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레삭매냐님 글에서 보고 어 이런책도 있어? 하면서 찾아보니 절판!

다행히 중고로 나온게 있어 잽싸게 주문했다.

 

브레히트가 잡지나 신문의 사진들을 오리고 붙여 그 아래에 4행의 시를 써서 만든 책이다.

브레히트 특유의 촌철살인 문장으로 빛나는 이 책은 사진이 보여주는 표면이 아니라 그것이 말하고 있는 본질을 꿰뚫고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이 책은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할 당시의 사진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

전쟁교본이라는 제목으로 전쟁의 본질과 그 폭력성을 고발하는 이 책이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1933년 히틀러가 말로써 독일의 총리가 되었던 그 순간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또한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고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들면서 일당독재의 서막을 연것이 무솔리니나 프랑코처럼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히틀러의 연설에 열광했던 독일인들 전체에 결국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사진에 붙은 아래의 4행시처럼 파멸로 향하는 그 길을, 자신들의 영광의 길이라 착각하면서.....

 

잠결에 이미 그곳을 달려본 자처럼,

나는 알고 있다. 운명에 의해 선택된

파멸로 향하는 좁다란 그 길을,

나는 잠 속에서도 그 길을 찾을 수 있다. 그대들이여, 함께 가지 않겠는가? - 사진 1

 

 

 

 

 브레히트의 비판은 전방위적이다.

전쟁이 일어나는데 히틀러와 나치세력의 주도성은 의심할 바 없지만 그들만의 힘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자주 간과하고 그들의 뒤에 슬쩍 숨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한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라고 말할거나 그저 나는 동원된 힘없는 일개 병사, 노동자, 공무원, 시민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말이다.

하지만 브레히트의 시는 누구도 빗겨가지 않는다.

폭탄을 떨어뜨리고 명중한 것에 환호하는 병사들에게도, 무기를 만들고 있는 노동자들에게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마지막 연민과 희망을 놓지 않는 것 역시 브레히트의 시가 보여주는 강인함이며 아름다움이다.

 

 

독일군이 휩쓸고 간 소련의 한 마을에 당도한 연합군이 아이들을 안고 환하게 웃는 이 사진에서 브레히트는

전쟁 이후 적이 아니라 서로 웃고 환호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다는, 평화의 세상이 오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아니라면 이런 글을 남길 수 있을까?

브레히트의 시가 가지는 진정한 힘은 이렇게 강력한 휴머니즘에의 믿음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팔에는 아이를 안고 다른 팔로는 총을 들고서

더 나은 삶을 향해 이 삶을 무릅쓰는구나

나 기원하노니 이 피투성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우리 민족의 아이들도 너희를 둘러싸고 환호하게 되기를.  - 사진 62

 

 

 

 

 

공습이 일어날 때마다 지하 방공호로 피난해야 하는 런던 거리에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다.

어린 아이들이 피난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팔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본주의의 불평등이라는 것을 단 한장의 사진으로 고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장면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더 보기도 하고 덜 보기도 하며, 제대로 본질을 포착하기도 하고, 겉만 훓거나 잘못보기도 한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브레히트의 대답이 여기 있다.

이 책을 펴내고 난 뒤에 이 책이 모든 도서관과 학교에 비치되기를 소망했다는 브레히트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도 이 책속에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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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3-02 01: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에 다른 곳에서 이 책 이야기 봤을 때는 몰랐는데, 브레히트 시인이군요 다 아는 건 아니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인가 하는 시 쓴 사람... 전쟁은 히틀러 혼자 일으킨 게 아니겠지요 그 뒤에는 히틀러가 한 말에 따른 사람도 많을 거예요 그때 독일이 안 좋았는데 히틀러가 살기 좋게 해줬다는 말이 있던데... 사람은 자신이 먹고 사는 걸 먼저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일본에도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란 사람 있고, 나라가 그 나라 사람을 속이기도 했더군요


희선

바람돌이 2021-03-03 11:43   좋아요 2 | URL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제일 유명하죠? 제가 브레히트를 처음 알았을 때는 책을 찾기도 힘들었고, 금서였어요. ㅎㅎ 오랫만에 브레히트의 그 날카로운 언어를 만나는건 여전히 좋더라구요.
 

