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보면 좋은데 내가 쓴 글을 읽다 보면 더없이 우울해진다.  

수많은 비문들, 잘못된 맞춤법, 논리의 비약(우격다짐), 어디서 생으로 들고 온 멋내기용 문장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대체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도달하고 싶은 지점이 무엇인지.  

점점 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고 있는 이 답답한 느낌들.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다 보니 내가 끄적인 모든 글들이 역겹기까지 하다.  

전공을 한 번 바꾸고 또 전공과 전혀 상관없는 직종에서 5년을 헤매고, 이제는 그것마저 때려치고 

앞으로 적어도 50년을 대체 무엇으로 일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갈지.  그저 벽이 턱하니 걸어 들어온 이 느낌. 

독서만 해도 그렇다. 활자를 읽고 있는 것이지, 잡식성으로 읽어댄 수많은 책들이 대체 내 몸 속 어디에서 흐르고 있는지 

알길이 없다.  눈만 피로해져 가고 지갑만 가벼워져 가는 것이 아닌지. 

한 숨 푹 자고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아기 말고 중학교 1학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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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하릴없이 인터넷을 쏘다니다, 사실은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평론에 인용된 체호프의 단편집을 어느 출판사 것으로 구입하냐 열심히 고민하다, 생각보다 재미없다는 평을 읽다가 정말 재미있는 얘기와 마주쳤다. 

바로 유명한 책들에 등장한 또다른 책들과, 잘나가는 작가가 작품 속 인물을 동원해 추천한 책은 대체로 재미없다는. 

솔직히 여기에 아주 극렬하게 동의한다. 또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이 재미있는게 하루키의 책에 나온 '위대한 개츠비'가 참으로 지겨웠다는 데에 동의하는 글들. 나는 '위대한 개츠비'에 아픔이 있는 사람이라 아마 죽을 때까지 그 책을 읽지 않을 것같다. 

때는 바야흐로 대학교 시절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 죽순이였던, 그러나 글을 올리지는 못하고 소심하게 리플만 달아대던 내가 영문학과 학생들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하여 올린 글을 읽고 리플에 '생각보다 지루하다던데요'라고 올린 글에 내 기준으로는 악플이 턱하니 붙어 있는 광경을 목도하고 말았다. 

"쳇, '위대한 개츠비'가 지루하면 세상 지루하지 않은 책이 없겠네." 이런 내용이었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늬앙스로 나의 리플을 비난하는 글이었는데 솔직히 그 어느 리플보다 기분 나빠짐을 느껴, 다시는 그 게시판에 리플도 달지 않았다는 소심한 기억이다. 

아무리 훌륭한 책도 그것이 소설인 바에야 재미 없어 책장 넘기는게 고역이라면, 그 책은 나에게 별로인 것이다. 그게 나의 지적 소양이 부족해 흩어진 지적 단편들을 체계적을 모아 체화하는 기술이 부족해서라거나, 인내심이 부족해 진정한 문학을 알아보지 못하는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비난한다 해도 나는 재미없는 책은 싫다. 그런 면에서 나는 페터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 너무 힘들게 읽은 책이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고, '마농레스꼬' 같은 책은 겉표지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 지금도 내가 왜 그 어린 시절 지루함의 결정체인 '마농레스꼬'를 그리도 고통스럽게 읽느라 방바닥을 굴러다녔을까 후회할 따름.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이 철저히 개인적 취향이라는게 또 재미있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을 읽고 세상에 이런 훌륭한 작품이 책장 넘어가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재미있다는 데에 전율해서 주위에 강추하고 다녔다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기억이 있으니, 나에게 재미있는 책과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책은 영원히 몇 개를 제외하고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소위 잘나가는 엣지 있는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는 데에서 오는 지적 교만에만 기대어 재미없는 책 추천하는 자들 나는 그들을 멀리하련다. 왜냐, 나는 단순하고 흥미를 추구하는 말초신경이 발달한 인간형이라 짧은 인생 재미있는 책들만 읽기에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니까.

요는 끊임없이 고민하는 작가들. 읽지도 않고 검색만 줄창 해대다 언젠가 읽어야 할 숙제처럼 느껴지나 재미없다는 평에 거북 목처럼 갑자기 목을 쑥 넣어버리고 마는. 체호프와 폴오스터와 레이먼드 카버. 잘난척하려고 읽어야 하는지 심히 고민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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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9-09-20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호프는 정말 재미있구요. 재미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한번 시도해 보실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 민음사 정도가 무난하지 싶어요.

폴 오스터는 번역이 어려워요. 신경 집중해서 읽어야 하죠. 영어만 된다면, 원서는 정말 쉬이 읽히거든요. 재밌어요.

