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전 10시 40분 오랜 기간 정들었던 자동차를 폐차장으로 실어 보냈다. 잠시후면 해체를 위해 폐차장 수술대에 오를 것이다. 

 지난 주는 폐차문제로 정신이 사나왔다. 화요일 자동차를 타고 창원에 갔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 시동이 꺼졌다. 몇 년전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다.저속에서 rpm이 떨어지고 시동이 꺼지는 현상이다. 당시 문제는 엔진 분사과정에 있었다. 인젝터라는 부분을 손보고 괜찮아졌다. 일단 부산으로 와야했기에 속도를 가급적 떨어뜨리지 않고 창원에서 일을 마친 후 부산까지 왔다.(따지고 보면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안전불감증이란 이런 거) 고속도로에서야 가속폐달을 쓰기때문에 별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문제는 도심에 들어와서 신호대기로 정차하면 신호가 꺼지는 것이다. 시동이 꺼지면 사이드브레이크를 쓰고 가속페달을 밟아 rpm을 유지하며서 겨우 겨우 단골 정비소까지 왔다. 간단한 문제인 줄 알았는데 엔진 실린더의 헤드가 나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략 70-80만원 정도의 수리비를 요구했다. 

사실 지난해 요맘때 명절을 쇠기 위해 서울에 갔다가 집 앞에서 차가 퍼져서 80만원 정도를 주고 수리했다. 그 때도 긴급출동한 정비사가 새차 교체를 고려해 보라고 요구했으나 2년 정도 더 탈 계획으로 눈물을 머금고 수리했다. 차는 97년형이었고 내 계획은 15년은 타는 것이었다. 올해로 14년째가 된 셈이다. 

그런 기억이 있었으니 다시 또 80만원의 수리비라는 말에 '이제 끝이구나' 라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고액을 들여 수리한다고 해도 다른 쪽에서 문제가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었다. 결국 폐차 쪽으로 방향을 잡고 긴급서비스를 통해 일단 집까지 견인했다. 당장 폐차에 대한 방법이나 절차,보상금 같은 것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폐차라는 과정을 통해 폐차장과 폐차대행사가 영업이익을 얻는 방식을 나름 알게되었다. 대행사가 그렇게 많은 것도 폐차라는 과정에 꽤 괜찮은 부가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차 안에서 개인적으로 필요한 것을을 옮겨놓아야 했다. 

주차장에 옮겨 놓은 자동차는 자신의 운명이 다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묵묵. 늘 대던 주차장에 서 있는 자동차인데도 아직 수명이 남아 있는 자동차들 사이에서 흑백 사진 처럼 보여졌다. 폐차를 위해 주차장에서 대기 중인 내 차는 그렇게 하루 사이에 '과거'의 시간 속을 달리고 있었다.  

이 차는 내가 돈 벌어서 처음 산 자동차였다. 다른 주인 밑에서 7년을 있었고 또 내 곁에서 7년을 있었다. 차를 처음 샀던 해 남도 여행을 했다. 해남 들녘으로 해지는 모습도 함께 보았으며 김제 평야에서 소나기를 몰고가는 먹구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기도 했다. 이른 새벽 진통을 하는 아내를 싣고 조산원으로 달렸던 것도, 태어난 두 아이를 안전하게 지금 살고 있는 집까지 옮겨 주었던 것도 이 차였다. 오디오질을 좌절당한 내게는 가끔 음악 감상실이 되어 주기도 했고 또 가끔은 실내등을 밝힌 독서실이 되어 주기도 했다.  

몇 번 장거리 운행을 마치고 길 중간에서 고장이 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목적지를 몇 백 미터 앞두고 멈추어섰다. 그래서 차에 대한 애정 어린 농담으로 "그래도 이 차가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지켜준다니까...힘이 딸릴 때까지 최대한 안전한 곳까지 와서 기절하잖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난 주말, 또 다른 정비소에 가서 타이어와 오디오를 탈착했다. 타이어는 같은 아파트 사는 이웃에게 주었고 오디오와 스피커는 일단 보관했다. 주말이어서 견인을 할 수 없었던 관계로 일단은 그정비소에서 이틀 밤을 두었다. 그리고 오늘 오전에 폐차 견인업체와 인도약속을 잡았다.  

