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이 밀리면 또 꼼수를 쓴다.
마음은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리뷰를 쓰고 싶은데, 다른 마음 한켠에서는 리뷰고 뭐고 계속 계속 다른 책을 읽어나가고 싶은 마음도 커진다.
밤 11시쯤은 되어야 머리가 맑아지면서 뭔가 한줄이라도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출근을 하는 평일에는 아무래도 힘들다.
그러니 주말에 꼼수 페이퍼를 쓰자! 한꺼번에 몰아서 뭔가를 하는 내 특기를 여기서도 발휘하는거다. ㅎㅎ
지난 1월에 책탑을 쌓고 하나씩 하나씩 빼나가자 했는데 왜 책탑은 줄어들지 않고 계속 높아만 지는지도 의문이다.
저러다 책탑때문에 탁자가 무너지는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고민도.....
새파랑님이 책탑을 옆으로 쌓으면 안무너진다고 하는데 한번 그래볼까????
러시아령인 연해주는 사실상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소외받은 지역이다.
두만강만 넘으면 되는 그 땅은 간도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흉년을 피해, 세도정치기 관리의 수탈을 피해 이주하면서 한인사회를 형성하였고, 따라서 당연히 독립운동의 중요한 근거지였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국가가 된 소련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묻혀버린 곳이다.
저자인 정철훈씨는 먼저 소설 <김 알렉산드라>를 썼고, 이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라는 제목의 평전을 썼다.
김금숙 작가에 의해서 그래픽 노블로도 쓰여졌는데 사실 내가 아는 이 탁월한 여성 알렉산드라 김에 대한 연구나 책은 정철훈씨의 것 밖에 없으니 이 여성을 제대로 소개하고자 하는 작가의 열정이 느껴진다. 감사한 일이다.
독립운동사의 재구성에서 애를 먹는건 항상 절대적인 자료의 부족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기에는 소설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거 같고, 이후 자료를 보충하고 연구를 계속한 성과로 이 책 평전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을 출간했지 싶다.
그럼에도 책의 많은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
그만큼 그녀의 삶을 실제 그대로 재구성하기에는 자료가 정말 없었으리라.....
책을 읽으면서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이라는 이 여성은 우리 역사에서 좀 더 중요하게 기억되고 연구되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한다는 의미보다는 우리 역사학이 민족주의의 단단한 틀을 이제는 좀 벗어나야하지 않나하는 의미가 더 크다.
알렉산드라라는 여성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독립운동가에서는 다소 벗어난다.
그녀는 이 시절에 세계 혁명을 꿈꾼 철저한 볼세키비 전사였다.
책에서 그려지는 이미지대로라면 한창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있던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을 꿈꾸고, 그것이 식민지 민족해방과도 바로 맞닿아 있음을 자각하고, 자기의 모든 삶을 투신한 전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아직 젊어 정치적 모략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고 투쟁하는 순수한 전사의 이미지라고 할까?
그녀의 활동을 보면 감탄스럽기 그지 없다.
여성이라는 한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며,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고민하는 혁명가!
유일한 여성으로 우랄지역까지 가서 우랄노동자 동맹을 이끌고, 1차세계대전 중 포로가 된 협상국 포로들에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연설하며 그들을 혁명의 편으로 이끌어내고, 연해주 지역에서 백군에 대항해 지역의 혁명을 지키고, 조선인, 러시아인, 중국인을 가리지 않고 억압당하는 계급의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녀의 삶은 무슨 말로 치장한대도 그 삶의 숭고함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려면 이러한 이념적 지형을 끌어안아야 한다.
연해주 지역내에서 먼저 이주해와 러시아로 귀화한 원호인들과 뒤늦게 이주해와서 귀화의 기회도 얻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여호인들의 갈등. 그들이 독립운동에 끼친 영향들도 보다 냉정하게 다시 평가되어야 한다.
연해주 지역의 대표 독립운동 단체로 지금도 교과서에서 이름이 나와있는 대한국민의회는 이 책에 의하면 기득계층이었던 원호인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하는 상황에서는 독립이고 뭐고 오로지 계급적 이익을 위해 똘똘 뭉치는 세력으로 그려진다.
독립운동은 어쩌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것을 깨고 냉정하게 들여다보지 않는한 우리 역사학계의 민족주의 과다 신봉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학자들 대부분이 자유시 참변 이전 이 지역에서 있었던 독립군에 의한 러시아 농민 수탈을 말하지 않는다. 민족주의라는 틀로 보는 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싸우는 곳은 어떤 곳이든 단순한 곳이 없다.
온갖 이해관계와 관점의 차이가 치열하게 부딪히는 곳이다.
그 복잡한 난맥상을 뚫고 그래도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과 잊혀져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그런 이념의 차이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한단계 넓히는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혁명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의 복원에서 우리는 그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soul푸드, 영혼을 울리는 식사? 내가 먹는것이 나를 만들기도 한다는데, 우리의 음식문화는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소울 푸드란건 개인적으로 볼때는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의 총체이므로 사람마다 달라지겠지만, 그것을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어떤 집단으로 확장하면 어느 정도 범주화가 가능해진다.
<한국인의 맛>에서 다루고 있는 음식은 모두 9가지고 아지노모도(미원이다, 한국인의 조미료 바로 그 미원, 이건 다시 다시다로 이어진다.), 짜장면, 돈까스, 설탕, 카레, 단팥빵, 김밥, 팥빙수, 커피가 그것들이다.
이 9가지 중에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며,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음식에서 모두 상위 랭킹에 빛날 음식들이다.
그런데 다시 보면 뭔가 싸하다.
