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한 권 보고 싶어졌다. 온힘을 다해 지난 계절의 수분을 빼어내는 겨울나무를 보다가... 언젠가 사두었던 코맥 맥카시의 <피빛 자오선>을 열었다.   

영어로 하면 Blood... Fascinating! 이다. 그러고 보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드>,<피빛 자오선>을 본 셈인데, 그는 아직 단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 중 으뜸은 <피빛 자오선>이다. 논란이 될 말한 결말 부분 역시 개인적으로는 흡족하다. 

이러다 국경 3부작을 다 따라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읽어야 할 책들도 많은데...이런....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닌 '전작 읽기'는 내게 스노비즘의 의혹을 들게 한다.)     

초식의 환상으로 폭력의 삶을 건너려는 세계에 죽은 동물의 내장을 통과하고 날아오는 비릿한 모래 바람은 어떤 종류의 난처함을 던져줄까?  

어제 밤 회식에서 돌아온 후 취기에 모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계란을 벽에 던지듯 시집을 던져버렸다. 고깃살에 뚝뚝 떨어지는 지난 생존의 상징이 주는 역겨움이 차라리 낫다. 반백의 시간, 고행의 숨결을 통해 겨우 닿은 곳이 그곳이었다면 말이다.   

  

 

 

 

 

 

 

 

  1.<피빛 자오선>이 영화로도 만들어진다기에 혹시하고 유투브를 뒤져봤다. 영화 티저가 하나 있는데 실제 영화 홍보물은 아니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한 대학생이 과제로 만든 작품이다.  

 

 

2.유투브를 뒤지다가 예일대학 공개강의에서 <1945년 이후 미국문학>에서 <Blood meridian>을 다루는 강의를 잠시 들었다. 실존 인물 홀든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90분 강연물이어서 살짝 보고 나왔는데 좀 한가해지면 다시 찾아봐야겠다.  

 

 

3. 홀든 판사가 전쟁에 대해 설하는 장면이 있다. 나름 역사를 가진 흔한 이야기지만 인상적인 장면으로 포함 될 만하다. 홀든식으로 생각하든 홀든에 대결하든 말이다. 지금 이 곳에는 너무 많은 늙은 홀든과 홀든이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살고 있나? 

어쨋거나 어제 그 시집을 던져버린 것은 후회하지 않는다.

   

The good book says that he that lives by the sword shall perish by the sword, said the black.

The judge smiled, his face shining with grease. What right man would have it any other way? he said.

The good book does indeed count war an evil, said Irving. Yet there's many a bloody tale of war inside it.

It makes no difference what men think of war, said the judge. War endures. As well ask men what they think of stone. War was always here. Before man was, war waited for him. The ultimate trade awaiting its ultimate practitioner. That is the way it was and will be. That way and not some other way.

He turned to Brown, from whom he'd heard some whispered slur or demurrer. Ah, Davy, he said. It's your own trade we honor here. Why not rather take a small bow. Let each acknowledge each.

My trade?

Certainly.

What is my trade?

War. War is your trade. Is it not?

And it ain't yours?

Mine too. Very much so.

What about all them notebooks and bones and stuff?

All other trades are contained in that of war.

Is that why war endures?

No. It endures because young men love it and old men love it in them. Those that fought, those that did not.

That's your notion.

The judge smiled. Men are born for games. Nothing else. Every child knows that play is nobler than work. He knows too that the worth or merit of a game is not inherent in the game itself but rather in the value of that which is put at hazard. Games of chance require a wager to have meaning at all. Games of sport involve the skill and strength of the opponents and the humiliation of defeat and the pride of victory are in themselevs sufficient stake because they inhere in the worth of the principals and define them. But trial of chance or trial of worth all games aspire to the condition of war for here that which is wagered swallows up game, player, all.

Suppose two men at cards with nothing to wager save their lives. Who has not heard such a tale? A turn of the card. The whole universe for such a player has labored clanking to this moment which will tell if he is to die at that man's hand or that man at his. What more certain validation of a man's worth could there be? This enhancement of the game to its ultimate state admits no argument concerning the notion of fate. The selection of one man over another is a preference absolute and irrevocable and it is a dull man indeed who could reckon so profound a decision without agency or significance either one. In such games as have for their stake the annihilation of the defeated the decisions are quite clear. This man holdgin this particular arrangement of cards in his hand is thereby removed from existence. This is the nature of war, whose stake is at once the game andthe authority and the justification. Seen so, war is the truest form of divination. It is the testing of one's will and the will of another within that larger will which because it binds them is therefore forced to select. War is the ultimate game because war is at least a forcing of the unity of existence. War is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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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에서 <더 셀>,<더 폴>을 만든 타셈 싱 감독의 여자주인공들이 순간 스쳐간다. 아니면 이스트반 자보의 <메피스토>라든지... 

