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황우석 사태,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적 사건"
  "'盧정부 업적강박'-'애국열정' 결합해 '유사파시즘' 연출"

 

지난해 노무현 정부가 자신의 지지 기반인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관료기구'와 '수퍼 재벌'이 주도하는 헤게모니에 투항했다는 비판에 매진해 온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이번에는 노무현 정부와 노 정권을 창출한 민주화운동 세력의 관계, 이들의 '민주적 구속 실패'가 불러온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고찰을 내놓았다.
  
  
"황우석 사태, '민주주의 퇴행'의 징후적 사건"
  
  최 교수는 12일 성공회대 '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연구소'가 대학 내 새천년관에서 개최한 '민주주의, 여전히 희망의 언어인가? : 한국사회 위기 진단과 희망 찾기' 포럼에서 "최근 황우석 사태는 다른 어떤 요소보다 노무현 정부의 과학 정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민주주의가 퇴행할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잘 드러내는 징후적 사건"이라고 진단했다.
  
  한국을 세계 생명공학의 중심으로 내세우고자 했던 '과학정책'은 무언가 업적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노무현 정부의 강박관념'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이를 위한 정책 지원과 민족주의ㆍ애국주의적 열정의 동원이 결합하면서 진실과 비판이 억압되는 일종의 '총화단결', 즉 유사파시즘적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이 상황을 통해 우리는 민주정부를 지지하는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의 일부와 극우적 세력 간의 연대를 목도할 수 있었다"며 "이러한 상황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과연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나 되짚어 보게 한다"고 지적했다.
  
  "盧정부 강박관념은 '바닥 지지도' 탈출구 차원…그러나 잘못 짚었다"
  
  최 교수는 이어 노무현 정부의 '업적 강박'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노무현 정부의 '바닥 지지도'와 한국사회의 정치지형을 분석한 뒤, 해법의 오류인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계속되는 한 '민주주의의 위기'는 계속될 것이라고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은 신자유주의의 생산제도를 보장할 수 있는 경제관료의 수중으로 넘겨진 지 오래며 그럴수록 노동ㆍ사회복지정책은 전자의 잔여 범주에 지나지 않게 됐다"며 "동북아허브 건설, 지역 균형발전, 행정수도 이전, 기업도시 건설 같은 정책은 '토건 국가'로 명명 되듯 큰 규모의 국가 재정과 행정기구를 가동시키며 무언가 큰 일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불러일으키지만 이는 민중적 삶의 질 향상의 효과는커녕 역행하며 엄청난 위험성을 수반한다"고 우려했다.
  
  최 교수는 이어 "노무현 대통령은 정당이 아닌 '제도권 밖 운동'의 대대적 동원을 통해 정부를 창출했다. 이것이 노무현 정부의 첫번째 드라마였다면 그 정부가 신자유주의적 정책노선을 능동적이고 공격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두번째 드라마"라며 "이 두번째 드라마는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히 유해하다"고 덧붙였다.
  
  12일 오후 2시30분부터 열리는 이 포럼에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가 최 교수와 함께 발제자로 참여하며 성공회대 권진관 교수와 카톨릭대 조돈문 교수,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조현옥 대표, 성공회대 조효제 교수가 토론자로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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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문화 보물창고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이야기
장 마르칼의 장엄한 서사시 '아발론 연대기' 김정란 번역으로 출간돼
 
김선자
 
“사막 끝에는 뭐가 있지요?” 보호트가 묻는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있지요…….” 모르간이 대답한다.

 
사막 저 너머엔 무엇이 있을까. 그저 또 하나의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마법사 모르간은 대답한다. 그러나 원탁의 기사들은 그 너머를 탐색하러 떠난다, 끊임없이.
 
젊은 그들은 ‘솔직한 눈길’을 갖고 있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홀로 세계를 주유하며, 한번 결심한 것은 자신과 동지들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밀어붙인다.” “세계의 위대한 신비 앞에 인간은 참으로 무지하지만” 그러나 “세상엔 언제나 무슨 일은 일어나 있고 앞으로도 일어난다”. 에메랄드로 만들어진 성배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세상은 언제나 무슨 일인가로 가득 차 있고, 젊은 그들의 탐색은 계속 된다.
 
