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블로그에 소개한 적이 있다. 이자람의 <억척가>다.  몇 달 전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공연이 있었다. 매일 대형 포스터 앞을 지나면서 '봐야 하는데' 만 되뇌였다. 그러다 결국 회사 일과 공연일이 겹쳐서 만남을 놓쳐 버렸다. 다행히 새 봄  2회 부산 앙콜 공연이 있었다. 따뜻했던 지난 주말 토요일(3/17) 공연을 봤다. 객석은 만석에 가까왔다.

 

 

 

 예매를 해놓고 의구심이 하나 생겼다. 무대의 배치 문제다. 전통적으로 판소리는 객석과 같은 눈높이이거나 객석 보다 낮은 곳에서 연행한다. 판소리의 연행 장소는 잔치집이거나 양반집이었다. 또는 장터인 것이 일반적이다. 마당에서 공연을 할 경우 양반들은 마루 위에서 본다.  한옥 구조를 염두해둔다면 판소리 연행의 공간배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은 전통적인 서구식 무대다. 무대가 객석보다 성인 남자의 가슴 높이 만큼 높다. 일단 <억척가>가 창작 퓨전 판소리라고 하더라도 이런 공간 배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주변에서 무대 위에 객석을 차렸다는 이야기를 해주어서 일정 정도의 의문은 풀렸다. 일반적인 다른 공연장에서도 그 방식 밖에 없을 것이다. 객석의 가장 깊은 쪽에 관객이 둥그렇게 앉는다. 그리고 공연자는 무대 안쪽을 보고 공연한다. 쉽게 도상화하자면,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를 생각하면 된다. <억척가>에서는 오케스트라 쪽이 객석이 되고 연행자는 지휘자의 위치와 시선으로 선다. 그리고 전통적 의미의 객석은 <억척가>에서 막으로 가려진다. 이 공간 배치는 나중에 한 번 더 언급할 예정이다. 효과적인 이미지장치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억척가>는 창작 판소리이다.브레히트 <억척어멈과 자식들>을 주요 창본으로 한다.요즘 세대에겐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8,90년대 학번들에게 브레히트는 친숙하다. 대학 동아리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했으며, 예술적 이념화(?) 교제로도 자주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관심사는 내러티브라기 보다는 작품의 형식이었다.

 

 극은 브레히트의 <억척어멈>의 배경인 30년 전쟁을 우리에게 친숙한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로 옮겨 놓는다. 짧은 단가에서 이자람은 <적벽가>의 첫번째 아니리를 맛보기로 선보이며, 이 공연이 기존의 판소리와 다른 우리말투의 공연이 될 것임을 말한다. 그러니 안심하라고 말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판소리<적벽가>의 숨겨진 주제가 '반전'에 있다는 점에서 브레히트와 <적벽가>는 은밀히 공명한다. 판소리 <적벽가>의 '죽고타령'같은 것이 실제 이자람의 <억척가>에서도 짧게나마 들린다.  

 

공연에서 이자람은 1인 15역을 한다. 하지만 그것 자체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판소리 창자는 기본적으로 1인 다역을 한다. 춘향이 되었다가 몽룡이 되었다가 월매가 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즈음 판소리에도 역할 분화가 일어난다. 관객의 변화와 서구극의 영향이었다. 이 때 생긴 것이 몇 몇 역할을 분담하는 창극이다. 1936년 정정렬의 주도로 이루어진 빅터판 <춘향가>녹음은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는 판소리 창극계열의 녹음이다. 이 녹음이 전설로 남은 것은 한 세대를 풍미했던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기 때문이다. 정정렬, 임방울,이화중선,김소희, 박녹주 명창이 그들이다. 중요한 차이가 있긴 하다. 이자람은 단순히 노래만 하는 것은 아니다. 창극의 경우에도 역할 분담이 있어서 연기를 하며 창을 한다. 하지만 이자람은 창과 연기 모두를 혼자서 해낸다. 이런 경우는 매우드물다고 할 수 있다. 잡종어를 만들자면 '모노 뮤지컬드라마'라고나 할까. 

