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별 뇌구조라는데 웃길려고 한 번 올려본다. 난 B형이다. 이런 유사과학을 믿지도, 신뢰하지도 않는다. 헉...그런데 조금 맞다. ㅜㅜ 그런데 다른 혈액형들 둘러 보면 다 맞다.ㅋㅋ 그래서 이런게 사이비 과학이다. 하지만 '길에서 마주친 여학생'은 매우 맞는것 같다.호호호 Have you ever really loved  woman? 

 

 영화<설국열차>에 대한 평가에 호불이 갈린다. 텍스트가 다양한 해석의 갈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 의미의 다층성으로 인해서도 즐거운 일이다.  예를 들어, 봉준호가 과거에 비해 디테일과 인과관계를 소홀히 했다는 비평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아마 헐리우드에서 제작했다면, 헐리우드의 제작자의 지시를 받아가며 제작했다면, 당의정에 쌓여서 먹기 좋은 알약을 만들었을 것이다. 매끄럽고, 소화시키기에는 훨씬 그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설국열차>는 봉준호가 작정하고 자기 마음대로 만든 유기농(? ^^ )의 거친 SF영화다. 봉준호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 해먹어 보겠냐는 듯, 밭에서 무를 쑤욱하고 뽑으며 씨-익하고 웃는 듯 하다. 제1 투자자인 CJ 역시 작품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은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CJ는 투자와 배급문제에는 -국내 흥행 성공은 사실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CJ가 가지고 있는 배급망을 생각하면 문제될 것도 없었다. 물론 비즈니스는 냉정하기 때문에 장사가 되는 작품이 필요조건으로 구비되어야 한다.

 

여러가지 평가와 논평이 가능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듣기 불편한 단어가 이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의 입에서 몇 차례에 걸쳐 들려온다. 그 단어는 '세뇌'다.

 

위대한 '세뇌'의 생존력은 반공의 시대가 끝나도 무의식 속에 기생하고 있다. '세뇌'라는 단어는 아마 '이데올로기'에 대한 한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해방 정국부터 시작된 말일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쉽게 말해, 좌익병, 빨갱이병이다. 즉 멀쩡해 보이던 삼촌이, 순종적이고 착한 딸이 어느 날 '세뇌'되어, 좌익활동을 한다. 7,80년대 영화나 드라마들은 이런 걸 강화한다. 80년대에는 '의식화교욕','좌경화교육'이라고, 뭔가 민주정의적인 표현법을 만들어 내었다. 그래 봐야, 오렌지나 어린지나 같은 말이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의리도, 주체성도 없이 '세뇌' 당한 것이다.

 

SF영화의 전통 속에서는 기계를 통한, 인간 개조 프로그램이 이루어진다.( 최근의 트렌드는 유전자조작이나 복제인간이다.) 클래식한 예를 들자면, <1984>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 세뇌된 인간들은  '애비,에미도 없다.'  천륜을 끊을 만큼 세뇌는 무시 무시한 것이다. 각종 형태의 삐라가 만들어내는 상상은 그런 것이다. 빨갱이들이 어떤 사상을 주입하여-때로는 의자에 붙들어 앉혀, 고문이라는 방식으로- 인간을 바꾼다는 것. 대단한 공포다. 나의 주체성이 사라진다는 것, 내가 피붙이 조차 외면할 만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 내가 나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완전히 알 수 없는 이가 된다 것. 이것만큼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또 어디있겠는가? 한창 SF 재난영화에서 몸값 올리고 있는 좀비가 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애비 애미도 못알아 보고 물어 뜯는 좀비말이다.

 

영화<설국열차>를 본 사람들이 종종하는 세뇌의 구체적 시퀀스들이 있다. 학교에서의 윌포드를 찬양하는 장면, 하층계급 앞에서 '각자 자리를 지키라'는 오래된 격언같은 장면들이다. 사실 이것을 세뇌라고 읽어 주는 것만으도 이데올로기의 틈새를 보여준다. 물론 이것을 당신들의 일, 타자의 일, 영화 속의 일이라고 생각을 멈추는데 조금 문제가 있을 뿐이다. 이 생각을 조금 더 발전 시켜 보면 이런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말의 한국적 뒤틀림은 그렇다 치자. 그 '세뇌'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배제를 문제시 해야한다.

 

세뇌는 대단히 배타적 단어이다. 발화의 위치를 단 한번 만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한 쪽의 언덕에서서 외치는 고함인지 알 수 있다. 그 언덕에서 세상은 세뇌 당한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은 스스로를 '세뇌 당하지 않는자'의 언덕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이 바닥도 비슷할 것이라는 조금은 객관적 생각까지 미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그것들을 이해하는 세뇌당하지 않은자다. 그들은 세뇌당한 것이고, 나는 세뇌를 관찰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세뇌를 당당히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뇌는 영화 속에서 만나는 팀버튼식의 알록달록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나 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자유주의적 가치관의 가장 근본적 결함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작동한다면,(작동한다. 인류 역사에 작동하지 않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앞으로도 작동한다.) 이렇게 자기는 이데올로기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 지점이 가장 이데올로기가 제대로,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런 의미라면, 세상은 모두 세뇌당하는 사람들의 공간이다.  

