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드런 오브 맨 - 할인행사
알폰소 쿠아론 감독, 클라이브 오웬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머리칼에 눈이 내릴 수록 눈은 '희망'을 향한다.  역설적인 징후다. '희망'이 사라질 수록 '희망에 대한 욕망'은 커진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희망을 원한다.'고 선언할 수 있으리라. 불과 몇 년 사이에 '희망'이라는 말을 봄철 돋아난 연두빛 새순처럼 좀 더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비록 그 희망이 봄날의 아지랑이거나 또는 흘러넘치는 술잔의 잉여일지라도 말이다.  
  
  모든 '희망'은 애둘러온 '희망'이어야 한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희망'이며 일종의 '부정성의 희망'이어야 한다. 나는 스스로 절망 쪽에 늘 고개를 주억거리는 '비극 친화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키지도 못할 허언이나 낭만적 상상은 백일몽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 잘될거야' 또는 '언젠가 되겠지' 는 술자리에서나 결혼식장의 문턱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것도 싫다.'바닥을 봐야 튀어오를 곳이 있다'는 닮아빠진 전언에 문종이 한 장 더 바르는 짓 말이다. 나는 '절망'이나 '포기' 이후 뭐가 있는 지 모른다. 정확히는 '그 이후 뭐가 있는지 없는지 내 알바가 아니다'가 모토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성향은 여전하다. (쉬크하기는...) 

하지만 '부정성의 희망'이란 것. 골똘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희망의 실재'가 아닌가 싶다.  '희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희망하는 것 아닌가? 68혁명이 원했던 그 불가능성말이다.  

내게 '희망' 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 계기는 나의 아이들이다. 아이 이전/ 이후에는 모종의 단절이 있다. (애 낳아봐야 어른된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런 류의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  '희망'의 전도사가 될 생각은 없고 되고 싶지도 않지만 '희망'이라는 공간에 대한 재영토화의 계기는 있어야 했고, 또 그런 일이 있었다면 1m도 안디는  작은 그 아이들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희망'을 다시 창조해야 했다. 소급해서 보면  인류라는 족속들 중 일부는 판도라 상자에 남은 마지막 목록을 세대 유전하기 위해서 이어져 온게 아닌가 싶다.     



알폰소 쿠아론의 <칠드런 오브 맨>은 아이가 사라진, 아이들을 잃어버린, 즉'불임의 세계'가 배경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옥외 전광판은 인류의 마지막 아이가 1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속보를 전한다. 인류는 마지막 아이의-실제적 나이는 청소년이지만- 갑작스런 죽음을 애도한다.  

 그렇다면 이 미래 세계에서 무엇이 불임을 만들었을까? 사실 원인은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치 않다. 제대로 언급되지도 않는다.(환경 호르몬때문이었을까? ^^) 이미 인류는 '불임의 시대'를 조건으로 생존하고 있다는 실제감이 중요하다.  모든 역사가 현실의 조건인 것 처럼 말이다. 현재의 자본주의를 생각해보자. (좀 더 정확히는 우리가 의식적/무의식적 이데올로기로 믿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말이 정확하겠다.) 자본주의는 끝임없는 흐름을 목적으로 한다. 즉 무한 생산-소비가 전제조건이다. 그런고로 앞서 말한 '불임' 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하지만 자기증식하는 자본주의는 그외의 것을 타자로 만들며 '(타자의) 불임'을 생산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이외의 것은 없다'  '역사의 종언'이니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니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그로 우리가 '불임'속 인류임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라고 종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자본주의 외엔 없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개인을 그런 방식으로 호명하는 순간- 그것은 가장 현실적인 이데올로기가 되면서 '자본주의하의 불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분고분해지게끔 만든다. 

