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인터넷 총아에서 왜 몰락했나?
[기자의 눈] 조중동과 한나라당 비토 아닌 개혁진영의 외면이 더 심각
 
도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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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수사에 가장 어울리는 정치인이 있다면 단연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일 것이다.
 
그런 유시민 의원이 보건복지부 장관에 내정됐다가 당내외 반발 여론에 막혀 제동이 걸린 상태다. 네티즌들의 갑론을박으로 와글거리는 건 당연.

문제는 더이상 유시민 의원이 인터넷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인터넷상에서 유시민 팬클럽을 지칭하는 소위 '유빠'만큼 극성인 네티즌들도 드물었다. 어느 사이트에 유시민이나 盧 대통령 관련 인터넷 여론조사라도 한다는 글이 뜨면, 특정 사이트를 통해 이를 집중 홍보하고 집단으로 몰려가 투표수 올리기 등을 통해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유빠들의 극성은 고전이 된지 오래다.
 
최근엔 황우석 옹호에 앞장서며 진보진영을 깍아내리고 마타도어하는데 조선일보보다 더 극렬하게 활약한 네티즌 중에 친노그룹중 유빠 성향의 네티즌이 상당할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실제 유시민 의원은 이번 황우석 스캔들 와중에 극렬한 언사로 PD수첩을 맹비난하고, 황우석을 옹호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유시민 의원 자신의 입각에는 황우석 논란 과정에 끼어들어 인기영합적 발언으로 들인 공에 비해 효과는 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 '노통의 유시민 집착' 세계일보 4일자 만평    
유시민 입각 보류 소식이 전해진 이후 네티즌들의 유시민 입각에 대한 평가는 반대가 압도하고 있다. 유 의원 입각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들은 부정적인 멘트가 단연 우세하고, 네티즌들을 상대로 한 네이버 라이브 Poll 여론조사에서도 4일 오전 현재 찬성 34.77% 대 반대가 63.26%로 두 배에 가깝다.
 
이에 대해 한 네티즌은 "현재 유시민 사태의 심각성은 조중동이나 한나라당 세력의 비토가 중심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정작 열린우리당 지지자와 개혁적 국민들은 유시민이 개혁적이라서 그를 비토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의 화신인냥 자처하지만 실제로 개혁과는 거리가 멀고 권력투쟁에만 몰입하는 사람이라 비토하는 것이다."는 뼈있는 코멘트를 했다.
 
이 네티즌은 "유 의원의 언행에 달려들어 찬양 댓글을 다는 수 십명의 유빠들만 보고, 그의 정치적 행보를 이성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다수의 눈팅들을 외면한 결과"라고 일침을 가했다.
 
단순히 유시민 의원의 싸가지 없어 보이는 '말투' 때문이 아니라, 사안에 따라 갈짓자 행보를 보이고도 자기합리화에만 충실한 '뻔뻔스러움'에 많은 사람들이 질려버렸다는 지적인 셈이다.
 
그런가하면 황우석 사태와 관련해, 진실에 입각한 차분한 대응을 강조했던 김근태가 떠난 자리에 쥐뿔도 모르면서 PD수첩을 맹비난 '오버의 극치'를 보인 사람을 악착같이 등용하려는 盧 대통령의 사고에도 '마비 증상이 온 것 아닌가'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으론 최근 정치적 사안과 관련한 네티즌 일각의 동향를 토대로 재미난 분석도 있다.
 
정서적으로나 행동양식으로나 비슷한 과에 속하는 유빠와 박빠(박근혜 팬클럽)의 사안별 '접맥과 이탈'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그것이다.
 
황우석 신드롬은 박빠와 유빠가 성장주의와 노무현 보위라는 각각의 이해관계 때문에 황우석 무조건 지지 여론을 태풍에 광풍으로까지 만드는데 모두 올인했지만, 유시민의 입각 관련해서는 서로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난 '이탈'의 결과라는 분석이 그럴듯하게 제기되기도 한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활약도로 볼때 유빠보다 박빠들이 훨씬 많아서 그런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났을 것이란 해석이다.
 
ㅁ 유시민 입각 관련 네이버 라이브 Poll 여론조사 보기==> http://news.naver.com/hotissue/poll.php?cmd=result&no=648
 
오프라인 국민 여론도 절반 이상이 부정적
 
유시민 의원의 입각과 관련해서는, 인터넷상 여론도 나쁘지만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도 부정적이기는 마찬가지다. SBS가 3일자로 실시한 개각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유시민 의원의 입각에 반대하는 국민이 절반이 넘는 50.2%로 찬성(37.3%)보다 훨씬 많았다.
 
