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착각
로버트 M. 새폴스키 지음, 양병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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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죽는 게 당신의 책임이 아니듯 부자로 사는 게 결코 당신의 성취도 아니라는 과학적 근거를 이보다 유려하고 유쾌하게 댈 수 있을까. 오늘날 모두를 불안하게 만드는 자유의지도 책임도 성과도 그릿도 쓸려나간 자리는 황량하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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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착각
로버트 M. 새폴스키 지음, 양병찬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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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변곡점, 능선을 넘었다. 이제 미래를 향한 생각보다는 과거를 반추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 반추가 가지는 의미도 달라졌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할 수 있었던 다른 선택에 얽매였다면, 이제 내가 가지는 성취감, 아쉬움, 상실감 모두 내 의지와는 전혀 무관한 그 어떤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노력해서 가졌다고 누렸다고 여기던 것들조차 그렇다. 실패했다고 여겼던 것들은 더더군다나 그렇다. 예전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맹신이 있었다면, 이제는 회의적이다. 즉, 한 사람이 그 인생에서 주체적으로 많은 것들을 선택하고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더는 생각하지 않게 됐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는 도발적인 책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것을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가스라이팅하는 자기 계발서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민 책처럼 보인다. 저자 로버트 새폴스키는 생물인류학을 전공하고 현재 스탠퍼드대 생물학과 및 의과대학 신경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과학 저술가다. 이 책은 과학책의 외피를 입었지만, 사고 실험 같은 철학서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생물학적.환경적 운이 누적되어 어느 순간에 이르렀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장부터 새폴스키는 이렇게 선언하고 시작한다. 이후부터는 이 선언문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자유의지가 들어설 여지를 허락하는 아니, 강력히 비호하는 카오스 이론도 창발적 복잡성에 이르러서도 결국 1초 전, 1분 전, 심지어 수 세기를 가로질러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선행 원인과 이유가 등장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생물학적 원리의 여백에 존재하는 것들에 자유 의지가 설 자리는 없다. 진화, 창발성, 카오스 그 어디에도 인간의 주체적 의식적 선택과 의지가 발휘된 순간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력을 우리의 의지로 키울 수 없다. 그럴듯한 행동도 심지어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난동조차도 우리의 뇌 속 전두피질의 기능과 관련되어 일어난다. 뉴런 사이의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로 반응한다. 유전적으로 타고 난 생물학적 취약성은 운 나쁘게 나쁜 환경과 만나 증폭된다. 운 좋게 우월한 유전자와 만난 좋은 환경은 그 사람의 운을 더 증폭시키기도 한다. 감정 표현도 지적인 언설도 통증도 감각도 다 우리의 자유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그 어떤 범죄자도 위인도 그들의 범죄나 공적을 처벌하거나 상찬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진다. 새폴스키도 이런 자유의지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이 급진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과대평가한다고 해서 이 세상이 더 도덕적으로 성숙하거나 살기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더 많은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고 해서 그 사회가 성숙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배의 선장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이 두꺼운 책의 중심 테마다. 즉, 우리는 생각보다 더 무기력한 존재다. 더 열심히 살라고, 더 노력하라고 밀어부치고 성취를 개인의 업적으로 실패를 개인의 것으로 환원하는 이 자본주의 전장에서 결국 모든 것에 선행하는 원인들이 겹겹이 있다는 이야기다. 아쉬운 점은 그 이후에 대해 얘기하겠다는 그의 약속은 지켜졌다고 보기 어렵다. 자유 의지가 없는 인간이 이후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새폴스키는 변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 식으로 뭉뚱그린다. 이것조차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결국 인간의 삶이 가지는 의미 자체에 의구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유 의지에 대해 착각하는 숱한 오해들과 비과학적 맹신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명쾌하게 과학적으로 설명한 대목들에는 절로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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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6-04-02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꽤 두껍던데 벌써 완독하셨네요. 중심 테마 문장 보니 더 궁금해지는걸요.

blanca 2026-04-03 09:23   좋아요 1 | URL
재미있더라고요. 그런데 읽고 나니까 자꾸, ˝다 어쩔 수 없었다.˝ 식으로 합리화하는 부작용이 생기네요. ^^;;;
 

무언가에 연루된다는 일은 솔직히 피곤한 일이다. 담백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데 삶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다. 끊임없이 어떤 일이 일어나고, 내 좌표는 이동한다. 대문자 J에게 가장 적성에 맞지 않는 것은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딜레마가 있고, 갈등이 있다. 고민 끝에 당시에는 더 나은 선택이라 여겼던 일이 현재에 와서는 깊은 회한으로 남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모든 자유 의지에 대한 생각이 모두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온다. 내가 선택이라는 걸 감히 할 수는 있는 걸까? 그냥 삶이란 이미 죽 그어진 경로고 나는 무력하게 그 경로에 놓인 하나의 미물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닌 걸까?




