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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웅얼거리면 하루 종일 웅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세간에는 이를 두고 '유령송' 이라고 한다. 

오늘 하루 종일 '입급하라...메이드 인 차이나' 하고 있다.  

www.youtube.com/watch

세상이 내게 묻는다
지금껏 넌 얼마나 열심히 살았느냐고
그 누구보다 치열했던 삶이었냐고
나를 다그친다
그래서 변명해본다
조금은 게으르고 그래서 가난했지만
적어도 나는 정의로웠다
너에게는 별 의미 없겠지만

*한 번 더 세상에 나를 맡겨볼까?
한 번 더 속는 셈 치고 믿어볼까?
나 혼자서 아무리 울부짖고 소리쳐봐도
이 땅의 정의는 made in China*

결국엔 나도 똑같다
정의가 있네 없네 잘난 척 하고 있지만
1억만 주면 닥칠 것이다
입금하라 정말로 닥치는지
입금하라 입금하라 입금하라 입금하라

**

이 땅의 정의는 made in China
이 땅의 정의는 made in China
이 땅의 정의는 made in China

h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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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내세 민음사 모던 클래식 7
러셀 뱅크스 지음, 박아람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저녁이 하는 일이란/ 천지간에 어둠을 깔아 놓은 일/ 그걸 거두려고 이튼 날의 아침해가 솟아오르기까지/ 밤은 밤대로 저를 지키려고 사방을 꽉 잠가둔다." 

                                                                         김명인,<천지간>중에서 

상실은 사람을 부유(遊)하게 만든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언제 터질지 모를 거대한 고무풍선에 몸을 맡긴 것과 유사하다. 대부분은 운명의 여신이 다른 대상을 찾아 우리를 시큰둥해하며 내려놓을 때까지 묵묵히 올라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삶의 일정 부분은 운명의 여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수용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삶은 다른 '너머' 를 만들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실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깨달음조차 우리의 인식과 실천에 항구적인 항체를 만들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매번 이름을 바꾸어 달고 또 다른 처방전을 요구하는 변종 바이러스같다. 

  
  아이들이 모여 산다는 '달콤한 내세'는 없다. 아니 역설적인 형태를 취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달콤한 내세'는 '쓰디쓴 현세'를 심장이 찟기는 통증만큼이나 강하게 인정하는 순간에 도착할 수 있는 상태이다. '젓과 꿀이 흐르는' 피안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천국'이니 '이데아'니 하는 류의 '내세' 따위는 없다. 그것은 도착적이며 기만적인 환상이다. 삶 너머는 아무것도 없다. 그 너머의 것은 애써 상상해보려해도 불가지의 영역일뿐이다. 불가지의 영역은 헤아려서 안되는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뿌리 뽑힌 존재론적 조건에 대해 우리는 비극적 전망 밖에 할 수 없는 것일까?  애초부터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에 충실히 비극적 삶이어야 할까?  존재의 조건이 존재의 양식에 그대로 반영된다는 생각은 즉물적이며 허무주의적이다. 우리는 오히려 부서진 채 -니체의 말처럼- 춤을 출 수 있다.    



 "우리 모두, 그러니까 나와 니콜, 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들과 살아남지 못한 아이들. 우리 모두는 이제 완전히 다른 마을 사람들이 된 것 같았다. 우리는 달콤한 내세에서 외딴 마을을 구성하고 사는 것 같았다."  러셀뱅크스,<달콤한 내세> P299 

   눈 덮인 뉴욕 북부의 시골마을, 평소와 다름없던 그날, 아이들을 태운 버스가 추락한다. 다수의 아이들이 사망한다. (소설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사적 정의감인 '분노'로 자신의 업을 정당화하는 합리적인 변호사 미첼 스티븐슨. 그는 이 사건의 원인 규명과 배상을 위해 희생자들의 부모들을 만나러 다닌다. 단순히 운전자의 과실이 아니라 도로의 상태나 안전 시설등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 당국과 교육 당국에 막대한 배상을 목적으로 소송을 할 요량이다. 비교적 순탄하게 소송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사고 생존자 니콜 버넬을 만난다.   



