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제목만큼이나 멜랑콜리하진 않다. 오히려 블랙 커피의 남은 찌꺼기를 혀로 핥는 듯 진한 씁쓸함이 있다. 그 입맛이 기억 너머로 사라지기 전에  메모를 남겨 놓는게 좋을 듯 하다.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는 블랙 코미디다. 그로테스크한 정치우화다. '슬픈 광대는 아이들을 웃기지 않는다.'는 영화 속 주인공 하비에의 말처럼 박장대소 할 수 있는 장면은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외형상 사랑의 삼각관계를 중심 축으로 한다. 스페인 파시스트 정부군에 아버지를 잃은 '슬픈 광대' 하비에와 서커스단의 주역인 '웃긴 광대' 세르지오, 그리고 세르지오의 연인인 줄타기 하는 나탈리. 영화 중반부 이후 서사는 질투와 광기의 두 광대 사이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띤다. 이들의 사랑은 광기와 폭력의 화염에 뒤섞인 뒤틀린 사랑이다. 영화는 결국 삼각관계라는 캐릭터의 배치를 이용할 뿐 사랑의 의미따위를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사랑이 극단적으로 놓이게 되는 시대적 멘탈리티 같은 것에 의미를 둔다. 전체적인 영상은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하다. 특히 사건의 변화와 흐름,그리고 시대적 알레고리와의 연결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적인 화면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영상의 이중적 활용 방식은 관객을 극과 사실 사이에 미학적 거리를 확보하게끔 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 거리는 영화를 단순한 치정행위로 소급시키지 않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이 유효한 거리를 통해 광대들의 이야기와 프랑코 독재시대의 사회적 상황을 직조할 수 있게 된다. 뉴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시기는 성장하는 소비사회의 과실을 향유하는 낭만의 시대로 묘사된다. 그 화면 속의 스페인은 정열과 사랑의 나라일 뿐이다. 아무런 일도 없다. 그러나 광대들의 사랑을 둘러싼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이런 단면에 빗금을 긋는다.안락하게까지 보이는 독재시대와 파국으로 향하는 광기 어린 사건들은 사이의 간극은 전자의 포획된 정체가 일종의 마약과 같은 판타지에 지나지 않음을 돌아보게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앞서 말한 대로 '슬픈 광대' 하비에다. 그런데 하베에르는 왜 슬픈광대가 되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아버지의 유언과도 같은 말이다. 감옥을 방문한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는 '광대가 되려면 슬픈 광대가 되라.'라고 말한다. 그는 <양철북>의 오스카처럼 어린아이인 적이 없었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는 어린 하비에에게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으로 '복수' 를 말한다. 
 영화 초반 도입부는 주인공의 멘털리티를 형성하고 이해하는 첫번째 단초로 작동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복수'를 요청한다고- 마치 무협 영화를 연상시키듯- 몇 몇 영화 기사에서 쓰고 있는데, 완벽한 오독이다. 최소한 사적 복수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제기하는 길은 파시스트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나갈수 있는 극단적 처방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개인적 복수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시대적 무능을 이겨낼 수 있는 분노를 요청하는 것이다. 파르티잔의 '복수'를 말한다. 이것은 하비에의 구명 계획의 오히려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몰고오면서 개인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실재계의 트라우마가 된다. 영화의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온순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던 하비에르가 미친광대가 되어가는 과정은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의 복귀로 볼 수 있다. 하비에르가 갖는 트라우마는 스페인 사회가 무의식 속에 담고 있는 트라우마의 은유이기도 하다. 

 


