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휴가 - 미시마 유키오 에세이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성민 옮김 / 시와서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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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트일 것 같은 미시마의 가장 나르시시트와 거리가 먼 글들의 향연. 결국 예술의 성취란 ‘자기‘를 뛰어넘을 때 가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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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할 때 뭔가 주저주저할 때가 있다. 그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며, 그 작가의 문체, 때로는 그 작가의 철학까지 긍정하게 되면, 마치 그 작가 생전의 기행, 편향된 사상, 정치관까지 동조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기기 때문이다. 

내게는 그런 작가가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 자위대의 궐기를 주장하며 할복 자살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이 대목은 더없이 거북하다. 그의 극도의 탐미주의가 아슬아슬하게 횡단하는 윤리의 경계 부분도 그러하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지고의 가치처럼 보인다. 이쯤 되면 작가의 윤리관, 가치관에 의심이 들 지경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금각사>를 불태우는 이 천재 작가에 대한 연상들은 반쯤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갈수록 미시마 유키오라는 사람을 우리는 철저히 오해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떨칠 수 없다. 하루키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대하고는 자신이 방탕한 생활을 한다고 오해하지만 실은 지극히 담담하고 무미건조한 일상을 충실히 사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는 고백을 한 것처럼 미시마 유키오도 세상 사람들의 오해로 규정되는 캐릭터를 강제로 부여받은 게 아닐까. 실제 그의 에세이나, 소설들에 우경화된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적 시각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다. 미시마는 자신을 천재 작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극우라고 정치적 입장을 작품 속에 표명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떤 고정된 가치관에 유보적이고, 퇴폐미와 유미주의에 대해서도 한 발 물러서는 입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마지막 죽음의 어처구니 없는 전시에 대해서는 또 다른 관점에서 비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솔직한 고백록이다. 당연히 문장들은 아름답고, 묘사력 또한 출중하다. 하지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그의 자신 없어하는 머뭇거림들이다. 흔히 일본 작가들의 사소설에서 발견하게 되는 비대한 자아 따위는 없다. 그는 작중 캐릭터와 작가 자신을 혼동하는 다자이 오사무가 싫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세상에서 유리된 듯 하지만 그 현실에 우뚝 서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좋다고 거듭 고백한다. 여기에 우리가 미시마 유키오 하면 흔히 떠올리게 되는 미친 천재 작가는 없다. 십대의 치기, 자기 중심주의에 대한 철저한 해체, 반성의 대목도 그렇다. 


지금 내가 빨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스물다섯 살의 나는 하양이라고 쓰고 있다. 하지만 마흔 살의 나는 그것을 초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리를 분별할 수 있을 때까지 소설을 쓰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현실이 확정되는 순간, 그것은 소설가에게 죽음일 것이다.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쓰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 <소설가의 휴가>


마지막에 실린 <팽이>는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어느 날, 집앞에서 하염없이 이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젊은 작가를 기다리던 십대 소년에게 미시마 유키오가 허용했던 단 하나의 질문. 그건 바로 "선생님은 언제 죽습니까?"였다. 십대의 어느 순간, 돌던 팽이가 돌연 투명해지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게 되는 그 유일한 순간에 대해 미시마 유키오는 이야기한다. 진짜가 출몰하는 그 찰나에 대하여.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다. 자신을 추앙하는 무리들에게서 온갖 찬사를 받던 이 작가는 이 엉뚱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자신의 삶이 어떤 죽음으로 마감될지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예술은 예술로서 다 용인될 수 있는가, 에 대한 거대한 질문에 온몸으로 답한 한 작가의 생애에 대한 혼란스러운 감정에 대해 조금이라도 답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에세이를 읽는 일이 의미를 지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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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2-15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얼마전에 잠자냥 님도 미시마 유키오에 대한 글을 쓰셨는데, 이젠 블랑카 님도! 미시마 유키오란 작가는 도대체 어떤 작가이길래 잠자냥 님과 블랑카 님 두 분 모두, 책 잘 읽고 글도 잘 쓰시는 두 분 모두 이렇게 기꺼이 페이퍼를 헌정하시는걸까요.....

blanca 2026-02-15 19:5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봄눈>으로 시작해 보세요. 좀 과할 데도 있지만, 문장이 말도 못하게 아름답습니다. <금각사>도 그렇고요.

카스피 2026-02-16 0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시마 유키오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시절(45년 2월) 징집명령을 받았으나 당시 페결핵으로 오진을 받아 병역 부적격 판정을 받았는데 당시 징집된 대학 동기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전사해 일종의 죄의식을 가졌다고 합니다.하지만 일각에선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서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을 동경한 미시마 유키오가 오진을 이용해 징집을 피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는 전후에 그가 병약했던 육체를 단련하고 극단적인 군국주의 성향과 자위대 궐기 촉구, 할복 자살 등의 행보를 보인 이유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보통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적 문학관을 많이 이야기 하는데(옐ㄹ 들면 금각사),부도덕 교육강ㅇ좌를 읽으시면 5~60년대 일본 사회를 위선적 도덕관을 비판하고 풍자했던 그의 날카로운 통찰과 역설의 유머를 느끼실수 있을실 겁니다.

blanca 2026-02-16 10:41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미시마 유키오가 극우 군국주의자라는 평이 있는데 개인적 사상관이나 작품을 통해 보면 그렇게 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마지막 죽음의 명분이 너무 뜬금 없어서 생 전체가 오해받게 됐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봅니다.