ㅁ SBS 여론조사 결과 43% "잘못된 개각"(1.3일자) 방송내용 보기==> http://news.sbs.co.kr/sbsnews_NewsDetail.jhtml?news_id=N1000045978 
 
2006/01/04 [09:50]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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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뉴스 2005-12-28 13:33]    



황우석 사태로 어수선한 가운데, 우연히 ‘딴지일보’에 올라온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읽으며 “딴지일보가 약 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해 보니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11월 29일에 어느 매체에 올린 글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글을 읽으며 이번에는 “아, 총수가 약 먹은 거였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모든 의문이 풀리는 듯 했다.

몇 십 개국을 돌아다니며 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알게 됐다는 총수. 대한민국이라는 우물 속의 애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 믿어왔는데, 이번에 드러난 그의 투철한 애국심을 에 보며 그만 덩달아 나도 국기에 대한 경례가 하고 싶어졌다. 딴지 총수가 여행을 통해 익혔다는 국제적 감각,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월등히 후진 모양이다. 그의 주장을 보자.

#1.  
"PD수첩은, 2002년 안정환의 이탈리아전 결승 헤딩골은 카메라 사각이어 제대로 잡히지 않아 그렇지 사실은 안정환의 핸들링이었다는 것을 온갖 자료를 동원해 증명해내고 또 손에 닿은 것을 알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은 안정환은 거짓말쟁이라는 걸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입증한 꼴이다."

과학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본다 해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스포츠신문도 ‘신문’이고, 스포츠 기자도 기자인 이상, 안정환의 결승골이 사실상 핸들링이었다면 그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그런다고 판정이 뒤바뀌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리고 그런 사실을 국익을 위해 대중은 몰라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과학은 스포츠가 아니다. 마라도나는 자신의 결승골이 실은 핸들링이었다고 떠들며 “황금의 손” 어쩌구 하며 그 사실을 공공연히 자랑하고 다녀도 선수 생활 하는 데에 지장이 없지만 (그 실수는 그의 것이 아니라 심판의 것이므로), 과학자는 거짓말을 하는 순간 학자로서의 생명이 끝나기 때문이다.

축구에서는 할리우드 모션으로 심판의 눈을 속여 페널티킥을 얻어내는 게 잘하는 일인지 몰라도, 과학의 그라운드에서는 그런 짓 하는 선수는 당장 레드카드를 받고 경기장 밖으로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고, 선수 자격까지 박탈을 당하게 된다. 총수는 이 차이도 모르는 걸까?

#2.
“만천하에 황 교수 거짓말쟁이로 만들며 얻게 된 우리 사회의 이득은 생명과학 분야에 있어 보다 투철한 윤리의식 획득과 그에 준하는 보다 엄정한 프로세스의 확립. 아마도 그쯤일 게다. 그럼 손실은. 황우석 명성에 국제적 흠, 국민들 자존심에 상처, 연구진 사기의 저하 정도 되겠다.”

이렇게 “대차대조”표를 짜놓고 총수는 묻는다. “PD수첩이 방송하지 않고 황 교수에게 조용히 조언할 순 없었냐?”고 묻는다. 총수의 눈에는 ‘투철한 윤리의식 획득과 엄정한 프로세스의 확립’보다는 ‘황우석 명성', '국민들 자존심’, ‘연구진 사기’가 더 중요해 보이는 모양이다.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여성의 몸에서 나오는 난자가 과학 그 자체와는 별 관계가 없는 ‘명성’이나 ‘자존심’이나 ‘사기’ 따위보다는 더 소중한 것 같은데, 딴 총수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다.

200개의 난자로 1개의 줄기세포를 만들어냈을 때에 세계는 두 가지 점에 놀랐다. 먼저 황우석 박사의 연구 성과에 놀랐고, 그에 못지않게 그가 그 많은 난자를 구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듣자 하니 이번 연구에 사용된 난자의 수가 무려 1000여개를 넘어선단다. 몸에 위험한 배란촉진주사를 맞으며 그 많은 난자를 기증한 65명 여성의 몸이 ‘명성’과 ‘자존심’과 ‘사기’보다 못하단 말인가?