 서커스단은 역사적으로 축소된 작은 스페인 사회가 된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교실로 압축된 한국 사회의 폭력과 위계구조였듯이.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그런 역할을 한다. 서커스단의 '웃는 광대'는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있다. 하비에가 사랑하게 될 나탈리라는 여인은 폭력과 성적 비하를 당하면서도 그에게 복종한다. 서커스단의 당원들 역시 생계를 위해 그에 순종한다. 하비에가 '슬픈 광대'가 된 것은 아버지의 유언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시대적 메저키즘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들뢰즈에 따르면 메저키즘은 사디즘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디즘과 유사한 정서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슬픈 광대'를 택한 것은 스페인의 대중 정서 구조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폭력을 제압할 수 없을 때, 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것에 공포를 느낄 때, 대중이 취하는 방식은 스스로 폭력을 수용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메저키즘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즉 알아서 기는 방식으로 폭력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비에가 서커스단에서 첫번째 공연을 했을 때, '웃는 광대'는 그의 연기를 높게 평가한다. 하비에는 적극적으로 메저키즘의 매커니즘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코 시대의 스페인 사람들 역시 그와 같지 않았을까? 성향은 달랐겠지만 오랜 독재 시절을 경험했던 우리에게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 감독은 그 시대를 관통했던 대중들을 연민하면서도 풍자와 독설을 아끼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이런 장면들이다. 미친 광대가 된 하비에르가 거리로 총을 들고 나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붙잡고 위협하듯 '당신들 때문이야' 라고 하는 장면이 있다. 하비에에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협박당하게 되는 일가 역시 휴게소에서 무얼 먹을까로 실랑이하는 소시민적 주체들이다. 그들은 하비에의 총구 앞에 도망가기 바빠서 화장실간 막내 아들을 놓고 온다.  '대중독재'에 대한 공모에 대한 풍자적인 자기비판이자 항고이다. 이런 장면들도 있다. 주인공 하비에가 어린 시절 악연을 맺게된 대령의 집에 잡혀왔을 때 일이다. 대령은 숲에서 그를 잡아서 사냥개처럼 부린다. 문자 그대로 '사냥개'로 취급한다. 하베에는 군벌들의 사냥터에서 잡은 새를 입으로 물고 주인에게 가져온다. 이 때 둘 사이의 악연을 모르는 프랑코가 이를 나무라다가 하비에게 물린다. 하비에는 '무는-기계'가 되어 정말 개처럼 프랑코의 손을 물어 뜯는다. 이 장면은 우습기도 하지만 또한 매우 조롱을 담고 있기도 하다. 그 집의 집사가 '어쨋거나 프랑코의 손을 물어 뜯다니 대단해.'라고 하는 대목에서 질문은 매우 선명해진다. '하비에=무는 기계;  개' 가 되었다. 그렇다면 프랑코를 물어 뜯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은 무얼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한 '개-기계' 가 되지 않고는  물어 뜯을 수 조차 없는 정치권력은 어떤 존재의미를 갖는가? 


 




영화속에서 내성적인 하비에르가 숨겨진 광기를 드러내는 방식은 일종의 환타지적 사건을 통해서다. 하비에르에게 나탈리는 성모의 모습으로 수호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한다. 영화에서는 이장면을 포함하여 영화 후반부에 카톨릭과 관련되어 두 번 정도 종교적 이미지가 사용된다.프랑코 독재와 카톨릭과의 연계를 생각한다면 이 것이 괜한 배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종교의 신비주의와 파시즘이 연동되는 방식을 매우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실제 프랑코 정권 역시 정적들을 제거하고 독재 정권이 안정적 단계에 들어서자 카톨릭 세력들을 영입하여 국민적 지지를 확보해 나간다. 

