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마녀사냥 또 시작되나
‘동급생 폭행사망 사건’ 누리꾼 무차별 공격
가해자 개인정보·미확인 소문 마구 퍼뜨려
이정애 기자
누리꾼들의 ‘검증되지 않은 분노’가 도를 넘어서고 있다. 최근 특정 이슈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이 인터넷에서 빠르게 퍼지면서 집단 분노를 일으키며 확대 재생산되면서 여론재판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개인정보가 무차별적으로 공개되는 등 부작용도 나오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1일 부산 ㄱ중학교에서 벌어진 폭행 사망 사건(〈한겨레〉 6일치 부산·경남판 12면) 이후 숨진 홍아무개(14)군의 어머니가 썼다고 알려진 글이 인터넷에서 급속도로 퍼지면서 가해자 최아무개(14)군에 대한 처벌과 정확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누리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이 사건에 대한 온갖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더해져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집단적으로 분노만을 표출하고 있다. 자칫 다수가 범죄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한 개인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제2의 개똥녀’사건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홍군을 추모하는 누리꾼들이 수천명에 이르는 가운데, 일부 누리꾼들은 가해자 최군의 실명과 사진, 전호번호 등 개인정보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고, 최군의 미니홈피를 공격하고 있다. 이들은 ‘최군이 인근 5개 학교 일진회 짱으로 수시로 폭력을 휘둘러 왔다’‘학교가 사건 은폐·조작에 앞장서고 있다’‘최군의 부모가 학교운영위원이라더라’ 등의 확인되지 않은 사실까지 퍼뜨리며 최군의 가족과 학교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현재 최군은 부산구치소에 수감돼 정식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데도 ‘2년6개월형을 선고받은 최군이 보석금으로 풀려난 뒤 이민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까지 돌고 있을 정도다. ㄱ중학교는 홈페이지에 ‘확인이 안된 댓글에 대한 학교 쪽의 해명’을 올리고 소문 진화에 나섰지만, 소문의 불길은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일부 공격적인 누리꾼들은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들에 대해서도 비난과 공격을 퍼붓고 있다. 포털사이트들이 명예훼손 등 우려 때문에 최군의 실명 등을 금칙어로 정한 것을 문제삼고 있는 것이다.

홍군 사망 사건 직전에도 유명 연예인인 ‘ㅂ씨와 ㅎ씨 괴담’이 전혀 사실 여부가 검증되지 않은 채 집단 분노현상을 일으켰다. 가수 ㅂ씨가 한 라디오 방송중 동료 연예인과 전화 연결된 상태에서 “ㅎ씨와 동침했다”고 말했다는 헛소문이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해당 연예인들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다. 소문에 거론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가수 ㅂ씨와 전화연결한 사실조차 없었다.

이런 집단분노에 대해 네이버 관계자는 “개인 정보가 노출되고 정확한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소문으로 심각한 사이버 폭력이 우려되는 상황에서는 부득이하게 덧글 쓰기를 제한하고 있다”며 “누리꾼들이 보다 냉정하게 사안을 보고 평가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진보넷의 김정우 정책간사는 “정의감에 불타는 누리꾼들의 힘으로 사건 규명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해도 개인의 민감한 사생활 정보까지 공개하는 것은 또 다른 인권침해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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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13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 브라더가 따로 있는 게 아니네요... -ㅅ-

라주미힌 2005-10-14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지나친 정의로움이 인권마저도 재단하려 드네요.
 
 전출처 : 릴케 현상 > 변태

게이 후배가 있다. 7년 전 어떤 책을 번역해보겠다고 찾아왔을 때 해사한 얼굴에

 

주황색 사파리가 인상적이었다. 바로 일을 진행했으나 얼마 뒤 다른 출판사에서 책이

나오는 바람에 중단되었다. 딱히 볼일이 없어졌지만 워낙 똑똑하고 호감가는 친구라

언젠가 같이 일할 기회가 있기를 기대했다. 그 녀석을 다시 만난 건 3년 전이었다.