지난 한 주 동안 자동차를 의인화 하려는 '감상주의'때문에 무척 심란했었다. 물론 오늘까지도 나는 그 감상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톰 행크스의 영화<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은 무인도 생활에 말벗이 되어준 배구공 '윌슨'(스포츠용품 브랜드이다)이 실수로 바다로 떠내려가자 위험을 무릅쓰고 건지려고 한다. 결국 망망대해로 떠나가는 '윌슨' 배구공을 보며 마치 친구를 남겨두고 온 듯 오열한다. 물론 내 차에 대한 감상은 정황상 무인도에서 대화 상대였던 톰 행크스의 '윌슨' 만큼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폐차 결정 초기에 비해 일주일 가량이 지난 지금은 감기 치료에 필요한 시간만큼 감상을 치료하기에도 적당한 시간은 되었다. 처음에 폐차 결정을 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 회고적 글을 쓰려고 했었다. 하지만 하지 않았다. 처음에 마음 속을 스치는 상념들을 글로 썼다면 마치 사춘기 소년이 밤에 쓰는 편지처럼 얼설픈 감상과 회고적 감정의 편린들이 춤을 추었을 것이다.(사춘기 여인들은 좋아할지 모르나 이건 내가 보기엔 가장 끔찍한 글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정들었던 사물에 대한 의인화의 감정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견인차를 기다리면서 매번 장거리 운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면 습관적으로 했듯이 운전석 앞 바디에 손을 대고 "수고했어"라며 인사했다. 견인차 기사를 기다리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오래 손을 대고 있었다. "그동안 수고했고, 고마웠다. 덕분에 무사히 다닐 수 있었어."라고 말이다.

 견인차 기사에게 35만원의 고철값을 받고 차를 인도했다.  차가 사라져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봤다. 비록 쇠로 만든 기계덩어리에 지나지 않지만 그리하는 것이 정든 사물에 대한 예의 아닌가 싶었다. 투박하게 견인차에 실려 자동차가 점점 멀어졌다. 켜 놓은 비상등이 마치 내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듯 깜빡였다.     

안녕.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조간 신문을 점심 식사 하면서 보게되었다. <소금꽃 나무>의 저자이기도 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결국 크레인에 올랐다.  고 김주익 위원장이 올랐던 그 곳이다. 85호 크레인. 몸에 익은 용접공의 기억을 되살려 용의주도하게 자물쇠를 녹이고 그녀가 또 고공에 올랐다.    

한겨레 신문 "8년전 비극의 크레인 올라.." www.hani.co.kr/arti/society/area/457677.html 

김진숙 위원의 편지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

"세벽 세 시 고공 크레인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를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이미 고인이 된 정은임 아나운서가 김주익 위원장의 비보를 듣고 그날 방송의 오프닝에서 한 말이다. 반복되길 원하지 않지만 반복되는 비극이다.

 한진중공업은 부산 영도에 있다. 배를 만드는 곳이다. 며칠 전 나는 한진중공업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져 버렸다. 부산시청에 양해를 구해서 시청 광장에서 할 일이 하나 있었다. 3주전에 시청에 양해를 얻었다. 그리고 별 일 없이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전날 퇴근길에 한진중공업의 48시간 연좌집회가 그 곳에서 있다는 소식을 알게되었다. 경찰청에서 우리 쪽에서 하는 일을 모르고 집회 신고를 내준 것이다. 집회 허가는 경찰청 관할이니 시청 측 담당자가 그것까지 알 일은 없다. 공무원이라해도 서로 다른 성격의 기관이다 보니 이런 업무에서 연계될리 만무하다.  

 결국 우리가 먼저 잡은 장소였는데 민주노총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된 셈이다. 경찰청 담당자도 일이 그렇게 되었느냐며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민주노총에 몇 시간이라도 양해를 구해보라고 했다. 처음부터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모양새가 말이 안된다. 결국 내가 장소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민주노총도 거기서 뭔 일이 있는지 알수 없었고 나 역시 그랬고 시청도 그렇고 경찰청도 그렇다. 광장 사용에 대해 시청-경찰청 연계만 잘 되어 있었어도 문제가 없었겠지 말이다.  내가 땅을 치면서 억울해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나야 자리를 바꾸면 좀 업무적으로 수습해야할 일도 늘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400명이 실직할 판이다. 그에 따른 가족들까지 생각해보면 그 수는 더하다. 조금 더 가면 조선소 특성상 한진중공업은 하청업체가 많다. 하청업체의 연쇄적 도산과 그 가족들까지 생각하면...숫자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하여 나는 한진중공업때문에 피해를 본 축에 끼지만 조금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원망할 생각이 없다.   

