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은 대답을 망설였다. 당시에는 그와 만나기만 해도 사상을 의심받던 시절이었다. 마치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여기듯이.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그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신발 위에 내려 쌓였다. 그는 그 거리에서 곧 지워질 것처럼보였다. - P70

다.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1958년 북한의 사람들에게 자유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들은 들으라는대로 듣고, 보라는대로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라는 대로 말해야만 했다. - P85

"저는 전봇대가 계속 웅웅거렸다고 기억하는데, 아빠 이야기는그렇지 않아요. 아빠는 기차가 떠난 뒤로는 세상이 적막했다고 기억해요. 기차가 떠나고 누군가 말했대요. 우리는 세상에 버려진것이라고, 그리고 또 말했대요. 죽으라고, 우리 죽으라고 이런 곳으로 보낸 것이라고. 그랬더니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고, 그러자엄마들도 울었고, 할머니들도, 아빠들과 할아버지들도 다 울었다. - P94

그 시절의 새벽, 기행의 이웃들은 아직 푸릇푸릇한 기운이 감도는 대동강 변을 따라 하염없이 걷거나 제자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거의 매일 목격했다. 눈만 돌리면 보이는 그 유령과도 같은이미지는 마치 기행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처럼 착각하게만들었다. 꽉 막힌 세계 속에서 오갈 데 없이 헤매는 기행의 비판받는 자아들처럼, 그렇게 서서, 혹은 버드나무 몇 그루 아래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며 기행은 누군가의 명백한 악의마저도 자기운명의 일부로 여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를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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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시네. 독침을 쏘는 말벌이 하늘을 가득 뒤덮은 풍경. 그나라에 적어도 시인이 한 명은 있는 셈이네."
"그 친구의 꿈은 시인이 아니라 영화감독이야. 북조선의 미하일 칼라토조프를 꿈꾸고 있지."......
"미래의 칼라토조프를 꿈꾸는 청년이 있는 나라라면 절대로 폐허일 수 없지." - P14

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벨라의 고향은 스탈린그라드였다. 지난 대조국전쟁에서 히틀러의 나치군에 맞서 스탈린그라드의 남녀가 맹렬한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지키려고 그토록 안간힘을쓴 이유가 무조건 사수하라는 스탈린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라는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도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이 청춘과 꿈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그 청춘과 꿈의 이야기가 있기에 어떤 폐허도 가뭇없이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 P15

벨라는 여행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기행의 노트를 떠올렸다. 서양식대로 페이지를 넘기면 결말부터 읽게 된다는, 세로로 써내려간, 동양의 글자들, 인생을 거꾸로 산다면 어떻게 될까? 결말을 안뒤에 다시 대조국전쟁을 거쳐 십대 시절로 돌아간다면? 장차 시인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네크라소프의 시를 읽는다.
면? 얘는 전쟁에 가서 돌아오지 못할 거야, 라고 생각하며 급우와대화를 나눈다면? 그렇다면 원래보다 더 슬플지는 모르겠으나 그순간에 더욱 집중하긴 할 것이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과거는 잘 알고 있으니, 오로지 현재에만, 지금 이 순간에만
- P26

"외로움을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럴 수밖에. 외로워봐야 육친의 따스함을 아는 법인데, 이 사회는 늘 기쁘고 즐겁고 백찬 상태만 노래하라고 하지. 그게 아니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고, 어쨌든 늘 조증의 상태로 지내야만 하니 외로움이 뭔지 고독이 뭔지 알지 못하겠지.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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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이 멋진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확 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작품이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쇼리>

더군다나 이 작가의 책은 단편집 아니면 모두 시리즈물이고 단행본이 딱 2권인데 그게 <킨>과 <쇼리>인것.

그것도 <킨>은 작가의 명성을 널리 알린 첫번째 소설이었고, <쇼리>는 작가의 마지막 소설이다.

뭔가 운명적인 게 느껴지지 않나?

어쨌든 <킨>을 읽었으니 "아 그럼 <쇼리>부터 읽고 나머지 <와일드 시드>와 <블러드 차일드>로 넘어가야지"한게 <쇼리>를 읽기 전까지의 생각.

 

이 2권의 공통점을 추린다면

<킨>은 시간여행, <쇼리>는 벰파이어의 세계로 일단 SF적인 또는 판타지를 주요 소재로 한다는 것.

2권 모두 이런 소재를 통해 당면한 사회부조리, 젠더의 문제, 인종차별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 정도 되겠다.

