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그릇 2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9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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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선>으로 마쓰모토 세이초를 처음 만났다.

한 마디로 굉장한 책이었다.
철도역의 기차시간표를 활용한 트릭의 절묘함이라니!

1958년에 나온 책이니 오래 된 책 특유의 고전적인 분위기와 함께 사건의 전개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정통 추리소설의 재미를 한껏 누렸다고나 할까?

어릴때 셜록홈즈를 처음 읽을때의 두근거림을 다시 느끼는 행운을 누렸다.

 

한껏 기대감을 고양시킨 상태에서 나에게 선택된 세이초의 두번째 책은 가장 최근에 출판된 <모래그릇> 1961년작이다.

소설의 분위기는 <점과 선>의 분위기와 거의 비슷하다.

세이초라는 작가가 당대 일본 현실을 그대로 배경으로 가져오는 것이니 당시 사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기본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는게 당연하겠다.

주인공은 다르지만 사건을 풀어가는 경찰의 분위기도 비슷하다.

 

도쿄 새벽 기차역에서 처참하게 죽은 시체가 발견된다.

전 날 근처 작은 술집에서 죽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와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셨고, 죽은 쪽 사람의 지방사투리가 심했다는 것 외에는 어떤 단서도 없다.

죽은 이의 신원도 알 수 없고, 목격자도 없으며 증거가 될만한 그 무엇도 없다.

 

이제 어떻게 할까?
현실에서는 미결사건으로 남을 가능성이 대부분일테고, 이 책에서도 역시 미결사건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베테랑 형사인 이마니시는 이 사건에 계속 끌리게 되고 수사본부가 해산하고 난 뒤에도 끝까지 이 사건을 물고 늘어진다.

<점과 선>에서도 그러했고 이 책 <모래그릇>에서도 마찬가지인건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주인공 경찰들을 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전통 장인정신의 체현자들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에 나오는 경찰들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1950년대쯤이 배경이 되는 일본 드라마 같은 걸 보면 흔히 나올 전형적인 가장이자 직장인의 모습이랄까?

다만 이들이 특별한 지점은 아주 끈질기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이 맞는 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본끝까지라도 몸을 움직이고 범인의 생각을 짐작하기 위해 범인이 갔을 것으로 예상되는 코스를 직접 체험하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몸에의 체득과 함께 이루어진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겠지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과 생각의 틈사이에는 번뜩이는 한 순간이 준비되어 있다.

그 순간을 대면하는건 그야말로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지만......

장인의 경지를 보이는 주인공 경찰들을 보다보면 작가인 마쓰모토 세이초가 이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가 평생 쓴 작품의 숫자는 너무 엄청나서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평생을 무언가 하나에 자신의 모든 혼을 쏟아넣는 장인의 반열에 작가 자신이 올라 있으리라....

 

그러나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모래그릇>은 결론적으로 <점과 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흥미로웠고 끝까지 독자를 데리고 가는 몰입도도 있었지만 그것의 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틈사이 번뜩이는 순간을 내놓기에는 조금은 뜬금없거나 너무 많거나....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은 철저하게 논리와 논리를 연결짓고 유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 절묘한 어느 한 지점에 신의 한 순간이 결합함으로써 전체 논리가 완성되어 지는 것이다.

결국 모래그릇이 모자란 부분은 바로 이 지점, 논리의 연결부분이다.

지나치게 자주 그 부분을 번뜩이는 깨달음으로 메꾸는 것은 억지스럽다고 얘기할 수 밖에 없게된다.

 

이제 내게 마쓰모토 세이초는 양쪽 두 지점을 선보였다.

다시 만나기 어려운 뛰어난 작가와 그냥저냥 괜찮은 추리소설 작가

이후 내가 다시 만나게 될 마쓰모토 세이초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점과 선>이 작가의 최고작이 아니기를 빈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의 책 중에서 가장 처음 읽은 것보다 더 좋은 책을 발견하지 못하는 건 정말 안타까움이다.