 

<블랙스완>은 <더 레슬러>를 만든 대론 아로노프스키의 최신작이다. 나탈리 포트먼과 뱅상카셀이 주연을 맡고 있다. 국내 개봉은 내년 2월정도로 잡혀 있다고 한다. '검은 백조'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악마의 딸 오딜이다. 주인공 왕자가 백조 오데트와의 약속을 깨게 만드는 것이 흑조 오들이다. 즉 팜므 마탈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오데트와 오딜은 1인 2역을 맡는다. 영화 예고에서 주인공이 그녀의 라이벌 릴리에 대해 갖는 강박은 흑조의 그런 본능적인 검은 매력이 자신에게 약하다는데서 출발한다. 거기에 완벽을 향한 예술적 강박이 포개진다. 그녀의 강박은 또 다른 자아를 현실 속에 불러 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며 언뜻 보이는 또 다른 자아로 추정되는 배우는 위노나 라이더이다. (나탈리 포트먼과 위노나 라이더의 이미지가 매우 혼란스러운 적이 있었다.) 질투와 경쟁,그리고 예술적 강박은 주인공을 실제로 검은백조로 만들어간다. 참고로 감독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고 영화는 심리스릴러 장르로 알려져있다.

 

여담삼아.. 

차이코프스티의 발레 <백조의 호수>중에서 검은백조 오딜의 유명한 32회전 뿌에테를 아메리칸발레시어터의 질리안 머피의 공연 중에 올려본다. 이런 장면은 권투로 치면 '마지막 한방' 같은 그런 것이다. 요즘 국내외를 막론하고 아마추어 장기자랑에 나오는 성악가 지망생들이 대개 부르는 노래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중에서 '공주는 잠못이루고'이다. 그 마지막의 All'alba vincero! ...  vincero... vincero. (파바로티의 한방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빈체로...빈체로...빈 체에에엥에에에로.... 열정적인 이탈리아 남자 성악가들은 이거 한방으로 먹고 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거 한방이 없으면 식자층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대중적 장악력은 떨어지는 법. <백조의 호수>에서도 마찬가지다. 32번 멋지게 돌아주어야 한다. 쉬크하게 

 

'예술과 삶'이라는 겨울에 어울릴 만한 주제로 내 책상 위에 놓인 영화는 찰리 카우프만의 <시네도키,뉴욕>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하는데-윈터 홀릭? 오로지 눈때문인가? 부산은 '무설'의 도시다- 그렇다고 자잘한 감상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건 정말 딱 밥맛-밥에게 미안하지만- 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겨울은 무뚝뚝한 손님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존중하며, 유약한 남자들처럼 배불뚝이 불의 우상에게 기도 드리는 일 따위는 하지않는다." 

&nbs 

 혹시 예고 중간에 나오는 잔잔한 노래가 귀에 걸리면  좋은 귀를 갖고 있는 거다.  

겨울은 차가운 위로가 필요한 계절이다.

영화 속에서는 엔딩 크레딧에 나오는 Jon Brion 의 Little pers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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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퇴근한다.  

비록 다음 한 주는 또 바쁠 지라도.그건 그 때일이지.  

"아들들아 기다려라. 아빠가 집에 간다.ㅋㅋㅋ ㅋㅋㅋ  마구 마구 어지르고 놀아보자..으하하 

예찬이...그리고 낼은 목욕가자. 크하하하.크하하 " 

옛 시인이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새가 날아가는 걸 보고 이 아니 통쾌한가...라고 노래했다지. 나의 적들아...나는 간다. 모두 다음 주에나 보자. 크하...이 아니 통쾌한가.!! 

중3때 나를 락의 세계로 이끌어주신 ozzy님. 여전히 전 님을 좋아해요.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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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 퇴근길에는 라디오나 CD를 듣는다. 오늘 내 차 안에는 안드라스 쉬프가 연주한 '스카를라티 소나타'와 게오르그 솔티가 시카고 심포니를 지휘한 '말러 교향곡3번'이 있다. 만약 라디오를 듣는다면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들을게다. 거의 늘 그렇기 때문에. 

어제 저녁 청취자 사연중에 고3수헙생의 부모가 보낸 사연이 있었다. 전국의 고3수험생과 학부모님들 수고하셨다는 사연이었다. 배철수씨 왈 "저도 사실 고3수험생 아버진데요...전 한게 없어서 빼주십시오" 라고 예의 겸손을 표했다. 사실 공부는 아이가 하는 거지 부모가 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는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물질적 안정과 약간의 배려,그리고 힘겨움을 뚫고 나갈 애정을 주는 것 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건 뭘 모르는 일이 되었다. '아이가 고3이면 엄마도 고3이다' 이런 경향은 요즘은 아예 유치원때부터 시작된다. 이제 부모들은 최근 책을 낸 엄기호씨의 표현을 빌자면 어린시절부터 '학습 매니지먼트 전문가'가 되어서 함께 수능일을 위해 달린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교육'은 사라지고 '교육 산업'만 남은 것이 한국의 교육현실인셈이다.       