#3.
“우선 연구원 난자. 헬싱키선언, 보편타당하다. 그러나 충분히 자발적임을 입증할 수 있을 경우, 연구원 난자기증 가능하단 것이 배아복제 실험과정에서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실험윤리라고 국제과학계에 주장하는 꼴 좀 봤음 한다. 그 주장이 꼭 국제적으로 환영받길 원해 하는 생각은 아니다. 스스로 납득할 만한 논리 있다면 헬싱키선언이고 나발이고 우리 생각을 자신 있게 말하는 꼴 좀 보고 싶어서다.”

문제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획득한 실험윤리”라는 것이 “보편타당”하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게 아닐까? 다른 나라에서 연구원의 난자 채취를 금하는 것은, 연구팀 내의 권력관계로 인해 난자 기증의 자발성이 훼손될 염려가 있기 때문일 게다. 그 규정을 빗겨가려면 외국과 달리 한국 연구실의 분위기는 매우 자유스럽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내가 알고, 딴지 총수도 인정하겠지만, 한국의 상황은 그 반대다.

게다가 실제로는 어땠는가? 박을순 연구원의 난자 기증은 사실상 강요당한 것이라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PD수첩’ 측에서도 이미 자신의 난자를 기증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박 연구원의 글을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네가 망가뜨린 난자, 네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 압력이 행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헬싱키 선언을 피해가는 데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논리”란 게 있을 수 있겠는가?

#4.
만천하에 황 교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며...

여기서 총수는 ‘PD수첩’이 “만천하에 황 교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황 교수를 거짓말쟁이로 만든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황 교수 자신이다. 그 동안 그는 국민들 앞에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 왔던가? 언론들이 황우석 편들어주느라 꼼꼼히 정리해주지를 않아서 그렇지, 이제까지 드러난 그의 거짓말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다. 황 교수가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황 교수가 거짓말을 안 하면 된다. 그러더니 총수는 이렇게 선언한다.  

그리고 이제 제발 황우석 좀 그냥 냅두자. 사람 죽겠다.

황 교수가 어디 죽을 사람인가? 이제까지의 행태로 볼 때 그는 끝까지 죽지 않을 사람이다. 그가 10kg나 빠진 몸무게를 들고 병원에 입원한 것을 보고 하는 얘기인 것 같은데, 그나마 황 교수에게 일방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언론의 태도가 약간이라도 바뀐 것은, 수염도 안 깎은 모습으로 병실에 누워 그가 연출하는 유치한 수난극을 보고나서의 일이라는 점, 잊어서는 안 된다.

#5.
‘딴지일보’에 오른 인터뷰를 통해 총수는 목하 자신을 변명하는 모양이다. 물론 11월 29일자의 글로 천하의 딴지 총수 스타일이 상당히 망가진 것은 사실인데, 사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냥 “내가 생각이 짧았다”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마음속으로 인정이 안 되는 모양이다. 누가 한 말이더라? “모든 사람이 어떤 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라, 과거에 그들이 그것을 한번 주장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총수와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원천기술”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통해 줄기교는 서서히 배판포교로 진화하는 모양이다. 저들은 음해세력(?)에 맞서  황우석을 옹호한다고 하나, 그들이 지금 열심히 옹호하는 것은 사실 바로 얼마 전에 보여주었던 자신들의 부끄러운 모습일 뿐이다. 누구 말이더라?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고...

#6.
그러니 이건 경거망동할 사안이 아니다.. 불확실한 정보에 움직이지 말고 차라리 직관으로 판단하라. 그래서 딴지는 다른 모든 언론들이 붕붕 나르며 수많은 기사를 낼 때... 여느 때와는 다르게 사실상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어요. 그 동안..

“직관으로 판단하라.” 갑자기 총수께서 개똥철학까지 하시는데, 그렇게 ‘직관’ 믿고 줄 잘못 섰다가 민망해진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모든 이들이 제 ‘직관’을 남발하며 미쳐 돌아가던 시절에, 유일하게 이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지금 딴지가 씹고 있는 ‘브릭’이었다. 그리고 풍자와 해학으로 몰상식한 사회를 도발하던 딴지일보. 총수가 거룩하게 애국질 하는 동안, 딴지가 하던 일을 대신 맡았던 것은 ‘DC의 과학 갤러리’였다.

총수는 손가락에 침 발라 “똥꼬 깊쑤키” 꼽고 알아서 반성하라. 굳이 이런 일에까지 내 손가락을 써야 겠는가?