 최소한 노동자들의 파업때문에 길이 좀 막혔다고-미리 알아보지 않는 자기 잘못은 생각치도 않고- 또는 밥 먹고 들어오는 길에 1인 시위하는 자들 때문에 몇 발짝 더 돌아가야 한다고  울컥거리는 인간 따위는 되지 않는다. 책 좀 편히 사려는데 시끄러워 심란하다고 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안다. 그런 인간들 많은거. 내 입장에서 그거 한마디로 규정해 줄까?  나쁜 족속들이 인간되기란 참으로 힘들다.딱 그거다.) 

지난해 이맘때 쯤 조지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이란 책이 나와서 책 좀 읽고,생각 좀 있다는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2010년 나온 '올해의 책' 같은 목록에도 들어 있었다. ) 조지 오웰의 책을 보며 진짜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시대의 위건부두 사람들은 어디있는가? 조지 오웰이 애정을 가지고 담아내려 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사람들'은 아껴지는데 이 시대의 '위건부두사람들'은 잘 눈에 안들어온다면 그게 바로 책이 만든 청맹과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속이지 마라. 자기를 속이지 않는것이 글을 읽는 첫걸음이다.   

모든 싸움에서 가장 큰 적은 외로움이다. 고 김주익 위원장도 그리고 또 김진숙 위원도 모두 싸움에 익숙해온 사람들이다. 나같은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절박하고 또 그 절박함이 만든 강인함으로 무장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단단한 그들도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외로움이란 적과 마주쳐야 한다. 이런 걸 알려야 하는 지역의 언론이라고 하는 것들은 400명의 생존권이 달린 문제는 외면하고 각급 기관장들을 초대해서 안면찍기에나 정신이 팔려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사실은 별로 없다. 대신 나는 외롭게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을 지지하고 한진중공업 노조의 투쟁을 지지한다. 단 1명의 몫만큼 더 친구가 되어주는게 자본과 언론에 고립되어 '무지몽매한 폭력주의자", "막무가내 노동자" 등으로 외로와져가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예의이며 작은 연대의 실천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년 빈 신년음악회가 오늘 저녁 KBS1FM <FM실황음악: 진행 정준호>로 방송된다고 한다. 저녁 먹거나 아니면 설거지 하면서 싱크대 위로 빈의 왈츠를 듣게 될 성 싶다.  

 올해 지휘자는 카라얀의 제자로 세계 무대에 등단해 맹활약 중인 프란츠 뵐저 뫼스트이다. 그는 두달 전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했었다. 뵐저 메스트는 오스트라이 출신으로 80년대 후반 공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서구 오케스트라계의 기린아로 주목받았다. 90년대에 런던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으로 있었으나 데뷔 초기의 총기를 인정 받진 못했다. 덕분에 한동안 그의 이름을 비꼰 Frankly worse than most (솔직히 대부분보다 못한) 으로 기억되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주목받게 된 곳은 대륙 건너 미국이었다. 국내에서 대중적 인기를 끌진 못했지만 탄탄한 내공을 선보였던 크리스토퍼 폰 도흐나니로부터 2002년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를 이어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10년 가을 빈슈타츠오퍼(빈국립오페라단)의 음악감독이 되었다.이어 2011년 빈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지휘자로 초대된 것이다. 빈 필하모닉 단원들이 빈슈타츠오퍼의 단원을 겸직하고 있기 때문에 지휘자로 프란츠 뵐저 뫼스트가 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인셈이다.  

빈필하모닉 신년음악회는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1940년 부터 시작되었으니 60년의 역사인 셈이다. 기본적으로는 이 콘서트는 세기말의 빈 '황금시대'를 염두해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함과 세기 말의 우울이 동시에 존재하는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거의 유럽발 지적 운동의 중심에는 빈이 있었다.즉 유럽 문화와 유행, 철학등의 대표 도시였던 셈이다. 비트겐슈타인, 프로이트, 말러,쇤베르크,클림트, 바우하우스 등등.. 

