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국기에 대한 맹세를 추억함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을 신앙생활처럼 여기던 죽마고우
위대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충성을 다짐케 만든 상징 조작들
'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소련·중국·북한과 같은 ‘현실 사회주의적’ 사회들에 대해 정치학자들은 ‘극단적으로 정치화된 사회’라 말한다. 추수가 ‘수확을 위한 전투’가 되고, 생산은 ‘속도전’과 같은 ‘돌격대’ 방식으로 이뤄지는 등 개인에 대한 정치적인 호명이 모든 분야에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소련이 일상적 생활과 언어를 극단적으로 정치화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데, 1980년대의 말기적인 소련 사회에서는 정치적 언어를 일상에서 잘 쓰지 않았다. ‘사상 학습’에서 ‘지도자의 말씀’들이 인용되고 ‘당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미사여구가 남발돼도 일상적으로는 노망에 든 듯한 브레즈네프 공산당 총서기관과 같은 지도자들은 관심 밖이거나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소련 사회가 낡은 체제를 아래로부터 전복시킬 힘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는 상당 부분 상실해가고 있었다.

국가와 군에 대한 외경의 정서

당시 브레즈네프는 누군가가 써준 연설문조차도 제대로 낭독해내지 못할 만큼 노쇠해 있었는데 그에게 국민은 냉소와 멸시를 보냈다. 이렇게 구체적인 ‘지도자’들이 권위를 잃었지만, 국가나 군사력에 대한 소련 국민의 태도는 마치 독실한 교회 신도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지금도 1980년대 중반에 중학교 동급생들과 나누던 대화가 기억난다. 몇몇 동급생의 형이나 친척 등이 아프간을 침략하는 소련군의 일원으로 아프간에 파견돼 있었다. 한 동급생이 아프간 빨치산들의 ‘무자비함’을 이야기하자 다른 친구가 응수했다. “그 짐승들에게 포로로 잡히느니 수류탄 하나만 남아 있다면 남자답게 그냥 자폭하고 마는 게 낫지. 저 짐승들 죽이고 명예도 세우게 말이야.” 그것은 ‘사상적 건전성’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나온 말로 평범한 소련 청소년의 의식 세계를 잘 반영한다. 브레즈네프가 아프간에 보낸 군대와 ‘나’는 동일시됐으며 ‘전우애, 담력, 희생정신, 조국 사랑’에 대해서는 토를 달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국가와 군대가 도덕적 최고선이었기에 거기서 침략의 불법성이나 잔혹성은 논외로 치부됐다. 소련 군대가 철수되고 침략이 정치적 오류로 판명된 1989년 이후에도 많은 소련인들은 “잘못은 정치인에게, 명예는 우리 전사들에게 있다”는 식의 사고를 했다.


△ "조국과 공산당에 맹세한다!" 2002년 5월 소년 공산당원들이 모스크바 크렘린궁 근처 무명용사의 무덤에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 EPA)

비판적 지식인을 부모로 둔 아이들도 분위기에 휩쓸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필자의 한 죽마고우는 1980년대 말 병영에서의 구타나 자살 사건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자, “조국을 지키는 것이 남자의 의무고 어차피 군대 갈 사람은 가야 하는데, 징병 대상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악질 고참을 막는 방법을 익히게 하자”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간 침략과 같은 만행이 ‘조국을 지키는’ 일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군대’ 같은 단어가 나오면 흥분된 말투로 변했다. 그에게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은 이성의 개입이 불가능한 성(性)이나 신앙생활과 같은 진리와 격정의 세계에 속했던 것이다.

서민을 총알받이로 만들고 고참의 주먹 앞에서 인격과 자존심을 상실케 하는 군대가 어떻게 해서 수많은 이들의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신성한’ 위치를 획득하게 됐는가? 사회경제적인 이유에서부터 성·정치 영역까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예컨대 남성의 ‘군인’ 이미지가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권위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군 사랑’의 이유 중 하나다. 그 외에도 시민사회를 압도한 ‘과대 성장 국가’의 상징 조작도 ‘국가와 군에 대한 외경’의 정서를 체계화하고 유지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을 것이다. 성장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징·의례들이 개인적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없는 내밀한 ‘나만의 세계’에 속하기에 국가의 상징 조작 앞에서 개인은 무력해진다.

그 애국가 가사에 구토를 느끼다

예컨대 남한만큼이나 크고 작은 행사마다 자주 울려퍼졌던 소련 애국가를 생각해보자. 1944년 스탈린의 지시로 제정된 소련 애국가는 ‘위대하고 강력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영원히 무조건 충성을 바칠 우리들’의 이미지를 합치게 한다. ‘나’의 존재를 영원히 기탁해도 될 위대한 조국의 힘…. 우리 무의식의 ‘아버지’ 원형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이 ‘조국의 힘’의 이미지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자란 사람들의 몸에 배게 된다. 1944년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 애국가는 국제 노동운동의 노래 ‘인터내셔널’이었지만, 그 뒤 전세계의 3분의 1이나 장악하게 될 스탈린 제국에는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가 어울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재미있게도 새로운 자본주의적 러시아는 과거 소련 시절의 애국가 음악은 그대로 놔두고 가사만을 ‘상황에 맞게’ 변형시켰다. ‘무조건적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이 보호하는 신성한 우리 조국’이 됐으며, ‘조국에 대한 충성이 우리에게 영원히 힘을 줄 것’으로 돼 있다. 남한의 애국가에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오듯이 푸틴 정권의 새 애국가에는 ‘남쪽 바다부터 북극권까지 놓인 우리의 광활한 숲과 바다’에 대한 긍지가 강조된다. 필자는 이 애국가를 구토가 나는 심정으로 들으며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그러면 그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도 보장받지 못하는 빈민까지도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오늘과 같은 참경에 내몬 상전님들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야 하는가?

애국가는 정교회 신앙이 지배했던 1917년 이전의 러시아의 주기도문을 ‘최고의 신성성 텍스트’로서 대체했지만 이외에도 젊은이들을 ‘선량한 국민’으로 만드는 의례들이 대단히 많았고 개인 생활의 내밀한 부분까지도 개입할 수 있다. 예컨대 1917년 이전의 성탄절을 대체한 소련 국민 최대의 가족적 명절은 신년맞이였다. 가족끼리 신년을 맞이할 때 텔레비전을 켜놓고 밤 12시를 기다리는 것은 소련 체제의 ‘국민다운 습관’으로 자리잡았다. 송구영신의 12시가 되자마자 텔레비전에서 크렘린궁의 커다란 시계가 보이고 모스크바 중심의 붉은광장의 풍경이 보였다. 국가의 중심축이 개인적·가족적 시공간의 중심축까지 돼야 한다는 것은 이 ‘국민다운 습관’의 의미였다. 더군다나 정치적 색채가 지배적인 5월1일의 노동절이나 11월7일의 혁명기념일에는 시위대에 합류하고 군사의 사열대를 보고 애국가의 울려퍼지는 소리에 ‘차렷’ 하고 경건한 표정을 짓는 것은 거의 계절 의례였다.


△ 빨간 깃발에 거수경례를 하고 있는 소년 공산당 여름 캠프의 조회 모습(왼쪽). 군사주의적 색채가 짙은 소련 시대의 포스터(가운데)와 전승기념일 포스터.

군인들이 행진하고 탱크들이 굉음을 내면서 지나가고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그 정치적 명절의 광경은 대다수 소련 국민에게 결정적인 성장기 경험이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행군과 군가 가창대회’란 이름으로 ‘군인답게’ 행진하고 군가를 부르고 군기를 방불케 하는 소년 공산당의 깃발 앞에서 충성의 맹세를 바치고, 고등학생이 되면 정식 교련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 수업 못지않게 중요한 ‘정신교육’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지만 필자는 교련수업 때 자동총을 정해진 시간인 40초 내에 분리·조립하지 못해 교련 교사에게 “자동총도 제대로 분리·조립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할 여자가 어디 있겠냐”라는 질책을 들었다. 당시에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기도 했다. ‘남자의 매력’과 자동총을 다루는 솜씨, ‘남자의 자존심’과 ‘빨간 깃발에 대한 충성 맹세’가 동일시됐기에, 아프간의 양민을 학살한 소련 군인들은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적 상징 세계의 존재가 ‘국민’의 의식을 결정짓는 슬픈 광경이었다.

