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비전 1 - 서구 정치사상사에서의 지속과 혁신 정치와 비전 1
셸던 월린 지음, 공진성 외 옮김 / 후마니타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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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광우병'과 별로 상관이 없다. 아이들의 작은 손에까지 '미친 소를 먹고 싶지 않아요'라는 피켓이 들려진데는 광우병이 도화선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뒤늦게 광우병의 의학적 위험성에 대해 따져보고 '촛불'과 연결시키는 것은 죽은 아이 고추 만지는 짓이다.(물론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 )  '촛불'은 초기 단계에서 '광우병의 과학적 증거'라는 -사실은 공학적이란 말을 쓰고 싶다.-틀거리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넓은 의미로 말하자면, 그것은 현 정부의 '정치의 부재' 상황에 대하여 대중이 '정치적 인 것' 으로 대항한 것이다. 촛불의 전개 과정에서 보여준 -앞으로도 지속될- 이명박의 결정적 한계는 언제나 정세 파악에 둔하다는 것이다. 시장 가서 배추 파는 아줌마와 눈물의 포옹을 한다고 정세 파악이 되는게 아니다. 한국민에게는 불행하게도 대통령의'정치철학' 이란게 밑바닥 수준이다 보니 배멀미는 기본이고 난파 상황까지 걱정해야 한다. 그의 정치적 좌우명은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자'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그의 자세도 촛불때와 거의 유사하다. 

앞서서 '촛불'을 '정치적인 것'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요즘 말이 많은 '정치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 말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칼 슈미트의 말을 끌어오자면 '정치적인 것'이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특징이며 '갈등과 적대'의 개념이다. 최근에 내한한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을 창조해 가는 무엇으로 전제한다. 그러면서 본래의 정치를 '배제된 자들의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정치와 비전>의 저자 셀던 월린에게도 '정치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책의 전부라고 할 만큼 중요하다. 그렇지만 월린은 '정치적인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이 정치적인가?' '주어진 행위나 상황을 정치적이라 부르려면 그것이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가?' 라는 질문들을 하면서 '정치적인 것'의 윤곽을 말한다. 그렇지만 정확한 대답은 없다. 월린은 '무엇이 정치적인가를 보존하는 작업이 어렵다. 는 것이 이 책의 기본주제라면서 독자의 분발을 유도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에 대해 몇 가지 기본적인 전제들을 제공하기는 한다. 먼저 '정치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대해 갖는 관계'이다. 예를 들어 '권위' 라는 정치적 용어가 있다고 하자. 이 용어는 개념적으로 혼재되어 사용된다. '아버지의 권위', '통치자의 권위' 등등... '정치적인 것'을 말할때 '아버지의 권위' 는 분명히 공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적인 개념이다.(사적 권위가 또 어떻게 정치적으로 구성될 수 있나는 다른 문제이다.) '정치적인' 권위는 그것이 공통의 속성에서 고려된 사회의 이름으로 표명된다는 의미에서 다른 형태의 권위와 구분된다.  '공통된 것'은 또한 유동적이며 '교차적'이기도 하다.저자가 정치철학의 범주를 다루는 부분은 유비한다면 '정치적인 것'의 개념도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정치철학의 범주를 바라보는 월린의 관점은 '연속성'과 '유동성'이다. 정치철학은 어떤 천재 하나가 발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물줄기에서 '재발견'한다. 저자는 구체적인 정치사상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서구 정치사상의 전통이 두가지 모순된 경향을 드러내왔다고 말한다. 하나는 과거로의 무한한 회귀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누적의 경향이다.  이런 '지속과 누적 경향' 속에서 정치철학의 범주는 유동성을 갖는다. 즉 그 경계의 다층적인 침투로 인해 불분명해진다. 예를 들어 고전시대의 정치는 '선'이라는 지고의 가치에 대한 위상이 중요한 문제였다면 근대의 정치에서는 '경제'의 문제가 정치철학의 내파에 직접적인 자극이 된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의 1장에서는 이런 서양정치사에서 드러난 정치철학과 정치의 추상적이며 개괄적인 설명이 돋보인다. 대중들은 읽기를 싫어하지만 정치철학의 이론화가 갖는 의미와 그 효용성, 정치 사상의 전통과 혁신,정치철학과 정치이론사이의 관계 등등. 1장에서 거론하는 주제 하나 하나가 모두 숨이 가쁠만큼 거대한 것들이며,또 기본적인 것들이다. 원래 짧은 질문들이 훨씬 어렵우며 긴 대답이 필요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정치란 무엇인가?') 그런면에서 정치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1장을 수시로 곱씹어 보라고 제안하는 역자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렇다면 수 천년의 서구 정치사상사를 한 타래로 묶는 저자의 이론적 줄자는 무엇일까? 저자는 서구정치사를 '정치적 혼돈으로 부터 정치적 우주'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고 말한다.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정치체계는 '질서'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와 '철인'을 통해, 중세 기독교는 '그리스도'와  '교황의 권위'를 통해 그러기를 원했다. 저자는 정치철학의 주제가 대체로 이렇게 정치를 질서의 요구와 양립할 수 있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로 구성되어있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저자는 1장 '비전과 상상력' 장에서 대상과 사건에 대한 기술적 설명으로의 비전과 달리 '상상적인 것'으로의 비전을 제시한다. 정치 사상가들은 이런 상상력이 이론의 필수적 요소로 믿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론가들이 역사를 초월하고자 할 때 쓰는 요소였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삶을 상상적으로 재질서화하는 것이었다. '비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월린은 '운동의 정치'가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그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해 공격하면서 '도전과 반응'이라는 정치사의 연속성 속에 '운동적 참여'에 높은 가치를 둔다. 그를 규정하는 한 단어로 '참여의 정치철학자'라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성 싶다. 여기서 역자의 후기에도 나오는 '버클리와 시카고학파'의 차이가 드러나는 듯 하다. 셀던 월린은 '참여민주주의' 지향적인 버클리파의 주도자였다. 경제학에서 시카고는 밀턴 프리드만의 통화주의로 이름높다. 정치학에서도 시카고의 학품은 버클리와의 비교를 통해 이해되는 정도다. '운동의 정치'에 조금은 비관적인 최장집이 시카고대학 출신이란 것은 안다. 그것이 서로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추상적이며 개념적인 1장을 끝으로 <정치와 비전>은 익숙한 순서에 의해 서구정치사상을 따라 간다. 연대기적 구성이긴 하지만 학자들의 정치철학을 하나씩 집어서 입어 넣어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각 시대의 중요한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중심으로 어떤 이론적 함의와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앞서 강조한 일련의 '연속성과 비전'의 차원에서 수 천 년 역사의 정처철학사에서 중요한 지점에 새롭게 구성되어지는 정치이론의 지형도를 그려내고 있다.

<정치와 비전>을 읽다보면 어떤 흐름의 단절성 같은 것을 느끼기 어렵다. 그 점이 커다란 장점이다. 연속성에 대한 저자의 철학과 함께 이행기-저자는 그런 말을 쓰지 않았지만-에 대한 배려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서구정치사상사의 시작은 플라톤으로 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플라톤을 정치철학의 아버지의 위치에 올려놓으면서도 또한 정치를 철학에 종속되게 만든 것으로도 본다. 몇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되는데 저자는 플라톤 철학의 중추적 약점으로 정치적인 것의 관념과 정치의 관념사이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본다. 쉽게 말하면 '선의 이데아'에 대한 복종은 '조정'이라는 의미의 '정치'와는 별로 상관없는 개념이다. 흔히들 플라톤을 말한때 '절대권력'에 대한 옹호자 정도로 취급하는 논점이 지난 한계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물론 월린 역시 플라톤이 '사심없는 절대권력'이라는 쟁점적인 문제를 던져놓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모델은 먼 미래에 레닌의 '사심없는 혁명엘리트'로 이어진다.월린은 플라톤의 철학자가 공동체의 선과 참주정의 방지라는 현실적인 목적에서 나온 것임을 말한다. 그렇지만 너무도 빨리 플라톤의 철학은 비판에 직면한다.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의 능동적 통치집단과 수동적 공동체 사이의 경계를 비판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의 일원성이 아니라 선의 다원성이라는 측면에서 시민의 입법적 기능과 개인의 권리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정치와 비전>의 1권은 고대 정치철학을 다루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작으로 하여 근대 정치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에서 마무리된다. 애써 근대적 이성의 특징이라는 구획짓기를 통해 구분해 보면 책의 구성은 이런 셈이다.