빈의 '황금시대'에 그 도시의 지배계급이었던 부르주아지들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던 음악은 말러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또는 쇤베르크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의 왈츠였다.  

1940년 빈 필하모닉이 신년음악회 레퍼토리로 요한 슈트라우스를 선택한 것은 지난 화려한 시절의 영광에 대한 추억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문율처럼 자리잡아서 여전히 신년음악회 레퍼토리에는 큰 변화가 없다. 8,90년대를 들어서면서 모차르트나 하이든 등이 부수적으로 연주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슈트라우스의 '왈츠'라는 '춤곡' 장르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구성된다. 

빈 필하모닉 신년음악회의 지휘자는 매년 클래식 호사가들의 관심사가 된다. 원래 지휘자 초빙의 원칙은 빈 출신이거나 빈과 깊은 관련을 맺은 지휘자들로 선정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개방되었다고 한다. 빈 신년음악회를 기획하고 최초로 지휘를 맡았던 사람은 클레멘스 클라우스였지만 가장 오랫동안 신년 음악회를 지휘한 사람은 빈 필하모닉의 악장으로 있었던 빌리 보스코프스키였다. 1955-1979년까지 빈신년음악회의 단골 지휘자였던 셈이다.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당연히 바이올린주자였기 때문에 그는 바이올린을 들고 지휘하기도 했다. 이런 전통을 그대로 이어 받은 사람은 로린 마젤이다. 1980년대부터 1986년까지 보스코프스키에 이어 빈 신년음악회의 포디움에 섰다. 90년대 이후로도 4번 신년음악회의 지휘를 맡는다.  로린 마젤은 지휘자가 되기 이전에 부터 바이올린 신동으로 불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신년음악회에서는 지휘자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도 들어볼 수 있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지휘자의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한다. 90년대 이후 빈 신년음악회 DVD에 가장 얼굴을 자주 보이는 사람은 리카르도 무티와 주빈 메타이다. 각각 4번씩 초대되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카를로스 클라이버,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등이 2번씩 지휘를 했다. 2002년에는 오자와 세이지가 동양인으로서는 처음 지휘를 맡았다. 라데츠키 왈츠에 앞서 빈 필 단원들이 세계 각국의 나랏말로 새해 인사를 하는 작은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단순한 인사이긴 하지만 빈-유럽 중심성에 일종의 작은 화두처럼 읽히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프랑스출신 조르주 프레스트가 지휘를 맡아 2008년 자신의 기록을 재갱신했다. 지휘계의 황제 카라얀은 1988년 딱 한번 빈 신년음악회를 맡았고 내년인 2012년은 지난 2006년에 지휘를 맡았던 마리아 얀손스에게로 낙점되어 있다.  

 

 

  

 

 

 

 

  

 

빈신년음악회는 음악 자체보다는 일종의 전통이 주는 상징효과가 더 큰 셈이다. 매년 신년 음악회 DVD가 나오지만 따지고 보면 대동소이하며 레퍼토리 역시 그렇다. 오히려 여전히 유럽이, 그리고 여전히 빈이 클래식음악의 중심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선언같은 것을 유희적으로 감싸 안은 것이 신년음악회라는 이벤트인셈이다. 빈 사람들은 이것을 일종의 '빈의 자존심'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게 좀 지루할 일 중 하나는 오프라인 매장에 갈 경우- 비록 스쳐보긴 하겠지만-한동안 프란츠 뵐저 메스트의 신년음악회 실황만 계속 봐야 한다는 것이다.  

 유투브에서 2010년 빈 신년음악회 (지휘:조르주 프레스트)를 가져다 왔다. 사실 이런 앵콜 곡에 지휘자가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냥 웃는거지.  

그냥 잘 차려 입고 빈 필의 반주에 맞추어 박수 한 번 치고 싶어하는 늙은 유럽인들에게 팬 서비스 한 번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뭔가 뿌듯함 한 번 주는 광대 짓. 차라리 노래방에 가서 지르시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브레히트는 그의 미완의 희곡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에서 이렇게 일갈한다. 

