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6/20) 부산 영화의 전당 시사회에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를 봤다. 어차피 기억에 의존하는 영화쓰기인지라 며칠 지나면 쓸 마음도 땡볕아래 아이스크림처럼 사그러질 것 같고 해서 그냥 끄적인다. 늘 그렇듯이 아님말구식이지 뭐.ㅎㅎㅎ 시작. 

 

최근 국제 금융시장은 '버냉키쇼크'라는 것에 술렁이고 있다. 미 연방준비위원회 의장의 유동성 축소 발언에 세계 주식시장 전체가 초록불을 빨간 불로 바꾼다. 한국 증시 역시 마찬가지다. 코스피 지수 붕괴선을 두고 대책과 해석이 분분하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는 그런 국제금융시장을 움직이는 '큰 손'  애릭 패커(로버트 패틴슨 역)의 이야기이다.  (앞서 언급했던 '버냉키쇼크'와 유사한 예는 영화에서도 잠시 언급된다. '재무장관의 발언 하나에 시장이 과민하게 움직인다.' 고 탓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는 세계 금융의 수도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월가의 큰손 애릭 패커는 사무실에 있지 않다. 그는 개량한 리무진 속에서 금융시장과 접속한다. 여기서 접속은 이중적인 의미다. 1차적으로 그의 비즈니스. 즉 실제 거래를 하는 방식이 그렇다. 컴퓨터 단말기를 통한 트레이드는 이제 상식이다. 두번째는 타자와의 접속방식이다.  그가 타자와 만나는 방식이 분산적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에 의존하자면- 3명 이상의 사람이 모인 적이 없다. 마지막 이발소 씬에서 짧은 대화를 제외하면 말이다. 대화는 늘 1:1 형식을 취한다. 즉 애릭 패커가 타자와의 관계맺는 방식은 마치 컴퓨터 단말기와 개인이라는 관계의 미메시스다.  그가  컴퓨터 단말기와 접속하면서 '투자-기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는 그 외의 삶에서 새로운 접속점을 찾아 내지 못한다. 그의 정체성 따위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접속의 지점을 찾지 못하는 인간은 어떤 지점에서 비가시적  자본처럼 그 물질성을 놓쳐버리게 된다는 휴머니즘적인 유물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인간화한 형식에 가까운 그가 결국 자기 목적성을 놓쳐버리는 순간 -자본은 절대 자기목적성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내파한다.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흐름은 비가시적이다. 현재 국제 경제 규모에 있어서 실물경제는 비가시적 금융경제에 자리를 내준지 오래다. 이것은 어느 대통령, 어느 정권, 어느 경제블럭의 탐욕이나 욕망 때문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겪는다." 라는 오래된 금언이 있다. 이말을 한 사람들은- 물론 공황론에 대한 이견은 산처럼 많다- 이윤율 하락을 주 원인으로 생각했다.실제 2차대전 전후로 이윤율 하락을 견지해낸 것은  전시경제 시스템이었으며, 자본의 유기적 재구성 과정은  끊임없은 유동전략을 통해 '자기증식-재생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해 왔다. 데이비드 하비가 <신제국주의>에서 말한 '조정' 또는 '축적'(fix) 라는 것은 세계체제론자들이 말하는 세계 경제의 파동 함수 속에서 자본이 대응하는 전술 방식을  정리해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목격해왔던, 예를 들자면 외환은행 론스트 매각과 도 같은것-금융자본주의의 M&A라고 하는 방식을 하비는 '강탈에 의한 축적' 이라고 말한다. 과거 포드시스템 하에서 실물경제가 아직은 숨을 쉬고 있을 때 공간의 이동 등을 통한 생존 방식과 다른 자본의 생존 적응방식이다. 생각해보면 자본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환경을 조절하는 거대한 괴물과도 같다.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 등장하는 매트릭스. 자본주의는 그런 괴물이 스스로 창조해 놓은 매트릭스다. 모든 배치와 재생산은 그런 스스로 수정하고, 적응하는 매트릭스 안에 놓여 있다.

