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모퉁이 오래된 집 - 근대건축에 깃든 우리 이야기
최예선 지음 / 샘터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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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짐이라 뛰지는 못하지만 걷는걸 좋아한다.

오래된 집이든, 종교 공간이든, 현대의 멋진 건물이든 모든 아름다운 건축물을 좋아한다.

건축물을 보며 걷는걸 가장 좋아한다.

다만 전문적인 건축용어들은 너무 어려워서 패스

건물들에 담겨있는 사람들의 삶과, 그곳에 배어 있을 삶의 흔적들을 찾아 읽고, 보고,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

 

가령 이런 사진- 15쪽 최순우 옛집

 

 

이 단정한 방에서 어쩌면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에 나오는 글들을 간간히 썼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가 좀 잦아들면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다.

저기 최순우 옛집에 가서 선생이 생전에 어루만졌을 책상을 보고, 그가 거닐었을 뜰을 거닐면서 우리 미술에 대한 최순우 선생님의 그 마음을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다.

 

최순우 옛집이 좋은 건 사람 사는 집다운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나고 문화재가 된 집들은 삶의 온기가 주는 애틋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곳은 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과 회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정성과 노력으로 살뜰하게 매만지며 정성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빨갛게 익어가는홍시를 볼 수 있고 사철 따뜻한 감잎차를 마실 수 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품격 있는 집 한 채를 지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은 그토록 애써서 지켜야 하는 일이다.- P21

 

어쩌면 이 책의 저자도 나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오래된 집들을 같이 따라 여행하다 보면 그런 저자의 마음이 한껏 느껴진다.

 

때로 집은 주인이 바뀌면서 완전히 다른 삶과 마음들을 품기도 한다.

친일파의 집이었다가 민족주의자의 집으로, 남편을 잃고 홀로 60여년을 지킨 아내로 주인이 바뀐 백인제가옥은 얼마나 많은 눈물과 의지와 희망을 품고 있을까?

친일파 한상룡의 그 허영에 찬 과시욕이 남아있을 테고, 그곳을 용도 변경하여 흥사단원들이 모임을 가졌던 흔적도 집은 가지고 있으리라... 무엇보다도 납북된 남편 백인제씨를 기다리며 60년간 그 집을 지켰을 아내의 한 평생이 녹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삶의 흔적이 어딘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집은 알게 모르게 주인을 닮아간다.(126쪽 장욱진 가옥)

 

 

저 집의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 한마리에서 장욱진 화백의 그림 냄새가 물씬 풍긴다.

막 그린 듯 천진한, 그러면서도 애잔한 그의 그림과 이 풍경은 이토록이나 어울린다.

슬핏 스쳐지나가면 그냥 집일 뿐이지만 기둥 하나 서까래 하나 문짝 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집에 살았던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

옛적 전라도 장성의 필암서원을 갔다가 기겁했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강당이 대문쪽 정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당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속깊은 뜻이야 모르겠지만 그 건물배치가 보여주는 갑갑함이라니...

"학생 너희들은 자나 깨나 오로지 선현을 공경하고 배우고 익히거라.

헛된 풍경이니 풍류니 하는 삿된 것에는 눈도 돌리지 말거라"라고 건물이 엄숙하게 훈계하는 느낌이었달까?

이처럼 건물에 스며있을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면 오래된 집들을 산책하는 즐거움은 더욱 커진다.

장욱진 화가의 집에서는 구불구불한 기둥들이 그의 그림과 꼭 닮아서, 사랑스럽다.

 

집만 사랑스러운 것이 아니다.(162쪽 영천 임고초등학교)

 

오랜 역사를 가진 시골의 초등학교는 숲을 품고 있다.

건물은 오래되어 낡고 불편해서 리모델링을 들어갈 수 밖에 없겠지만 이 숲을 저 아름드리 나무를 가진 것 만으로도 이 학교는 보존되어야 한다.

저 나무들 아래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유년을 추억을 쌓았을까?

내 기억 속 학교 하나는 목련나무 하나로 남아있다.

봄이 되면 아름드리 크게 훌쩍 솟은 나무에서 목련꽃이 피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나무만큼 아름답게 목련꽃을 피우는 나무를 본적이 없다.

매일 등하교길에 한참을 꽃을 바라보던 순간은 또한 내 삶이 그래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 책속에 아름다운 공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쓸쓸히 쇠락해가는 소록도의 공간에서는 한센병 환자들의 아픔이 만져지고, 그들을 위해 봉사했던 오스트리아인 간호사 2분의 희생과 봉사가 같이 잊혀지는 안타까움도 전해진다.

식민지 시절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지어졌던 영단주택지역의 흔적, 김구선생의 최후를 간직하고 있는 경교장, 피난민들의 고달픔을 품고 있는 부산 아미동, 감천동지역들......

 

적산 가옥인 부산의 정란각의 구조를 보면서는 예전에 다녀왔던 군산의 적산가옥을 떠올린다.

군산 지역 최대 지주로 군림했던 일본인의 집을 보면서 성채를 떠올렸었다.

이들은 돌아갈 생각이 없었구나, 영원히 이 땅에서 조선의 농민들을 부리며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겠구나라는게 건물 전체에서 풍겨나왔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적산가옥들이 그렇지 않았을까?

 

구룡포의 일본인 거리를 보는 마음은 작가도 씁쓸해하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자고로 집이든 거리든 이야기를 품고 있어야 한다.

관광지화 되어버린 그곳에 그 시대를 살았던 어민들의 삶이 없음으로 해서 생명없는 복원이 되어버렸고,

이대로라면 아마도 얼마 안가 찾는 이 없는 쓸쓸하게 퇴락한 관광지가 되지 않을까?

부산의 용호동 일대는 옛적에 백합조개 산지로 유명했었다.

그곳의 어민들은 그 조개를 캐는 것으로 그럭저럭 살만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이 들어오고 어업령이 내려지면서 백합조개를 캐기 위해서는 허가를 받아야 하게됐다.