 

 아감벤은 푸코의 '장치'개념을 확대하여, '인류의 역사는 장치의 역사다.'라는 말을 한다. 그 장치라는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인간의 역사, 문화, 생활, 옷차림, 말하는 방식, 화장실에서 응가를 처리하는 방식 까지 구획하고 통치하는 기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게 내 생각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인문,사회,미학은 이데올로기의 전체 지형도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일격을 먹이는 무엇이다. 그 지형도는 '세뇌'라는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결국 문제는  이데올로기 전체(전체는 형식,내용,효과 등등을 모두 포한하는 전체다.)대한 이해다. 그것은 세계를 아는 방식이고, 또 세계를 뚫는 방식이다. 영화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 세밀한 장치들의 효과들을 충분히 개진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를 건드릴 수 있는 상업 영화는 드물었고, 앞으로도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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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설국열차>에 대한 스포일있습니다. 리뷰는 아닙니다. 아내랑 나눈 대화를 거의 가감없이 정리한 형식. 영화적 사실 관계가 다를 수 도 있지만, 남의 부부 대화 엿듣는 느낌으로 보시면 됩니다. ㅋㅋㅋ

 

 

 

 영화<설국열차>를 휴가 마지막 날 밤 9시 넘어 봤다.  늦은 밤이었으나 극장은 만석이었다. 천만 관객 돌파는 최소 3주 이상이 걸리는 일이어서 초반 흥행 성곡이 천만 벽을 단언해 주진 않는다. 물론 천만이 무슨 염라대왕의 살생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올 상반기 최대 히트작이었던 <아이언맨3>과 비교해 본다면 초반 스타트는 <아이언맨3> 그 이상이 아닐까 싶다. 향후 방향은 좀 다를 수 있는데, <아이언맨>은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인데 반해, <설국열차>는 조금 색깔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관객 평들이 이후 영화 흥행 성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설국열차> 입장에서 다행이라는 것은, 최소한 <아이언맨3>은 두번 볼 마음이 없는 나같은 관객이 <설국열차>는 두 번 볼 계획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영화 흥행에는 도움이 되질 않겠나. 그래봐야 손바닥으로 바닷물 퍼담는 것정도 겠지만.

 

<설국열차>를 먼저 보고 온 것은 아내였다. 휴가 기간 중 둘째가 아파서 함께 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래서 여행 돌아온 후로는 개인적으로 룰루랄라 거릴 수 있는 시간은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둘은 내 몫이었다.

 

오늘 낮에 아내가 회사 근처에 왔다. 요즘 시험 준비하는게 있어서 공부하다가 햄버거 하나 사가지고 위로방문하라기에 들렀다. 아내가 영화<설국열차>에 대해 물었다. 아내와의 대화를 통해 영화 보는 동안 스쳤던  생각 몇 개를 이야기했다.(긴 리뷰는 쓰지 않을 것 같다. 영화 <설국열차>는 내게 약간의 분석적 작업을 요하는 텍스트가 될 것이라서)

 

아내)영화 어땟어?

나) 음..나쁘지 않았어. 한국 SF영화의 정치적 아이디어를 일정 수준 높인 것 같아.

 

아내) 마지막에 북극곰, 이상하지 않았어.

나) 그렇지. 그런데 왜 봉준호가 북극곰을 롱샷으로 제시하지 않고 돌아보는 미디움 샷을 넣었는지 생각해봐야해. 내가 보기에 그건 봉준호가 웃기려는 거야. 그냥 이제 힘 빼라고 넣어주는 농담같은 것. 사실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으로서의 상징이라면 산기슭을 올라가는 곰샷이면 충분했다구. 근데 굳이 미디움 샷을 넣었단 말이지. 내가 보기에...그런거 있잖아...우리가 뭐 한참 진지하게 말하다가...이야기 끝낼 쯤 되면....그러니까 말이 그렇단 거지요 뭐! ㅎㅎ 아니면 말구요..하는 식으로 어깨를 가볍게 하는 화법을 쓰잖아. 그런거야. 곰이 왜 나왔는지, 곰이 식인곰인지 아닌지 뭐 이런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구. 중요한 과정은 그 전에 모두 끝났잖아.

 

아내)그런가? 하긴 언젠가 TV에서 신성우가 왜 뮤지컬 배우들이 공연 끝나고 나면 커튼콜 할 때 우스꽝스런 포즈를 취하는지 이야기 한 적이 있었거든. 그게 관객들에게 '이제 연극은 끝났어요. 각자 자기의 현실로 돌아가세요.'라고 빠져 나오는 시간을 주는 거라데.

나) 음. 좋은 비유같네. 봉준호도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여간 곰이 북극곰인지, 시베리아 곰인지 그거 별로 중요한거 아닌거고, 그게 현실적이네 아니네도 전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는 거지. 웃기려고 한거야 봉준호가...ㅎㅎㅎ

 

아내)자긴 어떤 점이 좋았는데?

