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두 사람을 겨냥한 부자신문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강연과 고별사에서 언론을 ‘조준’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장은 외교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언론이 감시견(犬)도 아닌 권력 쟁취견이 되려 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조 수석의 고별사는 더 했습니다. 듣기에 따라서는 시원함을 느낄 분들이 계실 터입니다. 분명 수구언론에 ‘보수 우익의 완장을 차고 국민을 호도하는 광신적 색깔론자들’이 포진해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따라서 부자신문의 두 사람 공격에 가세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저 자신 줄기차게 수구논객들의 허위의식을 비판해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가령 조 전 수석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해 놓은 일도 정말 많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불평뿐이다. 참여정부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물어보면 정확한 답도 없다. 단지 인상적이고 감정적인 불만들이다. 불평만 늘어놓는 그들에게 다시 되묻는다. 대통령만 덜렁 뽑아 놓고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조 전 수석의 글이라고 믿어지지 않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분명했습니다. 더구나 그가 기고한 글에는 다음과 같은 더 충격적인 사실이 담겨있었습니다. 며칠 전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갑작스런 질문을 했답니다.

“조 수석, 내가 요즘 제일 해보고 싶은 게 뭔지 아세요?”

대통령은 “야당”이라고 스스로 답했고, 조 전 수석은 순간적으로 “저두요. 비판 좀 한 번 해봤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답니다. 대통령은 “아주 멋지게 한 번 밀어주고 싶다”고 말을 받았다지요.

참, 대단한 분들입니다. 청와대 대통령 자리에 앉아 야당을 하고 싶다는 말이나, 그래서 집권당을 ‘멋지게 한 번 밀어주고 싶다’는 발언에서 ‘한나라당과 대연정’ 구상이 아직도 잠복해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야당을 하고 싶은 대통령이 서울 광화문 뒤에 있습니다. 그와 그의 참모들은 한나라당과 대연정 구상이 아직도 옳았다고 고집합니다. 조 전 수석은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었다. 주인이 된 국민이 권력을 행사해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체 어떤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었다는 걸까요?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권력 이양’을 거론한 것은 사실입니다. “권력은 이미 시장에 넘어갔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민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요? 칠순 가깝도록 평생 소작농으로 살아온 농부를 국회 앞 아스팔트에서 때려죽인 공권력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살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데도 되레 비정규직을 늘리는 법안을 고집하고 있는 정부는. 스크린쿼터협상은 물론이고 주한미군 ‘전략유연성’ 합의에서 미국에 자발적으로 끌려가는 정부는. 지금 이 순간도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 양극화해소를 거론하는 모순을 걷고 있는 정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지지율 하락을 언론과 야당 탓으로 돌리고 있는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에게 대체 어떻게 하면 진실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귀를 꼭 막고 있는 그들을, 마치 자신들이 핍박받는 듯 착각하고 있는 저 권력자들을, 언제까지 바라만 보아야 할까요?

“대통령만 덜렁 뽑아 놓고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노 대통령 ‘측근’이 민주시민에게 던진 그 물음을 곰곰 되새겨 볼 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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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6-02-18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정말 골때린다.
내가 봐도 놈현은 대통령 그릇이 안돼.
 

경찰폭력뿌리뽑기 프로젝트

우리가 겪은 대통령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보면 그저 쪽팔려서 못 살겠다는 생각뿐이지만, '싸가지' 면에선 지금 대통령이 으뜸이다. 그는 이를테면 경찰이 사람을 쳐 죽인 일로 사과한다고 나와서는 "시민사회가 폭력시위를 방관하고 있다"고 뇌까리는 인물이다. 그런 대통령이 있으니 경찰폭력이 지속되는 건 당연한 일. 내 청년 시절 그 무지스런 백골단과 수없이 싸워봤지만 요즘 전경들 방패는 정말이지 새롭게 섬뜩하더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경찰폭력 뿌리뽑기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꼭들 읽어보시라. 우리는 언제 목에 방패가 날아들지 모르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

경찰폭력뿌리뽑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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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스크린쿼터'는 대선공약이었다