졸지에 조선인 어민들은 조개를 캘 수 없게 되어버렸고, 일본인 업자 밑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지금 용호동에는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 삶의 거리를 복원하지 못한다면 구룡포 지역은 반대로 삶의 자취들은 남아있으나, 그곳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짐으로 해서 죽어가는 거리가 되어가는 것이겠지.

 

많은 건물들을 소개하면서 각자의 이야기들이 너무 짧다는 것이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이다.

깊은 울림을 느끼기에는 짧은 분량들이 방해한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그러나 건물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제목처럼 따뜻하다.

어딘가 거닐고 싶은 봄이다.

이 책 한권을 끼고 작가가 느꼈던 그곳을 확인하고, 작가가 보지 못한 곳을 찾는 기쁨도 누려보고 싶은

그런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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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1-04-05 0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런 멋진 풍경의 시골 초등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으나 서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여고에 다니는 동안 숲에 둘러싸여 초록빛 동산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 그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많이 스며들었던 거 같아요. 어떻게 살고싶다 어떻게 살아야겠다 그런 꿈을 품은 데 영향도 있었구요. 가슴 아픈 공간도 부러 찾아다니고 싶네요, 봄 기운 맞아서. 부산도 가고 싶어요!!

바람돌이 2021-04-05 10:12   좋아요 1 | URL
저는 섬마을 초등학교를 다녀서 저것과는 또 다른 풍경의 기억을 갖고 있어요. 점심시간에 바닷가 내려가서 굴따고 파래 뜯고..... ㅎㅎ 방학이면 아침에 바다 들어가서 밥먹을 때만 들어오는 생활요. 진짜 어디든 가고 싶은 봄입니다. 마음만 설레발... 수연님 부산 오시면 제가 찐하게 밥살게요. ^^

수이 2021-04-05 10:26   좋아요 1 | URL
저는 밥보다 술과 함께 하는 안주를 사랑합니다 바람돌이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해요. 아 진짜 바람돌이님 만나러 부산 휙 다녀올까요 언제 ^^

바람돌이 2021-04-05 10:28   좋아요 1 | URL
아니 밥 다음에 술은 당연한거 아닌가요? 제가 좋아하는 술집들도 쫘악 ~~ ㅎㅎ

수이 2021-04-05 10:3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자꾸 그러시면 저 날 잡아서 진짜 가요!!! 🤔

붕붕툐툐 2021-04-06 00:59   좋아요 0 | URL
그 날에 전 무족권 낍니다!ㅋㅋ

바람돌이 2021-04-06 11:21   좋아요 0 | URL
수연님도 툐툐님도 무조건 okok ^^

scott 2021-04-05 09: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숲을 품고 있는 학교, 나무그늘에서 맘껏 뛰어노는 아이들,,,,
자연과 함께 숨쉬며 살아가야하는 아이들인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로
나무는 커녕 뛰어놀 공간 시간도 없고
더더욱 코로나 떄문에 원격 강의를 들어야 하는,,,,
바람돌이님에 리뷰 속 사진들 보며
지난날의 그곳 그나무 떠올려봅니다.

바람돌이 2021-04-05 10:15   좋아요 3 | URL
요즘 아이들의 안타까움이죠. 에휴... 볼 때마다 안쓰러워요.
우리집 애들 어릴 때 보니까 장난감이고 뭐고 다 필요없더라구요. 그냥 아무데나 풀어놓으면 알아서 너무 잘 놀던데..... 요즘 애들은 마스크와 원격수업의 추억을 너무 강렬하게 가질 것 같아 안타까워요.

syo 2021-04-05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가 사진에 붕어빵 올려놨어.....

바람돌이 2021-04-05 11:50   좋아요 2 | URL
지금 배고프시죠? 그래서 포악해지신듯.... 역시 사람은 먹어야죠. 빨리 三씨랑 밥 드세요. ^^

붕붕툐툐 2021-04-06 01:00   좋아요 0 | URL
아~ 놔~붕어빵ㅋㅋㅋㅋㅋㅋㅋㅋ

mini74 2021-04-05 1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석의 무우징게국 끓이는 냄새 난다던 여우난골족 그 집이 생각나네요. 집이란 생활일땐 몰랐는데 떠나오면 참 그리운 곳이 되는 거 같아요.

바람돌이 2021-04-05 21:23   좋아요 2 | URL
전 도대체 그 무우징게국이 뭘까가 궁금해요. 어릴 때 살던 집 놀던 곳 왠지 꼭 한번은 가보게 되더라구요. 뭔가 그립고 애틋해요. 그쵸?

붕붕툐툐 2021-04-06 0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남의 집 구경이 그렇게 좋더라구요! 집엔 그 사람이 고스라니 담겨 있는거 같아요~ 그러니 주인이 바뀌면 집도 변하는거 같아요!
숲이 있는 초등학교 너무 좋아요~😍

바람돌이 2021-04-07 14:00   좋아요 0 | URL
다들 좋아할 거 같아요. 집이란게 참 거기 사는 사람들의 삶이나 마음 같은게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예전에는 별 생각없었는데 요즘은 내집을 보여주는건 부담스럽더라구요. ^^

희선 2021-04-07 0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품격 있는 집 한 채를 지키려면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오래됐다고 안 좋게 여기는 사람도 있잖아요 숲이 있는 학교라니 좋을 듯하네요 아직 남아서 여러 이야기를 알 수 있는 곳도 있지만, 이제는 사라진 곳도 있어서 아쉽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07 14:03   좋아요 0 | URL
사람들마다 생각이나 판단의 기준은 정말 다양해서 한 번씩 깜짝 깜짝 놀라게 되어요. 오늘도 아 이렇게 생각이 다르구나 하는 거 또 실감한 사건도 있네요. 어쨌든 학교는 나무가 있고 운동장이 넓고 좀 그래야 할 거 같아요. 그래서 저 시골학교가 오래 오래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초딩 2021-05-08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앙 바람돌이님 이달의 당선작 진심 축하드립니다!
넘넘 멋져요 ^^

바람돌이 2021-05-08 22: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초딩님이 더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데미안으로 쓰신 글 같은걸 저는 못 쓰는 글이라 굉장히 멋지다소 생각하면서 읽었었거든요. ^^
 

