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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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절박하다.

이 경이로운 소설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하면 나는 저 "절박하다"라는 한 문장으로 대신하겠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감정은 바로 저 "절박하다"라는 것이었다.

 

소설의 배경은 1970년대의 북아일랜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어느 곳에서도 고유명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국가도, 지역도, 살고 있는 동네도, 사람들의 이름도, 심지어 주인공의 이름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두가 보통명사로 지칭된다. 주인공을 가리키는 말은 그냥 가운데 딸이다.(그녀는 7딸 중에 딱 가운데 넷째다)

그녀와 썸을 타는 남자친구는 그녀를 부를 때 어쩌면-여자친구야라고 부른다.(요즘식 표현이면 썸타는 여자친구야정도?)

친구는 그녀를 부를 때 가장 오래된 친구야라고 부른다. 소설을 보다가 이런 장면에서는 살짝 키득거리게 되기도 한다.

가끔 이름이 등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들은 그야말로 이름 자체가 아무 의미없는 스쳐가는 인물이다.

중요 인물 중 유일하게 고유명사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긴 하지만 이건 스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니 넘어가자.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책을 보시는 분이 계시면 한번 맞춰보시라 하고싶다. 나는 못맞췄다.)

 

한 번도 이렇게 보통명사로만 이루어진 책을 본 적이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다.

따라서 이것이 어떤 효과를 줄 지 알 수 없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것의 효과에 전율하게 된다.

고유명사가 없다는 것은 이 소설의 장소들이 어디나 될 수 있다는 말이고, 소설 속 인물이 바로 나 자신이 되거나 또는 나의 주변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그래서 더 절박하게 주인공 가운데 딸에게 감정이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게 너무 어려웠다. 그야말로 꾸역꾸역 읽었다.

어려운 말 하나 없고 어려운 내용도 없다.

그런데도 이 책을 읽는건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건 주인공 소녀가 느끼는 그 감정들이 모두 나에게로 휘몰아쳐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가 되어 불안에 떨며 거리를 걷고, 사람들의 폭력적인 뒷말과 소문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런 정도의 몰입감을 주는 소설이 또 있었던가?

 

그래도 이 시기 북아일랜드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지 않으면 소설을 읽어나가다가 어리둥절해질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북아일랜드의 역사는 워낙에 복잡해서 내 나름대로 북아일랜드의 그 암울한 상황을 각색해보았다.

 

이건 정말 그냥 예다.(영국에 일본을, 한국에 아일랜드를 대비시켜 얘기하면 북아일랜드인들이 느끼는 그 절박한 상황이 좀 더 잘 와닿지 않을까 싶어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 통치한게 35년이 아니라 700년이라고 하자.

그 무자비한 통치를 700년이나 받았고, 우리는 그 기간동안 엄청나게 싸우고 독립운동을 했다.

왜? 당연히 일본의 통치하에 사는게 너무 고통스럽고 희망이 없으니까.

오랜 독립투쟁 끝에 드디어 독립의 순간, 해방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한국의 한귀퉁이 경상남도의 주민들이 독립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한 300년전부터 일본에서 이주해와 정착하고 대대로 뿌리를 박은 일본인들이 전체 주민의 50%에 달한다.

이 일본인들은 경상도 땅의 대부분을 차지한 지주로 이 지역에서 아주 떵떵거리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 부를 그 토지를 다 버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라고? 절대로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경상도에 사는 한국인들 중에서도 이 일본인들과 경제적 이해관계나 혼인관계 등으로 얽혀있는 이들이 많다.

물론 친일파도 많을 거고..... 이들은 한국의 독립을 결사반대한다.

이 상황에서 한국은 독립을 위해 경상도를 버리기로 결정한다. 일본과 더 싸울 힘이 모자라니 그냥 경상도만 일본 식민지로 두고 나머지 지역만 독립하기로 하는 것이다.