나) 일단 몇 가지 패러디들이 귀여웠어. 예를 들자면 <올드보이>의 장도리씬 있지. 봉준호가 기차에서 하데. 물론 귀여운 오마주인데, 생각해보면 장도리씬의 공간과 기차의 공간이 비슷한 부분이 있어. 앞으로 가아가야 하는 절박함. 뒤는 죽음이지.ㅎㅎ 그 기차의 현자있잖아. 그 사람이 팔을 내주었더니, 나중에 다른 기차 안 사람들도 팔을 내었다는 대사 같은 거 있지. 그거 기독교의 산상수훈에서 '오병이어'에 대한 공동체적 해석과 유사해. 어떻게 그 작은 음식으로 모든 사람을 먹였겠어. 예수가 솔선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은거야. 그러니까 저마다 하나 씩 나중에 먹으려고 숨겨놓았던 것을 내놓게 되었고 결국 무리 전체가 떡과 물고기로 먹을 수 있었지. 성경은 그걸 상징적으로 '오병이어'로 먹었다고 말하는건데,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리고 커티스 반란팀의 첫번째 위기. 진짜 조마조마 하던데, 적외선 살육씬 있잖아. 거기서 성냥으로 횃불로 대응하잖아.

 

아내)그래.아이가 성냥을 켜지

나) 그래, 그리고 어른들에게로 이어져. 그 장면 보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랑 거의 유사해. 그리고 마지막에 아이들만 남지. 영화적으로는 그 촛불을 건넨 아이와 마지막에 살아남은 아이가 같은 아이라구..

 

아내) 영화적으로는 그렇겠네. 영화 <괴물>의 끝보다는 낙관적이긴 하지.

나) 그게 봉준호가 가진 현재의 정치적 포지셔닝인 것 같아. 기본적으로 봉준호는 현세대를 믿지 않아. 즉 우리와 봉준호를 포함하는 모든 기성세대 말이지. 거기에는 별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 같아. 사실 나도 좀 그래서, 봉준호를 끌어들이려는 것 같기도 한데.ㅋㅋㅋ 하지만 아이들은 좀 다르지. 최소한 그 아이들은 두 개의 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론 그아이들도 늘 희망이 될 수는 없어. 단지 아직 카드를 펴지 않았으니, 우리보다 낫잖아.

 

아내) 그래, 우리 아이들 잘키워야겠어

나) 어제 예찬이에게 화를 세번 내었는데, 마지막에는 예찬이가 나를 바라 보던 표정이 ...하 뭐라고 해야할까. 좀 서글퍼보이기도 하고 하여간 맘에 남아.

아내) 그래, 자기는 바깥에 나가서 남들에게 뭔 피해주는 일 하면 너무 곧바로 화를 내더라.

나) 좀 그래.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는 건..좀. 하여간 그래도 예찬이에게 잘해야 하는데...

 

어쨋거나, 봉준호가 보기에 새로운 세상에 어른들은 들어갈 수 없어. 아니 들어가서도 안돼. 그만큼 기성의 것에 부정적이지. 물론 기성세대들도 할 일은 있어. 그 아이들을 폭발로 부터 지키는 것. 거기까지가 끝이야. 이거 구약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여호수와 관계 같은 거 잖아.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유대인을 이끌고 고생 고생하며 도망쳐 나오긴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을 밟을 영광을 주지 않지. 모세의 역할은 가나안이 보이는 그곳까지야. 그리고 여호수아가 결국 입성해.

영화에서도 봐바... 마지막에 살아 남은 아이들...그 아이들은 흙을 밟아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라구. 걔네들 모두 기차에서 태어났잖아. 고아성이 영화 마지막에 밟는 눈길은 ...마치 우주비행사 암스트롱이 달에 내려서 작은 발걸음이나 인류를 위한 거대한 발자취다...뭐 이랬던 거랑 비슷하다구. 즉 그 아이들에게 그 땅은 완전히 새로운 가치이고 새로운 땅이야. 그들이 거기서 다시 시작한다구. 그런 의미에서 어른들은 모두 사라져야해. 봉준호는 그런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공식을 따르고 있어. 나는 영화가 절망으로 끝난 것은 아니라고 봐. 즉 아까 말했던 것을 연결시키면 횃불을 이어 받은 새로운 희망이구 인류니까.

 

아내)그런데 결국 커티스는 다 속은 건가?

나) 글쎄. 거기는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 같아. 봉준호는 앞뒤 인과관계를 잘 맞추려는 노력을 많이 하거든. 봉준호의 디테일이란게 결국은 거기서 나오는 거겠지. 길리엄이 그러잖아. 앞칸에 가면 윌포드의 이야기에 속지마라. 혀를 뽑으라 그러나...하여간...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윌포드의 말을 100% 수용할 수는 없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커티스는 윌포드가 말한 상황을 이해한 것 같아. 사실 대단히 설득력있거든. 아마 그랬을 거야...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발생하는데...성냥 달라는 고아성을 첨에는 뿌리치는데 커티스가 다시 재정신 돌아오는 계기가 대단히 휴머니즘적인 사건에 의해서야. 뭐랄까...혁명에서의 이론과 신념같은 것 중요하겠지만 어떤 결정적 사건을 만드는 힘은 그게 아닌 것일 수도 있지. 봉준호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아내) 자기는 어떤 장면이 좋았어.

