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은 복잡한듯 하면서도 단순하다.

인간의 온갖 욕망이 다 복잡해보이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어디에 방점을 더 두는가? 어느정도의 사랑? 어느정도의 인정? 어느정도의 부자에 만족하느냐에 따라 그 스펙트럼은 또 천만가지로 나뉘겠지만 말이다.

 

소련 또는 러시아라는 나라의 여성작가 책은 처음이다.

이쪽은 워낙에 쟁쟁한 작가들이 많아 사실 그들의 책만 읽어도 차고 넘치겠지만,

가만 생각하면 그 세계적인 대가 러시아 작가들에게서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본적은 없는 것 같다.

<안나 카레리나>나 <닥터 지바고>가 있겠지만 이런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남성작가가 바라본 여성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는 못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빅토리아 토카레바라는 이름도 생소한 러시아 여성작가가 펼치는 여성의 세계는 흥미로웠다.

 

이 소설은 스탈린 시절부터 페레스트로카 이후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면서 다양한 여성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 시절의 소련 또는 러시아는 어쩌면 지금의 중국처럼 뭘 가져와도 이야기가 되는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격변의 시절이란 상상하기 힘든 일도 너무 쉽게 현실이 되고, 일반적인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는 것이 오히려 일상이 되기도 하는 시절이기 때문일테다.

결국 이 소설은 그런 시절 사랑과 부와 명예를 갖고 싶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다.

읽다 보면 이게 과연 소설인가 르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대기적인 느낌도 물씬 나는 중편 3개의 이야기와 단편 2개로 이루어져 있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이야기 속 여성들은 하나같이 자존감이 강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쟁취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굉장히 긍정적인 인물상이 그려질법도 한데,

우리의 개발시대 시골에서 꿈을 품고 상경했던 수많은 영자 순희들의 삶을 생각하면 이들이라고 해서 딱히 다르지는 않을테고, 그런 속에서 무엇인가를 가지고자 했다면 긍정적이거나 도덕적인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소설속 여성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욕망하는 주체로서의 자신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런 점이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페미니즘 작가로 분류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표제작인 <티끌같은 나>에서 노래라는 재능 하나를 믿고 모스크바로 상경한 소녀 안젤라는 아직 어린 소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명민하게 살핀다.

 

레나는 실제로 편두통을 앓았고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잤다두통의 원인은 안나 카레니나처럼   없음이었다레나는  일이 없었다화단에 물이라도 주면 좋으련만……하긴 집안일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가 일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집에는 운전기사와 경비원도 있었다안젤라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들에게는 저마다 목표와 높은 이상이 있었다뇌물을 줘서 아들의 군복무를 면제받으려는 이도 있고딸이 전문의 자격증을 따도록 뒷바라지하는 사람도 있으며러시아제 가젤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저마다 추구하는  다를 뿐이었다. - P61

 

러시아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새로운 부르조아의 삶의 허위를 냉철하게 간파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안제라의 선택이 딱히 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는 중요한 것,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안젤라의 삶이 그저 그런 뻔한 신파가 되지 않는 것은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중심에 두고 주변을 끊임없이 이용하고, 쟁취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두번째 중편 <이유>에서 주인공 마리나는 그야말로 사랑받고, 사랑하고싶은 욕구를 극단으로까지 표현하는 여성이다.

삶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라서 개인의 선택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녀는 살아남는 방법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생활력 강한 억센 여성이지만 자신의 모든 삶의 순간 순간에서 항상 사랑을 선택하는 여성이다.

그것이 비록 자신을 절망의 구렁으로 이끌지라도말이다.

삶은 끊임없이 곤두박질 치지만 그럼에도 마리나는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는 여성이다.

그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도덕적인지 아닌지는 마리나에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한다마리나의 지인 중에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이 없었고다른 사람들 사정은 그녀가   아니었다.- P287

 

 

세번째 이야기인 <첫번째 시도>에 가면 주인공 여성의 욕망추구는 극단적으로 진행된다.

마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쟁취하는데 어떤 거리낌도 없다.

사랑도 권력도 부도 모두 가지고 싶은 여성이고, 실제로 한때는 그것 모두를 가지기도 하는 여성이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화신이라고나 할까?

그녀의 삶은 어쩌면 러시아가 자본주의 사회로 재편되면서 무수히 많은 러시아인들이 밟아갔던 바로 그 과정일 것이다.