<억척가>에서 이자람의 연기 중 눈에 띄는 부분은 해학적인 보조 캐릭터들의 특징을 잘 살려내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극을 연상시키는 장군, 순정마초같은 주방장, 지식인의 상징인 거사, 백마담 등의 캐릭터를 선명하게 연기하며 또 캐릭터 간의 연결을 매우 자연스럽게 처리한다. 광대로서 관객들을 휘어잡는 힘은 이지람의 뛰어난 캐릭터 표현력에서 출발한다. 신재효가 광대의 기준으로 득음보다 아니리를 먼저 언급한 것도 관객에 대한 흡입력 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흥미있는 캐릭터 구성이었지만 한 숟가락의 아쉬움도 있다. 그것은 주인공  억척네의 캐릭터의 연기였다. 억척네가 가진 삶의 질곡의 깊이를 이자람이 담아 내었는가에는 약간의 의구심이 간다. 이자람은 혼신의 연기를 선보이지만 몇 몇의 연극적 장치와 처절한 구음으로 이것이 표현되었다고 보기에는 심도가 얕다. 비단 이자람의 나이 문제때문은 아니다. 억척네의 성격 분석에 있어서,은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주름살을 표현해 내는 연기적 디테일을 언급하는 것이다. 

 

 또한 초선의 죽음 이후 억척네의 각성 또는 인물의 성격변화는 너무도 급작스럽고 간단하게 처리되어 있다. 먼저 첫째 아들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암시한 것은 초선의 죽음이라는 클라이막스를 처리하기 위한 이완으로 대단히 좋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초선의 죽음 이후 억척네의 허망함과 한을 조금 더 길게 처리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초선의 죽음과 급작스러운 마감그리고 이어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자'라는 계몽적 메시지는 각성을 위해 달려온 듯한 인상을 준다.즉 판소리<억척가>의 결말은 억척네의 이후 생의 열린구조 보다는 '인간다움'의 계몽의 강박으로 서둘러 정리된다. 이것 역시 판소리가 가진 전형성을 재영토화해내지 못한 연출이 아니었나 싶다.

 

 

 

판소리<억척가>는 기본적으로 고전적 의미의 비극적 플룻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비극의 좋은 플롯의 예는 이렇다.

 

'덕과 정의에 있어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78쪽)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명망가들을 대상으로 생각하였지만, 현대에와서 이것을 그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어보인다. 관객은 억척네와 쉽게 동화된다. 공연 중간에 낮은 흐느낌이 객석으로 부터 자주 포착된다. 억척네에 대한 연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책에서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 되며,공포의 감정은 우리 자신과 유사한 자가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환기 된다.' 라고 말한다.  관객에게 자녀 모두를 잃는 억척네의 불행이 그런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기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극과 배치되는 소격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판소리는 지속적으로 해설자가 개입하여 브레히트가 단절을 위한 서사극의 장치로 이용한 것과 유사한 형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판소리 창자는 브레히트적 단절보다는 극적 인물이나 사건을 강화하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다. 또한  미학적으로 음악이 가진 효과를 간과할 수 없다. 음악은  여타의 장르에 비해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경향이 강하다.  판소리는 유사한 형식적 분절에도 불구하고 소격보다는 동화라는 몰입의 길을 관객에게 요청한다. 현대의 관객 역시 브레히트의 소격장치라는 것을 하나의 극외적 장치로 이해하고 다시금 몰입의 중력에 빠져든다. <억척가>는 그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내러티브를 빌어온 것이지 브레히트의 서사극 양식을 빌어온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던 무대 장치 부분을 이야기해야겠다. 극에서 무대의 뒷막은- 전통적 극장에서 객석의 공간-두 번 정도 노출된다. 비극적 죽음과 연관된 부분에서다. 특히 인상적인 사용은 초선의 마지막 북장면 이후의 이미지 효과이다. 초선이 피범벅이 된 상태에서 마지막 북을 두드리는 순간, 극장의 막이 숨이 떨어지는 것처럼 일시에, 망설임도 없이, 훅하고 떨어진다. 심도 깊은 빈 공간에 달린 광목천이 저승과 이승의 경계를 있는 다리처럼 진양조로 하강한다. 하얀 천을 띠처럼 두른 무대 뒤편은 녹색계열의 조명이,무대 위에 절규하는 억척네는 붉은 계열의 조명이 비춰진다. 객석 의자를 넘어가며 덮여있는 하얀 천들. 규칙적인 줄과 통로. 의장대가 사열 하듯, 국립묘지의 묘비들이 정렬하듯.  죽음의 영상 이미지가 구축된다.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대규모의 학살, 이름없는 주검이다. 4.3 항쟁이나 5.18 항쟁 ,또는 수많은 전쟁 사진에서 등장하는 길게,그리고 일정하게 놓인 빈 관들.  이자람의 웃음과 울음이 섞인 구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구음이 가진 의미를 길게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최소한 인간계에 있으며 비인간계를 재현하는 소리라는 것 정도로만 설명해도 족할 것이다. 이 장면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영상과 음악을 통해 대단히 잘 표현해내 장면이다.  