 나는 근근이 버텨오던 영화전문도서

출판을 지속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고 그 녀석을 찾았다.

 

 

저녁 무렵 대학로에서 만난 그 녀석은 살이 붙고 안색이 안 좋았지만 지적인 분위기는

더하고 있었다. 밥 대신 맥주를 먹기로 하고 골뱅이집에 들어갔다.

일 이야기에 간간이 ‘깃발 꽂는 지식인들’을 안주(참으로 질긴 안주) 삼아 너댓시간을

 보냈다. 그 녀석은 내가 말을 하면 조금은 부끄럼 타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듣고 있다가 선량하게 웃었으며 이따금씩 손뼉을 쳤다. 그날 그 녀석으로부터 받은 느낌은 특별했다. 처음엔 ‘매력있군’ 했지만, 며칠 뒤 나는 그

‘매력’이 성적인 지점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성적 취향의 경계란 얇디얇은 것이었다.

 

 

그 뒤론 그 녀석한테서 그런 느낌을 받은 기억이 없다. 그 녀석은 내 앞에서 더이상

부끄럼을 타지 않았고 술만 먹으면 악을 쓰고 차도에 오줌을 갈기곤 했다.

 “형, 나 남자 좋아해요.”

한 달쯤 지났을까. 그 녀석은 포장마차에서 만취한 채 내게 커밍아웃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받은 느낌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그 녀석은 제 애인를 나에게 소개했고 며칠 뒤 생일파티에 초대했다.

 

낙원동의 아담한 게이카페에서 열린 생일파티엔 열댓명이 참석했다. 열명 남짓한

게이들이 짝을 이뤄 참석했고 ‘일반’(그들은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고 자기들은

‘이반’이라고 부르더라)은 그 녀석의 여자친구 둘과 나, 그 녀석의 남자친구 그렇게

넷이었다. 게이들의 생일파티(네가지 성이 참석한)는 유쾌했다.

적극적인 이성애자일 뿐인 나로선 그들 가운데

이정섭씨처럼 간드러지게 말하는 친구가 없다는 것부터 신기해 보였다. 돌아가면서 준비한

선물을 내놓고 덕담을 하는 식당 지배인, PD, 철인경기 선수, 스튜어드, 학생에 백수까지그들은 그저 건강하고 예의바른 남자들이었다. 그들의 짝짓기가 가진 원시성은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들은 성적 매력(육체적 의미만이 아닌)을 기반으로

짝짓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짝짓기에 돈과 계급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정말이지 그들에게 결혼이 없는 것은 축복이었다.

 

 그 녀석은 첫 키스를 초등학교 5학년 때 했다고 했다. 남자와 말이다.

내가 여자에게 느끼는 성욕과 안타까움을 그 녀석은 남자에게 느끼는 것이다. 그 녀석과 내가 다른 건 단지 그것뿐이다. 그 녀석은 엑스포만 피는 나를 ‘변태’라고

 놀리곤 했다. 맞는 말이다. 게이가 변태라면 남들 디스 필 때 엑스포 피는,

딱 그만큼의 변태다. 그 녀석은 아직 공식적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했다. 그 녀석이 난

 남자가 좋다라고 맘 놓고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은 올 것인가. 퀴어영화제가 번듯하게

열리고 게이 담론이 늘어나는 건 그런 세상이 오고 있는 징표다. 하지만 이미 찬성하거나 이해할 채비가 돼 있는 사람들끼리 생각을 재확인하고 학습을 늘리는 일이 세상을

개선시키는 건 아니다. 퀴어의 세계는 문화 담론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과연 누가 변태인가. 꼴리면 하고 땡기면 살고 싫어지면 헤어지는 그들이 변태인가, 돈 때문에 하고 계급 때문에 살고 싫어져도 못 헤어지는 우리가 변태인가.

정말이지 누가 더 변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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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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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0-13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딱, 그만큼의 변태인 것 같아요. '타인의 취향'.
 

