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강의
백승욱 지음 / 그린비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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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요리'라는 게 있다.다들 한번쯤은 '코스요리'를 경험해보셨을 것이다.한식은 물론이고 중식,일식,서양식..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제법 큰 음식점에는 코스요리가 있다.대개 보급형과 고급형으로 나뉘어진다.. A코스,B코스,C코스 하는 식으로 보긴 편하지만 번호 매기 듯 멋대가리 없이 구분한 곳도 있고 나름대로 고풍스런 이름을 붙여 멋을 낸 곳도 있다.

태어나서 '코스 요리'라는 걸 처음 먹어봤던 때가 기억난다.음식이 하나씩 하나씩 나오는게 참 신기했다.학교 후문 식당에서처럼 쫘악 펼쳐 놓고 먹는데 익숙한 나에게는 음식의 맛보다 감칠 맛나는 기대감이 더욱 컸다.기대감의 하이라이트는 종업원이 테이블에 접시를 내려놓을 때 이다.늘 뻔한 질문..종업원도 수 천번은 했을 대답이 오고 간다. "이게 뭐에요? 뭐로 만든거에요?"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정성들여 마련된 코스요리이다.에프타이저를 시작으로 모두 9개의 전체 요리가 준비되어 있다.그리고 맛집의 포인트,깔금한 후식도  마련되어 있다.고객에게는 이 요리집이 어떤 음식을 다루는지가 중요하다.일식인지 중식인지 알아야 여자친구를 데리고 갈 것 아닌가? 어떤 음식점은 이름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그래서 들어갔다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는 세계체계론을 주메뉴로 한다.이 책의 제목이 설명하는 '역사적 자본주의'가 이 집의 종목이다.요리 종목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면 주방장들의 프로필도 한번 눈여겨 볼만하다.주방장들의 경력이 화려하면 일단 요리의 맛은 기본 이상은 한다.(실제 경험적으로도 그렇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에 등장하는 주방장들....페르낭 브로델,칼 폴라니,임마뉴엘 월러스틴,지오반니 아리기,비버리 실버....학계에서 별 다섯개짜리 호텔 주방장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다.이 중에 저자인 백승욱이 세계체계론 설명을 위해 가장 많이 시선을 주는 사람은 월러스틴과 아리기이다.이 집의 메인 요리 중에 메인 요리는 이 두 사람의 세계체계 분석을 주 내용으로 한다.두 명의 훌륭한 주방장인데 요리 하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저자는 친절한 종업원답게 각 요리의 구성과 첨가물을 설명하고 이어서 서로의 장단점 그리고 상호보완적인 측면을 이야기한다.브로델과 폴리니,그리고 실버는 세계체계 분석의 토대로서 또는 세계체계론이 담지하지못하고 있는 노동의 실질적 포섭문제 등에 대해 보완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방대한 분량의 세계체계론 내용을 전부 설명하기란 내 능력 밖이다.종업원의 친절한 설명에 밑줄을 그어가며 각 주방장들의 요리마다 따로 정리를 해놓았지만 그 분량 또한 만만치 않다.(한 강의당 바람구두님 리뷰 길이만큼 된다.때로는 넘을 때도 있다.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11개의 장이니 분량이 '대략 난감'이다..)  세계체계 분석은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출발한다.자본의 세계성에 대해 마르크스만큼 압축적으로 설명한 사람도 드물다.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하는데 한계를 갖는다.마르크스의 이론 자체가 보편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세계체계론은 마르크스의 '역사 없는 역사성'을 극복하여 상대적 역사성을 회복하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또한 마르크스의 자본논의에는 세계체계론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국가'라는 개념이 미비하게 다루어진다.세계체계론은 이 두가지, '역사와 국가'의 공백이라는데에 문제의식을 제기하며 출발한다.

아무래도 논의를 월러스틴 주방장과 아리기 주방장으로 좁혀야 될 듯하다.나머지 주방장들의 요리도 너무 맛있긴 하지만....세계체계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월러스틴 주방장.이 동네 대표요리사이다.그의 세계체계 분석은 근대비판으로 부터 시작한다.그가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에서 말하고자 한 바가 요소론적 근대화에 대한 문제제기였다.요소론적 근대화라는 것은 근대적 요소를 많이 가진 나라가 근대국가라는 의미이다.그런 취지에서 후발 근대국가는 앞선 근대국가를 따라가게 된다.예를 들면 유럽은 한국보다 더 근대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근대적이다.월러스틴은 이런 근대론이 가지고 있는 서구 유럽중심주의를 전복한다.

그의 유명한 세계체계론은 몇 가지 틀이 있다. 월러스틴은 브로델이나 아리기와 달리 자본주의의 출발을 농민의 내부분화에서 찾는다.반면 브로델과 아리기는 상업자본주의에 기원을 둔다.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장기지속이 국가간 체계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그리고 이 국가간 체계는 중심과 주변의 분할 원리를 축으로 한다.일명 기축적 분업이다.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의해 지탱되면서 독점 또는 준독점을 향한 강한 지향성을 갖는다.브로델도 지적했듯이 자본주의의 시장이 경제의 독립성만 가지고 존재한 적은 거의 없었다.중심과 주변 분할을 작동하는 것으로 인종주의,성차별주의 등이 언급된다.그리고 정치이데올로기로서 가장 촛점을 맞추는 것이 '자유주의'이다.역사적으로 보면 '선거권과 교육''복지모델''민족동일서'등이 자유주의가 제시하는 포섭모델로 작용한다.또한 월러스틴은 공간적 분할에만 그치지 않고 계급분할에도 촛점을 맞춘다.계급동일성이 신화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월러스틴의 논의에 대해 같은 동네 주방장 아리기의 비판은 새로운 메뉴의 기대감을 갖게 한다.아리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기원론과 이행논쟁에서 월러스틴의 농업자본주의론이나 영주의 산업자본변신론등에 대해 부정적이다.아리기는 국가간 헤게모니 경쟁이 어떻게 자본주의 동학을 발생시키고 역사를 만드는지를 설명한다.아리기는 의도적으로 그의 대표저서<장기20세기>에서 계급문제를 배제하고 있다.이 문제는 아리기의 후반작업과 비버리 실버,또는 그 이전에 폴라니적 테마를 통해 연구된다.아리기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체계적 축적순환'과  '국가간 체계'이다.헤게모니 국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독특한 축적구조를 가지고 있기때문이고 축적구조는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며 또 순환된다는 것이다.월러스틴이 세계경제를 기축적 분업으로 본 것에 비해 아리기는 세계적인 축적구조로 본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이러한 축적 구조의 형성을 위해서는 국가간 체계의 매개가 가장 중요하다.국가간 체계는 헤게모니의 우열은 있지만 완전히 일방적인 제국주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다.또한 국가간 체계는 체계의 카오스를 예방하는 성격을 갖는다.이는 다른 말로 하면 국가간 체계가 요동치면 세계체계 역시 흔들린다는 것이다.미국이 모든 것을 쥐고 흔드는 것은 맞지만 흔들다보면 국가간 체계에 바탕을 둔 현재 체계 자체도 무너지는 모순적 상황에 들어간다.(미국의 힘이 강력하지만 미국이 모든것을 다 움직인다는 친미주의나 미국이 모든 악의 축이다라는 일방적 혐미주의는 동시에 극복되어야한다..)

