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린이가 저한테 늘 읽어달라고 졸라대는 책 중에 <파랑새>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널리 알려진대로 찌르찌르와 미찌루가 나오는 그 이야기지요.

근데 문제는 이 책이 동생이 어디서 얻은걸 예린이가 다시 한권 얻어온 것인데, 책의 그림이나 내용(내용의 연결이 안될 정도로 축약이 심한데 그것도 엉망으로 축약해서)등이 조잡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린이는 이 책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러고는 허구헌날 뒤표지에 소개돼 있는 피노키오, 엄지공주, 백설공주 이런 책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부르는겁니다.

예린이가 이제 6살이 됐고 저는 이런 명작동화(?)류의 그림책은 아직 되도록이면 안 읽히고 싶은데 말예요. 축약본이 가지는 문제도 있고 또 가장 결정적인건 이런 류의 그림책이 전하는 메시지가 맘에 안드는게 너무 많다는게 제 생각이죠..

그래도 어차피 안 읽히고 살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졸라대니 어차피 읽을거 지금 이렇게 읽고 싶어할때 차라리 괜찮은 출판사걸로 골라서 읽혀볼까 싶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요즘 이 방면의 책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도 본적이 없거든요.

아이들 키워보신 분들은 어떠세요. 읽히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그냥 버티기로 넘어가는게 좋을까요? ^^

혹시 읽히는것도 나쁘지 않다면 괜찮은 출판사는 어디인지도 살짜쿵 알려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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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01-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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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01-19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예 안 읽힐수는 없을거예요..
저는 그냥 삼성에서 나오는걸로 다 읽혀버렸는데...(저렴하기도 하고..)

세실 2006-01-1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99900

글쎄요. 독서지도 하는 선생님이나 대학 교수님은 이런 책을 읽히지 말라고 하는데....저는 아이가 원하면 읽히는 것도 괜찮을듯 합니다. 어차피 지금 읽지 않는다고 해도 때가 되면 찾게 되고, 워낙 유명한 책이라 노출이 되있고, 극단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백설공주는 얼굴이  예쁘지만 마음씨도 착하잖아요....권선징악의 의미로 생각하면 될듯. 제가 본 출판사중에 웅진에서 유아용으로 나온것이 있기는 한데 대부분이 방문판매라 좀 그렇긴 합니다. 이 기회에 도서관을 이용하심이~~~


바람돌이 2006-01-1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숫자까지... 저도 안 읽힐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시기가 조금 빠르지 않을까 싶어서요.
세실님/우리동네 도서관은요. 어린이실이 어찌나 찾는 사람이 많은지 가서 원하는 책 고르기가 하늘의 별따기예요. 방문판매용은 전집으로 사야하는거잖아요. 음 전집까지는 좀 그렇고... 단행본으로 그냥 몇권 골라줄까도 싶은데요. 어째야 될지...

2006-01-19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6-01-19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세계의 동화는 저도 샀는데(그 열풍에 휩쓸려서리...) 이건 저 볼려고 산거지요. ^^ 읽기는 읽겠는데 아이가 이제 6살이니 좀 더 두고봐야 할지 어떨지...
속삭이신님/책들의 그림체가 심상치 않습니다. 보통의 조잡한 그림책들과는 좀 다른듯하군요. ^^ 보관함에 일단 넣어둘게요. ^^