 

판소리는 관객과 소통하는 극이다. <억척가> 역시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관객은 웃고 울고 박수친다. 무대 위의 악사들은 때론 멜로디 라인이 빠진 반복적 리듬의 언캐니(uncanny)함으로 비극적 정서를 극대화한다. 어떨 때는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며 뽕끼 어린 음악을 연주한다. 북치는 고수가 되어 추임새도 넣는다. '아마도 이자람 밴드'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악사들이기에  북보다는 기타나 드럼, 퍼쿠션이 더 자유로운 듯 하다. 북소리에는 달라 붙는 감칠 맛이 떨어지지만 힘과 직선적 패기와 흥이 들어있다.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이자람과 악사들과 어울리다 보면 지루할 겨를은 없다. 그러니 '재미'만이 예술의 유일한 존재 이유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도 후회할 일 없는 선택이 될 것이다.  

 

공연 말미에 이자람은  브라질 공연을 간다고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외면 받는 장르인 판소리를 새롭게 재창작하여 열심히 뛰고 있는 청년 이자람에게 수박덩어리만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녀는  훌륭한 광대가 될 것이다. 만약 새로움이라는 이름의 레테르를 찾아다니는 매스 미디어가 '오래된 미래'가 되어버린 판소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그 중심에 이자람의 <억척가>가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한편으로는 매스 미디어의 분칠한 관심이 살짝 피해가 주길 바라는 마음도 한 구석에 있긴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비 오는 아침, 무지개 빛 우산이 작은 동심원이 되어 멀어져 간다. 아파트 사이로 붉게 포장된 길은 1학년 예찬이의 학교 가는 길. 지난 일주일 동안 엄마 또는 아빠와 함께 학교를 갔다. 그리고 이번주 부터는 혼자서 씩씩하게 집을 나선다. 오늘 아침은 내가 아이들을 챙겨야만 했다. 아이 엄마가 이른 시간에 울산에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찬이는 여덟시 십분, 재원이는 여덟시 오십분에 등교한다. 부지런히 예찬이를 보내고 나서 아파트 뒷창으로 녀석이 사라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 봤다. 찰방 찰방 잘 걸어간다. '많이 컸네 아들' 하며 기특해하고 있는데, 재원이가 그런다. "아빠, 형아, 숟가락 안가져 갔는데..옹옹"  아뿔싸, 수저통을 넣어 주지 않았다.

 

순간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몇 가지 생각이 머릿 속에서 타탁거렸다.  '에이..남자 답게 지가 알아서 해보라고 그냥 둬. 그것도 다 배우는 거지 뭐?' '아니 아니...어렸을 때 날 생각해봐. 좀 당황스럽겠지. 초반이라 아마 선생님이 본보기로 이렇게 빼놓고 다니면  어쩌구 저쩌구 아이들 앞에서 뭐라 하실지도 모르는데 그럼 창피해서 자존심 상하는데'

 

'그래 가져다 주자. 그런데 어떻게 넣어주어야 하지?', ' 교실로 가서 수업 중에 넣어주나? 아니면 학교 교무실에서 아무나에게 전달해 달라고 해야 하나?'