 이 영화 속에서 '나탈리의 성모 현신'은 사건을 극적으로 전환시킨다. 나탈리는 '성과 속'이라는 부르주아 남성의 성적 이데올로기 재현방식이 전형적으로 투영된 인물이다. 공포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은 정상적인 형태를 띨 수 없다.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었던 즉 오이디푸스적인 하비에르는 '복수'라는 법의 이름으로 상징계 속에 봉합되어 삶을 유지해 왔다고 봐야한다. 그리고 그의 내적 실재가 폭발하는 공간은 자기투영적 짝패라 볼 수 있는 '웃긴광대'의 폭력성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궁극적으로 '웃긴 광대'와 '슬픈 광대'는 거울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비에의 폭력성을 깨운 것은 세르지오의 폭력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비에는 세르지오에 대해 일종의 거세 공포에 시달린다. 영화 초반부까지 하비에는 세르지오에 공개적으로 무섭다고 할만큼 주눅들어 있는 모습을 보인다. 하비에르는 영화 속에서 성적 무능력자처럼 그려진다. 그는 나탈리라는 여인을 성녀화하면서 또한 마초적 유희의 대상으로서 염원한다. '웃는광대'와 나탈리의 거친 성교장면을 피치못할 상황에서 경험하게 되는 하비에르는 마치 부모의 성교행위를 목격한 자식의 경험상태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 모욕감과 동시에 오디이디푸스적 동일시를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의 전치된 형태는 당연히 '성녀 마리아'일 수 밖에 없다. 하비에르의 불시의 공격으로 자상을 입은 '웃는광대'가 영화 후반부 자학을 통해 일그러진 '우는 광대'의 얼굴을 보고 '너도 나처럼 되려고'라는 뉘앙스의 말을 뱉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비에의 오이디푸스적 혼란은 극장씬에서도 드러난다. 슬픈광대의 발라드를 부르는 라파엘의 노래에 몰입해 있던 하비에에게 또 다른 판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복수와 폭력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며 영화 속 영화의 라파엘은 그런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길 종용한다. 하지만 하비에의 내적 갈등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이미 하비에는 이미 부서진 상징질서 속에 드러난 실재의 영역으로 들어와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게 남은 것은 최후의 격전지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광기를 드러내고 죽음의 욕동을 향유하는 길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폭력과 광기의 시대를 통과한 두 명의 서로 다른 광대가 조우한다. 관객은 파국적 비극의 결말에 와서 서로의 거울로써 공명하고 있었던 등장 인물을 확인한다. 무릎을 맞댈만한 거리에서 이 둘은 공통으로 경험한 상실과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비극의 몫을 상기하며 웃음과 울음을 교차한다. 짧지만 강력한 두 광대의 클로즈업은 누가 울고 누구 우는지, 또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호한 상태로 남는다. 마치 어린 시절 본 작은 광대 장신구처럼 위에서 보면 웃고 있고 돌려보면 우는 그런 형상을 닮아 있다. 광대들의 비극은 그렇게 시대적 비극을 소환시키며 웃음과 울음의 기묘한 이중주 속에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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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사에는 제작의 형식과 구조를 두고 '다이렉트시네마'와 '시네마베리떼' 사이의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무엇이 더 효과적인지, 무엇이 더 다큐멘터리적인지 논쟁은 있으나 근원적 진실은 없다. 리얼리티와 관련된 문제가 다큐멘터리의 태동기부터 '왼쪽벽'- 스티브 제이굴드식 용어이며 <풀하우스>에서는 주정뱅이 모델로 진화의 방향성을 지칭한다-으로 작동한다는 것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라는 오래된 질문이 남는다. 







내 세계관이나 정치적 성향에 근접한 것은 '진실'인가?  카메라로 재현된 저것이 '진실'인가? 

테리 이글턴은 <이론 이후>에서 진실은 대개 매우 단순한 것에 한정된다고 말한다.  

세상은 작은 진실의 규모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진실의 커다란 에드벌룬만이 진실의 의상을 입고 거울 앞에 선다.



 



그런데 진실을 외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이 진실이다' 또는 '내가 경험 한 것이 진실이다.'라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외친다. 무덤들이 반복적으로 공원 묘지를 점유하고 있듯이 '동어반복'은 자기복제적 진실이 되어 주체를 완성한다. 











아...진짜 입 없는 것들이 부럽기까지 하다.