나) 글쎄.윌포드와의 대화도 좋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정치적 색깔을 드리운건, 송강호와 커티스가 문앞에서 나눈 대화야. 커티스가 문을 열라고 하지. 그런데 송강호가 그래 나도 열구 싶다구...그 문 말고...기차 바깥문 말이야라고 하지

아내) 그래, 그 장면 좋더라.

나) 사실 좌파 정치에서 아직까지 논쟁하고 재논쟁하는 그런 주제이기도 해.  커티스의 반응이 흥미롭지. 커티스 역시 '바깥에 나가면 죽어'를 반복한다구. 커티스는 보면, 일종의 레닌처럼 비쳐지거든. 거기서 그가 레닌의 제스처를 끝까지 취하진 못하는구나 싶기도 하고...하여간 반란군의 리더 역시 학교의 학생들에게 주입된 것같은 담론을 의심없이 받아 들이고 있다구. 아랫칸에서도 그런 담론의 유포는 계속되지. 아랫칸 사람들 역시 현재의 물질적 상황과 인정투쟁 욕구는 강했지만 그 체제 외부를 생각하지는 않는다구. 즉 바깥의 사유를 염두해 두지 못하는 거야. 니체나 들뢰즈등에 영향을 받은거겠지만... 소수자운동 등등 뭐 한방에 무슨 전복을 꿈꾸는 그런거 말고, 체제의 움직임에 자체에 제동을 거는 다양한 운동들이 그런 사유에 기대어있어. 그렇게 바깥의 사유를 염두해 두지 못하면 결국 윌포드의 제안, 내 대신 이 자리를 대신해서 기차를 유지해주게 라는 요청에 허걱하게 된다는거지...혁명이라는게 그렇게 권좌만 바꾸는 건가? 물론 그런 의미도 크겠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쉽게 말해 못가진 자들의 질투, 욕심 정도로, 너희가 돼도 다 똑같다라는 정도로 머물 수 밖에 없는거거든.  다행히 커티스에겐 아직 윤리적 선택의 길이 있었지만. 근데 실제로 우리 노조나 그외 기타 정치조직이나 보면 실제 여기서 대입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

 

아내) 자기 이야기들으니까...뭐 그런 것 같기도 하네.

나) 몰라 나도. 그냥 영화 보면서 그 정도 생각했구. 다시 한 번 봐야돼. 이거 원래 만화가 있었잖아. 2008년에 봤거든. 집에 가면 책 있어. 어제 영화 보고 와서 잠시 화장실에서 넘겨봤거든 만화에서는 기차가 순환하고, 앞 칸 뒤 칸 구분이 있고, 뭐 그 정도 설정만 빌려왔어. 뒤에 이야기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구. 봉준호보다 훨씬 디스토피아적이지. 만화 속에서는 실제 열차가 1001량이나 돼. 그리고 2부인가 하여간 그 설국 열차가 또 있어서 충돌이 예상된다는 상황도 나오고...스윽 봐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 영화는 아무래도 캐릭터나 스토리를 좀 더 단순화하고 집중화 시켰야했겠지. 하여간 만화랑은 완전 달라.

 

아내) 그렇구나. 자기 이제 들어가봐야지.

나) 어...공부 열심히 하고. ㅎㅎ 공부하는거 보니 귀엽네.ㅋㅋㅋ 저녁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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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6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06 15:51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네요.ㅎㅎ 텍스트에서 저자가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으니 훨씬 다채롭게 상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 관심은 정치철학이나 이데올로기론 같은 것들이기 때문에 그 부분이 더 눈에 들어온 셈이구요. 실제 한국 SF영화에서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는 거의 없었습니다. 외국의 경우, SF의 역사와 저변이 영화 소재에 충분한 공급처가 되어 주고 있습니다만, 한국은 이제 슬슬 시작인 셈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SF영화에 있어서 제작 과정에서 부터 텍스트성까지 어떤 변곡점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겠지요.ㅎㅎ)

맥거핀 2013-08-06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데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아서 아무래도 킵해두어야겠군요. 나중에 보고와서 꼭 읽겠습니다. 설국열차에 꼬리칸이라도 탑승하기가 쉽지 않군요.^^

드팀전 2013-08-07 11:40   좋아요 0 | URL
ㅎㅎ 뭐 그냥 스치는 생각 정도 였는데요. 맥거핀 님의 영화 리뷰도 틈틈이 잘 보고 있습니다. 만화에서는 꼬리칸 탑승의 용도가 명확하게 그려져 있긴 합니다. 그냥 예뻐서 태운 것이 아니라는 것. 일요일 밤9시30분 영화를 봤는데, 극장에 자리가 2-3개 밖에 안 비었더군요. 혼자간지라 커플 사이의 이빠진 자리에서 봤습니다. 그렇게라도 보시면.ㅎㅎ

맥거핀 2013-08-1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생각보다는 조금 더 어두운 결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들로부터 시작된 인류는 또 무엇인가를 반복할텐데, 그것은 열차 안에서의 (혁명과 조절이라는) 반복의 또다른 버전에 가까울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저는 마지막의 곰돌이가 유머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조금 더 냉소적인 걸로 느껴졌습니다.^^; 뭐 근데 아무튼 봉준호의 영화들이 그러했듯 여러 겹의 텍스트를 담고 있는 영화라서 확실히 여러 다양한 얘기들이 많이 나올 영화겠구나 싶기는 했습니다.