  물론 자본주의 이외의 것을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라타니 고진은 <자본론>을 다시 읽으며,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이 자본주의의 욕동-일종의 자기증식형 경향성-이라고 말한바 있다. 자본주의 외에 다른 것을 상정할 때 우리는 더 커다란 괴물을 만날 수도 있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생각이다. 그렇다면 '그래, 그러니까 우리 모두 자본주의에 충실하며 행복해지자' 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불러온 세계의 풍요와 그 안팎의 비참 속에서 어떤 이론적 구멍, 어떤 가능성의 돌파구를 내보자는 것이다. 가라타니식으로 말하자면 '가능성의 중심'으로서 '불임'을 돌파해보겠다는 것이다.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서 이제 인류에게 남은 것은 서로를 대적하며 머리통을 물어뜯고 머리카락으로 입을 닦는 것 뿐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우골리노 백작처럼 말이다. 우골리노는 탑에 갖힌 채 배고픔으로 인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을 버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탑 안에서 비극적으로 아사한다. 그의 복수는 오로지 지옥에서나 가능할 뿐..

"그 때 한 구멍에 두 놈이 함께 얼어 붙은 것이 보였다. 한 놈의 머리가 다른 한 놈의 머리에 모자터럼 얹혀있었는데 굶주린 놈이 허겁지겁 빵을 먹듯이 위에 있는 놈이 밑에 있는 놈의 머리와 목사이를 물어뜯고 있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 32편  

 그런데 주인공 테오는 이런 현실로 부터 무감각하다. 일종의 무감각. 정치적 용어로 하면 '냉소주의'다. 그 만인 그런 것이 아니다. 모두들 마지막 인류의 죽음에 애도는 하지만 인류의 사멸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다. 테러는 테러이고, 격리는 격리일 뿐이다. 이 영화에 대해 높이 평가한 지젝이- 그의 인터뷰가 유투브에 있지만 슬라브식 영어탓에 오래 듣고 있기 힘들다- 이 영화의 앞면과 뒷면, 즉 배경이 되는 정치적 갈등의 -인종주의, 정치적 과잉 억압등-과 그에 반해 이질적으로 평온해 보이는 내부 정상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는 점도 거기에 있다.  지젝이라면 우리가 '냉소'에 빠져 있는 공간은 어디인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또는 '민주주의' 라는 이름의 그곳 아닌가?

  지젝이 지적하고 있듯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디스토피아의 현실이 은폐된 평범하고 전통적인 의미의 영국 일상 풍경이다. 한쪽은 폭동에 격리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 또 한 쪽은 여전히 근위대가 낡은 위용을 자랑한다. 먼 미래같지만 공간의 축소만 제외한다면 '여기'아닌가? 여담이지만 이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반가왔다. 내 또래의 락 음악 애호가들은 흥얼댈만한 곡이다. 공포에 쩍 벌어진 입 자킷으로 유명했던 킹 크림슨의 'court of crimson king'이다. 80년대 락매니아들은 이 앨범과 동시에 이 앨범의 히트곡 'epitaph' 를 기억할 것이다.  

테오의 사촌이 근무하는 곳은 일종의 미술관이다. 영국정부가- 불임의 시대, 다른 나라들은 이미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다. 오직 영국만이 어찌되었든 통제되고 있다- 인류의 유산들을 보관할 목적으로 세계 각국의 작품들을 컬랙션하는 곳이다. 테오가 그곳에 들어가자 마자 처음 만나는 것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이다. 미술관답게 매우 모던하고 매끄러운 공간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식사를 하는 홀에 걸린 그림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리고 또 하나 창밖으로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의 돼지와-또 모른다 .락밴드CAKE의 돼지일지도- 핑크플로이드의 자킷에 나온 굴뚝 비스무리한 것도 보인다. (나는 가끔 영화 속에서 감독들이 배치해 놓는 이런 소품들이 좋다.잔재미를 주니까) 테오는 곧 인류가 없어지면 이런 작품들도 의미가 없을텐데 왜 수집하느냐고 묻는다. 사촌은 미래는 관심없으며 오로지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다분히 세속적이며 또는 냉소적인 현실주의다.  

