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격하게 일하기 싫다.
알라딘과 읽은책과 읽고 있는 또는 지금 격하게 읽고 싶은 그리고 저 책들 밑에 수북이 쌓여있는 일더미!!
2개월을 미친듯이 몰아치며 일을 했는데 지금 딱 이틀 남았다.
저 a4용지 더미들만 해결하면 나에게는 2개월의 게으름을 만끽할 수 있는 날들이 온다.
그런데 그 이틀이 딱 이틀이 미치겠다. 아 정말 격하게 일하기 싫다.
11월과 12월은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바쁜 날들로, 퇴근해오는 순간 번아웃상태!
갈수록 지능은 떨어져 가는데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은 늘어나고, 이것의 결과는 늘어나는 흰머리와 두통이다.
하루종일 오늘 중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들을 계속 머리속에서 굴리면서 다니면 정말 퇴근할 때쯤에는 두통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과 몇가닥 더 늘어난 흰머리를 볼 수 있다.
일상의 스트레스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물리적인 신체적 변화로 그대로 나타나는 걸 보는건 아직도 좀 경이롭다.
아! 몸의 늙음이여!
물론 기분은 나쁘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얼죽아의 자세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으며 새 책을 잠시 집었다.
아. 제대로 읽겠다는게 아니라 그냥 커피마시면서 어떤 책인지 훑어보기만 하겠다고 말이다.
그냥 별 생각없이 제목이 끌려서 집어든 책이다.
그런데 첫페이지가 너무 강렬하다.
일주일째 눈이다. 나는 창가에서 밤을 바라보고 추위의 소리를 듣는다. 이곳의 추위에는 소리가 있다. 아주 특별하고 기분 나쁜 소리. 건물이 얼음 속에 끼어 짜부라지면서 끙끙대고 삐걱대는가 싶을 정도로 불안한 신음을 토해낸다. 이 시각 교도소는 잠들어 있다. 여기서 한동안 지내다보면 이 건물의 신진대사에 익숙해져 어둠속에서 교도소가 거대한 짐승처럼 숨을 쉬고, 간간이 기침을 하고, 뭔가를 꿀꺽 삼키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다. 교도소는 우리를 집어삼키고 소화한다. 우리는 그의 배 속에 웅크린 채 번호가 매겨진 주름들 속에 숨고 위장의 경련들 사이에서잠을 청한다. 그저 살 수 있는 대로 살아간다.- P11
문장이 너무 좋다. 이 책 뭐야?
나의 지금 정신상태와 몸 상태를 표현하는듯.... 홀린듯 한 챕트를 다 읽었는데... 계속 읽고 싶잖아.
난 프랑스 소설이 좋았던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나는데....
아 정말 격하게 읽고 싶다.
그러나 저 일더미는 어쩌지? 너 잠시 제발 내 눈에 안띄는 곳으로 가줘라.
사람마다 독서스타일이라는게 있는데 나의 경우 특별한 건 없고, 그냥 한꺼번에 여러 책을 보지 않는다는 것.
보고 있는 책을 끝내지 않으면 다른 책을 시작하지 않는다.
무지하게 마음에 안드는 책이 아닌 이상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는다.
그런데.....
리베카 솔닛의 <마음의 발걸음>을 3분의 1쯤 읽다가 던져놓았다.
책이 마음에 안들어서?
그럴리가?
너무 좋은데 나의 정신상태가 이 책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매일마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안고 와서 각잡고 앉아 정독하고, 인터넷 검색을 수시로 하며 아 이건 어디지? 이 사건은 뭐지? 찾아가며 성실하고도 경건한 자세로 읽어야 하는 이 책은 지난 2달간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책이었다.
기다려라. 1월만 되면 내가 처음부터 다시 너를 읽어주마.
물론 지금 이 일더미를 끝내고 나서....
그래서 피곤의 정점에서 완독한 책은 바로 이 책. <여행 준비의 기술>이다.
이 책은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
저자와 코드가 맞는 이들에겐 우와 이럴수가 나의 바이블이야를 외칠 수 있게 해준다면,
맞지 않는 이에겐 그냥 시시껄렁한 책이다.