 

쉽사리 적을 지목하고 싶은 대적의 욕망은 짐짓 자본의 효과를 원인으로 착각하게끔 한다. 실제 애릭 패커와 같은 거대한 금융가의 큰 손들은 세계 경제를 교란시킨다. 그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생존권을 잃고 크고 작은 행복들이 사라진다.  그들을 하나씩 제거하면 이 자본주의는 윤리적 자본주의로 전환될까?  대결은 국면적 상태로 계속되어야 하지만 - 그런 국면의 대결이 흐름을 주도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몇 몇의 효과를 주범 삼아 제거한다고 자본주의가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가보다 훨씬 큰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내에서 자본에 대항하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진격의 거인들'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는 푸코의 권력에 대한 사유에서 힘을 얻는다.  권력을 전략적 관계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구조주의적 공간의 불능적 매트릭스를 변용가능한 쟁투의 매트릭스로 바꿀 수 있다. 영화에서 쥐와 케이크로 상징되는 사건들은 매트릭스 내의 지형도를 바꾸게 만든다.  비버리 실버는 <노동의 힘>에서 체제를 주조하는 대항력으로서의 저항의 힘에 대해 역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만드는 구조  역시 저항력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주인공 애릭 패커는 위안화 투자 실패로 파산지경에 이른다. 여기서 그는 인지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매우 취약한 지점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정점에 오른 사람이 자본의 비대칭성, 예측불가능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넌센스다. 감독은 그의 젊음과 오만함 등으로 인과성을 형상화해내려고 하지만  성공적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감독은- 특히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지점인데- 웅변투의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서 자본의 유동성과 예측불가능성을 설파한다. 영화에서 전립선의 비대칭성같은 은유는 오히려 귀엽다.  애릭 파커는 탁월한 정보력과 이성적 분석을 통해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패한다. 애릭 패커가 느끼는 존재의 붕괴감은  마치 <계몽의 변증법>에서 아도르노가 말한 '소외'와 유사하다. 즉 오딧세우스는 이성의 힘을 통해 세이렌의 마법으로 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귀를 막는 '소외'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자연과 인간의 변증법이 만들어낸 일종의 전술적 오류와도 같은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공리계 속에서 스스로 오딧세우스라고 생각한 패커가 취한 방식 역시 이런 '소외'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 안에서 홀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자본'이다. 자본은 자기합목적적인 운동을 한다. 그것만이 존재의 유일한 이유이다. 그 흐름은 저항조차 포섭하며 재생산한다.  

 

 비인간적인 패커에게는-뱀파이어 패틴슨의 무표정연기는 꽤 어울린다- 돈과 섹스만이 세계를 체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더 큰 자극을 요청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패커 역시 정상성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야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떤 맥락 위에서도 자리잡지 못한다. 자신이 밟고 있고 운영한다고 착각하는 자본주의라는 토양 위에서 미끄러진다. 흥미로운 일이다. 자본주의의 숨은 운용자라 자임하는 사람이 자신의 질서 속에서 의미와 결합하지 못한다는 것. 특히 아내의 거절은 의미가 크다. 테리 이글턴은 <발터벤야민 또는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에서  '거절이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는 어느 시인의 구절을 인용한다. 패커는 자본주의로부터의 일시적 거절과 아내로부터의 영원한 거절을 통해 비로소 공포와 대면한다. 그리고 의미결합의 실패로부터 오는 공포는 결국 죽음본능으로 발현된다. 

 