아..근데 만화에서 얘기하는 꼬리칸 탑승의 이유는 뭔가요? 물론 윌포드님의 자비는 아닐 것이고..역시 조절과 균형과 관계된 것인가요?

암튼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드팀전 2013-08-19 09:01   좋아요 0 | URL
네.ㅎㅎ 희망을 이야기하지만-상대적으로 괴물에 비해 조금 더 희망적인 것일 뿐이라고 보입니다. 시작과 반복을 말씀 하셨는데...그것 때문인 듯 합니다. 이런게 보이던데요....남궁민수의 딸 요나가 무기를 드는 장면 한 번은 기차 중간에서 아빠를 돕기 위해 칼을...그리고 엔진 칸 앞에서 총을 들지요. 첫 번째 칼을 들었을 때, 남궁민수가 '안돼'라고 크게 저지합니다. 그리고 엔진 칸 앞에서 총을 들 때도 남궁민수는 '그만'을 외치지요...그 때 요나의 반응이...(첫 번째 볼 때 지나쳤던 장면이었습니다.)...요나는 '싫어'라고 하며 방아쇠를 당깁니다.

신학적으로 보자면 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인 셈이구 인류학적으로 봐도 인류는 '희생제의'를 통해 -희생 제의의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않아야 상징질서에 기입될 수 있었던 - 원초적 살해를 자행했던 사람들의 후예이지요. 유전학적으로도 그렇다더군요. 현생 인류는 모든 살아남은 것들의 자손인셈이지요.

결국 봉준호가 요나를 세상에 다시 내려 보내는 희망에는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인류 역시 '카인의 후예'가 되어버리는 반복으로 돌아가는 걸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희망은 희망이지만 회색빛 희망.

대신 전 알랭 바디우가 말한 희망의 의미를 통해 조금 위로를 받아 봅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주체적 차원은 극복된 시련이지, 우리가 그것의 이름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어떤 것이 아니다. 희망은 시련을 이겨내는 충실성이다.... 희망은 결국 보상되는 이상적 정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시련을 통해 진리에 대한 인내를 동반하는 것 또는 사랑의 실천적 보편성을 동반하는 것이다...."

알랭바디우, <사도 바울> p183-184

아...만화에서 꼬리칸은 필요에 의해 태워집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치 생산은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에서의 그 노동 말이지요. 앞 칸을 먹여 살리려면 반드시 생산력이 필요하거든요...봉준호는 이 부분을 좀 친철하게 그리지는 않습니다.
 

** 스포일이 걱정된다면 보지마세요. 길기까지 하니까. 제발. 그냥 영화관 가서 맘에 드는 제목 있으면 들어가서 아무런 인포메이션 없이 보고 오는 방식이 스포일의 강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가장 지적인 방식이며, 또한 공연윤리심의위원회의 스포일 가이드 라인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순간 자기가 정말 행복한지 돌아보게 한다. 그럭저럭 나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혀끝을 살짝 건드릴 때쯤, '아니 그런데, 저 인간이 묻는 행복이란게 뭐지?' 라는 생각이 뇌신경을 건드린다.  이어서 '아니, 왜 저런 걸 묻는거야? 뭘 얻자고, 뭐 하자는 거지?'라는 데 까지 생각이 미친다. 질문에 묘한 악취가 난다고 느껴지는 순간  몸속의 아드레날린은 별의별 거지 같은 위악의 제스처를 요구한다.

 

 영화<마지막 사중주>도 한가운데로 직구를 던진다.

 

 푸가 사중자단의 연장자이며 첼로연주자인 피터(크리스토퍼 월켄 역)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며 영화는 시작된다. 25년 이상 서로 이해하며 최고의 음악을 만들어온 푸가 사중주단. 드디어 위기를 맞는다. 시작은 제2바이올린을 맡던 로버트(필립 세이 무어 호프만 역) 부터이다. 팀의 위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상황에서  제1바이올린과 역할을 나누고 싶다고 말한다. 왜 자신은 늘 배경이 되어는 제2바이올린에 만족해야만 하냐는 것이다. 조화의 이름으로, 삶의 이름으로 덮어 두었던 크고 작은 욕망과 불만들이 하나씩 움을 틔운다. 과연 그들은  행복했을까? 그들은 무엇을 대가로 치루었을까?

 

지젝은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주체가 자기 욕망의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욕망하지 않는 것들을 욕망(하는 척)한다. 그래서 우리가 '공식적으로' 욕망하는 것을 얻는 일은 결국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된다. 그래서 행복은 본질적으로 위선적이다."

 

즉 푸가 사중주단의 명성과 행복은 지젝의 입을 빌자면, 모든 욕망의 배반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멤버 교체 또는 팀 해체의 위기 앞에서 유령처럼 돌아온다.