자 이제 경상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50%의 일본인들은 나머지 50%의 한국인들이 다시 독립운동을 벌일까봐 전전긍긍하며 그들을 무력으로 짓누르고 감시하고 억압한다. 그들은 지역의 모든 군대와 경찰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본국의 군사적 지원까지 받는다.

조국이 독립했는데 버림받고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에 시달리는 경상도 지역의 한국인들은 이후 50년간 여전히 독립을 위해 싸운다. 이 50년간 경상도 지역은 일본인 거주지역과 한국인 거주 지역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그러면서 먹고 살아야 하니 생활공간은 또 겹친다. 이제 이 곳 한국인들의 거주 지역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게 피폐해져 갈까? 도로 하나의 거리인 만큼 언제나 밀고자는 넘쳐나고, 정체성을 위협받는 상황은 수시로 일어난다. (실제로 북아일랜드의 상황은 여기에 카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과 개신교를 믿는 영국인들 사이의 대립까지 겹쳐있어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바로 이런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여성들의 이야기가 소설 <밀크맨>이다.

 

 

반대자가 만행을 저지르면 ‘아, 하느님 맙소사, 나와 같은 관점에속한다는 이유로 내가 이런 행위를 지지한 꼴인가?‘ 하며 충격에빠지게 되지만, 다른 쪽에서 또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그런생각을 했던 것도 잊게 됐다. 또다시 충격을 받고 또 생각이 바뀌었다. 복수에 복수가 거듭됐다.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공동체 간의 대화를 추진하고, 다 함께 행진을 하고, 선하고 진정한 시민의식을 북돋고 하다가, 평화운동과 선하고 진정한 시민의식에 어떤 분파가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면, 운동을 접고 희망도 버리고 잠정적 해결책도 팽개치고 익숙하고 믿을 수 있고 필연적인 원래의 관점으로 돌아갔다. 그 시대에는 어디든 다 닫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공동체도, 저쪽 공동체도....- P168

 

만약에 단 한 사람만 정상이고 나머지사람 전부가 정상이 아니라면, 집단의식에서는 그 한 사람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겠지. 그렇다고 그 사람이 미친 사람이니? ‘응" 친구가 말했다. - P285

 

 

이런 환경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말하기를 잊어버린다는게 더 적당한 표현일거다. 주인공 소녀도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한다. 꽁꽁 숨긴다.

그래서 소설은 철저하게 감정을 누르고 누른 건조한 문장들로 이어진다.

그러나 하고싶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고싶은 말이 넘치고 넘쳐서 문장은 끝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상황이든 마음이든 무언가를 말하고자 할 때 상황에 맞은 또는 적당할 것 같은 모든 말을 쏟아낸다.

그렇게 많은 말을 쏟아내면서도 감정은 누르고 눌러진 상태가 어떻게 가능할 까 싶은데 이 소설이 바로 그 모순적 상황을 너무나도 완벽하게 펼쳐놓는다.

소설의 서술 기법은 너무나도 새롭고 경이롭다.

그러나 더 경이로운 것은 그런 모든 형식과 모든 문장이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완벽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독자의 몰입을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뒷날개에는 이 책에 대한 각종 매체들의 소개글이 실려있다.

이 소설을 혹시 발견한다면 꼭 소개글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폭력에 대한 보편적 저항, 북아일랜드의 분쟁을 다룬 정치소설, 현대사회의 불안을 다룬 소설, 페미니즘 소설, 성장소설 등등.... 이 모두가 맞는 표현이다.

여기에 나의 평가를 덧붙이자면 니체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중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네가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볼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을 넘어서> 중

 

오랫동안 폭력에 노출되고 일상화된 곳에서 인간 군상들이 어떻게 인간성을 말소당하고, 똑같이 폭력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판단하게 되는지를 이토록 잘 보여줄 수가 없다.

또한 그럼에도 빛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꼭 하고 싶다.