한때 폐지됐던 교련 수업 부활

대자본들이 그 국적과 무관하게 전세계로 문어발을 뻗치는 요즘 세계에, 미국 학교에서는 ‘국기에 대한 충성의 맹세’가 강조되고, 러시아에서는 한때 폐지됐던 교련 수업이 부활되고, 대한민국에서 대형 스포츠 행사마다 ‘태극기의 바다’와 흥분이 이루어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황우석씨가 한 발언을 좀 바꿔보자면, 자본의 이윤 추구에 국경이 없지만 자본가들은 국민국가의 행정력과 군사력을 필요로 하고 착취 대상자들을 국적별로 유순한 ‘국민’으로 묶어둘 필요를 느낀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저들의 ‘게임 룰’을 그대로 받아들여 ‘신성한 국기’ 앞에서 ‘우리’의 자본을 위해 ‘남’의 나라 노동자를 유사시에 살육할 것을 맹세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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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메커니즘]흘깃 0.013초 “저 남자 멋지네”
이성 호감도 극히 짧은 순간에 판단
2006년 01월 27일 | 글 | 김훈기 기자ㆍ wolfkim@donga.com |
 
바쁜 출근시간 지하철역을 뛰어오르는데 누군가 스쳐 지나간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흘깃 봤을 뿐인데 왠지 기분이 좋아져 다시 돌아본다. 멋있게 생긴 이성이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얼굴을‘정확히’ 파악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최근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인간은 0.013초라는 짧은 시간에 이성이 잘생겼는지 아닌지를 알아차린다고 한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얼굴이다’ ‘그림이다’고 이성적으로 인식하는 시간은 0.2초로 알려져 있다. 상대에 대한 호감, 즉 감성은 이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발생하는 셈이다.

잘생긴 얼굴보면 긍정적 정서 생겨

사진 제공 Baton Rouge School of Computers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심리학과 잉그리드 올슨 교수 연구팀은 고등학교 교과서와 인터넷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의 사진들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 줬다. 올슨 교수는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또는 ‘추하다’고 느낄 수 있는 극단적인 두 종류의 얼굴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실험의 핵심은 사진을 보여 주는 시간이 0.001초 수준으로 매우 짧아 미처 ‘볼 수 없는’ 상태라는 점. 실험 참가자들은 모두 매력적인 얼굴이 제시된 후에 ‘멋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놀랍게도 이런 답변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0.013초.

연구팀은 또 매력적인 얼굴을 보여 준 후 ‘웃음’ ‘행복’ 등 긍정적인 단어와 ‘슬픔’ ‘불행’ 등 부정적인 단어를 제시해 반응을 살폈다. 실험 결과 긍정적인 단어를 더 빨리 인지했다. 매력적인 얼굴 대신 건물을 보여준 실험에서는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심리학회가 발행하는 계간지 ‘이모션(Emotion)’ 최근호에 소개됐다.

서울대 심리학과 김정오 교수는 “사람이 호감을 갖는 것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는 무의식 상태에서 일어난다”며 “잘생긴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져 긍정적인 정서가 유발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찰나의 시간에 뇌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건이 벌어진다는 의미에서 ‘0.001초는 영원이다’라는 말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순간적인 정서 반응에 대한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밝혀지지 않은 상태. 단지 0.001초는 신경세포 하나가 다른 신경세포에 신호를 전달하는 시간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사람이 호감을 갖는 시간에 대한 연구는 ‘시선을 붙잡는 데 성패를 건’ 기업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는 경우.

캐나다 캘리튼대 기테 링가드 교수는 실험참가자들이 홈페이지를 보고 마음에 드는지 를 판단하는 시간이 0.05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내 국제저널 ‘비헤이버 앤드 인포메이션 테크놀로지(BIT)’ 1월호에 소개했다.


홈페이지 여는 순간 호불호 갈려

적외선 이용한 안구 추적장치 안구추적장치는 눈동자에 적외선을 쏘인 후 반사된 빛을 분석해 시선이 모니터에서 움직이는 경로를 포착한다.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시선이 가장 먼저 머무르는 위치를 알아내는 데 사용되고 있다. 사진 제공 AMMA
예를 들어 검색엔진에서 찾은 목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우리의 뇌는 이미 호불호를 감지하고 있다는 것.

아주대 심리학과 언어 및 인지처리실험실 최광일 연구원은 “홈페이지에서 고객을 오래 붙들려면 가장 먼저 시선이 머무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며 “그 내용은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서양인들은 대부분 화면의 왼쪽 윗부분에 먼저 시선을 두며, 검색엔진은 오른쪽 윗부분에 있기를 기대한다고 한다.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회사들로서는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순간적인 감성 자극을 이용한 고전적인 광고 사례는 코카콜라와 팝콘으로 알려져 있다. 1957년 미국의 한 극장에서 영화 화면에 0.0003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코카콜라를 마셔라’ ‘배가 고픈가? 팝콘을 먹어라’ 등의 자막을 넣자 영화가 끝난 후 두 제품의 판매량이 급격히 늘었다는 것. 관객들이 실제로 자막을 읽을 수 없었지만 이 자막이 무의식에 호소해 광고 효과를 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영화에 푹 빠져 있는 관객들이 무의식적으로 작은 글자를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며 “실제로 이 사례는 거짓말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무의식의 영역을 이용한 광고 사례는 이제껏 학계에 보고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0.001초는 영원이다...
시선이 머무르는 곳엔 '영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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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인간아 > 1월 24일 - 커피와 담배 (Coffee And Cigarettes, 2003)

 

주연
로베르토 베니니 Roberto Benigni
케이트 블랑쉐 Cate Blanchett
신쿼 리 Cinque Lee
조이 리 Joie Lee
테일러 미드 Taylor Mead
알프리드 몰리나 Alfred Molina
빌 머레이 Bill Murray
이지 팝 Iggy Pop
윌리암 라이스 William Rice
RZA RZA
톰 웨이츠 Tom Waits
잭 화이트 Jack White
멕 화이트 Meg White
스티븐 라이트 Steven Wright
스티브 부세미 Steve Buscemi
스티브 쿠건 Steve Coogan
이삭 드 번콜 Isaach De Bankole
연출 부문
짐 자무시 Jim Jarmusch 감독
각본 부문
짐 자무시 Jim Jarmusch 각본
촬영 부문
톰 디칠로 Tom DiCillo 촬영
프레더릭 엘머스 Frederick Elmes 촬영
엘렌 쿠라스 Ellen Kuras 촬영
로비 물러 Robby Muller 촬영
제작 부문
그레첸 맥고원 Gretchen McGowan 제작부
스테이시 E. 스미스 Stacey E. Smith 제작부
제이슨 클라오트 Jason Kliot 제작
조안나 비센트 Joana Vicente 제작
프로덕션 디자인 부문
마크 프리드버그 Mark Friedberg 미술
편집 부문
제이 라비노위츠 Jay Rabinowitz 편집

 

커피와 담배가 만나듯, 사람은 무한히 만난다

짐 자무쉬의 능글거리며 고요한 유머를 또 한 번 경험합니다. 뭐랄까, 침묵을 사랑하는 악동 같기도 하고 여전히 뼛속부터 원래 언더였다는 듯한 이미지의 사내 같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입니다. 동양의 참선의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탕자가 돌아오는 길에서 느끼는 회개와 참회와 반성이 담긴 화면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커피와 담배에 대한 짐 자무쉬의 오마쥬입니다. 그가 커피와 담배를 통해 들려주는 깊이 있는 유머를 경험해보세요. 저는, 커피를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흡연자도 아니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좀 아쉽기는 합니다. 담배를 배워볼까 하는 망상도 생기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통해, 커피와 담배의 마력과 매력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으니, 이 영화는 분명, 커피 매니아와 흡연자들에게는 잠언처럼 달콤하고 알싸하고 깊이있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엊나가는 대화와 말들의 파편들에 대해서, 커피와 담배를 마주하고 나누는 두 사람의 균형이 미묘하게 기울어지고 어떻게 다시 역전이 되는가에 대해서,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주고받는 말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떨어져버리고 마는 유성의 아름다운 빛처럼 그의 유머는, 드러납니다. 웃기기는 하는데, 저는 여기에서 미국의 위선과 가식, 여러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짐 자무쉬의 풍자도 보았습니다. 저만의 생각일런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이 영화를 보고나면 카페인과 니코틴에 잘 절여진 영혼이 되어 몽롱하고 황홀해집니다.