‘인터넷 패권주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통 매체들이 인터넷에 굴복하고 있다. 인터넷의 강점은 무엇인가? 유통 파워다. 자체의 콘텐츠 생산 능력으로 보자면 인터넷 포털업체는 신문사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감히 비교를 하는 것 자체가 신문사에 대한 모독이다. 그럼에도 신문사들이 포털에 납작 엎드린 이유는 우리 시대의 대중이 ‘접속’을 의식주(衣食住)에 이은 삶의 4대 요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접속’의 흔적인 댓글마저도 콘텐츠로 축적되는 세상이다. 우리 시대의 콘텐츠는 동어반복이다. 남들이 관심을 갖기 때문에 관심을 갖는다. 검색 순위에서 밀려나면 있어도 없는 게 된다. 빼어난 콘텐츠는 반드시 빛을 보게 돼 있다는 속설은 믿지 않는 게 좋다. 콘텐츠는 기본일 뿐, 대중은 주류 유통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콘텐츠를 만날 길이 없다.

●정부 고충 있겠지만 방식이 비겁

인터넷을 기반으로 삼은 신경제의 문법은 오프라인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유통산업의 거대화는 유통을 엔터테인먼트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백화점과 할인점 애용자들이 단지 상품 콘텐츠 때문에만 그곳을 찾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재래시장에선 찾을 수 없는 편의와 쾌락을 동시에 즐기고자 한다.

사정이 그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콘텐츠 파워에 대한 신앙은 여전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유통 권력에 대해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스타는 콘텐츠 스타다. 영화배우 이름은 알아도 제작ㆍ배급사 이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베스트셀러 작가 이름은 알아도 출판사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지키기 투쟁에 대중이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영화인들의 책임도 있다. 극소수 영화가 ‘대박’이 터질 때마다 대박 관련 영화인들은 “대다수 영화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했어야 했다. 인터뷰를 하는 기자들에게 사정을 해서라도 다른 다수 영화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널리 알려지게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좋은 홍보 기회를 다 놓치고 말았다.

대중은 영화시장에서 유통 권력이 누리는 괴력에 별 관심이 없다. 자신이 최근 본 영화들이 대부분 한국영화였다는 기억만으로 콘텐츠 파워를 신봉하는 것이다. 정부는 그 점을 노리고 ‘왕의 남자’라는 대박 분위기를 이용해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을 발표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방식이 비겁했다. 지원책이라고 내놓은 것도 엉터리였다.

스크린쿼터제가 없어진다 해도 ‘왕의 남자’와 같은 대박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과 경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인들이 염려하는 건 영화산업 전체다. 정부가 그 염려를 인정하고 수용하면서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다면, 영화인들이 지금처럼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선 사과하면서 격려했어야

묘한 일이다. 유사 이래 현 정권처럼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쓴 정권도 없었건만 왜 이리 진정성 없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려 드는지 말이다. 스크린쿼터제 사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기에 그걸 뒤엎고자 한다면 더욱 진정성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닐까?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졌다는 이유는 너무 궁색하다. 대선공약이 나온 2002년에도 국산영화의 시장점유율은 48.3%였다. 아니면 대선 땐 몰랐는데 이젠 스크린쿼터제 사수가 영화인들의 ‘집단 이기주의’에 불과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든가 하는 무슨 해명이라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노 정권에게 최소한의 염치라는 게 있다면, “영화인들의 주장이 타당하지만, 형편이 이리 됐으니 죄송하게 됐다, 우리 한번 최선을 다해 미국 영화들과 붙어보자”고 사과하면서 격려했어야 했던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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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 말


마루 : 하늘의 우리말

아라 : 바다의 우리말

희나리 : 마른장작 의 우리말

씨밀레 : 영원한 친구 의 우리말

벗 : 친구의 순수 우리말

숯 : 신선한 힘

한울 : 한은 바른, 진실한, 가득하다는 뜻이고 울은 울타리 우리 터전의 의미

볼우물 : 보조개를 뜻함

여우별 : 궂은 날 잠깐 났다가 사라지는 별

매지구름 : 비를 머금은 검은 조각구름

아람 : 탐스러운 가을 햇살을 받아서 저절로 충분히 익어 벌어진 그 과실

아람치 : 자기의 차지가 된것.