 

 

 

 

 

 

 

 

 

 

 

 

 

 

브레히트는 평화교본을 계획했지만 갑자기 죽음으로써 이 한편의 평화교본만 남겼단다.

하지만 이 한편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이상의 무슨 메세지가 필요할까?

3.1절을 맞아 어떻게 평화가 가능한지도 한번 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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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소 국경분쟁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소련은 중국 유물이중국인들이 여기에 살았다는 근거로 쓰여 자칫 영토분쟁의 빌미가 될까봐 이볼가 성터를 흉노에 잡혀온 ‘중국인들의 포로수용소라는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2011년 내가 일본과 몽골에서 흉노 성터 연구를 발표하자 한 일본인 노학자는 그 내막을 듣고서자신은 이제까지 이볼가 성터를 포로수용소로 알고 있었다며 허탈해했다. 국가 간 학문적 교류가 전무하던 시절의 해프닝이다.
이볼가 성터 발굴 이후 부랴트공화국과 몽골의 성지 곳곳에서는옥저 계통의 온돌을 설치한 주거지가 속속 발견되었다. 흉노가 살던 추운 북방 초원에서 옥저의 온돌은 꽤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 P159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신라도 국력을 강화하면서 부여계와는 다른 그들만의 선민의식이 필요했다. 이에 진한 시기부터 이어져왔던북방과의 교류를 전면에 내세워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했다. 신라가 흉노를 선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은 흉노의 영향을 받은 유목민들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세력을 키웠다.  - P174

무덤의 생김새만으로 기원을 찾으려 하는 것도, 신라인이 우연히 똑같은 고분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것도 둘 다 의미 없다. 신라인들이 유라시아의 적석목곽분 제작 기술을 받아들여 경주에서재창조했다고 보는 게 맞는다. 1500년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단단히 지키고 있는 거대한 돌무더기는 유라시아의 기술을 신라의 것으로 바꾼, 신라인들의 지혜가 집약된 산물이다.
- P180

흉노의 영향을 받아 왕족들이 편두를 하는 나라들에는 또다른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금관이나 금동관을 쓴다는 점이다. 신라와 가야의 금관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신라의 금관과 유사한유물이 발견된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 테페(Tilla Tepe)에서도 편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흑해 연안에 살며 금관을 썼던 사르마트인(Sarmat)들도 편두를 했다.
- P222

그 배경에는 20세기 초반에 서양에서 유행한 우생학과 인종주의가 있다. 그들은 순수한‘ 유럽인을 찾아야 했다. 열등한 타민족과 섞이지 않은 고대의 우월한 사람들이 신아 지역에 모여 있다고생각했고, 서구의 인류학자들은 경쟁적으로 파미르고원과 티베트고원을 탐사했다.  - P241

유목민들은 다른 부족들을 정복할 때에 반드시 적의 무덤을 파괴하고 도굴했다. 전쟁에서 이겨도 정복해야 할 도시나 요새가 없기 때문에 유목민들이 모이는 장소인 조상들의 무덤을 파괴했던것이다. 무덤 속에서 황금 유물이 나오면 전리품으로 나누어가졌다. 그 과정에서 황금 유물들이 사방으로 전해지며 잘못된 황금의나라 전설을 부추겼다. 그렇게 수천년간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했던 황금의 나라 이야기는 특별할 것이 없다.
- P258

수많은 핸디캡을 딛고 그가 마야 문자 해독에 성공할 수 있었던이유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차별 없이 보고, 인류의 보편성에 눈길을 주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이후에 서양의 수많은 학자들은 크노로조프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서 연구하면서 새롭게 발굴된마야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마야의 언어도 발전할수 있다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반면 크노로조프의 천재성은 마야의 문자가 세상의 다른 글자와 마찬가지로 수백년간발달해왔다는 단순한 진리를 발견한 데 있었다.  - P274

어용학자를 바라보는 서양의 관점은 상당히 비판적이다. 예를들면 지금까지도 서양에서는 학문 연구에 있어 나치에 부역했던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며, 그들의 이름은오로지 비판을 위해서만 인용된다. 이러한 냉정한 평가는 그 사람들의 개인적 능력이나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제국주의 고고학의 폐해는 그들이 성격 파탄자거나 연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관점을 암묵적으로 따라가는 연구 경향이 결국 수천만명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 P296