 

먼저, 영화 속 사중주단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푸가 사중주단'. 영화 속에서는 뉴요커들이 '푸규어 쿼텟'이라고 발음한다. '쿼텟'이라는 발음이 매력적이다. 미끄러지는듯 하면서도, 살짝 당겨주는 그 느낌. '푸가'란 쉽게 말하자면, 여러 개의 성부가 주선율과 일정한 규칙적 관계를 두고 전체 화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합창단으로 예를 들자면, 소프라노가 주 멜로디를 한다면 알토와 테너,베이스등이 화음을 만드는데, 이 화음이 단지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멜로디의 모방,변형, 또는 확산의 관계를 통해 전체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만든다. 영화 속 연주팀의 이름이 푸가인 것은 이중적인 의미로 읽힌다. 그것은 푸가라는 형식이 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중성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원칙적으로 각 성부는 독립적인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리더 악기가 존재한다. 그러니까 원론적 차원에서의 평등을 말하지만, 그 안에 순수한 의미의 평등은 존재하기 어렵다. 내재적으로 힘의 관계,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힘은 물론 상호적인 것이긴 하다. 푸가 사중주단 역시 그런 권력관계의 발현이 문제의 시작이된다. 

 

 

 영화<마지막사중주>를 이끌어가는 양날개는 중견의 연기파 배우들과 베토벤의 음악이다. 주요 배우들은 과르네리나 스트라디바리우스처럼 귀에 찰싹찰싹 달라붙는 연기를 한다.  그들의 연기에 실밥이 없다. 크리스토퍼 월켄,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케서린 키너, 마크 아이반니가 그들이다.  사중주의 생명은 악기 간의 완벽한 호흡과 밸런스듯이, 이 영화<마지막 사중주>에서 4명의 배우들은 최상의 연기 조합을 만들어 낸다. 화려한 제스처나 극단적 캐릭터는 없다. 그들의 연기는 잘 지은 흰색 쌀밥 같은 연기이다.윤기가 흐르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며, 식감을 자극하는 밥 향기가 난다.

 

 영화 속의 캐릭터들을 보자. 인물들은 현악사중주에 쓰이는 악기들의 보편적 특성과 동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딸이 엄마인 줄리엣에 대해 말할 때, '비올라는 두 개의 바이올린이 가지고 있지 못한 깊이를 더해준다.'라고 말한다. 실제 현악 사중주에서 비올라의 역할이 그렇고, 극중 비올라 주자 줄리엣의 성격이 그렇다.

 

 첼로 주자인 피터는 파킨스 병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연주 생활도 곧 끝날 것이며, 자신의 삶 자체가 흔적으로만 남을 것이다. 지난해 먼저 떠난 아내의 그림자-피터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그녀는, 놀랍게도, 성악가 안나 소피 폰 오토였다-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피터는 첼로의 굵고 깊은 소리처럼 삶의 심연을 거스르지 않으며 유영한다. 모든 시간에는 추억이 있고, 또 멈춤이 있고, 그리고 잊힘이 있다는 것을 그만이 안다.  제1바이올린의 대니얼은 음악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구도자적인 삶을 산다. 그는 러시아의 자작나무처럼 냉정함의 외피 속에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음악에 대한 헌심을 담았다. 그에게는 이민자의 정서적 고독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랑이 다가온다. 그의 흔들림은  중년의 객기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지막 열정을 쉽사리 놓치고 싶은 이가 누가 있겠는가? 그의 바람이 한순간 사라져버렸을 때, 그는 늘 하던 데로 활대를 다듬는다. 그의 숨결에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회한과 그것 없이 살아가야하는 시간에 대한 고통이 묻어있다. 그의 반복되는 기계적 움직임은 그런 의미에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비올라의 줄리엣은 사중주단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고정점이다. 피터는 그녀의 스승이자 부모 같은 존재이다. 이제 그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한다. 제2 바이올린 로버트는 그녀의 남편이고, 제1 바이올린 대니얼은 한때 애인이었던 사람이다. 로버트는 그녀가 자신을 진정 사랑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원했던 것은 제2 바이올린의 역할처럼 안정감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젊은 시절 연인은 대니얼이었지만, 그 둘은 이제 동료일 뿐이다. 그녀는 로버트를 이해하려 하지만, 문제는 점점 그릇되어 나가고 이 둘은 별거에 들어간다. 또한 그녀의 딸 역시 다른 이름의 상처를 맛보게 한다.

 

로버트에겐 자신을 입증하려는, 즉 인정투쟁에 대한 욕구가 있다. 모두들 최고의 제2 바이올린이라고 칭찬하고, 본인 역시 '함께 하는 즐거움'을 더 높이 샀지만 그 안에는 또 다른 욕구가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대로 멈추며 안주할 것인가, 파괴를 통해서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추구할 것인가의 위치에서 로버트는 자기를 드러내는 방향을 택한다. 그가 보기에 팀은 지나치게 제1바이올린과 멘토인 첼로에 의존하고 있었다. 초기에 있었던 음악적 이견차이와 이를 좁히기 위한 열정적 소통마저도 희끗한 머릿결처럼 회색빛이 되어 버렸다. 그의 선택은 팀 내 균열을 만들어내지만, 사실 이런 '폭력'-하이데거가 존재를 만드는 방식으로 이해했던-이 없었다면 그는 그의 욕망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현실적인 흡입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라는 사건 앞에서 파국적으로 보이지만, 유연한 애도 과정을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자의에서든, 욕망의 대면을 통해서든,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 임해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  그들이 이것들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온건하다. 고통스러우나, 파괴적이지 않고, 병적이지 않은 방식인 셈이다. 또한 단시간적이다. 그들은 뉴요커니까