느루 : 한번에 몰아치지 않고 시간을 길게 늦추어 잡아서

가시버시 : 부부를 낮추어 이르는 말

애오라지 : 마음에 부족하나마, 그저 그런 대로 넉넉히,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좀

닻별 : 카시오페아 자리


가람 : 강

미리내 : 은하수

산 : 뫼

도투락 : 어린아이의 머리댕기

용 : 미르

다솜 : 사랑

알범 : 주인

가우리 : 고구려(중앙)

구다라 : 백제(큰 나라)

시나브로 : 모르는 새 조금씩 조금씩

타래 : 실이나 노끈 등을 사려 뭉친 것

단미 : 달콤한 여자, 사랑스러운 여자

그린비 : 그리운 선비, 그리운 남자

산마루 : 정상(산의)

아미 : 눈썹과 눈썹사이(=미간)

언저리 : 부근, 둘레

이든 : 착한, 어진

아띠 : 사랑

소담하다 : 생김새가 탐스럽다

오릇하다 : 모자람이 없이 완전하다

성금 : 말한 것이나 일한 것의 보람

더기 : 고원의 평평한 땅

너울 : 바다의 사나운 큰 물결

너비 : 널리

벗 : 친구

미쁘다 : 진실하다

노루막이 : 산의 막다른 꼭대기

샛별 : 금성

소젖 : 우유

바오 : 보기 좋게

새암 : 샘

느루 ! : 한번에 몰아치지 않고 시간을 길게 늦추어 잡아서

마수걸이 : 첫번째로 물건을 파는 일

애오라지 : 마음에 부족하나마, 그저 그런 대로 넉넉히, 넉넉하

지는 못하지만 좀

내 : 처음부터 끝까지

닻별 : 카시오페아 자리

베리, 벼리: 벼루

나룻 : 수염

노고지리 : 종달새

노녘 : 북쪽

높새바람 : 북동풍

높바람 : 북풍. 된바람

달소수 : 한 달이 좀 지나는 동안

닷곱 : 다섯 홉. 곧 한 되의 반

덧두리 : 정한 값보다 더 받은 돈 (비슷한말 ; 웃돈)

덧물 : 얼음위에 괸 물

도래샘 : 빙 돌아서 흐르는 샘물

마녘 : 남쪽. 남쪽편

마장 : 십리가 못되는 거리를 이를 때 "리"대신 쓰는 말

마파람 : 남풍.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하늬바람: 서풍

몽구리 : 바짝 깎은 머리

묏채 : 산덩이

버금 : 다음가는 차례

부룩소 : 작은 수소

살밑 : 화살촉

새녘 : 동쪽. 동편

새벽동자 : 새벽밥 짓는! 일

샛바람 : "동풍"을 뱃사람들이 이르는 말

서리담다 : 서리가 내린 이른 아침

헤윰 : 생각

도투락 : 리본

햇귀 : 해가 떠오르기전에 나타나는 노을 같은 분위기

나르샤 : 날다

벌 : 아주넓은 들판, 벌판

한 : 아주 큰

온누리 : 온세상

아사 : 아침

달 : 땅,대지,벌판

시밝 : 새벽

샛별 : 새벽에 동쪽 하능에서 반짝이는 금성 어둠별

꼬리별, 살별 : 혜성

별똥별 : 유성

붙박이별 : 북극성

닻별 : 카시오페아 별

잔별 : 작은별

가늠 : 목표나 기준에 맞고 안 맞음을 헤아리는 기준, 일이 되어 가는 형편

가래톳 : 허벅다리의 임파선이 부어 아프게 된 멍울

노량 : 천천히, 느릿느릿

가라사니 :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지각이나 실마리

갈무리 : 물건을 잘 정돈하여 간수함, 일을 끝맺음

개골창 : 수챗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

개구멍받이 : 남이 밖에 버리고 간 것을 거두어 기른 아이(=업둥이)