 자네 여기 웬일인가/ 쌍둥이/ 캘리포니아 어디엔가/ 담배는 해로워/ 사촌/ 별일 없어/잭이 메기에게 테스라 코일을 선보이다/ 사촌 맞아?/ 사랑의 블랙홀/ 흥분/ 샴페인 의 열한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통해 짐 자무쉬의 뛰어난 각본 연출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들려주는 하나하나의 대사들의 깊이는 대단합니다. 커피도 모르면서, 담배도 모르면서, <커피와 담배>는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담배와 커피> (Cigarettes & Coffee, 1993)라는 작품으로 패러디하기도 했군요. 보고 싶네요. 유쾌하고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물론 단편마다 쪼개어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커피 한 잔 하러 갑니다. 커피를 마시고 잠들면, 꿈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간다고 하는군요.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당신의 점심이, 커피와 담배였던 적은 없습니까?

 

<짐 자무시의 모든 것> - 씨네21에서 옮깁니다.

짐 자무시는 우리에게 이름에 비해 영화의 실체가 덜 알려져 있는 감독이다. 그것은 아마 <브로큰 플라워> 이전까지 만든 8편의 장편영화 중 한국에서 개봉한 그의 영화가 <천국보다 낯선> <데드맨> <고스트 독> 세편뿐이라는 단순하고도 안타까운 사실 때문일 거다. 그러니 그동안 간과되어왔던 그의 나머지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나서야, 간명하면서도 유쾌하고, 유쾌하면서도 탄식어린 자무시의 세계가 좀더 친절히 열릴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자무시에게서 <브로큰 플라워>라는 영화편지 한통을 받았다. 자무시의 전작(과거)을 되돌아보기를 독촉받는 이상한 영화의 아홉 번째 편지를. 그걸 계기로 ‘짐 자무시의 모든 것’을 살펴본다.


니콜라스 레이에게는 그를 따르는 많은 후대 감독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두명의 후배가 있었다. 그의 마지막 생전의 모습을 담은 영화 <물 위의 번개>(1980)를 만들었던 빔 벤더스가 그 한명이고, 니콜라스 레이가 뉴욕대에서 강의할 무렵 그의 조교였으며, 그 인연으로 <물 위의 번개>의 스탭으로까지 참여한 짐 자무시가 나머지 한명이다. 자무시와 벤더스가 서로 알게 된 것도 이때쯤이다. 사실, 자무시의 첫 번째 장편영화 <영원한 휴가>(1980)도 니콜라스 레이 덕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어떤 이들은 <천국보다 낯선>을 자무시의 첫 번째 장편영화로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엄밀히 말해 <천국보다 낯선>은 자무시의 ‘첫 번째 35mm 장편영화’다. 대학 시절 학기 제출용으로 작심하고 만든 77분짜리 16mm 작품 <영원한 휴가>가 그의 첫 번째 장편영화다). 자무시가 파리 시네마테크에 묻혀 일년 내내 영화를 본 뒤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는 학비가 없었다. 하지만 능력있는 그에게 학교는 니콜라스 레이의 조교로 일하라고 추천했고, 그 대가로 졸업 단편을 만들 수 있도록 학비 장학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자무시는 냉큼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학교는 그가 학비를 내기로 약속하고 받은 장학금을 장편영화를 만드는 데에 유용(?)한 죄로, 게다가 “그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죄”로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다. 그의 졸업장은 몇년 뒤에야 우송됐다.

벤더스가 졸업 작품으로 단편 대신 127분짜리 장편 <도시의 여름>을 만든 것처럼, 자무시도 10년 뒤 그런 사고를 똑같이 친 것이다. 여하간 그 이후 자무시는 수없이 많은 인터뷰에서 벤더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질문받았고, 그때마다 그는 “그와 나는 친구이고, 그의 초창기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에게서 받은 영향은 크게 없다”고 잘라 말하기를 반복해야 했다. 벤더스가 영화적 정점을 구가하고 있던 시절, <사물의 상태>를 만들고 나서 남은 40분 정도의 필름을 짐 자무시에게 주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천국보다 낯선>(1984)의 첫 번째 에피소드 ‘신세계’가 만들어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무엇보다도 그들의 계보를 규정하는 증거로 작용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어쨌거나, 그뒤 짐 자무시는 보란 듯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중요한 건 결코 ‘로드무비’라는 틀만큼은 벗어나질 않았다는 거다.

2005년 자무시와 벤더스는 <브로큰 플라워>와 <돈 컴 노킹>이라는 로드무비를 들고 똑같이 칸영화제를 찾았다. 그러나 여기서 자무시는 벤더스와 거의 반대의 결론에 도달해 있다. <돈 컴 노킹>에서 벤더스의 길은 자아를 찾는 길이고, 복구의 길이고, 의미의 길이다. 거기에 비해 자무시의 길은 방기의 길이고, 대상만이 있는 길이고, 해답이 없는 길이다. 의미가 끼어들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봤자 뭔가 바뀔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미정의 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그의 영화적 길 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지판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 무의미성과 미결(未決)을 넉넉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처음부터 순서대로 가보자.

자무시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여행자이거나, 유랑자이거나, 아웃사이더이거나, 이방인이거나, 이민자이거나, 실제 외국인이다. 짐을 꾸려 여행하는 사람들이고, 정서의 처소를 찾지 못해서 이질적으로 떠도는 사람들이고, 중심 문화로 들어서기를 거부하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고, 내 땅이 아닌 남의 땅에서 남의 언어로 사는 사람들이고, 그래서인지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했거나 지금 막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이다. 특히, 초창기 두편의 작품 <영원한 휴가>와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의 모습은 황량함으로 그려져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방랑자예요.” 자무시는 <영원한 휴가>의 주인공 앨리를 그렇게 소개한다. 영화의 내용은 별 게 없다. 찰리 파커를 좋아하는 뉴욕 청년 앨리 파커가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별별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 대화하며 다니는 게 전부다. 고다르식 구성을 염두에 두거나, 오즈를 경외하거나, 브레송 영화의 한 장면을 대놓고 인용하거나 하면서, 아직 시네필의 혈기를 매끈하게 내성화하지 못한 티가 역력하지만, 결국에는 떠돌던 앨리가 마지막 장면에서 무작정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세편의 에피소드로 나눠져 있는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들의 모습은 더 황량하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이제 막 뉴욕에 도착한 에바와 이미 그전에 도착하여 반(半)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촌 윌리의 며칠간의 동거가 이 첫 번째 에피소드 ‘신세계’의 내용 전부다. 원래 단편은 에바가 클리블랜드로 떠나면서 끝난다. 그런데 자무시는 두편의 에피소드 ‘일년 후’와 ‘천국’을 덧붙여 장편으로 만든 것이다. 내용은 윌리와 그의 친구 에디가 에바를 찾아 클리블랜드로 향하고, 거기서 다시 셋이 플로리다로 충동적인 휴가를 떠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의 무위도식하는 삶의 내용을 무미건조한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화적으로 본다면 다소 과대평가받은 면이 있고, 벤더스의 영향을 의심할 만한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미 자무시의 표지판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영화의 첫 장면에 뉴욕에 도착한 에바는 황량한 비행장에 홀로 서 있다. <지상의 밤>에서도 영화는 비행장에서 시작하고, <미스테리 트레인> <데드 맨>에서는 기차가 들어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브로큰 플라워>에 이르러서 에피소드 사이를 잇는 교량 역할로 이륙하는 하늘의 비행기를 연신 보여주는 것은 이런 일관성의 연장이다. 자무시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끊임없이 오고가는 임시성의 장면들을 거쳐야만 한다.

