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에는 행랑살이나 셋방조차 구하지 못한 빈민들이 수두룩했다. 그들은 날품팔이, 공사장 막일꾼, 행상으로 연명하며 시내와 교외를 가리지 않고 제방, 하천변, 다리 밑, 산림의 공한지, 관유지, 사유지에 움막이나 토막을 짓고 집단으로 거주했다. 움막은 풀이나 짚으로 지붕을 이어 조그맣게 지은 것이고, 토막은 땅을 파고 위에 거적을 얹은 다음 흙을 덮어 추위나 비바람만 가릴 정도의 집이었다.
토막민에 관한 기사는 신문이나 잡지에 심심찮게 나왔다. 상왕십리에 사는 어느 할머니는 반쯤 쓰러진 컴컴한 토막에서 열다섯 살손자와 단둘이 살았다. 살림살이라곤 귀 떨어진 항아리 한 개, 쭈그러진 양철 대야 한 개, 석유 한 상자였다. 다 팔아도 오십 전이 못 된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할머니는 양철 쓰레기통을 줍는 손자와 실낱같은 목숨을 이어간다고 했던가. 13 - P49

과연 그랬을까? 명창대회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윤 직원은 경성에서 하는 명창대회라면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날 윤 직원이 명창대회를 보는데 쓴 돈은 95 전이었다. 춘심이를 데리고 정상적으로 봤으면5원은 썼을 것이다. 윤 직원이 별난 취미를 즐기려고 부민관을 오가는데 여러 사람이 손해를 봤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만석꾼에다 은행에 10만 원을 예금한 윤 직원이 쉽게 등쳐먹는 상대는 언제나만만한 약자들이었다.
- P90

그러나 사람 욕심 끝이 없다고, 점점 못마땅한 것이 하나둘 늘었고 그 불만은 고스란히 대복이에게 쏟아졌다. 국악방송이 없는 날이면 윤 직원은 왜 날마다 나오는 소리를 느닷없이 못 나오게 하느냐며대복이를 쥐 잡듯 잡았다. 물론 대복이는 그때마다 열심히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그날 프로그램을 다르게 정했으니 집에 앉아서 라디오를 아무리 주물러도 남도소리는 나오지 않는 법입니다요."
"법이라께? 그런 개 같은 놈의 법이 어딨당가? 어떤 놈의 소리가엊저녁까지 들리던 게 오늘 갑자기 안 들리고? 기생이랑 광대가 다급살 맞아 죽었다덩가?"
- P102

활동사진이 조선 대중에게 널리 공개된 것은 1903년 동대문 한성전기회사 기계 창고에서였다. 특별한 주제도 없이 구미 각국의 풍경이나 관광지, 춤 같은 것을 50초 정도 보여준 것에 불과했지만 생전처음 보는 조선인들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설렁탕 한 그릇 값을 내고 보러 가서 화면이 나올 때마다 놀람과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차가 역에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면 진짜 기차가 눈앞으로 튀어나오는 줄 착각하고 비명을 질렀고, 드레스입은 여자 무용단원이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면 갓 쓰고 도포 입은영감들이 그 절을 받으려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 P119

 북촌에 활동사진 전용관이 생긴 것은1912년 우미관이 처음이었다. 우미관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관람석에 긴 나무 의자를 두었는데, 빽빽이 앉으면 1000명까지 들어갔다. 우미관은 조선인 변사만 두고 조선말로 무성영화를 해설하는 상설 영화관으로 운영되었다. 종업원도 모두 조선인이었고, 일본인 주인은 일체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겉으로만 보면 조선인의, 조선인에의한, 조선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
- P120