책읽는나무 2006-01-19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민이가 말입니다. 집에서 그냥 혼자 키울땐 잘 모르겠던데 미술학원을 다니다보니 그학원서 소위 그 명작동화를 읽혀주는 것같더라구요! 민이는 그런 내용은 전혀 모르다가 엄청 구미가 땡겼나보더라구요! 얼마전에 학원을 그만 보내려고 끊으려고 학원에 직접 방문하여 선생님이 지도하시는 걸 잠깐 보았더랬는데 그날은 전래동화를 읽어주시고 계시더군요!
그것도 가만보니 그림도 좀 조잡하고 내용이 완전 축약본이더라구요. 민이가 학원을 다니면서 명작동화를 따로 사서 읽혀야 하는건지? 내심 고민이 좀 많아서 그림책에 관한 지침서 같은 책들을 따로 구해다 읽어보았더랬습니다. 읽히려면 어떤책을 읽어줘야하나? 궁금하여 찾아보았더니 딱히 답이 없더군요!
모두들 하나같이 축약본은 읽히지 말라는 말이었는데 그렇다면 원본책을 읽어줘라는 뜻인데 원본책은 내용이 너무 길어 다섯, 여섯 살짜리 아이들이 과연 집중하여 들어줄지 의문이 가더라구요! 아이들은 더군다나 그림에 더 흥미를 느끼는 시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덮어놓고 안읽혀준다는 것도 좀 무리가 있을 것같아요!
이것 또한 아이들 게임이나 텔레비젼 만화영화같은 유행의 한 흐름인 것같아 보여요. 다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또는 흥부 놀부, 도깨비 방망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데 우리아이만 그것을 몰라서 대화에 끼지 못한다는 것도 마음이 아플 것같아요!
그래서 전집으로 동화가 훌륭하게 출판되어 나왔다는 소문은 못들어봐서 전집은 그냥 접어두고서 단행본으로 나온 책들을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사서 읽혀줄 생각이에요! 단행본 중에서도 꽤 괜찮은 책들이 많더라구요!^^
그리고 단행본 또한 시리즈물로 나온 것들이 많아 그것을 다 구입하는 것도 만만치 않겠던걸요..^^;;
그렇게 내용을 대충 익혀준 다음 완역본 책을 서서히 보여주는 것이 어떨까? 싶어요!

2006-01-19 01: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돌이 2006-01-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님 역시 고민이 많죠? 단행본 보시고 괜찮은 것 있으면 리뷰 올려주세요. 저도 제깍 가서 사주게.... ^^

바람돌이 2006-01-19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은 일단 읽히기는 읽혀야 된다는게 중론인것 같은데... 그럼 남은 문제는 어떤 걸 읽혀야 하는가겠네요. ^^
일단 단행본으로 조금씩 사서 읽힐까요? 이쪽에 워낙에 허접한 책이 많아서...
 
 전출처 : 돌바람 > 천공의 성에서부터 풀피리까지-전통에 관하여



요즘 일본 그림들을 보면서 몇 가지 영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녀 이상하게 외롭다. 그것은 영상, 그 자체가 주는 것이기도 하고, 끊어지지는 않았으나 다 풀려버려 이전의 모습을 도통 모르겠는 뜨게옷 같은 기억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천공의 성 라퓨타>를 처음 본 것은 국내 극장 개봉도 하지 않은 1991년이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첫 작품이었으니까 아마 일본 개봉은 86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1년! 그러고 보니 내겐 참 많은 일이 벌어졌었구나. 내가 컴퓨터를 구입한 게 대학에 입학한 1993년이니까 아마 이때는 천리안이나 하이텔 등의 통신 동호회가 뜨기도 전일 것이다. 학교 밖에서 만난 한 친구의 집에는 도스 프로그램으로 구동되는 컴퓨터가 한 대 있었다(나는 타자기를 쓰고 있었다). 녀석은 그 컴퓨터에 팩스를 연결하여 나라 밖 소식을 들고오곤 했는데(지금의 인터넷과 같은. 내가 기억하는 녀석은 컴퓨터 천재였다), 어느날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기가 막힌 애니메이션을 소개해주었다.

"으악! 진짜 멋지다. 저 돌멩이 하나하나 떨어지는 것 좀 봐!"

우리는 어른들 몰래 포르노를 훔쳐 보는 사춘기 애들처럼 입을 헤벌리고 넋을 놓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시는 일본 문화, 영상물을 접하는 것이 일종의 금기였다. 이러한 금기는 금서처럼 더 보고 싶다는 열망을 부추기기도 했다. 일본어 자막이 도착하고, 아는 사람을 총동원하여 얼렁뚱땅번역을 마치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고3이었는데 대학에는 뭐하러 가나 결정하고 나니 의외로 할 게 참 많았다) 연세대에 작은 공간을 빌려 이 애니메이션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하나만 올리자니 명목이 안 서는 관계로 아예 판을 좀 벌리자고 누군가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그해 여름은 '고등학생 문화학교'라는 타이틀로 일주일간 영화도 보고 글도 쓰고, 무엇보다 제도교육에서 튕겨져 나오고 싶어서 안달인 친구들을 한 자리에 모아 진지한(진짜 진지했다) 토론도 해볼 수 있었다.



