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싫어했다. 지금도 여행을 그리 좋아한다고 할 수 없다.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 크고 낯선 곳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난 여행은 다시금 용기를 준다. 다음에 또 가고싶다,는 느낌은 참 신기하고 고맙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아주 특이한 사람은 아니다,라는 자각이 좋다. 여행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정도다. 


어쩌다 보니 이십 대가 태반인 패키지 여행에 유일한 가족 단위로 합류하게 됐다. 시작도 전에 가슴 한켠이 답답해왔다. 민폐 작렬일까봐. 삼십 대도 아니고 이십 대라면 상상도 잘 되지 않았다. 출발 당일, 약속 장소에 한 명씩 나타나는 젊은 친구들은 내가 내 모습이라고 여기던 모습들이어서 또 한 번 놀랐다. 나는 늙었던 것이다. 자기가 늙었다,고 자각하는 일을 그런 식으로 경험하니 뭐라고 말로 옮기기 힘든 감정이 들었다. 우리는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그렇게 일박 이일을 함께 했다. 


친해졌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것저것 피로감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질문도 수다도 삼갔다. 초면인 친구들 역시 서로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청년들은 과묵했다. --;; 차 안의 수다는 주로 우리 꼬맹이들, 엉뚱한 싸움에 간간이 웃음소리가 나오는 정도. 서로 힘든 일을 맡아 하려는 자세도 놀라웠다. 한 마디로 놀라운 청년들이었다. 내가 저 나이 때 하지 못한 것, 시도하지 못한 것, 참아내지 못한 것들을 잘 해내는 젊음을 보니 또 가슴 시리도록 부러웠다. 다시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고 삼십 대 중반 정도로 타협하고 싶지만 그런 젊음이라면 이십 대 후반도 괜찮을 듯.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놀라운 경관 앞에서는 함께 점프 사진을 찍었다. 사진 때문에 카톡을 어쩌다 공유하게 됐지만 그렇게 거리를 지키며 함께 한 여행의 잔상이 오래 간다. 




김연수가 얘기한 청춘과 김연수가 예고한 중년을 기억한다. 나는 지금 사십 대가 되어 가장 힘들다는 그 골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한정없이 뻗어나가는 시간을 죽이는 청춘의 미학도 모든 것을 지나온 오십 대의 여유도 없다. '청춘의 문장'을 이야기했던 김연수가 가고 있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문장의 결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에 연재했던 글들은 한 바닥씩 조금씩 읽기 좋다. 전 세계 유명 여행지를 개관한 것은 아니고 그가 여행했던 곳중 개별적인 의미나 여운을 남긴 곳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행자의 정서, 삶 그자체를 바라보는 이야기다.


작가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여행과 마찬가지로 인생 역시 사진보다는 기억에 의존하는 게 더 좋다. 기억을 더듬다 보면 좋은 시절, 나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시절이 이제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도, 그래서 누군가 어떻게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나빴던 시절을 그 시절이 모두 지나갔다는 사실을 알려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좋았던 시절에 대해 말하리라.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그러고 보면 여행은 삶과 참 닮았다. 지나오고 나면 이야기하고 싶어지고 힘들었던, 나빴던 시절도 결국 서사가 된다. 그것이 고이는 곳이 우리의 기억이다. 삶의 끝에 다다라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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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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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은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때로는 어떤 대단한 층위에 있는 것도 같아 ‘어찌 감히 내가’라는 의심의 시험에 들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글 속의 ‘나’는 언어의 체로 이미 한번 걸러진 후라 가짜 같기도 하고 너무 진짜인 것도 같아 민망해질 때가 있다. ‘나’는 ‘나의 삶’은 언어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로 빠져나가는 많은 것들의 그 허룩한 지점에서 서성이는 것이라 ‘쓰는 일’은 때로 한없이 허무해지는 것이다. 쓰는 일은 용기와 더불어 선별과 선택과 포기와 체념을 전제로 하는 것 같다.

이런 대목에서 김중혁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는 어깨도 다독여주고 손도 잡아주는 따뜻함이 있다. 그는 읽고 쓰는 일을
함부로 과장하거나 미화하거나 폄하하지 않는다. 김중혁이 쓰기 위해 동원하는 사물과 그가 쓰기 위해 읽어낸 많은 것들이 그의 사람 좋아 보이는 언어를 통과하면 한결 가볍고 한층 실한 것들로 거듭나는 기분이다. 그가 사용하는 애플의 펜슬과 이미 내가 쓰고 있는 팔레르모의 블랙윙만 있다면 무언가를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호기를 불러일으킨 책임을 작가에게 물어도 될까.