다만 이 평범한 이야기가 특별해지는 것은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 때문일테다.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소설 속 주인공 어느 누구도 딱히 긍정적이지 않으며, 쉽게 공감이 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특별한 것은 이 여성들을 보라고 당당하게 내놓는 지점에 있다.

남자에 의해 대상화되고 타자화되는 여성이 아니라, 비열하든 부도덕하든 상관없이 자신이 주체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에게 말할 자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욕망을 잘 들여다보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연한 욕망이다.

왜 남자의 욕망은 성공스토리로 포장되면서 여성의 욕망은 은폐되어야 할 부도덕한 무엇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해 당당한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굳이 이론적으로 따지고 들지 않아도 그저 여성의 삶을 보여주면 된다.

거기에 남성 여성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있을 뿐이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로 2021-02-26 06: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바람돌이님처럼 읽지 않고 그냥 정신없이 읽었어요. 이 책 덕분에 소설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는데... ^^;;

바람돌이 2021-02-27 02:04   좋아요 0 | URL
러시아 여성을 소재로 하는 현대 소설이 많이 신선했어요. 소설을 읽는 건 항상 즐거워요. ^^

mini74 2021-02-26 1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유. 읽으면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일본영화가 생각났어요. 묘하게 닮은 느낌. *^^*

scott 2021-02-26 14:28   좋아요 1 | URL
오 미니님 저도!
마츠코 불쌍한 마츠코 ㅜ.ㅜ

바람돌이 2021-02-27 02:07   좋아요 1 | URL
아 맞네요. 둘이 닮은거 맞네요. ㅎㅎ

cyrus 2021-02-26 1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성의 욕망’이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남자)은 ‘섹슈얼한 욕망’으로 생각해요. 욕망을 욕정의 동의어로 보는 거죠. 남자들은 여성의 욕정에 호기심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바람돌이 2021-02-27 02:08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남자들은 왜 아직도 그 지독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못벗어나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걸까요? 그렇게 자기 생각에만 갇혀있으니까 독해도 못하죠. ^^

희선 2021-03-02 0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람은 욕망을 가지고 있겠지요 예전에 본 드라마 같은 거 생각해도 다 남자이야기밖에 없었던 것 같네요 러시아 작가도 남성 작가만 더 알려졌고... 아주 없지 않았을 텐데,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는군요


희선

바람돌이 2021-03-03 11:44   좋아요 1 | URL
저도 마찬가지예요. 진짜 러시아는 워낙에 대단한 남자 작가들이 많아서인지 여성작가들이 너무 가려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하나씩 이렇게 번역이 되어 나오니 다행이겠죠?
 

레나는 실제로 편두통을 앓았고, 오후 1시까지 늦잠을 잤다. 두통의 원인은 안나 카레니나처럼 ‘할 일 없음‘이었다. 레나는 할 일이 없었다. 화단에 물이라도 주면 좋으련만……. 하긴 집안일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녀가 일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집에는 운전기사와 경비원도 있었다. 안젤라는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주인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목표와 높은 이상이 있었다. 뇌물을 줘서 아들의 군복무를 면제받으려는 이도 있고, 딸이 전문의 자격증을 따도록 뒷바라지하는 사람도 있으며, 러시아제 가젤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거나 작은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돈이 필요한 사람도 있었다. 저마다 추구하는 게 다를 뿐이었다.
- P61

"나는 그가 매일 날 보고 기뻐하면서 ‘당신이 최고야. 난 당신만 사랑해……..‘라고 말해 주면 좋겠어."
안젤라는 오븐을 끄면서 ‘안나 카레니나랑 판박이야. 라고 생각했다. 주인 남자는 육즙이 너무 많이 빠지는 걸 안 좋아했다.
- P79

"난 우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우정은 게오르기만으로 충분해요. 난 열정이 필요하다고요."
"열정은 돈을 주고 사면 되죠." 라이사가 지적했다.
"대가성이 있는 사랑 말고요.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바보 이반이 세 개의 솥에 들어갔다 나와서 젊은 이반 왕자로 변한것처럼 그렇게 되고 싶다고요."
"당신의 솥들은 똥으로 가득 찼을 거예요. 그 안에서 헤엄칠지말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죠."
- P83