여성이 픽션을 쓰고자한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여러분이 곧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견해는 여성의 참다운 본성이니, 픽션의참다운 특성이니 하는 문제는 미해결로 남겨두는 셈입니다. 나는이 두 문제에 관한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는 의무를 피해왔으므로 나에 관한 한 여성과 픽션은 미해결의 과제입니다.  - P10

그러나 그 생각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신비로운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마음속에도로 집어넣으니까 즉시 매우 재미있고도 중대한 것이 되더군요.
그것은 쏜살같이 나아가다가 밑으로 가라앉고, 여기저기에 번쩍번쩍 나타나며, 여러 상념의 대단한 파도와 격랑을 일으켜서 나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 자신이 잔디밭을 가로질러 굉장히 빠르게 걸어가게 된 것이 이렇게 하여 일어난 일이지요.  - P13

그런데 여기 나는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문에 실제로와 있었습니다. 내가 그 문을 틀림없이 열었나 봅니다. 왜냐하면하얀 날개 대신 검은 가운을 펄럭이며 길을 가로막는 수호 천사처럼, 뭔가 불허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은발의 친절한 신사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돌아가라고 손을 흔들며, 낮은 목소리로 숙녀분들은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지녔을 경우에만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고 유감스럽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 P16

옥스브리지의 오찬회와 정찬회를 다녀오자 질문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요. 왜 남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여자들은 물을 마시는가? 왜 한쪽 성은 그렇게 부유하고 다른 쪽 성은 그다지도 빈곤한가? 가난은 픽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데는 어떤 조건들이 필수적인가?  - P39

또한 우리는 무엇보다 환상의 동물이므로 인생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요구합니다. 자신감이 없이는 우리는 요람 속의 어린 아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헤아릴 수 없으면서도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자질을 가장 빠르게 갖출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이지요.
즉, 자신이 다른 사람에 비해 타고난 우월함을 가지고 있다고 느낌으로써 이지요 - 그 우월함은 재산, 지위, 곧은 콧대, 혹은 롬니가 그린 할아버지의 초상화일 수도 있지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애처로운 책략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따라서 뭔가 정복하고 지배해야만 하는 가장에게는 사실상 인류의 절반인 수많은 사람들이 본디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되겠지요. 이것이 실제로 그의 권력의 중요한 원천 중 하나임에틀림없습니다.  - P52

그 시절의 쓰라림을 기억해보면고정된 수입이 가져오는 엄청난 기질의 변화는 실로 괄목할 만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강제력으로도 나에게서 내오백 파운드를 빼앗아갈 수는 없지요. 음식과 집과 옷은 이제 영원히 내 것이지요. 따라서 단지 노고와 노동뿐만 아니라 증오와신랄함도 그치게 됩니다. 나는 어떤 남자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가 나를 해칠 수 없으니까요. 나는 어떤 남자에게도 아첨을 떨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 자신이 인류의 절반에 대해 새로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미세하게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 P56

픽션은 거미집 같아서 어쩌면 대단히 가볍게, 그러나 여전히 네 귀퉁이가 모두 삶에 부착되어 있지요. 종종 그렇게 부착되어 있다는 것이 거의 감지되지 않는데,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희곡은 홀로 완벽하게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이지요. 그러나 거미집을 비스듬히 잡아당기고 가장자리에 갈고리를 걸어 끌어올리고 가운데 부분을 찢어보면, 이 거미집들은 실체 없는 피조물들이 공중에다 친 것이 아니라 고뇌하는 인간들의 작품이며 건강과 돈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같이 지극히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부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 P61

그리하여 하나의 매우 기이한 합성체가 나타나게 되지요. 즉,
상상 속에서는 여성이 대단히 중요하나 실제로는 완전히 무가치하다는 말입니다. 시에서는 그녀가 표지에서 표지까지 스며들어있고, 역사에서는 거의 부재중이라는 말입니다. 픽션 속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사실에 있어서는 그녀의손가락에 억지로 반지를 끼워주는 부모의 아들에게 속한 노예였지요. 문학작품에서는 가장 영감을 받은 말과 가장 심오한 생각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고, 실생활에서의 그녀는 거의 읽을 줄도철자법도 모르며 단지 그녀의 남편이 소유한 재산이었던 거지요.
- P63

게다가 19세기 초에 여성들이 받았던 문학훈련은 인물의 관찰과 감정의 분석에 대한 훈련이었지요. 그녀의감수성은 몇 세기 동안 공동 거실의 영향을 받으며 교육되었지요. 사람들의 감정이 그녀에게 새겨졌으며 개인적인 인간 관계들이 눈앞에 항상 있었지요. 따라서 중산층 여성이 글쓰기에 전념하였을 때에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설을 썼습니다. 비록 꽤 분명하게 보이다시피 여기에 언급된 네 사람의 유명한 여성들 중 두명은 본래 소설가가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에밀리 브론테는 시극을 썼어야 했고 조지 엘리엇의 넘쳐나는 넓은 마음은 그 창조적 충동이 역사나 전기를 쓸 때 널리 퍼져나갔을지도 모릅니다.
- P94

아마 여성이 종이에 펜을 갖다 대면서 발견하게 되었을 첫 번째 일은 그녀가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는 공통의 문장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새커리, 디킨스, 발자크와 같은 모든 위대한 소설가들은 빠르면서도 추레하지 않고 표현력이 풍부하면서도 까다롭지 않은 자연스런 산문을, 공동 소유물이 되기를 그치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색조를가지고 썼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문장에다 그 산문의 기초를 두었지요.  - P106

 그러나 거의 예외 없이 여성들은 남성들과의관계를 통해서 보이고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시대까지 픽션속의 모든 위대한 여자들은 다른 성에 의해 보일 뿐만 아니라 다른 성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보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상하였지요. 그런데 그것은 여성의 삶 중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요. 그리고 남성이라는 성이 자신의 코 위에 걸쳐놓은 까맣거나 장미빛인 안경을 통하여 그것을 관찰할 때 남자들은 그 작은 부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지요. 아마 이래서 픽션 속의 여성들이 특이한 성격으로 나타나는데, 그녀는 놀랄 만큼 극단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혐오스럽고, 천국 같은 선함과 지옥 같은 타락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요 - 왜나하면 그녀의 연인인 남자가 자기의 사랑이 올라가고 가라앉는 대로, 순조롭거나 불행한 대로, 거기에 따라서 여성을 보기 때문이지요.  - P115