새로운 축적 체계는 새로운 조직혁명에 근거를 두고 있다.아리기는 세계헤게모니의 역사를 4시기로 구분하는데-15세기 제노바,16세기 네덜란드,19세기 영국 그리고 20세기 미국 헤게모니-각 시기별로 보면 도시국가의 유연성.보호비용의 내부화(네덜란드 해군력),생산비용의 내부화(기계와 노동의 포섭),거래비용의 내부화(법인기업)라는 특징을 갖는다.아리기는 세계적 축적이 상승국면화 하강국면을 갖는다고 보는데 실물적 팽창과 그 이후 등장하는 금융적 팽창,그리고 금융팽창기에 일시적으로 등장하는 호시절인 벨에포크가 그것이다.이 순환이 끝나게 되면 다른 축적체계로 헤게모니가 이동한다는 것이다.20세기 미국 헤게모니에 이를 대비하면 미국의 금융화는 1970년대 이후 시작되었다.벨에포크이후에는 체계의 카오스가 발생하여 헤게모니가 이전된다.아리기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새로운 축적구조가 동아시아-특히 중국-으로 이전되는 양상게 관심을 갖는다.이러한 순환과 헤게모니 교체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아시아가 새로운 헤게모니 축적 모델을 이루어낼 지는 아직 이론이 많다.

미국 헤게모니의 붕괴와 관련해서..(혐미주의자들과 친미주의자들의 이론적 공통점은 미국이 망하지 않는다이다.) 저자는 1980년대 이후 신경제 모델을 파악하며 미국 금융축적체계의 불안정성과 취향성을 이야기한다.1995년-98년 사이 미국 주식시장의 폭발적 팽창을 미국 헤게모니의 벨에포크로 보고 있다.미국 신경제의 취약성으로 신경제의 생산축적구조가 노동시간 연장에 의지한점,IT업체가 기업 가치만 높일뿐 생산 가치와는 관련없다는 점.미국 내 가계부채,외국인 소유자산 비율의 증가들을  예로 든다.또한 전지구적인 금융체계 역시 미국이 독자적으로 해결한 능력이 없다고 본다.결국 미국은 전세계적 금융적 축적구조를 짜내면서 무장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국가간 체계를 재편한다.그러나  이는 달러의 신뢰성문제, 미국내의 경상수지,재정수지적자 문제,과도한 전쟁비용 지불등으로 오래도록 지속될 수 없다고 본다.아리기는 특히 금융적 축적구조가  단기간 안정된다고 하더라고 국가간 체계가 불안정해지고 금융적 축적의 취약성이 커지면 지속성에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이 책의 전반부가 세계체계론의 전사에 해당하는 브로델과 폴라니의 이야기였다면 이 책의 후반부는 세계체계론에서 눈여겨보고 있는 동아시아의 문제이다.동아시아 발전모델의 특성,즉 일본의 다층적 분업체계,그리고 세계의 생산공장으로 부각되고 있는 중국문제 등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또한 마지막에는 19세기 영국 헤게모니가 생산비용의 내부화 작업으로 이루어낸 노동자의 실질적 포섭과 관련되어 세계체계론 논의에서 취약한 노동문제를 아리기와 실버의 논의를 빌어서 설명한다.(실버의 <노동의힘>에 대해서는 비판적 접근이 우세하다) 역사적 자본주의는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되지만 노동의 문제는 미시적 차원에서 움직이기때문이다.즉 세계체계론적인 자본주의로 모든 것을 환원시킬 수 없는 부분 중 가장 큰 것이 노동문제이다.특히 노동은 자유주의에 의해 파편화 개인화되고 20세기 포드주의와 테일러주의등에 의해 임금에 포섭되었다.아담스미스적 노사관계는 노동문제를 분배의 문제로 축소시켰고 포드주의에 바탕을 둔 작업작 교섭력 중심의 노동문제는 한계에 부딪혔다.

저자는 여기서 변증법적 시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책 서문에서 박현채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언급했던 것은 결국 이런 의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저자는 역사적 자본주의의 거시담론과 미시적 차원에서의 사회구성체적 대응을 통해 변화를 도모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백승욱의 <자본주의 역사강의> 여러면에서 훌륭하다.물론 이것은 딱 내 수준에서 하는 말이다.무언가 본격적인 연구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이 책은 너무 나이브할 수 도 있다.우선 이 책은 강의투로 씌여져 있다.설명이 비교적 친절하다.읽는 행위 자체를 고행으로 만드는 문장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구성의 면에서도 아주 높은 점수를 줄 수 밖에 없다.다음 요리가 기다려지는 마음으로 앞에도 설명했듯이 한 강의를 읽고 나면 다음 장이 궁금해진다.각 장의 끝에는 강의 내용을 짧게 요약하고 있다.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 역시 역사성에 바탕을 둔 이론적 특성상 관념적인 담론 수준에만 머물지 않는다.우리와 직접 관련이 있는 동아시아 문제,미국 헤게모니,중국의 문제등이 요리에 올라오기 때문에 눈에 확확 들어온다.

자본주의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꼭 읽어볼 만한 친절한 세계체계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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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7-13 15:47   좋아요 0 | URL
사회 구성체 논쟁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따까리 나라로서의 한국 경제 종속성 심화의 FTA 과정이나,
재벌 그리고 아직도 전근대적 세습 체제의 거대 기업의 생태,
땅따먹기가 유일무이한 재화 획득의 현실까지...
이 사회 구성체는 외세에 의한 난도질과 국가라는 체제를 빙자한 독점 자본의 수탈과정 공고화를 위한 각종 호화럭셔리 법률들로 떡칠이 되어 있죠.
처음 그 논쟁이 불거졌을 때보담도 훨씬 우아한 꼬락서니로 썪은 부위가 감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종류는 세상의 모든 국가 수보다 훨씬 많고, 지방자치단체 수의 합보다 무진장 많으며, 아마도 인간의 머릿수의 몇 곱절 정도 되는 종류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되지도 않은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반화 작업을 하는 이들을 보면 존경스럽기도 하죠. 근데 저 일반화 작업들이 일반화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훨씬 많은 나라들의 국민 눈을 가려버리는 일도 생기지 않을까요?

드팀전 2007-07-13 22:50   좋아요 0 | URL
어떤 이론이든 현실의 모든 사항을 그대로 반영할 수는 없습니다.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에궁..전면적인 외세지배력과 독점자본 수탈도구로서의 국가론 가지고는 설명하기 힘든점이 너무 많습니다.자본의 일반법칙과 각 정세에 따른 작용과 반작용..그리고 그에 따른 일국내에서의 역사적 변용과정은 당연히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지요.그렇지만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조망할 수 있는 시각을 줍니다.세계체계론 역시 3세계 문제와 3세계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내부변화 역사에 약한 것이 지적됩니다.그러나 이것이 전체문제를 호도하는 방식은 아니지요...사회구성체 논쟁의 유효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또한 그에 근간이 되는 생산관계와 양식의 변화,노동의 양상 변화에 대해서 파악해야지요.노동의 양상과 노동자의 구성이 급변하고 있기때문입니다.국민의 눈을 가리는 것은 자본에 대한 비판적 거대담론보다는 오히려 자본이 매개하고 있는 국민국가가 형성하는 헤게모니,또는 게급담론을 무마시켜버린 민족개념,또는 국민을 매개로 하는 근대적 담론(체제론에서는 자유주의라고 하는)것들이 아닐까 싶군요.글샘님의 시각은 한국이라는 일국자본주의내에서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오히려 이런 책이 유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한국의 자본주의도 거대한 자본움직임의 하나이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바밤바 2007-07-14 00:51   좋아요 0 | URL
책을 요리집에 비교하고 글쓴이를 요리사에 비유한 부분이 참신하네요. 물론 드팀전 님도 어느 분의 착상에서 빌려 온 것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맛갈지게 글을 쓰시는걸 보니 읽기 좋군요^^. 제 전공도 경제학이라 경제학에 대한 담론들을 자주 보는데 님의 온건하면서 균형잡힌 시각이야 말로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가치와 대척점으로 치닫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훌륭한 대항마가 될 것 같네요. 드팀전님의 전공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사회학일거 같은데.. 맞을려나?^^