 

 

 

영화 속 또 하나의 중심축은 첼리스트 피터의 고별 공연 레퍼토리인 '베토벤 현악사중주 14번 작품131'이다. 많은 베토벤 추종자들이 그의 최고 작품으로 후기 현악사중주를 꼽는다.  후기 현악사중주는12번부터 16,그리고 대푸가까지 포함하여 총 6곡의 작품이다. 흔히 베토벤의 일대기를 세시기로 나눌 때,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기간에 나온 작품들이다. 잘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그리고 애호가들에게 일종의 그노시스적 영감을 준다는 후기 피아노소나타 같은 곡들과 함께 작곡되었다. 특히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는 매우 독창적인 면 때문에,그리고 일종의 현학성(?) 때문에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 음악은 과거 베토벤 음악과도 차이가 있으며, 이후 등장하는 후배 작곡가들 것과도 다르다. 이 영화에서 자주 들리는 현악사중주 14번의 1악장은 아다지오로 시작된다. 베토벤의 작품 중 아다지오로 시작되는 작품은 이것을 포함하여 오로지 2곡 뿐이다.

 

 1악장의 도입부는 전형적인 푸가풍이다.  곡은 진행되면서 전형적인 푸가의 틀을 벗어나기 때문에 학자들은 푸가라고 지칭하 보다는 '푸가풍'이라고 말한다. 제1바이올린의 주선율에 이어 5도 차이로 다른 악기들이 등장한다. 푸가 사중주단의 마지막 곡이 '푸가풍'이란 점, 그리고 애도의 느낌을 자아내는 아다지오 악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에서 슈베르트가 임종을 이 음악이 지켰다는 말에 미루어 볼 때, 이 음악의 1악장은 그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도의 느낌을 자아내는 장치로 활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극 초반부에 피터는 학생들이게 이 현악사중주의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 '모두 7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중간에 쉴 수 없다. 그래서 연주자들은 악기 조율을 할 물리적 시간이 없다. 불협화음이 발생해도 그냥 가야 하는가? 아니면 멈추고 조율해야 하는가? 그렇다. 이 곡은 끊김이 없다. 마치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에 얹혀 흘러가는 우리네 삶처럼 말이다. 멈추어야 하는가? 아니 멈출 수 있는가? 아니 그냥 가야 하는가? 아니 그냥 갈 수 있을까?

 

 딜레마를 해결하는  한가지 방법으로,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화해에 반대하여 아도르노는  '말년성'이라고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말년성'의 특징을 조화와 해결이 아닌 비타협, 난국, 풀리지 않는 모순이라고 설명한다. 그것은 정체성을 규정해내는 총체적 개념을 거부하고 부유하는 상태, 모순을 그대로 그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 모순은 파국과 생성의 가치를 배양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느껴진다. 앞서 말했던 피터의 딜레마와 아도르노가 말한 '말년성'의 특징은 결국 공명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것이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가 담고 있는 의미의 일부이며, 영화 <마지막 사중주>는 이 생의 말년성을(이것을 연대기적으로 수용하면 절대 안된다.) 음악영화의 이름으로 영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모순의 스펙터클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완벽한 봉합의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도 아니다. 사중주단의 조화를 파괴하지 않는- 즉 상징질서를 전복시키지는 않는- 방식으로 내러티브는 마무리된다. 물론 '사중주단은 과거와 같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니얼이 꼼꼼히 적혀 있는 악보를 덮는 장면이 그런 변화를 예시한다. 불안하고, 불확실하지만 자발성과 즉흥성과 새로운 시도에 대한 믿음으로 중단된 나머지 악장이 시작된다.  그들의 이들의 삶 속에서 타자에게 노출되어 버린 욕망의 흔적 역시 금세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해결의 기미를 희미한 낙관을 담아 영화는 보여준다.  즉 영화는 삶의 표면 아래 가라 앉은 타오르는 얼음의 그림자를 일정부분 추출해내지만, 개량적인 방식으로 재봉합 시키는 안정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처리하는 방식은 쾌도난마다. 이것은 영화적으로 급속한 제동처럼 보이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색함이 현실적이긴 하다. 늘 봉합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마치 벌어진 살이 순간 오므라들 듯이 어긋남 속에서 급속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후기로 갈수록 꼼꼼한 연주 지시를 악보에 명기해 놓았다고 한다. 하지만 베토벤의 연속적 연주 지시는 삶과 음악이 포개지는 자리에서 깨어져도 상관없지 않을까?  푸가사중주단의 멈춤은 그런 의미에서 엄격한 기준으로 보자면 어긋난 연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급작스러운 단절이 없다면, 우리 삶에는 어떤 도약의 가능성들이 남아 있을지 반문해보게 된다. 새로운 멤버와 함께 연주는 재개되고, 관객들은 그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한다. 그리고 베토벤의 음악은 여전히 살아 있고, 삶도 여전히 지속된다.