마땅히 사랑받아야 하지만, 외면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진실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 묻는 사람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우며, 익명의 공간이라는 행동의 거세를 조건으로 하는 어떤 세상에서 진실을 목터져라 외치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다. 혐오스런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몇 몇 가지 굵직한 역사적 과오들을 소환시켜, 현실의 모순을 감정적으로 되집어보는 것은  사이비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 또는 공부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한 자기분노를 전염 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 사람 다산 정약용은  제대로 된 분노를 '유분'이라고 했다. 분노는 딱딱하게 굳어 아무때나 터져나는 '욱'이랑은 다르다. 차라리 매번 분노를 배뇨하기 위해 땀구멍 대신 문자를 이용하느니 거대한 분노를 응축해 놓는 것이 더 정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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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싸우는 상대는 알기 쉽지. 하지만 네가 왜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 나오는 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저 대사가 쓰인 장면이 주인공의 사형 집행 전날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가 혁명의 역사,또는 정치의 역사에서 이루어지는 요소들을 압축해 놓았기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이야기를 맥락적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여기저기 들여다보면, 이 둘 다 너무 잘 아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것이 미력한 내겐 오히려 불편하다. 특히 두 번째 질문에 반사적으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쉬운 일이된다. 그것을 어렵게 하는 것은 외부적 억압때문이지 진실 자체 때문은 아니다. 억압이 어렵게 만드는 것이지 진실이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이 시대에 누군가 진실에 대해 말한다면 그에게 씌여질  처방전은 '히스테리'이거나 '분열증'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나 진실을 말하는 데 그는 진실에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 중 최악은 넘기는 책장에 따라 주체를 주채하지 못하는 일부 독자들이다. 혁명가의 책을 읽는 순간 검은 깃발 아래 설 듯 말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붉은 깃발이 그의 머리 위에 있다. 다른 종이뭉치를 끝내고 나면 그는 녹색 휘장을 두르고 휘파람을 불고 서있다.  말을 바꾸어 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로지 문자적 감응을 즉각 즉각 배설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이 시간의 발효 속에 제대로된 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습관적 위장 장애로 인한 설사에 지나지 않을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럼에도 거기에 열광한다. 장인지 똥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그곳에 오로지 포토샵을 하지 않아도 날것으로 어여쁜 단어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아름다운 말들로,또는 가정된 진실로 그 말들이 '진실로'-여기서 '진실로'라는 말은 본인도 결코 의식하지 못하는 순수한,또는 순진한이라는 차원이다.- 도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 평등, 우정, 사랑, 정의, 관용, 조화..... 이 모든 말들은 입에 달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어찌 이 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가치가 마뜩치 않다고 고개를 저을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만,

영화<대부>에 돈 꼴레오네의 말은 참고 삼을 수 있을 듯 하다.

 

"모임을 주선하겠다고 내게 오는 놈, 그 놈이 배신자다." (로저 에버트 <위대한 영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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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2-04-05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해자가 피해자의 얼굴로, '순진한 피해자'의 얼굴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자기정당화와 변명이 화려한 수사와 혁명의 언어로 전치하는 것 같고요. 건강하시죠? 안부글 남기러 들렀다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는 글 읽고 갑니다.

드팀전 2012-04-05 09:02   좋아요 0 | URL
^^ 반가와요. 부산에는 벚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기대를 안고 페이퍼를 썻다가 약간의 성질과 함께 지웠던 적이 있다.(요즘은 뭐 끄적였다가 많이 지우는 편이다. 삭제된 페이퍼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ㅋㅋㅋ) 벨라 타르의 <토리노의 말>에 대한 것이었다. 개봉 소식을 듣고 "그래!" 하면서 기대의 페이퍼를 썼다. 그런데 곧 실망의 페이퍼가 되고 말았다. 지방에서는 볼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맞다면 국내 오직 단 한 곳에서만 개봉했다. '아트 하우스 모모'

 

'약간의 성질'의 원인은  '개봉'이라는 기대감과 '단 한 곳의 개봉관'이라는-더 있을 수도 있겠으나 내가 아는 바로는- 추정된 '사실' 사이의 낙차 때문이다.

 

어떤 분의 페이퍼를 보다가 그 때 생각이 나서....하여간 그렇다는거다. 

 

 라스 폰 트리에감독의 <멜랑콜리아>의 오프닝도 매우 유명했다. 친구들만을 위해 열어놓은 페이스북에서는 꽤 오래전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ㅎㅎ 두 영화를 보면 비동시성의 동시성 같은 것을 느낀다. 고전 영화를 연상시키는 흑백의 롱테이크와 패션잡지의 화보와도 같은 감각적 느린 영상. 벨라 타르의 음악은 스코어였고 폰 트리에의 음악은 바그너다.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 오프닝의 독백이 니체 이야기이다.

 

 

http://youtu.be/v32n4lCG0OA

 

라스폰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오프닝, 음악은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서곡이다.

 

 

http://youtu.be/2kP-vuOy8c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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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이제 우리나라이로 7살이 된 예찬이가 잠자리에서 던진 질문이다.

예찬: "아빠, 세상에서 제일 큰 건 뭐야?"
나: "음,,,그건 우주."