1) 고대 시기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2) 제국의 시기 : 스토아  3) 중세 시기: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퀼라스 5) 종교 개혁의 시기 : 루터와 칼빈.

흥미로운 시각은 제국의 시기와 종교 개혁의 시기이다. 독립적으로 긴 시점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이행기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특히 셀던 월린은 제국의 시기를 서구정치철학사의 암흑기로 꼽는다. 흔히들 중세를 사회적으로 암흑기라고 보는 관점(이것도 최근에는 수정되고 있다.)과 다르다. 스토아학파의 탈정치적 이론들은 우주론적인 질서 속에 정치를 깡그리 말아넣고 말아버렸다는 것이다. 월린은 아예 이렇게 말한다 "가공할 만한 권력 앞에서 철학의 자랑스런 전통은 비굴한 무력감으로 추락했다." 정치와 영성의 문제를 혼돈하여 상호 침투시켜 버리는 초월적인 뉴에이지적 흐름에 대한 수 천 년전의 예로 보아도 될 법하다. (솔직히 내가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스스로도 지겹다. 네그리의 말처럼 다시 '제국'의 시대가 오고 있는 증거 같기도하다.) 월린은 폴리스의 쇠퇴가 정치사상의 분석단위를 없앴으며 삶의 비정치적 성격에 집중하면서 정치사상이라고 통용된 것 역시 비정치적이며 도덕철학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중세의 초기 기독교는 이런 망해버린 정치철학을 복원한다. 물론 그 중심에는 '그리스도'와 '교황'이 있었다. 오히려 기독교는 자신들의 신학을 세속에 설명하는 과정에서 고대철학의 정치철학 전통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면서 정치철학의 전통들을 지속시켜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델은 상당부분 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유사하며 일신론은 신과 그의 대리인 교황의 절대권과 연결된다. 아우쿠스티누스와 아퀼라스의 교회-사회에 대한 정체성, 신학론등은 나름대로 논리적 흐름이 있기때문에 흥미진진하게 읽을 만하다.

셀던 월린이 루터와 칼빈에 대해 큰 분량은 아니지만 한 장을 할애했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흔히 근대정치학의 시작을 마키아벨리로부터 찾기 때문에 <군주론>부터 읽는다. 그런데 특정한 관점에서 -이것은 대중들의 참여관점이다- 마키아벨리나 홉스가 가지고 있지 못한 부분을 루터와 칼빈이 보여준다고 제기한다. 전자는 모두 소수의 정치입안자들에 대한 제안자들이었다. 반면 루터와 칼빈은 급진적 정치철학의 아이디어를 대중소구한 행동가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말까지 나온다. "홉스는 가망 없이 고전적이었고, 루터는 불길하게도 근대적이었다. "저자는 루터를 중세 교회 권력으로부터의 정치 사회로의 탈출을 목적으로 했던 급진적 평등주의자도 본다. 그런데 교회로부터의 저항은 당연히 정치권력에 지나친 기대를 낳게 된다. 즉 과거 교회 질서의 척결이라는 이름으로 좌편향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는 한계를 갖는다. 칼빈은 '질서'의 이름이 교회와 정치 사이에 공통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가치하에서 이 둘 사이의 미묘한 결합을 시도한다. 칼빈의 몇가지 이론들은 이런 조화에 대한 신학적 답변들이다. 칼빈은 교회 질서와 정치 질서를 모두 독립되게 인정했으며 루터와 달리 공동체의 자율에 대해 반대했다. 여기서 월린은 칼빈의 이념 속에서 이성과 정치절 삶 사이의 연관성을 읽어낸다. 즉 이성이 정치적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이게 뭐 대단한가 싶다면 타임머신을 타 보든가..) 이것은 이성과 정치간의 고전적 관계의 복원인셈이다. 기독교가 '신국'의 이름으로 포기했던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상이 다시 등장한다. 물론 칼빈 역시 교회(프로테스탄트)에 우위를 두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정치와 비전>은 사실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다. 첫 판이 1960년대 나왔으니 말이다. 구판은 홉스를 거쳐 자유민주주의와 조직이론이라는 장에서 끝이 난다. 월린은 현재의 증보판을 내면서 새로운 장을 추가한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추가하고 탈근대민주주의까지 이야기를 끌어온다. 마르크스는 경제라는 관점에 주목하고 있으며 니체는 전체주의와 탈근대의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밝힌다. 원래 이 책은 첫번째 판가 추가판으로 해서 두 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번역판은 3권으로 나오게 되었고 그중 1권 만이 번역된 셈이다. 그러니 아직 추가 증보판에서 월린이 다루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목차와 월린의 증보판 서문을 통해서 그 맥락을 짚어볼 수 있을 따름이다. 월린은 초판과 다른 위치에서 증보판을 썼다고 밝힌다. 냉전이라는 '삶권력적'상태에서 정치철학이 어떤 변화를 겪는지,그리고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지배하에서 어떤 관계들이 형서되는지를 말한다고 한다.  미국을 이념형으로서 '전도된 전체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또한 서문은 새로운 세기의 단절을 탈근대적 권력으로의 이행으로 읽으면서 제국과 정복을 대신하는 '우세'라는 개념을 통해 합의와 지배 반복하는 과정을 쫓는다고 말한다.

어떤 결론을 쓸 까 하다가...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런 책은 공부하는 이들을 제외하곤 많이들 읽지 않으려할테니,이런 책을 읽어 보라고 권해야겠다.' 그러다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생각났다. 흔히들 이책을 '군주에게 아부하고 권력을 위해 잔인한 짓도 불사해야 한다는 비도덕적 책'이라 말한다.(맞는 말이다. 모든 핵심이 다들어 있다. 군주,권력,정치방법론,도덕의 문제..)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궁금해지는 것이다. '왜 그런 모진 책이 교양 목록에 들어가 있는지, 왜 그게 근대정치철학의 첫 번째 교과서인지?' 이런 긴장의 가장 간단한 원인은 '맥락'의 결여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맥락'을 위해서 '정치철학사'를 뒤적여야만 한다. 셀던 월린의 <정치와 비전>은 공동체를 위한 참여의 건강성에 대한 긍정과 정치사의 맥락을 모두 짚어주는 훌륭한 책이다. 2권과 3권이 빠른 시일내에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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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2-10 12:05   좋아요 0 | URL
로쟈님과 함께 양질의 책을 훑어주시는 드팀전 님의 서재에 자꾸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저와 코드가 딱 맞아서 그런지 드팀전 님이 추천해주신 책을 자꾸 사보고 읽게 됩니다. ㅎㅎ

결론에서 마키아벨리를 말씀하셨는데, 마키아벨리와 한비자를 비교해서 읽고 싶은 욕구가 치미는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승주나무 올림^^

드팀전 2008-12-11 10:13   좋아요 0 | URL
한 해가 다가고 있군요. 코드가 맞나요 ?^^ ㅋㅋ 글쎄..그건 두고 보죠.저 역시 좋은 리뷰에 늘 감사드립니다.

마립간 2008-12-18 23:29   좋아요 0 | URL
왜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을까요?

드팀전 2008-12-20 01:31   좋아요 0 | URL
^^ 정말 궁금하신건가요?
정치는 그리고 선거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게임이라는 것만 말씀드리지요.
대중정당의 권력순환론부터 10가지도 넘게 그 이유를 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저보다는 <창비>,<황해문화>,<비평>같은 계간지들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연쇄하는 대폭락 - 숨죽이고 밀려오는 세계공황
소에지마 다카히코 지음, 박선영 옮김 / 예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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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토록 강력한 생산수단과 교류사단을 마법을 써서 불러 내었던 현대 부르주아사회는 주문을 외워 불러 내었던 저승의 힘을 더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마법사와 같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중에서

세계 공황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공황은 다큐멘터리 영상자료 속에, 또는 영화 속에 남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긴 선으로 기억된다. 직업 안내소에 줄지어선 실업자나 배급소 앞에 서 있는 아이와 엄마들의 대열. 역사는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세모칼로 자신의 나무판 위에 깊은 굴곡을 만들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 2008년, 세계는 다시 보레아스(북풍의 신)의 날개 짓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는 내재적 모순으로 인해 주기적인 공황상태를 경험할 수 밖에 없다고 예견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말하는 마법사들처럼, 또는 자기 피조물에게 희생당하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처럼 말이다. 마르크스의 공황론은 생산의 과잉공급과 이윤율의 지속적 하락경향에 의존한다.그는 저서를 통해 결국 이런 자본의 모순이 새로운 역사의 주체를 만들고 이들이 자본주의를 대체하게 된다는 점을 말한다. 마르크스는 계룡산 도사가 아니다.그래서 그가 이런 주기적 공황이 몇 년 몇 월에 나올지 예견하지는 않았다. 세속의 점쟁이들도 먹고는 살아야 할 터이니 그들의 몫으로 남겨 둔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대공황 시대를 앞둔 시점에서 첫 번째로 돈 버는 사람들은 '대공황을 예견하는 책'을 쓴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서점가에 가면 코 앞에 있는 디스토피아를 예견하는 책들이 이미 수십종이 나와 있다. <연쇄하는 대폭락> 역시 그런 선상에 있는 책이다. 이 책의 구성과 주장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다면 1) 서브프라임 사태로 불거진  금융자본주의의 성격 2) 미국 금융패권의 몰락과 일본의 대응 3) 음모론 이다. 