장 마르칼은 그들의 가슴 뛰는 모험과 순수, 유치한 열정을 자신의 색깔로 그려 내었다. 김정란은 그것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옮겼다. 김정란에게서는 모르간의 향기가 난다. 멀린의 반지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모르간은 매혹적이고 강하다. 열정적이고 관능적이며 저항하기 힘든 매력을 지닌 검은 머리의 모르간. 란슬롯조차 그녀의 강인함을 두려워한다. 켈트의 신비로운 숲에 슬픔과 고통을 아는 깊은 눈빛으로 서 있는 모르간의 모습에 내내 김정란의 모습이 겹친다.
 
장 마르칼의 장엄한 서사시 <아발론 연대기> 여덟 권이 김정란의 향기 넘치는 번역과 섬세한 해설, 멋진 도판들과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젊은 출판인의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 그것은 세상 저 너머를 꿈꾸는 원탁의 기사들의 열망과 맞닿아 있다.
 
▲ 장 마르칼 지음, 김정란 번역으로 나온 <아발론 연대기>  © 북스피어, 2005

기독교 문화와 아름답게 공존하는 켈트 문화의 보물창고, <아발론 연대기>와 함께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브로셀리앙드 숲에서 전해져 오는 음유 시인들의 노래를 들었다. 멀린의 슬픔과 아더의 지혜, 란슬롯의 열정, 원탁의 기사들의 용기, 기독교 문화 사이사이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켈트 문화의 수많은 상징들이 “망각의 먼지를 뒤집어쓴 필사본”에서 빠져나와 음유 시인들의 투명한 언어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참으로 매혹적인, 그러나 때로는 쓸쓸한 그들의 언어.
 
원탁의 기사들이 찾아낸 성배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인들 어떠랴. 어차피 성배란 질병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인간들이 만들어낸 샴발라적 이상인 것을. 원탁의 기사들을 키운 것은 ‘길’이다. 위대한 신화 속의 영웅들뿐 아니라 고대의 시인들이나 역사가들도 길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도, 최고의 시인 이백도 젊은 날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지 않았던가. 떠남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는 언제나 만들어지고 시인들은 그 이야기를 노래로 기억 속에 아로새긴다.
 
기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의 역사, 그들의 전설. 기억만을 갖고 다녔던 바람을 닮은 사람들. 그들이 전해주는 바람의 이야기, 시간의 이야기, 그리고 길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아발론 연대기>이다.
 
맑은 눈길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대, 아스팔트길 위에서 나른한 일상에 빠져 있는 그대, “내 가슴이 잊지 못할 얼굴” 때문에 수많은 밤을 열정으로 새워본 경험이 있는 그대, 켈트 문화의 숲속으로 난 푸르른 길을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떠나보지 않겠는가. / 신화전문가, 『김선자의 중국신화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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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신드롬, '유사‘ 아닌 진짜 파시즘
[논단] 열정과 광기 속에서 읽은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
 
김수민
 
로버트 팩스턴의 <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혁명>을 덮으며 나는 2002년 어느 모임의 송년회를 회상했다. 거기서 만난 한국계 프랑스 대학생 H와의 대화는 대부분 정치비평으로 채워졌다. 마침 그해 한국과 프랑스는 대통령선거를 치렀던 참이었다. H는 프랑스 의회의 극좌 트로츠키주의 정당부터 극우 국민전선에 이르는 정당과 그들 각각의 대선 득표율을 메모지에 적어주었고, 나는 나대로 우편향된 한국 정치지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느덧 화제는 프랑스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한 극우파 장 마리 르펜으로 옮겨갔다. H가 물었다.
 
"한국에서는 장 마리 르펜의 이미지가 어떻습니까?"  "극우파로 일단 보도됐고. 이미지는 네오-나찌, 네오-파쇼쯤 됩니다."

H는 고개를 젓더니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막혔는지 불한사전을 뒤졌다. 그의 손가락이 ‘일반화하다’라는 말을 가리키고 있었다.
 
"파시즘이란 단어가 너무나 남발되고 있습니다. 르펜은 극우파이지만 파시스트는 아닙니다. 그는 노동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사회주의적 레떼르를 구사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자크 시라크 등 보수주의자들이 르펜과의 작은 간극을 크게 보이게 하려고 그를 파시스트처럼 묘사하기도 합니다."
 