혁명보다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혁명은 이름과 의식을 바꾸는 것이지만, 개혁은 몸의 형태를 바꾸는 것, 즉 변태(變態)의 과정이다. 개혁(改革)은 글자 그대로 살갗을 벗기는 것. 피가 쏟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시대나 개혁을 주장하는 지도층은 스스로 피 흘리는 고통을 보여줄 때만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는 테제로 유명한 맥루언의 걸작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인간의 확장’이다. 오늘날 인터넷, 휴대 전화가 우리 몸의 일부이듯, 이 책은 몸이 인식의 매개체(미디어)라고 주장한다. 앎이란, 인식 주체가 인식 대상에게로 몸을 확장하는 것.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는 알기 이전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안다는 것은 확장된 자기 몸에 사로잡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변화는 새로운 인식을 의미하는데, 이는 ‘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서 발생한다. 알이 부화하여 나비가 되듯, 몸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변태의 고통을 뜻한다. ‘변태’가 원래 의미보다는 흔히 ‘변태 성욕’의 줄임말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기존 질서를 수호하고자 하는 사회는 변태하는 사람을 싫어할 것이다.

사랑과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인생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자기 부정이다. 사랑과 운동은 목적에 헌신하기 위해, 그들 몸의 일부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역량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이나 사유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사랑이 깊을수록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자신을 철회하기도 한다. 금연, 다이어트, 일찍 일어나기, 관계·초콜릿·카페인·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기 등 사람들의 계획이 대개 실패하는 것처럼, 자기 변태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변태는 기존의 나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며, 미래의 것이기 때문에 알 수 없어 두렵다. 특히, 연령주의 사회에서는 나이가 들면, 오후 3시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오후 3시는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포기하기엔 미련이 남는 위치다. 자기 문제를 극복할 수도 승복할 수도 없고, 자기 조건에서 탈출하기도 저항하기도 힘들다. 막다른 골목을 꺾어진 골목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인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변태는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존재가 인간이다.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미국의 어느 소설가는 자살을 결심한다. 상처받을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여, 남들도 납득할 만한 자살 이유를 찾다가 에이즈에 걸리기로 마음먹는다. 6개월 동안 온갖 위험한 섹스를 시도하다가, 어느 날 타인에게 에이즈를 전염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검사를 의뢰한다. 결과를 기다리며 그는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하다.

너무 심란한 이야기인가? 모든 사람이 “나를 바꾸고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 책을 쓴다”는 푸코처럼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실은, 변태 과정에서의 좌절과 자기혐오가 변화 없는 현실의 괴로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냥 생긴 대로 살까? 나를 다른 세계로 날아가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중력을 인정하며, 어차피 가끔 중독은 필요한 것이라 자위하며, 결핍은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믿으면서, 이렇게 사는 것이 나을까?

정희진/서강대 강사·여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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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12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오!!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기꺼이 뵨태가 되겠숨돠! 역쉬, 정희진 ^^b

라주미힌 2005-10-1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복돌님은 변태세요. (이상하넹 ^^;)

우아 정희진씨 글을 너무 잘 써요... 주제는 간단한데.. 변태하자.

숨은아이 2005-10-13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뚱한 소리 : 일요일에도 일해야 하는 경우엔 오전 내내 빈둥거리다가 밥 먹고 한숨 쉬고 오후 세 시 되어서야 일 시작하곤 하거든요. 그래서 난 오후 세 시에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인간이다! ^^b

릴케 현상 2005-10-13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김규항이 변태 얘기 했던 게 생각나네요
 

<2002년 7월 사회당 기관지 원고>

청계천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2
- 정책이 아닌 Event의 한계 -

이헌석(청년환경센터 전 대표, GreenReds@hotmail.com)