 

 재원이를  광속 스피드로 씻겨서 노란 유치원 버스를 태우고 손 키스를 날렸다. 다음은 예찬이 학교. 1층에 있는 1학년 교실. 어떤 반은 선생님이 앞에서 무언가 말씀하고 계셨고, 어떤 반은 우르르 뒤에서 선생님과 사진 찍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예찬이 반 문은 열려 있었다. 아이들이 없었다. 어디 다른 곳에 갔나보다 싶었다. 처음엔 교탁에 수저통을 놓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어차피 교실까지 간거 예찬이 자리가 어딘지나 보자 싶어졌다. 교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으니 뭐라지 않겠지 하며 말이다. 눈에 익은 빨간 코트가 의자에 걸려 있었다. 책상 왼쪽 구석에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예찬이 이름이 적혀있다. 책상 위에 초록색 수저통을 놓아두고 누가 볼새라 후다닥하고 나왔다.

 

예찬이 녀석 하루 종일 '어...이상하다. 이게 왜 여기 있지?'  할 거다. ㅋㅋㅋ

 

2. 지난 해 부터 대학원이란 곳에 다닌다. '뒤늦게 공부를 한다.'라고 쑥쓰럽게라고 고백이라도 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난 늘 공부해 왔었다. 내가 책보고 알라딘이든 어디든 글을 끄적이고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기웃거리것이 따지고 보면 공부아닌가? 그래서 학위를 주는 곳에 간다고 마치 기독교인이된 사울처럼 새 세상을 선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대학원 공부가 늦었던 것은 대학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선때문이었다. 부분적 적실성이 사실로 입증되기도 하는 그 편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학문이 학교 바깥에서 이미 만연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오로지 학교에 있는 사람들 뿐이다. 김영민의 <공부론>에서 인상적인 것이 학문의 도와 무사의도를 비교하는 대목이다. 칼을 쓰는 사람들은 칼을 뽑는 순간 생/사를 건다. 생/사를 걸기에 인고의 세월을 무림에서 내공을 쌓는다. 하지만 학문의 도는 그와 같지 않다. 말도 사람을 찌르지만 가볍기 그지 없다. 남의 것을 배껴서 어떤 위치에 오르기도 한다. 생/사를 가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진정한 학문은 무사의 도와도 비슷한 것일게다. 그런면에서 무사의 도를 거는 학문하는 이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지금도 열심히 알아주지 않더라도 무공을 닦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학교라는 거대한 제도의 틈바구니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사가 늘 그처럼 되진 않는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내 개인적으로도 학문의 길을 갈 재목도 내공도 의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공자가 말씀하셨고, 옆집 순돌이 아빠가 말했듯이. 즐기는 자가 최고고 뭐든 직업이 되면 괴롭다. 나는 즐기는 자가 되는게 좋을 듯 싶다. 공부라는 평생 지루하지 않을 즐거운 놀이감을 직업으로 만들어 좋은 놀잇감 하나를 없앤다면 인생이 너무 심심하지 않을까? 

 

아내는 머리로 싸우는 일에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한다.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학원이란데 다니면서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곧 실용음악학원으로 바꿀까 생각중이다.ㅎㅎ 아마 대학원과 실용음악학원을 동등한 교환 층위에 올려 놓는 것에 분개할 사람들이 꽤나 있을 듯 하다. 사교댄스도 배우는 마당에 분개하실 필요까지야.ㅎㅎ

 

 지난 겨울 아침 일찍 창원으로 가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증권사인지 보험사인지 광고가 나왔다. '40대는 또다른 20대다'라는 카피가 귀에 걸렸다. 그 질문을 내부적 환기시켜봤다. '더 늦기 전에 하나 해야 한다면 뭐를 할까? 10년 정도 꾸준히 하면 좋을거' ..그리하여 기타를 다시 치기로 했다.