 

하지만 차이점이 더 큰데

일단 <킨>은 흑인인 여주인공이 미국 노예제시대로 타임슬립하면서 겪게 되는 일들을 이야기의 축으로 하면서 노예제의 진정한 문제점이 무엇인가. 그리고 여성 흑인 노예의 입장에서 보는 노예제란 어떤 것인가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주어 나를 옥타비아 버틀러의 세계로 입성하게 하였다.

 

그런데.........

 

<쇼리>의 시작은 흥미진진했다. 인간의 나이로는 10살정도밖에 안되보이는(하지만 벰파이어, 이책에서는 이나라고 하는 존재로는 50년쯤 산) 흑인소녀가 동굴에서 만신창이로 깨어난다. 기억을 모두 상실한채...

이후 쇼리라는 이 소녀가 자신의 종족을 찾아가면서, 그리고 왜 자신이 기억을 잃게 되었는지 사건을 알아가는게 이야기의 주요 내용인데 이야기의 흥미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감소한다. 뭔가 뻔하달까?

심지어 그 일이 해결되는 과정도 그리 흥미롭지 못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게 아니다.

내 생각에 작가는 뭔가 새로운 공동체의 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재의 이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것과는 다른 절대적으로 선하고 평등하고 평화로운 그런 공동체말이다.

그것이 벰파이어들의 공동체같은데 이건 시작부터 아 이건 뭐야라는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면 폴리아모리같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 폴리아모리에 진입하는 과정이다.

벰파이어가 어떤 인간을 흡혈하면, 그 인간은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끼게 된다.

그 느낌을 경험하게 하고 그 인간에게 묻는다.(여기서 중요한 건 최초의 흡혈경험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는거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

 

<네가 우리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 이 느낌을 늘 경험할 수 있고, 덕분에 너는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으면서 200년 내지는 300년을 살 수 있다고.... 하지만 네가 내기치 않으면 거부할 수 있어.

일단 우리 세계로 들어오면 너는 나의 흡혈과 나와의 섹스를 통해 항상 황홀한 이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나를 보호하고 나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 수 있어. 하지만 우리 사이에서 아이는 생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다른 벰파이어와 짝을 지어 아이를 낳고 가족을 만들어야 해. 물론 인간인 넌 너와 같은 처지의 다른 인간들과 짝을 짓고 아이를 낳는 것도 할 수 있어. 아니면 같은 동성끼리 짝을 짓는 것도 되고 무엇이든 네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어. 그렇게 벰파이어와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뤄 행복하게 살아가는거야. >

 

이 책에서 제시하는 공동체는 지극히 폴리아모리적인 세계다.

폴리아모리가 나쁘다는게 아니다. 사람의 생각은 다 다르니까 그렇게 사는게 더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나의 자유의지로 내가 결정한 것이 맞냐는거다.

 

인간이 저 훌륭해보이는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일단 벰파이어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그리고 일단 벰파이어에게 동의하지 않은 흡혈을 당해야 한다.

또한 저 흡혈을 한 번 당하고 나면 중독증세가 시작되는거다.

인간이 동의하는지 안하는지 질문하는건 그 다음이다.

 

아니 나는 폴리아모리고 뭐고 싫을 수 있잖아.

근데 내가 왜 선택당해야 하고, 벰파이어의 독에 일단 중독시키고 나서 묻는건 뭐냐고?

그게 정말 차별없는 행복한 공동체가 맞을까?

이 책에서 주요 조연인물이 쇼리가 깨고 난 이후 처음 만난 라이트라고 하는 청년이다.

이 청년은 사실 알 수 없는 이유로 쇼리에게 마음이 끌리고 흡혈을 당하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쇼리를 사랑하게 된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바로 이 라이트라는 청년이 쇼리의 세계를 받아들여가는 과정인데, 내가 보기에 이 과정은 정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라이트는 벰파이어의 공동체 마음에 안든다. 왜냐하면 쇼리를 공유하고싶지 않으니까.

라이트가 상징하는 세계는 기존의 일부일처제 사회다.

하지만 이미 흡혈을 당했고, 쇼리에게 중독되었고, 그래서 사랑을 하고,

또 하지만 쇼리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혼자 쇼리를 독점하는 것은 안되고.....

그래서 점점 자신을 바꿀 수밖에 없게 되고....

 

나는 점점 저 라이트의 입장에 절절하게 동일시하면서 소설을 읽게 되었다.