특히 나처럼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을 경우 그 작가의 책에 흥미가 떨어질때까지는 전작주의를 추구하는 독서 스타일을 가진 이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 안타깝다는 표현보다는 예전에 유행하던 안습이다라는 표현이 이럴 때 정말 딱이라는 생각이 드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그런 작가가 몇몇있다.

예를 들면 로맹가리의 책을 이것저것 읽었지만 제일 먼저 읽었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에 필적하는 책을 더 이상 만나지 못했다던지, 주제 사라마구의 책 역시 가장 먼저 읽은 <눈먼자들의 도시>가 가장 좋았다던지....

아!  미야베 미유키도 처음 읽었던 <모방범>이 가장 좋았다.

 

이 경우 문제는 가장 훌륭한 책을 요령없이 제일 먼저 읽어버린 내가 문제일수도 있구나.....

아직은 마쓰모토 세이초를 손에서 놓지는 않을 것이다.

<점과 선>과 <모래그릇>중간의 어느 지점정도라면 이 작가는 여전히 내게 매력적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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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11-0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오랜만에 뵈어요. 두 공주님도 잘 있겠지요?
저도 최근에 이 책을 읽었거든요. 마쓰모토 세이초와의 첫 만남이었는데 제가 일본문학 작품을 읽고 푹 빠져본 경험이 없어서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한게 아니었는데 역시 기대만큼이 아니어서 좀 실망했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논리적인 추리에 의해서 사건이 하나 하나 해결되어 나간다기 보다 우연히 떠오르는 무엇에 의한 부분이 너무 많고 갑자기 등장하는 실마리가 좀 엉뚱했고요. 모래그릇이라는 제목을 무엇을 의미했을까, 그것도 명쾌하게 저에게 와닿지 않아서 읽고나서 뿌듯함이 적었어요.

바람돌이 2013-11-08 10:14   좋아요 0 | URL
hnine님도 잘 지내셨죠? 예전처럼 알라딘에 들어오는게 열심 모드가 되지는 않네요. ㅎㅎ
이렇게 가끔 와도 인사 건네주는 분들이 계셔서 너무 감사해요.
이 책은 그저 그랬는데 이 작가의 <점과 선>은 정말 좋았어요. 아마 앞으로 한 2권 정도 더 읽어보고 계속 이 작가를 읽든지 그만두든지 하겠죠. ^^
그래도 늘 읽고싶은 작가가 넘쳐나서 행복하기도 해요. ^^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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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왠만한 사람은 다 읽었는데 나는 안 읽은 책

내게는 하루키의 책들이 그렇다.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얼마나 굉장한 유행을 일으켰는가말이다.

그런데 왜 안읽었냐고?

그냥 별로 안땡겨서라는 말 외에는 이유도 없다.

살짝 유행에 편승해본다.

1권짜리인데다 내용도 뭐 그리 무거울것 같지도 않고.....첫 책으로 고르기에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다.

 

하루키에 대한 첫 느낌은?
뭔가 있을듯한 묘한 분위기로 독자를 현혹시키는데 아주 재능이 있는 작가쯤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심심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럼에도 책이 심심하지 않다 느껴지는 것은 추리소설의 기법들을 절묘하게 배치한 덕분인듯...

완벽한 공감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고등학교 친구들의 느닷없는 절교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자기안에 갇힌 다자키에게 어느날 다가온 하이다라는 청년

그리고 하이다가 말해주는 사람들의 색채를 볼 수 있는 신비한 사람의 이야기와 어느날 사라져버린 하이다

다자키로 하여금 순례를 시작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사라의 등장, 하지만 사라 역시 보여주는 것이 전부가 아닌 뭔가 비밀을 간직한 여인이다.

거기에 알 수없는 이유로 자살한 시로까지 명확한 인물은 누구도 없다.

어쩌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는 명명이 보여주듯 다자키 자체가 모호한 인물이다.

이런 모호함들이 은근히 이야기의 힘을 만들어내고 독자를 유혹한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하루키는 인물을 창조해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건의 힘이 아니라 인물과 인물간의 디테일함이 독서를 이끌어가고 있으니말이다.