 

 

 

 

 

 

 

 

 

 

 

 

 

 

 

 

 

 

 

 

 

 

상단 왼쪽부터 부다페스트사중주단, 과르네리사중주단, 이탈리아사중주단

하단 왼쪽부터 에머슨사중주단, 타카시사중주단, 브렌타노사중주단.

p.s) 

 

1.영화사 보도자료를 보니 감독이 어려서부터 실내악을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속 푸가 사중주단을 만들어내면서 과르네리 사중주단, 이탈리아 사중주단, 에머슨 사중주단을 모델로 생각했다고 한다. 과르네리는 40년 이상 유지된 사중주단이었다. 1,2 바이올린의 구분이 당대 다른 사중주단에 비해 좀 약했다. 이탈리아 사중주단은 여성멤버가 있었다. 에머슨은 1,2바이올린이 곡에 따라 서로 임무를 바꾸는 독특한 구조이다. 이 팀이 모두 베토벤 후기 사중주 음반으로 유명하다. 개인적으로 추가하자면 타카시 사중주단과 알반베르크사중주단. 그리고 오래되었지만 빼놓을 수 없는 부다페스트사중주단과 부슈사중주단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훌륭하다.

 

2.영화 속에서 피터의 후임으로 오는 나니 리는 실제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첼리스트이다.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 음원이 나니 리가 속해 있는 브렌타노 사중주단의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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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8-06 06:43   좋아요 0 | URL
^^ 오타지적을 원하지 않는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다 할려면 ...ㅎㅎ 그렇네요. 젠킨스는 뭐람
 

 알라딘은 종종 독창적인 상품들을 만든다. 다행히 날개 없는 선풍기나 아이패드 같은 것은 아니다.  기껏 해야 이사갈 때  '이 참에 버릴까, 아니야 그래도 한 때 좋아했는데' 라는 3초간의 고민을 안겨주는 소소한 물건들이다. 머그컵, 티셔츠, 에코 백 등등

 

사실 작가 김승옥의 얼굴에서 멈칫 거리지만 않았던들 몇 번의 물질에 숨 죽은 고사리처럼 되어 버린 검은 티셔츠도 사진 않았을 것이다. 김승옥에서 걸려 버린게 외상이 되어 그 셔츠를 두고 두고 곱씹기 위해 산 셈이다. 하여간 내게는 여름철  햇빛을 쏙쏙 흡수해줄 검은 셔츠가 서너장이 있었다. 특히 아는 사람은 탐내는, 셔츠 배꼽 언저리에서 '시쉬쉿' 하고 sheet of sound를 들려 줄 존 콜트레인이 새겨진 멋진 반소매 티셔츠. 수년 전에 배우 모씨가 우연히 그 셔츠를 보더니 "어...이건 그대랑 잘 안 어울리는 듯 한데. 나 주지?" 라고 했지만, 절대 사수하여 지금도 존은 옷장에서 순번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심야 라디오도 틀어 놓지 않은  깊은 밤. 바람은 시원하게 쌩쌩 부는 이 밤에,

'앗' 하고 스타카토의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녀석이 등장했다.   

 

그렇다. 이것은 PKD(필립 K- '왜 이건 늘 '케이'라고 하지 않고 K라고 하는지, 존 F 케네디도 그렇구.'- 딕)의 '유빅컵'이다.

 

하악 하악....

 

살짝 걱정도 된다.

 

마치 약 먹는 기분이 날 것 같다.

한편으로 보면 비이커가 떠오르기도 한다.

화학공학도도 아닌데 맥주를 비이커에 따라 마실 필요가 있을까 싶긴 한데...

 

그래도 저거 하나 있어야 겠다.

 맥주 한번 따라 마셔보고

역시 맥주는

'하이네켄 잔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냥

연필 꽂이로 쓰던지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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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13-07-27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받았는데 꽤 괜찮아요. 히죽.

드팀전 2013-08-01 02:16   좋아요 0 | URL
휴가 다녀와서....저도 다음날 받았어요. ㅎㅎ
 

지난 달 영화의 전당에서 폴 토마스 앤더슨전이 있었다.

영화<마스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다음 주말이면 일반 개봉을 한다.

 

 

 

 

수상경력은 화려하다. 2012년 베니스 은사자상,남우주연상을 비롯해서

많은 영화제에서 감독상, 주연,조연상을 받았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호아킨 피닉스, 에이미 아담스가 출연한다.

호아킨 피닉스가 배우로서 우리 관객의 눈에 들어온 건 아마 영화<글라디에이터>에서

근친상간의 욕망과 질투에 사로잡힌 황제 역할을 맡았을 때였을 것이다.

그 전 까지는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요절한 배우 리버 피닉스의 동생 정도로만

기억되었다. 

 

영화 예고에서 보여지는 그의 금새라도 조각날 듯 한 분위기의 표정연기는

조각같은 배우들의

얼빠진 표정보다 훨씬 아름답다.

 

영화 배경이 2차 대전 이후이다 보니 영화에도 복고풍의 노래가 많이 쓰였다고 한다.

한국판 뮤직비디오에는 조 스태포드의 'no other love'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했다.

멜로디는 귀에 익다.

 

쇼팽의 에튜드 작품10의 3 일명 이별의 곡으로 알려진 노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편곡으로 불렀다.

조 스태포드의 오래된 느낌이 비오는 계절에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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