"부당함을 가르키고 있는 너희들의 손가락은 썩었다." 

'썩은 손가락'에 대한 가장 평이한 해석은 '개인의 도덕적 자질론'으로 돌리는 것이다. 즉 부정의를 행하는 너희들은 더욱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이런 '도덕 자질론'은 여러가지 형태로 변주된다. 쉬운 예로 '인간됨/사회적 실천'이라는 이항의 설정 방식같은 것으로 말이다. 나는 이 곳에서 매우 투사적인 발언을 하고, 또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토로하는 이들을 만났다. 그들 역시 가끔 마음을 풀어놓는 글에서 '인간됨/사회적 실천'이라는 이항대립의 의제에 자신의 심사를 토로하는 경우를 보아왔다. 거의 90% 이상은 전자, 즉 '인간됨'에 무게를 둔다. 이것은 매우 옳은 지적이지만 또한 진보를 매우 오랫동안 괘롭혀왔던 딜레마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의 보수는 이미 사회적 윤리같은 것은 포기한지 오래다. 그런 그들은 자기들이 버린 아들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진보세력을 매우 고까와 한다. 그래서 보수세력들은 그들의 상대를 '진정한 도덕집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자격지심을 만회하기 위한 공격의 과녁으로 '도덕'을 이용한다.  

실제로 해방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 그룹은 도덕이라는 측면을 투쟁의 무기로 사용해왔다. 그래서 '민주화세력=도덕적'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독재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기댈 곳이 없던 민주화세력은 옳음에 대한 대중적 동의를 '도덕'의 이름으로 확보했다. 87년이 끝나고 자칭 민주화세력들이 정치의 중심에 들어섰을 때 이제 그 '도덕'은 하나의 덧이 되어 쓰레기만도 못한 수구보수 세력에게 이용당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보고 컹컹 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좋은 예는 91년 외대 사건이다. 일명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사건이다.  이 사건의 개요는 간단하다. 91년 봄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해 4월 명지대 강경대 학우의 사망사건으로 부터 시작된 '분신정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해 6월 정원식은 노태우 내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학원 강의를 하기 위해 외대를 방문한다. 신문,방송 기자들을 대동하고 말이다. 그 때 외대의 운동세력이 군부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정원식 총리 서리에게 계란과 밀가루 투척을 했다. 다음 날 신문 1면은 밀가루를 허옇게 뒤집어 쓰고 계란으로 떡칠된 그가 소동을 피해 쫓기듯 길을 뚫는 사진이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1991.6.4 <동아일보1면>

  

또하나의 6월 항쟁이라던 91년 봄 투쟁을 한 방에 날려 버린 사건이었다. 안 그래도 대학마다 하계방학에 들어가는 시점이고 어떻게 91년의 열기를 이어갈까 고민하는 세력에게는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내 기억에 외대 총학생회는 이 사건으로 운동권 내부에서도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 사건은  6월 말 있었던 내 전공수업의 시험 주제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신문은 '운동권의 비윤리성'을 한목소리로 드높였다. 흔히 '선생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사제관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학생들은 교사 정원식이 아니라 정치인 정원식에 대한 비판이라는 이성적인 대답을 내놓았지만 여론은 쫓겨가는 방송국ENG 카메라의 영상과 스틸사진의 이미지에 압도당했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언론은 기획기사와 논설등은 악의적 방식까지 동원해서 운동세력의 윤리성을 깨부수는데 달려들었다. 

그런데 외신보도는 이 문제에 대해 좀 다른 시각을 보였다. 그들에게는 유교적 의미의 '그림자도 피해가는' 스승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어젠더를 '스승과 제자'로 설정할 수 있는 틀이 없었고 왜 그래야하는지 이해가 되지도 않았다. 학생들의 투쟁 수단 역시 그렇게 과격한 것도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계란투척이나 밀가루 투척은 매우 일반적인 정치항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정치인들이 계란맞고 도망가는 사진은 국제란에서도 쉽사리 볼 수 있다.) 한국 주재 외신 기자들은 대한민국 언론이 난리를 피우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그 원인과 이유를 말했다. 