예를 들어, 문학작품 속에서 남자들이 오로지 여자들의 연인으로만 그려지고 남자들의 친구나 군인, 사색가, 공상가로는결코 그려지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십시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 얼마나 작은 역할이 그들에게 할당되었을 것이며, 문학은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요! 오셀로 같은 인물의 대부분과 안토니같은 인물의 상당수는 아마 계속 존재하겠지요. 그러나 시저나브루투스, 햄릿, 리어, 혹은 자크는 없었을 것이며 문학은 믿을 수없을 정도로 빈곤해졌을 겁니다. 실로 문학이, 이제까지 여성에게 닫혀 있었던 문으로 인해 축적할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해졌듯이 말입니다. - P116

우리는 그 당시의 셰익스피어에게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양성적이었으니까요. 키츠, 스턴, 쿠퍼,
램, 그리고 콜리지도 그러했지요. 아마도 셸리는 무성無性이었지요. 밀턴과 벤 존슨은 내면에 너무나 많은 남성적인 허세를 지녔지요. 워즈워스와 톨스토이도 그러했지요. 우리 시대에는 프루스트가 양성적인데 아마 여성적인 성격이 조금 더 많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그런 단점은 너무나 희귀해서 불평을 할 수가없습니다. 그런 유의 혼합이라도 없이는 지성이 우세하게 되어마음의 다른 능력들은 굳어지고 메마르게 되니까요.  - P143

누가 되었든 글 쓰는 사람이자신의 성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히 그리고 단순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며 우리는 남성적 여성 또는 여성적 남성이 되어야만 합니다. 여성이 어떤 불평불만이든 그것을 조금이라도 강조하는 것, 정당하더라도어떤 주장의 변론을 펴는 것, 어떤 식으로든 의식적으로 여성으로서 말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그리고 ‘치명적‘ 이라는 것은 언어상의 비유가 아니지요. 왜냐하면 그런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쓰인 것은 반드시 없어질 운명에 처하게 되니까요. 그런 것은 더이상 풍부하게 되지 않지요. - P144

예찬과 비난은 똑같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니, 가치를 재는 소일거리가 제아무리 즐겁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 중에서 가장 쓸모없는 일이며 그 측정 자들의 법령에 굴복한다는 것은 태도 중에서 가장 굴욕적인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있는 한 그것이 중요한 전부이지요. 그것이 몇 세기 동안 중요한 것인지 아니면 몇 시간 동안만 중요한 것인지는 아무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손에 은항아리를 들고 있는 교장 선생님이나 소맷자락에몰래 측정 자를 숨기고 있는 어떤 교수님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여러분 비전의 머리카락 한 올이나 그 색조의 미묘한 차이라도희생한다는 것은 가장 비열한 배반입니다. 이에 비한다면 인간의재난 중에 가장 엄청난 것이라고 일컬어지곤 했던 부와 정조의희생은 벼룩에 뜯긴 정도의 사소한 상처에 불과하지요.
- P147

그 누구도 문제의 요점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시인은 오늘날 쥐뿔만 한 기회도 갖지 못하고 지난 이백 년 동안에도 그러했다.…… 영국의 가난한 아이가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 위대한 작품이 탄생되는 지적 자유에로해방될 희망이 더 많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것이지요.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의존하지요. 그리고 여성들은 단지 이백 년 동안만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줄곧 가난하였지요. 여성들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더 없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성은 시를 쓸 쥐뿔만 한 기회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돈과 자신만의 방을 그렇게도 강조한 이유이지요. - P149

내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뒤져봐도 나는 남성의 동료나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어 더 고귀한 목적을 향해 세상에 영향을 끼쳐보고자 함에 대해서는 어떠한 숭고한 감정도 발견하지를 못하니까요. 알고 보니 나는 그저 다른 무엇이 되기보다 자기 자신이 된다.
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간략하고도 단조롭게 스스로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만일 내가 그 말을 고귀하게 들리도록 하는 법을 안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자 하는 것은꿈도 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일 테지요. 사물을 있는 그 자체로 생각하십시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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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0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엄청 어렵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ㅎㅎ 등대로나 델러웨이 부인 읽으려고 대기중~~!

바람돌이 2021-04-04 22:06   좋아요 1 | URL
등대로를 엄청 어렵게 읽어서 전 미리 각오를 하고 읽기 시작했어요. ㅎㅎ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등대로보다는 낫더라구요. 그래서 이게 어딘가 하면서 읽었습니다. ^^
전 다음 책으로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평전 나온거 한 번 읽고 그토록 재밌다는 올랜도로 가볼까 싶어요. 우리 같이 힘내서 열심히 읽어봐요. 버지니아 울프는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으니까요. ^^

새파랑 2021-04-04 22:09   좋아요 0 | URL
자기만의 방 읽고 좌절했다가 올랜도 읽고 다시 관심이 가더라는ㅎㅎ 알겠습니다^^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리뷰를 쓰면서 남편과 나의 옛날 이야기를 살짝 들춰봤더니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남편이 군대에 가 있을 때 나는 딱 2번 면회를 갔었다.

그것도 혼자 갔으면 뜨거운 밤을 보냈을지도 모르지만,

그 때 내 나이에 혼자서 가기에는 남편은 너무나 먼곳에 있었다.

 

논산의 신병훈련소 다음에 뭔지 모르는 후반기 교육을 받는다고 한달간 배치된 곳이 경기도 어디였다.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하여튼 그 때 친구들과 5명이서 용감하게 면회를 갔었다.

새벽 첫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아침에 도착했었다.

당시에는 예매 시스템이라는게 없었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건 밤에 내려갈 기차표를 역에서 미리 예매하는 것이었다.