글·진중권(시사평론가·‘SBS 전망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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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5-12-28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남 비꼬는 글쓰기.. 썩 보기 좋아보이진 않지만, (악취미인지는 몰라도) 후련하다..

라주미힌 2005-12-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딴지 일보 아직도 있네.. ㅡ..ㅡ; 엽기 코드는 한물 간거 같은데..

로드무비 2005-12-28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인용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듯.
김어준 총수 정말 왜 그랬을까요? 갸우뚱.

라주미힌 2005-12-28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재적 전체주의자가 아닐까요..
불통만 튀기면 활활 타오를... (성인용품 ㅋㅋ.. 그 장사 아직도 하나.. 옛날엔 정말 웃기게 읽었었는데..)

깍두기 2005-12-28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어준....딴지일보....안 가본지 꽤 됐죠.
싸이트 요상하게 바뀌어 가더라구요.
그래도 김어준이 저런 말꺼정 할 줄은 몰랐네.

페일레스 2005-12-2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쩝... 쾌도난담 할 때도 중간중간 핀트가 안 맞는다 싶은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 게 점화된 걸지도... 아무튼 찝찝합니다.
 

건축업과 IT, 빌더의 철학

김국현(IT평론가)   2005/12/22

 

신생 분야 IT는 자신의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정의되어야 할 갖가지 과제를 기존 타 분야의 관념에 빗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유난히도 은유가 풍부한 분야가 되고 말았다.

‘인헤리턴스’나 ‘폴리몰피즘’과 같이 생물학에서 가져 온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건축과의 밀월은 넓고도 깊다. 특히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나는 다양한 행태, 예컨대 하청과 하도급이 난무하는 관행은 꽤나 흡사하다. 또 설계나 구축, 아키텍트나 빌더와 같은 업계 용어도 건축으로부터 차용한 것이 많다.

IT. 수학적 알고리즘에서 시작한 이 순수 과학은 경영의 시녀인 SI 산업으로까지 급박하게 변모해 간다. 21세기가 이 산업에 거는 기대란 20세기의 경제 발전 5개년 계획 등지에서 건축과 토목이 해 왔던 인프라 건설의 역할에 비견할 만 할 것이다. IT839 정책 등에서 볼 수 있듯, IT는 어느새 사회 간접 자본으로서 여겨지고 있다. 건축에 대한 은유는 IT의 오늘을 잘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공사판이 되어 버린 SI 산업을 한탄하며, 소프트웨어란 그리고 프로그래밍이란 창의적 지성의 특권과도 같은 것이라 믿고 싶은 오늘,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 괴리에서 고민하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한다.

벽돌을 올리는 인부에게 누군가가 묻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지겨워 죽겠어. 오전 내내 시멘트만 개고 있으니까."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골목의 랜드마크가 될 10층짜리 벽돌 건물을 짓고 있지."

이 것이 바로 빌더의 철학이다.

테라코타 붉은 벽돌로 유명한, 교보 강남 빌딩과 리움 미술관의 설계자 마리오 보타는 "건축은 모든 예술의 모체"라 말한다. 우리가 막노동판이라고 야유하던 그 산업을 두고 말이다.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강하게 살려 명성을 얻은 건축가 마리오 보타. 지방의 건축물들이 세계적 화제를 사고 그 양식이 다시 지역과 무관하게 퍼져 나간다. IT는 그럴 수 없을까?

예술로서의 건축처럼 테크놀로지가 미감과 교차하고, 단순한 기능을 시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기에는 IT 산업 구조가 너무나도 미국 중심의 일극 주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미국에서 솟아 나와 흘러 나오는데 무슨 지역적 아이덴티티가 있겠느냐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덴마크를 생각한다. 걸출한 건축가를 수없이 배출해 낸 덴마크. 그 곳에서 C++이 탄생했다. 터보 파스칼, 델파이, C# 모두 덴마크인의 작품임을 기억한다. 오브젝트 지향에 관해서는 스캔디나비안 학파를 알아 주며, 모듈화의 은유에 등장하는 '레고 블럭'마저도 덴마크가 준 선물이다. 면면하게 이어지는 지역적 아이덴티티란 이런 것이다. 진정한 건축 강국이란, 진정한 IT 강국이란 이런 것이다.

건축으로의 은유를 IT가 지닌 숙명이라 생각한다면, 이에 대한 교훈도 IT가 닮고 싶어했던 건축이 주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건축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빌더의 철학이다.