  소설은 사건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가려진 모습도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에서 니콜은 마지막 대사를 통해 '각자의 규칙에 따라 살아가는' 이라는 방식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한다. 죽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그리고 영혼까지 이제 '다른 세계'의 마을 사람이 되었다. 각자의 '달콤한 내세'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이원론적으로 나눌 수는 없다. 우리라는 공통의 현존재들은 삶의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부여안고 사는 존재들이다.  마을 공동체가 죽음을 조금의 잔여도 남기지 않고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 안고 가는 모습에서 죽음을 삶의 일부라고 여기지만 결국은 타자의 것으로 인정해버리는 통속적인 깨달음의 것과는 다른 차원을 만난다.  마을 공동체 전체와 그 구성원들이 죽음 자체를 삶의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서, 존재의 기본적 전제로 안고 가는 것이다. 죽음의 뼈를 그대로 드리운 채 삶을 이행하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삶의 본질로서의 죽음을 온전히 이해한 것이다.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송이라는 법률적 절차를 통해 죽음의 직간접 원인에 대해 대속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방식이 변호사 미첼의 것이었다. 하지만 소설은 그 반대방향을 향한다.  

소설 속 희생자의 유족이자 베트남 참전군인인 빌리 안셀이 사건 이후의 삶을 '베트남전'의 트라우마와 비유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빌리 안셀의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이지만 결국 마을 전체에도 해당하는 것이다. 즉 마을 전체가 이제 아이들의 죽음을 통해 '죽음을 통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대면해야하는 요청에 맞닥드린 것이다.  영화 속 아톰 에고이안은 이런 죽음을 통한 삶의 영위라는 과제를 오래된 유럽의 구전설화인 '피리부는 사나이'를 통해 상기시킨다. 피리부는 사나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사라져 버린 아이들의 세계에 사는 마을의 사람들은 어떤 존재적 변화를 겪어내고 강요받은 삶과 대화할 것인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은 평온한 마을 공동체의 이면과 삶의 다층적인 변부들을 보여준다.  우화적인 사회소설이 추구하는 추악한 공동체의 위선 같은 것과는 크게 상관없다. 물론 무탈한 마을 공동체 안에 도덕적인 흠결 등이 있고 그것이 사건의 중대한 반전을 쥐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소설이 마을이 가진,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도덕적 일탈을 고발하거나 집어내기 위해서 씌여진 것은 아님에 틀림없다. 근친상간의 트라우마는 사건 진행의 숨은 열쇠이며 사건의 방향을 변모시키는 매우 중대한 계기가 된다. 그것은 결국 사고 피해자인 니콜과 돌로레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끄는 계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삶의 봉합과 새로운 지속을 위한 사건 전개상의 도구이지 그것이 공동체의 도덕성과 숨겨진 개인의 성적 음험함등을 고발하기 위한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소설 속에는 얼음길에 미끄러져 세상을 등진 아이들 말고도 사실 숨은 아이가 하나 더 있다. 변호사 미첼의 딸이다. 영화는 소설에 비해 이 역할에 비중을 좀 더 많이 둔다. 그리하여 '변호사 미첼-딸/ 마을주민-희생된 아이들' 이라는 이중 구조가 연결된다.  영화 첫 장면도 변호사 미첼과 딸의 대화부터 시작된다. 미첼의 딸 조이는 부모의 이혼,마약과 방탕한 생활 등으로 이미 부모와는 척을 지고 있는 상태다. 오로지 마약을 구매하기 위한 돈이 필요할때만 뉴욕의 변호사인 아빠에게 읍소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조이의 어린 시절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비춰진다. 영화 포스터의 스틸화면으로도 알려진 그 이미지이다. 미첼의 과거 회상 장면인 것 같기도 하고 지금처럼 뒤죽박죽이 되기 이전의 어떤 평화로운 상태에 대한 이미지인 것 같기도 하다. 아톰 에고이안은 아예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딸의 친구와의 비행기 속 만남이라는 씬을 설정하여 변호사 미첼이 또 다른 방식으로 딸아이를 '내세'로 보낸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끔 한다. 소설과 영화 둘 다 딸의 HIV양성반응이라는 전화장면을 통해 파국적이지만 단 한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모종의 재회를 암시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영화 포스터로도 쓰인 평화로운 장면은 변호사 미첼의  인상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 앞으로 소설이나 영화를 보게될 사람들을 위해 일종의 예의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성 싶다. 그 일화 속에는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삶/죽음' 에 대한 은유가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버스가 추락하고 난 이후 다음에 등장하는 컷트도 바로 그 장면이다.  소설 속에서 미첼이 이야기 했던 그 경계선에서의 섬뜩한 '명쾌함'이란...참으로 ...(소설 속에만 이 '명쾌함'이란 단어가 나오는데...미첼이 들고 있던 소독한 면도날도 어쩔 수 없는 '명쾌함'이란 단어가 주는 예리함보단 날카롭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서 가장 적절하며 필요했던 단어가 바로 그 '명쾌함'이었다니 그것을 찾아낸 작가에게 경의를) 이 책은 어쩌면 '죽음의 그 명쾌함'에 대한 역설적 오마주, 그 절대적 불가능성에 대한 오마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러셀 뱅크스의 <달콤한 내세>는 사실 아톰 에고이안의 영화<달콤한 내세>를 보고 난 이후 찾아 읽게 되었다. 영화가 좋을 경우만 하는 짓이다. 세간의 평가처럼 비교적 원작에 충실한 영화였다. 러셀 뱅크스의 소설은 사건의 진행과 주인공들의 사건 전후의 일상,그리고 사건과 관련된 내면의 움직임등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입체화한다. 반면 아톰 에고이안은 주로 미첼 변호사의 시선과 생존자의 증언을 병치 시키고 있다. 대신 효과적인 교차편집과 인서트편집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 내밀한 정서들을 표현한다. 매체는 다르지만 둘 다 매우 뛰어난 스토리텔러들임에는 틀림없다.   