   내게 '도덕'과 '정치'라는 매우 미묘한 문제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 건 아마 저 사건일게다. 나는 '도덕정치'의 위험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게된셈이다. 그래서 '정치=도덕이다' 라는 식의 논리가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매우 위험한, 그리하여 문자 그래도 수용되어서는 곤란한 명제라는 것을 알게된 셈이다.  

학생운동권세력을 포함해서  민주화세력 등에 대한 윤리적 기대가 높았던 국민들은 정치권에 유입되면서 하나 둘 수의를 입는 민주화 세력의 일부 엘리트들을 보면서 결국 정치적 냉소주의에 빠진다. 정치=도덕으로 보았기 때문에, 도덕의 실패는 정치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치의 실패가 이어진 자리에는 냉소가 자라난다. " 그 놈이나 그 놈이나 똑같다."  (노무현 사후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런 도덕의 실패의 역에 해당한다는 생각이다. 노무현의 도덕성은 어느 정치인보다 뛰어났다. 그의 자살은 그런 면에서 도덕성의 표상이다. 그런데 그의 비극적 죽음 이후 같은 논리가 작동한다. 그의 정치적 실패는 도덕성의 이름으로 가려졌다. 생존에 노무현을 놈현이라고 평가하던 이들이 갑자기 '당신의 뜻을 오해했습니다'라며 사과문을 쓰더니 노무현! 노무현! 이렇게 된다.정치=도덕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된 다른 예가 된다.)  

도덕정치의 현실적 모습을 바라본 사람들은 이제 사회윤리적 차원의 높은 수준을 생각하기 보단-어차피 그 놈이 그 놈인데- 실제 자본주의적 풍요를 조금 더 누리기 위한 몰역사화된 경제적 동물로 주체화한다. 특히 97년 IMF 라는 초유의 사건은 성장 일변도의 한국경제에 일침을 가하며 '한방에 무너질 수 있는' 공포감을 조성한다. 연일 미디어를 통해 등장하는 노숙자와 도산 사업가의 자살 소식은 정신줄 놓으면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제 생존을 위한 변화와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이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87년 투쟁이 만든 시민들의 연대의식은 이제 쓸쓸한 자화상이 되었고 개인들은 '아침형 인간'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재탄생하기 위해 누구보다 착실한 자본주의의 시종이 되었다.  

오로지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파괴된 정치와 실용화된 도덕일 뿐이다.정치는 불구가 되었고 도덕은 오욕을 뒤집어 쓸 지언정 어떤 이름으로든 살아남았다.  

엄기호는 그의 책<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민주주의가 정치적 언어에서 한쪽에서는 냉소주의로 다른 한쪽에서는 속물들의 윤리적 언어로 전화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우리는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절대적 가치로 고정해놓고 도덕적으로 사용하다가 정치가 도덕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도덕'을 전면에 내세운 보수주의자들에게 역습을 당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대학생들의 탈정치화가 아니라 우리가 일조한 정치의 도덕화가 문제이다.' 

 우리사회에 과잉화된 '도덕 담론' 속에서  나는 '정치'와 '도덕'의 화용론적 결합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되물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정치인가?' 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내 답은 부정적이다. 근대 정치학에서 마키아벨르의 업적은 그가 '정치'를 '도덕'의 영역과 분리시키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를 신학정치에서 세속정치로 바꾼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신학정치의 영역과 세속정치의 영역 속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는 있지만 최소한 막연한 본질적 대상으로서의 도덕으로는 포퓰리즘과 그의 짝패(전체주의) 이외에는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내게 도덕적 유토피아는 가능성으로서의 유토피아일 뿐 큰 매력을 주지 못한다. 현대정치철학자들이 가능성이 없어진 시대에 그 '가능성을 창조하기' 찾기 위해 애쓰는 이유는 충분히 이해하고 일정 부분 공감도 하지만 말이다.  

밀레니엄의 10분의 1을 달려온 한국 사회. 나는 아직 이 땅에 정치적 역동성이 한 조각쯤은 남아 있다는-있을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물론 이것도 야금야금 그 동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5년 또는 10년 사이에 어떤 전환적 출구를 만들고 시스템화하지 못한다면  퇴행적 순응으로 안착될 가능성은 매우 농후하다.(이 말이 민주당식의 대통합론 수준을 의미하진 않는다.그들은 전환적 출구를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정치사회의 역동성은 제로수준으로 가라앉는 식으로 말이다. 이미 사회 곳곳에서는 그런 징후들이 징후의단계를 넘어서 조건들로 자리잡고 있다. 

