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열네 살이고, 그녀도 열네 살이었다. 그게 우리가 만나기에 실로 마땅한 나이였다. 우리는 사실 그렇게 만나야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하루키가 사회의 시스템의 맹점을 탐사하는 방식, 시선이 비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여성을 묘사하는 그 독특한 성적 판타지가 때로 불편하다.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의 남자들은 아내나 연인의 배신을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에게 여성은 삶에 아연한 흠이나 공백을 남기지만 그녀들이 곁에 있었을 때에 차지했던 공간은 다분히 성적이다. 여자가 떠나고 남자는 성장한다. 그 성장이 한때 여자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여자가 떠나고 남긴 그 필연적 상실감과 상처 때문인지 모호하다. 그에게서 여성은 너무 가볍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필립 로스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도 논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서는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솔직함과 더불어 여성을 동등한 동반자이자 존재로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루키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을 장식한 같은 표제의 <여자 없는 남자들>의 십대에 만났던, 혹은 십대의 정서와 그 순수한 사랑의 교감을 간직했던 여자가 떠난 이야기는 아련한 마침표다. 하루키는 영리하다. 이미 성장해버리고 이미 사회 시스템의 각종 억압에 길들여진 사랑의 기호를 밀고 나가 도착하고 싶은 지점을 그는 간파한다. 순수하고 어리석었던 시간들의 흔적. 소년과 소녀의 사랑.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한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중략>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중 '십대 소녀'

 

 

폴란스의 시인 쉼보르스카는 더 나아가 시 습작을 하던 십대 소녀 시절의 자신을 불러낸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노시인 앞에 선 그녀의 소녀는 낯설고 미숙하다. 그리고 그녀의 느낌은 반갑다기보다는 낯설고 당혹스러워 보인다. 어쭙잖은 확신들 속에 선 소녀 앞에서 그녀의 성장과 노쇠는 조금 안타까운 것도 같다. 그녀는 그녀의 소녀로 돌아가고 싶어한다거나 그리워하는 모습이 아니다. 언제나 삶의 비의를 양파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듯 포박해 들어가려 했던 시인은 성장과 시간의 무게를 그 숱한 미숙한 실수들과 시행착오들의 도정을 다 같이 존중한다. 사랑을 포기하지 않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열정과 순수의 가치를 알긴 하지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 다른 이야기다.

 

나는 하지만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또 다시 열네 살로 다시 기꺼이 갈 것같다. 미숙하지만 어설프지만 이미 잘못된 결론이 될 것들로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 힘겨웠던 시간을 또 다시 살고 싶다. 이유는 그냥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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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6-03-12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마지막 단락, 저도 동감이에요.
그리고 하루키는 영리하기도 영악하기도 귀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구요.
그 시절, 열 네살의 시절로 돌아가 다시 살고 싶은 이유는 그냥 그러고 싶다,예요.^^
봄햇살에 속지 말고 아직 차가운 봄바람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blanca 2016-03-13 13:2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도 역시 바람이 너무 차요.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는데...
하루키 안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쉽게 섞이기 힘든 것들이 한데 모여 있어서
알다가도 모를 작가인 것 같고 바로 그 점이 대중성을 띠는 것 같기도 하고..아직 소설은 많이 읽어보지 않아 사실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힘들기도 해요. 프레이야님도 꽃피는 봄 함께 기다리며 감기 조심하세요.^^

기억의집 2016-03-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그는 언제나 여자의 배신을 말하죠!!! 그러면서 시작되는 모험! 하루키는 문장도 좋은 작가같아요.

blanca 2016-03-13 13:24   좋아요 0 | URL
기억의집님, 하루키는 참 신기한 게 갑자기 `쨍`하는 문장이 막 나와요. 분명 스토리텔러적인 강점이 있는 작가인데도 문장까지 잘 잡고 있어서... 하지만 역시 전적으로 좋아하기에는 참 저한테는 무언가 찝찝한 작가입니다.--;; 여성을, 사랑을 그리는 방식이 거슬려요.