그 결과는 도대체 이 빌어먹을 공동체는 뭐야

이게 <킨>의 세계관이 도달한 궁극적 이상향이라면 아 정말 난 동의못하겠다.

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냐 폴리아모리냐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소설에서 이상적인 공동체를 표현하고자 한다면 벰파이어든 인간이든 완전한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잖은가 말이다. 내가 <킨>에서 만난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라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동체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벰파이어의 것이다.

심지어 그 벰파이어들은 전부 부자이기까지 하다.

평등하지 못한 관계, 애초의 자유의지가 묵살된 관계위에 성립된 공동체가 정말 이상적인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

 

만약 작가가 이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상적인 평등한 공동체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 소설을 썼다면 아마 내가 심각하게 책을 오독한 거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한에서는 그런 비판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가 살아있다면 구글 번역을 열심히 해서 편지라고 보내고 싶은 기분이다.

 

<쇼리>덕분에 당연히 읽으리라 했던 책 2권 <와일드 시드>와 <블러드 차일드>가 읽을 책 순서에서 확 밀려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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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1-01-03 04: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꾸역꾸역 읽다가 리뷰라도 보려고 들어왔어요. 킨하고 블러드 차일드 읽었는데 둘 다 좋아요. 추천합니다. 와일드 시드는 사두기만하고 아직 못 읽었네됴. 쇼리는 으으.. 이제 반 정도 읽었는데 얼른 읽고 치워야겠어요.

바람돌이 2021-01-05 01:08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오랫만이예요. 잘 지내시죠?
킨은 읽고 너무 좋아서 쇼리를 든거였는데 실패. ㅎㅎ 앞에 읽은 킨이 아니었다면 전 중간에 덮었을텐데, 지금은 그냥 덮을걸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블러드 차일드는 대체로 다 평이 좋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어요.
 

"그가 싫어하게 놔둬, 쇼리, 그와 대화를 해. 그를 도와줘. 안심시켜줘. 폭발하지 않게 다독여줘. 그러면서도 본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그만의 방식으로풀게끔 해주는 거야."
- P113

 "이 일이 일어난 원인은 셋 중 하나일 거예요. 몇몇 인간들이당신네 종족의 존재를 알고 죄다 위험하고 사악한 뱀파이어일 거라고 결론 내리고 벌인 짓이다. 아니면 어떤 이나 집단 혹은 개인이 쇼리의 가족이 인간과 이나의 DNA를 섞어서 낮에도 깨어 있고 햇빛에도 쉽게 화상을 입지 않는 아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걸 질투해서 벌인 짓이다. 그것도 아니면 인종차별주의자들, 아마도 이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쇼리의 피부가 검은 것을 알고 당신들이 낮에 겪는 문제를 해결할 비법이 멜라닌이라는 사실에 비위가 상해서 벌인짓이다. 이 세 가지가 가장 유효해요.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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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1919 - 신문기자, 100년 전으로 가다
오승훈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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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3.1운동에 대해 얼마나 알까요?

예전에 삼일절을 삼점일절이라고 읽는 아이들 때문에 온 나라가 한번 떠들석한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하고도 가슴아픈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명칭말고 아는 것을 얘기해보자면 3분정도를 채우기도 쉽지는 않을듯 보입니다.

 

여기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삼일운동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실제 계획과 진행과정, 결과, 이후 역사적 의미까지를 씨줄로 하고,

1919년의 한국 민중의 삶의 형태와 다른 나라들의 상황까지를 날줄로 엮어 3.1운동이라는 거대한 판을 짜보았습니다.

우리가 3.1운동에 알아야할 거의 모든 것들이 담겨있네요.

 

1919년은 조선이 식민지가 된지 10년째에 들어서던 해입니다.

이 해의 시작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그 전해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처리과정에서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였지요.

물론 이건 패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제국을 분해하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배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겁니다.

오죽하면 3.1운동 와중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직접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오고 있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았을까요.

 

흔히 3.1운동이라는 명칭 때문에 사람들은 이 거대한 운동이 3월 1일 하루 또는 3월 초 며칠간에 걸친 만세운동이었다고 오해들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19년 1월 부터 국내, 중국 상해, 만주, 연해주, 일본, 미국 등 우리 민족이 있는 곳이면 모든 곳에서 독립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민족운동가들은 긴박하게 모이고 계획하고 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의 함성은 민족운동가들이 전국으로 비밀리에 나른 독립선언문과 서울 학교의 휴교령으로 귀향하던 학생들을 따라 지방으로 번져나갔습니다.