지금이야 이런 모임 한다고 이상하게 볼 사람도 없겠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쫓고 쫓기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연세대에만 들어가만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지나가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팔짱도 껴보고 애써 안 무서운 척 당당하게 걸어야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참 우습다. 그때 우리가 상연작으로 올린 영화는 <닫힌 교문을 열며> <파업전야> 등이 아니라 <천공의 성 라퓨타>,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아아, 그 신음소리에 관해서도 우리는 진지하게 토론했다. 하하하) 등이었는데... 그때 만났던 녀석들이 갑자기 와르르 쏟아지는 별빛처럼 그리운 날이다.



(금각사, 저런 식으로 조그만 성 하나가 섬인 곳이 진짜 일본에 있다. 섬 사진 대신)


그리고 벌써 십 년 하고도 또 몇 년이 더 지난 요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를 나는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신화적 상상력으로 독재와 기계문명을 비판하던 '천공의 성'은 그만의 상상력이 아니라 일본에 실제 있는 섬( 하나의 성으로 이루어진 섬, 섬 이름을 모르겠다. 나중에 떠오르면 추가해야지)인 풍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카오나시(얼굴 없는 귀신)나 강의 신 등도 그들의 토착종교(모든 사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에서 나왔다는 것을. 또한 쌍둥이 자매인 유바바와 제니바는 일본의 천지창조신화의 한 가닥인 국생신화에 나오는 이자나기, 이자나미를 떠올리게 한다. 유바바의 아들 보우는 '호오리'가 금기(보면 안 된다는)를 깨는 바람에 수치심 속에서 태어난 '우카야후키아에즈'로도 볼 수 있다. 우카야후키아에즈가 누군가? 일본 최초의 신화적 천황으로 불리는 진무 천황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러면 보우는 인간과 신화의 세계가 단절된 이후 금기를 지키지 않은 수치심 속에서 태어난 천황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천황은 머리와 몸이 1:1 비율인 먹보이자 울보이다. 그리고 그는 제니바의 주술에 걸려 뚱뚱이 새앙쥐가 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치히로라는 이름을 빼앗긴 센이 '누군가를 위해' 길을 떠나면서 보우도, ('쓸쓸해'를 외치다 '다 먹어버릴 거야'를 외치게 된) 카오나시도 스스로 마법의 열쇠를 찾아 돌아온다는 점이다. (일본 신화 부분은 아직은 그냥 가정만... 올해 최대, 최악의 책읽기가 될 것 같은데 일본 <고사기>를 읽는 것이 내 목표다. <고사기>를 통해 재미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면 좋겠다.)



그 외에도 내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고 있는 '하쿠가 종이학에게 쫓기는 장면'은 17세기 화가이자 서예가였던 타와라야 소타츠의 <학도하회화가권>을 통해서도 전달된다. 뿐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지브리 스튜디오)의 그림들은 역시 에도시대 만화로도 유통되었던 우키요에의 판화가 주는 깨끗한 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안도 히로시게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평면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우울한 풍경은 그대로 미야자키에게 투영되어 영상으로 재연되었음을 보게 된다.



 ('하쿠가 종이학에게 쫓기는 장면' 스틸이 없어서 이것으로 대신)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다카히타 이사오 감독의 <폼포코 너구리대작전>을 보면 단지 미야자키뿐 아니라 일본 내 많은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이 무엇에 빚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인간들에 의해 살 곳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너구리들이 회의를 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헤이안 시대 궁중화가들이 다양하게 제작한 <조수인물희화>와 닮았다.