“내 집은 미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외국인이고, 또한 미국인이에요”, “내 자리는 언제나 주변이에요. 만약 내가 어쩌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다면,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닌지 걱정하게 될지도 몰라요”라고 자무시는 말한다(실제로 그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브로큰 플라워>에 쏟아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에 적잖이 불편해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주인공들의 입지는 자무시의 개인적 성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생각에 집은 하나일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정착이 고착이 되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나 사이-공간을 맴돈다.

<영원한 휴가>의 주인공 앨리는 파리행 배를 타기 직전 항구에서 누군가를 만난다. 지금 막 파리에서 뉴욕으로 온 젊은이다. 꼭 파리에서 뉴욕의 앨리처럼 살았을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러니까 한명이 그 자리를 떠나는 ‘그 시각’, 다른 한명이 그 자리로 들어온다. <천국보다 낯선>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에바가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를 탔다고 착각한 윌리가 표를 끊고 출국장 너머로 그녀를 찾으러 들어간다. ‘그 시각’, 에바는 부다페스트는 고사하고 그냥 플로리다 해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다시 모텔로 돌아온다. 영화는 거기서 끝나기 때문에 그뒤로 그들이 서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서도 중심은 ‘그 시각’이다. 그들이 같은 시각에 그 행위를 우연히도 교차했다는 사실뿐이다. 자무시의 영화에 도시의 지명이 곧잘 지정되는 것은 그 자체로 로드무비의 요소인 탓도 있지만, 이런 우연의 행동이 시간적 필연성 안에서 어떻게 동시에 일어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 시각, 여러 곳에서 그들은 뭔가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제각각이다.’ 그게 바로 동시적인 삶에 대한 자무시의 관심이 표명되는 방식이다. 특히나 그 관심사를 풀어냄에 있어 자무시가 편하게 생각하는 것은 에피소드의 선택이다. <다운 바이 로>(1986), <미스테리 트레인>(1989), <지상의 밤>(1991)에서 바로 그 방식이 두드러져 드러난다.

자무시 스스로 “네오-비트-누아르-코미디”, 또는 “동화 같은 상상의 이야기”라고 말한 <다운 바이 로>에서는 이름이 비슷한 두 주인공 잭(Jack)과 잭(Zack)의 각각 따로 흘러가던 동시간대 에피소드가 그들이 함정에 빠져 죄를 뒤집어쓰고 루이지애나 감옥 같은 방으로 들어오면서 하나로 합쳐지고, 여기에 로베르토가 등장하면서 다시 다른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것이 유연하게 에피소드를 합친 예라면, <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은 처음부터 끝까지 에피소드 형식이다. <미스테리 트레인>은 멤피스의 어느 허름한 모텔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혼 아래 접혀진 동시간대 세개의 이야기다. 엘비스를 찾아서 일본에서 건너온 남녀 한쌍, 비행기 사고로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묵어가야 하는 이탈리아 여자, 술김에 사고를 치고 모텔로 숨어든 세명의 남자가 그들이다. 영화는 같은 모텔을 빌려 이 세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준다. 게다가 자무시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재치있는 몇 가지 요소, 특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블루 문>으로 이것이 같은 시각에 겹쳐 일어난 사건임을 알려준다.

다음 영화 <지상의 밤>에서 그 시각, 그 장소의 그 행위는 다섯개로 나뉜다. LA, 뉴욕, 파리, 로마, 헬싱키에서 같은 시각 각각 승객들이 택시를 타고 택시 기사와 벌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LA에서는 나이든 연예인 매니저와 나이 어린 소녀 기사가 만나고, 뉴욕에서는 운전에 미숙한 이민자 기사를 대신해 흑인 손님이 대신 운전하고, 파리에서는 맹인 여자와 흑인 기사의 짧은 교감이 오가고, 로마에서는 신부가 떠버리 기사의 차 안에서 숨지고, 헬싱키에서는 직장에서 쫓겨난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며 함께 술을 퍼마신 승객들에게 그보다 훨씬 더 슬픈 일은 얼마든지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자신의 절절한 이야기를 기사가 들려준다.

<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을 만들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자무시는 한때 문학도였던 그 기질을 발휘해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종려나무>와 제프리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 등에서 이런 형식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건 질문을 위한 대답이다. 사이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는 자로서, 동시간 각기 다른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이고, 그들이 서로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이기 위해서라도 각각의 에피소드는 적절해 보인다. 이쯤에서 자무시는 극중 인물이 한명이라면, 어떻게 그 에피소드 방식을 인물의 삶의 방향에 어울리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 <데드 맨>과 <고스트 독>을 내놓는다.

 

2005-12-07 | 정한석 mapping@cine21.com | 씨네21

‘그 시각’이라는 횡적인 분산을 ‘그 시대’라는 시간의 종적 연속성 안에 끼워넣고 ‘문명 속의 고독’을 생각하는 것이 <데드 맨>(1995)과 <고스트 독>(1999)이다. “완전히 문화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후회없이 자신이 꿈꾸는 생활을 고집스레 끌어나가는 돈키호테를 떠올렸다 돈키호테처럼 고스트 독은 자신의 행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자신의 신념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자무시는 말한다. 그건 <데드 맨>의 주인공 윌리엄 블레이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시대의 돈키호테다.

<데드 맨>과 <고스트 독>은 형제처럼 닮은 영화다. 일단 이 둘은 웨스턴 무비와 갱스터 무비라는 장르를 기점으로 우회한다. 하지만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볼 때 이 두 영화의 닮은꼴은 더 잘 보인다. 영화는 한명의 주인공을 따라 흘러간다. 그들이 만나는 인물들, 사건들은 에피소드처럼 다시금 새로운 국면의 이야기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거기에서 주인공 블레이크와 고스트 독은 이질적인 존재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처음에는 문명인이지만 뒤에는 원주민에 동화되어간다. 야만스러운 것은 원주민이 아니라 이곳을 차지한 문명인이라는 것을 블레이크는 느낀다. 야만적 문명의 개척시대에서 시인의 영혼으로 명명되어 환생한 블레이크(그의 친구 인디언 노바디는 그렇게 믿는다)는 본의 아니게 킬러가 되어 서부를 맴돈다. 그런가 하면 고스트 독은 유령 같은 존재다. 왜냐하면 그는 현대의 규율보다 고대의 규율을 존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가 영혼의 지침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담은 책 <사무라이의 길>이다. 어떤 계기로 그가 사무라이가 되었는지에 대한 증언은 (일부러 영화 속에서) 엇갈리지만, 어쨌든 지금 그는 문명 속의 고대인이다. 그리고 서구인의 육체를 가진 정신적 일본인이다. 흑인 래퍼 차림의 그는 일본식 무사도의 방식으로 삶을 꾸린다. “스즈키 세이준과 장 피에르 멜빌을 참고했지만, 오마주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자무시의 말은 진짜 참고 정도만 했다는 말로 들으면 된다. <데드 맨>과 <고스트 독>에서 주인공들은 문화와 역사를 지시하는 이질적 탐구자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어쩔 수 없는 건 그들이 모두 고독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친구는 있다.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거나 완전히 반대의 자리에 있을 때에만 진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블레이크의 친구는 오직 인디언 노바디이고, 고스트 독의 친구는 말이 통하지 않는 프랑스 이민자 아이스크림 주인청년이다. 하지만 죽음을 옆에 매달고 사는 이들에게 인생은 결국 혼자가 아닌가. 절대의 고독,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과연 이 고독의 실체는 역사와 문화를 휘도는 형이상학적 영화로만 물을 수 있는 몫인가? 자무시는 형이상학의 신화적 세계에서 일상의 미니멀리즘적 세계로 돌아간다.