사브라스킨은 안젤라를 성장시켰다. 그는 ‘존재하기‘와 ‘소유하기‘에 대해 알려 주었다. ‘존재하면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할수도 있다. 그래도 ‘존재해야 한다. 반면 모든 것을 가졌지만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안젤라는 사브라스킨의 눈동자를 쳐다보면서 그의 말을 경청했다. 사브라스킨의 날개가 자라고 있었다.
그는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의 작품을 조각했고, 자신이 만든 작품에 마음을 빼앗겼다.
- P155

안젤라는 순간 바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높은 바닷가가 떠올랐다. 해변이 파헤쳐질 것이다. 허름한 흰색 집도 철거될 테고 마당도 사라질 것이다. 대신 일자리가 생길 것이다. 누군가는 기뻐하고, 또 누군가는 속상해할 것이다.
하지만 바다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다는 달에 의해서만 동요될뿐이니까..….
- P175

모성애는 축복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돈과 집안일을 도와줄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있고 아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아무것도 없이 힘만든다면 스스로 사람이 아닌 비 맞는 한 마리 말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 P182

"스탈린 때가 나았어요." 마리나가 결론을 내렸다.
"스탈린 때는 강제수용소가 있었어요." 안나는 마리나가 잊은부분을 상기시켰다.
"난 잘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거기에 수용되지않았으니까요."
사람은 자기 경험을 토대로 세상을 이해한다. 마리나의 지인중에는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 사정은 그녀가 알 바 아니었다.
- P287

마리나는 문득 사람들이 사는 이 지구 역시 개미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다른 개미들 틈에서 들기 힘든 짐을 끌고 가는 것이다. 누군가 쓰러진 나무에 앉아서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319

사실 그녀에게 전화를 거는 이유는 호기심이 아니라 연민이었고, 나를 실제 모습보다 더 나쁘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 모든 사람에겐 이상적인 자아가 있는 법이다. 나는 누군가 내 이상적인 자아를 폄하하면 당황한다. 더 낮고 더 약한 새로운 이상을 재단할지, 내 이상을 폄하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중단할지 고민한다. 두번째 방법이 좀 더 쉽기는 하다. 하지만 마라는 지금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이고, 그렇게 해서 그녀의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희생할 준비가 돼 있었다.
- P389

그녀가 가끔 꿈에 나타나는 날이면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하며머릿속으로 대화하는데, 우리가 논쟁의 끝을 보지 못해 계속해서논쟁을 이어 가는 듯 묘한 기분이 들곤 한다. 또 하나는 죄책감이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 내가 잘못한 게 뭘까? 나도 모르겠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계속해서 내 삶을 살아가지만, 늘 뒤를 돌아봐서 마치 목을 뒤로 꺾은 채 앞을 향해 걷는 기분이 든다.
- P3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있을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이있는  아닐까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있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 P75

 

책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제일 쉽게 대답할 수 있는건 재밌으니까요 정도?

하지만 뭔가 더 멋있는 말을 하고싶은 욕망은 분명히 있다.

가끔 잘난체 해도 될 듯싶은 대화에서는 한 번씩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나는

"책 특히 소설을 읽으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물, 살아보지 못한 삶을 한번 살아보는 느낌이 들어요. 나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보고 나면 내가 뭔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된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자꾸 책을 찾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몇번은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된 느낌을 좀 더 확장하려면 인문학이나 예술쪽 책들도 좀 더 읽어줘야 할 것 같고요라는 대답까지는 한번도 한적이 없고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김연수 작가의 여행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작가가 책에 대해 하는 저 말을 읽으면서 "아 정말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데 어쩜 저렇게 멋있고 정확하게 표현했지"라고 감탄하면서 역시 작가는 작가구나라고 생각한다.

 

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있다는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바뀐 풍경은 낯설다새롭고 또 신기하다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인 이야기다나를 둘러싼 풍경만 낯설고 새로운 게 아니라  풍경 속의  역시 낯설고 새로운 존재 이방인이다- P255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이 된 나를 바라보면서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여행의 즐거움은 책이 주는 즐거움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쳇바퀴처럼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을 치우고 밥을 하고 매일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에 갇혀지낸다.

매일 매일 새롭고 스펙터클한 일이 터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말이다.