 

<폼포코 너구리대작전>에 나오는 너구리들은 단지 인간의 대치물이 아니다. 그들은 일종의 둔갑술로 그들이 인간보다 한 수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자연 파괴에 대처하는 그들의 치밀한 작전은 그들이 갖고 있는 마력(영적인 힘, 더 나아가서 인간의 양심, 자연으로부터 받은 근원적인 힘)으로 빛을 발한다. 이것은 저 헤이안시대의 <조수인물희화>를 보며 내가 느낀 우화적인 세계에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최근에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요괴인 '이누야샤'를 통해 그들의 전통적인 세계관이 현대 작가들에 의해 어떤식으로 재탄생하는가를 볼 수 있다. 기계문명이 도를 지나친 21세기, 그들의 세계는 포켓 '몬스터'를 탄생시키게도 한다.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장난감과 놀이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는 정령이나 지켜야 할 가치 등이 '몬스터'(귀신, 요괴, 정령)를 불러올 수밖에 없는 사회라고 규정해본다. 그것도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정도로 작아지고 휴대할 수 있는 편리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단서도 넣어본다.




그들의 전통은 현대에도 국제 경쟁력을 갖을 정도로 세련된 무언가가 있다(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을 얼마나 연구하고 끊임없이 파헤치고 있는가의 증명이기도 하다). 또 그것들이 향유되고 이어져오면서 더욱 폭넓게 해석되고 재탄생되었다는 역사도 알 수 있다. 얼마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척 맨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을 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강하다가도 구슬픈 목소리를 닮은 트럼펫이 아니라 쇳소리가 섞인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태평소 소리였다. '아, '산체스의 아이들'을 이렇게도 들을 수 있구나'라고 느꼈다. 전통은 '현대에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는 탁석산식 정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느꼈다. 전통은 내 몸에 이어진 실과 같아서 나를 감았다 풀었다 하는 기억과도 닮았다.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끌고 와야만 되살아날 수 있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그러했을 때 좀더 폭넓은 지평을 갖게 된다는 면에도 그렇다. 또한 한번 끊어버리면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다시 이을 수 없다는 점에서도 탁석산의 발언은 위험하다. 다만 어떠한 전통을 이어받을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겠지. 나는 풀피리 소리의 전통을 이어받고 싶다. 풀피리가 담고 있었던 자연과 호흡하는 전통이 담아내는 세계는 넓고 아름다울 것이라 소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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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 동물의 교미와 인간의 섹스

종족보존이 아닌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해 섹스를 하는 동물이 인간말고 있을까? 만약 없다면 이게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하나의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보노보의 경우 - 보노보 두 무리가 하나의 무화과 나무에 도착했다면, 그 나무를 독점하기 위해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의 암컷이 나와서 다른쪽의 수컷과 그 자리에서 섹스를 한단다.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의 섹스? 또 발정기 때만이 아니라 매우 자유롭게 여러 수컷과 교대로 섹스를 즐기기도 하고, 자위행위까지... 결국 이러면 성적쾌락을 위한 섹스는 인간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던 듯... 거기다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졌던 마주보고 하는 성체위까지 보노보에겐 나타난다고 하니...(나는 이사실이 그렇게 충격적인지 몰랐는데 인문학자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듯... 특히 기독교계에서..)

생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살아남기'와 '번식'이라는 두단어로만 설명된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는 이 필연 뿐만 아니라 거기서 이탈하는 행위 - 이를 자유라고 명명할 수도 있겠다.-들도 중요하다. 결국 번식과 필요없는 보노보나 인간의 성행위는 필연에서 벗어난 자유라고 명명할 수도... 그런 관점에서 인간의 피임이나 동성애도 바라볼 수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자유가 동물계에서도 -보노보나 민벌레의 으뜸수컷과 교미하지 않고 2위 3위의 수컷들과 교미하는 암컷들- 존재한다면 결국 사회생물학의 입장에서특별히 인간적이랄 행동의 없게 된다.

인간에게서 보이는 성적 은밀성의 문제 -인문학 쪽에서 본다면 인간이 가지는 성적 은밀성은 신성성의 다른 이름일 수도.. 다른 영장류 동물의 경우 수태 가능성을 광고하는데 비해 인간은 그것을 숨기는 쪽으로 진화했다. 이런 인간 여성의 배란 은폐는 남성의 일부다처제적 성향을 상당히 줄여주지 않았을까? 배란시기를 모르는 상황에서 남성이 찾아낸 가장 좋은 전략은 한 여성이라도 잡아놓고 매일 밤 그 여자와 섹스를 하는 것. 즉 가족과 결혼의 탄생을 이렇게 생물학적으로도 바라볼 수 있구나...(감탄..)