혼을 담은 예술이라 생각하는 건축을 하지 않는다. 막노동이라 투덜댄다. 그러다 보면 백화점이 무너져 내리고, 대교가 끊어져 가라 앉는다. 빌딩의 수준은 빌더의 철학을 반영할 뿐이다. 철학이 없다면 이러한 수준의 IT 밖에 될 수 없다.

으레 건축에는 필연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기묘한 형상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는 '오브젝트(Object)'와 '컨텍스트(Context)'에 대한 건축가의 해석으로 표현된다. 오, 너무나도 IT에 익숙한 용어다. IT에게도 이러한 해석을 기대할 아키텍트가 필요할 텐데, 코딩도 할 줄 모르는 아키텍트가 무책임한 제안서와 타성에 젖은 개발자들과 씨름하고 있다.

지나치게 험난한 SI 현장에 있다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냐"는 빌더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자. 지나치게 무모한 제안서를 써야만 한다면, 현상 공모에 도면을 내는 건축가의 심정이 되어 보자. 이러한 마음가짐은 업계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빌더의 철학이 담긴 분위기가 자리잡을 때, 너무나도 한국적인 IT, 한국다운 지역적 아이덴티티를 살린 성과물로 세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참된 IT 강국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짠 한 줄의 코드가 다음 시대의 랜드마크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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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sama 2005-12-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봤습니다. 추천하고 퍼갑니다.
 

YTN과 <조선일보>는 어물쩍 넘어가선 안된다        
[진중권 칼럼] '황우석 조작극' 가담한 언론의 난치병        
진중권(angelus) 기자            


▲ 황우석 교수가 2005년 <사이언스> 논문조작과 관련해 23일 오후 대국민사과와 함께 서울대 교수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황우석 박사의 논문은 예상대로 조작으로 드러났다. 황 박사의 성과가 세계적이었으니, 이 사태로 인한 망신도 국제적인 규모를 자랑한다. 국민의 90%를 졸지에 바보로 만들어버린 황우석 해프닝. 21세기에 일어난 이 황당무계한 사태에 우리의 언론들은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언론, 대중을 선동하다

언론의 책임은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 단계는 < PD수첩 >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다. 이때만 해도 언론이 대중을 이끌었다. 즉, 황우석 박사가 이룩했다는 '위대한 업적'에 눈이 멀어, 그게 얼마나 근거가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은 것이다. 사실 이때만 해도 황 박사를 의심할 근거가 없었으니 딱히 언론에 이 부분의 책임을 묻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제 막 출발한 줄기세포연구가 당장 척추손상 환자들을 걷게라도 해줄 것인양 거짓 희망을 노래한 책임, 330조니 33조니 하는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하면서 이 연구의 가치를 부풀린 책임, 나아가 성과에 눈이 멀어 배아복제나 난자 채취에 따르는 윤리문제를 가볍게 처리한 책임은 오롯이 언론의 몫으로 남는다.

대중이 언론을 이끌어가다


▲ 후폭풍... 11월 26일자 <동아일보> 1면 보도. 11월 22일 < PD수첩 >의 황 교수 윤리 문제에 대한 비판 방송 이후 대중의 분노는 이상하게 황 박사가 아닌 MBC쪽을 향했고, 이 즈음 언론의 대중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동아 PDF

두번째 단계는 < PD수첩 >에서 문제를 제기한 이후다. 이때부터는 거꾸로 대중이 언론을 이끌기 시작한다. 난자 채취 의혹은 사실로 드러났고, 황 박사는 그로 인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런데도 대중의 분노는 이상하게 황 박사가 아닌 MBC쪽을 향했다. 이런 대중의 윤리적 도착증과 부조리한 행태를 자제시키기는커녕 언론은 이 부조리한 분노에 편승하기에 바빴다.

이미 논문의 진위에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언론이라면 중립적 위치에서 누가 참말을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가려야 했다. 언론이 제 임무를 방기하고 일방적으로 황 박사의 편을 드는 사이,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은 '브릭'의 젊은 과학도들에게로 돌아갔다. 이들의 문제제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공론화한 매체는 <프레시안> 밖에 없었다.

<한국일보>, <한겨레>, <경향신문>, 인터넷 매체로는 <오마이뉴스>와 <업코리아> 정도가 비교적 공정성을 유지했고, 나머지 매체들은 온과 오프의 구별 없이 MBC의 살을 뜯어먹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조·중·동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일보>를 비롯한 마이너 신문들의 보도도 고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KBS와 SBS 역시 진실보다는 MBC 때리기를 은근히 즐기는 듯했다. 거국적으로 반성들 해야 한다.