설사 그 빛이 희미하더라도 이 책에 등장하는 프랑스어 선생님, 진짜 밀크맨 -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남자, 그리고 소녀들의 이야기만 보면 이 소설은 휴머니즘의 희망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되겠다.

하나의 소설이 이렇게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는 것도 경이롭지 않은가?

그 경이로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고, 누구에게나 책을 들고 가 꼭 좀 읽어달라고 하고 싶은 글을 참으로 오랫만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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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08 1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구성이 독특하다고 여겼는데, 바람돌이님이 어떻게 독특한지 잘 써주셔서 저도 조금 더 새롭게 소설이 보이네요! 경상도 예는 ㅋㅋㅋ 북아일랜드 이해 확되브렀러요!! 잘 읽었습니다 😎

바람돌이 2021-03-08 19:20   좋아요 1 | URL
오우 칭찬 감사합니다. ^^
 

이렇게 타인에 대한 공포가 밝음과 선함을 압도하고 흩어놓고 결국 사살해버렸다. 밝음과 선함은 다른 모습으로 위장하고 나타났다. 일체성, 반짝임, 동생, 동생의 모습으로도 왔다.
그러니까 동생이 자기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그러면말이 된다. 알약소녀는 동생이 자기 안에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동생은 죽어야 했다.  - P378

바닥을 밟고 있는데도 떠다니는 기분인 한편으로 내가 달리 행동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테니 나에게는 분노할 권리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이러이러하는 대신 저러저러했다면, 거기 가는 대신 저기 갔다면, 이렇게 말하지 말고 저렇게 말했다면, 다르게 생겼다면, 그날 『아이반호」를들고 길에 나다니지 않았다면, 그날밤에도 그주에도 지난두달 동안 어느 날에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면 그가 나를 보고 욕망할일도 없었을텐데. - P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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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지는 책. 절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 어려운 문장 하나 없으면서도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더디다. 소설속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하나 하나를 내가 직접 느끼는듯 나를 압박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면 고전의 반열에 오르리라!








먼저 감정이 무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머리가 처음에는 "좋아, 잘했어. 사람들을 잘 속여서 내가 누군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인지 모르게 만들었어"라고 칭찬을해주던 머리가 이제는 내가 거기에 있기는 한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 우리 반응은 어떻게 된 거야? 속으로 표현하던 감정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어졌어.
어디 갔지?" 감정이 표출되기를 멈춘 것이다. 그러더니 아예사라져버렸다. 무감함이 어찌나 발달했는지 지역 사람들만내 속을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나도 내 속을 알 수가없었다. 내면세계가 통째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 P253

만약에 단 한 사람만 정상이고 나머지사람 전부가 정상이 아니라면, 집단의식에서는 그 한 사람이 미친 사람으로 취급되겠지. 그렇다고 그 사람이 미친 사람이니? ‘응" 친구가 말했다.  - P285

평범한 살인은 섬뜩하고 불가해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종류의 살인이다. 이곳 사람들은 그런 살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분류하고 토론해야 할지 몰랐다. 이곳에서는 정치적 살인만일어나기 때문이다. ‘정치적‘이란 당연하지만 국경과 관련된 모든 것에 얽힌 살인이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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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은 힘이 아니고안전이나 안도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는 힘, 안전, 안도감의 정반대 것일 수도 있다. 예민하게 깨어 있다보면 자극이 계속 쌓여 고조되기 마련인데 그런 스트레스를 해소할 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걸으면서 책을 읽는것은 알지 않으려고 일부러 하는 행동이다. 경계하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것이다. - P102

 빛나지 않는 사람들 집단을 생각해보라. 아니면 공동체나 국가나 아니면 소국가가 오랜 세월 동안 어두운 정신의 물리적 에너지적 상태에 빠져 있고 개인적 · 공동체적시련의 세월과 역사를 겪으며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 등의묵직한 감정을 지고 살게끔 조건 지어졌다고 생각해보라.
이 사람들은 빛나는 단추 같은 사람이 자기들 환경에 들어와서 환한 빛을 비춘다면 고깝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환경 자체가 사람들의 비관주의를 지지하며 같이 저항한다.
사방이 어둠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랬다. - P135