<커피와 담배>(2003)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쇼>의 청탁으로 1986년에 단편을 만든 게 계기가 됐다. 자무시는 세편까지 뜸하게 만들더니 내처 작정한 듯 연달아 나머지를 만들어 장편으로 늘렸다. 말이 장편이지, 각기 다른 장소의 카페에서 둘셋씩 모여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며 한담하다가 끝나는 10분 내외 11개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사랑스러운 소품이었지만 좀 의심스러웠다. 이거 일상으로 돌아가도 너무 돌아간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런 의심이 들 때쯤 들고 나타난 것이 <브로큰 플라워>(2005)다.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빌 머레이는 <커피와 담배>의 에피소드 중 ‘Delirium’에서 우탕클랜의 RZA, GZA와 한담을 나누는 주방장으로 등장해 자무시 세계의 입문식을 거친 바 있다. 하지만 자무시와 빌 머레이가 <브로큰 플라워>에 합의한 건 그보다 더 오래전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전에 빌 머레이를 염두에 두고 쓰여진 다른 가상의 영화 <하늘에 뜬 세개의 달>(Three Moons in the Sky)의 각본이 먼저 있었다. 한 남자가 각각 세명의 부인과 가정을 따로 갖고 산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각본으로 제작비가 거의 모였을 때쯤 자무시는 생각을 바꿔 2주 반 만에 다른 내용으로 고쳤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지금의 영화 <브로큰 플라워>의 내용이다.

자무시와 머레이는 4년 전 토크쇼에 게스트로 초대되어 서로를 처음 알게 됐는데, 그때의 느낌을 빌 머레이는 재치있게 표현한다. 얼마나 죽이 잘 맞았는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나눴는데 꼭 그동안 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사촌형제를 만난 것처럼 잘 통했다”고 말할 정도다. 그건 자무시도 마찬가지였다. 자무시는 실제 배우를 상정하고 나서야 각본을 쓰는 스타일이다. “내 영화에서 배우들은 항상 출발점을 제시한다. 빈칸이나 채우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느 영화, 어떤 인터뷰를 봐도 그렇게 말한다. <영원한 휴가>는 크리스 파커를, <천국보다 낯선>은 존 루리를, <다운 바이 로>는 톰 웨이츠를, <데드 맨>은 조니 뎁을, <고스트 독>은 포레스트 휘태커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에는 “배우로서 고정되어 있는 빌 머레이의 이면을 보여주기를 원했다”고 한다.

영미권의 평단들이 <브로큰 플라워>를 계기로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짐 자무시가 첫 번째 메인스트림 영화를 만들었다’는 쪽으로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는 이유도 배우들 때문이다. 빌 머레이를 위시하여, 제프리 라이트, 샤론 스톤, 제시카 랭, 프랜시스 콘로이, 틸다 스윈튼, 줄리 델피 등의 화려한 간판급 배역진이 그 증거로 손꼽힌다. 아니 그럼, 조니 뎁, 가브리엘 번, 빌리 밥 손튼, 존 허트, 로버트 미첨, 이기 팝이 나온 <데드 맨>은 간판이 덜 화려했던가. “도대체 왜 메인스트림 운운하는지 모르겠다”는 자무시의 반응은 그래서 이해가 간다. 비교를 하자면 자무시는 커트 코베인이 음악을 생각하듯 영화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자신에 대한 대중의 몰표를 절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두 번째 이유를 찾자면 영화가 쉽고 재미있으며 곳곳에 유머가 넘치는 로맨틱코미디스럽다는 사실 때문이다. 특히 형이상학적 내러티브를 견지한 <데드 맨>과 <고스트 독>, 이 쌍둥이 같은 영화 이후에 나온 것이고, <커피와 담배>보다는 훨씬 더 대중적인 내러티브를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자무시식 로맨틱코미디 정도로 치부되는 건 모함이다. “<데드 맨>에서는 웨스턴 장르를 일종의 틀로 썼다. <고스트 독>에서도 영화의 다른 장르들을 비유하는 인용이었을 뿐이다. 그 점에서 <브로큰 플라워>는 로맨틱코미디도 아니고, 침울하고 비극적인 영화도 아니다. 범주 그 사이의 무언가다.”

<브로큰 플라워>는 9편 장편을 통틀어 백인 중산층이 주인공인 첫 번째 자무시 영화다. 미국사회의 가장자리에서 그 중심부에 사는 인물로 넘어온 것이다. 메인스트림이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만 의미가 있다. 굳이 <브로큰 플라워>의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면, 실마리는 그 이전까지 반복되던 영화들의 요소가 어떻게 흡수, 변주되었는가이다. 자무시는 여전히 인생은 난감하고, 고독은 운명이라는 믿음을 저버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를 피하고자 한다면 이 대목은 영화를 본 뒤 읽으시길)

주인공은 돈(빌 머레이)이다. 그는 그 이름의 의미를 텔레비전 속에서 흘러나오는 흑백영화 <돈 주앙의 모험>을 망연자실 보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도 한때는 돈 주앙처럼 못 말리는 바람둥이였다. 그러나 지금은 동거녀 쉐리(줄리 델피)조차 가정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는 그를 탓하며 기어이 짐을 싸서 나가는 중이다. 그녀는 문 앞에서 분홍색(분홍색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편지 한통을 주워 돈에게 건네주고는 떠나버린다. 20년 전 헤어진 누구인지도 알 길 없는 애인이 보낸 그 편지에는 돈 몰래 낳아서 기른 19살짜리 아들이 지금 그를 찾아 여행을 떠난 것 같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옆집에 사는 절친한 흑인 친구 윈스턴(제프리 라이트)은 편지를 보낸 사람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강권에 못 이겨 돈은 그녀들을 찾아 나선다. 로리타라는 딸과 홀로 사는 로라(샤론 스톤), 잡초 같은 히피 처녀에서 부동산 중개업자의 화초 같은 아내가 된 도라(프랜시스 콘로이), 잘 나가는 변호사에서 동물의사 소통사로 변해 있는 카르멘(제시카 랭), 험상궂은 남정네들과 같이 사는 페니(틸다 스윈튼), 그리고 죽어 땅에 묻힌 미셸 페페의 무덤까지 돌아다닌 뒤 돈은 성과없이 집에 온다. 그런데 어느 날 정말 아들 같은 녀석이 그의 동네를 초조한 눈빛으로 어슬렁거린다. 돈은 그 소년에게 말을 건다. 분명 그 분홍색 편지에는 “그 애가 아버지를 찾아 떠난 게 확실하단 느낌이 들어”라고 적혀 있었다.

먼저 영화의 분위기만을 놓고 설명하자면, <브로큰 플라워>는 완만하고 편안하지만, 궁금증이 동력이 되어 굴러가는 미스터리다. 이 미스터리극을 자무시는 두개의 미니멀리즘 동선으로 그린다. 그 하나는 얼굴 자체가 미니멀리즘인 빌 머레이의 무표정이고, 그 빌 머레이의 무표정을 영화의 무표정한 미니멀리즘 형식이 감싸안고 있다. 여기에 자무시의 키워드들이 변형된 형태로 버팀목이 되고 있다. 돈은 말 그대로 여행자다. 그리고 그 시각, 그 시대에 대한 자무시의 관심은 현재라는 시제로 바뀌어 이 영화의 화두로 자리잡는다.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돈은 한번 만난 사람을 두 번째 만나는 일이 없다. 이미 이 여행길 자체가 다시 만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 여행길에서 만난 옛 애인들은 말 그대로 이미 지나간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과거의 현현이다. 그래서 돈은 또다시 고독한 현재로 돌아온다. 아들같이 생긴 녀석이 눈앞에 나타나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아들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아들 같은 녀석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무시는 마지막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정말 미소년이 돈의 아들일까요? 그렇다면,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돈과 눈이 맞은 못생기고 뚱뚱하고 멍청하게 생긴 저 아이는 돈의 아들이 아니고 누구인가요, 라고. 또다시 판단은 유보되고, 그 순간 카메라는 현기증을 일으키듯 하늘을 한 바퀴 돈다.