  

 
 주인공 테오도 한때는 반정부테러리스트였다. 그가 어떻게 전향(?)했는지는 생략되어 있다. 그저 '운명'을 택했다는 정도의 설명뿐이다. 하지만 전 부인이자 이민자 권리를 위한 -극중에는 이들은 '푸지'라고 부르며,지워진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언어는 번역되지 않는다.그런데 인류의 '희망'은 또 그들로 부터 나온다. 매우 정치적인 설절아닌가? - 테러리스트 집단의 지부장이 그를 찾는다. 그리고 그에게 자의반 타의반 프로메테우스의 의무가 지워진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다분히 신학적이며 신화적이다.(아마 지젝이 이 영화를 좋아한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주인공 '테오'의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테오'란 이름은 '신과 관련된' 것이란 뜻이다. 영화 속에서 테오의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는 베들레헴을 찾은 요셉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의 등장을 알리는 세레자 요한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삼위일체중 성자는 앞으로 '딜런'- 밥 딜런이 연상된다-이라고 불리우게 될 여자아이다.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장소는 베들레헴의 마굿간 처럼 푸지들의 쓰레기같은 집단거주지의 폐허 속이다. 예수가 마굿간이라는 가장 낮은 장소에서 태어낫듯이. 

 

  

좀 뒤로 가서 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마지막 롱테이크의 탈주씬을 보자. 주인공 테오는 모세와도 같다.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어린 시절 교회사람들과 함께 가서 본 찰튼 헤스튼 주연의 <십계>를 떠올렸다. 바짝 쫓아온 이집트인의 추격 앞에서 정말 통렬하게 갈라지는 홍해.(당시 극장 곳곳에서 '할렐루야'가 터졌다.) 테오가 안고 있는 아이 앞에서 경이에 찬 침묵에 쌓여 갈라지는 무리들의 모습은 마치 그 장면의 패러디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유대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나룻배씬도 그렇게 일치한다.    
   

 쿠아론 감독은 영화 중간에 넌지시 해방의 가능성에 대한 작은 질문을 상정한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 그리스 비극이 던졌던 질문이다. 쿠아론감독은 히피처럼 사는 제스퍼(마이클 케인)의 말과 행동을 통해 '운명'에 대항하는 '신념'이라는 과제를 던진다.  그는 예감되는 죽음의 상황 앞에서 디스토피아에 사는 마지막 인류를 위해 친절하게 고안된 알약을 통해 편안한 마감을 택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식물인간이 된 자기 아내를 위해서만 그걸 사용할 뿐. 주체적인 죽음 즉 신념에 따른 죽음을 선택한다. '불임의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는 저항력은 '운명'이라고 일컬어지는 현실주의 이데올로그에 맞서는 주체의 윤리적 자기선택이기나 한 것 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고 한다. 감독은 그냥 그렇게 유동하는 불안 속에 끝낼 의도였다고 하나 결국 다른 제안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상투적이게도 -'미래호'가 등장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좋았느냐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미래호'는 분명히 치명적인 사족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긴 한다. 이 영화가 상업영화였으니-이건 여러 입김이 작용한다는 뜻이다- 어느 정도의 타협은 불가피했으리라.  

    
 늦은 밤까지 DVD로 이 영화를 본 나는 주말도 집안 팎으로 분주하다. 그래도 집 안에 있는 녀석들과 노는게 다른 모든 것들 보다 제일이다. 나는 일이 없으면 땡하고 집으로 가는 사람인데, 요즘은 빠질 수 없는 일 때문에 잠든 아이들 옆에 소리를 죽여 눕는 경우가 많다. 11월이 되면 좀 나아지겠지.  나는 여전히 ' 희망하는' 존재이다. 소중한 내 아이들과 귀중한 그 아이들의 친구들을 위해서,  이 땅에서 내게 할애된 시간만큼 세상이 한뼘만큼은 나아져야 하지 않겠나...하는게 평범한 아빠로서의 소망이자 다짐이다.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시대'이다. 최소한 희망을 물려줄 수 없는 시대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희망을 아이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앞으로도 열량 제로 것들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련다. 희망의 가능성에는 늘 무게가 있다. 