 내가 기타를 처음 배운 것은 중 2때다.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통기타를 사서 기타학원에 몇 달 다녔다. 몇 개의 코드와 스트로크 등등을 배우고 그걸로 대학까지 버팅겼다. 물론 독학자들의 바이블 <이정선 기타교실>이 있었다. 그런데 대학교 초반부까지도 과방에서 기타 좀 치는척했는데 복학 이후에 기타는 완전히 내 손을 떠났다. 취업도 해야겠고 연애도 해야겠구...하여간 나이 40넘어 17-8년 만에 다시 기타를 잡았다. 연습용 일렉기타를 샀다. 데임 세인트 250 디럭스. 썬버스트색이다. ㅋㅋ  용어들이나 코드 등등이 낯설지는 않았다. 그래도 음악이론부터 다시 잘 배우기 위해 밤에 열심히 독학하고 있다. 주요 플랫 중심으로만 알았던(사실 개방현과 7플랫만 알고 있었다) 기타 지판도 모두 외우고 있고, 제대로 하지 않았던 각종 스케일 연습도 .... 인터넷의 각종 동영상 강의들도 참고한다. 뭐가 되려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좀 늦어도 제대로  하고 싶어서 TAB보고 곡 카피하는 짓은 앞으로도 꽤나 오랫 동안 하지 않을 셈이다. 물론 유투브 등에 올라와 있는 유명란 곡들 카피한 거 보면 당장 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10년 할 거라서 천천히 한다. 왼손 오른손을 조자룡 헌창 쓰듯 하려면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지옥의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ㅎㅎ 기타의 세계는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삑살이와 뮤트되지 않는 소리들과 부드럽지 못한 프레이징과...드러나는게 수 백 수 천이다. 그럴싸한 자격증 가지고 해결되지 않는다.ㅎㅎ  무림의 세계는 목숨으로 증명하고, 기타의 세계는 녹음기로 증명한다.속일 수가 없다. (진지하게 쓰다가 약간 자기 검열도 하고...뭐가 그리 심각한 것도 없으면서...하면서 웃기는 간지로 빠진다.ㅎㅎ)

 

사실 내 목표는 나중에 아들 키워서 같이 리듬과 리드 번갈아 가면서 연주해보는 거다. 직장인 밴드같은 건 안한다. 직밴들도 하급무사들처럼 웃기는 구석이 있다. 김과장 이대리님도 왜 이리 아티스트 흉내들을 내시는지 아주 웃긴다. 무대나 강단이나 올라가면 다 비슷한 구석이 있나보다. 올라가지 말아야지 인간되는 건 맞는 것 같다.

 

하여간 2-3년 뒤에 좀 더 나은 실력이 되면 좋은 기타를 하나 정도는 사고 싶다. 근데 좀 많이 비싸다.ㅜㅜ 

깁슨 커스텀 57 레스폴 골든탑....뚜웅. 대략 500만원 정도.

 

뷰티풀하다.

 

예전에 스노위 화이트라는 기타리스트가 있었다. 필리뇨트의 그룹 씬리지의 멤버이기도 했고, 핑크 플로이드와도 공연을 자주하는 기타리스트다. 스노위 화이트가 57 레스폴 골든탑의 대표적 유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13-03-14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13-03-1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게 누구세요. 살아있으니까 안부를 전하는군요.^^ 먼저 키우신 분들이 다들 금방 지나간다고 하던데 정말 그렇네요. 잘 하실거에요.ㅋㅋㅋ
 

 

워쇼스키 남매가 <무릎팍 도사>에도 나왔다고 하니 영화 홍보를 위해 꽤나 애쓴다 싶다. 미국에서는 흥행과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한국에서는 어떨지. 영화/소설의 중심축은 불교의 윤회/연기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행동에 무의식적 근간이 되는 문화로 불교를 이해하는 한국인과 동양의 색다른 종교로 그것을 수용하는 서양인은 아무래도 접근이 다를 수 밖에 없다. 헐리우드는 그중 환생이나 연기에 관심이 많다.

영화<클라우드 아틀라스> 의 예고를 보니 6장의 에피소드에 주인공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게 소설과 영화의 매체적 특성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차이이다. 영화 만드는이들의 발을 무겁게 만든 모래 주머니 같은 것일게다. 대자본이 투입되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발에 10KG 주머리를 달고서라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 6개의 에피소드는 19세기 후반 태평양 선상 부터 인류가 멸망하고 다시 원시 사회로 돌아간 하와이까지 시공간을 달리 한다. 영화와 소설에서 각 에피소드를 다루는 주인공을 윤회의 연결고리로 묶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소설은 매우 간단하며 또한 효과적이다. 사건을 연결하는 방식은 그들의 기록물 들이다. 마치 미장아빔(엘리베이터 속 거울..그리고 그 안의 거울...거울을 생각하면 된다.)처럼 각 에피소드의 기록물들이 수 백년의 시간을 거쳐 어떤 형태로든 다음 에피소드에 등장하고 연관된다. 주인공들은 공통된 신체특징을 가지고 있다. 윤회의 연결고리는 내/외부에서 그렇게 만들어진다. 소설의 독자는 그것만으로 소설적 시공간을 이해한다. 영화는 문제가 좀 다르다. 만약 6개의 에피소드에 각각 다른 주인공을 내세우면- 동일인물들로 구성해도 매우 혼동스러울텐데- 관객들은 쉽게 이를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같은 주인공들이 몇 가지 역할을 맡도록 영화<클라우드 아틀라스>는 만들어진다. 안타깝게도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들의 모습은 그들만 모를 뿐, 관객들에게는 반복된다. 소설을 읽는 이들은 동일한 외모를 가진 이들로 윤회적 반복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결국 분산되고 카오스적 반복을 영화는 적절하게 끌어담아 평면 위에 올릴 수 밖에 없다.