<브로큰 플라워>가 독특한 건 모든 정황이 다 펼쳐지는데 그중에서 진실을 밝히는 정황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자무시는 <브로큰 플라워>를 ‘기표의 드라마’라는 구조로 만든다. 그 기표란 분홍색이고, 타자기이고, 복장이고, 개중에는 윈스턴이고, 농구대이다. 로라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녀와 그녀의 딸은 번갈아가며 분홍색 나이트 가운을 입고 있다. 도라를 찾았을 때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는 분홍색 명함을 건넨다. 동물의사 소통사 카르멘의 집 앞에는 농구대(열아홉살의 미국 소년이 즐기는 스포츠가 무엇이겠는가?)가 있고, 그녀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꾼 것은 사랑하는 개 윈스턴(이 여행을 강권한 돈의 흑인 친구 이름)이었고, 그녀는 분홍색 바지를 입고 있다. 네 번째 여자 페니의 집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정황들이 있다. 농구대가 있고, 분홍색 커버가 있는 오토바이(열아홉살의 소년이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이겠는가?)가 있고, 심지어 분홍색 타자기가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페니와 돈 사이의 아들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돈은 분홍색 꽃을 한 다발 사들고 죽은 미셸 페페의 무덤을 방문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도 기표의 드라마는 끝날 줄을 모른다. 윈스턴은 아마 첫 장면에 등장했던 쉐리가 편지를 조작한 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떠날 때 분홍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돈에게 영화 말미에 분홍색 편지를 보낸다. 점점 더 알 길이 없다. 이젠 더 심해진다. 아들처럼 생긴 미소년의 가방에는 분홍색 꼬리표가 달려 있다. 엄마가 부적처럼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그럼 이 녀석이 내 아들 아닌가? 게다가 돈과 그 소년은 생각도 비슷하고, 복장까지 똑같다. 하지만 그 순간 돈과 그 아들로 보이는 소년과 똑같은 복장을 입은 또 다른 소년이 눈앞을 지나간다.

<브로큰 플라워>의 기표들은 기의를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뭔가 있음을 밝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만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맥거핀들이다. 자무시는 기표를 모아 뭔가 해보려 하지 않고, 그냥 기표 자체의 너저분한 널림으로 놓아둬버림으로써 만 가지 가능성을 갖게 한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이다. 돈의 여행은 끝없이 이 몇 가지 기표들을 따라 옮겨다니는 의식의 여행이다. 애타게 기표를 쫓아다닐 뿐이다.

짐 자무시의 로드무비가 해답이 없는 길이라는 것은 기표의 드라마로만 구축되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휴가>의 파리가 그것이고, <천국보다 낯선>의 플로리다가 그것이고, <다운 바이 로>의 두 갈래 길이 그것이고, <미스테리 트레인>의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것이고, <지상의 밤>의 시계가 그것이고, <데드 맨>의 담배가 그것이고, <고스트 독>의 <사무라이의 길>이라는 책이 그것이고, <커피와 담배>의 커피와 담배가 그것이다. “플롯을 먼저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두렵게 합니다. 그보다는 과정 안에 뭔가 있다는 것이 나를 더 흥분시키죠. 내가 원하는 것은 이야기를 찾기보다 디테일을 첨가하고 모아서 퍼즐이나 그 이야기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기표의 드라마는 이런 창작의 습성과도 관계가 있는 셈이다.

짐 자무시의 영화에 사실은 있지만 진실은 없다. 때문에 조급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계는 아예 정해져 있지 않은 것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소개하자면 그건 명상이다. 자무시는 ‘명상의 영화’를 만든다. 명상의 영화를 만들지, 성찰이나 통찰의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가령 성찰의 영화를 만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를 보고 나서는 무언가에 대해 열심히 반성해야 하는 책임

아닌 책임이 주어진다. 그러나 자무시의 영화는 잘 모르겠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깊이 그냥 거기에 생각을 적시면 된다. 옳고 그르고, 공감하고 아니고는 그 다음이다. 보고나서 아주아주 맑은 명상에 깊이 잠기면 되는 것이다. 그게 <브로큰 플라워>의 여행길이 인도하는 무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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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1-09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글/최준영 yiyagy@naver.com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프랑스산 와인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문외한인 제게도 ‘보졸레 누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들리겠습니까. 혹자는 이를 두고 우리 사회의 선진화를 얘기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부유층의 전유물이던 와인이 대중화 되고 있다니 그닥 부정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프랑스산 와인이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는데 반해 같은 프랑스산이면서도 아직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있습니다. ‘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가 그것입니다.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는, 숙성 기간이 11년이나 된 데다 비싼 가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지식인들로부터 동시에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대체 뭡니까?

지난 연말부터, 거세게 휘몰아쳤던 황우석 광풍과 정치권의 이전투구를 목도하면서 저는 뜬금없이 ‘홍세화표 와인, 똘레랑스’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땅에 파종된 지 어느덧 11년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새삼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종래 갈증이기도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물 대신 와인을 마신다지요. 그들에게 똘레랑스는 숱한 역사적 질곡 속에서 피어난 인동초와 같은 의미라지요. 돌이켜보면,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운 현대사의 한 대목만 떠올려 봐도 우리 역시 프랑스 못지않은 역사적 질곡을 경험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아직도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줄 ‘와인’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까?

홍세화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를 통해 우리 사회에 ‘똘레랑스’를 전파한 게 어느덧 11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설파했던 ‘똘레랑스’는 그닥 어렵거나 복잡한 논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실천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차분하게 그 의미를 음미해보라고 권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종래 그 속삭임이 작은 물결이 되어 우리사회의 무식성과 배타성에 경종을 울리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es respecter).”

이 말은 프랑스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잔디를 밟지 말라’는 뜻의 푯말이라고 합니다. 홍세화가 설명하는 똘레랑스가 바로 이것입니다. ‘먼저 존중함으로써 비로소 존중받는 것’ 말입니다. 그의 말을 좀 더 들어보면 그 의미가 더욱 쉽게 이해됩니다.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른 사람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당신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홍세화의 잔잔한 외침이 우리의 막힌 귀를 뚫어주고, 감긴 눈을 뜨게 했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억압된 체제 속에 박제되어버린 양심을 일깨우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던 듯합니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책세상)의 저자 하승우는 홍세화표 똘레랑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의 규칙을 지키자’는 홍세화식 똘레랑스는 의도의 순수성만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실천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명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순진한 똘레랑스’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이어 그는 허버트 마르쿠제의 입을 빌어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홍세화식 ‘똘레랑스’(순진한 똘레랑스)가 아닌 ‘차별하는 똘레랑스’라고 주장합니다. 즉,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선전할 수단을 갖지 못한 채 기성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게임을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인 것이지요.

이쯤 되면 오히려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똘레랑스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 말입니다.

『지식의 발견』(그린비)의 저자 고명섭은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전제한 뒤 “똘레랑스는 라틴어 ‘tolerare’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참다’ ‘견디다’를 뜻하는 것으로 ‘관용’이라는 다소 권위적인 뉘앙스가 깃든 말보다는 ‘견딤’이나 ‘용인’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덧붙여,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통해 하승우의 설명을 들으면 그 의미가 비로소 가깝게 다가옵니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intolerance)’와 짝을 이루고 있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똘레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극단주의나 이기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질타합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성적으로 논쟁할 것을 요구하는 똘레랑스가 논쟁을 얼버무리거나 대립하는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변했다. 나를 다스리는 기준이어야 할 똘레랑스가 남을 비방하는 기준으로 변질되었다.”