그가 애플 펜슬로 그린 그림과 수능문제 형식으로 빚어낸 독자들 대상의 창의력 테스트는 이미 완결된 텍스트를 이스트처럼 발효시켜 ‘읽는다’는 그 단순하고 수동적인 행위를 창의적인 즐거운 소통으로 업그레이드시킨다. 확실히 김중혁은 유쾌한 작가다. 꼭 쓰는 일이 아니라도 우울해지고 소심해지고 자괴감의 동굴로 파고들고 싶어질 때 ‘그’를 권한다. 사는 일의 무게가 덜어지지만 그 의미는 더욱 깊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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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7-12-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 님이 그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다니,,,,겸손하세요.
제 아들 해든이 글을 올렸다가 님의 분홍공주 생각이 났어요. 어떻게 지내나요?? 의젓한 누나가 되었나요??? ㅎㅎㅎㅎㅎ 엄마 닮아서 글도 잘 쓰고 책도 많이 읽겠죠?^^

blanca 2017-12-29 08:08   좋아요 0 | URL
해든이와 분홍공주가 아마 동갑이지요? 동생과는 여섯 살 차이가 나는데도 어찌나 투닥거리는지 몰라요. ㅡㅡ 요즘 부쩍 어릴 때 모습이 많이 떠올라 기분이 참 묘해요. 벌써 사춘기 소녀 느낌이 나기 시작해요. 제가 분홍공주 나이 때도 기억이 생생한데... 해든이 큰 모습 사진도 보고 어찌나 쑤욱 컸던지 깜짝 놀랐어요.

라로 2017-12-29 16:49   좋아요 0 | URL
투닥거리고 할때가 좋은 때 같아요,,,ㅎㅎㅎㅎ
분홍공주 벌써 사춘기 느낌이 나는 군요!!!
가끔 아이들 얘기도 올려주시고 사진도 살짝 올려주세요~~~. 어떻게 컸나 궁금해요,,,해든이랑 동갑이라 더 궁금한가봐요~~~.^^
 
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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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직 칠십이 되지 않았고 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간 적이 없다. 엄마의 고향은 부산이지만 엄마의 소녀 시절, 처녀 시절을 함께 더듬어 갈 기회는 아직 없었다. 엄마와 딸과의 관계는 엄마와 아들과의 그것과는 또 다른 것 같다. 수많은 일상들이, 구체성이 그 어떤 추상성을, 개요를, 일반화를 내리눌러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만 정작 나누어야 하는 그것과는 멀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대화가 많다고 해도 그것의 대부분은 생활 그 자체에 가 닿아 있어 그 사람의 본질을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김탁환 작가가 어머니와 동행하며 어머니가 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작가로서의 배아가 싹 튼 진해의 골목 골목을 누비며 나눈 그 어머니와의 진짜 대화가 눈물겹게 부러웠다.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와도.


진해는 나에게 낯선 지명이다. 벚꽃이 피면 수많은 상춘객들이 일부러 그 허무하게 저버릴 것만 같은 무게를 이고 빛나는 찰나를 보기 위하여 내려간다는 그곳을 아직 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가보고 싶은 곳이 남아 있다는 건 어쩐지 좀 덜 채워져서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무방할 것 같아 안심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로가 좁은 2차선인 탓에 벚나무 가지들이 허공에서 서로 만나 벚꽃터널을 이룬다. 그 하얀 터널 아래로 걸어 내려가면, 인구 10만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도시의 특별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토록 새하얀 봄길을 걸어본 사람은 인생의 정갈함이 무엇인지 안다.

-p,124



그곳은 칠십 대 중반이 된 작가의 어머니가 무려 칠십 년을 보내며 이웃의 삼대의 가족과 소통한 공간이다. 작가를 낳고 키우고 단련시켜 훨훨 날려보낸 바로 그곳이다. 아들의 글을 어머니는 다 정독했다. 아들은 글 쓰는 이야기를 노모와 나눈다. 어머니는 함부로 간섭하거나 단정하거나 조언하는 대신 묵묵히 아들을 지지한다. 백석의 시집을 읽고 그 시집에 나온 음식을 직접 요리해 보는 어머니라니...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여인은 아들과 함께 걸으며 누빌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잘 여며 두어 행복하다. 하모니카를 불며 자신이 다 없애 버린 사진 속의 젊은 남편과 어린 아들들을 추억하는 나이 든 여인은 너무 멀리 보지 말고 하루 하루를 잘 살라고 이야기한다. 이제 사라질 것임을 알고 인정하고 수긍한 겸허함이 서글프지만 눈부시다.


이 이야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가볍거나 통속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 균형은 작가 자신의 글 그 자체보다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태도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회 전체의 애도로 감당하기 벅찼던 이야기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형상화하는 작가는 어머니의 격려를 지고 있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마음을 빌리지 않았던가. 결국 우리의 이야기는 어머니로부터 이어지는 생래적 한계를 부정할 수 없다. 그것은 개별성을 넘어선 어떤 공통의 공동의 영역이라 어머니와의 이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 같지만 대단히 공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진해를 가본 적도 없는 내가 그 모자의 답사에 간접적으로 행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던 이유다.