내 개인적으로 SF를 좋아하는 이유는 SF가 외부를 통해 내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담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의 사건과 타자적 존재와 의 대면은 '미래가 무엇인가?' '사이보그란 무엇인가?' 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 현재는 어떤가?' '인류란, 인간이란 무엇인가?' 를 묻고 있다. 배두나가 역할을 맡은 손미-451은 페블리컨트(일종의 복제인간)이자 예수이기도 하고, 마르크스가 되기도 한다. 그녀가 만든 문서가 '매니페스토'(선언) 이라는 것, 그녀가 식당 노동자라는 것 등등이 그렇다.

-아래 부터는 스포일의 가능성이 높으니,알아서- 쳇-알아서 검열해준다니까...스포일하면 안되냐? 스포일의 에티켓? ㅎㅎㅎ

손미는 페블리컨트의 돌연변이인 셈이다. 기업 관료 체제는 미래 사회를 지배한다. 미래 사회의 중심도시는 서울이다. 유일회와 의장이라는 최고의 권력 기관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인류는 철저히 계급화되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전에 커다란 전쟁이 한번 있었다. 반-페블리컨트 운동의 구심인 유니언이 존재한다. 손미는 페블리컨트의 운명을 알고 유니언은 손미를 통해 '선언'을 작성케한다. 손미는 결국 잡히게 된고 사형을 앞두고 감독관과 이런 대화를 한다. 그런데 그 유니언도 따지고 보면 기업 관료 체제가 반체제 인사들을 가시적 범주 안에 두기 위해 지원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 싸우지만 또한 노동운동을 체제의 관리 범주 안으로 포획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과 같다. 노동조합/자본의 관계에서 발생하게 되는 일이다. 일명 현상적으로는 '관리형 노조'라고도 한다. 일부는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는 그것을 인정하면 투쟁에 대한 자기의 충성심이나 진실성이 떨어지거나 의심받는다고 생각한다. ^^ 어디 노조만 그럴할까 싶다. 자기 주장을 외치고, 비슷한 부류와 교류하면서 결국 내가 어떤 위치,어떤 좌표,어떤 세계 속의 관계 속에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대부분 그렇다. 그래서 고대 델포이 신탁의 유명한 말이 '그노티 세우아톤'이다.)

아래의 대화는 마치 20세기 초반의 어느 러시아나 독일의 정치범 감옥에서 있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1월에 죽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각이 난다. 여자라서 그렇겠지.

손미 :고위층들은 앵무새처럼 일곱번째 교리문답,"소울의 가치는 그 속에 있는 달러이다."만 되뇌이고 있습니다.... 대기업이 독점으로 제조하고 공급하는 고도로 유전자 조작된 소프(페블리컨트의 식량) 가 없으면 마흔여덟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죽기 때문에 ,'그것'은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나만 예외였지요.

기록관리자 : 당신은 진심으로 유니언의 선전을 받아들인 것 같군요,손미
손미: 내가 보기에는 당신도 네아 소 코프로스의 선전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데 지나지 않습니다. 기록관리자님.

기록관리자:어떻게 이런 얘기가 터무니 없는 환상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해가 안되는 군요.

손미: 모든 혁명은 일어나기 전까지는 터무니없는 환상입니다. 일단 일어나면 역사적 필연이되지요.