한편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형성되기까지의 역사적·철학사적 과정을 짚어보면 철학자 김용석의 ‘사랑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이며, 이해는 철학적 차원, 용서(어떤 의미에선 똘레랑스로 해석될 수도 있는)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두 글자의 철학』중에서)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똘레랑스는 지긋지긋했던 종교전쟁의 산물이며, 숱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이자 교훈이기도 합니다. 명예혁명을 경험했던 존 로크, 억울한 죽음을 변호(칼라스의 억울한 죽음)했던 볼테르(공공의 질서와 안전을 해치지 않는 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산업 혁명기를 살았던 존 스튜어트 밀(여론의 억압을 비판하고 소수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주장), 혼란스러운 1960년대(68혁명)를 살았던 카를 포퍼(비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사회제도를 건설하는 것)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똘레랑스의 의미를 창조한 사람들입니다.

마르크스 역시 ‘고타강령 비판’에서 “양심의 자유가 종교 영역을 넘어서 사회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종교라는 도깨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똘레랑스를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똘레랑스를 실천적 과제로 부각시킨 사람은 그람시였습니다.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진지전’(반대 ‘기동전’)을 주장했던 그람시는 “진지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길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에서 출발해 그 상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파했으며 또한 “진보적인 사람은 논쟁 상대의 견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상대의 입장과 논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광신에서 벗어나는 길”이라고 봤습니다.

서양 철학사를 수놓은 숱한 사상가들의 ‘똘레랑스’론(論)을 되짚던 하승우는 다시 홍세화에게로 넘어와 그의 ‘순진한 똘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합니다. 일정부분 홍세화의 차분한 주장에 수긍하면서, 요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지요.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치’의 기치 하에 뭉친 다양한 시민사회의 대안공간들입니다. 얼핏 아나키즘을 연상케 하는 자치공간의 전범은 우연찮게도 프랑스에서 발견됩니다. 프랑스의 살아있는 성인 피에르 신부의 ‘에마우스Emmaus운동’이 그 예인 것이지요.

“자치는 대중으로 하여금 외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권력과 맞서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운동은 대중을 지도하고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대중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극빈자를 위한 ‘에마우스Emmaus’운동을 창시한 피에르 신부는 절망에 빠진 한 살인자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고, 그 살인자는 신부에게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만나서 대화하고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낸 것이다.”(시어도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 재인용)

프랑스 사람이면 누구나 즐긴다는 와인, 그 와인의 달콤쌉싸름한 맛을 뒤로 물리고 대신 손에 망치와 삽을 든 빈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빈집과 공터를 찾아다니는 피에르 신부의 표정은 종래 해맑은 웃음입니다. 그 ‘웃음’이야 말로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쓴 하승우가 천착하는 실천적 똘레랑스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진보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맞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런 진보적인 삶이 불편하고 귀찮아 피하려 하고, 지식인은 그것이 옳다며 강요하려 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단단히 밀착시키는 힘은 웃음이다.”

올해에는 제발 헛된 희망에 넋을 놓지 말고 소박하나마 현재의 삶 속에서 웃음을 만들며 서로의 어깨를 겯고 틀며 더불어 사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게 바로 11년 숙성의 홍세화표 와인을 즐기는 법이려니 싶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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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시라노'(블로그 보기-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지만 아직 작가라는 이름을 갖기엔 부족한 게 많다고 판단, 현재 책읽기와 습작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경기방송(FM99.9Mhz)에서 책소개 코너를 진행하는가 하면, 각종 월간지에 서평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한 ‘성 프란시스 대학’에서 작문강좌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시라노의 주책잡기>는 책(冊)과 술(酒)을 좋아하는, 그러니까 ‘고즈넉함’과 ‘질펀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시라노의 인생이야기’라는 뜻입니다.

 

http://www.yes24.com/home/chyes/07_ReaderColumn_Review.asp?class=yiya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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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빠'는 어떻게 파시즘의 도래를 예고하는가"  

  [화제의 신간] 빌헬름 라히이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파시즘 연구의 역사에서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할 책이 새롭게 번역, 출간됐다. 빌헬름 라이히가 쓴 〈파시즘의 대중심리〉(황선길 옮김, 그린비, 2005)가 그것이다. 독일어로 쓰인 초판이 1933년에 출간되었으니까, 독일의 나치당이 급성장하고 집권에 성공한 1930년대 초, 바로 그 현장에서 집필된 것이나 다름없는 책이다. 동시대에 대한 연구가 그로부터 70년 이상 지난 지금에도 고전으로 꼽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 바, 이 책이 갖는 연구사적 가치에 대해선 달리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연구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의 황우석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이 파시즘이란 용어를 자주 불러들이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영웅을 넘어 우상을 만들어냈고, 이제 그것이 무너지면서 감당할 수 없는 공허함 때문에 비합리적 공황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러한 진단이 분명 지나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한국 사회 역시 이 책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다.
  
  병리적 사회심리와 파시즘
  
  라이히가 강조하듯이, 대중운동의 형태를 띤 파시즘은 반동적인 성격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기득권 질서에 대한 하급 중산층의 반역적 열정이 결합된 급진적 내용이 함께 있다. 초기 파시즘 운동이 보수적으로 타락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좌파 정당에 대한 혐오, 노동운동에 대한 적대, 유태인에 대한 공격성이다. 사회구성을 우생학의 관점에서 바꿔 보려는 것도 파시즘의 한 특징이며, 여기에 덧붙여 퓌러(Führer)라고 하는, 우리말로는 영웅적 지도자에 대해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자 하는 대중심리가 동원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파시즘을 과거 독일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서 나타났던 예외적이고 일시적인 사태라고 생각한다면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살아있는 파시즘 연구의 총결산자"로 불리는 로버트 팩스턴 교수가 강조하듯이(〈파시즘〉, 조효제 옮김, 교양인, 2004), 파시즘은 민주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도전이자, 민주주의가 사회적 요구와 갈등을 통합해가는 데 있어서 실패할 때 나타나는 일상적 위험요인이란 점이 강조되어야겠다. 홉스봄을 잇는 차세대 유럽역사 연구자인 마크 매짜와(Mark Mazower) 교수가 〈암흑의 대륙〉(Vintage Book, 1998; 후마니타스 근간)에서 강조했듯이, 파시즘은 당시 프랑스, 영국을 포함 유럽의 중산층들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발전모델"로 광범하게 지지를 받았던 대안이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파시즘과 유사한 특징이 표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바 있다. 한 가지 더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귄터 그라스와 피에르 부르디외는 대담에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보수혁명이 진보적 동원의 뉘앙스를 풍기면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역사상 이런 예는 1930년대 파시즘에 이어 두 번째라고 말했다. 지금 정부의 정책기조가 신자유주의라는 보수혁명의 내용을 가지면서도 이런저런 개혁의 수사를 동원해 뭔가 큰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듯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더 주목된다.
  
  노무현 지지자들은 어떻게 파시즘의 징후를 보여주는가
    
  
ⓒ프레시안  
  

  한편으로는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는 듯한 외피를 쓰면서도 실제로는 정부 정책의 성격이 민중적 내용과 배치되는 상황에서 그 간격을 상당수 대중들이 진보파에 대한 공격과 황우석 비판자에 대한 공격으로 채우고 있는 현실은 아주 위험하다.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노무현 지지자들 중 일부가 황우석 사태의 책임을 묻는 비판자들에 대해 보여준 태도이다.
  