먼저 현재 금융위기의 약한 고리부터 시작하자. 그것이 터져 나온 곳이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과 파생금융상품의 파산이다. 이 부분은 최근 신문의 경제란만 제대로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식적인 것들이다. 저자는 경제신문이 전문적인 용어로 돌려 이야기하는 것들을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저자의 방식대로 가장 쉽게 설명해보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란 결국 담보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돈 빌려주어서 집 사게 한 것이다. 집 값이 오를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집을 담보로 각종 신용거래가 가능하다. 그리고 천재들이 만들었다는 각종 파생금융상품들도 가능하다. 미국의 담보상품은 우리와 많이 다르다. 그만큼 고도로 선진화(?)되어 있는 것이다. 담보를 가지고 또 다른 담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쉽게 말하면 파생금융상품이다. 이 작업이 수 십 번 가능하면 그 때마다 새로운 부가 창출된다. 문제는 부동산 가격 폭락시에 드러났다. 결국 채무불이행이 속출하면서 연쇄적으로 파산국면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물론 큰 돈들은 파산국면에서 다른 투자를 모색한다. 데이비드 하비가 자본 이윤율 창출방식으로 말한 '강탈에 의한 축적'이 바로 그런 것이다. 뭔고 하면?  부동산이나 기업의 가치를 폭락시키고 난 다음 낮은 가격에 그걸 다시 매수하는 것이다. 현재 큰 손들은 그 미래 시장에 가 있다. 

책의 저자 소에지마 다카히코는 이 모든 것이 '가상적인 부'에 올인하게 만든 금융사기꾼들의 모래성이 무너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매도, 주가지수 선물같은 것들은 '실물'이 아니다. 주식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하는 말 중에 하나가 '현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내 돈이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스스로 이 말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주식이 10% 오르면 그만큼 자신의 부가 늘어났다고 믿는다. 저자가 금융자본주의의 몰락을 말하면서 주장하는 것이 바로 '페이퍼 머니의 시대는 끝났다. 실물의 시대이다' 라는 점이다. 저자가 현재 경제를 공황 초기 상태로 보며 그 징후로 '금값의 상승' 에 주목한다. 이것은 '실물'을 중요시한 저자의 입장이기도 하고 불안기의 특징인 현금화 성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실제 일본은 과거 부동산 거품의 폭락으로 장기 불황을 겪었다. 아직 그 여파에서 완전히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거품붕괴의 모델은 그 성격이 다르더라도 그 결과를 미국에 적용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오히려 선진화된 네트워킹된 금융시스템하에서라면 파급효과는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동산 거품 붕괴는 한국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부동산 가격은 이미 강남을 중심으로 폭락하고 있다. 몇 년 전에 과열양상을 생각해보면 이미 그 때 몰락의 징후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 한국의 주택 담보대출은 대략 300조 수준이다. 너도 나도 부동산으로 돈 벌어보겠다고 대출 받아서 집을 사지 않았던가. 은행들은 신용카드 남발의 비난이 가시기도 전에 주택부분 개인대출 경쟁에 돌입했다. 부동산 폭락이 시작되면 대출금의 상환이 불가능하다. 결국 그 부실은 은행이 안게 되고 개인 파산과 금융권의 연쇄도산을 불 보듯 뻔 한 일이다.(이건 상식 아닌가) 여기서 한가지 엇박자가 있다. 바로 인간 이명박, 당신들의 대통령이 하는 짓이다. 이명박은 건축 경기 부활에 다시금 희망을 걸고 있다. 건축이 경기부양에 효과가 있다는 과거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본인이 노가다 대통령이니 그것 외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지만 전국에 걸친 미분양아파트와 자금 경색등을 생각하면 이건 불난 집에 불 쏘시개 넣어주는 것이다. 이명박이 대학교수라면 '휴강'하는 것이 가장 좋은 강의가 될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마치 독보적인 예언자처럼 말하지만 이미 많은 경제학자들이 미국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와 패권몰락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의 10여년전 부터 말이다. 앞서 말한 마르크스는 주기적 공황에 대해 말했고, 세계체계론자인 아리기 같은 이들도 금융 자본주의가 한 세기의 몰락징후임을 말했다. 당연히 세계체계론자들은 미국패권의 몰락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미국 패권의 몰락은 달러의 몰락을 뜻하는 것이다. 반소비주의 계열에서는 미국의 몰락이 이미 레이건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레이건 시대부터 경기활성화를 위해 개인 소비를 확대하는 정책이 시작되었다. 개인 소비를 위해 가계 대출이 늘어나게 되고-주로 주택담보다- 그것은 빚 위에 선 경제이다. 미국은 오래전 부터 쌍둥이 적자에 시달려왔다. 클린턴이 의료보험체계 개혁을 지지부진하게 만들면서도 균형재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도 그때문이다. 그렇지만 부시 이후 미국의 재정적자 규모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재정적자가 대략 40조 달러 수준이라고 본다.(이 책에서 제시되는 수치들은 사실 객관적인 자료검증이 부족하다. 기본적으로 정확한 수치는 누구도 접근이 어렵다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추론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결국 미국은 스스로 통제없이 찍어대던 달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미국의 발목을 잡고 있고, 스스로 달러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방식 외에는 답이 없다. 이 말은 기축통화국으로 달러를 찍어내어 유지하던 미 달러 제국이 몰락하고 다른 체제-아직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로 다극체제론이 많이 등장한다-로의 이행을 뜻한다. 재미있는 것은 오바마의 등장에 대한 해석이다.

한국의 진보인사들이 오바마를 지지한 것은 그가 보편적인 진보 이상에 가깝기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부시의 일방주의가 다극주의로 바뀌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부분이 있다.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으로 적극적으로 경기부양에 나설 수 밖에 없다. 또한 복지를 확충하는 길을 걷는다. 개인 부채를 국가가 어느 정도 담보해주는 방식으로 갈 수 밖에 없다. 결국 이것은 미국의 재정적자 폭을 줄이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즉 달러를 찍어내는 방식을 결코 전환시킬 수 없다는 말이다. 재정적자가 늘어나고 달러가 약발이 떨어지면 미국은 지금처럼 큰 소리로 주변국들을 호령할 수 없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미국의 채권에 관심을 가져보면 된다. 50% 이상이 중국,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에 편입되어 있다. 미국 국채를 말 잘듣고, 경제성장이 필요한 나라에 떠넘겼다는 뜻이다. 중국,한국, 미국이 대표적이다. 이 들은 모두 장기적으로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이다. 우리가 IMF를 쉽게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중에 하나도 미국의 경기성장 정점에서 무역수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잇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즉 동아시아국가들이 미국 국채를 많이 인수했다는 것은 미국과의 위계성을 상징한다. 미국은 지속적으로 중국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고 중국은 미국 국채를 팔기시작한다. 미국 국채 시장이 무너지면 이제 본격적인 공황에 들어서는 것이다. 더불어 전세계 경제는 짙은 안개속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의 소비 둔화로 무역수지 적자와 강한 대달러의존도로 미국 채권시장마저 무너진다면 사방이 완전히 갑갑해지게 된다는 것은 상식이다. 자국민의 복지를 위한 오바마의 선택이 한국에는 커다란 불똥이 될 수 도 있다.(이건 가정이긴 하지만 개연성이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오바마의 민주당=진보= 선' 이라는 도식을 좀 비판해보자는 것이니까..)