레이먼드 카버는 개인적으로 별로에요. 원서를 읽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책을 읽는 것은 각각의 경험에 따라 천차만별인 행위이죠. 어릴적 읽었던 책과 지금 읽는 책이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blanca 2009-09-20 21:36   좋아요 0 | URL
아이구^^ 하이드님 댓글이라니 넘 영광입니다.^^ 체호프 이미 질렀답니다.잘한 거 맞죠? 아,레이먼드 카버는 별로군요. 근데 폴 오스터는 꼭 읽어보려고 생각중이었답니다. '달의 궁전'부터냐, '빵굽는 타자기'부터냐가 좀 고민인데.번역 문제가 외서 읽을 때 제일 걸리는 문제인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경우 훌륭한 번역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었던 터라 더. 그래도 참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하고 상대가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 같은 경우 괜히 좋기는 하더라구요.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진지하고 좀 지루한 독서는 접으련다. 욕봤다는-..- 

그리고 고등학교 때도 전혀 이해할 수 었없던 물리,화학,지구과학,생물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 같다. 

출산으로 인한 충격파로 두뇌 능력이 후퇴하였다는 어쭙잖은 변명을 들이대도 원체 머리가 좋지 않았다는 생각을 떠나 보낼 수는 없을 것 같고. 이제는 얇고 쉬운 책만 한동안 보련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조금 지친다. 

고등학교 때 <<마농레스꼬>>를 아주 재미없고 힘들게 고통스럽게 읽었던 기억이 갑자기 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재미없고 가치없다는 얘기는 감히 할 수 없을이만치 너무 훌륭한 책이지만. 솔직히 완독하기에 부담스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러셀의 <<행복의 정복>>도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 


빨랑 읽어 버리고 다음은 <<허삼관매혈기>>를 읽고 당분간 쉬련다. 정말이다. 눈도 아프고 일단 머리에 과부화가 걸렸고, 이런 무조건적인, 양적으로 밀어붙이는 독서가 대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깊은 회의감이 밀려와서. 조금 슬프기도 하고. 이젠 쉽게 가고 싶다. 누가 상주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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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9시경 매케한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과 함께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함께 왔다. 

불안감에 베란다 문을 열어 보니 세상에. 

시커먼 연기가 정확히 집 베란다 정면 건너편에서 미친듯이 회오리쳐 들어오고 있었다. 참고로 우리집은 남고 건물과 500미터 정도를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다. 남고에서 일요일밤 9시 불이 난 것이다. 소방대원들이 분주하게 학교로 투입되고 있었다. 무 서 웠 다. 몇 달 전에는 아랫층에서 큰 불이 나서 전소되어 마치 아파트 속에 흉가가 숨어 들어온 모냥새로 몇 달이 지나더니 이제는 바로 마주보고 있는 남고에서 불이 났다. 오만가지 생각이 다 지나갔다. 저 불이 건너 우리 집 베란다까지 붙으면 나는 어째야 하나. 아. 저 속에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럴 줄 알았으면 이웃들과 좀 친해둘걸. 외롭고 무섭다! 

역시나 좀 떨어져 있는 단지내 아파트 주민들은 신나게 심지어 놀이터까지 와서 불구경 중이었다. -..- 왜 우리집은 남고와 이렇게 가까이 있나. 마구 원망까지 해대며 시커먼 연기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 때 지나가는 생각들. 우리는 왜 평범하게 숨쉬고 걸어다니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는데 행복해 하지 않나. 정말이다. 예전 일본 작가의 글이 하도 좋아 다이어리에 적어두고 힘들 때마다 읽곤 했는데 그런 내용이었던 듯 기억이 아슴아슴하다. 숨쉴 수 있고 두 다리로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고 그것으로 행복하라고.  

인간들은 극히 이기적이라 자신들은 절대 불 타 죽지 않을 것 같고, 신종플루는 남 일이고, 온갖 재난재해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현재 사는 아파트 평수가 불만이고, 시집 잘간 고등학교 동창을 때려주고 싶어하고, 중간등수의 아들 머리를 쥐어 박고 싶어지는 모순을 그러안고 산다.  

순간 철학적인 생각들이 마구 지나가면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었다. 저 속에 내가 있지 말란 법이 없으며, 또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으리라는 필연성이 있을 린 만무하다. 그럼에 나는 행복한 것이다. 충분히..... 

오늘 아침 고등학교를 왁자하게 채운 녀석들이 와글와글거리는 웃음들이 얼마나 다행이고 예쁜지. 놈들이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참아주기로 했다. 지난 겨울 눈온다고 그 찢어지는 목소리들을 마구 질러대며 눈싸움하며 뒹굴대던 모습도 참 귀여웠지. 나 이러다 변태 아짐 되는 거 아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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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신경숙의 '외딴방'이 나에게 왔다. 어떤 특별한 계기나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그녀의  '외딴방'이 궁금해졌다. 

사실 솔직히 나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고3때 2권으로 분권되어 나온 이 책이 친구들의 책상 위에 줄줄이 누워 있는 모습에 괜한 반감부터 가졌고, 대학에 진학해서 교양국어 시간에 그녀의 단편 두어편과 '깊은 슬픔'을 대충 읽고 열심히 까 댄 주제넘은 글이 칭찬받자 기고만장했던 아찔한 기억이 한 켠에 있다. 나는 그녀의 지나치게 여성적이고 멋내는 듯한 문체가 싫었다. 그 때는 한창 담백하고 호흡이 빠른 남성적인 문체를 좋아했던 터라... 