 흥미로운 공간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패커가 유일하게 안식할 수 있는 곳. 패커의 오늘 일정은 궁극적으로 이 이발소를 찾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부터 다녀온 이발소이다. 여기서 패커의 행동은 마치 오손 웰즈의 '케인' 의 오마쥬 같다. 잠시 회고적 상념에 젖는 패커. 영화 속에서 거의 처음으로 3자의 대화공간이 만들어진다. 이발사와 운전기사의 대화 속에서는 다시 흥미로운 접점의 공간이 언급된다. '택시'이다. 뉴욕의 택시.  이 공간은 영화 초반부에 패커의 아내가 '자기는 택시가 좋다'며 언급하는 장면에 등장하고 마지막에 다시 상기의 형식으로 등장한다. 이발사가 말하고, 현재의 운전사가 말하고, 있는 '택시' 무수한 실제의 사람들이 오르고 내리며 성좌처럼 역사를 그들만의 작은 역사를 빚어 내는 공간이다.  안타깝게도 패커에게는 그런 실제의, 육화된 삶의 흔적이 없다.  그는 비로소 깍다가만 쥐파 먹은 머리의 흔적을 얻어낸다. 전기총이라는 인위적 자극으로도 경험하고 싶었던 육체성이 확인된다. 그가 리무진 주차장으로 가는 장면에서 그의 좌석 위치는 그런 의미이다. 그는 운전사 옆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향한 파국의 중력을 끊어 내기엔 늦었다. 영화는 다시 한번 자본주의에 대한 최종 토론을 거치고 나서 총을 겨눈 상태에서 끝이 난다.그나마 다행이다.죽어 주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을테니.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자본주의에 대한 혜안(?)의 메시지를 어딘가로 투여-사실 투척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만, 크로넨버그에 대한 예의로 그렇게 하진 않겠다- 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라도  있었을까?  영화라는 담론에는 어쩔 수 없이 이데올로기가 들어가기 마련이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읽어내는 방식은 나 역시 매우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메시지 말고도 또 있지 않는가? 그것은 같은 요리를 가지고 계란프라이를 만들 수도 오믈라이스를 만들수도 있는 그것.  크로넨버그의 계란은 어쨋거나 흡족스럽진 않다. 딱히 어려웠다고 말할 것도 없고 딱히 어떤 촉을 느꼇다고 할 수도 없는.  이거야 말로 하루키식 표현을 돌려쓰자면  요즘 뉴욕 메츠 6번 타자 같은 영화 아닌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전문가들과 시위대, 마지막 씬의 해고자까지 연극적이라고도 해야할 인물들 모두 관객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크로넨버그식 욕망의 인형들이다.  물론 돈드릴로의 아이들일 수도 있겠으나,  우리가 본 것은 영화이지 소설이 아니잖아.ㅎㅎㅎ  원작자 돈 드릴로를 존중했던 탓일까?  끊임없는 대화의 형식들, 아니 웅변의 형식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이건 소설이나 우디 알렌 스타일, 또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비포시리즈 감독 ㅎㅎ) 이지 크로넨버그의 스타일은 아니지 않았던가.

 

 크로넨버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프로파간다를 이런 상투적이며, 직접적인 방식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크로넨버그라면 이보다는 나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프라미스>에서 날 것으로 드러내고 싶었던 '폭력'의 얼굴에 대한 '자본' 버전인가?   만약 그렇다면 영화에서 사회학자의 입을 통해- 이론이라구 이론.- 드러난 대로 이것은 '텍스트화된 자본'에 대한 영화적 반복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는 이것을 높이 평가했을것이다. 우리가 너무 영화에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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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이면 시작되는 장마... 내 기억 속의 장마는 두 장의 스틸컷이다.

 

#1. 대학 1 학년때. 이미 20년이 훨씬 넘었다.

수업은 예상보다 빨리 끝났다.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저녁이 되려면 멀었지만 주위는 이미 회색빛이었다.

혼자 이름모를 대학로 2층 카페이 앉았다.

 

 창 밖으로 우거진 플라타너스 사이로 초록비가 내렸다.

 

아무도 없었다. 소리도 없었던 듯 하다. 내 기억의 스틸 사진 속 장면처럼 말이다. 아니 소리는 기억이 스스로 말소시킨 것일게다.

 

외로움과 다른 이름의 고독을 거기서 처음 대면했다.

 

 이후로 오래도록 친구가 되어 주었다.

 

 

#2

 아카시아 숲 길을 쓸고 있었다. 군복 입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점점 검게 물들고 있었다.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는 바람이 불었다. 물을 잔득 머금은 목탄화같았다.

 

혼자 하늘을 보다가.  '아.장마가 시작 될 무렵인가?' 라고 생각했다.

 

군대 고참이 "비 오려나 보다. 어서 어서 마감하고 이제 내려가자." 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빗물이 모여들어 흘러내려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3.

 멜랑콜리한 음악이나 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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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가방에서 하루를 재워 놓았던<시사인>300호. 오늘 아침 설렁 설렁 넘긴다. 언론계의 스파르트답게 300호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커버스토리는 '철수,호남을 얻다' 이다. 여자들이 제일 듣기 싫은 이야기가 남자 '군대'이야기,'축구'이야기,,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고 한다. 이젠 별로 감흥도 없는 신석기 시대 유머이긴 하다. 철수나 영희가 땅따먹는 이야기가 내게 그렇다. 