9장 - 판도라속의 암컷, 이데올로기속의 수컷

생물학의 오류들이 역사속에서 학문적 오류로 끝나지 않고 정치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거의 범죄에 가까운 만행의 도구가 되었던 경우 - 백인제국주의, 남성우월주의

최근의 사회생물학은 자연의 질서라는게 결국은 암컷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컷은 암컷이 번식하는데 잉여로 만들어졌다는걸 말하고 있단다. 근데 신화에서도 모든 가부장제 신화에는 남자의 잉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단다. 고대신화가 여성을 잉여존재로 강등시킨 것은 사실인즉 남성들 자신이 잉여존재일지 모른다는 공포를 역으로 투사한 거라고 볼수도 있다.(남성들의 거세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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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요? 바로 요거예요.

  들뢰즈와 가따리의 <앙띠 오이디푸스>

제가 읽은 건 요 2000년도판이 아니고 1994년도 판이었는데 새로 개정판이 나왔네요.

지금으로부터 한 10년이 조금 더 지난 날의 이야기예요. 그 때 이진경씨의 책에선가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간단한 소개글을 읽고(그 글도 참 쉽지는 않았습니다.)  무지하게 호기심이 동해 요 책을 샀다지요. 그 때 이 책은 부산에서 구하기도 힘들어 학교앞 서점에 주문을 하고서도 거의 한 2주쯤 기다려서야 받아볼 수 있었어요. 게다가 당시 저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백수였으니 당시 2만원이 넘었던 것 같은 이 책값은 저에게 엄청난 금액이었지요.

그런 큰 투자를 하였으니 얼마나 기대가 됐겠습니까? 그런데.....

전 결국 이 책을 못읽었습니다. 글자도 작고 페이지도 엄청났던 이 책의 겨우 50페이지 정도를 읽고는 결국 포기했다지요. '흰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라...'의 경지가 뭔지 그 때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도대체 주어와 서술어가 어디인지도 구분이 안가고요. 한 문장을 한 20번쯤 읽어서 겨우 뭔말인지 이해가 좀 간다 싶으면 그 다음 문장하고 전혀 연결이 안되고요. 한 페이지를 다 읽어도 무슨 말인지 머리가 하얘지는 그 느낌.... 저는 그 때 저의 머리에 절망했었습니다.(지금 생각하면 번역의 문제도 한 반쯤은 됐던 것 같은데, 그 때는 그런 생각은 전혀 안나고요. 그냥 절망했습니다.) 그래도 제 딴에는 엄청난 투자를 한 책이라 거의 한달간 50여페이지를 가지고 낑낑대다가......

어떡했냐구요.

그냥 방바닥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래 나 바보야" 하면서....

그후로 뭐 이런 책은 책장에 꽂아두면 폼잡기 좋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두고 두고 나를 절망시킨 이 책은 저의 눈의 가시였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지금은 누군지 기억도 안나지만 누군가가 이 책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 "아니 그냥 너 가져"하고 대뜸 던져 주고는 이 책이 주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제가 한 단순해서 눈에 안보이면 기냥 잊어먹거든요. ^^ )

지금에 와서 제가 다시 이 책을 볼까요? 아마 요 밑에다 한 100분쯤이 새로 번역돼 나온 책은 쉽지까지는 않아도 읽을만 하다고 댓글을 달아주면 아마 다시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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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6-01-18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만 해도 어려워보입니다;;;;

urblue 2006-01-1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때 무슨 세미나에서 해석학 책을 보게 되었는데, 정말 검은 건 글씨고 흰 건 종이더라구요. -_-;

바람돌이 2006-01-18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다행히 절판이더라구요.. 혹시 사람들이 이 페이퍼보고 안사보면 어쩌나 걱정되었는데... ^^
다른 분들은 이런 책 없나요. 무지하게 어려웠던 책... ^^
 

6장 - 인간, 거짓말과 기만의 천재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일단 시작은 '구라'에서 시작한다. 과학은 반드시 입증의 책임앞에 서야 하고 인문학적 이야기는 그런 엄격한 입증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차이는 있지만.....