드팀전 2007-07-14 11:12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시니 고맙습니다.바밤바님..그러고 보니 바밤바 안 먹어 본지 오래되었네요.저희 아버지가 참 좋아하셨는데 .^^ 요리집은 글쎄요...그냥 그런 생각이 났어요.누군가 먼저 쓰셧을테고 그랬겠지만.. 알 수는 없네요.또한 그걸 생각해서 한 건 아니구요 ^^ 그냥 책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났어요...아 ...저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신방학도 이런 말보다 사회과학도 이런 말이 더 좋았지요...사회학과는 저희 과방옆이었습니다.^^
바밤바님도 클래식을 좋아하시니 음악 관련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겠습니다.반가와요.지난번부터 ...^^

Jade 2007-11-05 01:45   좋아요 0 | URL
드팀전 님 페이퍼보고 책 구매했는데, 읽고나서 보니 더욱 맛깔스런 리뷰가 있었네요 ^^ 저는 경제학에 문외한이지만 책이 워낙 잘 설명해줘서 너무 좋았어요! 요즘 생활이 너무 무기력해서 책 읽고 억지로라도 리뷰 써보려고 하고 있는데 드팀전 님 리뷰 보니 감히 엄두가 안나는걸요 ㅎㅎ 농담이구요 알라딘에서 여러님들 페이퍼를 계기로 좋은 책들 만날때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

드팀전 2007-11-05 09:06   좋아요 0 | URL
이 책의 장점이 비교적(?) 쉽게 강의투로 썼다는 것 아닐까요...저도 경제학 전공이 아니어서 정리하기에도 급급하답니다...가끔 님의 서재에 가보고 있습니다만 글을 한번도 남긴 적이 없는 듯해요.먼저 흔적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셸 푸코 살림지식총서 25
양운덕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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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 내가 읽은 미셀 푸코의 저작 목록은 달랑 이것 뿐이다.언젠가 이런 저런 글을 읽다가 밴덤의 '판옵티콘'을 재해석한 푸코의 감시 개념이 인상적이었다.도대체 '판옵티콘'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감시와 처벌>을 읽었다.당시(지금도)그 책이 의미한 바를 꼼꼼히 이해하진 못했겠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나름대로 알려진 책이다보니 들고다니면 가끔 아는 척 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어..미셀 푸코..어려운 책 읽네'

사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중에 푸코의 저서 중 가장 대중적인고 널리 읽혔다는 <감시와 처벌>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에게나 나에게나 푸코는 이름으로만 친한 사람이었다.조금 더 아는 척 하는 사람이 꺼낸 말은  '아..그 동성연애자'.모 대학 사회계열 대학원생의 푸코에 대한 첫 멘트였다.그게 전부 인것 같다.

<감시와 처벌>을 읽은지도 몇 년 되었고 최근에 읽었던 네그리의 <제국>에서 푸코의 생체권력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해서 이 얇은 책을 펼쳐 들었다.책이 가벼우니 마음도 가벼워졌다.저자는 이 책 <미셀 푸코>에서 푸코의 중기 철학에 해당하는 권력이론에 대해서만 언급하겠다고 밝힌다.즉 '근대적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라는 주제에서 권력이 근대적 주체 형성과 관계 맺는 역학에 대해서만 정리하겠다는 것이다.주요 텍스트로 보면 <감시와 처벌>,<성의 역사>정도가 될 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우리 사회에 '신세대론'이 들끓었다.특히 광고는 발빠르게 새로운 소비층을 파악하고 그들의 마음을 잡는데 총력을 기울였다.영상 세대라는 신세대의 특징을 부각하며 현란한 영상과 감각적인 광고 문구로 그들을 구세대와 다른 새로운 인종으로 분류했다.그 당시 아이들을 가슴 설레이게 했던 문구 중에 이런게 있었다.

"세상의 중심은 나" ,"남들이 뭐라해도 나는 나다"

분명히 소아병적인 자기 환상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런 말들은 자아정체성에 목말라 하는 10-20대 청소년들에게 매력적이다.그리고 비성찰적인 자기정체성 탐구는 일종의 신화가 되어서 여전히 다수에게 작용한다.그래서 이런 이야기들이 여전히 유효하다.

"내가 나지..그럼 내가 누구란 말이야" (누가 아니라 그러던가)

푸코 말을 좀 세속적으로 적용하면 미안하지만 "너는 너가 아니다." 소설가 김중혁은 그의 책 후기에서 자신은 수많은 지적 편린들과 대중문화 상품들로 구성되었다고 예를 든다.그런 것들이 모자이크처럼 모인 것이 자신이란 것이다.소설가로서 좀 극화시킨 부분이 없지 않지만 오히려 유아적으로 '나는 나 이외 아무도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외치는 것보다는 낫다.

푸코는 근대적 주체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특정한 권력 장치를 통해 만들어진 산물이라고 본다.이런 주체는 규율에 따라 만들어진 유용하고 순종하는 몸을 갖는다.

그리고 몸은 자연스럽게 내 의식을 규정하고 또 모든 권력작용을 내면화하게 만든다.일명 '생체 권력'이다.

푸코의 권력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권력'의 개념이다.푸코는 권력을 어떤 개인,집단,기구가 소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망으로 본다.

"권력,그것은 제도도 아니고 구조도 아니며,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한도 아니다.그것은 한 사회의 복합적인 전략적 상황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푸코의 권력 개념을 이해하기 힘든 것은 그 실체성이 모호한 점도 있겠으나 독재권력이니 민중권력,국가권력 하는 '정치적 권력'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 투쟁의 역사도 독해를 방해하는 요인이된다.이러한 정치권력,경제권력등은 억압하는 권력이다.우리들은 대개 권력은 억압하고 금지하는 존재로 파악한다.푸코는 이런 억압가설을 부정한다.그는 권력이 단순히 금지하는 힘이 아니라 그것이 작용할 대상을 일정하게 형성하고 그 대상이 스스로 권력을 수행하게 한다고 본다.즉 권력은 억압하고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생산적,긍정적인 힘이다(푸코 형님!! 아멘) 이러한 권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담론이 필요하다.

푸코는 말한다.

'권력 안에서, 권력으로부터 ,권력을 가로질러 작용하는 진리의 담론을 구성하지 않고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으나 속담이나 격언이 가진 경험적으로 구성된 담론이 이런 경우 예로 쓰일 수도 있을 것 같다.필요할 때 한 방씩 촌철살인 먹일 수 있는 속담이나 격언.그 속담의 텍스트를 분석해보면 권력이 그 말 안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규율하는지 읽을 수 있다.