저녁 7시쯤 기차를 매표창구에 가서 당당하게 얘매하고 - 내가 예매했다. 이게 중요하다. - 우리는 남편, 그 때는 애인이의 군부대를 찾아갔고, 잘 놀았고, 넉넉하게 시간맞춰서 서울역으로 돌아왔다.

아니 그런데 기차를 탈려고 개찰구에 간 순간 우리는 기차 탑승을 거부당했다.

아니 왜요? 왜왜왜~~~~~

내가 예매했던 기차표는 오후 7시 기차표가 아니라 오전 7시 기차표였던 것이다.

내가 예매할 때 예매창구에서는 내가 그냥 7시라고 하니까 좀 있으면 떠날 아침 7시 기차표를 끊어 주었던 것.

그걸 확인도 안하고 룰루랄라 하루종일 놀았던 것이다.

아 진짜! 이 때는 신용카드도 없고, 계좌로 돈 보낸다는 개념도 없고, 기차는 이미 떠나서 환불 0원이고....

우리는 주머니의 개인 돈들을 탈탈 털었다.

정말 천만 다행히도 기차표를 살 돈이 되었다.(아니었으면 누구 하나 부산 집에 전화걸어서 서울역으로 돈 들고 오라고 해야할 상황...ㅠ.ㅠ)

그나마 기차표도 마지막 기차인 밤 11시 30분꺼밖에 안 남았고, 우리는 거지가 되었고....

서울역에서 거지가 된 우리는 남아있는 잔돈으로 어떻게 하면 알차게 보낼 수 있는지를 고민하다가 서울역 근처 만화방에 들어갔다. 거기서 컵라면 2개인가로 5명이서 끼니를 때웠고, 만화 1권씩을 빌려서 3시간 동안 아끼고 아끼며 봤다.

내 일생 가장 정성스럽게 본 만화였다.

아 그러고보니 나의 친구들은 다들 나를 잠시 한심스럽게 보기는 했지만 아무도 욕을 안했고나.

평소에는 입에 욕을 달고 다니는 것들이 말이다.

고맙다 친구들아!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너네들이랑 노는가보다.

 

 

대망의 2번째이자 마지막 면회는 그 1년쯤 뒤였던 것 같다.

1월 아주 추운 날이었다.

아직도 생각나는 그 동네, 강원도 화천군 사창리 이기자 부대!

1990년대 초반 부산에서 저기까지는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미지와 고난의 길이었다.

또 나의 절친 여자애와 같이 이번에는 밤기차를 타고 새벽 4시 반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면회간다고 하니까 애인이가 부산 촌놈 너는 여기 못찾아온다고, 마침 서울에서 대학다니는 친구가 같이 와준다니까 서울역에서 만나서 같이 오라고 하더라...

서울역에 도착하니 아직 잠이 안깨서 부스스한, 어제 술먹은것 같은 퉁퉁 부은 얼굴의 애인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전에 몇번 본 적은 있지만 내친구는 아니니까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근처에서 국밥을 먹었던 것 같다.

강원도 부대쪽 가는 버스는 아침 9시 넘어야 있다길래 그 때까지 갈곳이 없어서 그냥 서울역 대합실에서 죽치고 기다리다 버스 타러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애인이 친구가 나한테 "바람돌이씨 광릉 수목원 안가봤죠? 거기 진짜 좋은데 거기 갔다 가면 동선도 맞고 시간도 맞을 것 같은데 어때요?"라고 하는거다.

"거기 이 아침에 열어요?"

"에이 안열었으면 담넘어 가면 되죠."

그래 그래 내가 뭘 알겠는가? 담을 넘자면 넘고, 개구멍으로 들어가자면 가야지.

또 아무 생각없이 그렇게 우리 셋은 광릉 수목원으로 갔다.

어쨌든 담을 넘어 광릉 수목원안으로 들어간 것 까진 좋았는데....

추웠다. 입에서 욕이 절로 나올정도로 추웠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싶게 추웠다. 애인이의 친구를 죽이고 싶도록 추웠다.

뛰어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추웠다.

어디가 좀 덜 추울까를 찾아서 우리는 그 넓은 광릉 수목원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그 때 갑자기 직원 한 분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개장도 안한 시간에 입장권도 안 끊고 들어온 우리를 기가 차다는 듯이 바라보며 "아니 어떻게 들어왔어요?"라고 하는 그 분께 우리는 "살려주세요. 너무 추워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아 진정 그분은 우리의 구세주셨다.

우리를 별로 나무라지도 않고 온실로 안내해주셨으니....

그러면서 날 밝을 때까지 여기서 쉬다가 가요 하면서 사라지셨다.  

진짜 훌륭하신 분! 우리는 인사를 90도 폴더폰으로 하며 생명의 은인을 보내드렸다.

지금도 나는 간절하게 기원한다. 부디 복받으세요. ^^

어쨌든 애인이의 2번째 면회도 무사히 다녀왔다. 그러나 나는 그 후로 다시는 면회를 가지 않았다.

 

아 늙나보다.

자꾸 옛날 생각나면서 피식거리는 거 보면....

생각난 김에 주말에 여러분도 그냥 웃으라고 쓴 글인데 웃어주시면 다행,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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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04 03: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람돌님~ 대한민국 1%시군요! 군대 간 남친 기다려서 결혼까지 할 확률!! 진정 멋지심다!!
수목원 추억은 넘 좋네요. 요즘 같음 경찰서 직행일 듯한데....ㅎㅎ

바람돌이 2021-04-04 10:10   좋아요 3 | URL
그 1% 대부분 망한 1%아닌가요? 지금도 가끔 얘기합니다. 그 때 내 고무신에 발이 끼는 바람에 못바꾸신었다구요. ㅎㅎ

han22598 2021-04-04 04: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 바람돌이님이 2번이나 ㅋㅋ 면회가셔서...그 남친이 남편님이 되신거 아닐까요?? ㅎㅎ

바람돌이 2021-04-04 10:11   좋아요 2 | URL
어른들이 얘기하시죠. 지 팔자 지가 꼰다고... ㅠㅠ

han22598 2021-04-06 04:4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팔자 지가 꼰다는 말...익숙하지 않는 말인데 웃기네요. 아마 어릴때 듣고 무슨 말이지 몰라서 잊어버린 것일지도 ㅎㅎㅎㅎ

유부만두 2021-04-04 06: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못살아요... 너무 웃긴데 귀엽고 바람돌이님...