 이 책에서 저자는 미국 패권의 몰락은 기정 사실이니 이 참에 일본은 '종속국가'에서 벗어나자고 말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종전 이후 대미종속성을 떨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다. 플라자합의 이후 벌어진 0% 수준의 일본 금리는 결국 미국의 정책때문이다. 최근 달러 폭락시에도 엔화가 계속오르는 것은 이 때 발생했던 '엔 케리 트래이드'의 회수때문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이제 미국은 여기 저시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그 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물론 향후 가장 중요한 관건은 미국-중국의 관계이다.) 정치적으로 확대하면 이런 움직임은 일본의 '정상국가화' 작업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일본의 헤게모니가 미국중심 정치인과 관료들에 의해 움직여왔다고 일갈하며 이들이 여전히 미국에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음모론까지 가미하자면 일본의 총리와 자민당 및 관료들은 모두 미국의 입김에 의해서 그 자리를 유지한다. 저자는 강한 엔화에 대한 기대를 말한다. 1달러 60엔 수준까지 예상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전반부의 분석들은 사실 어느정도 세계 경제에 대한 상식만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추론가능한 것들이다. 최소한 추론은 못해도 따라 읽을 수는 있을 정도다. 문제는 조금 더 비관적으로 볼 것인가 아닐것인가의 차이 정도로 말이다. 사실 가장 비관적으로 보는계 예언자의 게임에서는 가장 손실이 적다. 왜냐하면 예언이 틀려도 좋은 일이 생긴 사람들은 예언자의 실수를 그다지 탓하지 않기때문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의 달러 폭락, 주식 폭락, 그리고 국채 폭락'이 몰리면 미국은 끝장이라고 말한다. 전세계가 동반 공황에 들어간다.  그나마 아직 살아 있는 것은 금리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연쇄하는 대폭락>의 비관론만큼이나 흥미로운 점은 '음모론'이다. 저자가 바라보는 세계관은 그림자정부' 에 의해 통제되는 세계이다. 프리메이슨이나 템플턴 기사단, 유대인그룹?  저자는 록펠러 그룹을 중심에 둔다. 19세기 영국의 헤게모니시대에 로스차일드 그룹이 있었다면 석유의 시대인 20세기는 록펠러의 시대다. 특히 시티그룹의 데이비드 록펠러(록펠러가문의 3대)이 세계의 대통령이다. 하지만 이 시대도 저물고 있다. 지금의 금융혼란은 이런 이행기에 발생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이행은 누구에게도 넘어갈까? 여전히 록펠러이다. 4대이며 현재 미국 민주당 상원의원인 제이 록펠러가 그이다. 결국 시티그룹에서 골드만삭스로의 이행이 이 시기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음모론'이라고 말했으니 그의 주장을 그대로 정리해보면, 버냉키나 오바바 같은 이들은 모두 록펠러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록펠러의 입장에서 보면 공황사태에서 미국의 흑인폭동 같은 반란을 통합할 수 있는 대통령으로 백인화된 엘리트 흑인 오바마만한 인물이 없다. 저자는 언론이나 학계가 이런 가장 큰 진실에 대해 모르거나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음모론'( 저자는 자기의 주장을 '음모론'으로 폄하하는 자들이 대개 모두 진실을 외면한 자들의 특징이라고 말한다.이것이 또한 '음모론'의 한 특징이기때문에 '음모론'이 맞다는 순혼논리도 가능하다.) 은 '닭과 달걀'이라는 '순환론' 에 머물곤 한다. 어떤 검증도 불가능하며,또 전혀 불가능하다고 보기도 어려운 사이비 과학이나 종교경향을 띠게 된다. 그 점들은 이해하면서 책을 보면 좋을 듯 하다.  

앨런 그리스펀은 96년에 '비이성적 과열'에 대해 경고했다. 사실 무엇이 과열되었다는 것은 곧 거품의 붕괴를 뜻한다. 사마천의 <사기>에도 나오는 말이 있다. "치솟아 오른 용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 <연쇄하는 대폭락>의 저자 역시 '무너질 것은 무너진다.'라고 말한다. 한국 경제 역시 현재 '붕괴'의 눈앞에 와 있다. 사실 거대한 붕괴의 흐름은 하루 아침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 것들의 무게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대응할 수 없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현재의 공황은 '욕망 시스템의 붕괴'이다. 한국 부동산은 그런 욕망이 어떻게 시스템적으로 장려받고 또 무너지는 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의 위기는 이명박의 할아버지가 와도 안된다. 대신 매를 맞아도 요령껏 맞는 방법이 있는 법이고,또 미리 붕대를 감고 맞아서 피터지지 않는 방법도 있는 것이다.  대미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 있어서 미국 경제의 붕괴는 치명적이다. 단순히 '양 키 고홈' 식의 '반미'나 하워드 진,촘스키의 '악의축으로서의 미국'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다.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는 이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에게 넘겨 주고 다른 것것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내가 정말 답답할 때는 이제 미국이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를 반복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미국이 폭싹 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설령 그것이 부시의 미국이라도 말이다. 미국이 폭싹 망하면 한국은 두 배로 폭싹 망한다. 미국은 망해도 연착륙으로 망해야 한다. 저자는 이제 미국 금리와 채권시장의 흐름에 주목하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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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다 쓰고 나서 신동아에 실린 미네르바의 글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처럼 비관적이며 한국 정부의 환율정책 혼선과 부동산 문제등을 지적하고 있다.(나 역시 비관적이다.) 글 말미에서 미네르바는 일본의 앤캐리 트레이드에 대해 언급한다. 그는 앤 캐리 트레이드를 '노란토끼'라고 해서 한국 경제를 위협할 외환자금으로 지목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일본의 안정적 자금을 바탕으로 한 미국을 상대로한 수동적 대응,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의 '일본의 강한 엔' '유동성의 여유'를 정치적으로 '강한 일본' ,'정상국가'로 환원할 필요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효과가 발생한다.

미네르바에 대한 정부의 과잉 반응,그리고 인터넷 상에서의 미네르바에 대한 과잉 열기 모두에 다분히 비정상적인데가 있다. 미네르바의 논리는 비관적이기는 하지만 공상적이지 않은 주장들이다. 이 책의 저자처럼 음모론을 재기하지도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의외로 '미네르바의 분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물어보는 경우에 볼 수 있다. 내 주변에 있는 일종의 진보적인 인사들의 답변은 거의 이거다. "미네르바를 탄압하는 정부가 잘못 되었다". 그래서 오늘 여러번 다시 물어야했다. '미네르바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정부는 말도 안되는 미친 녀석들이구..내가 묻는 것은 언론 탄압 국면에서 미네르바편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의 분석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냐구였단 말이야."  ...대답은 간단했다. "음...그런 상황까지 갈 수 있는 것 아니야." (금새 이해되는 주가지수만 이야기하면 500가지 떨어진다고 예측한다.) 결국 어떤 측면에서 보면 광우병 상황과 비슷하다. 결국 미네르바가 말한 것처럼 한국의 경제위기를 불러 일으킨 것 중 하나는 정부의 '신뢰' 부족이고 또한 미네르바를 '경제대통령'으로 -하여간 언론이나 인터넷이나 영웅만들기는 참 좋아한다.사실 이게 내 관심 분야인데- 키운 것도 정부에 대한 '신뢰'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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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8-11-24 11:57   좋아요 0 | URL
음, 연쇄하는 대폭락? 제목부터 비문이라 좀...

드팀전 2008-11-24 12:0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예언자로서 거의 자화자찬을 하는 것이 눈에 걸립니다만...그다지 어렵기 않게 썼습니다. 음모론 부분은 제 취향은 아니지만 또 그 영향력들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힘든 부분이구요. 하여간 최근 세계는 오바마가 당선되어서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이 아니라 경제 위기와 함께 커다란 변화 앞에 있기때문에 주의깊에 살펴야 될 듯 합니다.특히 미국과 관련해서 말이지요.
 
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반 나절 등산할 시간이면된다. 길 역시 매우 평탄하다. 그러므로 경제학이라는 부담을 떨치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나서도 된다. 만약 어느 일요일 브런치로 식사를 하고 첫줄을 읽기 시작한다고 쳐보자.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뉴스검색을 하며 슬그머니 딴짓에 고개를 돌리더라도  연애인들의 농촌체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하기도 전에 책 한 권을 다 읽어 버릴 수 있다.