저자가 정리한 권력의 특성은 이렇다.

권력은 하나의 중심을 갖지 않는다.즉 권력은 모든 순간에 모든 지점으로부터 나온다/.개인의 주체성은 권력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전략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다./권력 관계는 다른 관계들 '안'에 들었다./권력은 저항을 수반한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이 없듯이 저항의 핵심도 없다.그러므로 권력 관계는 변화시키고 수정할 수 있는 관계이다.

푸코는 근대적 신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형벌제도의 계보학을 통해 읽어냈다.그 노작이 <감시와 처벌>이다.핵심은 훈육사회로부터 전면감시 사회로의 이행이다.근대적인 규율은 신체를 조작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다.그리고 미시적 기술을 이용하여 근대적 인간을 창조한다.그러니까 현재 '내가 나'라고 떠벌이고 다니는 것도 사실은 이러한 거대한 메커니즘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는 점이다.푸코는 이성의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를 창조한 근대인이라는 개념에 대해 회의적이다.

규율은 신체를 공간 안에 배치한다.이렇게 되면 세분화된 공간 안에서 개인들은 쉽게 통제되고 조작된다.규율은 시간도 효율적으로 배치한다.그래서 인간은 이런 권력의 배치에 의해 녹색불 바뀌면 곧바로 반응하는 신호체계형 인간으로 탈바꿈한다.그리고 권력은 '바라보고 기록' 한다.모든 것을 감시하는 권력,모든 것을 기록하는 권력이 탄생한다.이런 규율과 감시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신체는 자연스럽게 이 권력을 내면화해서 알아서 잘 한다.내 몸 안에 감시하는 눈이 생기는 것이다.그래서 상황을 어색하게 받아들이지도 않는다.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권력이 자동적인것으로 비인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그럼 이렇게 되어서 좋은 것이 뭐냐고? 권력은 최적의 효율을 탄생시킨다.즉 창조하는 권력이되는 셈이다.

"푸코는 사회적 효용성을 증대시키려는 요구가 규율장치의 다양한 기술들을 사용하도록 하는 점에 주목한다.이런 양상은 권력이 사회 토대의 가장 세밀한 단위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행사될 수 있는 경우에 권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생산을 증대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즉 폭력을 행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부드럽게 작용하면서 생산과 이익을 늘이는 원칙에 따른다"

푸코의 권력이론은 감옥을 넘어서 이제 개인의 성 문제까지이어진다.이책에서 이부분은 훨씬 간략하게 정리되어있다.푸코는 프로이트의 성억압 가설에 반대한다.푸코는 성이라는 것 역시 억압되었다기보다는 매우복잡한 성장치에 의해 생산,조절된다 라고본다.우리가 갖는 성에 대한소극적 담론또는 과잉담론등도 결국은개체문제로 성을 환원시키는 권력의작용이다.푸코는 '성'을 관리하는 권력이 '생명'을 관리하는 권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지적한다.성의 생식력이 국가적으로 관리되는 형태가 '출산제한' 그리고 요즘은 '한 자녀더 갖기 운동' 같은것들이다.

우리는 근대인이다.합리적 이성을 신봉하고 근대적 자본주의 생산양식하에 있다.푸코는 계몽의 시간과 계몽된 인간을 회의적으로 성찰한다.그것은 우리에게 주는 대머리 아저씨의 축복이다... 시간 있으신 분 법회인지부흥회인지 참가해서 대머리 아저씨의 축복에 감화받으시고 성불하시던 천년왕국에 가시던가 하자...이 책 100페이지도 안되고 크기도 작다.회사원도 읽을만 하다.

세 명의 대머리 아저씨와 같은 시대에 살았다는것은 정말 뿌듯한 일이다.마이클 조던,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그리고 미셀 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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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g 2007-06-22 17:11   좋아요 0 | URL
끄덕끄덕 하고 읽어내려오다가
마지막 문장에서 풉...합니다
저도 대머리 아저씨의 축복에 몸을 맞겨 성불해볼까요 ^^
 
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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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함은 물처럼 존재한다.불행은 해처럼 떠오른다.

그리고 인간은 인간을 뜯어먹는다.물고기가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    브레히트의 <이기주의자 요한 팟저의 몰락> 중에서

<제국>을 읽기 전에 '제국 논쟁'을 접했다.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2차 저작이나 논쟁은 훨씬 다층적이고 복잡하다.딸기를 먹는 것은 쉽지만 딸기 케이크 레서피를 읽는 것은 어려운 것 처럼.<진보평론>을 중심으로 펼쳐진 '제국 논쟁'을 다 따라가는 것은 처음부터 역부족이었다.책이 번역된 후 국내외 세계 체제론자 또는 트로츠키주의를 포함한 범좌파의 '제국' 비판과 자율주의자들의 반비판이 이어졌다.그러나 국내에서 '제국 논쟁'은 정점을 지난 듯 하다.인터넷 한 구석에서는 '제국 논쟁'의 잔불마저 꺼져버린 것을 아쉬워하는 글들도 가끔 찾을 수 있다.

일단 <제국>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제국 논쟁'을 먼저 읽지는 말라고 권하고 싶다.<제국> 자체도 결코 만만한 내용이 아니다.거기에 주요 개념들에 대한 상이한 해석과 비판의 전체적 맥락까지 알아야 이해가 되는 '제국 논쟁'은 머리털 밑 신경세포를 괴롭히는 일이다.

선행과정이 좀 지저분해졌지만 <제국>을 읽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물론 내용과 개념을 이 잡듯이 이해하려고 달려든다면 또 다른 편두통의 원인이 될 것이다.조금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다.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이해하고 그렇지 못한 부분은 적당히 넘겨가면서 보는 유연성도 필요하다.<제국>을 읽는게 무슨 수학 정석의 미적분의 공식을 적어내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필요한 도구들은 있다.사회과학적 관심과 상상력,그리고 졸음을 이겨낼 정도의 끈기말이다.

<제국>으로 들어가자.도대체 '제국'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 책을 들고 다녔더니 회사차 운전하는 기사 아저씨가 그런다. "어..<제국>...음..무슨 대하 무협 소설인가 본데 "..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네그리는 제국의 기본 가설을 이렇게 말한다."주권이 단일한 지배 논리하에 통합된 일련의 일국적 기관들과 초국적 기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를 띠어 왔다는 것.이러한 새로운 전지구적 주권 형태를 제국 이라고 부른다"

네그리는 맑시즘을 주권개념으로 이해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어쨋거나 쉽게 생각해서 '제국'은 세계화된 어떤 힘이다.과연 이런게 있을까 하고 싶을때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끌고 가자.전지구적 주권형태가 없다라는 것도 '제국 비판' 의 하나인데 그걸 물고 늘어지면 진도 안나간다.'제국'의 독특한 점은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세상은 거대한 어항이고 그 어항은 물로 가득차 있다.우리들은 물고기인셈이다.제국의 바깥이 없다는 것은 이 체제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다  '제국'의 범주안에 포섭된다는 것이다.이것도 이해 안된다고 할 사람들이 많다.네그리가 드는 예를 보자면 수많은 국제적인 NGO들도 결국엔 '제국'을 땡실 땡실하게 만들어주는 개량적 제도들일 뿐이다.좀 더 나가면 네그리는 제 1세계와 제 3세계의 구분도 없고 남과 북의 구분도 없다고 말한다.역사적으로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제국적 이행과정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기존 좌파들의 전략에 대한 네그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전지구화에 대한 저항과 국지성 방어라는 이러한 좌파적 전략은 많은 경우에 국지적 정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율적이거나 자기 결정적이지 않고 실제로는 자본주의적 제국 기계의 발전에 연료를 공급하고 그 발전을 지지하기 때문에 해롭기도 하다.국지적 저항전략은 적을 잘못확인하고 그래서 적을 감춘다.오히려 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부르는 전지구적 관계들의 특정한 체계이다.