파시즘은 테러독재도, 극단적 자본주의도 아니다
 
H의 말은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다. 르펜은 극우 정치인으로서 사형제의 부활과 불법이민자 강제추방을 선동하는 폭력적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파시스트’라는 딱지를 붙이기에는 부족하다. 그런 의미에서 H의 말은 맞다. 르펜은 실제로 사회주의적 레떼르를 구사하면서 노동계급의 적지 않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파시스트적이지 않음'의 증거는 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르펜이 '파시스트적 극우파'라는 훌륭한 방증이다.
 
분명 파시즘이라는 말은 '일반화'되었고, 그러한 남발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것은 본 저서가 겨냥하고 있는 오류들이기도 하다. 첫째는 파시즘을 ‘테러독재’쯤으로 해석하는 견해다. 이것은 전두환 정권 때 쏟아진 ‘파쇼 타도’의 구호에서 잘 나타난다(팩스턴이 한국의 정치사를 연구했다면 더 풍성한 지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민주화운동세력의 담론과 저항에는 정확하고 치밀한 파시즘 담론이 결여되어 있었다. 파시즘은 극악무도한 독재자에게 붙일 만한 명칭에 다름 아니었다. 다시 말해, 파시즘은 경멸어였고 으르렁말이었다.
 
예컨대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대는 파시즘의 시대였는가. 대답은 복잡한 현실을 따를 수밖에 없지만 일단은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 옳을 터이다. 이 대답은 박정희와 전두환에 대한 보다 너그러운 평가를 뜻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만큼 파시즘을 둔 수많은 오해에서 당신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의 경우, 개인적으로는 천황제 파시스트였고 그가 구성하려 했던 체제 역시 파시즘 체제였지만, 의도대로 이뤄지지는 않았다. 3공화국 시절에는 노동정책과 금융정책에도 얼마간 숨통이 트여 있었고, 의회민주주의의 외형도 뭉개지지 않았었다. 유신헌법의 공포 이후에는 조금 더 파시즘 체제에 다가서지만 결정적 요건을 충족하지는 못했다. 제5공화국, 그러니까 전두환시대는 국가에 의한 테러리즘이 위세를 떨쳤으나, 그것은 무식한 군부독재 이상은 아니었다.
 
최근 몇 년동안 유행한 '우리 안의 파시즘', '일상적 파시즘'의 담론도, 파시즘을 폭넓게 정의함으로써 파시즘 아닌 것까지 파시즘으로 규정하는 오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서의 파시즘 역시 일반적인 ‘권위주의’에 가깝다.
 
파시즘 남발의 두 번째 사례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자)가 내놓은 견해, 즉 위기에 부닥친 자본주의가 마련한 돌파구라는 이론에서 발견가능하다. 스탈린이 코뮌테른 석상에서 발설하면서 더욱 더 널리 퍼지며 자리매김한 이 견해는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의 통로를 못 본체하고, 파시즘의 위험을 자본주의에만 떠넘기는 듯하다. 파시즘과 극우파가 다르다는 H의 말은 맞다. 그러나 바로 파시즘과 극우파가 다르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레떼르’를 근거로 르펜이 파시스트가 아니라던 H의 말은 틀렸다.
 
파시즘의 어원은 파스케스(fascec)로, 그것은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시가행진을 할 때 쓰던 나뭇가지 묶음에 싸인 도끼를 일컫는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파스케스가 1914년 이전에 주로 좌파의 상징물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 아이러니를 숙지한다면 파시즘을 추적하는 눈은 훨씬 더 밝아질 수 있다.
 
핵심은 열정과 광기의 대중운동
 
제1차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에서 민족주의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파시즘이 창궐하기에 알맞은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인류의 진보를 성취하는 방법이 기존의 길 바깥에 있다는 문제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19세기에 흐른 피와 땀의 대양을 넘어 20세기의 개막을 맞이한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도 인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 세 가지의 사상과 정파들이 경쟁할 수 있는 무대인 외회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었다. 독재의 가능성이 절대왕정을 비롯한 ‘위로부터의’ 전통적 권위주의 내지는 극빈수탈독재에서 대중운동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개발독재 내지는 전체주의로 옮겨가는 중이었다.
 