YTN의 '공작'


▲ 지난 4일 YTN의 김선종 연구원 인터뷰 보도 화면. ⓒ YTN TV 촬영

단연 고약했던 것은 YTN과 조선일보. 물론 YTN에서 MBC의 취재윤리 위반을 보도한 것 자체는 탓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YTN의 취재 경위에는 앞으로 밝혀져야 할 수상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김선종씨는 YTN 인터뷰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진술번복(?) 역시 황 박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밝혔다. 한마디로 YTN이야말로 황 박사와 손잡고 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강압 취재를 한 셈이다.

YTN의 것은 '보도'가 아니었다. 보도를 하려 했다면, 김선종씨가 < PD수첩 >에서 한 발언의 진위를 꼼꼼히 따져봤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 PD수첩 >의 취재윤리 위반만 부각시켜 그것으로써 애초의 인터뷰에 담긴 실체적 진실을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진실을 밝히는 게 아니라 외려 덮으려 드는 것. 이것도 '보도'라 할 수 있을까?

조선일보의 '선동'

<조선일보>는 좀 다른 맥락에서 고약했다. 그들은 < PD수첩 >에 쏟아지는 분노의 파도를 타고 랄랄라 즐겁게 이념공세의 서핑을 했고, 그 결과 과학논문의 진위 논란이 졸지에 좌우의 이념대립이 되어 버렸다. <조선일보>의 공세는 MBC에 그치지 않았다. <한겨레>, <오마이뉴스>는 물론이고, 애먼 민주노동당과 과거의 운동권, 나아가 좌파 일반까지 표적으로 삼았다.

YTN과 <조선일보>의 것은 '보도'가 아니었다. YTN이 '공작'을 했다면, <조선일보>는 '선동'을 했다. 군중의 폭력에 영합한 다른 언론사도 책임이 있겠지만, 적어도 YTN과 <조선일보>만은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두 매체는 국민을 기만하고, 이견을 가진 시민들을 음해한 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연구를 못한다?

"민주노동당 때문에 연구를 못 하겠다." 몇 달 전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의 제목이다. 민주노동당에서 황우석 박사의 연구를 방해하고 있단다. 알고 보니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미 있는 자료를 비공개로 열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을 뿐, 새로운 자료를 만들어 제시하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고 한다. 이 정당한 요구를 <조선일보>는 '황우석 때리기'로 규정했다.

그때 <조선일보>의 매도가 없었다면, 황 박사에게 들러붙은 의혹들은 더 일찍 밝혀졌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제기하는 의혹이 마음에 안들면, 취재를 통해 그 의혹의 진위를 밝힐 일. 하지만 <조선일보>는 해야 할 취재는 하지 않고 황우석 박사의 말만 옮겨 적었다. 취재를 안 한 것도 문제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진실을 밝히려는 남의 노력까지 방해했다는 점이다.

PD는 PD다?


▲ < PD수첩 > 사냥... < PD수첩 >을 강하게 비난하는 12월 6일자 <조선일보> A3면 보도. 하지만 결국 < PD수첩 >의 보도는 진실로 밝혀졌다. ⓒ 조선 PDF

재미있는 것은 한학수 PD의 과거 전력을 들먹인 부분이다. 과거에 한 PD가 좌파 운동권의 PD계열에 속했다는 것이다. 도대체 학생 시절에 운동을 한 것과 제보를 받아 취재에 나선 것 사이에 무슨 인과관계가 있단 말인가? <조선일보>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에 운동권이었던 민주노동당과 연결되어 있다며, 황우석을 내세워 좌파와 진보 사냥에 나섰다.

'황교수 물고 늘어지고 PD 수첩 편들고... 민노당 도대체 왜?'라는 12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민노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이 황 교수 문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좌파들의 "이념"이 문제라는 것이다. 여기서 논문의 진위를 가리는 과학의 일상은 졸지에 이념적 사건이 되어버린다.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김대중 칼럼은 <조선일보>의 정치적 리비도다. 12월 6일자 칼럼의 첫 머리. "'황우석과 MBC PD수첩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는 이상한 현상을 목도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좌파 매체와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한결같이 MBC PD수첩의 보도를 옹호하거나 더 나아가 '황우석 깎아내리기'에 동조했다는 사실이다." 공격은 이제 진보매체로까지 확장된다. 그는 <한겨레>,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프레시안>을 차례로 도마에 올린다.