이미  비판하고 싶은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가득차 있을 것이다.그렇지만 비판은 수첩 속에 적어 놓고 계속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도를 빼야한다.

아..한편에서는 상식적으로(특히 반미정서가 높은 우리에게 소구력이 있는 것인데) '미국이 제국 아니냐'고 말한다.그러나 이들은 단호히 어느 특정 국민국가도 '제국'이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제국으로의 이행은 근대적 주권의 황혼기에 나타난다.제국은 개방적이고 팽창하는 자신의 경계안에 지구적 영역 전체를 점차 통하하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 하는 지배장치이다.제국주의적 세계 지도에서 몇 가지로 구분됐던 국가의 색깔들은 제국적인 전지구적 무지개 속에서 합쳐지고 섞일 것이다.미국은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하지 않으며 진정으로 어떤 국민국가도 오늘날에는 제국주의적 기획의 중심을 형성할 수 없다.

미국의 연방헌법과 미국이라는 나라의 예외성은 '제국'적 속성(제국주의적이 아닌)을 지닌다.네그리는 로마제국의 권력체계를 인용한다.미국은 출발선상에서 공화주의적 마키아벨리 전통과 연결된다.특히 폴리비우스의 제국적 로마 모델을 따른다.군주정,귀족정.민주정의 3원분립은 팽창성을 특징으로 한다.하지만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이 제국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제국이 땅덩어리가 있는 영토주의적 국민국가 수준의 상상력은 벗어난 일이란 것은 짐작할 수 있을것이다.

네그리는 '제국'을 기획하기 위해 선배 철학자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스피노자,마키아벨리,맑스,푸코,들뢰즈가 자주 언급된다.그중 가장 먼저 꼽아야 사람은 스피노자이다.그는 스피노자의 '내재성' 개념을 차용한다.그리고 다음으로 푸코의 '생체정치학'은 인용한다.푸코는 '훈육사회'와 '통제사회'를 구분하였다.<제국>의 이행은 통제사회로의 이행선상에 있다.제국의 지배대상은 사회생활 전체이며 따라서 제국은 전형적인 생체 권력 형태를 나타낸다.개인들에 대한 사회의 통제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속에서 그리고 신체와 함께 이루어지기도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제국'은 닫힌 체계이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하는 물고문같은 것이다.그러나 '제국'기획은 그게 목적이 아니다.탈출구가 있고 전복의 가능성이 훨씬 많이 열려있다.네그리와 하트는 그래서 '제국'을 더 밀고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그렇다면 어디에 전복의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정답은 '제국' 그 자체가 스스로를 붕괴시킬 답을 안고 있다.제국은 제국 자신이 지닌 일반법칙에 의거해서만 그리고 제국이 제공하는과정들이 지닌 현재의 한계들을 넘어 그 과정들을 밀어붙일 때에만 효과적으로 논의 될 수 있다.우리는 그러한 도전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전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지구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 제국과 만날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열나게 인용하는 연구도 있는 반면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배격하는 것도 있으니 흔히 말하는 유럽 형이상학의 족보들이다.데카르트,칸트,헤겔...특히 '제국'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식의 변증법과는 단절하라고 말한다.천천히 읽어보면 어렵지 않다.근대 권력 자체가 변증법적이라면 탈근대주의적 기획은 비변증법적이어야한다는 논리가 된다.바바(탈식민주의 호미 바바이다)의 일차적 공격대상은 이분법적 분할이다.전체 탈식민주의 계획은 식민주의적 세계관이 근거하고 있는 이분법적 분할에 대한 거부에 의해 규정된다.세계를 둘로 나누어져 있지도 않고 대립 진영들(중심 대 주변,제 1세계대 제 3세계)로 구분되지도 않으며 오히려 셀 수 없는 부분적이고 이동적인 차이들에 의해 항상 규정되고 있다.세계를 이분법적 분할의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바바는 또한 총체성 이론들과 사회적 주체들의 정체성 동질성 본질주의에 관한 이론들을 거부하게 된다..바바의 분석을 따라 다니는 그리고 일관되게 이러한 다양한 적대자들을 열결시키는 유령은 헤겔의 변증법이다.즉 서로 대립하는 본질적인 사회적 정체성들을 일관된 총체성 안에 포섭하는 변증법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도입부에 '제국'에 대해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그리고 '제국'으로의 이행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유럽 근대를 분석한다.(책의 구성이 흥미롭다.) 네그리는 근대성의 두가지 양식이 있다고 말한다.혁명과 반혁명이다.유럽 르네상스기는 신이라는 초월성을 거세한 혁명의 시간이었다.그러나 이내 반혁명이 이루어지고 그들이 승리한다.르네상스가 종교전쟁,사회전쟁으로 마감했던 것처럼.그러나 반혁명이 성공했다고 모든게 끝이 아니다.내전은 근대성 개념속에 흡수되어 끊임없이 내적인 위기를 조성한다.근대성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가의 보도를 들고 나타난 것이 '계몽주의'이다.계몽주의의 일차적 과제는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수많은 주체들을 훈육시킬 수 있는 선험적 장치를 구축함으로써 중세 문화의 절대적 이원론을 재생산하지 않고 내재성 관념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애국하는 '국민국가'의 화려한 등장하여 질서와 명령을 더 효과적으로 통제한다.19세기-20세기에와서 근대적 주권의 국민 국가들 사이의 갈등은 내전을 가져왔다.국민들은 갈등 상태의 계급 주체들의 신비화로서 혹은 대역으로 제시되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제국주의'가 등장하는 것이다.(제국주의와 제국은 완전히 다르다) 국민국가는 계급 투쟁과 계급 투쟁의 전복 효과들을 해소하고 실질적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제국주의를 필요로 한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들어보자.자본주의적 정복의 역사적 새로움을 비자본주의 환경 자체를 자본화하는 것으로 본다.자본주의적 재생산 및 축적의 핵심은 반드시 제국주의적 팽창을 함의하고 있다.자본은 달리 행동할 수 없다.자본주의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제국주의의 해악과 대결할 수 없다.

어찌 어찌하여 식민주의도 제국주의도 마감하고 있는 시점이 중요하다.여기서 한참 기다린 '제국'이 나오는 것이다.