  죽음이나 죽음을 통한 상실은 매일 분만실에서 신생아가 세상 빛을 보듯 발생한다. 병원에서, 차도 위에서, 쓸쓸한 여관방에서. 상실의 문턱을 넘어서기란 결코 쉽지 않지만 또 영원히 함께 하기도 마땅치 않다. 애써 그것을 떼어내려하는 것도 작위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그것에 묻혀있어도 부자연스럽다. 결국 부서진채로 다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계속 물을 수 밖에 없다. 거대한 슬픔은 그런 질문을 정당화 해준다. 그리고 언젠가 행복이란 것은 결국 과거의 것을 쓸어담으며 오는 것은 아니라는 진부한 진실과 만날 때까지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그 질문과 대면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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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페미니스트적 용어라는 느낌이 강해서  '소녀취향' 이라는 말을 언제부터인가 자제한다. 특별한 정의는 없지만 내게 그 의미는 양식에 비해 내용의 함량이 미달한다거나 또는 지나친 형식미에 탐닉한다거나 또는 과도한 감상성, 특히 유아론적 세계인식 등을 미학적 차원에서 낮춰 하는 말이다. 

 어쨋거나 '소녀취향'을 대체할 말을 찾다보니 딱히 떠오르는게 없다. '소년소녀취향' 또는 '청소년취향' 등등  (욕을 잘하는 내 구어식 화법을 쓰자면 '애새끼들 취향'이다.) 하여간 정확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지하철 신문판매대잡지 같은 싸구려 감상의 철학적 중핵은 '세계는 오로지 나의 존재만으로 존재한다."는 류의 버클리식 독아론이다. 싸가지 패대기 처먹은 청소년 애새끼들의- 물론 괜찮은 아이들로 꽤 많다- 공통된 특징 중 하나가 저거다. 그래서 이 새끼들은 누구 주변에서 무슨 말을 해줘도 결코 알아 먹질 못한다. 내가 중심이니 오죽하겠는가. 내가 사라지면 지구도 사라지는 데 오죽하겠는가... 