우석훈은 언제부터인가 진보진영의 스타 경제학자가 되었다. 그의 <88만원세대>는 21세기 초의 한국을 사는 젊은 실업자들을 상징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각 종 칼럼을 비롯해서 블로그등을 통해 그는 대중친화적인 경제학을 선보이고 있다. 우석훈이라는 함수가 지닌 장점은 일단 복잡한 상황들을 최대한 압축하여 먹기 편안한 알약으로 바꾸어서 돌려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통'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환영받는다. 인문학이니 뭐니 난리를 쳐도 결국 대중은 '알약'을 선호한다. 물론 나는 '알약 처방전'을 늘상 환영하는 편은 아니다. 좀 아쉬운 소리를 하자면 '알얄'말고 '가루약'을 먹을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늘 '알약'만을 선호하는 태도에는 볼멘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알약 중독증'에 걸리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걱정되기도 한다. 우석훈은 몇 몇 대목에서 자신이 '알약'을 제조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간과하는 부문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차포떼고 이야기하니까 알아서 들어라 하는 정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케인즈와 뉴딜의 성공이 과연 국내적인 유효수효증진책의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전쟁때문이었는지 같은 것 말이다.   박정희의 성공등에 대해서도 이런 논쟁적인 주제들을 대충 한 번씩은 던져준다. 그 논쟁적인 주제를 어찌 다 이야기할 것인가? 물론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이윤율하락의 경향이 자본주의 자동붕괴를 의미했다는 실없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사회주의 경향을 국가 사회주의로만 한정하는 경향도 있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사족을 달아 여운을 주지 않는다.  

<괴물의 탄생> 은 저자가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계획했던 한국경제 4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 책은  경제사와 한국경제의 문제에 대해 압축할 만큼 최대한 압축해서 쓴 책이다. 그것도 이보다 더 쉽게 쓰기가 어려울 정도로 쓴 것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애초에 주려했던 것 보다 별을 하나 더 주었다.) 물론 나는 하도 여기 저기서 '우석훈, 우석훈' 하길래 궁금하기도 하고 또한 그런 추종에 대한 약간의 반감이 들기도 했다. 현재 대한민국은 과히 '장하준과 우석훈'의 대안경제론에 흠뻑 빠져있다. 장하준은 케인즈주의적 방식으로,우석훈은 제3섹터 방식으로 한국경제의 새로운 모델을 이야기한다. 둘의 공통점은 현재 한국에서 숭상받는 신자유주의는 전후무후한 말로 안되는 짓이라는 것이다. 우석훈은 최근의 이명박의 신자유주의는 소망교회식 신학의 변종임을 말한다.

 장하준과 우석훈의 책을 읽은 사람들은 사실 둘 사이에도 서로 비판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장하준의 모델은 다분히 케인즈주의적 좌파 모델로 우석훈 식으로 말하자면 스웨덴식 모델이다. 조합주의에 바탕을 둔 분배모델인 셈이다. 우석훈은 장하준보다 한국에 더 착종한 경제학자여서 그런지 이런 조합주의가 실현가능하지 않다는데에 동의하는 듯 하다. 한국경제의 발전사가 갖고 있는 내부적 모순에 '재벌'이 있고, 노무현의 시대를 건너며 이미 한국은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케인즈주의적 공공성 창조가 이미 힘들다는데에는 동의한다. 그러니까 우석훈의 말대로 하면 국가를 강화한다는 것은 이미 물건너 간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국가의 역할에 대해 손을 놓아야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석훈의 모델은 '스위스모델'이다. 이것은 국가,시장 외에 제 3의 영역을 공공성의 이름으로 강화하여 완충장치를 만들어야 된다는 것이다. 둘 다 미친 시장론자에는 반대하지만 해법은 다르다. 내가 가장 혐오하는 방식은 일단 '시장에 반대하면 다 같다' 는 환원론이다. 이런 방식은 늘 상 '커다란 적'에 대적하면 '우리는 친구'라는 논리와 똑같다. 이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2MB를 지상 최대의 악'으로 규정하는 방식이다.제발 그런 단순 논리는 현장에서 쓰지-나도 현장에서는 쓸 것이다- 아무때나 폭발시키지 말자. 그것은 그런 '폭발의 후폭풍' 아래 다양한 가능성과 의견들을 묻어버리는 후속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내 말이 뭔지는 잘 알 것 같다.(리뷰를 우석훈의 책보다 더 어렵게 써서야 곤란할테니..막말하면서 써야겠다.) 

'2MB주적론' 이 마치 진보의 척도인양 행세를 하다보니 최근에는 '노무현 예찬론'까지 등장했다. 논리는 간단하다. "어찌되었던 노무현은 2MB보다 낫지 않나. 노무현이 만든 종부세도 2MB는 다 철폐하고..."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단시안적이고 이분법적 구도하에 들어가 버리면 '그래 노무현이 낫지'로 생각하고 정답을 써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쯤 다양한 가능성들은 이미 화장실 소용돌이를 따라 내려가고 있다. 그래서 당신들에게 늘 정치는 '객관식'이되고 만다. 우석훈이 <괴물의 탄생>에서 한국 경제를 선순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육제도의 개선을 이야기하는데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당신이 어떤 지위에 있던지, 어떤 자리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던지, 당신이 정치를 말하며 늘상 객관식을 주장한다면 당신은 여전히 '정치적이지 못하다. 우석훈은 한국경제가 이 모양으로 작살 난 중요한 시점을 '노무현 시대'로 본다. 이는 적절하다. 그것은 노무현 때문은 아니지만 노무현의 선택 때문이라고 한다면 결코 틀린말은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압력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해서는 안되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못햇다. 거기아 더하여 국민경제 2만불 시대를 위해 올인하면서 '삼성' 과 '토목'에 목숨을 걸었다.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태클 걸어서라고 한다면 도대체 축구장에 나간 이유는 무엇이냐?  태클 없는 축구장을 원했다면 김규항의 말처럼 중소기업 사장으로 노동자들에게 노블리스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았으면 더 좋았을것이다.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을 이야기하다가 딴데로 갔는데, 사실 이 책에 여러번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완전히 딴세상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쉽게 이야기 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박정희에게는 비전이 있었다. 포드주의 시대에 맞는 비전이고 당시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는 아이디어였다. '보릿고개를 없애자' 이것보다 강한 아이템이 어디있겠는가? (여기서 그가 놓여 있던 시대의 국제관계,그의 국내 정치적 공과와 경제적 성취를 가능케 했던 방식들은 괄호로 치자.) 우석훈이 보기에 노무현의 시대는 세계적으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이 빠른 행보를 행하고 있던 시점이다. 노무현의 문제는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석훈의 대안은 근본적으로 국민경제가 '지식-문화모델' 하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첫번째로 사교육문제를 걸고 넘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현재와 같은 사교육 경쟁은 국민경제를 피폐화 시킬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제적 패러다임에 맞는 주체를 생산해내는 경쟁력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교육의 한시적 금지에 대한 헌법 소원이라는 주제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사실 그 소원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종류의 합의와 사회적 담론의 공유를 위해서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마지 못해 사교육에 가담하면서 늘 푸념처럼 하는 말이 그거 아닌가? " 사교육문제만은 전두환이 잘했잖아?" (물론 여기에는 서로 타당한 헌법적 개념들이 충돌하게 될 것 이다.)