이 중 어느것도 근대 이전에 먹었던 것들은 없다.
모두가 근대 이후 더 본격적으로는 식민지시대 이후 정착된 것들이다.
여기서 왜 비빔밥이나 김치가 있지 않냐고 말해도 별 영향을 못미치는게 지금 우리가 먹는 빨간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비빔밥이나 김치역시 근대 이후가 되어야 국민적인 음식이 되어진다.
고추가 우리나라 들어온게 임진왜란 전후쯤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실제 그것이 그렇게 대중화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게 고종때까지도 빨간 고추로 담근 김치는 왕실에서만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니까 말이다.
어쨌든 <한국인의 맛>은 재밌다.
류경호라는 가상의 기자를 내세워 근대시기 유행하게 된 새로운 음식들을 취재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음식의 역사를 풀어나가고 있다.
근대 일본의 탈아입구의 욕망이 서양인의 신체 사이즈를 열망하는 것으로, 나아가 음식문화의 변화에 영향을 끼쳐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좌충우돌하며 퍼져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한국인의 맛>을 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백년 식사>를 찾았다.
같이 보면 좋을 듯해 골라본다.
거의 비슷한 주제를 어떤 식으로 다르게 다룰지 기대하면서....
<니클의 소년들>을 보면서는 어쩔 수 없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 끔찍한 일들을 소설로만 볼 수 있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가까이 있었던 일과 똑같은 상황이라 감정의 과잉으로 좀 괴로웠다.
심지어 형제복지원 사건은 아직도 제대로 규명이 되지 않았고, 범죄자들의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 진행형의 사건이다.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국가가 제대로 닦아주지 않는한 언제까지나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오늘자 기사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다시 활동을 시작하는 과거사위원회에 상정되었다는데 법원의 결정을 뒤엎을 수 있어야 하리라.....
국가가 행한 범죄에서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증하라는 억지가 아니라 국가가 범죄를 제대로 입증해내기를....
사실상 국가는 언제나 저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다.
미국도 한국도, 그것을 어떻게 막는가 하는 것도 결국 시민의 깨어있는 의식과 연대로만 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요즘 서평집이나 독서에 관한 책들을 꽤 읽었던지라 사실 이 책은 패스할 생각이었는데 알라디너님들의 열화와 같은 폭풍 뽐뿌에 이끌려 읽은 책이다.
알라디너님들의 추천은 대부분 성공적인 독서경험을 제공하지만 가끔은 취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르 귄 작가님의 문학 특히 SF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부분과 르 귄 작가님이 쓴 서문이나 서평집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내게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반부였다.
특히 리얼리즘 문학에 일격을 날리는 <진지한 문학에 대하여>와 내셔널 북 파운데이션 메달 수락연설인 <자유>라는 글은 압도적인 명문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듯하다.
하지만 서평부문으로 가면 일단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책이 너무 많고, 내가 읽지 않은, 심지어 작가 이름도 처음 듣는 이들이 너무 많았으며, 서평을 읽음에도 나의 관심과는 살짜기 비켜가는 부분들이 많아 몰입이 힘들었다.
관심이 가는 책들은 이미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라있는 책들이고....
차라리 르귄 작가님의 소설을 찾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제일 큰 수확이다.

레베카 vs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작가의 대표작인 두 작품을 드디어 다 읽었다.
두 작품 중에서 어느쪽이 더 좋으냐에서 알라디너님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는데 나는 레이첼의 손을 들어주겠다.
<나의 사촌 레이첼>의 휘몰아치던 마지막 페이지는 전율이었고, 책의 모든 페이지를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레이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다시 되새기면서 당대 사회에서 여성을 보는 관점을 되짚어보며, 진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 사회적 편견이 우리의 눈을 얼마나 가리는지 지금 시대를 사는 나조차도 마찬가지의 편견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시종일관 주인공에게 일정정도의 거리를 두던 작가의 인물표현이 마지막 순간 모두 무너지는걸 보는 건 굉장했다.
이런 작가의 전략은 <레베카>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만 그 충격의 크기에서는 너무 못미친다.
일단 레베카라는 인물 자체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지나치게 단편적인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조차도 그렇게 긍정적이거나 새로운 인물상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소설의 후반부의 몰입감은 굉장하지만 기존의 서스펜스 작품들에서 이 정도의 반전이나 결말은 충분히 많았다는 것이 신선함을 떨어트린다. 물론 이 작품이 나온 시대를 고려하고 그 시대의 감성으로 읽는다면 굉장히 새로웠을 수 있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21세기의 독서가인것을....
소설 전체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나로만 표현되고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또 다른 주인공의 심리변화를 쫒아가는게 사실 가장 큰 소설의 재미였다.
<레베카>의 마지막을 보고 난 이후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이 때 <다시 올리브>에 나오는 한 대목을 떠올리게 되는건 나만 그런걸까?
아들은 엄마 같은 여자와 결혼했다. 모든 남자가 결국에는 -이런 저런 형태로 그러듯이- 그렇게 하듯이.
.......... 그녀는 그 집에서 아들을 키웠다. 엄마 없는 아이를 키운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한 번도 깨닫지 못한 채, 이제그 아이는 집을 떠나 멀리멀리 가버렸다.- P150
남자주인공인 맥심은 어리고 순진하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고 기댈듯한 아가씨와 결혼했지만 소설의 앞으로 다시 돌아가보면 결국 그 아가씨는 새로운 레이첼로 성장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재구성되어진 레이첼이 조금만 더 레베카처럼 공감이 갔다면 아마 이 소설도 나의 최애작이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