그런데 사실 이런류의 유아론은 철저하리 만큼 '자기 보호 본능'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아이들도 그렇다. 그리고 성인의 옷을 입은 아이들도. 인터넷이란 공간은 그것을 '다원성'이란 이름으로 가장 쿨하게 숨길 수 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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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를 쓰지 않다보니 리뷰 쓰는 법을 잊어 버렸다. 리뷰를 쓰기 위해 일정 시간을 고민하고 정해진 시간 동안 한 장소에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가끔 필기도구를 들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노트에 끼적거릴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로지코믹스>는 오랜만에 '리뷰 본능'을 불러 일으킨 재미있는 책이다. 

만화책 제목을 직역하면 <논리만화>가 될까? 

1. 첫번째 매듭, 버트런드 러셀과 20세기 초반의 수리논리학의 과제.  

책의 주인공이  버트런드 러셀이란 것은 이미 말한 셈이다. 여전히 서점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세계철학사>의 저자인 그 사람말이다.  하지만 조연진도 만만치 않다. 김유신이 나오는 곳엔 계백도 나와야 하는 법. 20세기의 대표적인 수학자와 논리학자들이 대거 조연으로 등장한다. 칸토르,프레게,힐베르트, 푸엥카레,화이트헤드,비트겐슈타인, 괴델 등등...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각축하는 이들은 광기 어린 수의 사제들이다. 실제 러셀을 비롯해 많은 이들인 가우어가 말한 '무한을 보려는 죗값'을 치루기도 한다. 이 책의 기획 아이디어이기도 한 '광기와 논리학'을 염두해두고 하는 말이다.  

이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는가?  이것이 사실 이들을 광기에 빠뜨리기도하고 위대하게 만들기도 하는 이 책의 중심 주제이다. 그것은 '토대'이다. 러셀의 무한한 거북이 위의 세계라는 거북이 비유가 바로 대표적인 예이다. 세계는 어떤 존재 이며 그 끝은 무엇인가? 그 세계를 가장 합리적인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은 무엇인가?  아인슈타인이 대통일장 이론을 구축하려고 무단히 애썻던 것이나 우주론에서 최종이론을 도출하려는 분파와 그것을 부정하는 분파사이의 논쟁이나 형식은 다르지만 지향점은 유사하다.

물론 언급한 이들이 각기 증명해내고 반박해낸 수학적 과정들을 하나 하나 이해하기란 전문가가 아니라면 결코 쉽지 않다. (1 곱하기 0은 다시 0 인 공리를 수학적으로 이해하는데도 한참 걸린 나로서는 말이다. 가끔 심심할 때 이런 공리들을 쫓아가보는 것도 요즘 즐거움중 하나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 정도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2. 두번째 매듭은-특히 이 책이 뛰어난 점이기도 한데- 러셀의 '자기언급'을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긍정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성 방식의 탁월함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히 러셀과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나열했다면 이 책은 평범하게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마치 한편의 메이킹 필름을 보는 것 같다.  책의 기획과정과 논의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구성하여 책의 실마리와 이 책이 가고자 하는 방향,또는 질문등을 만들어 낸다. 이 책의 저자와 그린이들이 실제로 만화의 주인공의 등장하여 러셀과 동료들의 질문에 토론하고 반박하며 균형을 잡아간다. 예를 들어 괴델의 '불완전성정리'에서 책이 끝난 것에 대해 공저자중 한명은 '폰 노이만'과 '튜링'을 말하지 못했다며 광기의 수학자들이 만든 알고이즘과 컴퓨터(인터넷)의 변혁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지 못한 것을 툴툴거린다. 그러니까 독자는 이들 기획자의 작업실 토론과정을 보면서 이 책의 기획의도와 방향성 그리고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는 것이다. 

3. 마지막 매듭 역시 두번째 매듭과 관련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단행본으로서 일종의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은 20세기 수리논리학의 전반적 행보를 읽어낸 이후 마지막 결론을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도출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 말이다. 아테네와 복수의 여신이 화해하는 방식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결론이기도 하다.  

만화는 모두 컬러 인쇄되어 있으며, 종이 재질도 매끈하다. 하지만 가장 뛰어난 것은 역시 기획력이다. 이런 철학적 내용들을 이런 형식에 이런 구성으로 담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많은 언론의 무수한 별 표는 우리가 평소에 접할 수 없었던 주제와 텍스트의 충실함, 그리고 새로움 때문이다. 

수학책들 몇 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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