바람돌이 2021-04-04 10:11   좋아요 2 | URL
네 저도 한 때는 웃기도 귀여운 사람이었습니다. ㅎㅎ

얄라알라 2021-04-04 08: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호기롭게 들어갔다가, 살려주세요^^ 정말 풋풋한 에피소드네요. 그 뒤로 담장 높이지 않았을까요? 휙 넘을 수 있는 담장이라 ㅋ광릉수목원은 예약 없이 못들어가서 저도 여태 딱 한번만 가보았네요^^

바람돌이 2021-04-04 10:13   좋아요 4 | URL
기억에 그 때는 담장이 다 낮았어요. 그러니 운동신경 꽝인 저도 넘었겠죠. 그 뒤 10년쯤 지나서 봄에 입장권 끊고 당당히 들어가봤더니 좋더군요. ㅎㅎ

scott 2021-04-04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남편분은 아내에게 평생 충성해야함 ^0^

바람돌이 2021-04-04 20:55   좋아요 2 | URL
나이들면서 그 충성은 귀찮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라죠. ㅎㅎ

청아 2021-04-04 10: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것도 너무 재밌고요!! 제가 글 잘쓰는 분들께 한번씩 말씀드리는데 바람돌이님도 이 글이랑 저 글 등등 모아서 책 내셨음 좋겠어요! 커피 마시며 넋놓고 읽었음요.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4-04 20:56   좋아요 1 | URL
제 책에 사용될 나무는 무슨 죄래요? 걔도 이런 잡문에 쓰일려고 장렬하게 종이가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ㅎㅎ 슈바이츠 정도는 돼야 종이가 된 나무도 그 희생이 뿌듯하지 않을까요? ^^ 저도 지금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면서 서재 들어왔음다. ^^

모나리자 2021-04-04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데요?ㅋㅋㅋ

바람돌이 2021-04-04 20:57   좋아요 2 | URL
재미있어 해주셔서 감사해요. 재밌으라고 쓴 글 맞아요. ^^

라로 2021-04-04 12: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왜 남의 연애 이야기는 넘 재밌죠?? 더구나 우리 또래의 이야기,,막 상상되고요,,친구들 진짜 찐구들이네요!!! (그런 친구 없는 일인 읽으면서 하하거리고 웃다가 혼자 울고 있다. 으흑, 부럽다 부러워!!!)

바람돌이 2021-04-04 20:58   좋아요 2 | URL
아 멀리 계신 라로님 생각하니 미국 뉴욕쪽에 가있는 제 친구- 두번째 면회의 그 친구입니다.- 생각나서 잠시 슬픔요. 카톡 보내봐야겠어요. ㅠ.ㅠ 라로님 얘기도 언제봐도 좋은거 아시죠? ^^

레삭매냐 2021-04-05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신 면회에서 느닷없는
광릉 수목원 전환태세~ 대박이었습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살려주세요
썰, 잼나게 읽었습니다.

바람돌이 2021-04-05 00:31   좋아요 0 | URL
곰신? 고무신요? ㅎㅎ
휴일이 끝나가서 꿀꿀하실텐데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오로지 즐거움입니다. ^^

희선 2021-04-05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그런 일이 있어서 지금 그걸 기억하기도 하네요 혼자가 아니고 친구분과 함께여서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때 친구분하고 여전히 잘 지내시는군요


희선

바람돌이 2021-04-05 08:45   좋아요 0 | URL
그때는 뭐든 친구와 함께 하는게 최고였던때니까요. 제게는 지금도 가장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syo 2021-04-05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어쩐지 철두철미하고 냉혹(?)한 이성주의자이실 것만 같은 바람돌이님도 청춘의 앞 페이지에서는 syo와 비슷한 헐렁이셨네요 ㅋㅋㅋㅋㅋㅋ 그치만 저는 마흔이 지척인 나이에도 저런 실수들을 일과처럼 반복하니까 제가 이긴 것으로.....

바람돌이 2021-04-05 11:51   좋아요 1 | URL
어 도대체 어디서 철두철미 냉혹 이성 이런게 떠올랐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데 저는 지금도 여전히 헐렁헐렁합니다. 다만 예전보다 그 헐렁함에 스트레스를 안 받을 뿐.... 그러니까 제가 이긴겁니다. ㅎㅎ
 
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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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내게도 작은 로망이 있었다.

연애 편지를 잘 썼으면 참 좋겠다라는.....

문과 출신임에도 감수성만은 이과쪽을 닮았으며, 툭툭 던지는 말투를 구사하는 100% 경상도 가시내였던 나는 연애를 하고 있음에도  연애편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낯간지러운 말들에는 알러지 반응까지 있었다.

그런 나에게도 연애편지를 쓸 수 밖에 없던 시기가 있었으니 애인이 군대를 가버린것이었다.

모든 군바리의 애인의 필수 임무라는 그 편지질을 내가 해야 하다니....

어쨌든 나는 참으로 정성스럽게 연애편지를 썼다. 한달에 한번쯤이었지만....

나중에 애인이 그랬다. "야 니 편지 다 남자편진줄 알더라. 솔직히 내가 내용을 봐도 그게 그냥 남자친구가 쓴거라고 생각해도 하나도 안 이상하다"

멋없게 쓴 편지봉투와 더 멋없는 주소를 쓴 나의 글씨를 보고 주변 사람들이 다 남자가 보낸 편지라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애인놈은 내 편지를 한마디로 웃기기만 한 내용이라고 했다. 연애편지가 아니라 무뚝뚝한 친구의 안부편지 정도랄까?

그에 반해 애인은 그야말로 문과감성 100%의 남자.

보내 오는 답장은 어떻게나 감성 충만하게 연애 편지의 정석을 그대로 밟는지, 어디 연애편지 대회라도 내보내야 할까 심각하게 생각할 정도여서 나를 열등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심지어 글씨도 엄청나게 잘쓴다. ㅠ.ㅠ

애인이 제대를 하고 난 이후에야 나는 연애편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애인은 지금 뭐하냐고?