오늘은 고3 수험생이 왕이다. 어제 받은 백화점 브로슈어에는 이 예비 소비자들을 위한 다양한 유인전략들이 빽빽했다. 수능 수험표를 가져오는 고객께 할인, 고3 수험생만을 위한 콘서트 등등 모두 "그래 그동안 지루한 학교에서 사육 당하느라 고생했다. 그러니 부모 지갑 털어서 이리로 와라. 이제 부모들에게 그 정도 요구해도 된다. 여기가 너를 위한 판타스틱 월드란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 기억해야 한다. 대학 입학률이 80%이상이라지만 당해년도 수능을 보지 않는 고3친구들은 훨씬 많다. 오늘 시험 보지 않는 고3 아이들은 하루 동안 투명인간이 된다. 그리고 그 부모들은 어제처럼 오늘도 투명인간으로 산다.  정말 먹고 살기 힘들어서-세상에는 정말 먹고 살기 힘든, 그래서 아이를 제대로 봐줄 시간도 정성도, 힘도 없는 서민들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고3이 된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부모들. 수능이라는 한국 사회의 위계 질서를 반영구적으로 결정짓는 이 비합리적이며 야만적인 행위 속에 끼이지 못한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을 위한 자리도 오늘 어디에도 없다.  

세상은 오늘 하루 그렇게 선명한 구분을 통해 그 속살을 보여준다. 오늘 하루 보게될 '수능/비수능'이라 구획선, 그 안에는 학벌의 문제, 빈곤의 문제,분배의 문제,계급의 문제가 물밑에서 눈만 살짝 표면으로 올린 개구리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어제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듣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로 해준 것이 없다'는 배철수가 좋다. 그리고 '별로 해준 것이 없다'는 배철수가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었던 부모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더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간만에 배철수 아저씨의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시인 최영미는 소월의 이 시에서 "돌아서면 무심타" 라는 말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나이가 든 것이라고 평했다. 난 나이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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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맘때가 되면 말러 교향곡 9번을 자주 듣게 된다.  

여러번 나누어서 들을 수 밖에 없다. 자동차 안에서도 조금 듣고, 잠자기 전에도 조금 듣는다.  

 한 악장이나마 처음부터 끝까지 방해없이 들을 수 있으면 그것도 행운이다. 아이들은 내가 혼자 음악듣는 것을 결코 그래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냥 배경음악이라도 걸어놓고 싶어서 몇 몇 CD를 플레이어에 올리면 곧바로 그걸 꺼내고  '놀이동요CD를 넣어 버린다.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만다. 살아있는 작은 아이들과의 시간이 죽은 바흐나 베토벤의 음악보다 더 소중하다. 아이는 금새 어른이 될 것이고 그 음악들은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 처럼 묵묵히 나를 기다려줄 친구들일테니... 

책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아마 동화책일게다. 하루에도 반복적으로 몇 권씩 읽는다. 약속한 서너권의 책을 마치고 아이가 잠들고 나면 그제서야 책을 위한 나의 시간이 조금 열린다. 하지만 몇 장 넘기다 보면 내게도 졸음이 찾아오고... 

 봄 꽃보다 화사한 가을 단풍도 사그라드는 계절이다. CD 장에 CD가 채워지고 책장에 책이 느는 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진다. 나무도 저렇게 자기 몸을 터는데 자꾸 늘어나는 뱃살처럼 그런 것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아직 이 친구들은 다이어트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 아직은 수습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같은 것때문이겠지.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허리가 30을 넘기고 채중계도 다른 단위의 수치를 가르치게 되는 줄도 모르고. 

 말러 9번은 '이별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말러 교향곡의 전통적인 주제이기도 한데 특히 '대지의 노래'와 연장선 속에서 그리고 악명 높은 교향곡 9번을 둘러싼 불길한 소문들 속에서 이 작품은 시작된다. 말러와 당대 깊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지휘자 빌헬름 멩겔베르크는 이 교향곡을 '사랑한 모든 이에 대한, 세계에 대한,예술, 삶, 음악에 대한 이별'이라고 칭했다.  

 

 

 

 말러의 세계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사이의 대립 속에 구성된다는 큰 특징이 있다. 그로 인해 범우주론적이면서도 세속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퇴페적 애상미를 띄고 있다. 즉 말러의 음악적 내용물들은 당대 어느 누구보다 세속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지만 그의 음악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곳은 '영원한 빛'이라는 초월적 평화다.  

 말러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 해석과 청취가 말러의 의도와 더 가까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죽음'이나 '이별' 또는 그 이상의 것들에 대해서 그와 똑같은 태도를 함께할 필요는 없다. 

<나는 하나의 노래 이 곳을 지나간다>라는 책에 보면 이런 글귀가 나온다.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는 모종의 서늘함이 있다. 인디언 쇼니족 테쿰세 추장의 말이란다.

 "죽을 때가 되어서 마음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 처럼 되지 말라. 그들은 죽음 앞에서 울면서 그들의 삶을 다른 방식으로 조금 만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죽음의 노래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사처럼 죽으라."   

돌아가는 계절 11월이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하는 헤센 심포니오케스트라 (과거 프랑크푸르트방송교향악단이라고 불리웠다)  말러 교향곡 9번 1악장 안단테 코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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