또한 일상에서 매일이 새롭고 스펙터클하다면 아 그건 그것대로 커다란 불행이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책과 여행은 안전하게 내가 매일이 새롭고 스펙터클해질 수 있는 길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이 2가지를 그토록 좋아하고 열심이었던거구나.

역시 책은 다른 세상을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는 힘도 있었구나 하면서 감탄하게 된다.

 

김연수작가는 5년동안 론리 플래닛에 여행에 관한 58편의 짧은 글을 연재했고, 그 결과가 이 책이다.

각 글의 길이는 3-4페이지 정도로 짧고, 여행이 주제라는걸 제외하면 딱히 공통적인 점이 없어 심심할 때마다 부담없이 들고 읽기에 좋다.

하지만 그런만큼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생각을 품고 있어 누가 읽어도 아 맞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라는 문장 몇개 쯤은 얻어낼 수 있을 테고, 또는 그런 상황과 관련해서 나도 글을 한번쯤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니 일개 서커스단으로서는 코끼리의 먹이를 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운반하기에도 상당히 버거웠을 것같다하루키 소설에서 코끼리는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려지는데먹이 문제를 생각하면 어쩐지 코끼리에게는 그런소멸 방식이 어울리는 듯하다.- P111

 

김연수 작가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온 서커스단에서 본 코끼리 얘기를 풀어놓고 하루키 소설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조선 태종 때 느닷없이 우리나라에 왔던 코끼리를 생각한다. 일본에서 선물로 보내졌던 코끼리는 처음에는 모두가 신기하게 보고 했지만 어쩌다가 사람을 두명이나 밟아 죽이게 되고 결국 유배형에 처해진다.

전라도로 유배를 간 코끼리는 곧 그 지방의 큰 골칫거리가 되는데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너무 많이 먹어서였다.

지방의 없는 살림에 코끼리가 먹어대는 걸 감당할 수 없자 지방관은 중앙에 서신을 보내 제발 코끼리 좀 어떻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게 되고 불쌍한 코끼리는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게 되는데 그 코끼리의 마지막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이 코끼리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설을 쓸까? 에세이를 쓸까 잠시 고민했지만....

에휴~~ 내 주제에 무슨... 리뷰나 쓰지 뭐....

작가가 되고 안되고는 글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또한 원래 글을 잘 쓰느냐 못쓰느냐라는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건 쓸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 나는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누군가 저 조선의 코끼리 좀 살려주면 안될까라는 생각도 막 하게 된다.

 

이런 부산 말고 다른 부산은 없을까그러자 부산을  아는사람이 가야시장 맞은편으로 가서 186 버스를 타보라고 말했다. 다음  나는 186 버스그것도 운전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알지 못하던 부산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피난지 부산의 삶과 애환을 담은 노래만 있으면 최고였는데그러니 다음에는 노래까지 준비해서 다시 타봐야겠다.-P103

 

또 하나 이건 것.

여행이 굳이 멀리 떠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다시 보고, 나를 다시 보는 것도 여행이다.

김연수 작가의 186번버스 부산 여행에 대한 짧은 글을 읽으면서는 그 186번 버스의 노선이 눈에 확 펼쳐졌다.

부산의 산복도로 곳곳을 휘감고 저 멀리 영도 태종대까지 가는 버스

좁고 가파른 길을 돌고 돌면서 여전히 너저분하고 어질러져있는 가난한 동네를 누비다가 어느 순간 멀리 부산항의 확 트인 바다를 보여주는 그 노선은 사실 부산의 속살같은 이야기들을 많이도 품고 있는 길이다.

오래 전 가끔 그 버스를 탈 때면 나는 '아 이런 곳도 사람이 사는구나'라며 더불어 그 동네들에 살고 있는 몇몇 친구들을 떠올리곤 했었다.

어느 여름 날 그 버스가 지나는 길에 살던 친구가 연락을 했었지.

집에 좀 와달라고...

혼자 자취하던 그 친구의 집이 아니라 방은 전날 내린 비로 천정의 벽지가 불룩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벽을 타고 내린 물로 방은 엉망이었다.