개맹이 : 똘똘한 기운이나 정신

개어귀 : 강물이나 냇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어귀

나릿물 : 냇물

고삿 : 마을의 좁? ?골목길. 좁은 골짜기의 사이

고수련 : 병자에게 불편이 없도록 시중을 들어줌

골갱이 : 물질 속에 있는 단단한 부분

눈꽃 : 나뭇가지에 얹힌 눈

곰살궂다 : 성질이 부드럽고 다정하다

곰비임비 : 물건이 거듭 쌓이거나 일이 겹치는 모양

구성지다 : 천연덕스럽고 구수하다

구순하다 : 말썽 없이 의좋게 잘 지내다

구완 : 아픈 사람이나 해산한 사람의 시중을 드는 일

굽바자 : 작은 나뭇가지로 엮어 만든 얕은 울타리

그느르다 : 보호하여 보살펴 주다

그루잠 : 깨었다가 다시 든 잠

그루터기 : 나무나 풀 따위를 베어 낸 뒤의 남은 뿌리 쪽의 부분

기이다 :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다

기를 : 일의 가장 중요한 고비

길라잡이 :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

길섶 : 길의 가장자리

길제 :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구석진자리, 한모퉁이

길품 : 남이 갈 길을 대신 가 주고 삯을 받는 일

겨끔내기 : 서로 번갈아 하기

고빗사위 : 고비 중에서도 가장 아슬아슬한 순간

까막까치 : 까마귀와 까치

깔죽없다 : 조금도 축내거나 버릴 것이 없다

깜냥 : 어름 가늠해 보아 해낼 ? 맨?능력

깨단하다 :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떤 실마리로 말미암아 환하게 깨닫다

꺼병이 : 꿩의 어린 새끼

꼲다 : 잘잘못이나 좋고 나쁨을 살피어 정하다

꽃샘 : 봄철 꽃이 필 무렵의 추위

꿰미 : 구멍 뚫린 물건을 꿰어 묶는 노끈

끄나풀 : 끈의 길지 않은 토막

끌끌하다 : 마음이 맑고 바르며 깨끗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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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6-02-14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예전에 국어사전 뒤지면서 찾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중국에겐 한국의 ‘냄새’가 난다

구더기가 들끓는 장독 같은 중국의 현실을 고발하는 <추악한 중국인>
인간관계가 법을 지배하고 내분 일삼는 모습에서 한국을 떠올린다

▣ 장정일/ 소설가

중국인은 단결할 줄 모르고 내분을 일삼으며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다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른다. 또 법의 원리가 적용돼야 할 곳에서 인간관계가 좌지우지되는 특성을 가졌으며, 중국인이 자랑하는 인정이라는 것도 아는 사람 사이에서나 작동되지, 낯선 사람들에게는 매몰찬 배제의 원리가 된다. 영성이 발달하지 못하고 사회적 책임이 방기된 중국에서 ‘바른 길’이란 부귀공명을 의미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는 행위는 바르게 행동하지 않고 바른 길을 걷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 이런 나라에서 민주란 “너는 민(民), 나는 주(主)”를 의미한다.

장제스 모독으로 9년간 옥살이


△ (일러스트레이션/ 황은아)

보양(柏楊)의 <추악한 중국인>(창해·2005)은 중국 문화에서 배울 점은 하나도 없으며, 중국이 곧 망할 듯이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예거된 중국인의 단점은 우리의 추악상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이 한국인을 따라잡으려면 “10만 광년”이나 걸린다는 글귀는 빨리 잊어야 한다. 이 책을 보며 위안하는 한국인이 많을수록 21세기는 고단해진다. 오히려 ‘추악한 중국인’을 ‘추악한 한국인’으로 바꾸어 읽으면 얻는 게 생긴다. 중국인은 한국인과 같이 여러 종류의 장(醬)을 담가 먹는데, 보양은 뭐든 오래되고 케케묵은 것일수록 좋다고 믿는 중국인의 의식을 ‘장독 문화’라고 부르면서, 그 원인을 유교사상에서 찾는다. 정치와 조상숭배를 결합한 유교가 중국을 지배하면서부터, 중국 문화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이 되어 구더기가 들끓는 장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익이 열 배를 넘지 않으면 변법할 수 없다”는 장독 문화의 썩은 냄새를 우리는 쉬지 않고 맡는다.