 

다자키 쓰쿠루는 자신만이 색채가 없다 생각하지만 하나의 색채로 명명될 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을까?

어떤 색채를 가지는가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그들 사이의 소통에서 이루어지는 것.

그러므로 인간의 색채는 언제든지 다양하게 변모할 수 있는 것일게다.

다자키가 순례를 통해 자신에게 다른 색을 입혀나갔듯이......

 

처음 만난 하루키,

와! 하는 함성은 없지만 그래그래 고개를 끄덕여본다.

거꾸로 그의 책을 거슬러 올라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그 순례가 끝까지 거슬러올라갈지 중도에 벗어던질지는 가봐야 아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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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11-05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반가워요~~~~~ 얼마만이어요^^
전 이 책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쉬우면서도 친구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도 만들어주었고^^
다자키...평범하면서도 참 매력적인 인물이었지요.

바람돌이 2013-11-05 16:25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 안녕하시죠? 이젠 글도 좀 써고 자주 와야지 했는데 맘만큼 안되네요. ㅠ.ㅠ
다자키라는 인물이 본인은 아무런 특색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의 존재만으로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들 꼭 친구들 중에 하나쯤 있잖아요. ^^ 인물은 매력적이고, 하지만 왜 그렇게 열광하는가까지는 잘 모르겠고 그래요. ^^
 

로맹 가리의 책들이 좋다.

하나씩 하나씩 읽어가면서 아직은 읽어야 할게 더 많음을 기뻐한다.

처음으로 읽었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임펙트가 워낙 강해 찾게 된 로맹 가리

은근 중독증세를 보인다. 아직은 이렇게 본 책 보다 봐야 할 책이 더 많아 행복한 작가!

 

 

 

 

 

 

 

 

 

 

 

 

 

 

 

 

 

지금 유럽의 교육을 읽고 있는데 제목만 들으면 완전 무슨 교육서적 같아 평소와 달리 역자 후기를 먼저 봤다.

그리고 봤다.

자살하면서 남긴 로맹 가리의 유서를.....

 

 

 결전의 날.

 진 세버그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상심한 마음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다른 데다 호소하도록 초대받는 법이다.

 사람들은 아마 신경쇠약 탓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신경쇠약이라는 것은 내가 성인이 된 이후 계속되어왔으며, 내 문학적 작업을 완수하게 해주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인가? 아마도 <밤은 고요할 것이다>라는 내 자전적 작품의 제목과, '사람들이 달리 더 잘 말할 줄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 마지막 소설의 마지막 말 속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로맹가리

 

 

아 젠장!  멋지잖아.

내가 이 세상에서 할 건 다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게 없다는 저 당당한 자신감.

저런 유서를 남겼는데도 사람들은 왜 1년 전에 자살한 진 세버그때문이라고 말들을 했을까?
(진 세버그는 영화배우였으며 로맹 가리의 전부인이기도 했다.)

 

 

 

 

김학철 선생님이 예전에 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시면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영면에 드셨다.

멋있었다.

 

 

며칠 전에 본 역사e에서 이회영 선생이

예순 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라고 했다.

머리가 띵 울릴 정도로 멋있었다.

 

 

 

 

 

 

 

 

지난 달에 영화 <지슬>을 봤다.

가장 슬펐던건 이들의 죽음이 너무 허무해서였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뭔가 의미를 남기지도 못하고, 따뜻하게 잡아주는 손 하나도 없이 그냥 그냥 죽어갔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죽음.....

 

 

깨놓고 말하면 나이가 든다는 건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다.

아! 죽을 때 멋있고 싶다.

로맹가리처럼, 김학철, 이회영처럼........

사는 동안 멋있었던 적이 한번도 없던 나같은 사람이 죽을 때 멋있어 보이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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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깝죽 2013-06-2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이가 66세라면 완전 청춘이구먼 그 아까운 나이에 자살을 하다니
나 같으면 뭔가 큰 물건 하나 만들어 놓고 가겠다.
 