 

특집은 '삼성경제연구소'이다. SERI는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다. 그람시를 인용하는 스튜어트 홀의 문화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적 쟁투이다. 실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정치적 권력의 쟁투이지만 그 이면에 담론의 투쟁은 정치적 권력의 지반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쟁투과정에 매우 중요한 자원이된다. 신자유주의와 그것을 지지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은 어느날 갑자기 툭하고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또한 그에 대한 대항권력도 '우리 합시다'해서 튀어 나오는게 아니다. 담론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중요하다.

 

<뉴스타파>의 김용진 대표,최승호 PD와 인터뷰했다. <뉴스타파>는 요즘 인터뷰하기 힘든 인튜뷰어들(^^ ?)이다. '조세피난처'라는 말 대신 '조세 은닉처'란 표현이 어울리는데 하여간 이 뉴스보도 이후 <뉴스타파>는 가급적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를 꺼리는 걸로 알고 있다. 후속보도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다른 인터뷰로는 <한국일보> 해직 편집국장과의 인터뷰도 있다.

 

문화면에서 <진격의 거인>현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진격의 거인>을 일본 사회의 무기력의 은유로 보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의 은유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싸우는 자 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영화<에브리데이>에 대한 평은- 미안하지만- 진짜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칼럼이었다. 평화연구자 임재성씨가 쓴 글인데 <공동체와 회사>라는 제목이다. '그린비' 출판사와 노조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인문사회학 책을 취미로 읽는 내게 '그린비'는 세 손가락 안에 꼽는 출판사이다. 글쓴이는 '진보적 인문학 공동체'와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는 회사'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어서 '공동체라는 이름 속에서도 존재하는 권력관계의 인정' 그리고 '동일함을 강요하는 공동체의 배타성을 넘어 직원을 회사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태도에 방점을 찍고 있다. 

 

 학문하는 사람들, 또는 문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 특징 중에 하나가 인간적 유대의 강조이다. 특히 진보적 문화연대의 특징은 그런 끈끈한(?) 연대같은 것이다. 이건 일반 회사에서도 목격되곤 한다. 서류적 인간이 아닌 동지 또는 가식적이긴 하지만 상징적인 또하나의 가족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싹튼 동지의식은 매우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고 힘든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침묵과 외면 또는 봉합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특히 연대의 정에 대해 다른 접근을 하는 아랫사람을 만날 때는 더욱 그렇다. 결국 그건 평등이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껍질을 쓴 하방식 권력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배나 권력자는 그런다.'너네들 내가 이런 좋은 생각으로 해주잖아. 그런데 나에게 이렇게 하면 어떡해. 이 나쁜'  

 

 시선의 위치는 여기서 매우 중요하다.

 

 동지의식의 카르텔은 스스로 권력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기형적인 착각을 한다. 우리는 평등한 동지, 불편이나 어려움은 함께 참는 것. 위계나 서열, 또는 비민주적 토의구조 같은 것은 보수적인 녀석들이나 또는 적들의 것일 뿐이다. 어려운 말 끼워넣지 않아도, 착각 중에서도 상착각이다.

 

최초의 어떤 모임들이 발기되는 과정은 소규모의 의기투합일 수 있다. 하지만 관계는 정체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개인과의 관계 역시 그럴진대 사람이 모인 집단이라면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아..시사인 300 축하해요.ㅎㅎ 인증샷 찍으면 추첨을 통해 상품 준다는데 혹한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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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6-1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전 아직 300호가 배송이 안되었는데요.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승주나무 2013-07-21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랑 책이랑 놀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연재 끝났어요. 드팀전 님 포스트에 댓글 단 것은 5년만인 것 같아요. 영화 카테고리는 열어 놓으셨군요~~ 근데 여긴 어디..? ㅎ

드팀전 2013-07-21 21:10   좋아요 0 | URL
예. 시사인에서 보고 반가왔습니다. 영화 카테고리라는 건 따로 없구요. 다 열려있어요.ㅎㅎ
 

1. 아침부터 빗방울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열어 보니 고층 건물들 사이로 느린 걸음의 안개가 다가온다. 습관적으로 틀어 놓는 라디오.  젊은 여자는 놀라운 비밀을 공유하겠다는 우월감 넘치는 목소리로 톤을 높여 이야기한다. 마라톤 행사로 인해 도로 통제가 있단다.