1985년 대만에서 초간된 이 책은 양안(兩岸)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대만과 중국에서 똑같은 책이 열화같이 읽히게 된 맥락도 흥미롭지만, 보양이라는 인물도 만만치 않게 극적이다. 장제스 숭배자였던 보양은 18살 때 국민당에 입당한 뒤 대륙이 공산당 손에 넘어가자 대만에 정착했다. 교편을 잡고 작가 생활을 겸하던 그는 언론인으로 날카로운 사회 비판 칼럼을 쓰기도 한다. 그러던 1968년, 한 신문에 미국 만화 <뽀빠이>를 연재 번역하면서 장제스 정권을 빗댄 일로 ‘간첩죄’와 ‘국기문란죄’ 등의 죄명을 덮어쓰고 12년형을 선고받는다. 화소도에서 9년간 옥살이를 하며 완성한 책이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권의 책 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맨얼굴의 중국사>(창해·2005).

우리나라에도 번역되고 영화로도 소개된 보양의 소설 <이역>(시대문학사·1991)은, 1962년 대만에서 출간돼 100만 부나 팔렸다. 대륙이 공산화되고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퇴각한 뒤에도, 본토 탈환을 위해 윈난성에서 항전하던 부대가 있었다. 마지막엔 공산군에게 쫓겨 윈난성과 가까운 버마·타이·라오스 접경지대에 은거하게 된 그들은, 그곳에 본토 탈환의 거점을 세우고자 했다. 대만 정부의 외면 속에서 11년씩이나 공산군과 싸우고, 국경을 침해받았던 3국 정부군의 토벌에도 맞섰던 ‘잔여분자’의 처절한 투쟁을 기록한 <이역>의 외양은 반공 성전. 하지만 실제 인물의 수기를 옮겨놓은 이 작품에는, 장제스 정권을 불편하게 하는 생생한 육성이 깔려 있었다. 즉, 잔여분자들이 대륙과 타국에서 싸우고 있을 때, 재물욕과 권세욕에 취한 고급 장교와 권력자들은 모조리 대만행 비행기를 타고 달아났으며 그것이 현 정권이라는 것. 보양의 독방은 이때 예약됐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날조가 오리엔탈리즘이라면, 옥시덴탈리즘은 서양에 대한 동양의 날조를 일컫는다. <옥시덴탈리즘>(강·2001)이란 책을 쓴 샤오메이 천은 그것을 ‘관변’과 ‘반관변’으로 나누었다. 관변 옥시덴탈리즘은 국민을 지도하는 정권이나 체제의 필요에 따라 서구를 부정적으로 채색한다. 서구 민주주의를 방임과 비효율이라고 명명하면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제시하거나(박정희), 서구 공산주의를 모조리 수정주의로 폄하하면서 ‘주체사상’을 내세우는(김일성) 작업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대로 서구의 합리주의와 민주주의를 이상화하면서 자국의 정치적 후진성을 비판하는 경우가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이다.

아편전쟁이 1천 년이나 앞서 일어나 “서방의 현대화된 문명이 낡은 중국으로 좀더 일찍 치고 들어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중국이 깨어나기 위해서는 서구의 인권·법치·자유·민주를 빨리 도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책은, 확실한 반관변 옥시덴탈리즘 텍스트다. 80년대 중반, 청년·학생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악몽을 진단하는 교서 노릇을 수행했던 이 책은 한때 중국에서 금서가 되었으나, 오랫동안의 묵인을 지나 2004년부터는 정식 출간이 허용됐다. 중국 공산당의 맷집이 이 정도는 수용할 정도가 된 것일까? 아니면 반관변 옥시덴탈리즘마저 중국 국민의 자아를 교화하기 위해 동원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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