1907년 8월1일 아침, 서 참위 대대는 도수훈련을 한다는 명령에 따라 맨손으로 동대문 훈련원(지금의 국립의료원 훈련원 공원 터)으로 갔다. 그러나 그것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일본의 속임수였다. 이미 일본군 부대는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채 훈련원을 이중·삼중으로 포위했고, 대한제국 군인들은 졸지에 치욕의 해산식에참가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 훈련원에 도착하지 않은 대대가 있었다.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1200여 명, 그들은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을도화선으로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꺼내 시가전을 벌이며 봉기했다.
남대문에서 서대문에 이르는 길이 피바다가 될 정도로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이었다. 그때 이충순은 서소문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체포당하기 직전 자결했다.
- P133

나운규의 아리랑>이 상영되었을 때는 변사가 나라 잃은 젊은이의 슬픔을 얼마나 절절하게 해설하는지그 자리에 임검 나간 일본 순사가 변사를 무대에서 끌어내린 적도있었다.
발성영화는 그런 즉흥적 변주의 맛도 짜릿한 긴장감도 없었다. 발성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너무 바쁘고 피곤해졌다. 영어, 불어, 독어 등 원어 음향이 쾅쾅 나오는데 일본어 자막은 독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극장에서는 발성영화에 변사 해설을 붙였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관객의 귀는 동시에 떠들어대는 원어 음향과 해설자 설명으로고막이 먹먹해졌고, 관객의 눈은 영화 장면과 알지도 못하는 일본어자막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심훈은 조선의 영화팬처럼 가엾은 존재가 없다며 개탄했다.  - P143

그러나 식민 도시 경성의 다방은 낭만적인 문화공간만은 아니었다. 다방은 갈 곳 없는 예술가들이 하루 대부분을 소비하고, 고학력실업자들이 피곤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벽화와 금붕어‘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벽화는 차 한 잔을 시켜놓고 두세 시간이 넘도록 그림처럼 앉아 있는 사람을 말했고, 금붕어‘는 ‘벽화와 반대로 하루 종일 이 다방 제다방을 돌아다니며 물만 마시는 사람을 일컬었다.  - P156

구한말 서양인을 통해 들어온 커피가 대중에게 선보인 것은호텔 다방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하면서다.
개항 직후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대불호텔, 정동의 손탁호텔,
소공동의 조선호텔 다방이 대표적이었다.
서양식 건물 호텔에서 소비되는 수입품 커피는 상류층의사교생활과 선진적인 서구 문물을 상징했다.
- P160

영이는 안방에 누워 마음속으로 그동안의 원한과 증오를 순이에게 쏟아냈다. 내일 아침 순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없이 비웃어주고 싶었다. 영이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듯 내일 아침에 순이가 사내를 졸라 가족에게 자장면을 시켜줄지 궁금했다. 그때 순이는 자장면을 더럽다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영이는 내일 보란 듯이 자장면을 맛있게 먹을 작정이었다. 영이는 곁에 누워 있는 부모의 얼굴을살펴보았다. 지금 건넌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뻔히 알면서도부모는 놀라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이는 갑자기 한기가 들었다.
‘이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영이는 베개를 고쳐 베고 눈을 감았다. 여윈 뺨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너마저 집안 식구에게 자장면을 해다 주게 됐니? 너마저, 순이야.
- P177

명월관은 1914년 인사동 이완용 저택(옛 순화궁)을 빌려 지점을 내고, 그 집에 있던 태화정의 이름을 따서 태화관(지금의 태화빌딩 자리)이라고 불렀다. 5년 뒤인 3월 1일에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모여 3·1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두 달 뒤 명월관 광화문 본점은 의문의 대화재로 전소되고 돈의동(지금의 피카디리 1958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 P184

9년 먼저 준공한 <동아일보> 사옥은 대지면적 400평, 건축면적140평, 연면적 470평에, 총공사비 14만 7200원이 들었다. 공사 기간은 1년 3개월이었고,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3층이었다. 두 사옥의 규모와 공사비를 비교하면 〈조선일보>의 물량 공세가 압도적이었다. 당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조선일보> 방응모는 자가용, <동아일보)송진우는 인력거, 〈조선중앙일보) 여운형은 뚜벅뚜벅"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수치였다.
- P192