▲ 파시즘은 극악무도한 독재가 아니라, 대중의 열정과 광기가 낳은 근현대적 현상이다. 이것을 착각하는 순간 파시즘의 개념은 현실의 맥락 바깥으로 흩어진다.   

파시즘운동은 묘하게도 생일을 가지고 있다. 1919년 3월 23일 일요일에 밀라노의 상공업연맹회의실에서 퇴역군인과 생디컬리스트, 미래파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주역은 무솔리니였다. 퇴역군인이야 그렇다 치고, 생디컬리스트와 미래파 지식인들이 파시즘 탄생의 산파였다는 것이 의외스럽다. 의회에서의 정당활동과 집권으로 자본주의를 개량하려고 했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달리, 생디컬리스트들은 노동조합에 기반을 두고 거대한 총파업으로 체제를 뒤엎으려고 했다.

자본주의를 대하는 이들의 호전성은 세계대전을 거쳐 애국주의와도 결합하며 ‘국가사회주의’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미래파 지식인들도 조금 다른 맥락에서 당시의 자본주의 체제가 처한 위기를 겪으며 강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혁명가들은 ‘파쇼(fascio;묶음)’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사회에 팽배한 불만과 혁명 분위기를 타기 위하여 ‘파시스모(fascismo)’라는 용어를 고안했던 것이다. 초기 파쇼 세력의 일각을 점하던 순결주의자들은 의회주의를 부정했다. 파시즘을 정당이 아닌 운동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확신했고, 자본가와 부르조아 세력을 향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뿐더러 무솔리니나 히틀러 같은 대표적 파시스트들은 자신과 그 일파를 노동자들의 대변자라고 선전하며 과거의 사회주의자 동지들을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파시즘은 사회주의와의 전쟁을 선포하기는 했지만, 그 원동력을 철저히 사회주의적 열망에서 빌려온 셈이다. 파시즘은 반사회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반자본주의적이었다.
 
물론 반자본주의 담론은 순전히 선택적으로 이루어졌다. 파시스트들은 '외국'이나 '적'의 사유재산만을 부정했다. 나찌 독일은 1932년 총선에서 37퍼센트라는 절대적이지 않은 지지율을 기록하지만 점차 절대권력을 확보하는 길에 들어서는데, 그것은 보수엘리트층, 기업인, 종교인들과의 협력으로 얻은 결과였다. 당대의 기득권층은 대중운동으로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준 대가로 파시스트들에게 권력을 내준 것이다.
 
노동계급 역시 자신을 ‘국민’의 일부로 껴안은 파시즘에게 저항하지 않았다. 나찌는 1933년 이후 ‘반사회집단’을 겨냥하여 표면화되고 광범위한 테러를 자행하지만, 이것은 국민에게 불안이 아닌 희망을 주었다. 르네 지라르의 표현에 따르면 ‘속죄양’에 해당할 질적 소수자들은, 고종석이라면 ‘우수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양적 소수자들이기도 했다. 나찌는 공포정책 이외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분열을 이용해서 노동계급의 무력화시켰고, 약간의 이권제공과 여가선용문화의 선도로 국민들을 노예적 안락함에 빠트렸다.
 
어쨌든 ‘혁명’은 계속되었다. 파시즘은 반자본주의적 강령을 슬며시 접으면서 사회경제적 혁명을 비켜갔고, 대신에 ‘영혼의 혁명’으로 애국심을 고취했다. 파시즘은 제 본연인 뜨거운 대중운동 없이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숨을 골라야만 했다. 파시즘을 제멋대로 규명하려는 기존의 학설들을 논파하고 ‘종지부’를 찍어버린 로버트 팩스턴은 이 일련의 과정을 ‘급진화’와 ‘정상화’로 설명한다.
 