그래도 젊었던 우리는 낄낄 대며 천정 벽지에 구멍을 뚫어 몇 바께스(양동이)나 되는 물을 밖으로 퍼날랐고, 청소를 하고 짐을 꺼내고 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비참하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낄낄대고 있었고, 일을 마치고는 라면이었는지 짜장면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뭔가를 또 맛있게 먹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지나치게 현대화되어버린 자갈치 시장에서는 느끼기 힘든 사람들의 오래된 묵은 그런 이야기가 아직도 그 길에는 남아있을 것이다.

그 길에 얽혀있는 이야기들을 써봤으면 좋겠다.

나 말고 김연수 작가가.... ㅠ.ㅠ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이라는 장르를 다시 생각한다.

많은 종류의 글이 있지만 에세이라는 이 장르는 그만의 방법으로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거였구나.

작가의 글이 내게 와 나의 마음이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때문에 에세이를 읽는구나

에세이를 읽는 동안 나는 작가의 마음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로 인해 잠시지만 내 글을 써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래서 진짜 작가가 되기도 할테고,

역시 책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구나 생각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1-02-19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연수 작가님도 써주시고, 바람돌이님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바람돌이 2021-02-26 00:40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럼 김연수 작가님이 안쓰면 제가 쓰는걸로요. 비교라도 되면 다행인데 사실 비교도 말이 안되잖아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02-19 04: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행의 목적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꾼다는 말이 참 와 닿습니다. 자신을 잃지 않고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로도 생각되네요. ^^:)

바람돌이 2021-02-26 00:4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나의 자리를 바꿔보는 것, 그래서 뭔가 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뭐 그런 말이겠죠? ^^ 책을 읽는 것도 여행을 가는 것도 결국 얻는 것들은 비슷한 것 같아요. ^^

scott 2021-02-19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님 말씀에 동감!!
186번 버스의 노선~부산의 산복도로 곳곳을 휘감고 저 멀리 영도 태종대까지 가는 버스~
광고에 휘황찬란하게 나오는 유럽 풍경이 아닌!!
부산,뿌산의 186번 버스, 바람돌이님에 그친구!
에피소드가 더 더 감동적임
오늘에 이페이퍼는 나와 다른 사람들 바람돌이님 김연수님의 여행지 에피소드로 만나게 되는 !
제임스 설터 옹이 쓰지 않으면 모든게 사라져버린다고
오로지 글로 기록된것 만이 진짜 ...모든건 꿈일뿐....

바람돌이 2021-02-26 00:45   좋아요 1 | URL
scott님 말씀 감사해요. ^^ 아 186번 버스 노선은 그냥 타봐야 돼요. 진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굉장히 다양한 감흥을 가져다 주거든요. 근데 이 버스 노선 무지 길어요. 진짜 날잡아서 맘먹고 타야 되는데요. ㅎㅎ
제임스 설터 옹이 그랬군요. 맞는 말 같아요. 이 글 쓰다가 아주 오래전 연락이 끊기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그 친구 생각을 다시 살려냈기도 하고, 그 덕분에 전 그 친구를 잊지 않겠죠? ^^

희선 2021-02-26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시대에 그런 코끼리가 있었군요 살던 곳을 떠나 모르는 곳으로 오게 되고 이리저리 가게 되다니... 그 코끼리는 나중에 어떻게 됐을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것도 여행이겠지요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는 게 다 여행이다 하더군요 그런 마음으로 다니면 즐거울 듯도 합니다 저는 다른 데 가는 거 안 좋아하지만... 실제로 안 가고 책으로 가죠


희선

바람돌이 2021-02-26 00:50   좋아요 1 | URL
아마도 동남아쪽에서 일본으로 선물을 보낸 듯한데 그걸 또 일본이 다시 조선으로 선물을 보낸거죠. 일본도 아마 코끼리 먹이 주는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보낸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뭔가 새로운걸 발견하는 것,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모두 여행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심지어 집밖을 안나서도요. 내방 여행하는 법이란 책도 있잖아요. ^^ 그러니 책을 통한 여행은 더 넓고 무한한 여행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

scott 2021-03-05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달의 당선 !
추카~*추카~*
바람돌이님의 추억의 여행기도 하나씩 풀어 놓셔야 할것 같아요 ㅋㅋ


바람돌이 2021-03-05 23:19   좋아요 1 | URL
scott님도 축하드려요. 그것도 두편이나.... 알라딘 적립금은 들어오기만 하면 또 더 보태서 무슨 책을 사나 고민하기 시작한다죠. ㅎㅎ