지주에게 유린을 당한 뒤 버림받고 쫓겨났다. 먼저 당한 간난이가 넋나간 듯 경성으로 흘러와 공장에 들어간 뒤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 노동운동가를 통해 차츰 사회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자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말 못하던 짐승이 말하는 사람으로 환생한 기분이었다. 스스로 존재 의미와 가치를 깨달은 감격은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간난이는 그 감동의 자존감을 선비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선비는 간난이를 따라 인천 공장에 가기로 약속했지만 아직 간난이가 노동운동을 하는지는 몰랐다. 간난이는 자신이 대동방적에서 쫓겨나기 전에 선비가 학대받던 여성에서 단단한 노동자로 변한모습을 상상해보았다. 간난이는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 P222

다. 인텔리의 껍데기를 벗겠다며 노동판에 뛰어들면서 박준구는 깨달았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역사에서 기술과 인문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한참 뒤, 오래전 그토록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시를쓰기 시작했다. 노동이 룸펜의 무기력을 밀어내자 시는 허무가 아니라 희망이 되었다.
- P258

은 농사꾼…. 100년 전에 살았던 그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인력거꾼 김 첨지는 택시운전사나 택배기사로, 삼청동꼭대기 사글세방의 박준구는 옹색한 고시원의 취업준비생으로, 여급 영이와 순이는 무슨무슨 방의 도우미로…. 그들의 직업과 공간은다양하게 변했지만 본질적으로는 100년 전과 어딘가 닮은 모습으로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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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최소한 고립 상태를 해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러한 행위가 도시의 이른 멸망을 유도하게 될 것을 두려워했고, 대부분은 어쩔 줄을 모른 채 공포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감염은 속절없이 퍼져나갔다. 온갖 뜬소문과 괴담이 돌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의 혈액을 한꺼번에 주입하여 면역 기능을 강화하면 감염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속설이 퍼겼을 때, 불멸인들은 서로를 해치기 시작했고, 폭력은 감염병보다 빠르게 전파되었다.
- P36

완전한 믿음도 완벽한 연기도 아닌,
내가 라이오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상태. 기계가 죽음을 맞이할 때 어떤 상태가 되는지 나는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런 종류의 중첩 상태가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열흘 동안, 셀은 어떤 순간에는 나를 라이오니라고 믿고, 어떤 순간에는 그렇게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라이오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낯선존재로 대하며 이어지는 그 기나긴 이야기가 가능했을것이다.
- P47

나는 지금도 가끔 눈을 감으면 셀을 만난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도시를 지키며 소리 내어 웃고 있다. 파편들이 셀의 위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그 풍경속에는, 내가 아닌 라이오니가 있다. 죽어가는 셀의 곁에서 라이오니는 셀의 손을 잡는다. 둘은 멸망을 맞이하고있지만 불행하지 않다.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의 원본이 아니라, 그자체로 최후이자 유일한 존재였던 라이오니의 모습을 - P49

그래서 이 주제를 다룰 거라면 아주 멀리 가자고 생각했다. 멀지만 나에게 친근한 세계, 그러니까 우주가 배경인 청소년 SF의 세계이다. 초광속 우주선을 타고 은하계로 진출하는인류, 장엄한 그림이지만 여기엔 좀 오싹한 구석이 있다. 멀리서 보면 인류는 바이러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유전자를 복사해 최대한 많이 전파하려는 작은 로봇들. 이 유사점을파보면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 너무 직설적이지는않게. 너무 직설적이면 쓰는 내가 재미없을 테니까.
- P70

