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콩들처럼 한번에 우르르--- 나온다. 오래전 이야기들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유효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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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0년전쯤 부산에 내려와서 처음으로 '뻘짓'이란 말을 들었다. 서울에 사는 동안 나를 비롯해 내 주변 어느 누구도 '뻘짓'이란 단어를 쓴 적이 없었다. 나는 이 '뻘짓'이란 단어를 알게되고 이 단어의 묘한 매력에 빠져서 요즘도 가끔 허튼짓을 하는- 나를 비롯한- 내 주변을 보고  

"나 원 뻘짓하고 있네." 라고 통렬하고도 적확하게 이 단어를 날린다. 마치 표적을 향해 직선운동하는 탄환처럼.  

나는 그동안 '뻘짓'의 의미는 '허튼짓' 정도로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외 부정확한 몇가지 사실을 몸 안의 결석처럼 이 단어 속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이 최근에 알게된 나의 잘못된 이해이다. 

1. '뻘짓'은 경상도 사투리다. ( '전라도 사투리'다. 내가 그 말을 들었던 것이 경상도 사람들 사이였고, 또 경상도에도 전라도 사람들은 많다. 그렇지 않더라도 언어는 돌고 돈다.) 

2. '뻘짓'은 '갯벌에서 하는 짓'에서 유래되었다.( 갯벌은 흔히들 줄여서 '뻘'이라고 발음한다. 여기서 연상 작용의 오해가 일어난 것이다. '뻘에서 하는 짓' 즉 '갯벌에서 덤벙덤벙하는 헛짓'이 '뻘짓' 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국립국어원의 '뻘짓'에 대한 답변은 이렇다. 

.. 현재(2006)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전라남도편, 이기갑외, 전남방언사전 314쪽>을 검토한 결과 '허튼짓, 헛짓'의 전남 방언입니다. '뻘짓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 1)은 완전히 잘못된 이해였고, 2) 어원으로 찾다보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현재로서 관련성을 찾아 내기는 나로서는 힘들어보인다.  

그렇다면 본론.

'뻘짓'에 대해 이런 사전적 의미와 수용과정의 오류에 대해 쓴 것은 단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이다. 

...."진짜 뻘짓들 하고 있다." 

여기에 응용도 가능하다. 강조를 표현하는 접두사를 첨가하는 방법이다.. 

.... "진짜 개뻘짓들 하고 있네."  

텍스트의 안팎을 해체하면 이 페이퍼야 말로 '뻘짓'들을 질타하기 위한 '뻘짓'이 된다.  

그냥 '뻘짓하지마라'고 하면 될 것을...뻘짓하는 것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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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혼자 때없이 그 길을 넘어 강(江)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다녀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고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 

시인 최영미는 이 시를 읽고 나서 그간 알았던 모든 시인을 버렸다고 한다. 또 교과서에- 최영미 시대의 교과서겠지, 이 시는 요즘 교과서는 아니어도 참고서에는 나오는 듯 하다- 실린 시들과도 작별이었다고 말한다. 문학소녀 최영미의 발견이 아니었나 싶다. 

네이버 검색에서 시를 퍼나르기 위해 검색했더니 지식in 이라는 곳에서 '이 시의 구조는' '이 시의 주제는' 뭐 이런 식의 해설이 나온다. 나는 오래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이런 것들과 이별한 사람이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시의 구조, 시의 주제, 시어의 함축된 의미 등을 아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 속맛을 느끼기에 그런 도구들도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제일 먼저는 무엇인가? 내 생각에는  '시'를 느끼는 거 아닌가 싶다. FEEL IT...? 

내가 최소한 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것은 절대로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국화 옆에서>를 보고 고등어 속살 같은 그 맛을 감상한 여력은 거짓말 단 한마디 안 보태고 전무했다. 물론 그건 배운다고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시간이 그런 힘을 키워주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말이 어런 놈들은 시의 형식이나 상징의 의미나 알고 넘어가면 된다뜻은 아니지 않은가. 결국 내게 시가 제대로 찾아온건 시간이 많았던 대학와서다. 그냥 '시' 나 한번 읽어볼까 하고 읽던 그런 시선집 속에서 말이다. 그때 시어들은 오징어 배를 가르듯 쑤욱하고 몸 속으로 들어왔다.

 결국 이런 기회를 막는 것은 바로 시의 구조와 형식,의미,표현의 특징,상징된 것의 의미를 서너가지 옵션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말하는것 교육 때문이다. 도대체 이건 뭘 느끼게 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완전 '싸구려 커피'다. 시험용 텍스트로 시를 만나게 되면 그런 방식 밖에 없다. 밑줄 긋고 무언가 받아 적고.  내가 보기에 교과서에 실린 역대의 명시들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호사를 누리게 되지만, 반면에 '진정성'으로서의 시의 역할을 반쯤 접게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각서와 교환된 것이다. 이 시를 다시 만나려면 아주 멀리 돌아와서야 가능하다. 마치 국화꽃 앞의 그 누이처럼. 

  

2. 