지금 내 눈앞에서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끔 방귀도 뀌어주면서 핸드폰과 한몸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내게 이 책은 오래전에 잊어버리고 마음 깊은 어딘가에 쿡 쑤셔넣어버렸던 연애편지 감수성을 되살리고 있다.

아니 되살리는 정도가 아니라 미미님의 표현대로 드잡이질 당해서 끌려갔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겠다.

노년의 학자가 자신의 첫사랑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편지, 평생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마지막 온힘을 다한 사랑의 노래가 이 책이다.

 

이제 막 소년에서 청년으로 첫 발을 내딛은 롤란트.

아버지의 세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에서 이제 막 다른 세계로 진입한 불안한 청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지식도, 면역도, 심지어 자신의 마음조차도 무엇도 모르는 롤란트에게 교수의 아름답고 다정한 부인은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소년이었어요. 이제 어른이 된 거예요."(144p)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여전히 소년이었다.

사랑이 무너진 순간에도, 마지막 연애편지를 쓰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나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그 시기의 사랑은 그저 맹목이고 혼란이고 알 수 없는 것, 그러나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휘둘림 아니었을까?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심장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이었지요. 내 자신이 스스로의 열정을 동원해 감각을 고양시킬 수는 있었지만, 내가 한 인간에게, 선생님에게 사로잡힌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나의 의무인 동시에 기쁨이었습니다.- P46

 

 한 눈에 반한 첫사랑. 그 운명을 순간을 이토록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소설은 주인공 롤란트의 흔들리는 감정, 혼란스러운 성장을 따라간다.

사실 이 책의 줄거리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조금만 지나면 롤란트에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교수의 변덕으로 보이는 행동이지만, 독자의 눈으로 보면 교수의 마음과 혼란이 무엇에 기인하는지 다 보인다.

롤란트를 혼란스럽게 하는 교수의 비밀스러운 잠적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심지어 내게는 교수 부인의 그 미묘한 감정까지도 손에 잡힐 듯 그려졌다.

교수와 교수부인 그리고 롤란트의 삼각관계 중 모두의 감정이 이해 되었고, 안타까웠다.

 

결국 이야기로만 본다면 이 소설은  뻔하디 뻔한 삼각관계일 뿐이다.

하지만 그 뻔한 이야기를 평생의 속울음을 담은 절절한 고백으로, 연애편지로 승화시키는 것은 순전히 작가인 츠바이크의 필력이다.

동성애자인 교수의 갈등과 절망, 이룰 수 없는 아니 말할 수 조차 없는 사랑앞에 선 인간의 비통함에 울컥하고,

불안하면서도 폭풍같은 저돌성,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아니 몰라서 돌진하기만 하는, 그러다가 벽에 가로막혀 절망하는 청춘의 혼란.

관조적인 자세로 그들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알고 느끼지만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어쩌면 빼앗는 것으로 교수와 롤란트에게 복수하고도 싶었던 교수 부인의 이중적인 감정들.

이 모든 감정들이 너무 생생해서 독자는 그저 끌려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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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04 07: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그저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세 인물 저마다의 감정 다 이해하고 싶어 몰입해서 읽게 되더라구요.

근데 군대애인하고 당연히(ㅋㅋ)헤어지시고 연애편지 잘 썼던 추억의 구남친으로 남았겠구나...했는데, 결국 끝까지 가셨군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바람돌이 2021-04-04 09:50   좋아요 5 | URL
맞아요. 끌려가는거... ㅎㅎ 만약 롤란트가 실제 내 옆의 누군가였다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녀석을 한심해 할수도 있을텐데 누군가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본다는건 또 다른 이해를 가져오네요. 그래허 소설으루읽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ㅎㅎ

남편이 군대를 좀 늦은 나이에 갔어요. 그 때는 이미 너무 오래 사겨서 그놈의 정때문에 참.... ㅠㅠ

bookholic 2021-04-04 0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문과감성이 없으셨다고 하는데, 지금 글들은 문과감성이 가득 하시고, 거기에 예능감각까지 더해져서 글이 찰지고 재미있습니다...^^

바람돌이 2021-04-04 09:59   좋아요 5 | URL
오늘의 저를 만든 것은 바로 알라딘의 서재지인들님입니다. 알리디너님들의 글을 보면허 자괴감에 시달리는 날이 얼마였던지.... 알라딤 처음 시작할 때 제 글은 지 인생의 흑역사입니다. 뭐 그렇다고 지금이 명문은 아니지만요. ㅎㅎ

청아 2021-04-04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다가 몇번이나 소름이..몇번이나 웃음터지고요ㅋㅋㅋㅋㅋ아 이 리뷰는 거의 <감정과 혼란>책 뒷편에 실어도 좋을 듯한 수준입니다!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평생의 반려로 고정출연 시키신것도 감동이예요! 👍👍😍

바람돌이 2021-04-04 21:00   좋아요 4 | URL
최고의 찬사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책 뒤에는 츠바이크의 유서가 있어서 도대체 제 리뷰는 안 어울릴거라는.... ㅎㅎ 평생 반려는 방금도 제가 해준 봉골레 파스타를 맛나게 먹고 뿌듯하게 소파와 또 혼연일체가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저 쌓인 빨래는 언제 갤건지.... ㅠ.ㅠ

scott 2021-04-04 10: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옹님의 감정의 혼란 번외편이네요 ㅎㅎ 미미님 말씀처럼 이책을 읽은 독자의 후기 편에 실려도 좋을 ㅎㅎ 바람돌이님은 순정파이셨어 ^ㅎ^

바람돌이 2021-04-04 21:01   좋아요 4 | URL
순정파의 숨은 뜻 중에 맹하다는 것도 있다죠. 네 제가 맹했습니다. 조금만 더 약았어야 했어요. ㅎㅎ

새파랑 2021-04-04 1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롤란트의 감정, 기쁨과 슬픔에 너무 몰입해서 읽다보니 반전을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좋았던듯. 책을 다 읽고나서 세인물 모두의 감정과 행동을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연애편지라는데 공감합니다^^

