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안나 씨.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싶은 겁니까?"
"말했잖은가. 기다리고 있는 걸세.
안나의 시선이 창밖의 우주를 향했다.
"언젠가는 슬렌포니아에 갈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기다리는 것이지. 언젠가는 이곳에서 우주선이 출항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언젠가는 슬렌포니아 근처의 웜홀통로가 열리지 않을까………. 자네에게는 흘러가는 시간이붙잡지 못해 아쉬운 기회비용이겠지만, 나 같은 늙은이에게는 아니라네."
- P177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지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 P181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왜, 보면 콘서트에 다녀온 티켓을 오랫동안 보관해두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사진도 굳이 인화해서 직접 걸어두고, 휴대폰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와도 누군가는 아직 폴라로이드를 찾아요.
전자책 시장이 성장한다고 해도 여전히 종이책이 더 많이팔리고, 음악은 다들 스트리밍으로 듣지만 음반이나 LP도꾸준히 사는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연예인들의 이미지를 향수로 만들어서 파는 그런 가게도 있고요. 근데 막상사면 아까워서 한 번도 안 뿌려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 P205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
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 P264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가윤은 조망대에 서서 시간이 허락하는 한까지 천천히 우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언젠가 자신의 우주 영웅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우주저편의 풍경이 꽤 멋졌다고 말해줄 것이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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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지구에 돌아온 이후로 평생 동안 유리를 수집했다. 할머니의 서재를 채우는 유리 수집품은 무척 다양했다. 유리로 만든 공예품에서 프리즘, 렌즈, 거울에 이르기까지. 할머니는 그 유리들로 책이나 그림을 들여다보기도하고, 손전등을 그 위에 비추기도 했다. 유리를 모으는 이유를 할머니가 직접 말해준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짐작해보곤 했다. 빛을 모으고, 분리하고, 보통의 감각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보게 하는 도구, 할머니가 행성에 머물며 가장 절실히 원했던 것들은 아마 그런 도구들이었을 것이다.
- P79

- 잘 자.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예전에는 몰랐다.
- P82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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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일상의 균열을 맞닥뜨린 사람들만이 세계의 진실을 뒤쫓게 되는 걸까? 나에게는 분명한 균열이었던 그 울고 있던남자와의 만남 이후로, 나는 한 가지 충격적인 생각에 사로잡혔어.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 P19

지구에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충격적으로 다른 존재들이 수없이 많겠지. 이제 나는 상상할 수 있어. 지구로 내려간 우리는 그 다른 존재들을 만나고, 많은 이들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우리는 곧 알게 되겠지. 바로그 사랑하는 존재가 맞서는 세계를, 그 세계가 얼마나 많은 고통과 비탄으로 차 있는지를, 사랑하는 이들이 억압받는 진실을.
올리브는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 P52

그들이 어떤 모습이건 순례자들은 그들에게서 단 하나의,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찾아냈겠지.
그리고 그들이 맞서는 세계를 보겠지. 우리의 원죄, 우리를 너무 사랑했던 릴리가 만든 또 다른 세계. 가장 아름다운 마을과 가장 비참한 시초지의 간극. 그 세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함께 완전한 행복을 찾을 수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순례자들은 알게 되겠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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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이전의 서양화는 언제나 어렵다. 왜냐하면 그림의 아름다움 여부를 떠나 그림의 소재가 대부분 서양의 역사거나 신화 아니면 성서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하고 있어 그림이 담고 있는 스토리를 모르면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장면을 그린건지 잘 모를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카노 쿄코의 그림 이야기는 항상 재밌게 읽힌다. 내가 모르는 그림속 이야기를 아주 친절하게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도판의 훌륭함은 그림을 온전히 보여주기까지 한다.

아 도판 얘기를 하려니 뭉크의 절규 얘기부터 해야겠다.
아주 운이 좋게도 노르웨이에 간적도 없는 내가 뭉크의 절규를 직접 미술관에서 만났었다. 2년전쯤 겨울에 중학교를 졸업했던 둘째 딸과 둘이서 일주일정도 일본 도쿄 여행을 했었다. 둘 다 그림에 관심이 많아 그야말로 미술관 여행이었는데 정말 운이 좋게도 뭉크 전시회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때 노르웨이 국립미술관이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들어갔다던가? 하여튼 밖으로 거의 나오는적이 없는 절규를 비롯한 뭉크의 엄청나게 많은 그림들이 일본 나들이를 한 것이다. 뭉크의 초기작부터 후기작까지 많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이었다.
평일 아침 일찍 미술관을 찾았는데 사람이 정말 어마어마했다. 우리도 유명한 그림이 오면 미술관이 복작복작하지만 이건 그 수준 이상이었다. 조용한 관람은 물건너갔고, 뭉크의 절규앞에서는 딱 2분정도 봤다. 줄 서서 이동하면서 사람에 떠밀려 봤으니.... 원작을 본 감동? 잘 모르겠다. 워낙에 많이 알려진 작품이고 이 책 도판이 워낙 훌륭하다보니 지금 도판으로 보는 것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듯하다.
일본의 서양미술에 대한 관심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듯하다. 그 짦은 기간동안 내가 본 대형 전시만 뭉크전, 베르메르전, 루벤스전 3개였다. 전시의 규모도 대표작 1,2개에 소품들로 채우는 우리 전시와 달리 마치 현지에 가서 보는 듯 온전하게 작가의 연대기별로 충실하게 시기별 대표작을 모두 알차게 채워놓은 전시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 많은 작품들을 한꺼번에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 싶은.....또한 그외 상설 전시관들의 컬렉션도 굉장히 훌륭했고.....
아마도 이런 문화적 환경이 나카노 쿄코같은 작가를 만들어낸게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다양한 작품들을 보고 즐길 수 있었던 사회적 인프라랄까?
더구나 도쿄의 대형미술관들은 모두 우에노공원 안에 몰려있다. 멀리 찾아 다니지 않아도 하루종일 걸어서 미술관만 돌아다녀도 되니 접근의 편리함이 아마도 이런 미술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더 키워줄듯하다. 이 부분은 살짝 부러웠다.