물론 나도 2020년을 기점으로 세상이 바귀었다는사실 자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습실에 들여서는 안되는 사전 지식이지만, 근대인들에게 2020년은 혐오를재발견하는 시기였다. 혐오가 죄조로 발명된 게 아니고,
잠재해 있던 혐오를 하나하나 그집어내기 시작안 시대라는 뜻이다. 감염병이 전 세계에 버지자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싫어했지만 이제 더는 숨기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 시기의 혐오에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가 엄정나게 많았다. 말도 안 되게 많았다. 슬모없는 21세기인들 갇으니.
- P149

2020년이 2019년과 달라지기 시작안 것은, 2019년사람들이 모두 병으로 죽어버려서가 아니다. 그보다는2020년 사람들이 2019년의 삶을 불결하다고 느기기 시작안 게 결정적이었다. 2021년 사람들은 2020년의 생활양식마저 비위생적이라고 느겼고, 2022년 사람들은 그2021년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갖게 되었다. 격리실습실이시간을 격리하듯, 한 시대는 바로 압 시대와 거리를 두었다. 매우 잛은 시간 간격을 두고,
- P150

"통촉하여 주시옵소서어어어어!"
그 말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하게 들리는 문장이었다.
글자 그대로 내면의 억울함이 분출하는 듯안 발성이었다.
문자를 동해 전달되는 의미 이상의 무언가가 서한지의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한(恨)이라는 건가?
- P152

언니가 다니는 회사는 어떤 면에서는 첨단이면서 어떤부분은 구식인 게 비슷하다. 언니는 사람과 사람의 피부가 맞닿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포포처럼 접촉 혐오가 있는 젊은 애들이 이해가 통 안 간다고 혀를차는 구식 인간이다. "탈학교가 사람들을 다 버려놨다니까." 언니가 투덜거리면 포포는 그냥 못 들은 척한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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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아키아의 내부를 둘러보면 추억들이 저마다 내게 속삭이며 말을 걸어온다. 그건 각각의 물건에 애초부터 완결된 형태로 담겨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그 물건이 나를 향해 밟아온 여정의 이야기이면서 그걸 내가 맛이 하느라 남긴 자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집이란 그 물건의 오랜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얹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눈 돌린 세계에 나름의질서를 부여한 뒤 그 세계에 나를 붙들어 매는 행위다. 그러니까 수집품은 그 물건의 역사와 수집한 사람의 삶이 만나 뒤엉키는 순간에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지나은 삶의 은유로 가득 찬 추억의 극장 파이아키아에서 끊임없이 서성이는 관객이다.
- P32

나이가 들어갈수록 다양한 취향에 대해 마음을 열게되고, 타인의 취향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게 되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취향의 비무장지대.
- P392

동네 레코드숍에서 쥬스 뉴튼의 레코드판을 사 들고 돌아오던날, 설레면서도 아쉬웠다.
왜냐하면 집에 레코드판을 들 수 있는 오디오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음악을 틀 수 있는 기기라곤 당시 우리 집에 카세트테이프 레코더밖에 없었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그 카세트테이프레코더의 모델명이 지금까지 생각난다. 아직 LG가 아닌, ‘금성‘에서 나왔던 TCR-433이었다.) 레코드판을 틀 수 있는 오디오도 없는데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레코드판을 먼저 사 들고 들어오다니.  - P395

그냥 그건 유전자의 문제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수집하는 자와수집하지 않는 자. 물론 그 둘 사이에 우열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명백히 차이는 있다. 좀 더정확히 말하면 나는 수집하는 자가 아니라, 수집하지 않을 수 없는 자다.
- P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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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23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때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곤 했죠. 독서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
그다음엔 글을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으로 나눴고요. ㅋ

바람돌이 2020-10-23 21:11   좋아요 1 | URL
하하하 그렇게 나누면 끝이 없을것같네요. 전 특별히 사람을 나누어서 생각하는건 잘 모르겠어요. 친한 사람과 친해지고싶지않은 사람? ㅎㅎ
 
르코르뷔지에 -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 클래식 클라우드 23
신승철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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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살았던 집은 창고위 다락방이었다.