기록관리자: 엄청난 변화가 필요하다면, 신중하게 단계를 밟아 점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 방법 아니겠습니까?
손미: 그렇다면 20세기 초의 글을 읽다가 이런 글귀는 혹시 못보셨습니까? '단 두 걸음으로 심연을 건널 수는 없다.'

기록관리자: 당신은 이런 음모(유니언 역시 기업 관료 체제의 하부단체라는것)를 알았다면 어째서 협조했습니까?
손미: 어째서 모든 순교자가 배신자와 협력하는 것일까요? 더 멀리 게임의 끝을 내다보기 때문이지요.

기록관리자: 당신한테는 그게 무엇입니까?
손미: 선언서입니다. 네아 소 코프로스의 어린 학생까지도 이제는 모두 내 열두 가지 '불온문서'를 압니다.

기록관리자:하지만 어떤 결말을 기대하는 겁니까? 말하자면....미래의 혁명?
손미: 기업 관료 체제에,유일회에, 증언부에, 주체와 의장에게, 세네카가 네로에게 한 경고를 인용하겠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전부 죽인다 해도, 우리 후계자들까지 다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rch 2013-01-04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스포일일지 모를 글이 안 보여요... 영화 소개로만 보자면 이 영화는 흥미로웠어요.

드팀전 2013-01-04 16:44   좋아요 0 | URL
^^ 일부러 안보이게 한 건데요. 호호호. 간단한 마술을 이용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마우스 왼쪽 버튼을 누르시고 드랙하세요.ㅎㅎㅎ

Mephistopheles 2013-01-0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살짝은 보입니다..^^

드팀전 2013-01-07 09:59   좋아요 0 | URL
저도 살짝 보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3-01-06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드팀전님.^^ 새해 인사 드리러 살짝 들렀습니다. 건강하시죠? 좋은 일을 바라기 어려운 기세지만, 그래도 좋은 일 많고, 건강하게 한 해 보내시길 빕니다.^^

드팀전 2013-01-07 09:58   좋아요 0 | URL
저도 늦은 새해 인사드립니다. 해야 할 일이 기다리는데 자꾸 미루고만 있어서 큰 일이네요. 이러다 또 쫓길텐데... 빵가게님도 행복한 한해되세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눈의 고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에 무감해지는 순간이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결국 잘 찍은 사진처럼 찰나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그런 마음도 반쯤은 떠밀려 포기한 처연함 속으로 잦아든다. 기억이란 것도 결국 탈색되어 가는 사진처럼 덩그러니 공허만을 남기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눈 아래 덮혀질 것이다.

 

던져 놓은 양말처럼 느긋하게 연말을 보내고 싶었다. 바람은 바람따라 날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 한 때 육신의 무게를 도도한 저항감으로 안아주던 소파도 이제 그 팽팽한 긴장을 놓았다. 그 자리는 제각각의 모서리를 뽑내는 책들에게 내어준지 오래다. 넘어갈 듯 아슬아슬 버텨주는 책들의 절묘함에 감탄 섞인 한숨이 흘러 나온다.   

 

이미 몇 몇은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있다.

택배 기사의 손에 건네 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난 하고 싶은 말을 잊었다./ 눈먼 제비는 그림자들의 궁으로 돌아가리라./ 찟긴 날개로 투명한 것들과 놀기 위해./ 인사 불명 속에서 밤의 노래가 불린다./ (중략) "

 

오시프 만델스탐의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 나오는 시. 출판사 '문학의 숲'에서 나오는 '세계 숨은 시인선' 은  눈여겨 봐도 좋을 기획이다.

시의 번역이란 것이 원론적으로 늘상 아쉬울 수 밖에 없겠지만, 우리가 세계의 모든 언어를 배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투박하지만 솔직한 제목이다. 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 영화운동이 불면서 가장 주목받았던 감독 중 하나가 타르코프스키이다. 지금은 오히려 잊혀진 감독처럼 느껴진다. 지난 주 알렉산더 소콜로프의 <파우스트>를 보고 왔는데, 그 여운 때문에 타르코프스키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소콜로프가 과연 타르코프스키의 뒤를 잇는 러시아 거장이 될 수 있을까?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끝에서 두번째 세계>. 영화 이론에 대해 살피다보면 크라카우어라는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일종의 가려진 실재의 세계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두번째 세계에 대한 그의 접근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첫번째 번역서이기에 더욱 관심이 간다.