실제로 3.1운동은 3월과 4월 2개월에 걸친 거대한 독립만세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군중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 되었다 믿고 만세를 부른다"고 하였고, 또 일부는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니 독립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279쪽)

 

전북 이리 지역의 교사였던 문용기 선생은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의 칼에 양팔이 잘리면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순국하십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리 절박하게 한 것일까요?

또 무엇이 그들을 그리 용감하게 만든 것일까요?

식민지에서 산다는 것은 그저 나라의 주인이 바뀐다는 형식이 아닐 것입니다.

1920년대 동아일보에 보면 우리 나라 곡창지대인 전북지역에서 추수 직후에 농민들이 하루에 1끼도 제대로 못먹어 굶어죽는 이가 속출한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일본의 쌀 수탈, 태형제, 임금차별 등등 민중들의 생활 곳곳의 변화가 나오네요.

식민지 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생존의 문제였던 것일겁니다.

나와 나의 가족의 생존이 언제 어디서나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성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구현된다는 것에서 절망이 기본 바탕에 깔렸을 것이고, 그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희망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했다는데 아마도 3.1운동의 거대함이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3.1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을 이야기하고 유관순열사와 같은 학생들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실제 3.1운동에서 일제에 체포된 사람의 반 이상이 농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자들, 도시빈민들이 있었습니다.

3.1운동은 정말 특이한 운동입니다.

초기에 지식인들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계획을 했지만, 그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일본 경찰에 스스로 전화해 체포되어버린 이후 이 운동에는 지도 조직도 지도 세력도 없습니다.

만세운동의 전국화에 큰 공헌을 한 학생들도 어떤 특별한 조직을 중심으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조직도 없고, 지도세력도 없는 운동이 2달간을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세계의 어떤 운동도 이렇게 진행된 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 식민지 한국인들의 절망이 얼마나 컸는지를 감히 짐작해봅니다.

이 책의 뒷부분에는 민족대표 33인이 아니라 민중대표 48인이 소개됩니다.

소중한 자료이고, 감사한 기획입니다.

그분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보며 그 때 그분들의 마음을 가늠해보았습니다.

 

3.1운동 이후 우리의 독립운동에 드디어 대중이 주인이라는 의식이 생깁니다.

이전의 독립운동이 명망가 중심을 벗어나지 못했던데 대해 처절한 반성이 생길 수 밖에요.

역사의 주인으로서의 민중,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의 민중이 전면에 나서게 되는거지요.

또한 3.1운동은 그 자체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들어냅니다.

 

"이 땅의 모든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내 정치경력은 3·1운동으로 시작되었다. 대중운동의 힘이 내 존재를 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미국인 기자 님 웨일스를 통해 세상에 털어놓은 회고담 <아리랑>에서 혁명가 김산은 밝혔다. 정확히 오늘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벌어진 기미년 3월 1일의 싸움이 당대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집약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말이다.
- P351

 

이전에 김학철 선생님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속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3.1운동 때 선생은 겨우 10대의 중학생이었는데 그 길로 어머님이 숨겨두었던 비상금을 훔쳐서 상해로 떠납니다.

그것이 독립운동 투신의 길이었고, 그 분이 고향을 다시 밟는데는 해방이 되고도 40년이 더 흘러야 했지요.

 

3.1운동을 직접적으로 겪었던 간접적으로 들었던 이후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은 그 자체로 정신적 지주였고, 고난을 이겨내는 근원이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끝까지 싸우게 했을까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존경스럽지만 나라면 그 고통의 세월을 이겨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궁금증입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3.1운동의 기억이 그분들이 그 세월을 이겨내는 큰 힘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정말 많은 인물들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3월 1일의 거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노력하는지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기도 합니다.

또한 역사적 인물들의 여러 면면을 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중국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여운형 선생은 30대 초반이었던 그 때에서 참 스마트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력거군의 호객행위에 짜증을 내는 조선인을 향해 말끔한 모습으로 "상해에서 모든 조선인은 자신이 외교관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라고 일갈하는 그분의 모습은 사진에서 보이는 스마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3.1운동의 준비부분에서 의외였던 인물이 있습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인 최린이죠. 나혜석과의 연애로 더 유명한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최린이 보여주는 협상과 기획 능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준비의 반 이상이 최린의 노력과 능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요.

어쩌면 그의 탁월한 현실감각이 이후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변절입니다.

