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둔의 기억 1 - 제1부 저항군, 제1권 수색
라우라 가예고 가르시아 지음, 고인경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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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둔의 기억은, 아침부터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던 잭이라는 소년이 부모님의 죽음이 일어난 장소에서 낯모를 사람에게 이끌려 ‘림바드’-시간과 공간이 겹치는 경계의 집-란 곳으로 가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림바드에서 만난 저항군-단 두 명뿐인-과 빅토리아라는 여자아이는 잭에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님이 죽게 된 원인이고, 잭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림바드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이다.

저항군은 잭을 온전히 믿지는 못하지만, 브룬 왕의 아들이자 바니사르 왕국의 왕세자이기도 한 저항군의 리더 알산은 잭을 위해 검술을 가르쳐준다. 잭보다 먼저 림바드에 온 빅토리아는 샤일로부터 마법 수련을 받고 있으며 약간의 마법을 다룰 줄 안다. 저항군은 이둔의 마법사들을 보호하는 일을 맡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임무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과 유니콘을 찾는 일이다.

용과, 유니콘.

이 두 생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나 전설 속의 동물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그래서 판타지 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생물이다. 이둔에서도 이 두 생물은 이둔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을 하는데, 둘 중 하나만 있어서도 안 된다. 셰크-날개 달린 뱀-들의 공격으로 용과 유니콘이 거의 다 죽고 겨우 살아남은 새끼용과 어린 유니콘을 발견한 것이 바로 알산과 샤일이었다. 그런가하면, 불을 일으키는 염화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뱀을 싫어하는 잭과 치유능력을 가진 빅토리아는 용과 유니콘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알산이 잭을, 샤일이 빅토리아를 발견하고 돌봐주는 모습은, 알산과 샤일이 용과 유니콘을 발견했을 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아마도 이 둘-잭과 빅토리아-이 알산과 샤일이 찾는 용과 유니콘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다시 이둔을 아슈란과 셰크들로부터 되찾을 힘이 될 용과 유니콘.

그러나, 이 책에는 또 한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얼음같이 차고 냉정한 눈을 가진 키르타슈가 바로 그 인물이다. 아슈란이 맡긴 일을 하고 있는 인물로 지구에 숨어 살고 있는 이둔의 마법사들을 찾아내 죽이는 임무와 함께 용과 유니콘을 찾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키르타슈에게는 이해하지 못할 점들이 몇 가지 보이는데, 그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캐릭터이다.

여기서 잠깐. 알산과 샤일, 그리고 키르타슈까지 그들은 용과 유니콘을 찾아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책에서는 용보다 유니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샤일이 어린 유니콘을 발견하여 찾아오는 장면의 묘사라든가, 자주 언급되는 루나리스-유니콘의 이름-가 그렇다. 용의 경우에는, 알산이 어딘가에서 새끼용을 데리고 왔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이 찾고 있는 대상으로서의 구체적인 용의 이름도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잭의 이미지가 용이고, 빅토리아의 이미지가 유니콘이라고 했을 때 두 사람을 대하는 저항군의 태도에서도 빅토리아에 대한 의존도가 더 큰 것을 알 수 있다. 잭이 불의 신 알둔(용들의 아버지)이 그려진 드미바트를 손에 쥐는 장면은, 빅토리아가 아이셸의 지팡이-유니콘의 마법이 깃든-를 손에 넣는 장면과 비교하여도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둔이 아슈란과 셰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명히 용과 유니콘이 둘 다 있어야하는데 말이다. 이 점은 책을 읽는 내내 의아했던 점이다.