단발머리 2016-03-1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필립 로스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도 논란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서는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솔직함과 더불어 여성을 동등한 동반자이자 존재로 그린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루키에게서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이 문장이 너무 좋네요. 제가 필립 로스에 대해 느꼈던 지점, 그리고 말로는 정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걸 블랑카님이 꼭 찍어서 말씀해 주시니 너무 후련하고 시원해요.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여성이 `성행위의 대상`으로서만 느껴져서요. 사람 같지 않고요.
필립 로스 작품에서는 다르다는 걸 느끼는데,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저는 제 자신을 욕망의 주체인 남성으로 느껴요.
제 스스로가 느끼는 욕망으로 느껴진다는 거죠. 필립 로스를 사랑하지만, 부담스러워하는 이유예요.
제 자신을 너무 많이 보여줘야 해요.... ㅎㅎ

blanca 2016-03-13 13:28   좋아요 0 | URL
그죠, 단발머리님,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필립 로스와 하루키가 나란히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게 그 지점에서 엇갈린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애정을 가지고 그 심연을 들여다 보는 건 같아요. 그런데 하루키는 분명 노골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성차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있어요.

필립 로스는 정말 대단한 작가인데 절필을 선언해 버려서 너무 아쉬워요.
 
아주 편안한 죽음 - 엄마의 죽음에 대한 선택의 갈림길
시몬느 드 보부아르 지음, 성유보 옮김 / 청년정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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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이해나 수긍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든 가까이 된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본 보부아르는 죽음의 구체적 경험이 오히려 그것의 무자비한 폭력성을 더 부각시키는 것을 경험한다. 제목은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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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0-25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을 좀 비관적으로 봤군요. 보부아르는...
자연사가 흔한 건 아니지만 아주 없지는 않더라구요.
자연사가 아니어도 죽음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있잖아요.
예를들면 헬렌 니어링 같은.

blanca 2015-10-25 22:06   좋아요 0 | URL
저도 헬린 니어링과 스콧 니어링의 자연친화적인 삶과 죽음이 어떤 면에서 참 이상적인 소멸과 닮아 있다 싶었어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자연스럽게 마감해 나간 스콧 니어링의 죽음... 죽음도 주체적으로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의지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참 부러웠어요.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처음에는 줄긋지 않은 문장, 지금은 내게 가장 긴요한 문장이 되어 있었다.

제게는 미래라는 것도 그런 의미예요. 당장 바로 앞의 시간이 미래인 거죠. 지금부터 30년까지, 이런 식으로 집합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집합적인 미래를 대비하자면, 지금 내게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해요. 그러자면 얼마나 벌어야만 하는지 계산이 나와요. 그래서 당장 읽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읽지 않고 일단 돈을 버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집합적인 미래는 없다고 생각해요. 당장 눈앞의 순간, 지금뿐이에요.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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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논쟁 -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김대식.김두식 지음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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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물리학과 교수인 형 김대식과 법조인 출신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동생 김두식. 엘리트주의를 비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사실은 우리 기준에서 보면 최고의 엘리트 형제이다. 자신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한풀이라면 그 또한 감정 섞인 질시, 패배감으로 폄하될 수 있지만 이미 어느 정도 누렸고 누리고 있다고 보이는 이들이 그러한 것들을 솔직하게 비판하는 모습은 가식으로 비칠 우려도 있지만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형과 동생이 만났다. 형은 진영 논리에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자신은 어느 정도 보수이고 동생은 진보라는 시각에서 오늘날 대학 사회에서의 유학파 교수들의 득세와 특목고 위주의 비평준화 정서를 가차없이 비판한다. 진보 진영이 엘리트주의에 물들어 무지 몽매한 민중들을 개안시키려는 듯한 그들의 하향주의적 제스처에 일침을 가하는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형이 비판하는 것은 진보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진보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자신들이 누리는 것들을 정당화 하는 집단의 해악이다. 동생은 주춤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형은 결국 진보진영도 그들의 엘리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터라 '평등'을 아는 그들이 마치 '평등'을 모른다고 속단하고 덤벼든 사람들 앞에서 실질적 '평등'을 저어하는 그 위선적 작태를 벌이고 있다고 지적하는 대목은 오늘날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의 모순을 뼈아프게 일깨우는 것이다.

 