황우석신드롬과 뉴라이트가 파시즘이 아니라면
 
파시즘의 주요 필요조건이 대중운동임을 감안한다면 박정희와 개발독재를 다루는 학자들의 논쟁도 이해하기 쉬운 것이다. 박정희는 무솔리니나 히틀러처럼 좌익의 토양에서 자라난 야심가다. 그는 이미 알려졌듯 좌익운동가의 동생이며 남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참고로, 박정희에게 영향을 주었던 일본 2.26 쿠데타의 청년장교들은 기타 잇끼(北一輝)라는 이데올로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일본제 파시즘이 유럽제 파시즘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충만하게 껴안고 있었다. 이는 청년좌익장교 박정희 뿐만 아니라 우익 독재자 박정희에게도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일례로 박정희가 쓴 시 가운데에는 ‘프랑스 시집을 읽는 소녀야/나는 네 고운 손이 밉더라’는 구절이 있다(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실 박정희시대의 요소들은 어느 것이 파시즘이고 자본주의며 사회주의적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만주국은 소비에트연방의 정책을 모방했고, 박정희가 만주국을 본떴다는 측면을 상기하면, 틀에 박힌 좌우 이데올로기로는 박정희시대나 파시즘의 본질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박정희시대는 파시즘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새마을운동이나 압도적 지지율로 통과된 유신헌법이 그 체제의 파쇼성을 증명하기도 하고, ‘강제적 복종이냐, 자발적 동의냐’는 논쟁을 분만키도 하지만, 유신독재는 체육관에 운집한 특권원로들의 지지를 얻어 탄생되었고, 반대로 국민들은 총선에서 야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주었다. 부산·마산의 대규모항쟁과 정권수뇌부의 내분으로 몰락한 유신독재는 정말이지 파시즘답지 않은 결말을 맞이했던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을 관통하며 한국사회는 파시즘체제로 흘러갈 위험을 대부분 덜어냈다. 그러나 오히려 파시즘운동의 조건은 더욱 성숙되었다. 군사정권에 기대어 사회 각 부문에서 전횡을 저지르던 이들은 사회운동의 형식으로 자신의 이해타산을 충족하려 달려들고 있으며, 족벌언론과 독단적 교육세력까지 뛰어든 ‘아래로부터의 흐름’은 민간정부의 기반을 흔들어 놓을 만큼 강력하다. 자유민주주의는 성숙하고 있으나 불황에 부딪힌 사람들은 ‘개혁 없는 개혁피로감’을 앓고 있으며 제 열망을 올인할 대상을 찾아 헤매고 있다.
 
조선일보나 한나라당은 파시스트들인가? 아니다. 이들은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나 히틀러의 독일에서, 파시스트들에게 협력한 ‘보수기득권엘리트층’에 가깝다. 민주정부와 진보진영을 불신하는 국민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은 불신을 표출하고 있다. 나는 이 시대 진정한(!) 파시스트 세력으로 ‘뉴라이트’와 ‘황우석 지킴이’들를 꼽는다.
 
자칭 뉴라이트(실은 신극우세력)는 과거에 극단적인 좌파였다는 점에서, ‘보수기득권엘리트’들(실은 구극우세력)에게 권력을 인수받으려 한다는 점에서, 원조 파시스트들과 빼닮았다. 더구나 이들이 주창하는 ‘보수혁명’은 파시즘운동의 핵심철학이었다. 뉴라이트의 주요 인물들은 학생운동의 전력을 오늘에 되살려 파시즘운동을 풀무질하고 있다.
 
황우석 지킴이들의 사상은 명쾌히 분석되지 않는다. 논문조작의 전모가 드러나지 전까지 수구언론은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노무현 지지자들의 상당수도 황우석을 옹위했다. 민족해방계열의 어떤 인터넷 언론인은 PD수첩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방했다.

이들이 한데 뭉칠 수 있었던 것은, (1차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와 독일을 배회했던) ‘애국주의의 유령’과 ‘새로운 비전을 갈구하는 민중의 뜨거운 열망’ 덕택이었다. 자, 어떤가. 이게 파시즘이 아니라면 무엇이 파시즘인가? 
  
* 2006년 새해 1월 4일 연세대학교에서 <황우석신드롬,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는 주제로 프레시안 강양구 기자와 민주노동당 한재각 연구원의 강연회가 열렸습니다. 본 기사는 주최측인 연세학술단체협의회(가)가 배포한 자료집에 수록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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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1-12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램이 아니라.. 바람 아닌가..