'제국'이 안과 밖이 없는 체제라면 도대체 누가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가? 네그리와 하트는 생산 경제에서 정보경제로의 이행이 가져온 생산양식과 노동 주체의 변화에 촛점을 맞춘다.전통적의미의 프롤레타리아는 더이상 혁명 주체가 될 수 없다.그들이 중요시 하는 것은 '비물질 노동'이다.그리고 '다중'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유출된다.Mutitude는 사전적으로 특정 지배장치에 의해 구조화되지 않고 소통하면서 주체적인 욕망과 주장들을 결집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이들의 저항은 근본적으로 도주,탈주,유목주의를 표방한다.<제국> 하에서 다중은  아무런 매개 없이 '제국'과 면하기 때문에 더 폭발력을 갖는다.다중이 갖는 요구는 크게 전지구적 시민권,사회적 임금권 등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재전유이다.생산수단의 재전유는 지식,정보,소통,그리고 정서에 대해 자유롭게 접근하고 그것들을 자유롭게 통제하는 것이다.이를 통해 다중은 자기통제 및 자율적인 자기 생산을 가능케한다.궁극적으로 다중은 제국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다르게 움직이는 기계(기계가 공장 기계가 아니다.)를 발명하는 것이다.(짧게 쓰려고 했는데 결국 또 길어졌다.ㅜㅜ 인용이 많다보니 ㅜㅜ)

<제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따로 적지 않아도 될 듯 하다.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보 네트워크(^^) 속에서 쉽게 <제국 비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조정환/정성진 논쟁 부터해서 등등등) <제국>의 역자이자 국내 자율주의 전도사인 전남대 윤수종 교수 역시 책 말미에서 네그리와 하트에 대해  비판적인 코멘트를 단다. 그들이 제국으로의 이행을 강조하다보니까 근대적인 성격의 잔존에 대해서 과소평가한 점, 그리고 이행 경향을 과도하게 강조하여 완전히 다른 사회로 넘어간 것 같이 설명한 점 등을 지적한다.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그러나 네그리와 하트의 책 <제국>이 유럽적 상황에서 쓰여졌다는 저자들의 한계설정,그리고 시대의 추이를 미루어보는 예언적 성격 등을 고려한다면 그 부분만 물고 늘어지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그렇다면 변혁 투쟁 역시 그 변화에 따라서 변화해야한다.적들이 대포 쏘고 있는데 돌도끼들고 뛰어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다.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의미심장하다.

개인적으로 자본의 입체적 압박에 숨을 못쉬고 패배주의에 빠져들고 있던 시점이어서 이 책<제국>이 더욱 반갑다.물론 세계와 현실에 대한 인식차이,개념의 모호성,실천적 구성력의 부재,과도한 낙관주의 등의 단어들도 머릿 속을 빙빙 돈다.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즐거웠던 것은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이 이러한 '낙관적인 선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잠시 즐거운 꿈일지라도 말이다.)

천천히 우리는 전지구적 잔치를 위해 도착하고 있는 아주 맛있는 많은 요리 접시들처럼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오는 기증품들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있다.상이 꽉차고 있다.축제를 준비하자!   

p.s)딱딱한 내용이 많지만 간혹 등장하는 문학적인 표현들이 감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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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6-04 16:33   좋아요 0 | URL
^^..지금 막올렸는데 추천 올려주신분 누구삼? ㅋㅋ 알라딘의 온정주의 ㅋㅋ.
재미있었는데 절대시간이 부족해서 읽는데 너무 오래걸렸어요ㅜㅜ
리뷰 쓸 능력이 안되다보니 정리를 하고 말았군요.ㅋㅋ.몰라 어쨋든 재미있었다니까요^^

2007-06-04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6-04 16:51   좋아요 0 | URL
오오..다 비밀이야..^^ 나오늘 한가해요.물론 퇴근 전까지만.이게 거의 한 달만의 일인듯...
어쨋거나 반갑습니다.요점 정리.. 복습한다고 정리한거에 가까와서리...직딩이 따라가기에도 벅찹니다만..직딩에게 필요한 것은 계발서가 아니라(사방이 그런 분위기인데 뭘 또) 인문사회과학 책이라고 생각해요.그걸로 자기계발 좀 해보려고요.^^
오..서재 2.0은 댓글 수정 하니까 뿅하고 글박스가 뜨누만요..좋은데요.
서재 사진도 크게 볼 수 있구나.사진 클릭하니까 또 뿅하고 커니누만
제 사진 멋있는데..저기 쿠바래요.

드팀전 2007-06-04 21:46   좋아요 0 | URL
소심모드. 이건 사실 더 공부많이 하신 분들이 더 좋은 리뷰를 올려주셔야하거든요.소박하잖아요..마광수에게 <즐거운 사라>가 있다면 네그리에겐 즐거운<제국>이 있다.^^ 반가와여..근데 그 여자 누구에요.과문해서리..ㅜㅜ

기인 2007-06-04 22:21   좋아요 0 | URL
ㅋ 저도 추천했어용~~ 퍼가용 :)
 
문화연구 하룻밤의 지식여행 12
지아우딘 사르다르 지음, 이영아 옮김 / 김영사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나는 '하룻밤000' '한권으로 읽는 000'을 거의 읽지 않는 편이다.그런데 지아우딘 사르다르의 <하룻밤의 지식여행 -문화연구>를 덥썩 골랐다.세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요즘 너무 바빠서 책볼 시간이 거의 없다.오직 화장실만이 나의 해방구이다.두꺼운 책을 들고 화장실에 앉아 있어본사람은 안다.팔이 얼마나 아픈지...결국 얇은 책이나 재생지로 된 책이 가장 좋다.두번째 이유는 올해 소비사회에 관심을 갖고 책을 몇 권 읽다가 결국 옛날에 관심을 가졌던 문화연구까지 생각이 뻗쳐버렸던것.그리고 세번째는 두번째의 연결 선상에서 비슷한 주제에 가지고 대학원 공부까지 한 바람구두님이 이 책을 읽고 서평까지 쓰셨다는 것. 대략 이런 세가지 이유가 섞여서 거의 몇 십년만에 '하루만에 읽는' 책을 손에 들었다.

이 책은 특정장소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 까지만 읽는 책이었다,그래서 이 책에서 한정하듯이 '하룻밤'에 읽을 수는 없었다.말처럼 '하룻밤'에 읽을 수 있었다면 나는 다음날 병원에 가서 관장을 했어야 할 지도 모른다.(하룻밤에 읽지 못하게 한 나의 건강한 장운동을 위해 건배!!)

사르다르의 <문화연구>는 결코 쉬운 내용이 아니다.아무런 사전 지식없이 고등학교때 압축판 소설 보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가는 '하룻밤'에 나가떨어질 수도 있다.책은 얇고 만화도 많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은 문화연구의 개념부터 반세계화 분석까지 그 스펙트럼이 광활하다.그러므로 사회과학적 용어들과 사회과학적 상상력에 대해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상태라면 문화연구에 대한 힘든 워밍업이 될 수도 있다.

사르다르의 <문화연구>를 통해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문화연구'의 범위가 '협의의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이것은 '문화연구'가 가진 '경계선넘기' ,다른 학문과의 '이종결합' '잡종성' 등에 기인한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개별적 학문으로 받아들인 '탈식민지론' '페미니즘' 오리엔탈리즘'이 광의의 '문화연구' 개념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생각치 않았다. 문화연구가 가진 '유목적' 인 성격은 사회과학,인문학,예술,심리학,철학,정치학 ..등등의 주제와 방법론을 빌려와서 제것으로 만들었다.그래서 현대의 문화연구는 거의 모든 것의 학문이자 비판자입장에서는 아무런 학문도 아닌 것 '비학문'이 되어버렸다.