미쳤다는 증거지, 내가 말했다. 머리를 들고 가겠다는 말이야? 여기가 아무리 황량해 보여도 어딘가에서 적어도 한 사람은 보고 있을 수 있는데? 누군가가 봤다면 소문이 더 퍼질 거고 날조가 더 늘어날 거고 네 정신이 망가졌다는 증거가 늘어날 거야. 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 P152

반대자가 만행을 저지르면 ‘아, 하느님 맙소사, 나와 같은 관점에속한다는 이유로 내가 이런 행위를 지지한 꼴인가?‘ 하며 충격에빠지게 되지만, 다른 쪽에서 또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그런생각을 했던 것도 잊게 됐다. 또다시 충격을 받고 또 생각이 바뀌었다. 복수에 복수가 거듭됐다.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공동체 간의 대화를 추진하고, 다 함께 행진을 하고, 선하고 진정한 시민의식을 북돋고 하다가, 평화운동과 선하고 진정한 시민의식에 어떤 분파가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면, 운동을 접고 희망도 버리고 잠정적 해결책도 팽개치고 익숙하고 믿을 수 있고 필연적인 원래의 관점으로 돌아갔다. 그 시대에는 어디든 다 닫혀 있었기 때문에 우리도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 공동체도, 저쪽 공동체도.... - P168

그 여자들은 우리 지역 최초의페미니스트 집단인데 아주, 아주 상도를 벗어난 사람들로확실하게 취급된다. 일단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상도를벗어난다. ‘여성‘이라는 말도 가까스로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 정도인데, ‘문제‘ 등과 같은 일반적인 단어와 결합해 어감을 좀 부드럽게 해보아야 페미니스트와 여성이 합해지는순간 끝난 거다. 우리 지역에서는 이 문제 여성들에 대해 심하게 말한다. 뒤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대놓고 한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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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 지음, 이수현 옮김 / 비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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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1979년작이다. 미국에서 유색인종의 투표권에 대한 여러 제한이 공식적으로 폐진된 것이 1965년이다. 하지만 차별의 역사에서 법적 권리의 확보는 평등으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에 불과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노예제가 폐지된지 100년만에야 흑인들이 제대로 된 투표권을 가지게 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1979년 흑인여성작가 옥타비아 버틀러가 소설 <킨>을 발표했다.

 

1979년의 미국은 어땠을까? 흑인 여성작가가 SF장르의 소설을 쓰고 출판을 하는 것이 그리 녹록한 사회였을까?

지금도 SF장르는 백인남성의 전유물인것처럼 다른 인종과 다른 성의 진입이 쉽지 않은 장르이고 여성작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정말 최근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의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 보듯이 미국의 인종차별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것도 아주 야만적인 형태로. 작가 역시 이런 상황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루퍼스에게 최악의 수호자였다. 흑인을 열등한 인간으로보는 사회에서 흑인으로서 그를 지켜야 했고, 여자를 영원히 자라지 못하는 어린아이로 여기는 사회에서 여자로서 그를 지켜야 했다. 내 몸 하나 지키기도 벅찬 곳에서 말이다. - P124 

 

1817년으로 타임슬립한 주인공 다나의 독백은 아마도 작가의 독백일 것이고, 그것이 1817년 노예제 하의 미국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 속에 흑인 노예의 아이들이 노예매매 시장을 재현하며 놀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값을 매기며 왜 내가 그정도 가격밖에 안되냐를 따지며 놀고 있다. 이 장면을 보던 다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노예상인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다시 보았다. "그래서 수월하다는 사실이 무섭게 느껴졌구나. 이제 이유를 알았어."
"무슨 말이야?"
"수월함 말이야. 우리나, 아이들이나… 노예제도를 받아들이도록 훈련시키기가 얼마나 수월한지 전에는 몰랐어."  - P191

 

억압을 당하는 사람이 그 억압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억압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작가는 소설을 통해 노예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고발하고 있다. 노예제는 그저 채찍질이나 힘겨운 노동이나 감금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몸과 정신 삶에 대한 결정권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존엄을 전혀 지킬 수 없는 그래서 자신을 스스로조차도 존중할 수 없을 때 그것이 노예의 삶이고 노예제라는 것을 고발한다.