자, 다시 키르타슈에게로 돌아가 보자. 키르타슈는 아슈란의 신임을 얻고 있고, 아슈란이 시킨 일을 하고 있지만, 그에게는 뭔가 다른 속셈이 있다. 그가 아슈란에게 새로운 마법사를 요구하는 장면을 보자. 거기서 그는 요정 중에 마법사가 있다면 보내달라고 말한다. 요정은, 샤일이 어린 유니콘을 발견하는 장면에서도 나온다. 어린 유니콘을 보살펴주고 있던 요정이 샤일에게 유니콘을 맡긴 것이다. 키르타슈가 요정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나는 유니콘과 함께 있던 샤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빅토리아에게 함께 가기를 권유하던 키르타슈, 엘리온으로부터 빅토리아를 지켜주던 키르타슈의 모습이 그와 연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책을 읽어가는 동안, 잭이 용이고, 빅토리아가 유니콘일 것이란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조금 맥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베일에 싸인 키르타슈란 인물의 정체가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잭과 빅토리아의 맥 빠지는 관계설정-물론 이 책을 읽는 독자인 내가 내린 관계의 설정이다-은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종류의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보다 더 호감이 가는 캐릭터가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키르타슈가 후반부(1부의)로 갈수록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로 변모한다.

‘이둔의 기억’에는, 중요한 장소로 이둔 외에 ‘림바드’가 등장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림바드는 시간과 공간이 겹치는 경계의 집이다. 1부에서 잭이 림바드를 떠나기 전까지 이 장소는 잭과 빅토리아를 지켜주는 방패로, 또, 키르타슈의 추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림바드를 상상하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작가의 설명과 잭의 설명을 이용해 머릿속에 온전히 새로운 상상의 공간을 그려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둔의 비현실적인 물건들과 함께 지구의 일반적인 물건이 교묘하게 섞여있는 인테리어까지 함께 고민하다보면 더욱 그러하다.

또, 이 책에는 인간 외에 여러 가지 생물들이 나온다. 이둔에서 생활하던 생명체들은 인간도 있지만 다른 종족들도 많이 있다. 판타지 소설을 읽는 재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새로운 공간과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닐까?

‘네 안엔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어’라는 구절처럼 잭과 빅토리아의 운명을 뒤바꿔놓을 그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재미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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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습관이 아이를 망친다
정경옥 지음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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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이 책의 제목이 모든 것을 다 말해준다. 이런 종류의 자녀교육서의 맹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내 아이의 역할모델은 그 누구도 아닌 부모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은, 바로 부모의 행동이 자녀교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을 처음 읽는 사람이다. 혹여, 교육학을 공부했거나, 이런 류의 자녀교육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읽지 않아도 된다. 읽고 나면 다 아는 얘기를 뭣하러 이렇게 써놨어?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다.

내가 자기계발에 관한 책이나 이런 류의 자녀교육서를 읽고 나면 항상 하게 되는 생각은 바로 다 알지만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일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내가 알면서도 못한 게 참 많구나를 깨달으면 그 책은 그걸로 역할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달이면 아이가 돌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직장에 다녔다. 아이를 낳은 후 아이를 봐줄 사람도 없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보다 내가 아이에게 더 못해주면 어쩌나 하는 이유도 있고해서 직장에 다시 나가지 않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기 전에 생각햇던 것과 실제로 키우면서 내가 하는 행동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그걸 깨닫게 해준 책이다. 결국은 이 책처럼 아이를 대하고자 했지만 나는 그렇게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분간은(그 유효기간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나는 다시 모범엄마로 살아갈 것이다. 어느날, 다시 내가 보통 우리 엄마들처럼 변했을 때 또다시 나를 채찍질하는 책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는 가정교육, 가정교육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가정교육이 차지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학교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늘 지적하곤 했는데 결국은 사회의 시선은 가정교육으로 돌아오고 만다. 어떤 이는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는 곳이지 인성을 형성시키는 곳이 아니라고도 하고, 선생들이 수업 외에 아이들 인성교육까지 신경쓰기에는 잡무가 많아서 안된다고까지 말한다. 예전과 지금은 교사의 역할 자체가 다르게 인식되는 듯하다. 그래서, 맞벌이 부부거나 한부모가정이 많은 요즘 사회가 교육을 일정부분 담당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학교나 사회의 역할은 축소되는듯하다. 그래서 결국은 부모들에게 그 책임이 돌아온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내 아이의 행동이 되듯이 밖에서 하는 내 아이의 행동은 결국 나(부모)의 행동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요지는 그것이다. 그러니 부모가 잘하면 내 아이도 잘할것이다라는... 다 아는 얘기지만, 이런 류의 책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도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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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하트
온다 리쿠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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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운명적인 사랑, 이런거 믿지 않는다. 만날 사람은 꼭 만나게 되어있다라는 말도 싫다. 이 말을 믿었다가는, 지금 나와 함께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뭐 어찌보면 그 사람이 운명적인 사랑일 수도 있지만...(--)

라이온하트, 단순히 노래 제목일 뿐일까? 책을 읽는 내내 라이온하트에 대한 궁금증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저 작가가 노래를 듣고 그 노래의 제목을 차용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와는 별로 연관이 없어보인다.