왜 그럴까? 물론 진보성향의 매체들을 씨잡아 매도함으로써 다가올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유리한 매체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속셈이다. 더 황당한 것은 김대중씨 스스로 이렇게 말하는 대목. "이런 것들이 '황우석 사태'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왜 제 입으로도 "일반의 상식으로는 가늠하기 힘들다"고 말하는 그 짓을 하는가?

보통사람들에 대한 마녀사냥


▲ 선동... 12월 6일자 <조선일보> A34면 '김대중 칼럼'. 이 글에서 김대중씨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좌파 매체와 좌파 성향의 인사들은 한결같이 '황우석 깎아내리기'에 동조했다"고 비난했다. ⓒ 조선 PDF

이 정도야 그냥 웃어넘기면 그만이다. 문제는 이 칼럼의 제목. '보통사람들에 대한 마녀 사냥'. '마녀사냥'이란 다수가 소수에게 행하는 부당한 탄압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MBC가 보통사람들을 사냥한 게 아니라, 그 반대로 보통사람들이 떼지어 MBC를 사냥하지 않았던가. 보통사람들에 의해 방송사의 광고가 모두 끊어지는 사태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었고, 세상 어느 곳에서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백번 양보해 설사 MBC가 제기한 의혹이 그릇된 것으로 밝혀져도 집단적으로 광고까지 중단시키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게다가 군중들이 PD의 가족사항을 게시판에 공개하고, 이견을 가진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쫓아가 폭언을 퍼붓고 공공연히 협박까지 가하는 게 어디 정상적인 상황인가? 그런데도 마녀사냥을 당한 것은 대중이란다. 이게 바로 <조선일보> 특유의 도착적 성취향이다.

'소폭' 지원하면서 '대폭' 지원도 하고


▲ 이랬던 조선일보가... 12월 7일자 <조선일보> A2면 보도. 이 신문은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의 줄기세포 연구에 정부는 올해에만 30억원을 지원했다"며 "예산만 소폭 지원"했다고 비판했다. ⓒ 조선 PDF        

▲ 이렇게 변했다... 12월 19일자 <조선일보> A5면 보도. 불과 12일전인 7일 "예산만 소폭 지원"했다고 비판했던 이 신문은 이날 기사에서는 "황 교수의 연구는 정부예산 400억원이 지원된 국가적 프로젝트"였다며 황우석 사태에 대한 '정부책임론'을 들고나왔다. ⓒ 조선 PDF

<조선일보>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은 역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슬쩍 도망갈 때. 많은 이들이 <조선일보>의 도주로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슬쩍 발을 빼며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노무현 정권에게 뒤집어씌우려 들 것이다.' <조선일보>가 이런 행태를 보이리라는 것은 종을 치면 침을 질질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의 행태만큼 명증한 사실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황우석이 잘 나갈 때는 야박한 정부가 황박사의 연구를 "소폭 지원"했다고 불평하더니, 황우석이 무너지는 듯하자 갑자기 멍청한 정부가 황우석을 "대폭 지원"해왔다고 말한다. '소폭'과 '대폭'은 논리적으로 서로 배척한다. 어떻게 소폭 지원이 동시에 대폭 지원이 된단 말인가? 논리를 초월한 이 심오함이야말로 <조선일보>의 두개골을 채우는 생명의 신비다.

줄기세포도 포기하다

언젠가 줄기세포의 비밀은 해명될지 모르나, A와 ~A가 동시에 성립하는 <조선일보>의 두개골 속 사정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남을 것이다. 언젠가 황우석 박사가 무덤에서 일어나 줄기세포 연구에 성공하면, 이 분들의 뇌부터 치료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 줄기세포가 환자 맞춤형이라니, 고민이다. 얼빠진 환자의 머리를 그대로 복제한 맞춤형 머리라고 어디 기능이 온전하겠는가.

결국 황 박사의 창작 시나리오대로 노성일 박사가 김선종 연구원을 시켜 미즈메디에서 확보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수정란 줄기세포로 바꿔치기를 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에는 면역거부 반응이 일어난다고 하니,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줄기세포가 모든 난치병을 치료해도, 이성과 합리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조선일보>의 뇌만큼은 영원히 난치병으로 남을 것인가?