 일제는 이 용어를 한반도에 도입하면서 한국인은 제대로 된청동기나 철기를 쓰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는 의미로 곡해해서사용했다. 쉽게 말하면, 석기 - 청동기 철기로 이어지는 발전 단계없이, 한반도의 바닷가에는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문화에 머문 사람들이, 내륙의 산과 평야에는 청동기를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장식용으로 일부 사용한 민무늬토기 문화에 머문 사람들이 문명을 이루지 못한 채 동시에 살았다는 뜻이 된다. 석기시대에 뜬금없이 중국과 일본에서 건너온 철과 청동을 같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금석병용기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P297

정작 일본의 현지인은 미개하다고 치부하고 ‘위대한 일본인‘ 조상이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는 일부 우리가 가진 한반도에 대한 인식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최근까지 한국에서도 북방 유라시아는원래 우리의 영토‘였다며 근거가 빈약한 주장이 떠도는데, 그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가 주장하던 침략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고대에 사람들이 교류하고 공존했던 사실을 현대 국가의 영토로 치환시켜 논하는 것은 오히려 고대 한국 문화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키려는 일본 군국주의의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일 뿐이다. - P298

1980년대 이후 개혁개방을 앞세운 중국의 정책과 함께 훙산문화는 그 의미가 변질되었다. 각 지역에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구계유형론은 한족 중심의 중국 문명을 강조하는 다원일체론(多元一體論)으로 바뀌었다. 다원일체론은 마치 여러 지류의 물길이 하나의 큰 강으로 합쳐지듯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모든 문명이 중화 문명이라고 하는 큰 문화로 이어진다고 본다. 다원일체론이 계냥하는 지역은 주로 티베트, 신장, 몽골, 만주와 같이 최근에 중국의 영토에 편입된 곳들이다. - P319

이후 다원일체론에 포함되는 지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양쯔강 유역의 량주문화에서도 옥기가 발견되면서 다원일체론에 추가되었고, 2010년대 이후에는 백두산 일대도 ‘장백산문화론‘이라 불리며 중국의 문명 재편 과정에 포함되었다. 중국의 이런 역사 만들기는 훙산문화의 재발견에서 출발했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촉발된 홍산문화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이 지금은 반대로 중국의 팽창주의적 역사관을 여는 단초가 된 셈이다.
- P321

터키가 세계적인 그리스와 근동 문명을 마다하고 굳이 머나먼알타이,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자신들의 기원을 찾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오스만튀르크가 멸망하고 지금의 터키가 들어선 사건이다. 신생국가 터키는 강력한 서구화 정책을 취하는 한편 머나먼 미지의 땅에 자신의 고향을 둠으로써 터키의 정체성이 서양으로 휩쓸리지 않도록하는 양면 정책을 실시했다.
머나먼 극동 지역의 한국을 형제의 나라로 여기며 아낌없는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현대 유럽의 일부로 살면서도 정체성은 아시아에 두는, 그들의 이중적인 역사인식의 발로인 셈이다. 유라시아동편에 자신의 기원을 둔 터키의 사례는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과고대사에 대한 역사인식이 현실의 치열한 일부분임을 생생하게 증명한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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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141페이지 유물 사진 설명에 의하면 아래 그림이 <위원 용연동 유적에서 발견된 명도전과 철제 농기구>라고 되어 있는데 사진의 유물은 모두 철제농기구입니다. 명도전이 없어요.
책의 본문이 명도전을 중심으로 설명이 되고 있는 중에 나온 자료 사진인지라 반드시 사진 교체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덧붙여 147쪽
아래에서 5번째 줄 휴노는 흉노로 고쳐야 하네요.
291쪽 아래에서 5번째 줄 부흥은 부응
314쪽 아래에서 7번째 줄 주변에는은 주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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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2-28 0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월요일에 저자 북토크를 놓쳐서 아쉽다 생각했는데, 저자분께서 인지하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바람돌이 2021-02-28 01:48   좋아요 0 | URL
알고 계시면 다행이고요. 몰랐다면 다음 인쇄에서는 고쳐줬으면 해서 올려봤어요. 출판사 바로 가서 얘기하는게 제일 빠르겠지만 제가 그 정도로 또 바지런하지는 않고요. ㅎㅎ

cyrus 2021-02-28 1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려보고, 출판사 측의 답변이 오지 않으면 직접 출판사에게 의견을 전달해야 될 거예요. 저는 인스타그램 DM으로 오자를 알려줘요. 출판사들이 인스타그램으로 책 홍보를 정말 열심히 하거든요. ^^;;