시골마을에서 오래 살았다보니 그 다락방은 늘 내 눈앞에 있었고, 그곳에서 살던 기억은 간간이 단편들이 떠오른다.

다락방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낭만은 없다.

다락방이니 온돌이 있을리 없고 방은 늘 추웠을테다. (솔직히 너무 어릴때라 추웠던 기억은 없다.)

부엌이 따로 없어 방안에 석유곤로를 두고 밥도 해먹고, 아마도 겨울에는 얼어죽을 듯 시린 방을 난로의 열기로 데우고 두툼한 이불로 때웠을거다.

다락방이다보니 내려오는 계단이 꽤 가팔랐는데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내가 거기서 몇번 굴렀단다.

지금도 내 머리가 시원찮은건 그 탓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그 집에서 우리집 셋째인 내 막내동생까지 태어났으니 딱 6년을 살았다.

그 뒤 잠시 온돌이 있는 방 한칸으로 옮겼었는데 나는 오히려 이집의 추위가 더 기억이 난다.

겨울이 되면 우풍이 어찌나 세던지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고 누워, 얼굴만 빼꼼 내밀고 엄마가 입에 넣어주던 고구마를 먹던 기억이 있다.

내가 8살이 되던 해 아주 작은 양옥집을 새로 지어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이 처음으로 가진 집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집도 딱히 좋은 환경은 아니어서 앞은 좁고 뒤쪽은 길다란, 그런데 그 뒤쪽이 좌우뒤로 모두 꽉 막혀서 하루종일 햇빛이라곤 일도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집이었다.

시골마을에서 가난이란게 뭔지를 알려면 배를 곯아야 하는데 그정도는 아니었고, 자식들 먹는것과 공부시키는 것에 유난했던 어머니덕분에 나는 우리집이 가난한지도 잘 모르고 자랐다.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내 부모님이 햇빛 잘 드는, 사람이 살만한 집을 가지는데는 딱 15년이 걸렸다.

 

그 시절은 내게는 천방지축 행복하기만 한 어린시절이었지만 어머니에게는 어찌 살았는지 지금도 눈앞이 캄캄한 시절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집이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르코르뷔지에는 집을 살기 위한 기계라고 불렀다그는 우리 삶에 최적화된 집을 만들기 위해 자동차비행기대형 여객선을 모델로 삼았다 기계들은 표준화규격화를 거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킨다르코르뷔지에는 여기에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집이라는 기계 "목욕햇빛따뜻한 ,
찬물난방요리가족 간의 대화위생아름다운 비례같은 복잡한요구를 가장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충족시켜야 한다산업화 이후 그의 시대는 다양한 재료와 구조를 통해 그에 걸맞은 해결책을 속속 내놓고 있었다- P134

 

르코르뷔지에가 살았던 20세기 초반부터 지구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다.

농업 생산력의 발달과 페니실린같은 항생제의 개발은 그 폭발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였다. 거기다가 산업화 이후의 도시로의 인구집중은 더더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면 과연 주택 문제는 어떤 대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산업혁명기 투기꾼들에 의해서 지어진  맨체스터의 노동자 주택단지들을 보면 그것은 집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기본 삶을 해결 할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아닌 것이다.

 

심지어 저 집들은 주택 하나에 한 가족이 살았던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가족들은 방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을 뿐이다.

더더더 심지어는 저 마당에서 사는 가족도 있었단다.

 

르코르뷔지에가 말하는 "목욕햇빛따뜻한 ,찬물난방요리가족 간의 대화위생아름다운 비례의 집은 중산층 이상의 계급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사회 하층의 사람들에게는 꿈조자 꾸기 어려운 허상이었다.

 

어떤 건축가도 이 문제에 대해서 제기하지 않을 때 르코르뷔지에는 주장하고 계획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르코르뷔지에는 예술가의 독창성이 발휘된 집에서 누구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주택은 표준화규격화되어야 하고대량생산될  있어야 했다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만인을 위한 집을 짓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 P176

 

그러면 르코르뷔지에는 도대에 어떤 식으로 모든 사람에게 인간다운 저택을 제공하고자 했을까?