김연수와 히라노 게이치로의 만남. '윤리적 딜레마'라는 공통 주제에 소환된 두 작가의 이야기 끝에는 대담이 실려 있다. 김연수의 작품 < 근접한 세계>에는 국정 농단 사태의 폭로에 연루된 손동하라는 사람의 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결정적 순간>에는 고인이 된 사진 작가의 전시회를 준비하다 우연히 마주친 작가의 성적 일탈로 인한 그의 전시를 기획한 미술관 큐레이터의 번뇌의 사연이 나온다. 김연수의 이야기는 맑고 찰랑이는 물 같고, 히라노 게이치로의 목소리는 뜨거운 불을 닮았지만, 그 둘은 묘하게 서로 공명한다. 소설이란 결국 존재가 현실과 부딪혀 자아내는 어떤 균열을 서사화하는 일이기에 서로 멀어질 수 없어서일까. 손동하의 소년 시절 만난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가스미가 생전 존경했던 작가와의 관계의 붕괴와 오버랩되는 지점도 그럴지 모른다. 우리가 보는 타인의 세계는 얼마나 진실한가. 그 사람이 내게 보이는 얼굴은 그 사람의 지극히 미분화된 조각이 시간의 구획 안에 스며든 것이다. 내가 지나가는 시간과 상대가 통과하는 시간이 만나 파열음을 낼 때 그 만남을 품은 과거의 이야기는 다른 측면에서 조망된다. 이미 헤어질 것을 알고 만나는 것과 죽을 것을 알고 사는 것은 그래서 닮아 있다. 우리는 종내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기대하고 산다.


이미 부서질 것을 알고도 인연을 맺고, 사랑을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돌아가 다시 듣는다. 김연수 작가는 그 향수어린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며 천천히 읽는 이들의 과거를 환기하는 시간을,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어느 순간 어쩔 수 없이 당면하게 되는 숱한 딜레마들을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영리하게 소환한다. 덧붙여 두 작가의 대화는 그 둘의 이야기만큼이나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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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지움 2026-03-04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루라는 말이 와 닿네요~~

blanca 2026-03-04 12:5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연결과는 또 다른 어감이죠.

아이엠용 2026-03-10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된 글이 너무 좋아 저장해 놓습니다. 개인적으로 김연수 작가의 팬인데 조만간 이 책을 접하게 되겠지요~~

blanca 2026-03-11 18:5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저도 김연수 작가 책을 따라 읽는 팬입니다.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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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인생은 나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가족 관계의 서사 또한 그렇다. 특히나 부모와의 관계는 그 특유의 긴장, 갈등, 애증이 교차되는 드라마의 기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모녀, 모자, 부녀, 부자 관계의 이야기가 고대부터 거듭 서사화되고 가장 많은 에세이의 소재로도 소환된 이유다.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그래서 더더욱 읽는 이의 공감이나 감동을 얻어내기는 힘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장 진부해지기 쉽고, 지나치게 극화되기 쉽다. 삐끗하면 함정으로 미끄러지기 쉬운 글감이다. 이제 내가 어머니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모두가 귀 기울여주는 시대는 아니다. 비비언 고닉은 이런 어려운 이야기를 다시 시도한 셈이다.


<사나운 애착>은 중년의 딸과 노년의 어머니가 뉴욕 거리를 함께 걷는 현재와 브롱크스의 다세대 주택에서 보낸 십오 년 유소년기의 세월이 끊임없이 교차하며 진행되는 이야기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유대인 공산주의자 어머니의 딸에 대한 애착은 끈적끈적하고 사납다. 어머니는 교과서 같은 결혼생활의 버팀목이 됐던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그 애도의 세월, 영리하고 조숙한 딸을 희생양으로 삼기도 하고, 자신보다 더 내밀한 친밀함을 교환했던 이웃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질투를 드러내기도 한다. 저자 비비언 고닉은 그런 어머니를 증오하면서도 사랑하고, 거리를 두고 싶어하면서도 반복해서 곁으로 돌아간다.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나도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이 진부한 선언은 사실 나만의 것이 아니다. 엄마의 내게 특별하게 좋았고, 특이하게 나빴다, 고 생각했던 모든 부분이 비비언 고닉의 목소리로 제대로 묘사됐다. 즉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것이었던 거다.  비비언 고닉처럼 나도 어느새 엄마를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다. 내가 실패라 여겼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생의 각인에 불과했다는 앎 또한 내가 특별히 뛰어난 선각자라서가 아니라 생의 주기가 몰고 온 자연스러운 교훈에 불과하다는 걸 매일 체감한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고 평범하게 실패하다 스러져갈 수밖에 없다.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알잖아."


비비언 고닉이 어머니와 나누는 맛깔스러운 대화들은 인생의 투명한 유리창을 통과한 아포리즘이다. 모녀가 마침내 확인하고 타협한 적절한 거리를 오고가는 말들. 


"인생은 어렵다."


그 어려운 인생에서 함께 있는 그 찰나 같은 시간들이 직조한 이야기를 제대로 잘하는 게 얼마나 큰 교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 그 둘의 인생 저장소의 문을 닫고 나오는 마음이 감동으로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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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31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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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 관계, 유년의 기억, 연애사, 이 진부한 소재들로 어떻게 가장 특별하면서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범 같은 작품. 사적 에세이가 심오한 자서전이자 고전 소설 같은 묵직한 감동의 마침표를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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