6.13 지자체 선거를 지나면서 나에게는 큰 화두가 하나 있었다. “과연 진보정당에게 정책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흔히 우리는 정책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선거는 상호 비방이 아니라 정책대결선거가 되어야 한다고도 말하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정책”이란 말은 너무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어서 “정책”이라는 같은 한국어 표현도 마치 서로 다른나라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정책의 사전적 의미는 “정부․단체의 앞으로 나갈 노선이나 취해야할 방침”이다. 하지만 정책이란 표현은 흔히 총학생회 정책국처럼 노선이나 방침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핵발전정책”이나 “대북강경정책”처럼 정부의 공공정책(public policy)의 의미로 국한되기도 한다. 또는 행정기관에선 “건폐율억제정책”처럼 뚜렷한 목적과 함께 지칭해 계획(plan)이나 기획(planning)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이 경우 정책은 집단간의 상충한 이해를 조정, 조율하는 의미가 많이 부각된다.) 시민단체 등에선 정책은 법․제도와 동일한 말로 쓰이기도 한다. “**정책 수립하라!!”는 구호는 대부분 관련한 법․제도를 개선하라는 말과 동일시 때문이다. 한편 학생운동진영에서 정책이란 - “정책 소양이 뛰어난 선배”라는 말처럼 - “이론적 접근”, “정세분석능력”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표현들 중에서 무엇보다 혼란스러웠던 것은 정당 - 그것도 “선거운동기간동안의 정당의 정책”이란 표현이었다. 많은 이들은 선거 정책과 선거 공약, 선거 컨셉을 포함한 선거 이미지 전략을 혼동했고, 심지어 이 모두를 통칭해서 선거 정책이라고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선본의 환경정책은 거의 모두 몇 줄의 공약으로 등치되었고, 선본의 이미지를 담은 컨셉과 슬로건이 정책으로 불리는 등 많은 혼란이 이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진중권을 비롯한 이들의 정책부재논란까지 있었으니 참으로 혼란의 연속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럼 다시 청계천 복원문제로 돌아가보자.
누군가의 말처럼 “청계천 문제의 모든 모범답안은 청계천살리기연구회(이하 청계천연구회)가 가지고 있었다.” 처음 문제제기를 했던 것도 청계천연구회였고, 관련 전문가들이 모두 모여 2년여 동안 연구를 해왔기에 복원 찬성-반대측을 통털어 청계천연구회만큼 진지하고 심도 깊은 연구를 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뒤늦게 청계천문제를 이슈화하려고 했던 서울시장선거의 모든 선본은 짧은 시간안에 “모범답안”을 소화하기에 급급했다. 자신의 제1공약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명박선본 조차 청계천연구회의 복원예산안에 감리비용을 더하고 운하건설설비용을 빼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했을 뿐 독자적인 정책개발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환경“운동”에 가까이 있었던 3명의 진보후보 조차 모두 같은 이야기 - 청계천 연구회의 연구결과 -를 그대로 읽어가는 수준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 누구도 “정책”을 고민하지 않고 나왔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다. 청계천 복원문제가 제기된지 1-2년 밖에 안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심한 결론이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정책”이라는 개념 속에서 “정책”의 실체는 없고 선거에서 부각을 시킬 수밖에 없으면 자연스럽게 택하는 것은 “이벤트” 밖에 없다. 각 후보들은 청계천 현장답사는 기본 코스로 하고 언론사의 사진찍기가 그대로 이어졌다. “후보 공동선언” 같은 연대투쟁이 제안되고, 일각에서는 “청계천 점거 시위”나 “플랭카드 시위”가 검토되기도 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정책 기획(planning)에서 이벤트는 매우 중요하다. 부각되지 않는 이슈를 부각시키고, 문제의식을 전파하는데 이벤트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짧은 선거운동기간동안 많은 것들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선거의 특성상 선거는 정책 대결이라기 보다는 이벤트 대결 - 그 중에서도 특히 언론을 위한 이벤트 대결 - 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책”의 부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이벤트는 누가 보더라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이벤트 대결은 보수정치권의 “원조보수” 논쟁만큼이나 민중들을 실망시키고, 한국정치를 또다시 수렁으로 빠뜨리는 일이다. 또한 진보정치의 이벤트화는 그동안 진보진영이 쌓아온 많은 성과물들을 희석시킨다. 보수정치권보다 환경운동에 가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고민하고 적용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 진보진영의 “청계천 복원 문제” 접근은 그동안 진보진영의 성과물이 얼마나 손쉽게 희석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정책은 저 깊은 도서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산 속에서 수도하다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일상에서 투쟁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책을 마련해 나가는 기획이자 계획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한 치밀하고 세밀한 계획들이 모여질 때, 진정한 정책정당-정책대결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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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부당하지 않은 관찰자인 나에게 우리 사회는 배반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유독 조승수 민주노동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배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4년 전인가, 노동사회연구소 주최 토론장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토론자 중 한 사람은 오늘 노사정위원장이고, 다른 한 사람은 노동부 장관이다. 또 어느날 시민단체 ‘학벌없는 사회’가 주최한 토론장에서 만났던, 지금은 대통령이 된 어느 후보를 기억한다. 노동 현안이든, 학벌 문제든, 당시 토론자들이 오늘 철저히 배반당하고 있다는 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과 김진표 교육 부총리라는 증인이 말해주고 있다.