사실 답은 너무 쉽다.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를 생각하면 된다.

그의 도시계획 도판들을 보면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 바로 떠오른다.

이쯤에서는 그게 뭐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형태가 같다고 그 속에 담긴 정신이 같은 것은 아니지 않을까?

 

르코르뷔지에가 꿈꾼 도시와 건축을 요약하면

인간의 신체를 기반으로 하는 모될로르 척도에 의해 구획되어 짐으로써 는 공간,

필로티를 세워 벽면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용되는 평면을 통해 다양한 가족 구성원들을 자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공간,

자유로운 입면으로 아름다움을 충분히 표혀할 수 있는 건축,

옥상정원이나 도시내 편의시설들을 통해 모두가 자연을 누리고 휴식과 편의를 누릴 수 있는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 생각해보면 그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도시의 대안이 아파트 단지가 아니고 무엇이 있을까싶다.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이 한국에 와서 그의 인간적인 척도를 모두 상실하고 형태만 남은 것이 건축가의 책임은 아니지 않는가?

더더군다나 집이 삶의 터전이 아니라 부동산투기와 재산증식의 수단이 되어 버린 것은 더더욱 르코르뷔지에의 책임이 아니지 않는가?

르코르뷔지에 자신의 종교는 건축이었다.

그는 자신의 건축 계획 외에 어떤 이념에도 상관하지 않았다.

심지어 파시스트와도 만나 도시계획을 논의한다.

하지만 그의 도덕성을 논의하기에는 그의 건축이상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고싶다.

누구도 사회적 하층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주거의 문제를 얘기하지 않을 때 대중을 위한 건축을 얘기했던 어쩌면 건축계의 가장 급진적인 혁명가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책속에서 르코르뷔지에의 이상을 공유한 오스카 니마이어라는 건축가가 설계한 브라질리아의 도시 구획 사진을 보면 딱 북한의 평양이 떠오른다.

책에서 따로 언급은 없지만 실제로 르코르뷔지에의 계획은 전후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싶다.

기본적인 주택의 공급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사회주의의 이념에서 르코르뷔지에의 규격화, 표준화를 통한 대단위 도시계획과 주택의 보급은 딱 들어맞는 이론일 수 있다.

실제로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주택단지를 보면 르코르뷔지에의 구상과 일치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의 사회주의 국가들 역시 대부분 주택정책이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듯하다.

소설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다보면  사회주의 국가에서 청춘들이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요원한 일인지가 나온다.

기성세대들은 국가에서 배급된 주택을 갖고 있지만 이후 경제정책의 실패로 국가는 더 이상의 주택을 짓지 못하고, 그래서 30살이 넘어도 자신에게 배급되는 주택을 가질 수가 없는 청춘들의 분노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현실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지, 르코르뷔지에의 책임은 아니다.

다만 그는 위대한 건축가였던 것이지, 정치가도 사상가도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우리는 자신의 경제적 처지에 따라 너무도 불평등하게 공간을 점유하는 나라에서 살고있다.

고시촌 쪽방부터 호화 펜트하우스까지.

당장 이 불평등 자체를 다 뒤집어엎자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은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는 건축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부제는 건축을 시로 만든 예술가이다.

이 부제에 걸맞는 르코르뷔지에의 대표작을 꼽자면 '롱샹성당'을 꼽아야 할 것 이다.

하지만 나는 르코르뷔지에에게 더 걸맞는 대표작은 마르세유에 세워진 아파트 '위니테 다비테시옹'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건축의 개척자, 건축으로 인간을 품고자 한 혁명가로 그를 불러도 되리라.

 

그런 그에게도 말년의 집은 지중해 작은 마을의 4평짜리 오두막이었다.