대신, 책을 읽으면서 계속 머리 속에 맴돈 것은 [시간여행자의 아내](미토스북스)였다. 물론 시간여행자의 아내에서는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인지한 상태며 한 사람의 일생이긴 하지만, 라이온하트에서의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는 시공을 뛰어넘어 몇세대를 걸치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어쨌든, 운명의 만남은 육신의 껍데기를 바꿔가며 계속 되었다. 결국 사라진 네이선교수와 기자 엘리자베스의 만남 역시 되풀이된 운명적 만남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또다른 생에서 또다시 만날것같다. 영국의 역사 속 사건과 인물을 배치시켰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어색할지 모르겠지만, 그 어색함이 그들의 시공초월의 사랑을 부각시킨듯하다.

이 책에는, 온다리쿠가 자주 사용하는 듯한 기법(?)들이 제법 있다. 결국은 이 책도 [온다리쿠의 소설]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 연극적 요소의 결합, 하나의 줄거리로 수없이 갈라지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뭐, 사랑이야기라고는 하지만, 순간의 만남을 거듭하는 것 외에는 사랑을 느끼기 어렵다. 적어도 나는. 그 만남의 순간 느끼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 또한 아주 짧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와 엘리자베스가 몇 세대를 거쳐가며 만나고 헤어지는 아픔따위는 없다. 순간의 만남을 통한 순간의 사랑의 불꽃은 잠시 타올랐다가 다시 냉정하게 사라진다.

한평생을 같이 살고도 그가 운명의 상대였다는 걸 죽음 앞에서야 눈치를 채는 것도 허망하다. 지금까지 함께 살면서 부대낀 사랑은 뭐였을까? 그래서 나는 운명적인 사랑 이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현재를 살면서 현재의 인간관계에 만족하며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 나의 미래가 몇번을 되풀이될 지 모르는 삶이라면 현재를 사는 의미가 너무나 미약할 것 같다.

어쨌든, 라이온하트에서 온다리쿠는 사랑의 엇갈림을 여러가지 이야기로 풀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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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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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온다리쿠의 책에 빠져 - 중독성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새 책이 보이니 사게 되고 또 읽게 되는, 혹은 실망을 하더라도 계속해서 보게 되는 - 읽다 보니 어느새 12권째이다. 이렇게 한 작가의 책을 계속해서 읽은 게 90년대 중반 한국작가들의 작품 이후 오랜만인 것 같다. 아마도, 그때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주제, 똑같은 이야기에 질리게 되면 온다리쿠를 나에게서 떠나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다행이랄까? 번역되는 소설의 양이 많아지면서 내용도 약간씩 달라지는 듯하다.

어쨌든 서두부터 이런 잡설을 늘어놓는 이유는, 일각에서 보여지는, [온다 리쿠를 추종하는 무리들, 온다 리쿠에 열광하는 무리들]이라며 낮춰보는 시각때문이다.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고 좋아하는 이야기가 다르듯이 미미여사에게 열광하는 이가 있듯이 온다리쿠에게 열광하는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온다리쿠의 이전 책들에서 미소녀 중심의 학원물 같은 이야기에 약간 질리기도 했지만 연이어 나온 책들에서 달라진 스토리를 만남으로써 그 지루함에서 탈피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온다리쿠의 소설들이 장르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자꾸 읽게 만드는 중독성을 가진 것은 틀림없다. 이전의 소설에서 보았던 온다 리쿠의 세계와는 많이 달라진 듯 하지만, 이것 역시 온다 리쿠라고 생각한다.