우석훈의 스위스 모델은 사실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이 길은 생태적 경제학의 길과도 유사하다. 우석훈이 대략 은퇴하고 시골 내려가고 싶다고 했다는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우석훈은 국민경제에서 20% 가량이  제 3섹터로 채워져서 완충역할을 한다면 사회적 안전망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스위스 모델의 직접 대입은 한국 사회에서 불가능하다. 그것은 우석훈의 <괴물의 탄생>에서 직접 보여준 한국 경제의 비정상적 성장과정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교육구조의 왜곡, 수도권집중형 경제구조, 지역토호들의 확산, 부동산과 건축경기에 지지하는 국민경제 등을 고려할 때 더욱 그렇다. 우석훈의 모델은 얼핏 보면 가라타니 고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어소시에이션' 형태의 경제와 같은 것이다. 우석훈이 모스의 '증여론' 같은 것을 언급하는 거 역시 고진의 방식과도 같다. 좀 도식화해서 보자면 '김종철-가라타니 고진-우석훈' 식의 패턴이 나온다. 물론 김종철은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인문학자이고 그의 문제제기는 인류학적이다. 고진의 대안 역시 칸트적인 영구평화에 기초한 전세계적인 대안 모델에 촛점을 맞춘다. 우석훈이  한국적인 토양 위에서  이 가능태를 실험해보아야 한다고 -즉그 국민경제의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우석훈도 그의 대안이 현재 상황에서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비관적인 정권과 그를 받치고 있는 체제 내에서 우석훈식 대안이 그나마 의견이라도 한 번 개진해보려면 '사건'적인 충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이다. 망할 때는 혁명적으로 망해야지 무언가 되살릴 수 있는 반동이라도 있는 것인데, 현재의 몰락은 천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우석훈 말대로 보자면 중남미식 8자형 경제가 정식화 될 가능성에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다. 우석훈은 결국 경제적 곤란은 파시즘의 형태로 발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이 지점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우석훈의 파시즘이라는 말은 일종의 '연성파시즘' 개념인데, 파시즘이라는 용어의 남발 문제는 좀 생각해 봐야한다. 우석훈은 '심각하에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는 상황을 뜻하고자 용어의 이미지적 환기를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본 한 칼럼에서는 '일본의 프리터들, 우리는 전쟁을 원한다.'라는 글을 본적이 있다. 물론 실재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라는 것 외에 계급고착적 사회에서의 진입이 불가능하다는 절규에 가까운 소리이다. 전쟁은 급진적 사회변동을 뜻하기때문에 이렇게 장기실업에서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삶보다는 모든 것을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할 수 있는 전쟁이 낫다는 주장이었다. 우석훈 <괴물의 탄생>에서 파시즘을 우려한 것은 일본의 그런 상황이 우리의 미래의 한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석훈은 그의 경제학이 '호러경제학'이라고,너무 비관적이라고 지적받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너무 단순화한 설명은 있지만 한국경제가 가는 방향에 대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지옥'의  입구에 서있다. 아니 이미 몇 걸음 이상 걸어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사실 그렇게 보인다.) 지옥의 특징은 그곳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주체 자기배려 또는 자율성이라는 것이 남아있다고 희망을 가져보자. 그나마 우석훈의 모델이 주는 작은 가능성 역시 미미하지만 구성원들의 자발성에 의존할 수 있는 범위가 있기때문이다.(한살림이나 생협에 가입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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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2008-11-20 12:24   좋아요 0 | URL
책을 읽을 때는 정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혼자 푸념했는데 드팀전님의 글을 읽으니 좀 차분해지네요.
'알약', '축구장' 비유 참 그럴듯합니다.
이것도 글쓰기를 통한 '증여'가 아닐런지요.
고맙습니다.
가끔 이곳에서 노래도 듣고, 그림도 보고 갑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드팀전 2008-11-20 19:22   좋아요 0 | URL
ㅇ..ㅇ..앞에도 이야기했지만너무 빨리 읽고 너무 빨리 써버려서 ..제가 별로 차분해지지 못했어요. 좀 차분하게 하나씩 정리해도 좋았을텐데...
반갑습니다. 찐빵님.
전 찐빵 좋아해요.진짜루...저희아들은 찐빵 속 팥만 좋아해요.

글샘 2008-11-24 02:00   좋아요 0 | URL
쥐박이한테 물어보면... 요즘 미네르바라는 괴물이 출현했다고 지롤거릴걸요... ^^
정글자본주의 운운하는 이야기를 보면서, 살아남으라는 말처럼 두려운 게 없음을 요즘 생각합니다. 살아남으라...

드팀전 2008-11-24 18:21   좋아요 0 | URL
이명박의 정책은 일단 정세파악부터 안되있습니다. 경제학도 아니라는 우석훈의 말은 그런면에서 맞습니다...
일부 계층의 사익에 봉사하는 경제정책인셈이지요.
그 반동으로 생긴 이익은... ^^ 죄송하지만 박근혜가 가지게 됩니다. 담론적으로 보자면 뉴라이트의 퇴조와 전통보수주의의 재입성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우석훈의 파시즘론은 정서적인면에만 어필하고 있습니다.

박근혜는 전통 보수주의-한국을 뜻하는게 아닙니다-가 가지고 있는 '정치세력'과 '경제세력'의 분리와 보수주의의 공공선 개념등과 개인적 처신의 일관성-한국에서 이것은 지도자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징표입니다-등으로 인해 어떤 형태로든 가장 막강한 이명박의 견제세력으로 부상할겁니다.(사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잠시 물밑에 있었던 것 뿐이지요.)
 
다중 - 제국이 지배하는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 제국 3부작 2
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조정환 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2월
평점 :
품절


머나만 반도 이탈리아에서 내공을 닦아온 안토니오 네그리가 동료 마이클 하트와 무림비서<제국>을 내놓았을 때 전세계 무림은 한 번 크게 출렁였다. 21세기에 다시 쓰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거대한 기획다왔다. 전지구적 변화를 예언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운동주체를 설정하는 그들의 방식에 모두들 감짝 놀랐다.싫거나 좋거나 무림맹주들은 그들의 도전에 주목했으며 그 동안 자신들이 연마해온 수련방식을 총동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거나 자신들을 방어했다. 한 동안 이 바닥에 불었던-그리고 아직 그 후폭풍이 가라앉지 않은-'제국논쟁'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과 그 후폭풍이 지나가지 않은 시점에서 후속적 <다중>을 선보였다. 이 두 책은 9.11테러로 무너지기전 서로 바로보고 있던 쌍둥이 빌딩처럼 상호보완적이다. <제국>이 나왔을 때 가장 크게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제국주의이냐 제국이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도대체 다중이란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네그리의 <제국>은 일국간의 경쟁상태인 제국주의가 무너지고 팍스로마같은 제국의 시대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제국'의 시대에 그에 조응하는 저항주체인 '다중'의 역동성과 저항잠재력을 말하고자 함이었다. 오히려 <다중>에서는 '저항의 우선성'에 대해 말한다. <제국>은 아무래도 '다중'에 대해 친절한 설명을 해주질 못했다. 오히려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 세계사적 변화와 그 이행 과정에 좀 더 촛점을 맞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그렇게 되다보니 '제국'은 물론이고 '다중'에 대한 여러가지 오해와 비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네그리와 하트는 9.11과 이라크 전쟁을 거치며 변화되어 가는 세계를 다시 한번 '제국'의 이행과정으로 목도한다.그리고 전편 <제국>에서 좀 더 부각시키지 못했던 '다중'과 '제국논쟁'에서 불거진 비판에 대해 후속편인 이 책<다중>에서 답변하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 <전쟁>은 전쟁이 예외적인 상황에서 보편적인 상황으로 바뀐 전세계적인 정치구도의 변화를 말한다. 영원한 전쟁이 전지구적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상황인식과 그것을 지배하는 유일한 형식이 제국이라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를 '전지구적 내전'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쟁이 삶을 바꾼다는 개념이다. 푸코의 연구를 빌어서 그들은 이 전쟁이라는 상황을 '삶정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한다. 푸코의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다. 국가 권력 혹은 지배의 방식은 전쟁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치사회적 질서가 반복,재생산 되는 것이다. 모든 사회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은 전지구적 내전 상황하에서 움직이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지만 이런 전쟁과 정치의 역전관계는 한국민들에게는 사실 경험적으로 익숙한 주제이다. 위의 푸코의 말은 김동춘이 <전쟁과 사회>에서 인용했던 것과 동일한 구절이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이 그후 근대 역사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한국민들의 삶을 어떤 형태로 바꾸었는지를 <전쟁과 사회>에서 쓰고 있다. 그는 '현재 진행형인 한국전쟁'이라고 이를 설명한다. 한국민들의 의식 속에 한국전쟁의 상흔은 내면화 되어 '삶권력'적인 형태로 작용했다. 우리 사회가 그 상흔으로 부터 많이 벗어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그런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바라보는 9.11 이후의 세계가 그런 '전지구적 내전'에 의해 안보라는 이름의 비상권력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기이다.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보면 9.11 테러 이후 '안보'와 '공포'라는 이름으로 미국민과 세계에게 어떤 '삶권력'을 강요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보기에 진보진영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군산복합체론'은 이런 전쟁의 삶정치적 영역을 단순히 경제성의 논리로 풀어나가는 '제국주의적 담론' 방식일 뿐이다. '군산복합체론'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이 일면적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리고 해방이후 '저강도 정책'의 방식으로 미국이 삶정치의 한 영역이 되어버린 한국에서는 이런 감각들이 탁월하게 이해될 수 있다. 