아말피의 밤노래   

           -새라 티즈데일 

별이 빛나는 하늘에게 나는 물었네/내 사랑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하늘은 내게 조용히 대답했네/ 오로지 침묵으로.  

어두워지는 바다에게 나는 물었네/저 밑에 어부들이 지나가는 바다에/바다는 내게 조용히 대답했네/ 아래로부터의 침묵으로. 

오, 나는 그대에게 울음을 주고/ 아니면 그대에게 노래를 줄 수 있으련만/ 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주리오/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

 평범한 시어.의인화된 질문. 환유적 전환. 질문-대답의 대칭구조...참 심심한 시다.

그런데 나는 왜 마지막 시어를 보고 밤 11시 잠자러 들어가는 아내를 붙잡아 새웠을까?  이거 좀 봐... 

 아.."하지만 어떻게 침묵을 주리오, 나의 전 생애가 담긴 침묵을" ....하...이걸 어떻게. 

사랑,영원,죽음,삶의 태도...서로 앞만 보고 있는 묘석들, 별빛을 바라보고 누운 이름 모를 와불,  논 바닥 한 가운데 있는 부서진 석탑, 퇴근길 산 위에 걸린 푸른 달, 며칠 전 DVD로 본 영화<오션스>에 나오는 거대한 고래. 바람이 불어오는 곳. 무지개 너머. 기러기들을 끌어당기는 자기장의 중심, 영화<해피투게더>에 양조위가 찾아가는 세상의 끝. 그리고 그 절벽. 영화<화양연화>에서 앙코르와트 탑사이로 넣어버린 양조위의 편지. (라캉의 '수신인이 없는 편지'에 대한 비유가 생각난다.) 지워져 버린 전화번호 목록, 왼쪽이 조금 무거워 보이는 식탁 다리. 꺼지는 찰나의 가로등. 그리고 그 외에 기타 등등 

나는 이 모든 걸 생각했다. 구조니 형식이니 하는 것은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교육의 분류표에 따르면 나는 시에 대해 모르는 거다.이게 서정시인지 서사시인지, 모더니즘인지 상징주의인지... 

그렇다면 매일 좋아라하는 말로 "철학,인문학,철학,인문학..."하는데 철학적인 질문 좀 해보자.  

무엇이 시를 읽는 것인가? 무엇이 시를 아는 것인가? 내가 아는 한 어느 교사도 그걸 답해줄 수 없으며, 어느 참고서도 설명해 줄 수 없다.    

동시를 즐겨 읽고, 또 노래로 부르던 아이들이 점점 시와 멀어지게 되는 건, 1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사보지 않게 되는 건, TV와 게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교과서식 해석의 강요,해석에 대한 과도함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내 대증요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 

 "그냥 시를 내버려 둬!" 

 (추가된 사족) 

 지금부터 한 10년전 쯤 지금 아내가 된 여자와 함께 안치환 콘서트에 갔다. 그 때 막간가수로 이지상이라는 가수가 나왔다. 만주 독립군과 관련된 내용의 노래였다. 그 노래를 딱 한번만 들었는데 아주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만주 벌판을 누비던 그 노인네'와 '이 좁은 바닥에서 헤메는 나' 사이의 심각한 격차때문이었다.  

노래 제목도 모르고, 처음 듣던 노래라 가사도 충분히 듣질 못했지만..'그 노인'과 나의 스케일 차이쯤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안도현 시인을 패러디 하자면 '노인들 함부로 대하지 말아라'라고 할만큼. 북방의 만주 벌판을 뛰던 사람과 어찌 나를 비교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시 이 처음 듣는 노래에 눈물이 핑 돌았다.

우연히 유투브에서 노래를 찾았다. 이지상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곡이다. 브레히트의 시 제목을 곡 제목으로 사용했다.  이건 민병일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이건 시인데 그 이유가 사회성과 역사성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이걸 목 놓아 이야기하는 건 나도 좋아하는 주제지만, 아무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아무 순간에나 이걸로 결론 짓고 싶어하는 건, 아니 그리로 가고 싶어하는건 한마디로 '과함'이다.  이 시가 좋은 건, 시의 구조와 형식을 갖추고 있어서도 아니다. 아름다운 시어와 운율이 있어서도 아니다. 그런 의미로는 별로 좋은 시가 아닐 것이다. 대신 이것은 날것인 채로 그대의 가슴을 그대로 노린다. 그러므로 시가 된다. (그리고 한마디 음악적으로 덧붙이자면 "아..위대한 포크의 전통이여." )  

다시, 나도 잘모르지만, 시에 대해 질문을 하자. 무엇이 시인가?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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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하하... 이런 걸 뭐라고 해야할까? ^^  

한동안 안보이다가 뒷북처럼 다시 나타난 음반이다.

요즘 클래식음반계는 박스로 과거 거장들의 명연을 재고정리하고 있다. 요즘 한참 열심히 뛰고 있는 현역 연주가들은 그래서 이래저래 힘들다. 과거 쟁쟁한 명연주가들의 녹음들이 다음 달에 출시되는 자기 음반과 경쟁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격 경쟁력면에서도 그들이 앞서 있으니 말이다.  