 


예찬: "아빠..그럼 우주 바깥에는 뭐가 있어."
나: "어? 그건....와우.그건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견이 다른 매우 중요한 이야기야. 유한 우주,무한 우주 뭐 그렇게 말하는데...빅뱅 이전 뭐 그런 이야기도 하는데. 하여간  쉽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우주가 가장 크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은 우주 밖에 아무것도 없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고도 이야기하지. 아직 잘 몰라. 예찬이는 어때?"
예찬: "음 그거야 당연히, 다른 빈 공간이 있지. 그래야 우주가 그 안에 있게 되잖아.그것도 몰라"
나: "그럴지도 모르지. 점점 알게 될거야."

예찬: "근데 아빠. 할아버지는 아빠의 아빠잖아?"
나: "그렇지"
예찬: "근데 그 할아버지의 아빠도 있을 거 잖아?"
나: "그렇지"
예찬: "그리고 그 아빠의 아빠도 있고 또 또 아빠도 있고...그럼 맨 마지막에 있는 건 누구야?"
나: "우하하하....야 예찬아...너 오늘 매우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질문을 하는구나. 일단 한번 안아주자,아들 ㅎㅎㅎ"

칸트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고민한다. 신을 설정할 수 밖에 없었던 대륙 합리론과 환경의 사물인 영국 경험론을 통합한다. 그가 각각의 딜레마를 해결하면서 만들어 낸 인식론이 <순수이성비판>이다. 그는 내용/형식을 이원화 시키면서, 경험상의 실재론-이건 버클리류의 주관적 관념론과 분명다르다-과 관념상의 초월론을 상정한다. 칸트의 인식방법은 인식의 출발을 신에서 인간으로 옮겨 놓은 주체 중심주의이다.(하지만 그도 신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한다.)그는 신에 기대지 않으며 주체 내에 존재하는 선험성을 강조한다. 예찬이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칸트를 생각했다. 그리고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언급했던 선사시대 밤하늘을 바라보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인지 네안데르탈인인지를 생각했다. 누워서 지금보다 수 백배나 맑았을 검은 심연의 너머를 바라보며 뭘 생각했을까? 처음에는 그날의 행동들을 반복했을 것이며 잡아야할 동물들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밤은 길고 세대는 반복 지속된다. 그 중 어느 선조는 밤 하늘의 어둠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며, 내 엄마의 엄마는 누구고 그 엄마의 엄마는 누구일까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졌고, 좀 더 큰 청소년기에도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는 이런 질문이 너무 어렵다거나, 너무 비실제적이라거나, 답을 알 수 없다거나, 돈이 안된다거너, 머리만 아프다거나, 내 알 바 아니라는 이유로 꺼내보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는 TV 리모컨을 든다.

 


예찬이가 던진 질문은 사실 형이상학이 계속 던져대던 질문이며, 우주론이나 진화생물학이 여전히 물고 있는 과제이다. 나는 아이들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런 거대한 질문을 하는 걸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호기심이 정말 본원적 능력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인류는 아직 그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인류는 그걸 찾아가면서 발전해왔으며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도  그 질문을 놓지 않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출근 전에 예찬에게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 나오는 몇 가지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편의적 도식화를 위한 그림임을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최근에 본 영화<어나더 얼스>중 한 장면이다. 저예산 SF영화인데 선대스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국내 개봉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지구(편의상 지구 A) 에 어느 날 '또 다른 지구'(지구B)가 나타난다. 멀리 달 처럼 보이는게 바로 지구B이다. 발견된 놀라운 사실은, 이 곳에는 지구A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똑깥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평행우주다. 쉽게 말하자면, 지구B에는 지구A에 사는 드팀전과 같은 형상의 같은 경험을 가진 인물인 그대로 있는 것이고 지금 이순간 똑같이 알라딘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MIT에 합격을 앞둔 18살의 전도유망한 여학생. 그리고 파티가 있던 그 날 밤, 인생 자체를 바꾸어 버리게 될 사건을 만난다. 지구B가 하늘에 빛나고 있다. 2년의 시간이 지나고 인류는 지구B에 가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나는 또 다른 나를 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 둘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리고 그 곳에서의 시간은 이 곳과 같이 흐르고 있을까? 만약 어떤 계기로 인해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면 지금 이 곳도 그 곳과 같은 경험을 겪게 되는 것일까? 시간과 우주는 일관된 하나의 현상일까? 아니면 매 결단과 사건마다 다른 우주와 다른 시간의 궤를 통과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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