2026-02-16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2-16 1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처음 읽었을 때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이제 그런 결말의 반전이 더는 새롭지 않은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이 부커상 수상작이 가졌던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내게 줄리언 반스는 젊고 예리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작가였다. 인문학적 소양과 픽션을 적절히 융합시킨 그의 소설은 어떤 것은 와닿았고 또 어떤 것은 내게 너무 난해했다. 그래도 줄리언 반스의 신작은 내게 언제나 챙겨보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는 오십대 후반에 이미 죽음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책 속에서 형인 철학자와 죽음에 관해 나눈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게 아버지뻘인 그가 얘기하는 죽음은 어쩐지 좀 유쾌했다. 오십대 후반에도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느끼기는 힘들구나, 싶었고 또 그것을 읽었던 삼십대의 나는 더더군다나 '죽음'을 현실이 아닌 하나의 철학적 소재나 주제로 치환하여 마음 편하게 받아들였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작가인 그나 독자인 나에게나 그때의 죽음은 '아직은...'이었다.


그러던 그가 스스로 마지막 책이라 호명한 소설을 썼다. 아니, 이건 소설이라기보다 그 자신이 한국인 독자에게 쓴 편지에서 고백한 것처럼 픽션과 논픽션, 자서전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책이다. 이제 만으로 팔십 살이 된 노작가는 자신이 소설가로서 살아온 삶과, 갑작스럽게 뇌종양으로 떠나보낸 아내의 상실, 코로나 시기의 암 진단, 친구의 연애와 이별, 다시 재결합의 메신저 역할을 했던 기억 등을 한데 모아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 어느 인터뷰보다 그 어떤 소설보다 줄리언 반스에 대해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고백들로 채워진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부터가 작가 개인의 이야기인지 구분하기 힘든 모호한 지점들 경계에서 줄리언 반스는 특유의 호쾌한 농담으로 독자들과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한다. 




누구나 태어나면 죽는다. 하지만 이 당연한 명제를 '나'를 주어로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란 어렵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일상 속에서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 앞에서 우리는 멈칫한다. 주변 사람들이 떠나고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거라는 각성은 차갑다. 삶이란 영속성, 연속성의 관성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지금 하는 일들이 곧 흩어지고, 그 일들을 하고 말하는 내가 사라지는 세상을 매순간 가정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쓰는 글이 사실상 마지막 작별인사가 될 거라 선언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소멸하고 말 거라는 걸 철학적이고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직접적으로 육박하는 시간 속에서 인정하는 일의 낙차는 아찔할 정도로 크다. 그럼에도 줄리언 반스는 여전히 그의 글처럼 그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도 무겁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논평가처럼 한다. 여기에서 멈추면 줄리언 반스가 아니다. 이제 줄리언 반스는 그가 만나지 못한 수많은 우리 같은 독자들에게 인사를 한다. 이 인사말이 어쩌면 이 책 전부를 아우르는 가장 아름다운 종결어일지 모른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즐거웠다. 사실 당신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신 팔에 잠깐 손을 얹었다가-아니, 당신은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나는 슬쩍 사라지겠다. 아니, 계속 구경하고 있어라.

-2022~2025년 런던에서

줄리언 반스


슬쩍 사라지지 말고 다음 책 한 권 정도는 더 써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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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저 - 난파선에서의 반란과 살인, 그리고 생존을 향한 사투
데이비드 그랜 지음, 김승욱 옮김 / 프시케의숲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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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이지만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리뷰임.


극한의 상황에 갇혀도 인간은 인간다울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본능에 충실한 저열한 동물로 떨어질까. 우리는 논픽션 작가 데이비드 그랜의 역작 <웨이저>를 통해 그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책 서두에 인용된 "어쩌면 짐승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우리뿐인지도 몰라."라는 <파리대왕> 소년들의 대사는 여기에서도 유효하다. 다만 18세기 영국의 제국주의와 인종주의, 패권주의는 개개인의 이야기를 자기 편의적으로 해석하고 종결지어버리는 폭력을 저질렀다는 걸 작가가 간파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데이비드 그랜의 문장을 따라가며 우리는 난파선 웨이저 호에 실제 올라 지진, 폭풍, 반란, 굶주림과 싸우는 승조원들이 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끝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살아남아도 서로가 눈감은 그 저열한 행동들의 잔상은 마침내 사라질 수 있는지 따라가 보자.