사과가 익어가는 방식


▲ 용서? 사과는? 12월 24일자 <중앙일보> 31면 '중앙 포럼'. 이 글에서 이연홍 논설위원은 난데없이 "좌도 우를 용서하세요, 우도 좌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한다. ⓒ 중앙 PDF

몇몇 언론사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겸허한 반성을 했다. 제일 먼저 <헤럴드경제>가 지면을 통해 독자에게 사과를 했다. 기계적 균형을 유지했던 <경향신문>은 자신들의 용기 없음을 반성했다. 방송사 중에서는 SBS가 국민을 오도한 점에 대해 공식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했다. 그런데 황우석팀의 진실은폐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YTN만은 아직도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계속 뺀질거린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중·동은 사과를 하는 방식도 변태적이다. 먼저 <조선일보>를 보자. <조선일보>는 스스로 반성을 하는 대신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이라는 웃지 못할 타이틀을 소유하고 있는 이화여대 유세경 교수를 내세웠다. 진실의 규명을 외면한 경마식 보도행태 등, 그의 지적에는 틀린 말이 없다. 하지만 유 교수는 정작 <조선일보>가 저지른 범죄적 행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황우석을 내세워 군중을 선동하고 좌파 사냥을 한 점. 이걸 뺀 반성은 반성이 아니다.

<중앙일보>의 변명은 실소를 자아낸다. 중앙포럼이라는 데에 실린 이연홍 칼럼에서 몇 구절 인용해 보자. "황우석도 노성일을 용서하세요. 노성일도 황우석을 용서하세요. … 좌도 우를 용서하세요. 우도 좌를 용서하세요. 그리고 용서받으세요. 좌가 어디 있고 우가 어디 있나요. 우리 속의 하나잖아요." 이제 와서 우리가 '하나'란다. 이거 읽고 뒤로 넘어가는 줄 알았다. 여기에 대한 코멘트는 딱 한 줄이다. '이연홍씨, 웃기고 자빠지셨어요.'

황우석에게 준 인촌상을 슬쩍 취소하고, 부랴부랴 어린이용 황우석 위인전도 수거하고 있다는 <동아일보>. 아주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차원의 반성문 하나 올리고 대충 넘어갈 태세다. 정부도 잘못하고, 과학계도 잘못하고, 국민도 잘못하고, 언론도 잘못하는 와중에 <동아일보>라고 조금 잘못을 안 할 수는 없었다는 식이다. 여전히 "원천기술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황 박사의 후속논문은 <동아 사이언스>에서 실어주는 게 어떨까?         

2005-12-24 23:27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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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벗에게,

   “회색인들의 사회”
   일제 강점기 이래 우리 사회의 교육과정에서 배제된 것 중 하나가 자율성의 가치입니다. 군국주의 일본이 식민지 노예들에게 자율성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학교는 일왕에게 무조건 충성하라는 타율적 질서의식을 형성하는 곳이었습니다.

   문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뒤에도 반공, 안보, 국가경쟁력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회구성원들에게 기존체제에 복종하는 의식, 즉 타율적 질서의식만 주로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군사학교를 본뜬 학교 구조가 바뀌지 않았듯이, 학교는 코흘리개 때부터 “앞으로 나란히!”로 시작되는 질서의식을 내면화하는 장소로 남았습니다. 그 위에 경제지상주의와 물신주의가 팽배하면서, 결과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정당화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율성이 없고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잘못을 반성할 줄 모르고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뻔뻔한 회색인들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황우석이라는 신종 우상에게 경배하기에 바빴던 군상들, 정치인들, 주류언론의 인사들, 그리고 거기에 맞장구를 처댄 누리꾼들... 그러나 그들 중 자기성찰과 자기반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남 탓하기에 급급하거나 슬그머니 빠지는 비겁한 행태를 보여줄 뿐입니다.

   회색은 검정색 바탕에서는 흰색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흰색 바탕에서는 검은 색으로 보입니다. 자율성이 없고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회색인들은 올곧음을 배격하며 정직성 앞에서는 비겁합니다. 주위에 올곧음과 정직성의 청백이 있을 때 자신의 회색이 검정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직장에서나 군대에서나 학교사회에서나 모두 청백한 사람을 왕따시킵니다. 그리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군”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있나” “좋은 게 좋은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도 여차할 때엔 주위에 검은 사람이나 세력이 나타났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주위의 검정을 강조하면서 자기들이 희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함인데, 조중동 등 주류언론의 주특기 중 하나입니다.

   황우석 사건을 통하여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성찰의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은 그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으며, 자기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회색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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