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당시 중3졸업을 앞두고 있던 둘째 딸과 단 둘이서 떠났던 도쿄 여행은 운이 좀 좋은 편이었다.
(이 해 봄에 No Japan이 시작되었으니 하마터면 오래도록 못갈뻔..... )
하여튼 여행에서는 나는 항상 운이 좋은 편이다. 감사하게도....
당시 도쿄에서는 각종 거대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뭉크, 베르메르, 루벤스 전이 한꺼번에 열리고 있었고, 심지어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이 우에노 공원 안에 다 모여 있다는 것 역시 행운이었다.
저 전시회들 중에서도 최고 화제였던 것이 바로 뭉크 전시회였다.
이 책에서 몇 번 언급되는데 당시 노르웨이의 국립미술관이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이 들어가는 바람에 뭉크의 작품들을 전시할 공간이 없어지면서 대규모의 해외 전시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인데 일본이 그 기회를 낚아챘던 것 같다.
덕분에 평소라면 나라 바깥으로 한꺼번에 나오는건 꿈꾸지도 못할 뭉크의 대표작들 대부분이 한꺼번에 전시되어 뭉크의 진면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물론 머나먼 노르웨이를 직접 방문하는 것은 빼고 말이다.
정말 큰 기대를 품고 전시장에 갖고, 이 책에 나오는 뭉크의 대표작들을 포함하여 그의 초기부터 말년까지 정말 꽉 찬 컬렉션이었는데....
아 전시회를 감상하는건 작품의 질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다.
전시 공간은 그리 넓지 않은데 아니 사람이 무슨....
심지어 그 유명한 <절규>앞에선 방 입구부터 3줄 겹으로 줄서서 한발짝씩 한발작씩 움직이며 그림의 영접을 기다려야 했고, 정작 그림앞에선 1분도 채 머무르지 못했다.
일본 사람들이 서양화에 관심이 많다더니 이건 무슨 돗대기 시장같은 꼴이다.
사람 많다는 얘기는 들어서 평일 아침 미술관 문 열자마자 갔음에도 이 꼴이다.
뭉크는 <절규>의 화가이고 그의 그림 대부분이 우울과 절망과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극성에 맞춰져 있다.
그런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대충 분위기는 맞춰야 하는데 이건 무슨....
내 마음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래도 꾸역꾸역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 딸이 엄마 토할 것 같아.....
마음이 토할 것 같은게 아니고 진짜 토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절규>의 감흥은 '아 이 유명한 작품을 드디어 봤어'라는 정도 외에는 딱히 없었다.
뭔가 특별한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는 실제 작품에 대한 약간의 신비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지나치게 알려지고 온갖 재인용으로 이용되어 져서 그림 속 주인공의 비명을 느끼기에는 너무 다른 이미지들이 중첩되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절규>속 주인공을 보면 영화 <스크림>의 가면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만으로 작품의 이미지는 반쯤 날아가버리니 말이다.
지나친 상업적 인용의 폐해라고나 할까?
이 노트를 읽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뭉크의 노트에 ‘절규‘라는 말은 없다는 점이다.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 는 있는 힘을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화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 P57
그리고 제목인 절규 역시 항상 뭔가 안맞다 싶었는데 그래도 별 생각없이 그냥 절규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위화감을 겨우 알아챘다.
<절규>가 아니라 <비명>이라는 것을.....
제목 하나 다르게 보는데 그림이 새롭게 보인다.
그의 내면의 우울과 절망이 온 하늘을 흔들리게 하는 순간이 훅 다가오는듯하다.
그래 뭉크는 한번도 제대로 희망차거나 마음껏 행복해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던듯 했다.
그의 그림들이 대부분 그러했는데 이 책을 통해 만난 뭉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기질이 그러했고, 어릴 적 맞이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 그리고 유부녀와의 비밀스런 첫사랑과 밀회, 그리고 헤어짐....
그의 평생을 지배하는 이 이미지들에서 그는 한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고, 백야와 긴 겨울이 지배하는 노르웨이의 자연환경 역시 그의 이런 성향을 강화시켰던 듯하다.
평생 마음속에 비명을 안고 사는 사람의 삶이랄까?
여성을 그린 그림들은 <마돈나>를 비롯하여 모두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강하고, 아예 대놓고 벰파이어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았다.
평생 혼자였고, 그것 때문에 괴로웠으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또 괴로움이었던 화가랄까?
그런 그의 외로움이 걸작들을 만들어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뭉크에게는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워낙 은둔형의 인간이라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화가 자체에 대한 특별한 감상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그의 그림들 역시 어려운 해석이 필요없이 당대의 불안과 개인의 불안이 중첩되어 한 인간을 얼마나 절망적으로 보이게 하는지 애잔한 마음으로만 보게 된다.
그런 것들 때문인지 실제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감동을 준 것은 그 자신의 다양한 자화상들이었다.
특히나 죽기 직전에 그렸던 말년의 뭉크

자신의 방에 우두커니 서있는 노년의 뭉크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려는 듯한 느낌이다.
죽음이라는 마지막 여행.
책에서는 그림속 상징들에 대해 이것 저것 얘기해놓았지만 그건 다 필요없는 얘기인듯 하다.
오랜 시간을 외롭게 보내고 그 고단한 인생을 이제는 접어놓으려는 듯, 지친듯하지만 평온하기만 하던 저 표정은 이제서야 길고 힘들었던 삶이라는 여행을 마칠 수 있구나, 또한 여전히 나는 혼자이구나라는 소리없는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온 하늘이 붉게 요동치고 사방이 그림속 주인공을 향해 압박하던 <절규>속 비명은, 노년에 이르러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제자리를 지키지만 어느 것도 애착 가는 것이 없는 조용한 <비명>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나의 작은 삶이 끝났다.
뭉크의 마지막 저 손에 아주 작은 무엇 하나라도 쥐어주고 싶다.
그 죽음이 외롭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