네그리는 근대전에서 탈근대전쟁의 형태로 전쟁의 추이가 바뀌는 지점에서 '저항과 역반란'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 쉽게 말해서 근대적은 전면적을 뜻하고 탈근대전쟁은 고강도의 치안행위까지 포함하는 국지전을 말한다. 후자의 경우에는 철저하게 정보와 네트워크에 의한 전쟁 테크놀로지에 의존한다. 이 전략은 '전역적지배' 를 목적으로 한다. 즉 군사력과 사회적,경제적,정치적,심리적 토제를 결합하여 지배를 안정화 시키는 것이다. 그렇지만 힘의 비대칭성은 이것을 가능할 것 처럼 보이게 한다.그러나 이것은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그 이유는 저항의 자율성 때문이다. 네그리는 '역반란'이 '저항'에 대응하면서 변화해나가는 지점을 찾는다. 그러면서 변화된 저항의 계보학을 게릴라전에서부터 찾는다. 게릴라전의 네트워크화는 역반란측의 네트워크 전쟁에 상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네그리는 게릴라전의 전통 역시 근대적 전쟁 신체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하면서 '제국'시대의 투쟁은 그런 유기체적인 정치 신체로부터 탈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부터 비롯되는 근대정치 철학의 신체관을 탈중심적으로 변화시킨 것이 탈근대시대 저항의 특성이 된다는 것이다.(근대 정치 철학은 대의를 통해서건 무엇인건 간에 머리-가슴-발에 해당하는 인간의 형상을 닮아 있다.) 탈근대적 세계인 '제국'의 주체 '다중'은 그런 면에서 '리좀'적인 존재이고 네트워크 간의 소통과 절합을 통해서 만나는 존재이다. 네그리는 신체라는 개념 대신에 훨씬 유동적이고 창조적인 '살'이라는 개념으로 다중의 성격을 설명한다.

2부의 <다중>은 '제국 논쟁'에서 말이 많았던 '다중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철학적,사회학적,정치학적인 측면에서 그 윤곽을 조금 더 분명히 한다. 일단 네그리는 '다중을 노동자 계급'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맑스주의의 동일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뜻하지 않는다. 또한 근대 정치에서 변혁주체였던 '민중'과도 구분한다. 이것들과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일자회귀'에 대한 네그리의 거부에 있다. 그들은 조금 더 유연하고 광범위한 형태의 '위험계급'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다중'의 외곽선을 긋는다. 흔히들 '차이의 주체'라고 하는 이들이 모두 포함된다.  네그리는 '우리 모두 빈자이며, 또 생산자이다.' 라는 말을 한다.  이는 '다중'이 다분히 정치적 개념이며 민중이나 노동자 계급을 탈영토화한 이후 다시 정치적으로 재영토화한 개념임을 뜻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물질노동'에 대한 '비물질 노동'의 우위를 '제국'시대의 특징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다중'은 그런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속에서 그 성격을 반영하면서 운동한다. 물질노동이 포드주의적 개념이라면 비물질 노동은 포스트포드주의적 그림위에 그려진다. 물론 이런 노동 주체의 이동과정은 비판을 대상이 되었다. 즉 '1세계에서의 비물질노동의 우위 상황을 전세계적으로 일반화한 것 아니냐?" 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비물질노동을 이야기하고 있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상표는 '메이드 인 차이나'이다."라는 것이다. 비물질노동의 우위가 아니라 물질노동의 전세계적 이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체제론자들의 비판에서 주를 이루었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들은 '조정'이라는 개념으로 자본의 이윤율감소 경향을 상쇄하는 방법을 말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서문에서도 이 책이 '철학책'임을 밝힌다. 그리고 이런 실제적인 비판에 대해서도 '이 책이 지적하는 것은 일종의 경향성'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 최소한 그런 실재적 비판의 예봉을 어느 정도 감쇄시킬 수 있는 답변이다. 저자들은 물질노동이 소멸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라 헤게모니가 비물질 노동으로 이전되는 경향을 말한 것이라고 답변한다. 그들은 맑스와 자신들을 그대로 유비한다. 즉 19세기 맑스가 프롤레타리아를 말할 때 그것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히 소수였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의 운동 경향과 그것이 어떤 힘에 의해 붕괴될 것인지 그 경향성을 말했다.  자신들 역시 그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의 조건에 있어서 '특이성과 공통성'을 강조한다. 이 양자는 서로 침해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특이성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요즘 말로 '차이'를 말하고 '공통성'이라는 것은 '보편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하지만 이것은 정확치않다. 왜나하면 근대적 의미의'보편성'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변증법적인 결과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네그리는 이것을 부정한다.) 다중은 각각의 특이성을 그대로 보존하는 차원에서 또 상대의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공통된 것을 추구하기 위해 절합한다.네그리는 우리가 흔히 '공적인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국가 체계에 포섭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그는 그보다 더 나아간 방식으로 '공통된 것'이라는 개념을 꺼낸다. 그는 이 '공통된 것'을 꾸려내기 위해 몇 가지 실행방향을 언급한다. 첫째는 신자유주의의 허위를 까발리는 것, 둘째는 공공의 이익 개념을 공통적인 참여를 허용하는 틀로 대체하는 것이다.(이것은 케인즈주의처럼 국가에 힘을 싣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오히려 꼬뮌주의적 참여에 더 가깝다.) 저자들은 일반적이거나 공적인 것들은 모두 다중에 의해 재전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며 따라서 공통적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다중을 조직하고 움직이는 것은 '잉여'이다. 기본적으로 맑스의 노동가치론과 선을 같이 한다.네그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자본에 의해 착취될 수 없는 전지구적 정치적 신체에 포획될 수 없는 잉여에 촛점을 맞춘다. 그 잉여가 적대가 되고 반란이 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조건은 다중의 잠재력,자율성과 소통,그리고 차이에 대한 존중과 절합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런 절합이 결코 반작용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이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적 앞에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한 답이다. 저자들은 축적된 공통된 불만들이 생산적으로 작동하는 점에 주목한다. 설령 미디어에서 보이기에는 항의운동의 측면만 보일지라도 이것은 훨씬 더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라는 것이다. 

제 3부는 <민주주의>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정치적 목표가 여기이다. 그들은 '급진적 민주주의'를 통해 이름만 남아 있는 '민주주의를 제국 시대에 재전유'하자고 주장하는것이다. '다중'의 문제와 근대정치 체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여러번 제시했던 '대의(제)'의 문제가 다시금 부각된다. '대의'는 다중과 정치를 연결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절대적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근대 정치체제는 지속적으로 인구의 확장,지역의 광역성들을 내걸면서 '대의'문제의 약점을 피해왔다. 네그리와 하트는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대의'라는 것은 '선출직 귀족제'에 지나지 않음을 말한다.이것은 자유주의국가에서나 사회주의국가에서나 공히 작동했다. 저자들은 이런 '대의제를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 형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러나 구체적인 내용들은 들어 있지 않다.)

네그리와 하트는 책 후반주에 가면서 제국 시대의 정치적 형식에 대해 조금 더 실재적인 예들을 거론한다. 그런데 이 역시 그다지 구체적이지는 못하다. '제국'시대에 현실적으로 가장 근접해 있는 단체인 UN의 개혁한 같은 것들이다. 상임이사국의 입김을 줄이자는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이야기들과 제2의 총회같은 이원화된 UN 개혁론같은 것들이 제시된다.그러면서 유럽연합의 복합적 연방체제 같은 것들에 대해 주목한다.(물론 이런 것들이 대의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은 지적한다.) 또한 국제적 사법질서를 위해 국제형사재판소의 강화, 경제적 개혁을 위한 최빈국의 외채 삭감, 전 인류의 공통된 이익을 위한 저작권,특허권의 공유같은 것들을 말한다.하지만 이런 제안들에 구체성들은 부족하다. 오히려 저자들은 삶정치 영역에서의 이러한 제안보다는 우리의전지구적 상황을다루는 실험들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생산적일 것이라고 살짝 발을 빼낸다.