나카노 쿄코의 이번 책은 운명이라는 주제로 그림들을 모았다. 책 속의 그림들은 이미 본적이 있는 그림들보다 처음 보는 그림이 더 많다.
시작부터 로마의 검투 장면을 거린 제롬의 <아래로 내린 엄지>로 시작해 패배한 검투사의 삶과 죽음의 기로의 순간을 표현한 그림으로 시작한다. 그림에 대한 설명과 함께 당시 로마의 검투사들의 처지 진행과정 등을 쉽게 설명하니 그림과 역사가 이야기로 어우러진다. 물론 깊이있는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건 아니다. 이 책의 그림을 감상하는데는 약간의 배경지식만 있으면 충분할테니.... 누구든 쉬운 문장으로 상세한 그림 이야기로 쉽게 그림을 볼 수 있다는게 이 책의 최대 장점일듯하다.

의외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림은 메인더르트 호베마라는 네덜란드 작가가 그린 풍경화 <미델 하르니스의 가로수길>이라는 작품이다.
전에도 어디선가 봤던 작품인것 같은데 그저 평범한 풍경화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던듯하다. 아마도 원근법의 들장 정도만 신경 쓰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그림이 내포한 스토리는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가로수길이라는 것이 시작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는 것. 하지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전쟁을 벌여 자유를 쟁취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이 가로수길의 계급성이 사라지고 장중함을 연출할 필요도 없이 누구나가 향유할 수 있는 길로 등장한다. 또한 네덜란드이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그들의 치열한 고민이 이 그림속 길에 담겨있다. 포플러 나무를 선택한 것은 이 나무의 실용적 용도- 쳐낸 아래쪽 가지와 잎을 비료로 사용하고, 줄기를 습기가 많은 네덜란드에 적당하누나막신의 재료로 삼으며, 지면의 흙이 넘치는 물에 쓸려가지 않도록 단단하게 잡아주는 역할-를 모두 고려하여 네덜란드이 환경에 맞게 조성된 것이다. 풍경화 하나에서 당대 네덜란드인들의 지난한 삶의 과정이 모두 펼쳐져 있는 느낌이다.

표지 그림인 아리 셰퍼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역시 이야기와 함께 읽으면 더욱 안타깝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불행한 정략결혼을 했던 두 연인의 사랑과 죽음이 어떻게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스토리와 함께 만나는 그림 이야기는 언제나 즐거운 독서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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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아카데미에서 군림했던 장 레옹 제롬은 인상파 화가들의 앞길을가로막았다. 예술은 지적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에게 인상파는 허용할 수 없었던 미술이었다.
- P21

지금껏 패배를 몰랐던 영웅호걸이 러시아의 혹한과 노련한 적장에게 처절하게 박살나 버린 일을 후세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두 번이나 쉽게 이겼던 러시아군이었기에 아무리 자신만만했어도 상대편 지휘관이 미하일 쿠투조프(Mikhail Kutuzov)로 바뀌어 전략이 크게 변했다는 사실을, 우여곡절 끝에 모스크바까지 당도했지만 비참하게 패하고달아나야 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65만 명의 대군 가운데 살아서프랑스로 돌아간 병사의 수는 겨우 3만 명이었던 사실을, 또한 역사를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집무실의 본인만은 아직 모른다. - P53

예로부터 가로수길은 왕후와 귀족이 사유지에 냈던 특별하고 개인적인 도로였고, 보기에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우거진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제공했다. 대부분 성 안 정원에 조성했지만 성곽 밖으로 가로수 길이 난 경우는 보통 성문이나 사적인 예배당 등과 직접 연결되었다. 따라서 서민의 출입을 차단하여 선택받은 사람만 다닐 구 있는, 마치 레드 카펫과도 같은 길이었다. - P89

하지만 새롭게 탄생한 독립국 네덜란드는 특수한 나라였다. 당시주변국들은 어디든 절대주의 왕정 체제를 다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는왕족과 귀족도, 가톨릭교회도 몰아낸 나라였기 때문이다.(총독이 명목상최고 통치자였지만 의회가 존재하던 연방 공화정 체제였다.) 또한 이 시대는 자연을 힘으로 굴복시킨 인공의 나라였던 네덜란드가 해외 무역을 통해부의 축적까지 이루어 낸 황금기였다. 이제 가로수길은 더 이상 특권 계급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시, 읍, 면이 공공사업으로 건설하여 국민 전체에게 개방되었다. 길게 늘어선 나무도 당연히 장중함을 연출할 필요가없었다.
- P90

이렇듯 호가스가 묘사한 인간의 모습에는 한결같이 가차 없는 시선이 나타나 있다. 그의 냉정한 태도는 상류 계급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귀족이는 거지든,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 아이든 부자든 빈민이든, 현명한 자는 어리석은 자든, 그 누구도 호가스가 쥔 날카로운 풍자의 붓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음의 신과도 같은 평등주의가 바로 호가스가 지닌 매력이었다.
윌리엄 호가스는 "내 그림은 나의 무대이고, 등장인물은 나의 배우다."라고 항상 말했다고 한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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