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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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명성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것.

이 책에서도 그 재능은 여지없이 당당하게 거칠것 없이 드러난다.

서예로 비유하자면 일필휘지라고 할까?

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뭔가가 한바탕 확 휩쓸고 지나간 분위기다.

책을 읽으면서 뭘 곱씹거나 되새기거나 그런거? 할 시간이 없다.

숨이 목끝까지 탁탁 막히며 헉헉거리며 읽어야 한다.

 

심지어 '빙의'까지 해야 한다.

마치 내가 메흐메트인듯, 헨델인듯, 톨스토이인듯 그렇게....

좋게 이야기하면 역사이야기에 확 빠져들어가고,

다르게 본다면 역사를 냉정하게 성찰하지 못하고 작가의 의도와 생각대로 휘말려버린다고도 하겠다.

 

예를 든다면 츠바이크는 이 책에서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고 마지막 몰락을 하게 된데에는 그루시라고 하는 그의 부관이 너무도 평범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했던데 큰 원인이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그것이 당시의 나폴레옹의 한계였다.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나폴레옹의 의중을 알아채는 뛰어난 부관이 있을 수 없는 상황, 평범하게 성실할 뿐인 자에게 대담한 영감을 요구하는 직위를 맡길 수 밖에 없었던 그것이 몰락 앞의 나폴레옹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폴레옹의 실패는 너무도 당연히 나폴레옹의 책임이어야 하는데.....

불쌍한 그루시가 도대체 뭘 잘못했느냐 말이다.

애초부터 능력에 맞지 않는 임무를 맡긴 상관이데 말이다.

그런데 츠바이크의 글을 읽다보면 그게 또 그럴싸해 보인다.

이게 이런 역사책들의 가장 큰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흥미를 가지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과도한 동일시로 역사를 작가의 뜻대로 단면만으로 보게 만든다는 단점이 그것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츠바이크는 선택한 역사적 장면은 모두 12개이다.

이것이 어떤 기준인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내 생각엔 그저 작가 개인적인 관심사 또는 작가가 가장 잘 쓸 수 있었던 장면 정도가 아니였을까싶다.

딱히 기준이랄게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모든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맞다.

하지만 해당 사건에 대해 사전 지식이 좀 있는 경우는 몰입감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츠바이크에게 휘말려 가면서도 내가 원래 알고 있는 지식과 생각을 계속 떠올리면서 어 이거 맞아 진짜 뭐 이런 브레이크를 걸어주게 되더라.

결국 작가인 츠바이크가 의도한 독서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내가 사전 지식이 하나도 없는 경우의 몰입감은 상당하다.

내게는

대양을 건넌 최초의 말 ―1858년 7월 28일, 대서양 해저 케이블 설치가 그러했다.

역사적 사실로 해저 케이블이 설치되고 전신이 연결되고, 곧 대양간에 전화가 가설되고.....

이론으로야 그 역사적 발전과정을 알고 있었지만 문과 감성 충만한 나는 그것의 기술적 설치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본적이 없다.

그런데 정말 한 번 상상해보자. 대서양의 그 해저에 케이블을 늘어뜨려서 전신을 연결한다?

그 시절에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지 않을까?

유럽에서 아메리카까지 대서양에 깔 끊어지지 않은 케이블을 준비하고, 그 케이블을 실어나를 배를 마련하고, 그 케이블을 바다에 빠뜨리면서 서서히 항해를 하고....

그냥 미친짓이었을 것 같은데 그 미친 짓을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해내고 만 필드라는 인물을 읽으면서는 정말 이 인물에 폭 빠져 츠바이크가 원하는 바로 그 감성으로 책을 읽었다.

 

그래서 결론은?

이 책을 읽을 때는 조심하시라.

츠바이크가 살짝 파놓은 뻥의 세계에 빠져버릴 수 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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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15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츠바이크가 파놓은 구멍에 홀딱 빠지겠군요. 지극히 문과감성 충만인지라~~
미리 알려주셔도 전 못빠져 나올거 같아요 배경지식 전무합니닷!~~

바람돌이 2023-02-15 23:35   좋아요 1 | URL
저도 못빠져나와요. 츠바이크의 글이 주는 매력이 워낙 크니 말입니다. ^^ 전 이런 역사에세이류나 평전만 좋은줄 알았는데 츠바이크가 쓴 소설도 굉장히 좋더라구요. 이래 저래 능력있는 작가는 뭘 쓰도 잘 쓴다는걸 보여주는 작가가 아닐까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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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음.......뭔가 쓴소리를 하는건 좀 쉽지 않긴 하지만....