 

 

음반. 재즈피아니스트 존 루이스. 바흐 <평균율 클라이비어곡집> 클래식을 좋아하든, 재즈를 좋아하든 이 음반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존 루이스의 피아노는 매우 겸손하며, 심각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경박하지도 않다. 자유로운 생기를 잃지 않으며 절제의 선을 놓치지 않는....좋은 음반이다.

 

 

 

 

 

 

이 음반은 지난해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명불허전이란 말로 말이다.

나탄 밀스타인과 모니카 에리니가 함께 하는 바흐의 <두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LP로만 나와 있어서 CD 라이센스로 나왔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게 아니다.

한동안 유투브에서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막아 놓은 듯 하다.

 

 

심각하게 유혹하는  바그너. 블루레이 플레이어가 없어서 더욱 고민이다. 1080의 블루레이를 보고나면 DVD는 아름답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진보를 염원한다는 사람들은 그 80년대식 견인주의를 뛰어넘지 못하는가?

견인주의의 앎에 대한 위계는 매우 단순하다. 

'세계의 실재를 전부는 아니어도 이해하는 나/ 권력의 전술에 포획당해 희히덕 거리는 너희 대중'
그리하여 지속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각성'이다. 이 위계적 구도를 각성이라는 요청 사항에 대입시켜 보자면, '각성한-각성하려고 애쓰는- 나' 와 ' 무관심한 대중'이 있다. 

최소한 발화하고 격노를 토하는 나는 '각성한 자'의 위치에서 '무지한 대중'을 비판하고 정치적 일침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무지한 대중'을 포기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무지'를 반성하고, 작은 '각성'이라도 한다면, 시쳇말로 '개념 탑재'라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베아트리체의 천국에 가진 못해도 최소한 연옥의 단계까지는 올라오는 셈이다. 물론 원론적으로 '개념 탑재'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나처럼 '비개념'인간은 '도대체 개념이 뭐지?' 라는 질문을 먼저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개념이라고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이지?' 라는 생각을 해 본다. 대개는 인정적 휴머니즘의 선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념 탑재'의 외부에는 '개념 무탑재'가 있는 것인가? 

 나같으면 누가 '야..너 개념있구나'라고 한다면 '누가 너에게 개념을 하사할 권리를 주었는데?' 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만.

80년대의 시대적 급박함은 대중운동에 일종의 견인주의를 인정해 주는 분위기를 낳았다. 실제 많은 정보들이 통제되었고, 조직적 저항 자체가 전면적으로 분쇄되었다. 현재의 고통을 과장하기 위한 습성은 MB시대를 과거 80년대나 그 이전의 군부독재시절과 비교한다. 그걸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맥락에 내포된 말은 퇴행에 대한 두려움이지 단순한 대차대조는 아니다. 만약 정말 이 시대가 과거로의 완전한 회귀라면  87년 이전 이후의 수많은 민중운동의 결과와 축적된 대중의 역량에 대한 부정이다. 설령 MB가 온갖 만행을 저질러도 밟으면 밟히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그 가능성과 축적된 역량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격노에 찬 분노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공포의 연상을 통해 80년대식 억압/투쟁의 양식으로 이해하고, 연쇄적으로 80년대식 견인주의적 운동의 메타포를 활용하는 것은 정말 부질없는 짓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진보 내부의 진보를 발목잡는 일이다.

우리의 삶을 포획하고 있는 선들은 단순한 이분법적 견인주의로는 풀어내기 쉽지 않다. 빌헬름 라이히는 '비정치적 인간'에 대해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방어를 동반하는 '정치적 능동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라이히의 지적이 진정 옮았는지 알 수 없으나, 만약 '비정치적'인 것인 일종의 방어적 능동주의라면 견인주의의 전술인 '각성'에대한 외침은 소잡자고 닭잡는 칼 들고 오리 우리 앞에서 외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훨씬 더 세분화된 미시권력과 통치 권력의 배치와 지배전술 속에 놓여 있다는 것만 이해한다면 듣는자 없는 '각성'이라는 분노는 사실 칼이 아니라 칼집에 씌여진 문자에 지나지 않음을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반가운 문자가 왔다. 번호 바뀌어서 안그래도 궁금했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