표지는 보랏빛. 어둠을 뚫고 형형히 빛나는 벚꽃에는 사실 빛이 없을진대 그것은 어둠을 뚫고 나올 듯하다. 아름다움은 그러한 것이다. 이미 고정된 고착화된 모든 한계를 스미고 나오는 것. 그것은 생의 본질이기도 할 것이다. 이미 스러질 것임을 안다 해도 그것이 무의미와 동의어가 아닌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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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프랑크 모베르 지음, 함유선 옮김 / 뮤진트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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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쩌다 우연히 처음 마주친 그날 오후, 벌써 삼십 년도 훨씬 전인 그해 여름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분명 논픽션을 표방하고 있는데 강렬한 단편 소설 같았다. 저자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분한 마음으로 미술관의 전시실에서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을 초상화로 대면하고 그로부터 삼십 년도 훌쩍 지나서야 프랑스 니스의 영국인 산책로의 덜컹거리는 승강기를 타고야 올라갈 수 있는 작고 초라한 아파트에서 늙어버린  그 빛나던 소녀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되어  이렇게 쓰게 된다. 충실한 아내가 있고 이미 충분히 성공한 위대한 노년의 조각가와 거리의 소녀는 나이 차가 사십을 뛰어 넘는다. 어쩌면 아주 진부하고 비윤리적이고 신파조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가 그렇지 않게 된 데에는 저자의 자코메티의 예술에 대한 깊은 교감과 그의 어린 뮤즈였던 이 작고 나이 든 여자의 삶의 무게 그 자체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기능했다.

 

가랑비가 내리던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의 밤을 자코메티와 까롤린은 팔짱을 끼고 걸어 다닌다. 자코메티는 자신이 전혀 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예술에 대하여 가지는 모든 느낌, 생각을 이야기하고 여자는 그저 남자가 말하는 모든 것에 매혹되어 듣고 또 듣는다. 삼십 년도 더 뒤에 이 날을 회고하는 여자의 말은 그녀를 빌리지 않고 언어에 기대지도 않고 이미지로 떠오른다. 추적 추적 내리는 비.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든 조각가의 곁에 서 있는 상황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뮤즈, 모델이 된다. 작업실에 갇혀 있던 나날들 속에 여자는 "빛이 나게 해주었다."고 자코메티를 회고한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그 고단한 여로를 여자는 자신의 늙은 연인 덕분에 배우게 된다. 남자는 병들고 투병하고 아주 많이 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자신이 죽고 남을 여자에게 이야기해준다.

 

"죽음이 나를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어. 내가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고생했는지 모르겠어."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어요."

 

2010년 소더비 경매에서 자코메티가 이야기한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중 하나인 <걸어가는 남자1>이 천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되었다,고 한다.(옮긴이의 말 참조) 죽음은 얼마 안 되는 공평한 일 중 하나이고 자코메티의 말처럼 '항상 마침내 사물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것'이라지만 자신과 함께 세상 전체가 암전되어버리고 나면 생이 그려낸 모든 궤적은 언어로 그려내는 지도 속 어딘가에 어렴풋이 남으며 존재와 생과 반목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 생 전체를 바쳤던 남자와 우연히 그 남자의 마지막을 동행하게 되었던 청춘을 회고하는 노년의 여자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언어로 옮기는 남자의 앙상블이 눈물겹게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면 그 누구에게도 '예외'란 없는 듯하다. 자신이 남긴 것들로 마침내 불멸의 성취를 이루어낸 남자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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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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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낳고 나면 겁이 많아진다. 옛어른들의 "간이 바닥에 두 번은 떨어져야 아이를 키운다",는 말, "애간장을 녹인다",는 표현은 그 강도가 무시무시하지만 단순한 엄포나 거짓말이 아니었다. 특히 아이의 몸과 관련된 문제가 그랬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시누이 다리야가 안나에게 가는 길 마차에서 아이들과 관련된 상념에서 아이들의 건강과 관련된 끊임없는 불안을 떠올리는 대목은 모든 어머니들을 만나게 한다. 임신 중간중간 각종 검사들의 출발부터 "나의 아이는 당연히 건강하고 건강할 것이다."라는 기본 전제는 든든한 지지대를 잃기 시작한다. 현대 의술의 발달은 판단 지점이나 조력 지점이 미묘하지만 마음껏 불안할 수 있는 영역에 어머니들을 모이게 했다는 점에서 과거 그러한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어머니들이 지녔던 근본적인 무기력의 무기와 겨룰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모성은 불확실, 불안과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기는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B형 간염 접종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백신의 일정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간다. 아기를 안고 병원에 가서 그 일정을 따르는 일은 기계적으로 행해지다 어느 순간 때로 의문을 야기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이렇게 주사를 많이 맞았나? 이 예방주사에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각종 보존, 첨가제, 부작용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충분히 부풀릴 만한 많은 확인되지 않은 근거, 사례들이 인터넷에 범람하며 나는 아이를 각종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각종 유독한 물질에 무방비로 내맡긴 듯한 죄책감에 혼란스러워진다. 보존제에 수은이 있다던데(이미 제거되고 생산된 지 오래다), MMR과 자폐증이 상관관계가 있다던데...제약회사도 이윤을 남겨야 하는 사기업인데 과연 백프로 선한 의도로 백신을 생산할까? 등, 끝이 없다. 그렇다고 필수접종을 건너뛸 용기는 없으니 슬그머니 선택 접종인 독감 예방 주사를 건너뛰기 시작한다. 그런데 마치 그런 의도를 간파하기라도 한 듯 독감 주사를 맞추지 않은 그 해에 A형 독감 광풍이 불었고 큰 아이는 육개월이 되지 않아 미처 독감 접종을 하지 못한 아기 동생까지 감염시켰다.