내가 살고싶은 삶은 이런거야.
내가 하고싶은 사랑을 보여줄게.
나는 이런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살고싶어.
하여튼 내가 원하는 아름다움은 이런거야하는 소망을 몽땅 모아 놓아 늘어놓은 느낌의 책.
현실은 없고 소망만 있는 판타지!


작가의 최근 책인 <시선으로부터>를 읽을 때도 딱 걸렸던게 지나치게 계몽적인 문체와 관점들이었는데 이 책은 계몽의 절정인듯 보인다.
20대의 정세랑 작가가 쓴 이 책은 비유하자면 심훈의 <상록수>를 읽는 느낌이랄까?


그래도 하나 느껴지는건 작가가 참 좋은 사람일것같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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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9-12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심훈의 <상록수>라고 하시니 느낌이 팍 옵니다!

바람돌이 2020-09-12 15:51   좋아요 0 | URL
10대때는 상록수 읽고 엄청 감동받았는데 말이죠. 지금은 너무 늙었나봐요. ㅎㅎ

수이 2020-09-15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록수 제 열다섯 독서인생의 절정이었죠 ㅎㅎ 반가운 마음이 더 커요. 정세랑은 욕심만 좀 줄이면 더 독자층이 넓어질 거 같아요. 전 작품 읽을 때마다 너무 호불호가 커요 :)

바람돌이 2020-09-15 23:1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때쯤 읽었었죠. 상록수. 눈물 콧물 빼면서 읽었던듯요. ㅎㅎ 정세랑작가는 2권 읽었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신작이 나오면 일겠디만 옛날 책을 찾아읽지는 않을듯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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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아주 고전적인 자세와, 그에 답하는 한아의 전혀고전적이지 않은 자세. 연기와 빛 속에서 그건 정말 희한한구도였다.
"나도 저렇게 여기에 왔어. 2만 광년을, 너와 있기 위해왔어."
- P93

"엥, 그렇게 말하면 좀 저열하게 들리지 않아? 조금 다르다고! 어찌되었건 내가 본 너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으로,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거 같았어.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지. 너는 비 오는 날 보도블록에 올라온 지렁이를 조심히 화단으로 옮겨주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고래를 형제자매로 생각했어. 땅 위의 작은 생물과 물속의 커다란 생물까지 너와 이어지지 않은 개체는 없다는 걸,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
나는 너의 그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 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 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 너는우주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너는너무 멀리 있는데, 나는 왜 널 가깝게 느낄까.  - P102

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던거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었던 거지. 질량과 질감이 다른 다양한 관계들을 혼자 다 대신할 수는 없었어. 역부족도 그런 역부족이 없었던 거야.
- P146

"하지만 전 우주가 자본주의가 불완전하다는 생각에는동의하니까. 새로운 노력들과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이 가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몰라. 지구도 재밌는 샘플이니 어쩌면 여기서 아주 다른 대안이 탄생할지도 모르고."
- P159

그 입술이 원래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따라 만든 모형이라는 건, 껍질뿐이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껍질은 언제까지나 남기 마련이었다. 지구와 은하계와 이 차원을 넘어선다 해도 분명 알 수없는 세계가 더 큰 바깥벽으로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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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 그만둘 만한 가벼운 직장을 그래서 택한 거니까.
"전전 직장은 그만두기 전에 불성실하다고 잘려버렸고말이지. 직업윤리 없는 사람은 다른 윤리도 엉망이야. 진짜라니까?"
"음, 아시아인들이 지나치게 성실한 편이니까 그걸 감안하면 지구 평균은 되지 싶은데…… 진득하게 하고 싶은 분야를 찾으면 달라지겠지."
- P18

