마전에 잠자냥 님도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글을 쓰셨는데, 이젠 블랑카 님도! 미시마 유키오란 작가는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잠자냥 님과 블랑카 님 두 분 모두, 책 잘 읽고 글도 잘 쓰시는 두 분 모두 이렇게 기꺼이 페이퍼를 헌정하시는걸까요.....

blanca 2026-02-15 19: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봄눈>으로 시작해 보세요. 좀 과할 데도 있지만, 문장이 말도 못하게 아름답습니다. <금각사>도 그렇고요.

카스피 2026-02-16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시절(45년 2월) 징집명령을 받았으나 당시 페결핵으로 오진을 받아 병역 부적격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징집된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전사해 일종의 죄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하지만 일각에선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동경한 미시마 유키오가 오진을 이용해 징집을 피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는 전후에 그가 병약했던 육체를 단련하고 극단적인 군국주의 성향과 자위대 궐기 촉구, 할복 자살 등의 행보를 보인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적 문학관을 많이 이야기 하는데(옐ㄹ 들면 금각사),부도덕 교육강ㅇ좌를 읽으시면 5~60년대 일본 사회를 위선적 도덕관을 비판하고 풍자했던 그의 날카로운 통찰과 역설의 유머를 느끼실수 있을실 겁니다.

blanca 2026-02-16 10:4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미시마 유키오가 극우 군국주의자라는 평이 있는데 개인적 사상관이나 작품을 통해 보면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마지막 죽음의 명분이 너무 뜬금 없어서 생 전체가 오해받게 됐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봅니다.

2026-02-16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6-02-24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잉 이 책 읽으셨네요! 이 글도 이제 봤어요. 오잉… 미시마는 일단 이번달엔 그만 읽으려고 하는데 땡투할게요! 😸

blanca 2026-02-24 14:42   좋아요 1 | URL
이 책에는 또 다른 미시마의 모습이 나옵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다는. 심지어 자신이 천재 작가가 아니라 은행가 같은 그저 성실한 평범한 작가라고 자평하는데... 사춘기의 자아 비대에 대해서는 반성하는 모습까지. 이런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돌변한 건지 의아해져요.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