제목은 여행 준비의 기술이라고 해놓고 실제로 기술은 얼마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고 준비하는걸 더 좋아하는 사람에겐,
"아 맞아! 그렇고 말고, 내가 별종이 아니었네" 이러면서 낄낄거리며 무한 반복되는 동의를 내뱉으며 읽게 된다.
읽다 보면 내가 약간 바보 분위기를 풍기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취미가 여행준비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작가가 자신의 취미를 자각했듯이....
여행을 격하게 좋아하지만 취미라고 말하기에는 여행의 기회가 많지 않다.
나의 경우 국내는 이제 안가본곳 핀 꽂을데가 별로 없으므로, 국내 여행은 여행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나들이라고 한다.
특별히 뭔가를 볼 목적으로 가기보다는 그냥 코에 바람 좀 쐬자라는 기분으로 다니는게 대부분.
여행이란 말의 설렘을 느끼는건 이젠 해외여행이다.
하지만 해외여행은 항상 돈과 시간이 문제다.
거기다 우리집은 모두가 여행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사람들이라 가족 4명이 움직이는건 그야말로 돈을 뿌리고 다니는것.
따라서 1주일 이내의 짧은 여행일때는 일년에 2번, 10일 내외의 여행일 때는 1년에 1번, 지난 이탈리아 여행처럼 4식구가 한달을 노닐다 오면 2년간은 꼼짝없이 돈을 모아야 한다.
이 정도를 가지고 여행이 취미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모자란다.
하지만 여행 준비는 다르다.
나의 경우 여행을 다녀오면 바로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그러므로 보통 준비기간이 짧으면 6개월에서 2년까지 간다.
큰 목적지를 정하고, 가이드북을 몇 권 사서 어디 어디를 갈 것이며 며칠 정도의 일정으로 갈지를 정한다.
그리고 최소 6개월에서 1년 전에 비행기표를 예약한다. 싸고 괜찮은 항공티켓 구매의 노하우를 제법 쌓았다.
비행기표를 티켓팅하고 나면 그 때부터는 진짜 여행을 떠난 듯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싸고 괜찮은 숙소를 찾아 예약하고, 현지 교통편을 찾고, 어떻게 하면 더 싸게 이용할 수 있는지도 찾고,
예약하기 어려운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하듯이 시계 맞춰놓고 사이트 들어가서 광클릭하고....
이런 과정이 엄두가 안나서 자유여행을 안가는 사람이 많지만,
내게는 이 과정이 모두 희열이다. 너무 즐겁다.
유럽의 고속열차의 1등석 티켓을 일반석 가격도 안되는 돈으로 예약에 성공했을 때라든가,
진짜 예약이 장난 아닌 밀라노의 최후의 만찬 관람 티켓팅에 성공했을 때 같은 경우
오우 나의 훌륭함이여! 자만심이 만랩에 도달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 혼자서 너무 즐겁다.
여행 준비기간동안 여행지 관련 책이라면 가이드북이든, 여행 에세이든, 학술서든 필요한 책은 거의 다 읽는다.
인터넷 서핑과 구글 지도, 관련 카페가입과 활동은 기본이다.
여행에 이렇게 공들이는 사람을 일단 내 주변에서는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취향은 다양했으니 <여행 준비의 기술>를 쓰는 이 책의 저자가 바로 나같은 사람이었던것이다.
물론 이렇게 가는 여행 스타일이 모두에게 맞는 건 아닐거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렇게 미리 다 보고 알고 가면 실제로 가서 실망하지 않냐고 한다.
하지만 준비는 눈과 머리로 하는 것이고, 실제 여행은 몸 전체가 하는 것이다.
내 몸의 오감이 모두 열려 몸으로 하는 체험은 정말 다르다.
그래서 여행을 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도 이제 당당하게 나의 취미는 여행 준비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다 이 책의 저자 덕분이다.
나의 여가시간 대부분을 쏟아붓는게 여행준비인데 암 말할 수 있고말고....
그나저나 일하기 싫으니까 말도 많아진다.
음 이제 다시 일로 돌아갈 시간이다.
새벽 2시정도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내일로.... 내일 저녁에도 아마 나는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 이 책과 일더미 사이에서 갈등과 고민을 하기는 뭘 한다고... 내일은 무조건 끝내야 하는데..... 젠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