  97년 이후 시대의 흐름에 맞게 철저하게 개인화된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태어난 이 시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정치라는 것 역시 개인적 차원으로만 이해한다. 투표를 한다거나 정책 결정에 대해 툭툭 한번씩 말대꾸하는 정도로 말이다. 정치는 개인과 집단, 또는 집단과 집단의 관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집단의 것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정치적 행위는 그것 자체로서 매우 의미있는 행동일 수는 있으나 그것은 정치를 위한 필요조건 밖에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런 사람들은 본다.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여기저기 시끄럽게 하는 것은 남보기 우사스럽기 때문에 조용히 나 혼자 하면 된다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개인적 윤리로서는  이것을 꼭 나쁘게 보지만은 않지만 이것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다.  그러면 아마 이런 질문이 있을거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 '정치'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핵심은 거기에있다. '모이게 하는 것'. 혼자 조용히 삼성에 불매하는 것은 아직까진 정치적 행위의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지 못한다. '모이게 하는 것' 이라는 참여와 연대의 영역이 누락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러한 집단화 과정에 참여하는 실천에 있는 것이다. 물론 너무 낯을 가리고 말도 못하고 쑥스러워서 남들과 하기 힘든 사람들도 있을게다. 그런 사람들에게 '참여'란 뭔가 껄끄러운 말이다. 그래서 '그냥 조용히 하면 안되냐?' 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나도 그럴 때가 많다.  모든 경우에 해당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럴 때 나름대로의 해법을 '선언'이라는 차원에서 찾는다.  그래서 '조용히... 선언하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조용히...실천하는 것'  알랭 바디우식으로 말하자면 이'선언'이 '정치'로 가는 첫길이다. 그냥 시끄럽게 떠드는 인간들은 다 말뿐인 존재들이라고 생각하고 혼자 묵묵히 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혼자 묵묵히 하는 것의 가장 본원적인 짓은 마스터베이션임도 알것이다- '선언'이라는 것은 그와 분명히 차원이 다른, 가장 작지만 또 가장 큰 걸음이 될 수 있다. 혼자서 조용히 '나는 삼성 안사...그걸 실철할거야' 이런 것은 앞서 말한바와 같이 아무런 효력도 없는 분출일 뿐이다. '나는 삼성의 물건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훨씬 정치적이며 자기 구속력도 강하다. 그리고 항상성의 측면에서도 그 유통기한이 길다.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며 다시 정치에 대해 생각한다. 정치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그 복원을 위해서라도 '정치는 모든 것이다' 라고 말해야 할 듯 하다.  

...부산에도 눈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J 인디영화 콜렉션 Vol.1 박스세트 : 피터팬의 공식+거북이도 난다+보이지 않는 물결 (3disc 디지팩)
바흐만 고바디 외 감독, 소란 에브라힘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페이퍼로 쓴 글을 이 쪽으로 옮겨놓는다 

TV로 폭격 동영상을 보면서 아내에게 농담처럼 전화를 했다. "TV 켜봐. 난리도 아니다. 쌀이나 라면 사놔야 되는거 아닌가? ^^"  - 아직 쌀이나 라면을 사놓치는 않았다. 
 결국 한반도 영구평화체제가 만들어지거나 한쪽이 완전 박살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은 과거 그랫던 것 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될지 모른다. 그런데 '한쪽이 완전 박살나는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하는 방식이다. 전쟁을 WAR, 대문자로 파악하는 자들은 '박살' 사이에 숨겨진 비극에 대해 모른 척 한다. 뭔 일만 터지면 금새 장농에 모셔둔 과거의 제복을 입고 '전쟁하자'고 들끓고 일어나는 무도한 모험주의자들에 대해서는 '정신 차리시오' 라는 말 이외에 달리 더할 말이 없다. 항문기때 미해결된 욕구의 문제라면,그대들 인생의 '화양연화'였던 군대 시절의 기억을 다시 재연하고 싶다면, 몇 만원 들고 서바이벌장으로 가라. 인생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 정체성이 멈춰진 시간이 군대시절이었다면 그 인생에 대해서는 '못났다'는 말대신에 '안타깝다'는 말을 해주는게 나을성 싶다.  