내가 협의의 문화연구 개념만을 문화연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내 전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학과 커리큘럼에는 대중문화론,대중매체 비평론,미디어 분석론,현대문화론 등등이 매학기 들어 있다.학과의 학문적 역사가 짧아서 사실 여기저기서 많이 퍼온다.어쨋거나 그런 연유로 스튜어트 홀에서 시작해서 부르디외 정도까지 해당되는 전통적의미의 '문화연구'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한 때 연애도 안되고 회사도 지겹고 했을 때는 '문화연구'나 '미학' 공부 하러 유학갈까도 심각하게 생각했다.불어나 독어는 ABC도 모르니까 포기하고 '뉴욕 대학' 에 홈페이지를 들락인적도 있었다.(그때 갔으면 결혼도 못했을 테고 인생도 달라졌을 게다.) 대학에서 배운 '문화연구'는 주로 '문화연구의 방법론' 과 '텍스트 분석' 이었다.딱잘라 말하자면 '대중문화연구'라는'문화현상과 문화상품'에 대한 철학과 분석, 논쟁들이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알튀세르와 그람시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것이 그 때 였는데 이 책에서는 딱 절반까지만 그런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연구' 개념이 나온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무었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탈식민론' '페미니즘' '과학과 문화' '오리엔탈리즘' '소수자 문화' '퀴어이론'등에 대한 이야기도 '문화연구'의 주제 안에 들어와 있다.언급되는 학자들을 보는게 오히려 쉬울 수 있다.가야트리 스피박,에드워드 사이드,토마스 쿤,아이즈드 아마드,호미 바바,도나 헤러웨이,벨 훅스 등등.... 사실 이런한 '잡종성'은 문화연구의 장점이기도 하면서 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저자 역시 문화연구의 애매한 성격때문에 거의 모든 것이 '문화연구'로 정당화 될 수 있다고 말한다.학문의 한 분야로서의 문화연구는 그 윤곽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해있다고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연구' 가 공부되어야하고 생존해야하는 정당성은 어디에 있을까? ... 저자는 '권력'에 있다고 말하는 듯 하다.문화연구는 학문으로서도 부대끼고 이데올로기로도 종교도 작용하지 못한다.그리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주거나 행동의 지침서도 되지 못한다.그렇지만 '문화연구'는 우리가 '문화 권력'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이에 저항하는 방법과 수단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미가 있다.설령 문화연구가 너무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적 장을 펼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때라도 말이다.

철학은 의심이라고 말한다.정말 좋은 말이다.의심해보는건 어떨가? 내가 오늘 본 TV 프로그램에, 내가 어제 먹은 맥주에, 내가 오늘 입은 옷에, 내가 어제 한 말에, 내가 지난주에 정당하게 번 돈이라는 것에,내가 한달전에 아파서 병원에 간 것에,내가 앉아서 컴퓨터 자판을 누르는 것에.... 어떤 권력이 어떤 형식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문화연구는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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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5-20 13:11   좋아요 0 | URL
저도 읽었던 책인데, 제 읽어본 이 시리즈의 책들 가운데서는 번역이 가장 안 좋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자인 사르다르는 수준급이지만...

드팀전 2007-05-20 22:06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시리즈는 처음이었습니다.이런 책의 장점은 대략적인 족보를 한번 훓어보는 즐거움인 반면 압축과 단순화를 하다보니 전후 맥락을 모르면 오히려 더 난해해지는 경우가 있더군요.번역은 어땟는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번역이 어색했어도 '음 원래 이렇게 꼬인 내용인가보네' 하면서 넘어갔으리라 생각됩니다.^^
다음번 화장실에는 푸코를 데리고 갈까요..^^
 
유한계급론
토르스타인 베블런 지음, 김성균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유한부인'이란 말을 처음 들었던 것이 언제쯤이었을까?

 옛날 일을 뒤적이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그 프로그램에서 언젠가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주제로 다루었다.프로그램의 내용은 소설<자유부인>이 반영한 한국 전쟁 이후의 성 모랄의 변화와 소설로 촉발된 사회적 풍조에 대해 논쟁이 중심이었다.물론 당시 소설 <자유부인>은 퇴폐풍조를 양산한다고 철퇴를 맞았다.내가 '유한'이란 말을 처음 들었던게 그 프로그램에서였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유한계급'이라는 말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유한'이라는 한자어가 낯설기도하지만 일단 '계급' 이라는 말이 주는 '붉은 기운'에 대한 거부감이 더 큰 것으로 추측된다.또한 '유한계급'이란 말이 시간을 건너며 의미가 희석된 부분도 한 몫 할 것이다.

비록 '유한계급'이란 말이 사회학에서든 일상에서든 흔히 사용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일상어'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그 말이 가진 함의가 통시적인 사회성을 확보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의미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베블런이 말한 '유한계급적' 속성은  장롱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옥가락지처럼 자본주의의 전지구화가 확산되는 이 시대에도 유효하다.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을 쓴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며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도움이 된다.시간이 허락한다면 미국사 관련 책들중 19세기 후반부분을 참고하면 재미가 있다.19세기 후반 미국은 거대한 부가 집중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 만세!' 천하였다.남북전쟁 동안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 돈 냄새를 맡은 신흥 부르주아들이 욱일승천하던 시기였다.서부 개척과 내륙 개발을 위한 철도는 자본의 기름에 불을 끼얹는다.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미국사>(케네스 데이비스)는 이 과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서부는 새로운 자원,소비의 시장이 된다.철도증설은 땅, 노동, 철강, 자본 네 가지 기본요소가 필요했다.땅은 연방정부, 값싼 노동력은 동부와 서부의 이민자들 ,철강은 카네기, 자본은 jp모건 부자...

요즘 자본가들은 국가를 자신의 적인척하며 '작은국가'를 이야기하지만  자본주의의 성공에 있어서 그들은 거대한 국가의 도움을 제대로 받아 왔다.

페르낭 브로델은 자본주의의 성공을 위해 몇가지 요소를 언급한다....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사회와 국가가 자본주의의 독과점을 인정해야한다.그리고 초과이윤을 수급할수 있는 해외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19세기말 미국은 이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또한 그 때는 기업들의 미친 말발굽에 가격당한 노동자들의 비명도 어느때보다 높았던 시절이었다.

<미국 민중사>(하워드 진)는 1886년은 동시대인들에게 '거대한 노동자 봉기의 해'로 언급한다.1886년에는 1400여 회의 파업에 50만 명의 노동자가 참여했다.그리고 1893년 역사상 최대의 경제 위기가 도래했다.42개의 은행이 파산했고 1만 6000개의 사업체가 문을 닫았다.1500만명 노동자 가운데 300만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1893년 경제불항은 이윤 확보를 위해 해외팽창의 도화선 구실을 했다.미국 상품을 위한 해외시장이 국내 저소비 문제를 경감시키고 1890년대에 계급전쟁을 야기했던 경제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사고가 팽배해졌다.자본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쌍두마차로부터 나온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미국은 스페인과의 어거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푸에르토리코,하와이,필리핀 등을 합병해나간다.