인간사회 모든곳에서는 신화가 존재하고 어차피 신화라는 것 자체가 '구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 구라가 잘못쓰일때- 즉 지배세력의 사회체제를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생존과 지배의 전략으로 사용될 때 그것이 미치는 파급효과는 치명적이다. 유대인들의 신화가 시온주의의 배경이 되고 인도의 거인신 신화가 인도의 계급제도의 기초가 되는 것과 같이.... 그런데 곤충세계에서도 개미사회에 그런 개미행세를 하는 곤충들이 엄청 많은데도 개미사회가 무너지지 않는걸 보면서 인간사회나 개미사회나 세상의 충격을 막아내는 점에서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뇌 발달 과정에서 특이한게 '자기 기만'인데 이건 대표적인 경우가 '난 할 수 있어' '하면 된다'같은 것. 누가봐도 못할 일인데 스스로에게 하면 된다고 하고, 때때로 가끔은 해내는 경우.  세계를 정확히 파악하는 분명한 의식체계를 발전 시키는 것이 아니라, 틀린 그림을 그려놓고는 그 그림을 정확한 그림이라고 생각하도록 자기를 속이는 능력. -자연계 역시 동물들의 신호체계에 있어 이러한 기만술이 가득하다는 것은 결국 인간과 자연계 모두의 기만술은 자연선택이 갈고 닦은 적응, 번식, 생존술의 일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신화와 과학의 관련성 - 자기들이 처해있는환경과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함으로써 더 강력한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탄생할 것이고, 결국 이것은 과학의 필요성으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7장 - 예술과 과학, 진화인가 창조인가

예술의 탄생에 대한 담론 - 구석기인들의 동굴벽화의 예

고래의 습성을 치밀하게 알지않고서는 그릴 수 없는 그림들이 발견되나 중요한 것은 누가 왜 그렸냐인데 그 점에 대해서는 인문학이나 생물학이나 속시원한 대답이 없다.(상징 문법의 상실)

생물학에서는 예술에 대해 자연선택이 아닌 '성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관점을 제시. -공작 수컷의 화려한 꼬리깃털은 자연선택의 관점에서 보면 불리하지만 성선택의 관점에서 유리함으로 인해 진화해 왔다는 것.

인간에게도 성선택설이 적용될 수 있을까? - 그림 잘그리는 사람이 구석기 시대에 성선택에서 유리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외 신, 죽음, 조상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도 성선택설로는 설명이 힘들지 않을까?

결국 이런 근본적인 질문은 정답이 없음으로 해서 오히려 이런저런 생각을 촉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예술의 기원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제기될 수 있는데, 인문학에서는 놀이설, 제의설, 실용설 등등...진화생물학에서는 성선택설 뿐만 아니라 ''줄달음 선택".-도저히 실용적이지 못할 것 같은 예술 행위도 처음에는 별로 대단찮은 것에서 시작했다가 갑자기 고비가 풀리면서 그 방면으로 확 진화하는 것 같은 것. 하지만 인문학쪽에서의 반발은 이러한 줄달음 선택도 자연계가 아닌 인간들 사이에서는 생물학적 원인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환경이 원인이 되어 일어날 수도 있다. 즉 성선택에 개입하거나 그걸 제한하는 문화제도들이 인간사회에서는 너무 많다는 것.

과학 역시 최재천씨의 경우 두뇌가 진화의 산물인 이상 과학도 진화의 사물로 볼 수 있다. 우리 두뇌가 과학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되고 그렇다면 그런 사고를 잘하는 인간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에 비해 진화의 역사를 통해 더 성공적이엇을 거라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사회로 확장하면 좀 문제가 있을 듯...) 어떻게 보면 또 이런 논리는 하느님이 과학을 하게끔 인간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과학이 필연이라는 말과 별로 다를바가 없는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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