18세기, 영국은 제국주의 패권 전쟁에서 라이벌이었던 스페인의 보물선을 가로챌 계획을 세운다. 이 위험하고 탐욕스러운 원정은 전함 다섯 척과 정찰선 한 척, 병력 2000명을 이끌고 대서양을 건너 케이프 혼을 끼고 도는 고난의 여정이었다. <웨이저>는 이 소함대의 전함 중 하나로 이 배의 선원들이 폭풍을 만나 난파되며 벌어지는 일들이 이 이야기의 골조를 이룬다. 여러 선원들의 시점에서 각자의 입장에 가장 유리한 이야기 덮어쓰기의 향연이 흥미롭다. 특히 시인 바이런 경의 할아버지가 되는 수습장교 바이런은 겨우 열여섯 살의 소년이었음에도 위기 상황에서도 대단히 침착하고 이성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눈길을 끈다. 승조원들이 고압적이고 독선적인 칩 선장을 외딴 섬에 버리고 가는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끝내 그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의외의 선택을 하기도 한다. 작가의 말처럼 "길고 위험한 항해는 사람의 숨겨진 영혼을 무정하게 끄집어내는 법이었다."


굶주리고 병들고 기약 없는 난파 상황에서도 인간들의 위계질서는 끊임없이 재편된다. 앞서 말했듯 외골수로 위험한 상황에서도 선원들의 안위보다는 임무 수행에 집착했던 선장 칩은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살인을 저질러 끝내 축출되고 지위는 낮았지만 영리하고 리더쉽이 있었던 벌클리가 반대 세력의 지휘관이 된다. 위기 상황에서 어떤 리더쉽이 설득력과 지지를 얻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형식적인 명분이나 위계는 생존 앞에서 무너진다. 허기는 모든 것을 압도한다. 죽은 동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장례를 하는 일과 그의 시신을 먹는 일은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사의 비극이기도 하고 희극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며, 존중하고 배척한다. 


사람은 누구나 혼란스러운 자신의 삶에 모종의 두서, 모종의 의미를 부여한다. 기억 속의 이미지들을 뒤지며 선택하고, 윤색하고, 삭제한다. 그렇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면, 자신이 저지른 일 또는 하지 않은 일을 견디며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위대한 시인 손자를 낳게 될 존 바이런의 일기와 선장에게 반란을 일으킨 벌클리의 기록은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 불일치를 함부로 봉합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노력은 이 <웨이저>를 일관되게 흐르는 기조다. 즉, 각자의 시선에서 각자의 버전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내버려두는 그 거리두기는 읽는 입장에서의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용인하는 관용이다.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유보하지 않고 각자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선원을 하나 택해 이야기에 뛰어들 수 있다. 그 행위 자체가 이 역사를 살게 하는 평행우주적 체험을 선사한다. 

이제, 우리는 그런 기록조차 남길 수 없었던, 그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에게도 시선을 옮겨야 한다. 


여기엔 존 바이런에게 자신의 모자를 양보했던 유일한 흑인 수병도 있었고, 자신들의 문명을 짓밟은 백인들에게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민 원주민들도 있었다. 어쩌면 <웨이저>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인 대목일지도 모른다. 기록을 통해 그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외된 이들을 뭍으로 건져 올리는 글쓰기를 한 작가에게 경외감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기록으로 남은 역사를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며 그 사이로 빠져나간 숱한 무명씨들의 잊혀진 역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2년여의 표류 끝에 이들은 결국 살아 돌아왔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각자의 편견으로 윤색된 이야기를 가지고 그들은 영국의 군사법정 안에서 재회한다. 선상에서의 반란, 지휘체계의 교란, 살인 등 그들을 감옥에 가두거나 처형할 근거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영국 역사는 가장 편리하고 그럴듯한 버전의 역사를 채택하기로 한다. 에필로그는 살아남은 자들의 너무나 평안한 세속적인 삶들을 후술한다. 평탄하고 여유로운 일생을 누렸던 소년 수습장교 존 바이런은 후일 자신이 겪었던 일들이 남긴 트라우마를 고백한다. 살아남기 위해 감행하고 때로 방조해야 했던 비인간적인 일들이 끝내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기 위한 방편이 된 부조리와 모순은 우리가 여기에서 살아나가는 일상이 가지는 무게와 의미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한다. 


역사는 결국 살아남은 자들이 미래에 올 자들에게 남기는 하나의 변명일 수도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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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저 - 난파선에서의 반란과 살인, 그리고 생존을 향한 사투
데이비드 그랜 지음, 김승욱 옮김 / 프시케의숲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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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의 성인버전. 난파선, 보물선, 원주민, 배신, 반란, 살인, 구조. 온갖 드라마틱한 요소는 다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의 민낯을 건조하게 서사화한 작가의 필력에 감탄.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인간 군상의 오디세이아. 귀향 이후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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