[유지니아]라는 소설을 다 읽은 지금,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야기의 핵심포인트라는 군청의 방이니 백일홍이니 하는 것들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히사코가 범인이라는건지 아니라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사람들의 인터뷰 내용을 읽는 동안, 똑같은 것을 보지만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어떤 대상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대상에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서술이 틀려지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고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이 느끼는 세계는 너무나 다르다. 보이는 사람은 오로지 시각적으로만 세계를 바라보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은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청각, 후각, 촉각, 미각-으로 세계를 본다. 그러면, 보이는 우리가 더 많이 볼까? 보이지 않는 그들이 더 많이 볼까?

생일날 일가족과 동네사람들이 독살된 사건이라는 개요를 가지고 온다리쿠는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결국은, 그 이야기들이 각각의 단편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범인이야, 히사코면 어떻고 히사코가 아니면 또 어떤가? 우리가 접하는 세상의 수많은 뉴스들은 확실하거나 증명할 수 있음을 근거로 해야하지만, 사실은 온갖 추측성 보도가 난무하는 것도 사실이 아니던가? 그런 뉴스를 보며 내 맘대로 해석해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유지니아]에서 보여준 사건들 역시, 그런 매스컴의 보도 중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며 책을 덮는다.

여름날, 그래도 몇시간 집중해서 읽히는 책으로 시간을 보냈다는 즐거움이 있다. 어떤 이는 풀리지 않는 이야기에 갑갑함을 느끼고, 어떤 이는 각각의 단편을 읽는 여운을 느끼기도 한다. 이 책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보이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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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집 아이들이 달라졌어요
김정희 지음 / 알마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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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도 유행이다.

요즘, 아이들이 있는 집에 [서재 만들기]가 유행인 것 같다. [독서]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책 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것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부모의 욕심이 만들어낸 유행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어온 이야기지만, 무엇이든 강제로 하게 해서는 효과를 거둘 수 없다. 학교에서는 [독서]라는 대유행에 뒤질세라 학생기록부에 독서기록장을 넣는다는 말까지 있으니 과히 전 국민적인 이슈가 될 만하다. 게다가 ‘거실을 서재로’라는 이벤트의 여파까지 더해져 너도나도 집안에 아이들을 위한 서재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그 옛날 보지도 않는 전집이 장식처럼 꽂혀 있던 것과 뭐가 다를까? 거실을 서재로 바꾸기만 하면 아이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를 버리고 책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 책을 손에 들고 제목과 목차를 보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럼 이 책에서는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는지(??) 한번 볼까? 미리 말하지만, 혹여 이 책을 읽을 다른 이들을 위해 조언을 한다면, [내 아이가 책을 읽는다](알마), [하루15분, 책 읽어주기의 힘](북라인)과 같은 책을 읽은 분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아이가 책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게 될까를 고민하는 분보다는, 태교부터 시작해서 유아교육을 실천하다 지치신 분이라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은 독서교육이나 서재 만들기가 주 내용이 아니라 엄마로서의 욕심이 내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지, 가족이 텔레비전에 의해 얼마나 해체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그 해결과정을 보여준다. 이때 책이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아이들을 기르고 키우는 과정에서 간접 체험을 하거나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는 데 있어서 [독서]도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다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책을 싫어하는 아이에게 독서를 강요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고통이다. 중요한 것은, 내 아이를 위한 서재 만들기가 아니라 나(부모) 스스로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환경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김정희 씨 역시, 아이가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병원치료를 받고, 텔레비전 앞에서 대화 없는 가정을 경험하고 난 후 결심을 통해 책이 있는 집을 만들게 되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책을 친구로 여길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방법은 성공적인 것이었다. 책을 통해 가족 간의 대화도 더 풍부해졌고, 남과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치영이에게도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이러리라고는 생각하지 말자. 책은, 아이들의 친구는 될 수 있지만, 독서라는 행동이 아이들의 짐이 되게 하지는 말아야 한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서재 만들기 같은 열풍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아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반대로 하기 싫은 것은 무엇인지 왜 그런지 하는 것을 서로 이야기하고 생각을 나눔으로써 가정의 해체를 막고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찾아주는 것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안타깝게도, 제목이나 앞뒤 표지를 통해 [독서와 서재 만들기]라는 유행에 휩쓸린 듯한 아쉬움이 남는 책이었다. 교육환경을 바꿈으로써 아이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모의 교육관에 대해 더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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