최근에 바흐만 고바디 감독의 영화<거북이도 난다>를 봤다. 이 영화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개봉했을 때 특이한 제목때문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대개 그랬듯이- 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제가 벌어지는 근처에 있으면서도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최근에 알라딘에 올라온 '파고닥세운님'의 <거북이도 난다>라는 페이퍼는 기억의 항아리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이 영화를 다시 생각나게 했다. 영어로 하면 '리마인드'다. (감사를..)  현재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불법 다운로드와 DVD  CJ인디영화시리즈를 통하는 길이다. 나는 DVD를 대여하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봤다. 영화관 갈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작은 컴퓨터 모니터나 그것보다 조금 더 큰 TV 화면으로 보게 되어 늘 안타깝긴 하다.   

영화 <거북이도 난다>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을 겪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말한다. 사람들은 근거없는 착각을 통해 '우리는 전쟁을 한다' 라고 믿는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전쟁을 겪을 뿐이다.'   

 

영화 줄거리는 쓰기 귀찮다. 포털의 영화 소개로 글로 대신한다. 

 <이라크 국경지역의 쿠르디스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문에 사담 후세인의 핍박을 피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들 중에는 어린이답지 않은 리더십과 조숙함으로 또래 아이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위성"이라는 소년과 전쟁 속에서 팔을 잃은 소년 "헹고"가 있다. "위성"은 "헹고"의 여동생인 "아그린"을 보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지나, 그녀는 전쟁 중 받은 상처로 늘 악몽에 시달리며 괴로워한다.

  전쟁이 임박한 가운데 "위성"은 지뢰를 내다팔고 무기를 사두는 등,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나가면서 "아그린"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아그린은 그런 "위성"과 자기를 아껴주는 오빠 "헹고", 그리고 불쌍한 아들인 "리가"가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 중 군인들에게 겁탈당하고 아이까지 낳은 악몽 때문에 늘 자살을 생각하는데.> -네이버 영화소개-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감독의 '슬픔에 대한 예의'이다. 이 영화는 대단히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여느 멜로드라마들처럼 눈물이 잔에 흘러넘치게 만들지는 않는다. 분노로 치아를 상하게 하지도 않는다. 영화를 보며 잘 우는 나도 고인 눈물을 천장 한 번 바라 보고 말릴 수 있었다. 만약 이 영화가 헐리우드적 방식으로 '잘 만들어졌다' 면 이 영화는 극장 바닥을 온통 적셔서 모두들 영화관을 나서며 젓은 신발의 문제를 해결하느라 영화의 감흥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감독은 이 아이들을 멜로드라마나 단순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렇게함으로써 이 영화가 담고 있는,또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바를  영화관객들의 자족적인 몇 천원의 문화적 소비로 끝내게 하지 않는다. 고바디 감독은 극도로 눈물을 자아내거나 또 치마를 부여잡으며 분노케할몇 몇 장면을 대단히 빠르게 처리한다. 예를 들어 슬픈 아기 '리가'의 마지막 장면 같은 것 말이다. 감정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장면은 거의 없다.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상처처럼 그렇게 필름은 스윽하고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 관객의 가슴을 밴다. 여기서 감정을 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사치이고 그것은 이들의 비극을 왜곡하는 것이라는 식의 태도다. 감독은 거리두기를 통해 슬픔에 대해, 비극에 대해, 현실에 대해 깊은 예의를 보낸다.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부분은 바로 그 지점이다. 비극의 겪는 이들에 대한 예의를 통해 슬픔을 가볍게 하지 않는 방식말이다.  

 

그 결과 영화를 보면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지는 않지만 잠자려고 누운 어둠 위에는 영화 속 어떤 장면의 적막함들과 비통함들이 다시 재상영된다. 

 거북이. 물소리. 지뢰. 아이들. 파란 하늘과 절벽. 아그린의 보랏빛 고무신. 팔이 없는 헹고의 절규. 위성의 공포에 젖은 안경. 붉은 물고기... 

거북이가 날 수 있을까...그렇다. 우리가 평화롭다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