역사 ⓔ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 1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기획 / 북하우스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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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e의 인기에 힘입어 EBS에서 역사e를 만들었다.

지식e만큼의 임펙트에는 조금 미치치 못하는듯 하지만, 자료로 쓰기좋아 관심있게 보고 있다.

결국 지식e와 같은 컨셉이다.

 

숨은 인물과 사건을 발굴하고, 뻔해 보이는 사건을 뒤집어보고, 낯설게 하고 그속에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것

지식e나 역사e가 기여하는 바는 바로 이런 면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식e나 역사e에 열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고....

 

역사e는 독립운동가 이회영으로 시작한다.

인상적인 시작이다.

 

 

 서른 살 청년 이회영이 물었다.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예순 여섯 살 노인 이회영이 답했다. "예순 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 (18 -19쪽)

 

 

조선의 유서깊은 양반가였으며 떵떵거리는 부자였던 이회영 일가는 일제에 의해 주권을 잃어버리자 집안의 재산을 정리해 간도 삼원보로 떠난다. 집안의 6형제가 함께 떠났으니 집안의 가풍을 짐작할만하다.

이 집안의 돈이 간도에 독립운동기지를 만들었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무수히 많은 독립군을 배출해냈으며 상해임시정부에 쓰이고.... 돈만이 아니다. 함께 간도로 떠난 6형제 중 해방 이후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건 다섯째였던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예순 여섯의 '일생'으로 답했다라......

얼마나 당당하고 오만한 자신감인가?

하지만 이회영이라면 수긍이 간다.

40대에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개화적인 양반에서, 계몽운동가로, 50대에 아나키스트로 자신의 사상을 새롭게 정립해나가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생을 바친 사람의 삶 자체가 답이 될 수 없다면 무엇이 답이 될 수 있겠는가?

나이 50에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온몸을 바쳐 투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범인의 경지를 벗어나는 것이리라....

내 나이 60은?

음.... 생각하기 싫다......`

 

 

 

 

 이부자리 개기, 아침인사, 요강비우기, 집안청소.... 할아버지의 시중을 들며 익히는 바른 습관

 단정한 옷차림, 바른 몸가짐, 남을 대할 때의 예의범절... 할아버지를 보며 깨치는 '선비'의 덕목

 봇짐장수, 일가친척, 방랑객... 사랑채에 드나드는 사람들, 사랑채에 앉아 듣는 '세상 공부'

 ........

 할아버지가 손자를 직접 가르치는 최고의 교육법 '격대교육'

 

 

바쁜 부모를 대신해 세대를 건너뛰어 조부모를 통해 이루어지는 가정 교육.

16세기의 사대부 이문건은 손자를 기른 일종의 육아일기 <양이록>을 남긴다. 사화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하던 이문건이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손자를 기르면서 쓴 육아일기다.

손자는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다.

일기의 마지막은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로 맺어진다. 대충 보니 이 때 손자가 딱 사춘기다. 부모 모두 잃고 혼자 남아 귀양살이 하는 할아버지 품에서 자란 손자의 사춘기가 얼마나 극심했을까? 근엄한 성인의 이미지 밖에 없는 율곡 이이도 사춘기때 새어머니와 맞지 않아 가출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모습을 닮는다. 아니 조선에서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닮았을까?

이후 손자는 할아버지의 뜻대로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하였지만,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키고 그에 대한 상도 당연한 일이었다며 사양했단다.

결국 부모 또는 조부모의 삶이 자식의 본보기인 것이다.

아이들이 크면서 진짜 사는게 만만찮다. 잘 살아야 한다. 내 아이가 올바른 삶을 살게 하고싶다면.....

 

 

 

 나는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조선 비석을 발견했다.

 .........