이리스 2006-01-12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자마자.. 어 저거.. 바람인데.. 라고 ㅋㅋ
윽, 그런데 오늘.. 바람은 이제 그만 ㅠ.ㅜ

라주미힌 2006-01-12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외국인 학자의 연구주제까지 된 아파트를 향한 한국인들의 열광
“당신은 몇평에 사나” 처절한 구별짓기의 현장, 보이지 않는 카스트

▣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고현정, 김남주, 김지호, 김현주, 김희애, 송혜교, 신애라, 이영애, 채시라, 최지우, 한가인(가나다 순) 등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이 빼어난 미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다 아파트 광고 모델이다. 대다수 한국인에게 아파트는 꿈이다. 아파트라고 해서 다 같은 아파트가 아니기 때문에 아파트를 향한 꿈은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계속 나래를 펴고, 그 꿈을 인도하기 위해 한국의 미녀들이 총출동한 것이다.

압구정동, 여기가 슬럼가냐?

아파트는 ‘코리언 드림’이다. 그건 한국인에게 진지하고 심각하고 비장한 드림이다. 그런데 외국인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충격을 받는 외국인들도 있다. 네덜란드인으로 단국대 교수인 헨니 사브나이에는 “한국인이 아파트에 살고 싶어하고 그걸 진보라고 여기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특이하다”며 “세계 어디에도 고층 아파트 건물들로 이루어진 마을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서울의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를 본 어느 독일인 교수는 “여기가 서울의 슬럼가냐”고 물어 한국인 안내자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한 도시계획가는 서울 반포의 5천분의 1 축적 지번 약도를 보고선 “한강변의 군사기지 규모는 정말 대단하군”이라고 말했다나.


△ 한국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에도 평수에 따른 차별이 있다. 서울 강남구 포이동 266번지 판자촌 위로 타워팰리스가 솟아 있다. (사진/ 박승화 기자)

대단한 건 통계로도 입증된다. 한국의 아파트 가구율(전국 47.3%, 서울 50.3%, 강남구 75.8%)은 세계 최고다. 70년대부터 한 세대 이상 지속돼온 아파트값 폭등 속도도 세계 최고일 것이다. 그런 ‘세계 최고’라는 위상에 비추어보면, 1994년 서울 아파트 단지의 거대함에 충격을 받은 프랑스 마른라발레대 지리학과 교수 발레리 줄레조가 한국의 아파트를 박사논문의 주제로 삼기로 마음먹은 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아야 했다. 현장답사를 하면서 한국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한국인들은 왜 아파트가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살려면 주택을 수없이 건설해야만 한다는 사실과, 그 많은 아파트를 왜 지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은 제기할 필요도 없다는 점을 이해 못하는 순진파로 취급되어 자주 낙심하기도, 마음을 상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협소한 영토에 인구밀도가 높은 네덜란드나 벨기에에서는 도시 집중화가 대규모 주택 건설을 초래하지 않았으며, 공간이 넉넉한 프랑스에 오히려 대규모 주택 건설이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즉,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것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파트를 향한 한국인들의 열광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라는 연구 주제를 물고 늘어져 지난해 <한국의 아파트 연구>라는 책을 내놓았다. 그는 이 책에서 한국인의 ‘영토 부족에 대한 강박관념’과 더불어 한국인들에게 아파트는 현대적인 삶을 상징했으며, 고도성장의 포드주의적 양산 체제에 더 들어맞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파트는 한국적이다. 한국과 한국인의 특성을 상징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사물을 하나 들라면 그건 단연 아파트일 것이다. 아파트는 처음에 현대성의 상징으로 도입됐다. 1958년 광복 이후 최초로 서울 성북구 종암동에 아파트가 세워졌을 때 준공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역설했던 것도 바로 ‘현대성’이었다. 1964년 마포아파트단지 완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아파트를 현대성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현대성’만으론 부족했다. 1960년대 말까지 아파트에 대한 저항은 완강했다. 정부는 마포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영화까지 제작하게 하는 등 아파트 홍보에 열을 올렸지만, 마당이 없다거나 공동생활의 불편함이 크다는 것 등이 아파트를 꺼리게 만들었다. 양변기마저 기피 사유가 되었다. 아직도 대다수 국민이 화장실 휴지로 신문지를 쓰던 시절 마포아파트의 양변기는 오히려 골칫덩어리였고,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신문지로 막힌 양변기를 뚫느라 바빴다.