미국이라는 신세계는 구대륙의 귀족정치에 도전해서 성립된 것이다.그러나 그건 말만 잠시 바꾸어탄 것 뿐이었다.건국의 아버지로 상징되는 계몽주의 엘리트들은 그들의 부를 계속 세습해나갔다.유럽식 귀족들은 사라졌지만 의식적으로 유럽귀족을 동경하는 미국형 신귀족들이 부를 독점했으며 산업혁명에 따른 신흥부자층이 뒤섞이며 19세기 상류층을 구성하였다.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이들 상류 부유층의 속성을 낱낱이 파해친다.대상에 대한 분석은 사회과학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인류학적,역사적,심리학적 접근이 주를 이룬다.흔히들 베블런을 미국 제도학파의 태두로 언급한다.그는 다윈으로 부터 응용한 '사회진화론'으로 사회를 분석한다.그는 사회 구조의 진화를 제도들의 자연선택과정으로 보았다.즉 지금까지 형성된 인간의 제도나 인간 성격의 진보는 가장 적합한 사고습관의 자연선택의 결과이며 적응 노력이라는 것이다.그 결과 제도들의 집합으로 구성되는 생활양식의 성격은 심리적인 측면에서 지배적인 정신적 태도 내지는 지배적 삶의 논리로 규정되며 '지배적인 성격유형'이라는 용어로 정리된다.

그는 '자연선택'이라는 차원에서 '유한계급'의 탄생을 설명한다.유한계급은 평화적인 미개단계에서 약탈문화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이것은 문화의 진화과정에서 사유재산의 발생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자연선택과정에서 우성은 남성들이다.그들은 '기술과 도구의 활용'을 통해 '호전성' 과 '용맹성'을 드러낸다.약탈적인 힘의 과시는 문화내에서 '존경의 대상'이 된다.또한 가부장제에 바탕을 둔 남성의 약탈성은 여자를 비롯한 사적 재산을 축적을 가능케 한다.베블런은 소유권 생성의 근본적인 동기를- 공인된 자기과시적 성향인-'경쟁'에 두고 있고 '부'를 소유하는 것이 세인들의 선망과 부러움을 사는 '명예'의 표시가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베블런은 '약탈단계'에서 발생하는 '유한계급'을 진정한 의미의 '유한계급'으로 보지는 않는다.이 시기는 이론상의 기원에 해당한다고 본다.그는 약탈문화가 금력과시문화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완전한 의미의 '유한계급'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한다.그는 완전한 형태의 유한계급제도의 기원도 이 시점으로 잡고 있다.그렇다면 금력과시문화 단계에서 '유한계급'을 유한계급이게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일까?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를 들고 있다.

먼저 중요한 것이 '과시적'이라는 말이다.단순히 부와 권력을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그들은 부와 권력을 그 증거로 제시하고 공인받아야 하며 차이를 두어야한다.그렇기 때문에 금력과시가 가능한 소비재를 선호한다.그러나 이러한 '과시적 소비' 역시 하류계층에 의해 추격을 받는다.유한계급들은 한발짝 앞서가는 전략 내지는 '검소'라는 또다른 '과시적 소비'를 통해 이를 비웃는다.그리고 '금력'을 문화적으로 또는 취향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방식을 선택한다.예를 들어 고급 문화를 향유하며 그 분야의 식견을 갖는다든가 고급 건축물등을 소유하며 금력과시를 미학적으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특히 '유한계급'에게 중요한 것은 '여가'이다.여가라는 것은 비생산적 노동에 종사한다는 즉 노동으로 부터 면제받는다는 의미이다.금력과시문화 단계에서 발달된 산업사회의 단계로 가면 남성들은 세습받은 귀족을 제외하면 사회 활동에 관여한다.여기서 '유한부인'라는 '대리여가'층이 발생한다.남성들의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는 가정 내에서 순응주의적인 '여자'를 대표선수로 내세우게된다.여자들의 고급스러운 예법,고급스러운 모임,고급스러운 태도,고급스러운 소비들은 모두 남성 유한계급의 명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여성들은 사회에서 생산활동에서 배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이러한 습속들을 내재화한다.또한 종교단체나 봉사활동을 통해 여가를 소비하며 남성 유한계급과 가족의 명예를 높인다.여성들의 이러한 '대리여가'와 '대리소비'는 유한계급들이 부리는 질 좋은 하인들에게 요구되는 가치와 동일선상에 있다.유한계급 아래에서 고급예법을 통해 주인의 가치를 높이는 질좋은 하인들 역시 결국은 남성 유한계급의 가치를 높이는데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영화 <남아 있는 날들>의 안소니 홉킨스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책 후반부로 가면 베블런은 유한계급이 향유하는 의복,스포츠,도박,종교,사회봉사,고등학문 등에 내재되어 있는 금력과 여가라는 낭비적인-비생산적인-특질등을 지적해낸다.특히 카톨릭의 과시적 문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그였던 만큼 유한계급과 동격에 둘 수 있는 성직자와 종교적 의례의 과시적 속성에 대해 날카롭게 반응한다.

베블런은 기본적으로 유한계급문제가 사회문화적 발전에 장애가 된다고 보고 있다.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는 사회의 중심가치가 되어서 하류계층에게도 직접적으로 주사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애어른 할 것 없이 '부자되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예견한다.(요즘은 돌잡이에서도 돈 집어야 부모와 친척들의 박수소리가 가장 크다.책 잡으면 좋아하며서도 웃음이 반쯤 줄어든다) 소설가 이순원이 <압구정에는 비상구가 없다>에서 '우리의 발걸음은 매일 아침 한걸음씩 압구정으로 향한다'라고 했던 지적과 같은 말이다. 상류층을 따라하는게 도대체 뭐가 문제가 될까 하고 질문할 수 있다.베블렌은 유한계급과 보수주의장에서 멋진 표현을 선사한다.

'일체의 에너지를 일상적인 생존투쟁에 쏟아부어야 하는 절대빈곤자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보수적일수 밖에 없다.동일한 맥락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에 불만을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유한계급제도는 가능하면 하류계급의 생존수단까지 박탈하여 하류계급의 소비력과 가용 에너지를 축소시킴으로써 하류계급을 보수화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사고습관을 배우고 거기에 적응하려는 하류계급의 노력마저 불가능하게 만든다.'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없다는 말도 동일한 선상에 있다.하류층을 비롯해 극빈층과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의식혁명을 통해서 삶을 바꾸라고 하는것은 폭력이다.오히려 자신이 하류층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만을 상징하는 유한계급적 속성일 뿐이다.베블렌의 명문을 그렇게 이해해도 양해가 된다면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현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그는 유한계급 문제를 '소비자'의 문제에만 국한했다.이 문제는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적 받은 바 있다.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의 사회>에서 '생산이 소비에 작용하는 과정'을 설명했다.정작 베블런이 쉽게 지나쳐버린 부분은 상류층의 생활습관이 어떻게,왜 하류층에게 그대로 답습되는가 하는 부분이다.그저 적응과 모방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는 지점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조직되고 어떤 습관들을 내재화하고 어떤 방식으로 지배적인 관념을 따르게 되는지 등등...베블런은 이 문제를 후배 학자들에게 넘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을 한동안 들고 다녔더니 후배가 지나가면 언뜻 그런 말을 한다."아니..요즘도 무슨무슨 계급' 하는게 있습니까?" 대꾸하려다가 일일이 대꾸하면 길어지기 때문에 그냥 웃고 말았다.아마 옛날에도 무슨 무슨 계급 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꼭 그런 말을 한다.계급이란 말이 무서운가 보다 ^^(하도 무서워해서 바꿔주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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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14 14:39   좋아요 0 | URL
어휴 무쟈게 깁니다. 뭔가해서 읽으려고 들어왔다가 지금 읽기엔 힘들거 같아 댓글만 달고 도망갑니다.

허선비님 2007-12-03 13:29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책 뒷부분 번역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읽다가 하도 답답해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궁금해하다보니..
흘러흘러 여기까지 왓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