 강제로 빼앗긴지 꼭 100년이 되던 해

 "남과 북은 일본으로부터 북관대첩비를 반환받기로 하고 이를 위한 실무적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제15차 남북장관급 회담 공동보도문)

2006년 북관대첩비는 원래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오랫만에 열릴 예정이었던 남북당국 회담이 결국 무산되었다.
예상한바라 하더라도 안타까운건 어쩔수 없다.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공방전, 대화의 의지 자체가 없으면서 책임은 피하고 싶은 작태는 가소로울뿐이다.

 

1592년 임진왜란, 일본은 부산에 상륙한지 겨우 20일만에 서울을 함락시키고 60일만에 평양을 함락시킨다.

당시 서울까지 가는 길이 급하게 걸어가면 20일정도가 걸렸던 걸 감안하면 말이 안되는 속도다.

이러한 전세를 뒤집은 것은 이순신의 해전과 곳곳에서 일어난 의병들이었다.

함경도로는 한번도 진 적이 없어 전쟁의 신이라 불리던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 2만 2천이 진격해온다.

의병장 정문부는 다른 의병부대와 곳곳에서 연합작전을 벌이며 일본군을 괴롭힌다.

이 책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 2만 2천 VS 정문부가 이끄는 의병 200 이라고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과장이다.

함경도 지역 곳곳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통틀어 북관대첩이라 하는데 2만2천대 200이라고 하면 마치 전면전을 벌인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전면전은 불가하다. 정문부의 의병부대를 비롯한 여타 의병부대가 상황에 따라 연합해가며 기습전을 벌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그럼에도 가토 기요마사의 정규군을 맞아 싸워 결국 그들을 패퇴시키고 함경도를 수복했다는 것은 엄청난 공적임에 틀림이 없다.

 

바로 이 북관대첩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 북관대첩비, 정식명칭 '조선국함경도임명대첩비'이다.

그런데 이 비석이 1905년 러일전쟁 중 북상하던 한 일본장교에 의해 "이것은 일본역사의 수치다"라는 선언으로 강제로 떼어져 일본으로 건너가 결국 야스쿠니 신사 구석에 내팽개쳐지게 된 것이다.

 

1979년부터 한국정부는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일본에 요구하였으나 난항을 거듭하다가 2000년대 들어 남북공동외교활동에 의해 결국 2005년, 강제로 빼앗긴지 꼭 100년만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남북이 같이 함으로써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북관대첩비의 글을 읽는 날, 남북회담의 무산이 더욱 씁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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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6-13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께 인사를 드린적이 있는 지 모르지만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넘 반가와요!!!!^^
이 책은 저도 세실님께 받아서 갖고 있는데 [린 인] 다 읽고 읽어야겠어요~~~.^^

바람돌이 2013-06-13 14: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아님. 음... 저도 인사를 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시아님 서재 가서 해든이란 이름을 보니 분명 인사를 했던듯해요. ^^
닉네임이 원래 시아님이었나요????
하여튼 반가워해주셔서 감사해요. ^^
 

 

팟캐스트 방송 중에 창비에서 만든 라디오 책다방 을 즐겨 듣는다.

김두식씨와 소설쓰는 황정은이 진행을 하는데 이번 9회 방송에서는 엄기호 한윤형 두 사람과 함께 방송이 진행되었다.

이 두 사람은 이름은 처음 듣는데 지은 책들의 제목은 모두 익숙하다. 제목만.... ㅠ.ㅠ

 

 

 

 

 

 

 

 

이번 편은 주로 세대론을 다뤘는데 듣다보니 속으로 뜨끔한 얘기들이 제법 있다.

그중에서도 386세대의 교육관을 얘기하는 부분은 정말 앗 뜨거다.(여기서 386세대라는 말의 폭력성이나 경계들의 의미는 잠시 재껴두자.)

 

나는 흔히 말해지는 대로 한다면 딱 386세대다.

대학시절 나는 세상이 이제 뒤집어질 줄 알았고, 그 기대가 어긋났을때도 이 세대가 사회의 주도층이 될 때쯤에는 세상이 확 달라져있으리라 기대했다.