바람돌이 2021-04-04 21:02   좋아요 2 | URL
아 저는 옛날 옛적에 로맨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런가 그냥 전개과정은 다 보이더라구요. 결론이 다르고 필력이 다른 거 빼면 장르소설에서는 거의 클리세수준이거든요. ㅎㅎ

희선 2021-04-05 0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남편분이 됐지만, 예전에 바람돌이 님이 보낸 편지 받고 기뻐했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겠지만, 사회에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있기도 했군요 지금은 예전과 달라졌다지만, 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1-04-05 10:16   좋아요 2 | URL
군바리가 뭐든 안 기뻤겠습니까? ㅎㅎ 좀 다른 사랑 하나도 포용못하는 사회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그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말입니다. 월요일 좋은 출발 하세요. ^^ 희선님 댓글로 저는 이미 좋은 출발 하고 있습니다. ^^

syo 2021-04-05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내 눈앞에서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가끔 방귀도 뀌어주면서 핸드폰과 한몸이 되어있다.˝ 이런 증언은 왜 세상 모든 곳에서 들리는 걸까요!

심지어 일생을 문과감성 1%도 없이 살던 三새끼조차 그 혼연일체의 경지에는 틀림없이 도착하였습니다.
시작은 달라도 끝은 같은 곳.....
중년의 남성들이 가는 곳....

바람돌이 2021-04-05 11:52   좋아요 1 | URL
글쎄말예요. 왜일까요? 우리집은 저와 딸들이 다 남편과 잘 놀아주는데도 말입니다.
역시 몸이 무거워져서 자꾸 중력이 끌어당기는게 아닐까라고 요즘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한옥의 아름다움은 집이 아니라 공간에 있고, 손맛에 있다. 뒤란으로 가는 좁은 길의 단정함이라던가, 처마와 기둥의 선이 매끈하게 잘 빠지다가도 살짝 틀어진 부분이라던가,
반질반질 윤나는 마루에 비친 맑은 광이거나 툇마루에 햇살이내리 때 느껴지는 따스함 같은 것이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의 감각이라고 할까? 최순우 옛집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 점 때문이다.
- P14

최순우 옛집이 좋은 건 사람 사는 집다운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떠나고 문화재가 된 집들은 삶의 온기가 주는 애틋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곳은 내셔널트러스트 사무국과 회원,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많은 정성과 노력으로 살뜰하게 매만지며 정성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가을에는 빨갛게 익어가는홍시를 볼 수 있고 사철 따뜻한 감잎차를 마실 수 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품격 있는 집 한 채를 지키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움은 그토록 애써서 지켜야 하는 일이다.
- P21

1930년대는 한옥실험의 해로 명명할 만하다. 집이 마당을둘러싸는 중정식 구조를 바꿔 방과 마루, 부엌을 내부에 두고 마당을 앞뒤로 배치하는 중당식 구조도 생겨났고, 일식가옥과 한옥의 장점만 섞어놓은 집도, 속복도가 있는 겹집 형태의 한옥도생겨났다.
집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새롭게바뀐 삶, 새로운 생각을 담기 위해서는 집이 달라져야 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생활을 개량하자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 P30

집은 가까이 다가가면 삶이 보이고 멀리서는 역사가 보인다. 도시 속 깊숙이 각인된 풍경 속에서 말을 잃었다.
- P77

소설가로서 살아온 세월 바깥에는 시대에 통렬하게 저항하며 견뎌온 개인의 역사가 있다. 노년에 다다른 그는 텃밭을 가꾸고 생명이 깃든 것들에 애정을 주며 살았다. 토지문화관을 만들어 후학에게 창작실을 선물하며 소설가로서 할 일을 다 했다.
큰 산 같은 작가였고 넉넉한 품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러니 그너른 그늘에 잠시 머물다 오면 내 안의 냉기가 녹아내리겠지, 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원주를 찾게 되는 것이다.
- P106

막의 감수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되는대로 함부로 한다는 ‘막하다‘의 그 막이다. 기준이나 가치를 세우지 않고 행한 작품이나 작업이 미학적인 완성도를 갖거나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민가에서 일상적으로 쓰는용도로 만든 그릇을 막사발이라 하지 않은가? 막사발도, 막 그린그림도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에 담긴 특별한막의 감수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수성은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서야 가치가생긴다. 서툴고 불완전하고 미완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 또한 그런 예술가와 마찬가지의 경지에 있는 것은 아닐까?
- P125

건물은 여러 개의 문을 갖는다. 문은 두 공간을 연결하고이곳을 지나 저곳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때론 막다른 지점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집이 살아가는 사람의 세계를 담고 있다면 공간이 만들어낸 세계는 무한할 것이다. 하나의 문이 하나의 세계를 연다고 본다면, 여러 개의 방과 거실, 현관, 대문 등으로 이뤄진 우리의 집에도 수많은 세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 P219

최근 구룡포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우뭇가사리 때문이었다. 부산에서 흔히 먹는 우뭇가사리 (한천)가 든 냉콩국을 다른지역에서는 전혀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의아해서 찾아보다가 우뭇가사리가 일제강점기 일본에 산업용으로 수출하던 품목이었고 이들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해녀들이 원정 물질까지 왔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 P261

관광지로 변해 버린 구룡포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서글픔을 느끼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처음 구룡포를 발견했을그때는 거기에 무엇이 있었다. 두루마리처럼 말려 있는 시대의비밀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이 있었다.
분명 그때는 있었다. 복잡하고 슬프고 희망차고 풍부한 무엇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드라마 촬영지 앞에 줄을서서 사진 찍고 싶어 하는 관광객들과 요란한 장식들이 난무하는 거리만 있을 뿐, 굴곡진 골목이 보여주고자 했던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 P265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과거와 어떻게 화해하는지, 과거의 아픔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껏 유보적인 태도로 일관해왔다. 외면하고 망각한다.
해서 그 과거는 없었던 일이 되지 않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과거는 언제나 흐트러진 현장으로 도처에 있으며 사라졌다가도 다시등장할 것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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