‘누구나 하나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역사상 가장 오래 되풀이된 거짓말 중 하나일 거라고 주영은 생각했다. 세계를 만들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탁월하고 독창적인 사람들이 만든 세계에 기생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기여하는 것이아니다. 거인이 휘저어 만든 큰 흐름에 멍한 얼굴로 휩쓸리다가 길지 않은 수명을 다 보내는 게 대개의 인생이란 걸 주영은 어째선지 아주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끊임없이 공자와 소크라테스의 세계에, 예수와 부처의 세계에,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의 세계에, 테슬라와 에디슨의 세계에,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의 세계에, 비틀스와 퀸의 세계에,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세계에 포함되고 포함되고 또 포함되어 처절히 벤다이어그램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말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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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축제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끝이 났고, 모든 전투는 이 노래와 함께 시작되었다. 주마프와 네르빈덴의 결전에서도 연대들은 이 노래를 불렀다.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방법이라고는 나누어주던 술의 양을 두 배로 늘리는 것밖에 모르는 적의 장군들은 이 무시무시한 노래의 폭발적인 위력에 어쩔줄 몰라 했다. 이 노래가 수천의 병사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와 철썩이는 파도처럼 자기들 진영을 향해 몰려들 때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프랑스의 모든 전선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열광하고 죽어가던 그 전쟁터에서 〈라 마르세예즈)는 날개를 단 승리의여신처럼 하늘에 떠돌았다.
- P138

오직 역사만이만들어낼 수 있는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지만, 이 혁명 찬가의 지은이는 이제 혁명 동참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저 불멸의 노래를 지어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혁명을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었던 그 사람이 이제 온 힘을 다해 혁명을 가라앉히고 싶어했다.
- P139

인간의 삶에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이런 위대한 순간은, 잘못불려나와 그 운명의 순간을 장악하지 못한 인간에게는 모질게 복수하는 법이다. 조심성, 복종, 노력, 신중함 같은 소시민적인 미덕들은 저 위대한 순간의 불길 속에 아무런 힘도 없이 녹아내리고만다.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언제나 천재를 원하고 그에게는 또 불멸의 모범이라는 명예를 안겨주지만 유순한자에게는 그렇지 못하다.오히려 경멸하며 밀쳐버린다. - P164

현재 암스테르담, 모스크바, 나폴리, 리스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파리에서도 알 수 있게 된 이후로 세계는 정말로 변화해버렸다. 이제 최후의 한 걸음만 내디디면 되었다. 그러면 지구상의 서로 다른 부분들은 저 거대한 연결망에 뒤엉키게 되고, 전인류의 공통된 의식이 생겨날 참이었다.
- P518

하나의 기적이 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이기적을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굽히지 않는 용기야말로 학자들의 망설임에 창조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 P220

그러나 새로 시작된 20세기는 초조하게 손길을 뻗쳤다. 실험실에서 새로운 무기들을 다듬고, 위험에 맞설 새로운 갑옷을 고안해냈다. 자연의 온갖 저항은 정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을 더욱부채질했다. 새로운 세기는 모든 진실을 알고자 했으며, 이미 처음 10년 동안에 그 이전 수천 년 세월이 도달하지 못한 것을 넘어설 참이었다. 개인의 용기에 국민 간의 경쟁심이 합류했다. 단순히 남극 자체만을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에 맨 먼저휘날리게 될 국기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 P299

영국인들의 경우 천재성조차 의무를 이행하는 형태로 등장한다. 이런 스콧 같은 부류의 사람은 영국 역사에서 이미 수없이등장했다. 그런 사람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이름 없는 섬들을 정복하고, 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고 세계에 대항해 전쟁을 해냈다.
언제나 강철 같은 에너지와 동일한 집단의식 그리고 똑같이 냉정하고 감정을 억누른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 P300

3월 29일, 그들은 어떠한 기적도 자신들을 구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불운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보다는 다른 모든 불행을 견뎌냈듯이 이제 죽음을 견뎌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각자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갔고, 그들의 마지막 고통은 바깥세상으로한숨 한 번 새어나오지 않았다.
- P317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 이제 이 사람, 블라디미르 일리치울리야노프가 밖으로 나왔다. 그제만 해도 구두 수선공의 집에 은둔해 있던 이 남자는 수백의 손으로 들어올려져 장갑차 위에 세워졌다. 그 장갑차 위에서 그는 군중을 향해 최초의 연설을 시작했다. 거리는 진동했다. 곧이어 ‘세계를 경악하게 한 열흘‘이 시작되었다. 탄환이 날아가 한 나라, 한 세계를 날려버린 것이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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