해외유학이 명문대 교수 임용의 필요 조건인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교수 임용 과정에 대한 비판은 지나치게 중언부언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인데 그것에 대한 무게중심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장원급제 식의 입시 제도가 진정한 장인을 발굴하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설득력이 있다. 오늘날 입시 제도의 복잡함과 특목고에 대한 특혜가 평준화를 무너뜨리고 가진 자의 자식들한테 유리한 쪽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는 오늘날 각계 각처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기고 세대들의 또다른 후계자들을 키우는 역할과 다름 아니다. 형제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 실질적 평준화가 시행되었던 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학력고사 같은 계량화가 쉬운 시험으로 줄을 세우는 것이 기회와 평등 측면에 더 호의적인 것인지, 학업 성적 이외의 것들의 변수의 여유를 더 주는 것이 그러한 것인지에 대한 결론은 아주 미묘하고 속단하기 힘든 부분인 듯 하다. 다만 평가 척도를 다양화하고 대상을 확대하는 것이 그 기준들과 척도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도 노력과 비용을 요구한다면 어불성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학력고사로 갑자기 다시 회귀하는 것도 그렇다고 이러한 복잡한 입시 전형을 유지하며 요리저리 허술한 구멍을 뚫어놓는 것도 답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소수의 이미 가진 자들이 또 누리는 자들로 둔갑하는 통로로 입시 제도가 악용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감시하고 살피는 노력만은 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괴짜 물리학자와 삐딱한 법학자 형제의 공부논쟁'이라는 표제는 어떤 확실한 결론이나 대안을 향해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누렸던 것들에 대한 허심탄회한 자성과 비판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사회 전반의 불평등적 요소를 자각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하여 유익했고 되도록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던 형제의 노력과 재기가 인상적이었다. 또한 오늘날 교육 제도와 대학 사회가 암암리에 엘리트주의에 물든 이들이 '평등'이라는 커다란 우산으로 교묘하게 자신들의 배다른 자식들을 양성하려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깊은 통찰과 자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도덕성의 토대와 인본주의의 기반도 갖춰지지 않은 토양에서 보수냐, 진보냐를 논하고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가늠하는 것은 사치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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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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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십대의 K는 세속적인 잣대를 들이밀면 퍽 성공한 축에 속한다. 그런 그가, 무신론자에 가까운 그가 정성들여
성경을 필사하는 장면을 우연찮게 보게 된 제자는 당돌하게 물었다.
"교수님, 신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믿고 싶으신 건가요?" 그는 후자에 가깝다고 얘기했나 보다.
카톨릭 세례를 받기 위한 예비자 교리 과정의 과제로서 성경필사를 시작한 그의 모습은 낯설었다.
무신론이 갑자기 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희구로 변모하기까지야 그 세세한 사정을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인간의 세속적인 성공의 마침표가 또다른 문장을 불러오는 그 길목에 선 K의 모습을 지울 수 없었다.

누군가의 삶의 고통에 대한 호소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 내 인생의 책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을 추천합니다."  나는 힘든데 누군가는 주제넘은 충고대신 책을 권한다.

이 책이 오는 길은 멀었지만 어떤 운명 같은 것이 있었다. 누군가가 추천했고 또 누군가가 동조했을 지 모른다.
어디에선가는 꼭 불쑥 이 책의 표지가 튀어나와 뒷덜미를 붙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멘토마냥 이 책을 찬양했다.
그래서 영적인 지도자라 자평하는 어느 사이비 교주의 설교집 정도 되는 줄 알았드랬다. 

저자 스캇 펙은 정신과 의사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경도되지도 않았고 기독교 교리로 교묘하게 자신의 얘기들을
포장하지도 않는다. 과학과 기적의 그 접점 어디엔가 그는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영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독자는 이윽고 그에게 상담을 받는 한 명의 환자가 된다.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결함과 상처를 이 세상에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주치의에게 다 털어놓고 탈진한 상태에서 성장으로 향햔 도약을 내딛게 된다. 그러니 이 책은 반드시 무조건 읽어어 한다.
힘들다고 하면 과장이고 견딜 만 하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인 항상 그런 지점에 발 붙이고 있어야 하는 우리들이라면. 

삶은 고해다. 

이 책의 첫문장이다. 그것은 대전제다.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 고해를 헤쳐나가는 실용적인 기술을 전파하겠다고 장담하지도 않는다.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인 훈련을 하라고 한다. 달콤한 마시멜로를 조금 뒤로 미루어 놓듯 즐거움을 나중에 갖도록 자제하고 책임을 지고 진실에 헌신하고 균형을 맞추는 기술을 얘기하는 대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다만 시인 실비아 플러스의 얘기처럼 진공의 병 안에서처럼 자신의 악취나는 공기를 되풀이하여 호흡하며 점점 더 깊은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도록 세상을 보는 자신만의 지도를 내보이고 과감하게 수정해 나갈 것을 독려하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가 세상 전부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 부모처럼 우리를 대우해 줄 것이라 여기던 바로 도수에 맞지 않는 안경으로 지금의 세상도 보고 있다. 이것이 전이다. 정신치료는 이 지도를 수정해 나가는 과정이다. 다시 시력검사를 하고 제대로 된 안경을 맞추어 써야 하는 그 너무나 당연하지만 번거로워 미루어 두었던 그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얘기는 끊임없이 사랑에 빠져 상처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전언이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고 자아의 붕괴가 아니라 자아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자신에 대한 사랑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은 사족 같다.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 그 순간 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마는 걸까. 사랑의 그 파괴적인 경향성은 마조키스트적인 자기희생의 망상과 맞물려 다분히 소모적이다. 그리고 깨닫는다. 사랑이 떠나고 간 그 자리의 흉물스러움에 몸을 떨며 이번 사랑은 가짜였으니 다음에 올 진짜 사랑을 기다리겠다고. 또 지난 번과 비슷한 경로를, 대상을 찾아 헤매며 끊임없이 사랑 그 자체에 빠지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연민어린 집착에 중독된다. 그리고 나의 삶은 불운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한다.