  기본적으로 이들이 황우석 교수의 비판자를 대면하는 방식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자들을 대면하는 방식의 복제판에 가깝다. 분명 안티조선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냉전반공의 기득권 세력의 집권을 저지하고 노무현 정부의 집권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던 이들에게서 점차 두드러진 것은 진보세력에 대한 혐오, 조직 노동운동에 대한 반감, 이데올로기화된 반(反)지역주의, 나아가 핍박받는 지도자와 영웅을 자기 동일시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서 과거와 같은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을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파시즘을 사회심리적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되고, 한국 사회가 파시즘과 같은 국가 사회체제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면 다소 비약일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란 비판이 오히려 비합리적 논란을 가져오는 부작용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꼭 파시즘이냐 아니냐를 떠나 한국 사회가 지금 민주화의 여러 과제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왜곡되고, 사회가 발전시켜야 할 공동체적 요소는 더욱 파괴되고, 연대와 공존의 가치들이 약화되면서, 그러는 사이 파시즘과 유사한 병리적 사회현상이 제어되지 않고 우리 사회에 스며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비판적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왜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비합리적이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열정에 스스로를 내맡기게 되었을까? 이런 질문을 갖는 독자라면 응당 빌헬름 라이히의 이 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속류적 해석을 경계해야
  
  이 책을 정확히 소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실 잘못된 소개는 책에 대한 이해를 돕기는커녕 책으로부터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 쉽다. 아마도 이 책만큼 부적절한 소개 내지 잘못된 독해에 의해 그 가치가 절하된 책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산당 내부에서 그의 출판물 배부가 금지되고 결국 당에서 축출되었으며, 국제적 방랑생활 끝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한 감옥에서 사망한 빌헬름 라이히의 삶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안타깝게도 이 책에 대한 협애한 이해 방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더 그렇게 보인다.
  
  이 책의 특징을 소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에 대한 라이히의 비판을 강조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사회경제적 조건과 역행하는 이데올로기의 운동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발견에 주목할 수도 있으며, 프로이트적 심리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연원으로부터 발전한 그의 생체심리학의 구조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그가 왜 성정치학과 성경제학에 몰두하게 되었는지 아울러 이해해볼 수도 있겠다.
  
  나아가 이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구성하는 권위주의적 가족이데올로기, 인종주의, 신비주의, 국가주의 등에 대한 그의 비판적 분석을 요약할 수도 있겠고, 그의 연구를 둘러싼 당시의 논란을 통해 공산당을 비롯한 파시즘 비판세력 안에서의 과도한 도덕적 엄숙주의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그의 책이 미친 연구사적 영향에 대해서도 추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 대해 후속 연구들이 개진한 여러 비판들을 검토하면서 라이히의 이론과 설명이 갖는 강점과 약점을 균형 있게 따져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라이히에 대한 대중적 소개에서 이런 논의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 책에 대한 속류적 이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 책이 파시즘은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대중들의 비합리적 성격구조 때문에 파시즘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몇몇 문장과 자구를 뜯어 맞추면, 이러한 독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라이히 책의 전체적 논의구조로부터 분리된 이러한 독해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 무모한 일이다. 이런 속류적 해석을 따르게 되면 전통적 가부장주의도 파시즘이 되고, 스포츠 응원에서 나타나는 대중적 열광도 파시즘이 되며, 민중주의와 같은 정치적 대중동원도 파시즘이 되고, 사회운동도 민주정치도 모두 미시 파시즘의 혐의를 받게 된다. 그야말로 파시즘이라는 용어가 무제한적으로 범용되는 일이 가능해지거나, 때에 따라선 라이히가 성욕 개방론자 비슷한 뉘앙스로 만들어지거나 대중의 집단행동을 경계하는 이론가의 이미지를 갖게 되기도 한다.
  
  속류적 해석에 따르게 되면 당장 독일과 이태리, 일본이 특별히 성적 억압이 강해서 파시즘이 승리한 것인지, 왜 유사한 성적 억압이 있었던 다른 나라에서는 파시즘이 성공하지 못했는지 등의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대중의 비합리성을 강조하는 수많은 보수적 해석 속에 이 책 역시 무의미하게 묻히게 된다. 그 결과 노동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살아 숨쉬고, 도착적 욕구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원초적 사랑이 복원되기를 추구하는 사회주의자 라이히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파시즘에 대한 여러 고전적 접근 중에서 이 책이 갖는 진정한 강점은 우리의 인식지평 너머로 실종되고 만다. 라이히의 논의가 이렇게 단순한 것이라면 한나 아렌트나 푸코와 같은 사상가들이 이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이 분석하려는 것은 파시즘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대중의 심리 상태에 대한 것이다. 대중심리, 곧 인간의 심성구조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라이히의 독창적인 작업은 프로이트적인 접근의 핵심 개념인 무의식의 세계, 그 다음에 정치경제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에 의해 영향받는 더 깊은 '생물학적 하부구조'의 존재를 밝히고자 하는 데 있다. 라이히가 강조하듯이 "좋은 사회적 조건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이 가장 깊은 핵심에서 근본적으로 정직하고, 부지런하며, 협동적이며, 사랑을 하고 있는 동물,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 합리적으로 증오를 표출하는 동물이 될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 "교양의 가면을 벗기면, 자연스런 사회성이 아니라 도착적이고 가학적인 성격층만이 우세를 점"하게 된다.
  
  요컨대 라이히가 밝히고자 한 것은, 자본주의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사회조직의 원초적이고 노동민주주의적인 형태가 붕괴"될 때 무의식이라고 하는 2차적 욕구의 층에서 인간의 심성은 어떻게 도착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변형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성격구조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집단화되면서 파시즘적인 사회구조를 어떻게 재생산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려는 데 있다. 결국 우리가 천착해야 할 것은 성의 사회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지 사회의 성적 측면에 대한 것이 아니다.
  
  확실히 라이히에 대한 속류적 해석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이 책은 다른 사람의 소개나 평가에 의존하는 일없이 직접 독서되어야 할 것이다.
  
  발전모델로서 생명공학 산업화론이 갖는 위험성
  
  사회적 관점을 강조하는 참에 새로운 발전모델로 신봉되는 '생명공학론' 혹은 '생명과학 산업화론'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사실 생명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이 덜 발달해서 인간 사회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기존의 의료기술의 혜택을 폭넓게 받을 수 없는 사회구조의 불평등이다. 신용불량자의 불행한 처지로 떨어진 사람들의 상당수가 의료비 부담 때문인 현실에서, 인간과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은 평등의 문제이다. 평등하지 않으면 가난한 자가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로울 수 없으면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은 약해지며, 결국 사회는 병들게 된다. 의료산업화, 생명과학 산업화에 엄청난 국가예산을 쏟아 설령 뭔가 엄청난 기술이 개발된다 한들 산업화 논리의 귀결은 가난한 다수를 여전히 혜택에서 배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라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 문제를 그들만의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보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여러 조건을 향유하게 하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사회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 개발에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도구적 관점이 더 커져버린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자극되는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한 복수의식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비극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에 의해 대중의 심성 구조가 반사회적인 방향으로 파괴되면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닌가 싶다. 모두가 경제와 기술 발전의 혜택을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사회에서 불안과 소외는 일상화될 수밖에 없으며, 그러는 사이 인간의 내면과 자아가 황폐해지고 공허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조건에서 자신의 문제를 자기 외부의 누군가에게 전가하려는 사회심리적 조건은 커지게 되고, 탁월함이라고 하는 귀족주의적 가치가 숭상되고, 그러한 능력을 갖는 영웅의 출현으로 모든 문제가 일거에 해결되기를 기대하는 병리적 현상이 만들어지게 된다. 집권 개혁파의 신자유주의적 타락이 우리사회의 불행을 심화시키는 현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기원이 이처럼 사회적이고 정치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정부가 검찰의 조사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더 참담하다.
  
  이런 고통과 참담은 라이히의 이 책을 읽을수록 더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인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개선해야 할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대가를 얻게 된다면 그야말로 좋은 거래가 아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좋은 서평보다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수천 배 더 나은 일이다.  

  박상훈/후마니타스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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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겜보이 2006-01-21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 :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의 문제에 대한 접근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사회라면 장애인이나 난치병 환자 문제를 그들만의 불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문제로 보고, 이들이 인간으로서 필요한 여러 조건을 향유하게 하면서 사회 속에서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것에 더 많은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기술을 발전시켜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반사회적이고, 반자연적이며,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장애인과 난치병 환자를 포함해 인간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커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첨단 기술 개발에 인간과 사회의 구원을 의탁하려는 도구적 관점이 더 커져버린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속에서 자극되는 것은 반대자나 비판자에 대한 복수의식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