 

...

 

 글렌 굴드의 시벨리우스 피아노 소나타의 느린 악장의 멜로디가 머릿 속을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한다. 하지만 거품처럼 잡히지 않는다.

 

...

 

커피 한 잔을 올려 놓고 이제는 창 문 밖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안개뭉치들을 바라본다.

 

혼자 물끄러미 바라본다.

...

관성의 법칙은 글쓰기에도 존재한다. 한번 멈춘 펜은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리고 주변에 지방이 쌓이면서 점점 더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글쓰기를 생업으로 하거나, 또는 소통의 중심거점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그래서 습관적으로라도 무언가 쓰는 것이 옳은 일이다. 전자나 후자나 효과라는 측면에서는 권할 바는 아니다만. 둘 다 인간관계라는 폭발적 변수들과는 일정정도 거리를 둔다. 그나마 글로 생업을 이어가려면 실물적 흐름을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돈이라는 매개는 싫으나 좋으나 접촉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반면 알라딘같은 곳에 취미로 글을 쓰는 것은 즐거운 일이긴 하다. 동호회에 전 회장 같은 느낌으로 여유를 부리며 글을 쓸 때는 더욱 그렇다. 적당한 스노비즘과 적당한 이해의 폭으로 여유를 부린다.

 

... 그래서 글을 더욱 쓰지 않게 된다.

 

2. 최근 문화예술쪽에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을 좀 만났다. 그런데 그저 문화자본을 통해 위세를 도모하는 부류들에 지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고, 돈도 좀 있는데,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와인을 한잔 기울이며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누군가를 거론하면서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작품에 대한 이해나 미적 관심보다는 예술계의 네트워크에 더 관심이 많다. 지역 내에서 문화적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이나 창작자들, 그들과의 교류 또는 인맥이 예술보다 더 예술적이라고 믿는 것일까?  이들이 '누구 누구 압네' 하며, '그 사람 작품이 아주 좋아' 라고 하면 그보다 사회적 지위도 낮으며, 뭔가 우호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 사람들은 동네방네 다니며 '그 분이 예술적으로 아주 해박하다.' 라고 자발적 스피커가 되어 준다.  그렇게 공생이 이루어지는것 같다. 한 쪽에서는 얄팍한 취미로 자신을 포장하고, 정치경제적 이득을 요하는 사람은- 일단 예술이니 뭐니, 그런건 관심 없으니- 그들의 부족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데 충성을 다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는 이런 형식으로 마감된다..

 

  "어...그 작품 아주 훌륭하다구...00씨도 너무 돈버는데만 힘 쏟지 말고, 그런것도 경험해 보라구. 아...그리고 이번 주 공치러 가는거 멤버 다 만들어졌나? 누구 누구 나오신다고 했지."

 

3. 점점 더 조용히.. 가만있어야 하겠구나라는 생각만이 강해진다. 

 

미뤄봐야 곧 샤게 될 몇 몇 책들 CD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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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찬이와 재원이 그리고 아내와 함께 부산 알라딘 중고 서점에 다녀왔다. 최근 책 구매 패턴을 봤더니 알라딘 신상보다 중고책의 비율이 2:8 로 높다. 몇 몇 중요(?) 신간을- <바벨17>이나 <마술적 마르크스주의> 같은 제외하곤 새 책을 잘 사지 않는 편이다. 새 책이 나와도 좀 기다린다. 물론  알라딘에서 하는 50%할인은 꼭 챙겨본다. 보관함에 오래 있었던 <야생종>도 50%할 때 샀다. 예찬이 녀석은 최근 <마법천자문>에 완전히 꽂쳤다. 일주일에 오로지 토요일과 일요일 1시간 정도만 DVD나 영상물을 보여준다. 요즘 토요일 낮에는 <마법천자문>을 순서대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에는 가족들이 함께 '런닝맨'본다. 오늘 김병만이 담장 타는 장면은 대박이었다.