아파트에 날개를 달아준 건 ‘돈’이었다. 투기 바람이었다. 60년대 말부터 시작된 정부의 ‘강남 개발’이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정치자금 조달 목적을 위해 강남 개발에 열을 올렸고, 1970년 7월7일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버는 이른바 ‘말죽거리 신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네트워크를 깔기에 가장 적합하다


△ 아파트가 고급화하면서 한국의 미녀들이 총출동해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두산아파트 '위브'의 텔레비전 광고(맨위)와 대우 푸르지오 텔레비전 광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말 그대로 군사작전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 사망자가 77명이나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아파트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아파트는 한국의 군사주의적 초고속 압축성장을 웅변했다. 예컨대, 잠실의 초창기 4개 단지의 건설을 지배한 구호는 ‘주택건설 180일 작전’이었으며, 이 작전은 성공적으로 완수됐다.

한국인들은 군사주의를 혐오하지만, 한국을 세계적인 정보통신 강국으로 떠오르게 만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아파트 대단지가 제공해주는 군사주의적 효율성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으랴. 중앙집중화의 터전 위에 선 아파트 공화국이야말로 네트워크를 깔기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닌가. 반면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교외주거지역의 특성상 인구밀집이 쉽지 않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어 인터넷 보급망에서 한국에 뒤처질 수밖에 없다.

아파트는 한국인 코드의 핵심이다. 한국 사회와 한국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 할 단일성과 밀집성을 아파트가 상징하는 동시에 실제로 구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또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구별짓기’가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 남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소재가 빈약한 아파트 공화국에선 아파트가 가장 중요한 구별짓기 양식이 된다.

별로 믿기지 않겠지만, 아파트 공화국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예견됐던 것이다. 아파트 구별짓기의 제1원칙이라 할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은 수백 년 전부터 ‘민간신앙’의 수준에서 인식됐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산 정약용이 죽기 전 자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이사가지 말고 버텨야 하며,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고 사회적으로 재기하기 어렵다고 신신당부한 동시에 경고했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건재하지 않은가 말이다.

서울 모 대학에 다니는 네팔인 유학생 검비르 만 쉐레스터는 한국인들은 인도와 네팔의 카스트 제도에 대해 놀라면서 비판하지만 자신은 한국 사회의 ‘보이지 않는 카스트’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의 일이다. 선배들은 처음 본 신입생에게 먼저 ‘집이 어디세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방에 산다고 대답했을 때와 강남에 산다고 대답했을 때 선배들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지방에 사는 신입생에게는 더 이상 질문이 없었던 반면 강남 출신 신입생에게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관심을 가졌다.”

서울·지방, 강남·강북 등의 지리적 위치 다음으로 중요한 구별짓기 소재는 아파트 평수다. 일부 지역에선 아파트 평수에 따라 어린아이의 친구들이 구분된다는 건 상식이다. 심지어 한국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에도 아픔이 있다. 평수에 따른 차별 때문이라고 한다. 그 안에도 젊은 독신자와 노인 부부 등을 위한 30평대 이하의 소형 아파트들이 있다. “‘30평 애들하곤 놀지 마’- ‘부의 상징’ 타워팰리스 빈곤층(?)의 비애”라는 제목의 어느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런 이야기다.

고밀도형 민주주의와 인터넷

124평 펜트하우스에 사는 최모군(13)은 “어느날 60평대에 사는 다른 동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는데, 부모님께서 그다지 달가워하는 눈치가 아니어서 그 뒤론 안 데려온다”고 털어놨다. 최군은 “이곳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대치동 D중학교에서도 아파트 평수와 부모의 직업에 따라 친구들이 구분된다”고 말했다. 소형 아파트들이 주로 D·E동에 몰려 있다 보니 “난 이곳(D·E동)에 살지 않는다”며 결백(?)을 증명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D동 20평대 오피스텔에 사는 이아무개(32·여)씨는 “가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사람이 묻지도 않았는데 ‘난 여기에 놀러 온 것뿐’이라고 해명하기도 한다”며 “일부 주민들은 자신이 소형 아파트에 산다고 오해받는 것을 불쾌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별로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런 처절한 구별짓기 욕구가 한국인의 삶에 대한 전투성을 배양시켜 한국의 대외경쟁력을 높여주는 데에 기여했는지도 모르겠다. 20평대에 사는 사람이나 120평대에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고 구별짓기의 효과도 없다면,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할 이유도 약화되지 않을까? 소설가 이외수는 아파트를 “인간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닛”으로 정의했지만, 아파트는 인간을 보관만 해주는 곳이 아니라 욕망이 타오르게끔 관리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누구도 그걸 아파트 체제의 장점이라고 감히 말하진 않는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묘한 나라다. 자본주의에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것과 한국이 ‘경제대국’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함께 손을 잡고 같이 간다. 논리적으로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치의 평화 공존이야말로 한국의 저력(?)이다. 개혁·진보의 이름으로 국가주의를 당당하게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 1960년대 말까지 아파트에 대한 저항은 완강했다. 하지만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건설 뒤 아파트는 '현대성'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사진은 마포아파트단지의 1965년 모습. (사진/ 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