은총에 대한 얘기는 다분히 영성에 관련된 얘기다. 자기 향상과 영적 성장을 위한 그 노력의 지향은 하느님과 같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하느님이 반드시 기독교적 하느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캇 펙은 심지어 칼 융의 집단무의식 개념을 차용해 온다. 그는 정신질환이 개인의 의식적 의지가 무의식의 신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할 때 발생한다고 덧붙인다. 여기에서 신은 일종의 신성으로 이해된다. 인간의 영적 고양의 그 지향점으로서 우리 인간 자체의 그 무한한 잠재 능력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서도 신은 발현된다. 그러니 그의 신은 인간의 그 완전함으로의 열린 가능성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다름아니다. 무신론이어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사랑이다. 나 자신과 타인의 성장을 배려한 그 무한하고 조건없는 사랑과 믿음. 무엇보다 그 근시안적이고 순간적인 그 허약한 욕망들을 향해 뻗어 있는 촉수들을 거두고 영적인 성장을 향해 전진하려는 그 진화선상에 나를 두는 것. 끊임없이 소비적인 본능에 몸을 내맡기려는 그 관성에 역행해 성장하고 단발적인 본능들을 억제할 수 있는 고차원적인 또다른 본능에 귀기울이는 것. 전체의 일부로서의 자아의 그 연결지점을 의식하는 것.  

임상의로서 삶 전체를 영성과 연결짓는 통찰의 시선까지 나아간 그의 얘기를 듣는 시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치유의 과정이었다. 나의 우울로 얼룩져 어룽대던 세상이 갑자기 말끔하게 닦여 그 청명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여 보여 줬다. 순간의 착시일지라도 이런 착시는 대환영이다.  우리는 걸었고 지금도 걷고 있지만 아직도 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이런 책을 반드시 어떤 길목에서 건네받아야 한다. 그래야 덜 후회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항상 더 현명하고 더 친절하니 그의 손을 잡고 걸으면 훨씬 덜 힘들게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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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3-01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꽤 두텁던데,, 다 읽으셨단 말입니까.. ㅠㅠ
전 저 시리즈 3권 사놓은지가 어언 2년.. 아직도 손도 못 대고 있어요. 아우 창피.

그나저나 블랑카 님의 글은 읽을 때마다 생각하는거지만, 정말 흡입력있으시군요. 부럽습니다.

blanca 2010-03-01 23:20   좋아요 0 | URL
시리즈 세 권 다 사놓으셨어요? 우와~ 근데 이거 생각보다 글자가 크고 들여쓰기를 많이 해서 잘 읽히더라구요. 상담에도 관련하여 아주 유용할 것 같아요. 덜 바쁘실 때 한 번 읽어 보세요~ 마녀 고양이님 서재로 놀러갈랍니다.

저절로 2010-03-0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님께만 오면 질러요.두텁다는 대목에서 망설였지만 지르게 해줘서 고마워요.제대루 지르면 넘 행복하단 거 벌써 알고계시죠?

글구, 제가 서재질 한거 얼마안돼 그러는데요, 어디 서재에 가보니 thanks to 해주시라 하던데, 뭐하는겐지 알아야 도움을 드리든 할거같아서요(이거, 쪽팔림 각오하고 드린 말씀이에요~)

blanca 2010-03-02 13:51   좋아요 0 | URL
저에게만 오면 지르신다니 ^^;;; 저는 중고로 구입했는데 에파타님도 한 번 찾아보세요. 알라딘 중고 서점. 그리고 Thanks To는 책 구입하실 때 그 상품의 아래 리뷰나 관련 페이퍼 하단을 클릭하시면 되요. 하는 사람은 마일리지를, 받는 사람은 적립금을 얼마 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여러 해 동안 서재가 있는지도 몰랐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