그런 나에게 외딴 방은 속죄처럼 왔다. 이 소설을 읽으며 줄곧 소설은 작가의 인생이상의, 체험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작가들의 소설의 기본테마가 반복하는 일정한 틀밖으로 나가기 힘든 것과, 소설 속의 수많은 등장 인물이 작가 주변의 실제 인물들의 버무림이라는 것. 예컨대 박완서는 주로 나이든 노년, 전업주부들의 이야기, 전후상황의 유년들. 신경숙은 주로 가족들의 얘기, 어머니의 얘기, 등. 리얼리티를 확보하는데에 있어 자신의 직접 경험만한 것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전적인 거짓말로 이루어진 소설은 싫다. 어느 지점은 반드시 무리가 있고 어느 지점은 반드시 뻥 뚫려 있는 허술함이 발견되어 내가 소설을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이 지점에서 소설 자체를 안 읽는다고 외치고 다니는 사람도 여럿 있다. 나도 한동안은 지나친 상상력과 픽션전개로 돌출되는 그 허술함의 조각들이 싫어 소설을 읽지 않았다. 읽어도 반드시 대여했다. 소설은 사서 읽지 않는다는 얘기는 두번 다시 손이 가지 않는다는 얘기이고 그것은 실제적 삶에 대한 고뇌가 결여되어 있다는 얘기와 다름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진정한 리얼리티의 정수. 작가도 종종 사실과 픽션의 중간쯤이 될 거라고는 했지만, 그 장막 속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솔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고백한 것으로 보인다. 다 사실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그것은 또 그 발설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작가를 질식시킬 수 있기에... 

필력은 공부로 연마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경숙 앞에서는 여지없이 이 편견이 부서진다. 그녀의 단련된 잘 연마된 문장들은 하나 하나 시구이다. '언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나 마음껏 향유할 수 있고 펼쳐낼 수 있는 그녀의 능력이 시샘이 난다. 게다가 그 전개 구조의 탄탄함이라니...이를테면 이런 대목... 

   
 

이제야 문체가 정해진다. 단문. 단조롭게. 지나간 시간은 현재형으로,지금의 시간은 과거형으로.사진 찍듯. 선명하게. 외딴방이 다시 닫히지 않게. 그 때 땅바닥을 쳐다보며 훈련원 대문을 향해 걸어가던 큰오빠의 고독을 문체 속에 끌어올 것.

 
   

문체에 대하여 시제에 대하여 이런 고민이 뒷받침 되어 얼개가 체계화된 소설을 접한 것은 처음이다. 여기에는 치열한 공부가 뒷받침 되어 있는 듯 하다. 막 써대는 낙서 수준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이상화되어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역시 이런 설명에도 현재와 대과거와 과거가 사정없이 교차하는 그녀의 전개 방식은 독자에게 다소 불친절하다. 잠깐만 집중하지 않으면 헤매고 만다.   

소설의 줄거리는 주로 현재의 글 쓰는 '내'가 16살 시절로 회귀하여 3년여간 산업체특별학급에서 다니던 시절의 얘기이다. 특히 '나'중심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그녀를 둘러싼 공단의 수많은 '그녀'들의 처절하고 쓸쓸한 삶에 대한 확장이다. 여기에서 '나'는 서술의 주체이지만 작품에서는 오히려 '그녀들'을 서술하기 위한 도구로 쓰인다. 

가족에게 끝간데 없이 헌신하는 큰오빠 얘기와, 아랫방 희재언니의 죽음에 관한 얘기가 가슴에 박힌다. 군복무를 하면서 밤에는 가발을 쓰고 학원강의를 나가는 오빠와 아기를 가지고 일터의 연한 남자에게 버림받는 희재언니의 얘기는 그시대의 서글픈 군상이다. 그리고 그 희재의 죽음에 저도 모르게 동참하게 되고 마는 '나'의 슬픈 사연도 더불어... 

   
 

나는 끊임없이 어떤 순간들을 언어로 채집해서 한 장의 사진처럼 가둬놓으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문학으로선 도저히 가까이 볼 수 없는 삶이 언어 바깥에서 흐르고 있음을 절망스럽게 느끼곤 한다. (......) 결국 나는 하나의 점대신 겹겹의 의미망을 선택한다. 할 수 있는껏 두껍게 다가가자고.

 
   

이처럼 문학의 한계를 여실히 담아낼 수 있는 표현이 있을까?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정약용이 퇴계문집을 읽고 무릎을 치며 울던 정경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 정도의 감동이 있었다. 바로 이거구나! 내가 하고 싶었지만 그 생각을 적절히 채집하여 표현할 수 없었던 이유가... 

이 책을 이제나마 만난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과한다. 나의 어줍잖았던 치기를...... 그리고 '엄마를 부탁해' 와 '리진'정도로 그녀 전체를 판단하고 결론지으려 했던 나의 좁은 소견이 탁 트일 수 있어 참 다행이다. 한국문단의 축복 같은 소설이다. 외딴방을 들여다 보고 나오고 나는 날, 어금니의 치통과 글쓰기에 대한 탁 트인 시야가 같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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