<바람구두님 홈페이지 대문 사진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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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 일이 있어 회사를 나갔다가 조금 일찍 퇴근해 버렸다.  집 근처 서점에 들렀다. 인터넷으로 본 책들도 넘겨보고, 또 우연히 눈에 걸린 책들도 넘겨봤다. 

두 권의 시집을 사들고 왔다.   하나는 짙은 감빛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과빛이다. 

최영미시인이 고른 <내가 사랑하는 시>이다. 외국시집은 강한 전류가 한순간 이라도 흐르지 않으면 잘 사보게 되질 않는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몇 몇 유명한 시인들 외에는 사실 외국시인들에 대한 정보도 많질 않다. 

내가 가장 최근에 산 외국 시집은 스웨덴 토머스 트란스트뢰메르 시선집인 <기억이 나를 본다>이다. 출판사 '들녘'에서 나오는 외국시선집 시리즈 중 하나인데 곧 다른 시집도 살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대가 되는 시리즈 중 하나인 셈이다. 

서점에서 <내가 사랑하는 시>를 뒤적이다가 두 눈에 콱 박힌 시가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이지도 않았다.  D.H로렌스의 <자기 연민>이란 시다.. 

 

결코 야생의 것들이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 보지 못했다.
작은 새는 가지에서 얼어죽어 떨어질 것이다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으며 

모과빛 시집은 아직 알라딘에 없다.  

내가 즐찾해 놓은 박남준 시인의 블로그에서 사진을 가져왔다. 이번 주 월요일에 나온 시집이니 아직 따뜻하다. 

 
    <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 그 여자의 반짝이는 옷가게>

“하동에서 구례사이 어진 강물 휘도는 길 / 비바람 눈보라치면 공치는 날이다 / 집도 없고 포장마차도 없는 간이휴게실이 있지 / 고물 트럭을 개조해 만든 / 국수와 라면, 맥주와 소주와 음료수와 달걀과 커피 등등 / 전망 좋고 목 괜찮아 오가는 사람들 주머니가 / 표 나지 않고 기분 좋게 가벼워지는 동안 / 눈덩이 같던 빚도 갚고 그럭저럭 풀칠도 하는데 / 빌어먹을 / 그 아저씨의 그 여자는 암에 덜컥 발목을 잡혔다 // 소원이 있었댄다 꿈 말이지 웃지 말아요 정말이라고요 /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밤무대에 서는 가수 /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깊이 모자를 눌러 쓴 그 여자는 / 아저씨를 졸라 간이휴게소 아래 / 얼기설기 비닐하우스를 지었다 / 선풍기도 난로도 아니 전등도 하나 없는 / 간판도 없는 두어 평 비닐하우스 무허가 옷가게 / 어려서나 더 젊어서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던 / 반짝이는 반짝이 옷, / 너울너울 인형 같은 공주 옷을 파는 그 여자의 옷가게 / 그녀에게서 사온 옷을 안고 잠을 청하면 / 푸른 섬진강물이 은빛 모래톱 찰랑찰랑 간지르는 소리 / 동화 속 공주가 나타나는 꿈 /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 구례에서 하동사이 길에서는 보이지 않는 반짝이는 옷가게 / 그녀가 웃고 있다 서비스 커피도 한잔 준다” 
 

책 뒤에 '시인 박남준 연대기' 가 있는데 한껏 웃었다. 입 싼 안도현 덕분에 입에 풀칠한 사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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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읽는 사람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성찰은  '-인 척 하기의 용이함' 과 '-되기의 어려움' 이라는 곤란 속에서 전자와 쉽게 악수하고 마음을 풀어놓지 않는 것이다. 김영민 선생이 말하는 '인이불발'의 인문학적 긴장은 그렇게 작동해야 하는 것이다.  

요사가 판탈레온을 통해 한 비유중에 그런게 있더라. "닫힌 입으로는 파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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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투브엔 재밌는게 많다. 