그의 아내와 그가 행복을 영위하는데는 그 정도의 공간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리고 죽은 뒤 그가 차지한 무덤의 공간도 1평쯤 될까나?

그러나 이 위대한 건축가는 자신의 무덤조차도 영혼의 안식을 위한 가장 적당한 넓이와 위치를 계획하고 실현했다.

 

 

내게 어릴 때의 집에서 지금 살라고 하면 너무도 고통스러울것이다.

단순히 그것은 넓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그냥 빈공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기본적인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력이라면 최소한 쪽방에서 사는 사람은 없어야하지 않는가싶은 생각을 간절하게 하게 되는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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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10-20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재였지요.
이책 살까 말까 망설이는중이랍니다.

바람돌이 2020-10-20 00:08   좋아요 0 | URL
지금까지 읽었던 이 시리즈 중에서는 제일 좋더라구요. 그래봤자 4권이지만... ㅎㅎ 다만 대표적인 건축물의 사진은 의외로 없어요. 그건 거의 다 인터넷 열심히 검색하면서 읽었어요

mini74 2020-10-2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적 우풍 심한 집에서 살았어요 전형적인 싼 자재로 대강 그리고 대량으로 찍어낸 빨간 벽돌 이층집. 볼이 터서 아팠던 기억이 나네요 ~

바람돌이 2020-10-20 00:43   좋아요 0 | URL
그래서 우리 볼이 다 빨갰잖아요. ㅎㅎ 오우 그래도 저에게 이층집은 로망이었답니다. 한번도 못살아봤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0-10-20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집들이 많은 동네를 산책하길 좋아해요. 다양함을 보는 게 재밌어요. 일종의 건축 감상 시간인 거죠. ㅋ
건축에 관한 공부도 흥미로울 것 같군요.

바람돌이 2020-10-2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축에 대해서는 항상 공부하고싶던데 깊이있는 공부가 안돼요. 아직은 그냥 설렁설렁 이 책 저책 뒤지고만 있는데 항상 재밌더라구요. 하지만 본격적으로 들어가면 이 분야는 또 접근하기가 많이 어려워요.
 

 

 

 

 

 

 

 

 

 

 

 

 

 

 

 

 

황정은 작가의 새책 <연년세세> 사인본에는 이런 글귀로 인사를 전한다.

책 제목도 뭔가 年年歲歲  이렇게 한자로 쓰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해마다.....

이렇게 제목을 읊어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아껴가며 책을 읽는다.

 

 

황정은 작가는 글씨도 예쁘구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라는 저 사인은 뭔가 의미심장한 것 같다.

맞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어른이 되는 과정이란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이미 떨어져 더러워진 것들 중에 그래도 먹을 만한 걸 골라 오물을 털어내고 입에 넣는 일, 어쨌든 그것 가운데 그래도 각자가 보기에 좀 나아 보이는 것을 먹는 일, 그게 어른의 일인지도 모르겠어. 그건 말하자면, 잊는 것일까. 내 아버지는 그것이 인생의 비결이라고 말했는데.- P146

 

누구나 삶속에 비밀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고, 아픈 기억 몇가지쯤은 가지고 있는 것이 산다는 것일게다.

그래도 사람들은 살아가고 그 과정은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땅에 떨어진 것 중 그나마 덜 더러운 것을 골라 먹는게 삶이라는 저 말이 마음에 와 박혔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동생의 죽음을 겪고, 그 죽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평생을 아둥바둥 살아왔을 순자씨의 삶은 순자씨 개인에게는 스펙터클하고 고난에 찬 행군같은 삶이었겠지만 그 시절 한국인의 보편적인 삶을 생각하면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녀의 이름 순자가 그러하듯이.....무수히 많은 순자들이 또한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있다.

개인의 아픈 삶과 고통이 평범한 삶이 되어버리는 지점에 우리 역사가 지나온 시간의 잔임함이 있지 않을까?