억압의 시대엔 투쟁이 있었고 투쟁은 희망의 근거였다. 억압이 사라진 시대라지만 소외계층엔 희망이 없다.

이것이 배반 시대의 첫째 특징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배반이 능력 있는 자들의 특권이라는 점이다. 배반은 이 시대 능력의 증거다. 반면에, 이 사회를 영리하게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애당초 배반의 가능성이 없다. 능력 없는 사람은 배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한때 훼절과 변절이 더할 나위 없는 수치로 여겨졌고 사회적 비난을 피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오랜 우여곡절의 역사는 대의와 명분이 현실적 안위와 영달에 비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증언한 수많은 변절자들을 생산해냈다. 언젠가 그들도 스스로 후회할 날이 오리라 믿었던 어리숙한 민중들은 배반을 거듭하면서도 승승장구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아야 했다. 그들이 후회하는 날은 끝내 오지 않았고, 올곧은 선비를 흠모하던 사람들은 점차 배반을 통한 출세도 능력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능력이 곧 출세가 되고, 출세는 모든 흠결의 면죄부가 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배반에 대한 응징은 우두머리에 대한 충성을 조직의 생명으로 여기는 조폭 세계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조폭 영화가 환영받는 이유는 의리라는 이름으로 배반이 금지된 유일한 조직이라는 점 때문일지 모른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은 가상세계다.

이 시대의 배반의 구도는 단순하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부정하는 모습을 텔레비전과 각종 매체에 당당하게 드러내면서 그것이 결단에 찬 부정이며 훗날 역사가 긍정적으로 평가할 것이라고 주장하면 된다. 실상, 그들은 ‘민중의 바다’를 읊조리며 용이 되는 데 성공했는데, 스스로 용이 되자 ‘민중의 바다’는 다시 개천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승천을 가능하게 했던 푸른 희망으로서의 ‘민중의 바다’는 언제나 ‘개천’이었을 뿐이다. 그들을 희망으로 알고 열심히 풀무질해댔던 개천 사람들은 더는 ‘민중의 바다’가 아니라, 허접한 개천에 사는 비정규직이며 소외계층일 뿐이다.

자신을 배반한 그들에게 개천의 삶을 기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일은 이미 무의미하다. 강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약자 처지가 되었을 경우를 가정하지 않는다. 반면, 사회적 약자들은 강자의 처지가 되었을 경우를 가정하며 그들의 배반을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으로.

따라서 이른바 민주화된 시대에 유행하는 정치 공학이란 민중을 배반해온 세력과, 과거에 ‘민중의 바다’를 말했던 자신을 배반한 세력간 싸움의 반영이다. 민중이 배제된 이 지루한 싸움판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그 열쇠는 배반을 응징할 줄 아는 ‘늠름한 민중’에게 있을 것이다.

홍세화/기획위원 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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