그게 얼마나 순진하고 멍청한 기대였는지는 지금 현실이 적나라하게 증명하고 있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먼 옛날 손자병법의 이 명언을 깨닫지 못한 우리 세대는 적의 강고함을 얕봤고,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들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소위 386세대들은 이제 대부분이 10대 이상의 아이들을 기르고 있는 부모세대가 됐다.

이들은 이제 자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고 있을까?

 

 

 

 * 자신의 아이가 초등학교는 대안학교를, 고등학교는 특목고를 가기를 바란다.

 * 유사 이래 아이들은 가장 똑똑한 부모를 뒀다. 그래서 아이들의 책을 부모가 고른다. 좋은 책만.... 그래서 아이들은 스스로 좋은 책 나쁜 책 고를 기회가 없다. 오히려 부모덕분에 책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된다.

 * 우리나라의 교육환경을 비판하다보면 자식교육에 올인 - 기러기아빠가 된다.

 *속마음 - 아이가 별로 공부안하고도 서울대갔다고 얘기하고싶어한다.

 * 최고 히트 - 학교 공부를 못하는 자식은 괜찮지만, 똑똑하지 않은 자식은 참을 수 없다. 학교를 때려치더라도 멋지게 때려치워야 한다.

 

 

여기에 내가 하나 덧붙이자면

* 사회문제에 관심많고 진보적인 부모가 집에서까지 진보적이고 완전히 민주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집에서는 그냥 게으르고 아이들 심부름 시키기 좋아하는 그냥 평범한 부모다. 즉 말만 진보적이다.

 

이러고 보니까 아!

애들 정말 이런 부모밑에서 산다고 고생이 많겠구나!!

똑똑해야 되고, 공부도 잘하면 좋고, 멋지기까지 해야 하고....

거기다 말빨은 세서 말로는 부모한테 절대 못이기는데 딱히 수긍은 안가고....

 

남 얘기가 아니다.

딸 둘을 키우고 있는 나의 은밀한 욕망이 이런식으로 까발려지니 뜨끔하다가 민망하고 딸들한테 미안해진다.

저 말들이 내 마음과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 70%이상이다.

특히나 학교공부는 못해도 똑똑하기는 해야 한다는데서는 빵 터졌다.

세상에는 똑똑한 아이보다는 똑똑하지 않은 아이가 더 많은데 어떡하지?

 

우리집 애들을 비롯해서 요즘 아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냥'이다.

왜 그랬어? 왜 좋아? 왜 싫어?
무수히 쏟아지는 왜, 왜, 왜?에 아이들은 그저 그냥이란다.

부모세대의 말빨에 아이들이 눌려가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386세대가 아이들을 기른다면 무지 반듯하게 멋지게 잘 키울 것 같았는데.....

관념의 진보는 이렇게 현실과 부딪히면 백전백패다.

 

지금이 행복하지 않은 아이가 미래에 행복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미래의 행복이 지금의 행복을 저당잡아서 이루어질 수는 절대 없는 것!

딸들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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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3-06-13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 딸도 그냥 이란 말을 잘 해요
그런데 가만 보면 전 그 그냥을 추궁하는거 같아요 왜인지
사실 말하기 싫어서일수도 있는데
하지만 저야말로 그냥 불쑥
이런 경우가 많은데요
전 그냥 아무 이유없이를 아주 생활화했던 사람인데
저도 점점 아이들 세계와 멀어져 가는 사람 같네요
아이입장 부모입장
같아질 날은 오지 않겠지요

바람돌이 2013-06-13 12:24   좋아요 0 | URL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특히나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툴죠.
아이입장 부모입장 같아지면 오히려 큰일 날 것 같아요. ^^
어른은 어른스럽게 아이는 아이스럽게.... ^^;;

순오기 2013-06-18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부는 저도 뜨끔합니다~ 그래서 동의하고요.ㅠ
부모 노릇을 잘하기는 어려우니, 그냥 친구같은 부모가 되면 좋겠다 생각해요.
물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하는 말이지, 어릴 때는 친구같은 부모를 생각만하고 실천은 못했어요.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