 

나는 가끔 나의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삶에 깊은 비애를 느낄 때가 있다.

그분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무슨 의미를 가지고 그 신산한 삶을 이어왔을까?

지금은 평범한 할머니로, 그럭저럭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듯해 보이는 두분이 사실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편안한 황금기가 지금이라는 사실을 문득 문득 깨달을 때마다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지나온 이야기들을 지금은 웃어가며 이야기 하시지만 그 되풀이 되는 이야기마다 느껴지는 울분과 슬픔과 억울함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순자씨에게 말하니 못한 이야기가 있듯이 그분들도 차마 말하지 못한 무엇이 있을까싶어 살짝 두려울 때도 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걸까?

 

그러나 한영진이 끝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용서할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거라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아이가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나도 말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할  없는 일들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이순일은 알고 있었다.
순자에게도 그것이 있으니까. - P142

 

그래서 황정은 작가의 저 사인본 메시지는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여기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지 않은가?

자신의 삶을 살아오지 못하고 늘 누군가에게 무엇인가에 떠밀리며 살아왔을 앞선 세대의 어른들을 생각하면 말이다.

 

황정은 작가의 책의 3권째 읽었다.

아직 특별히 우와 우와 하게 되는 책은 솔직히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읽게 되고 지난 작품들을 다시 찾아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그녀의 이런 위로 때문인듯하다.

 

 

 

 

 

 

 

 

 

 

 

 

 

 

 

사실상 황정은 작가의 책은 모두가 폭력과 그 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일관되게 이야기하고 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앨리시어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일단은 사적인 폭력이다.

물론 그 사적인 폭력이 쏟아지는 조건에는 다른 사회적인 폭력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다.

폭력은 하나의 폭력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폭력으로 이어진다.

앨리시어는 그 쏟아지는 폭력에 씨발 씨발을 연발하는 것 외에 대항할 무기가 없다.

폭력에 노출된 이가 겪는 고통이 너무 절절해서 이 책을 읽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같이 씨발 씨발을 읊조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디디의 우산>에서는 폭력과 함께 무엇인가를 잃은, 또는 상실의 순간을 예감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상실의 고통 역시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의 직접적인 폭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차별을 전제로 깔고 있는 사회적 시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배제되어지는 사람들, 예측하지 못한 사고 등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어디든지 널려있다.

소설은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 담담하게 그러나 절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설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아픔과 그들의 아픔을 동일시하게 함으로써 고통의 연대를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연년세세>는 <디디의 우산>에서 그렇게 많이 나아가지는 않은듯하다.

좀 더 일상적이고(그래서 더 비극적이기도 한), 좀 더 삶의 구체적인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가 맞아 나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있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황정은 작가의 3권의 책을 읽으면서 어쩜 이 작가는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삶의 모든 순간들과 인간의 모든 면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느낌이 있다.

소설가의 감수성이라기보다는 시인의 감수성에 더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

앞으로 어떤 책을 더 써줄까, 작가는 어디까지 더 나아갈 수 있을까를 기대하게 된다.

더더욱 내게는 아직 읽지 않은 작가의 책이 더 남아있다는 것도 감사하다.

 

문득 황정은 작가가 에세이를 쓰면 어떨까 싶어 찾아봤지만 에세이는 단 한권도 없다.

거기에도 나름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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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0-10-19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님 글씨체가 독특하네요.
‘좀 나아보이는 일을 먹는일‘ ..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와 닿네요.
바람돌이님 페이퍼 읽고 나니 황작가님 신간 장바구니속으로~

바람돌이 2020-10-19 20:11   좋아요 0 | URL
저는 글씨체에 컴플렉스가 있는지라 저렇게 멋있는 필체를 가진 사람을 보면 저절로 부럽답니다. 제 글씨체는 초딩체라고 하지요. ㅎㅎ 황정은작가의 책은 우와 이런 느낌은 안들어도 계속 사람을 진득하게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서 자꾸 손이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