그나마 해방이후 반민특위 재판에서 최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민족 대표에 한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를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사지를 소에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

 

반민특위에 회부된 친일파 중에서 유일하게 반성한 사람이 최린입니다.

 

3.1운동은 여성의 역할이 정말 컸던 운동이기도 합니다.

그 중 어떤 사람보다도 3.1운동 그자체라고 할만한 분이 있으니 김마리아선생입니다.

 

국외에서 3·1운동을 촉발시키고, 운동이 벌어지자 국내에들어와 이를 추동하고, 운동이 지나간 뒤에는 그 가치를 이어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김마리아는 남녀를 넘어 3·1운동의 정신에가장 부합한 인물이라고 할 만하다. - P354

 

아 그리고 이승만을 빼놓을 수 없네요.

이 시기에조차 이승만은 기회주의적입니다. 대학동문인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얘기하자 오로지 거기에만 매달려서(실제로는 만남조차 거부당합니다.), 조선이 독립할 길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것 뿐이라고 헛소리를 합니다. 나아가서는 국제연맹(실제로는 미국이죠)이 일본 대신 조선을 통치해달라는 위임통치를 건의하기까지 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을 가리켜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며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라고 일갈합니다.

이승만은 한번도 제대로 된 독립운동가였던 적도 없고, 해방 이후에도 무능하고 잔인한 야심가였을 뿐입니다.

그 무능한 야심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는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릴 뿐입니다.

그런 이승만을 국부라고 떠드는 이들이, 이번 광복절에 친일파 처단을 얘기하니 국론분열이라고 떠드는 이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아직도 3.1운동을 기억하고 독립운동을 되새기며, 친일파의 역사적 처단을 되새기고 되새겨야 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앞에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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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20-08-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1운동은 헌법 전문에 나오고 기념일을 만들어 기릴 만큼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지만, 반면에 너무 유명해서 저처럼 단편적인 지식만 알고 있으면서 제대로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나 저같은 독자분들께 필요한 책이네요..

바람돌이 2020-08-20 12:00   좋아요 0 | URL
기자들이 당대에 기사로 쓰듯이 써서인지 현장감있게 읽혔어요. 좋은책인데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

감은빛 2020-08-21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결제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삼일운동은 전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대단한 저항운동이죠.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우리나라 밖에 없었다죠?

삼일운동 이후에 본격적으로 항일독립투쟁에 합류하는 대다수는 사회주의 계열이었죠. 우리 정부와 사회가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절대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용이죠.

가끔 그런 상상을 해요. 만약 해방 후 친일부역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 지금쯤 우리 사회는 그래도 괜찮은 사회가 되었을까? 바람돌이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ㅎㅎ

바람돌이 2020-08-21 20:47   좋아요 0 | URL
독립운동사 특히 무장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역할이 가장 크죠. 하지만 삼일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항일독립투쟁에 합류하는 대다수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요. 삼일운동 직후에는 민족주의 진영도 무시하기 힘든 숫자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기의 사회주의라는 세력들의 이념이란게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를 표방한다고 보기도 좀 어려운 부분이 많고요. 실제로 이 시기 사회주의는 세계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며 민족주의에 대립하게 되는데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가들은 민족주의를 버릴바에야 사회주의를 갖다 팽개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

그리고 요즘 학교 교과서에는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운동도 같이 실린답니다. 물론 중도 좌파까지지만요. 사회주의라는 명칭도 정확하게 나오고 김원봉, 여운형, 조선의용대정도까지는 가르쳐요. 극좌쪽의 박헌영, 이관술, 그리고 해외에서는 동북항일연군은 빼먹지만요.

해방 후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잡지 않았다면은 이승만이 권력을 잡지 않은거겠죠?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아까운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되었겠죠. 이승만이 정말 많이 죽이거든요. 특히 6.25전쟁 중 국민보도연맹을 통해 뭔가 비판적인 생각을 말하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다 죽이죠. 그 피해의식이 저는 정말 우리 역사에 끼친 악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독립운동을 하고도 죽임과 배척을 당하는 국가, 친일 행위 이후에도 여전히 잘먹고 잘 살 수 있는 나라 - 이건 아마 집단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전쟁이 끝난지가 언제고, 남북의 경제적인 차이가 얼마인데 아직도 대북 공포 선동이 먹히는 나라인건 이 트라우마가 여전히 영향을 끼치는 거라고도 생각이 들고요. 역사에 만약이 없으니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가 그토록 오랫동안 입이 막힌 사회가 되지는 않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생각도 행동도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근데 실제 어땠을까를 추측하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