재고정리 덤핑과 함께 과거 명연들로 먹고 사는 메이저 클래식음반사들이-그런면에서 음질과 실험정신,레퍼토리면에서의 확장을 도모하는 클래식 마이너 레이블들이 20세기를 건너 살아남고 있는 진정 클래식 음반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난 십여년 동안 재미를 본 것은 복각 시리즈다. 복각전문 레이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LP판을 복각음원으로 하는 레이블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위의 음반- 장 막스 클레망의 바흐 무반주 첼로모음곡-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90년대 말이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자리에 가면 저 음반이 있었다. 몇 몇 평가들도 읽었던 기억이 나지만 사실 그다지 눈이 많이 가진 않았다. 이후 저 음반은 절판 되었고 수많은 원전 연주 음반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최근 LP를 전문으로 복각하는 일본레이블에서 장 막스 클레망이라는 이름을 다시 바흐 무반주 목록에 복원시켰다. 

 스펙트럼사운드의 왼쪽 음반이다. 그러니까 위의 데카 음반과 스펙트럼 사운드의 음반은 같은 음원이다. 스펙트럼 사운드는 전체적으로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음향-물론 기계 구동상의 노이즈가 있긴 하지만-을 품고 있다는 평가다. 가격도 만만치 않다. 

내가 클레망을 들은 것은 이 스펙트럼 음반을 통해서다.10여년 전 그냥 자킷이 차라리 나았는 걸 하면서 멋대가리 없는 스펙트럼 음반을 들었다. 40자평 하듯이 한 두 줄로 말하자면 연주는 요즘 연주자들처럼 매끈하지 않으나 고졸하면서도 개성적이다. 아날로그적 감성이 만드는 새로운 감성의 환기 같은 것. (나는 이 음반을 구매할 때 앙드레 레비의 동곡 음반도 동시에 구매를 했었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곡에 이렇게 많은 돈을 쓰다니...) 

스펙트럼의 복각음반이 나름 반향을 일으키자 데카에서 한국판으로 부랴부랴 과거 클레망의 음반을 다시 찍어내기로 결정했나 보다. 이와 유사한 예가 피에르 푸르니에의 바흐 무반주 음반이다. 

 

이 음반도 10여년전에 반짝 나온 적이 있다. 그 때도 이 음반을 살까 말까 고심하다가 그만 두었다. 이유는 당시 열심히 보던 클래식 잡지에서 기존의 푸르니에 DG해석과 큰 차이가 없다는 리뷰를 보았기 때문이다. (교과서는 한 종이면 족하다!) 최근에 나온 푸르니에의 음반도 클레망의 것처럼 로컬버전으로 나온 것인데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모 클래식 매장에서 지속적으로 요청했다고 한다.( 기본 수요에 대한 확신을 주었겠지.) 

하여간 나는 그냥 DG에서 나온 푸르니에 음반으로 (이건 LP로도 CD로도 가지고 있기때문에) 만족하기로 하고 이 라이브 음원은 앞으로도 접을 셈이다. 

그나저나 이런 과거 명연들의 복각음반이 나올때마다 홍보문구들은 참으로 거창하게쓴다.  

대게의 요지는 희귀성 그리고 일회성이다. "일생일대 최고의 명연" "이번이 아니면 다시 없을...." 나 역시 가끔 속는 셈치고 속는다만 그런 말들에 이명까지 겪을 필요는 없다.^^    

오늘 올리는 연주는 파올로 판돌포...^^ 이것도 내가 가진 거랑 음반 자켓이 다르다. 내건 민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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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자본주의'? 

도대체 '착한' 이란 말과-또한 같은 논리값으로 '악한'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자본주의'란 말이 결합 가능한 말인가?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 명백한 범주의 오류다. 개인이나 기업들이 조금 더 윤리적으로 나아갈 수는 있지만 그것이 '착한'과 '자본주의'를 이어붙일 수 있는 만능접착제가 될 수 있을까?  

장하준의 책에 대한 홍보문구에 '착한 자본주의'란 말이 자꾸 등장해서 그렇다. 물론 이 책은 올 하반기 인문학 베스트가 될 것 같다.(나쁜 일은 아니다) 내 주변에서는 장하준을 읽어보라구 그러면 후천개벽할지도 모른다고 입방정을 떠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나올 듯 하다. 1년에 인문학 서적이라고는 한두권쯤읽는 사람들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위아래로 펴넘기며 " 이 책 꼭 읽어보세요. 정말 정말 훌륭한 책이에요." 라고 하는 경험을 지금까지 몇 번을 했다.  나는 그 때 마다  "그래. 재미있던가요?" 라고 말하고 말았다. 호들갑이 싫어서. 올 하반기에도 아마 이와 유사한 경험이 몇 번 더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이렇게 말들하겠지.

"장하준 보셨어요. 보셔야해요. 정말 훌륭하고 쉽거든요. 정말 이 사람을 대통령시키던가 아니면 장관이라도 시켜야 대한민국이 잘돼는데..." 

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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