그건 아파트 공화국이 자랑하는 고밀도에서 비롯된 생존 본능은 아닐까? 한국의 민주주의도 고밀도형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고밀도 민주주의는 한국 특유의 온라인 민주주의를 낳았으며, 오프라인에서도 ‘월드컵 열기’나 각종 ‘촛불 시위’에서 보듯 일시에 수많은 군중을 동원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늘 ‘열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높다는 걸 시사한다.

그건 아파트 거주 구조의 전염력이나 압박력이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2년 6월 월드컵 열풍 때에 많은 아파트에 태극기가 내걸린 것은 아파트 관리소와 통반장이 합심해 “태극기를 걸고 주민이 하나됨을 보여주자”며 태극기를 걸지 않은 집을 찾아가 태극기를 걸도록 권유했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이기적 시위를 대량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하다. 아파트는 시위 체험과 방법론을 가르쳐주는 대학이다. 일부 아파트의 반상회가 내부 단합을 통해 집값을 올려놓는 묘기를 선보일 수 있는 것도 고밀도 주거 구조의 파괴력(?)을 잘 말해준다 하겠다.

고밀도 주거구조의 축복이라 할 인터넷은 다시 고밀도 행태를 강화한다. 더 나은 칸막이 속으로 들어가려는 ‘위계의 게임’은 인터넷 시대에 신속한 정보 교환으로 인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인터넷 사이트의 상담 코너에선 ‘투자’ 상담뿐만 아니라 똑같은 강남이라도 어느 학교가 더 좋다는 정보까지 왕성하게 교환되고 있다.

고밀도 민주주의는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따라 하기’를 낳기 마련이고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공연한 불안감을 갖게 만든다. 부동산값 폭등은 경제적인 현상인 동시에 심리적인 현상이다. 사람들이 우우 몰려다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걸 이용해 대박을 터뜨리는 산업이 엄청난 고수익을 올리기에 유리했다는 것이다. 일부 중산층은 물론 정부의 정책 결정자들까지 그 산업의 일원으로 참여한 ‘대박 신드롬’은 빈부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윤수일의 아파트와 당신의 아파트

한국의 1673만 가구 가운데 절반인 841만 가구는 집이 없다. 한국 사회에 대지진을 일으킬 수 있는 빈부 양극화의 진원지는 바로 아파트다. 그러나 우리의 감각은 마비됐다. 이화여대 건축과 교수 임석재의 <건축, 우리의 자화상>에 나오는 아파트 광고 비평은 처음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다가 종국엔 독자를 슬프게 만들고야 만다. 우리의 아파트 중독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강홍구는 “모든 아파트에는 분노와 공포가 창문처럼 매달려 있다”고 했다. 아파트는 아파트의 주인이 아닌 노예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리라. 한국적 삶이 전쟁이라면, 그 전쟁은 우선적으로 아파트의 노예가 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어떤 아파트를 점령하는 순간 당신은 더 나은 아파트를 또 점령하기 위한 임전 태세를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조망권과도 싸워야 하고 발코니와도 싸워야 한다. 윤수일의 ‘아파트’는 아무도 없기에 쓸쓸하다지만, 아직 아파트를 단 한 번도 점령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아파트는 처절하거나 경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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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0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꾹.

라주미힌 2006-01-0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인줄 단번에 알았습니다. ㅎㅎ

딸기 2006-01-07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