 

엄마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예방접종에 대한 의견 개진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다. 무조건적 거부도 선별적 거부도 또 그 거부 자체에 대한 반감도 대부분 아이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문제이기에 어떤 논리의 대결 구도로 가면 모두가 상처 입는 논쟁이 되고 만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러한 접종의 문제를 공공의 문제로 인식하는 엄마들의 의견이 귀에 들어왔다. 단지 내 아이를 보호하고 보호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면역을 형성함으로써 다른 아이들까지 함께 치명적인 질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하는 문제가 예방접종의 장으로 들어온 것이다. 실제 미국 상류층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MMR을 맞추지 않음으로써 홍역 전염을 일으켰던 사례는 접종의 문제가 단순히 개인의 선택권으로만 수렴될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이 책은 어린 아이를 키우며 예방접종에 대하여 가지게 되는 많은 의구심, 혼란, 불안에 대하여 실제 어린 아이를 키우며 저자 율라 비스가 가졌던 그 불확실성에 대한 천착, 때로 그것을 교묘하게 부추기고 이용하고는 책임감 없이 발을 빼는 집단에 대한 비판적 성찰들과 더불어 찬찬히 모색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우리가 접종을 통하여 형성하게 되는 면역의 장이 공공의 장이라는 이야기는 모성이 사적인 공간 안에 고이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되는 일이 공공의 영역에 걸쳐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시인도 언론인도 아니고 그저 에세이스트이자 시민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오만하거나 감정적이나 지나치게 학구적이지 않아서 와닿는다. 자신에게서 끌어올리는 감정을 부정하지도 않지만 최선을 다해 사실 논거를 수집하는 과정은 흥미롭다. 최초의 종두법부터 최근의 수두파티, 홍역 파동, 제3세계의 백신 접종을 둘러싼 논란 등의 사례가 그렇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려움을 갖게 된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까? 내게 이 질문은 시민이 된다는 것과 어머니가 된다는 것 둘 다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로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 우리는 아이를 어느 정도까지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순 없는 것처럼, 아이도 전혀 취약하지 않게 만들 수 없다. 도나 해러웨이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p.231

 

저자는 진부한 은유에 대하여 경계하지만 덧붙여 언급한 "시민이 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힘과 우리의 무력함을 조화시켜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시선을 잡아 끈다.

 

삶은 지극히 사적이지만 결국 공적인 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그러니 우리는, 어머니는 연약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더불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아이들과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려는 숭고한 노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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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란 취약성의 기간이다... 인생에 관한 여러 가지 정의들 중에서 가장 공감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언제 죽을지 모르고, 질병의 고통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이런 취약함을 잊으려고, 종교에 심취하거나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회피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합니다.

blanca 2016-12-07 19:13   좋아요 0 | URL
물 흐르듯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 하다가도 산다는 것 자체가 전투적 불안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때로 들어요.

GD 2017-01-21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남의 글을 읽고 글을 남겨보긴 처음입니다.제가 요사이 생각하는것과 무관하지않아서 주의깊게 읽게되었습니다.저는 일생이제까지살면서 나혼자만 잘산느것에 치중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살아왔다는데에 생각이 드네요 정말 난 한참 이기적인 인간이였구나하고말이죠 내이야기가 아니니 관심없던 나를 우리가족이야기가 아니니 무심했던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어머니의 힘이 대단합니다. 제가 어머니가 될수는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정말 누가 어머니들을 욕보이지 말았으면 하는심정으로 고맙게읽은 글에 댓글을 남깁니다.좋은하루되세요

blanca 2017-01-23 10:24   좋아요 0 | URL
GD님 댓글은 저를 돌아보게 하네요. 항상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가진다는 건 큰 의미가 있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파가 왔는데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