 

또한 눈에 분명히 보이는 악인 노예제를 비판함에 있어서도 당사자와 관찰자가 얼마나 인식이 다를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소설 속에는 중요 남성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절대악은 주변인물로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백인 농장주인, 다나가 생명을 구해주고 특별한 유대관계를 맺는 백인 농장주인의 아들이자 이후 농장주인이 되는 루퍼스, 그리고 현재 시점에서 다나의 남편인 백인 남성 캐빈까지 노예제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여러 층위의 인물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들 중 누구도 노예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왜 아직도 목숨을 구해준 보답으로 나를 죽일 뻔한 남자의 노예로 남아 있을까? 왜 그러고도 또 채찍질을 당했을까? 그리고 왜……… 왜 나는 지금 이렇게 겁을 먹었을까. 왜 조만간 다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만큼 겁이날까? -  P342

 

오직 다나만이 노예제가 외부의 온갖 억압과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까지 노예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자각하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저항한다. 1979년에 다나라는 여성을 창조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뛰어난 소설가일 뿐만 아니라 뛰어난 이론가, 페미니스트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만약 이 소설이 1817년을 그대로 배경으로 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당대에 뛰어난 사회소설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의 완성을 위해 작가가 소재로 쓰고 있는 것이 타임슬립이다. 세상에 타임슬립이라니..... 지금이야 영화고 드라마고 소설이고 너무도 흔해빠져서 식상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지만 1970년대에도 그랬을까? 타임슬립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도  필립 K. 딕의 1964년작 <화성의 타임슬립>이 처음이라고 한다. 소설에서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마크트웨인까지 거슬러 간다지만 이 시대에 그리 흔한 소재는 아니였을 것이다.

 

작가적 재능이라고는 일도 없는 내가 타임슬립을 상상하면 뻔하다. "로또 번호를 알아가야겠네, 아 너무 빠른 시대로 가면 주택복권 번호를 알아봐야 되나? 아! 로또나 주택복권이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딱 여기까지가 나의 상상이다. 조선시대나 구석기 시대 동굴로 갈지도 모르는데 그건 상상이 안된다. 어쨌든 지금의 타입슬립 소재의 드라마 영화 소설 등등은 클리셰화되어 나의 저 로또나 주택복권 번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욕에 빠진 나와 달리 잃어버린 옛사랑이나 과거의 원한이나 과거에 미제사건이나 걸치고 있는 옷은 다 다르지만 그것도 결국 복권에 다름 아니다. 타임슬립이란 소재가 소비되는 방식이 대부분 그러하다.

 

그러나 작가의 머리속에는 그런 클리셰가 하나도 없었나보다. 주인공 다나를 그것도 흑인 여성인 다나를 노예제의 한복판으로 데리고 가버린 걸 보니말이다. 이제 소재는 소설의 이야기적 흥미를 극대화시키고, 미국 노예제사회를 리얼하게 보여주는 장치로서 기능한다. 이 소설에서 타임슬립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공포이며 안타까움이고 ,소설의 극적 긴장을 고조시켜 주인공 다나의 감정으로 독자를 몰입시키는 장치이다. 또한 2개의 시대를  연결하면서 과거 세계와 지금의 세계의 사회문제를 말 그대로 리얼하게 파헤치는 리얼리즘 소설로 만들어주는 장치이다.

 

 그래서 소설 <킨>은 SF라는 장르에 갇힐 수 없다. 리얼리즘 소설로서도 빛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1979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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