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 검정고시 감독관 강제 동원 차출
내가 맡은 임무는 처음으로 해보는 복도 감독관.
시험장 감독관, 본부요원, 검수요원 뭐 다 해봤는데, 복도 감독관은 처음이다.
시험시간동안 복도에 대기하면서 수험생 안내, 돌발상황시 시험본부와의 연락 등등......
어쨌든 그를 위한 나의 준비물은 아래 사진들과 두꺼운 겨울 옷.
학교 건물의 복도는 항상 가장 추운곳이다.
교실들이 남향이니 복도는 항상 북향, 덕분에 햇빛도 잘 안들어오고 항상 바깥보다 더 추운 곳이 복도다.
다 넣어두었던 겨울 쉐타와 코트를 다시 꺼내 입고 아래 물건들을 들고 출발.

말이 감독관이지 사실 복도 감독관은 할일이 없다.
그냥 시험시간동안 복도에 책상 하나 놓고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것이 나의 임무다.
그 시간들을 위해 2권의 책을 준비했고 <오빠를 위한 최소한의 맞춤법>은 키득거리며 순식간에 다 읽었고,
<밤불의 딸들>은 초반에 집중이 힘들어서 - 왜냐하면 자꾸 졸렸기 때문에 - 얼마 못읽었다.
왜 추우면 더 졸리는지 모르겠다. ㅠ.ㅠ
아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저 책이 아니다.
바로 저 메가폰!
아니 복도 감독관에게 저런 메가폰이 왜 필요하지?
담당자에게 들은 이야기인즉슨
학교가 시험 중간에 정전이 돼면 방송이 불가능해지므로, 그 땐 복도 감독관이 저 메가폰을 들고 복도 중간에서 큰 소리로 방송원고를 읽어야 한다는 거다.
".... 고사준비를 알리는 시간입니다. 응시자는 책상 위에 붙여 놓은 스티커에 기재되어 있는 ......"어쩌고 저쩌꼬 저 방송원고에 있는 내용을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다 읽어야 한다고..... 길기도 무지하게 길다. ㅠ.ㅠ
저 메가폰을 들고???
아 순간 내 머리 속을 강타한건 형태는 개화기 동동구리무 장수요. 목소리는 어릴 적 골목에서 심심하면 울려퍼졌던 "계란이 왔어요. 굵고 싱싱항 계란이 왔어요"(아 이말은 진짜 딱 특유의 억양이 있는데 여기선 재현이 불가, 물론 나는 아침에 메가폰의 이유를 묻는 동료 샘들에게 저 계란방송을 재현해주면서 한바탕 웃음을 주긴 했다. ㅎㅎ)
근데 왜 하필 보기좋고 모양좋고 소리도 좋은 빵빵한 마이크가 아니고 메가폰이냐고?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1회성 학교 행사에 누가 마이크와 엠프를 사겠냐 말이다.
나 같아도 안산다.
그러니 대신할 물품을 창고에서 찾다가 발견한게 구석에 처박혀있던 저 메가폰이겠지.... ㅠ.ㅠ
하여튼 저 메가폰의 존재이유를 안 그 순간부터 나는 우리 동네 까마귀 공동체의 무사평안을 기원하고 또 기원했다.
물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왜 내가 갑자기 까마귀 얘기를 하는지 궁금하시리라!
지금 이 대한민국에서 태풍도 아닌데 갑자기 정전이 되는 사태를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하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그런 일은 일어난다.
2년 전 이 학교에서 그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들이 전국 공통으로 치는 영어듣기시험을 열심히 치고 있던 그 순간에 갑자기 학교 전체가 정전이 됐다.
영어듣기 방송 out, 학교샘들 모두 멘붕(특히 영어샘들), 아이들 전부 어리둥절....
어쨌든 한전에 빨리 신고를 했고, 영어듣기 시험을 치던 학생들, 감독하던 교사들 전부 사태가 해결되고 다시 영어듣기 시험을 칠 때까지 교실에서 못나오고 대기 상태.
한전의 빠른 대처 덕분에 전력은 복구되었고, 1시간 넘게 걸렸던 영어듣기 시험은 어쨌든 무사히 치뤄졌다.
궁금한 건 정전의 이유.
그 때 당시 교무실에 있던 난 제일 먼저 한전에 전화를 했었는데, 정전 되기 직전에 분명히 학교 건너 길쪽에 뭔가가 쾅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었다. 물론 그것도 한전에 신고할 때 얘기했고..
이후 한전에서 한 얘기는 까마귀 한 마리가 전깃줄에 부딪혀서 죽으면서 합선이 일어나 어쩌고 저쩌고였는데....
아니 그 새들은 전깃줄에 잘만 앉아 있더니 그게 부딪히기도 한다는걸 처음 알았다.
한전은 안타깝게도 정전의 원인을 밝혀내고 전기를 복구해주었을 뿐 그 까마귀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듯했다.
까마귀의 죽음은 자살이었을까? 아니면 실족사였을까? 혹시 다른 까마귀에 의한 살인 아니 살조였을까?
그 죽음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가 저 메가폰을 들지 않기 위해,
오늘 하루 제발 우리 동네 까마귀사회가 무사 평안하기를 간절히 기원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까마귀 사회는 무사평안했나보다.
나는 저 무거운 메가폰을 들지 않고, 아침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멍청히 복도에서 추위와 졸음을 견딘 대가 12만원을 받았다.
그 돈을 까마귀들을 위해 썼으면 나의 하루가 참으로 보람찼을텐데,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나는 그 돈을 몽땅 나의 위장에 술과 안주를 퍼넣는데 쓰고, 일요일 하루종일 골골거리고 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