음악을 눈으로 보는것. 마치 무슨 게임기 같기도 하다.그런데 집중해서 듣게 된다.&#160;

좀 더 친숙한 음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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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달 위로/ 여우 꼬리 끝처럼/ 흰 산봉우리' 

... 

까다로운 여우는 이 하이쿠를 보고 비로소 바쇼를 대시인으로 인정한다. 

이유는 다들 알다시피... 

 

'그 시에는 여우가 나오니까'  

.............

'어렵다.' 라는 말은 나도 쓰고, 남들도 쓰고... 

약사를 거치지 않아도 오용되고 의사를 거쳐도 남용되는 말이다.  

내가 조금 알면, 기러기가 하늘길을 알 듯 난척한다. 

내게 조금 낯설면... 그냥 어렵다. 왠진 싫다. 어려워서... 

그리고 주로 남 탓 한다. 대개는 작가나 예술가.  

...  

클래식은 원래 어렵구. 재즈는 들으려해도 어렵다. 팝송은 안들려서 어렵구, 현대미술은 그게 뭐가 미술이야?

철학책은 허무맹랑한 책같아서 어렵구, 역사책은 뭔가 다 외워야 될 것 같아 어렵구, 외국소설은 번역투가 목에 걸린 가래같아 어렵구, 종교책은 초월적인 것 같아 어렵구. 경제책은 그림 안그려져서 어렵구, 비평서같은 건 자기들끼리 말장난하는 것 같아서 어렵구. 

하여간 다 어렵다.  

.....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어젯밤 무릎팍 도사를 만났다.  

그의 답. .. .. ..

"공부하라 그러세요." ...팍팍... 

세상에 어렵지 않은게 있을 수 있을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것이 대중의 입에 딱 맞게 주먹밥 만들어 주라는 뜻도 아니지 않은가? 사람들 중에는 보이지 않는 '자부심'이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결코 말은 안하지만,자기는 어느 정도 문화적 소양과 학식을 갖추고 있는데, '그런 내가 봐도 어렵다.그러므로 그것은 창작자들의 잘못이다.' 여우처럼 말이다. 내가 이해하면, 그건 쉬운거다.  

이거야 말로 대중을 외면하는 창작자보다 더 오만한 대중의 독선은 아닐까? 

물론 세상에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많이 있고 실제로 이해 못하고 남겨두어야 하는 것들도 있다. 문제는 '어렵다' 라는 형용사가 사고의 정지, 행동의 정지를 공표하는 선언문의 끝단어가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즉 '어렵다'를 보채는 아이 입에 물린 줄줄이 사탕처럼 달고 다니면서 딱 거기까지만 알고 또 느끼고 멈춘다.    

어려우면...그걸 알기 위해 더 쉬운 것 부터 시작하면 된다. 쉬운거 서너권 보거나 듣고, 좀 어려운거 보다 지치면 , 다시 또 쉬운거 보고...해설서나 비평서보고...또 이래저래 인터넷글들도 좀 보고...그러면 나중엔 '아...그런거군'  전문가는 못되도 최소한 '어렵다' 와는 결별할 수 있지 않을까?  개개의 '어려운 것들'과의 이별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어렵다' 라는 태도에 대한 저항력이 더 중요하다. 어차피 사람이 만든거고,  동시대에 누군가 즐기고 있는 것들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자전거를 배웠다. 이틀이 걸렸다. 잡아주면 가고 놓으면 넘어지기를 반볻. 이틀째 되는 날  '아빠 놓치마.'...아버지가 잡고 있을거라는 믿음으로 페달을 쭈욱 밟았다. ...잠잠... 뒤돌아본 아버지는 손을 흔들고 있었고,점점 작아졌다.  나는 이울어가는 저녁놀을 맞으며 텅빈 운동장을 쌩쌩 달리고 있었다.

 습관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앞으로 개입할 지점, 즉 인식과 감성의 풍요를 위해 열려있는 문틈이 많다는 뜻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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