바람돌이 2021-02-28 23:43   좋아요 0 | URL
오호.... 하지만 전 인스타를 안해요. ㅠ.ㅠ 굳이 답변을 기다리는건 아니구요. 설마 자기들이 만든 책 독자반응도 안볼까 싶은거죠. 그리고 이 책은 2쇄 들어갈 것 같은데 쇄라는게 제가 알기로는 판본을 바꾸거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찍어내는 걸로 알고있는데 반영이 될지는 잘 모르겠네요. 출판사는 또 출판사대로 사정이 있을테니까요. ㅎㅎ

pistis 2021-07-13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오타오류가 발견되면 출판사에 전화를 하는 데, 간혹 저자분과 연락이 되어 영상통화도 하고 만나서 식사도 같이 하며 아는 사이가 되기도 했어요. 꼼꼼한 책읽기를 좋아합니다.

바람돌이 2021-07-14 14: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저는 성의부족인 낯을 좀 가리는 제 성격 때문인지 이런 얘기를 직접 하는건 좀 어렵더라구요. 저자분을 만나면 참 좋을듯도 한데 무슨 얘기를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망설일듯합니다. ^^
 

4대문명론은 20세기 초반 제국주의가 전세계를 활보할 때에 만들어졌다.
문명이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발달했고 나머지 지역은 미개하게살았다는 생각은 몇몇 선진국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와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의 선입견을 깨부수는 후기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여럿발견되고 있다. 터키 남부에서 발견된, 1만 5000년 전에 만들어진대형 신전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 유적과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2만년 전의 토기가 대표적이다.
- P22

유라시아 서쪽에 괴베클리 테페가 있다면 동아시아에서는 세계 최초로 구석기시대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1960년대부터 일본열도에서 구석기시대의 석기와 함께 토기가 발견되었고 1990년대에는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도 토기가 발견되었다.  - P23

고고학을 통해 강대국 문명 중심의 역사관을 해체하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주류와 변두리의 선을 긋지 않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한국사와 세계사를 보기위한 첫걸음으로 그간 우리가 지나쳤던 역사의 진정한 주역들을차례차례 만나보겠습니다. - P6

서 접근했다. 세계 문명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근동과 인더스의 문명이 전쟁, 행정, 교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중국을 비롯한아시아와 신대륙 일대는 제사와 그것을 주관하는 신관, 즉 샤먼이문명의 주축이 되었다. 구석기시대 이래 종교적 전통이 잘 남아 있는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예술품과 종교에 유사점이 보이는 것은이 때문이다. 이를 아시아-아메리카 샤먼 문화권‘이라고도 할 수있다.
- P43

훈족과 흉노가 같은 민족인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성립 자체가불가능하다. 유목사회는 다양한 집단의 융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그들이 ‘같은 민족‘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흉노와 훈족 관계의 핵심은 ‘유라시아를 관통한 문화교류에 있다.
- P77

동이(東夷)는 원래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으로, 중국 내에서 사용한 명칭이다. 동이족은 주나라 건국 직후에는 상나라 사람을,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는 산둥반도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통일을 이룬 진한시대에는 바다 건너 고구려, 부여, 옥저 등한반도와 북방의 만주족을 통칭해 동이족이라 불렀다.
- P107

한가지 분명한 점은 기자 동래설이 한나라때 갑자기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 있다. 고조선은 원래 중국에서 사람을 보내 세운 나라였다는 주장을 정벌의 명분으로 삼았다.
- P122

 이렇듯 다링하는 청동기시대에 다양한 문화가 교차하며 발전한지역이다. 단편적인 자료 몇개를 가지고 기자조선인가 아닌가라는흑백논리로 접근하는 것은 유라시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했던 이지역의 역동성을 무시하는 처사다. 어쩌면 상나라가 망하고 주나라 시대가 되면서 이 지역으로 건너간 중국인들의 이야기가 와전,
윤색되어서 기자동래설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나라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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