모나리자 2021-03-05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바람돌이님~ 모두 대단하시네요~ 주말도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1-03-05 23: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모나리자님도 행복한 주말 되새요
 

그러고 보면 그건 정말 대단한 단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세계의 끝이랄 수는 없지만, 조선의 끝이나 다름 없는 곳이고,
그런 데서 사내들이 모여서 손가락을 자르는 발가락을 자르는이 세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손가락을자른 것이다. 만약 안중근이 이토를 죽이지 못했다면, 그 손가락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연해주 벌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 P140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비록 나는 안중근의 손가락은 찾지못했지만, 그의 여정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P141

죽음을 앞둔 폐결핵 환자 카프카는 베를린 그루네발트 길을 걷다가 울고있는 소녀를 만났다. 카프카가 우는 이유를 묻자, 소녀는 아끼던 인형을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카프카는 "네 인형은 그냥 여행을 떠난 거야"라고말했다. 소녀가 그 말을 믿지 않자, 그는 "네 인형이 나한테 편지를보냈는걸" 하고 대답했다. 정말이냐고 소녀가 물었다. 그렇다고 카프카가대답했다. "지금은 안 가져왔지만, 내일 여기 오면 내가 줄께." 그리고전영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게 그때 카프카와 함께 산책을 했던 도라 디아만트는 전한다. 어떻게그날부터 카프카가 그 고유한 창작의 열의를 쏟아 인형의 편지를 써갔으며,
하루하루,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녀에게 읽어주었는지를, 인형이 이곳저곳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마침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그리하여 이제 옛 소녀에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삼십여 통의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팔십여 년이 지난 몇 년 전, 한 카프카 연구가가이제 와서 그 편지를 찾아보겠다고 나서면서 화제가 되었다.
- P171

이 일은 두 가지 부작용을 갖고 있다. 우선 오만해지고 독선적인 사람이된다는 것. 이를 선지자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남이 못 보는것을 꿰뚫어보는 자는 자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낮춰볼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 낮과 밤을 나눴듯이 선지자 콤플렉스에 빠진사람 역시 세상을 이분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이분법을펼쳐도 자신은 좋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 P188

두 번째 부작용은 음모론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세계를 불신하기 때문에 어떤 현상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분석이 필요하다. 분석이라고 썼지만, 선지자 콤플렉스와 결합되면 이는
‘관심법, 즉 다른 사람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는 일을 뜻한다. 한 사람을둘러싼 리얼리티는 그의 성장 과정과 가치관에 따라 선별적으로재구성된다. 그러므로 같은 리얼리티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리얼리티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같은 교통사고를 목격해도 목격담은달라질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간 예술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여러 번 증명됐다. 그러므로 관심법으로 알 수 있는 타인의 마음은없다는 게 자명하다. 그럼에도 자꾸만 알아내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긴다.
- P188

기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235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바뀐 풍경은 낯설다. 새롭고 또신기하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인 이야기다. 나를 둘러싼 풍경만 낯설고 새로운 게아니라 그 풍경 속의 나 역시 낯설고 새로운 존재, 즉 이방인이다.
- P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니 일개 서커스단으로서는 코끼리의 먹이를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운반하기에도 상당히 버거웠을 것같다. 하루키 소설에서 코끼리는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사라지는것처럼 그려지는데, 먹이 문제를 생각하면 어쩐지 코끼리에게는 그런소멸 방식이 어울리는 듯하다.
- P111

음, 그러나 컴퓨터가 더 중요해졌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당시김정흠 교수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5학년 학생도 대학교1학년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리라고 예언했는데, 틀린 말도아니다. 스마트폰을 붙잡고 종일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게임에몰두하느라 대학교 1학년의 교양 수준이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 떨어진것 같으니까.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인 셈이다.  - P113

여행의 교훈은 내가 보는 세상이 이처럼 상대성의 원리로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빈민이 많은 저개발국을여행하고 돌아오면, 미안하지만 한국에서 사는 게 참 행복하게느껴진다. 하지만 유럽 여행 뒤에 바라보는 한국은 전생에 나쁜 일을하다가 죽은 이들이 오는 곳 같기도 하다. 당연히 한국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한국은 그저 한국이다. 여행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두 지역을 한데 놓고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가능하다.
- P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