 

알라딘 중고서점에는 바람 쇌 겸, 지하철을 타고 갔다. 동화책 몇 권 사려고 말이다. 서점에 들어가자 마자 사태가 급반전되었다. 서가에 꼽혀있는 <마법천자문>시리즈...동생 재원이까지 덩달아 '아빠, 마법천자문...' 한다. 한자는 고사하고 낫놓고 ㄱ자로 모르는 꼬맹이가 말이다. 결국 각 각 한 권 씩 사고 말았다. 지하철로 돌아오는 동안, 사온 책을 보던 아내는 꼬박 꼬박 졸고, 아이들은 졸졸졸 앉아서 마법천자문 보고 있고, 나까지 책 보고 있으면 훈훈함으로 유난 떠는 가족티를 낼까 싶어 나는 그냥 앉아 있었다.  지하철에 주루룩 앉아서 책 보고 있는 가족들을 보니 가장 흐뭇한건 사실 나였음은 말하지 않아도 ...

 

2. 아내와 지하철 통로를 빠져나오다가- 어디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가 묻는다. " 자기는 우리 예찬이가 제일 잘하는게 뭐 같아?" ....순간...'어..잠깐...뭐지?' 

 

...  "아하...자전거 타기"

 

 

아내가 접시꽃처럼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다.

 

3. 예찬이가 자전거를 잘 타는 건 맞다. 자전거 신동까지는 아니어도, 자전거를 씽씽 신나게 탄다. 몇 년 전에 예찬이가 자전거 배우던 날에 대해 썻던 글이 떠오른다.

..

(이건 무슨 자동기술도 아니고...) 갑자기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이 생각이 난다.

 

  2011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왠만한 영화 사이트에서 쉽게 다운 받아서 볼 수 있다. 흔히 '자전거' 영화 하면 데시카의 <자전거 도둑>이나 <시네마 천국> - 물론 <E.T>에도 진짜 멋진 자전거 씬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내게 '자전거'가 등장하는 가장 아름답고 기억할 만한 영화는 다르덴의 몫이 되었다.

 

마지막 장면은 묘하게 숨을 죽이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살짝 들리는 가슴을 꾸욱 하고 눌러준다. 꾸-욱하고. 

 

 

  영화가 끝나면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이 흘러나온다.. (영화 전체에 걸쳐 메인테마처럼 몇 번쓰인다.) 개인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아노 협주곡 느린 악장이라고 생각한다.(때에 따라 바뀌긴 한다. 내가 그렇지 뭐 ㅋㅋ) 다르덴은 원래 다큐 만들던 사람들이라 음악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 마지막은 다르다. 그러니까 영화 끝나고 확 일어나서 가버리면 안된다는 거.( 영화<아이언맨>은 진짜 반성해야 된다. 양치기 소년같은 깡통 로봇들 같으니라구. 스크롤의 압박을 견디며 엄청 기다렸다만 남은 건  '뭐 어쩌라구.'였다.)

 

유명한 곡이다 보니 워낙 좋은 연주들이 많다. 아래 영상에 있는 크리스티안 짐머만 연주, 클라우디오 아라우,한스 리히터 하저, 아르투르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자주 듣는다. 처음으로 산 '황제'CD는 미켈란젤리 연주였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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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5-13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이 함께 올라와있는 페이퍼인데 안 읽어보고 지나칠 수 없었답니다.
저 소년에게 자전거는 그냥 자전거가 아니었지요. 베토벤의 이 곡은, 이전의 모든 정제되지 않고 날뛰던 감정을 모두 꼭꼭 다스려주는, 저에게 진정제같은 역할을 해주지요.
이른 아침, 베토벤의 황제를 듣고 시작하는 하루, 그리고 일주일입니다.

드팀전 2013-05-13 09:03   좋아요 0 | URL
이번주는 금요일이 석가님의 버스데이라....직장인들은 월요일 부터 좋답니다. 왜 공자님 버스데이는 쉬지 않는건지...으음 .. 좋은 댓글에 이런 영양가 없는 재댓글이라니..지송,.

바람돌이 2013-05-14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나요? 음... 잘 지내시는 것 같군요. ㅎㅎ
오랫만에 인사드려요. 둘째 이름이 재원이군요. 자전거 잘 타는 예찬이라니...
우리집 애들은 아직도 거리에는 못나가고 운동장만 도는 자전거 실력인데 역시 남자애들은 빠르네요. 하하... 너무 오랫만이라 약간 뻘쭘한 웃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