그러면서 다시금 18세기의 실재적 민주주의를 위한 꿈을 언급하고, 다중의 구성적 동력학을 고혀하여 복수성이 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급진적 민주주의를 제안한다. 물론 이것에는 '권력'이 배제된다. 다중은 '항구운동적인 주체'이지 결코 '주권권력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흔히들 네그리의 주장을 '아나키스트적'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반권력론'때문으로 보인다. 네그리는 보론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비판에 짧은 반비판을 가한다. 그 중에는 '당신은 아나키스트인가?"부터 "당신들은 레닌주의자인가?" 라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의 비판들이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그들의 주장이 이 사이에 있다라고 말한다. 최종결론 부분에서 다시금 이를 확인한다.(매디슨과 레닌 사이라는 다소 낭만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시대를 통찰한 새로운과학과 함께 새로운 존재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분히 신학적인 결론으로-본인들은 이를 신학의 사회학이라고 명명하겠으나-새로운 인류를 창조하고 그 결정을 사건적으로 이해하길 요구한다.새로운 인류의 창조가 궁극적으로 사랑의 행위이며 또한 정치적 해위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때 그때 비판적인 메모를 많이 했다. 물론 그 메모는 네그리와 하트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의도에서 이다. 그들은 내 메모를 훔쳐 본 사람들인양-아마 '제국논쟁'에서 이미 나왔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몇 장 건너지 않아 자신들의 주장에 대해 달릴 수 있는 오해들에 대해 설명한다. 그래서 메모를 계속 했으나 결국 어느 정도는 해소하면서 넘어갔다고 볼 수 있다. 최소한 그들의 생각을 비판적으로라도 받아들이는 독서였기때문에...

내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대목은 사실 <다중>의 맨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다중의 구성적 힘에서, 보장들과 입헌적 동력의 제도적 방법을 갖춘,"지금과는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기획을-주권을 넘어서는,권위를 넘어서는,폭정을 넘어서는 세계가 가능하다는 기획을-발견할 수 있을까?"  이것은 결국 '제국.다중론'의 현실 정치에서의 접합과정에 대한 질문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이와 유사한 무수한 질문에서 추렴된 것이겟지만- "'무엇을 할 것인가?' 는 이 책이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와 같은 것은 집단적 정치적 논의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라고 공을 넘긴다.사실 우리사회에서 '다중'이라는 최신 철학용어가 시사잡지에서도 옮겨지고 일반인들도 알만한 단어가 된것은 좀 이색적이다. 아마 지난 '촛불집회'의 영향력이 무척 컷을 것이다. 당시 학자들과 시사잡지들은 듣도 보도 못한 창조적인 운동주체의 등장에 놀랐다. 그들은 네그리의 예견과 용어를 도입하여 '시애틀에 이어 나타난 서울의 다중'으로 보았다. 나는 이런 분석은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모로 '다중'의 출현의 한 예로 충분하다. 문제는 그 축제적 운동과 철학적 결합의 이상적 상황에 흥분해버린 것이다.(나는 지난 촛불집회 상황에서 이를 누누히 강조한 바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인 것'의 복원을 축하하다가 '정치'를 놓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다중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도 관련이 있지만(권력문제에 대한 포기같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언젠가 알라딘의 어떤 분이 제기한 '좌파 역시 권력을 목표로 하기에 자율주의가 오히려 낫다.'는 입장에 대해서 비판한 적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치적 논의 속에 구체적으로 결정'되어야 할 문제를 이론적 유비를 통해 해소하려는 나이브 함에 있었다. 네그리와 하트 역시 자신들의 주장이 '경향성'이라는 점을 누누히 강조했다. 구체적인 아무런 변화를 끌어내지못하고 '다중 출현'의 광경만 목도한 것이 '촛불'이라면 사실 현재의 후폭풍들은 그 운동주체의 한계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광장에 열번 스무번 나간 것 만큼이나 지식인들이나 진보적인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그런 한계들을 깨닫고 운동의 흐름을 실재적인 변화를 위해 집중시키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인 즉, 이론을 현실에 맞추며 박수치는 것을 때려 치우고,구체적 변화를 도모하는 방향에 힘을 실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시대의 역행은 어떻게 보면 '촛불'의 후폭풍일 지도 모른다. 촛불의 개별적 주체가 잘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실패가 보여줄 수 있는 한가지 역사라는 것 말이다.

네그리와 하트의 주장에 내가 전적으로 동감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책은 분명히 <제국>과 어우러지는 좋은 책이다. 우리는 근대적 토대 위에 서 있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고 또 다른 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고려해야만 한다. 이 책은 그런 시각을 만들어주고, 또한 비판과 반비판의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은 더 넓어지고 튼튼해 질 수 있다. <제국>보다 훨씬 평이하게 씌여졌지만 이 책은 또 앞의 책이 '다중'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제국'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국'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지 <다중>에 접근하기 쉬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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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11-17 14:37   좋아요 0 | URL
요즘은 어려운 책 보기 싫은데 그래도 제국과 다중은 봐야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항상 뒷통수를 묵직하게 잡아끕니다. 너무 어렵지는 않던가요? 번역도...
올 겨울 방학 진득하게 앉아서 볼까 싶네요.

드팀전 2008-11-17 16:15   좋아요 0 | URL
글쎄요...<제국>보다 <다중>은 훨씬 평이하게 씌여졌습니다. 쉬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글쎄 쉽다 어렵다는 어떻게 답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번역 역시 제가 답할 수는 없지만 크게 장애가 되진 않았습니다. 대신 몇 가지 개념적 용어들이 <제국>과 <다중>에서 다르게 번역되고 있긴 합니다. <제국>에서는 multitude를 '다중'으로 정식화되기 이전이어서 '대중'이라고 번역하고 있기도 하니까요.생체정치 같은 개념들도 마찬가지지요.

Jade 2008-11-17 16:10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의 리뷰만 보면 어려운 책들이 매력있어진다는....-_-;;;

드팀전 2008-11-17 16:14   좋아요 0 | URL
읽어 볼 만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향연.파이돈 - 개정신판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플라톤 지음, 박병덕 옮김 / 육문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인문학의 위기론'이 새로운 대응을 낳고 있다.  '인문학 위기론'의 출처인 대학에서는 비인기인문학과들이 통폐합의 수난을 겪고 있다. 반면 상아탑을 나선 공간에서 '인문학'은 새롭게 싹을 틔우고 있다. 백발의 은퇴한 교사가 고전 강의를 듣기도 하고, 점심 시간에 여고동창들과 자식 자랑,며느라 뒷담화에 열을 올리던 아주머니들이 노트에 열심히 필기를 한다. 거기에 '희망의 인문학'의 새로운 버전으로 노숙자나 빈곤층을 위한 강의들로 계속 해서 이어지고 있다.  이윤의 노예처럼 그려지던 '전문경영인'들 역시 고액의 '인문학' 강좌를 열심히 따라다닌다. '인문학'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자기를 새롭게 배치하려는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여기에는 무언가 뒤틀림이 느껴진다. 특히 수천만원을 호가한다는 CEO들을 위한 인문학은 더욱 그렇다. 인터넷에서 본 몇 몇 사진들은 중세 시대 철학의 굴욕을 비유하는'신학의 시녀' 보다 오히려 더 굴욕적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의 시녀'가 된 '철학'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 '철학'은 허약하지 않다.) 별 다섯개 짜리 특급 호텔 리셉션장에는 고급 양복을 입은 CEO들이 눈을 반짝이며 앉아 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 대학 교수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에 감탄하며 '현묘의 도'를 깨달은 듯 한 고개짓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고급-아니 고가의- 인문학 강좌에 앉은 자들은 결코 '현묘의 도'를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영인들을 너무 평가절하한다고 생각치는 말기 바란다. 그들 대부분은 좋은 대학과 좋은 대학원을 나왔을 것이다. 국제수지 그래프를 읽는 눈은 누구보다 빠를 것이고, 수많은 성공심리학이 가르쳐준 '인간심리'에 대해서는 박사 학위자들보다 나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경영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경영인들은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좋은 일자리와 그들의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좋은 직장 안에서 노동자들은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꿈을 이루어나간다. 평등한 노사관계가 보장된 곳이라면 공장의 최고 주인은 아니어도 동등한 주인정도로는 대접을 받을 수있을게다.(인문학의 배운 CEO들이 강좌가 끝나고 그런 태도로 돌변해주길 기대한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인문학이 대중과 소통하려는 노력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번 강조하겠지만 그런 방식은 칭찬받아야 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인공 소크라테스도 좋아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은 '대화' 였다. '대화' 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상대방'을 직접적으로 상정하고 이야기 하는 방식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다른 말로 하면 '소통'이다.전문적인 철학 담론을 논하며 담론의 철옹성 안에서 박는 방식은 이미 소크라테스의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소통은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시장과 남대문 시장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교육이 결코 '아카데미아'에서만 머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의 모든 그리스인들이 그랬듯이 그들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토론하기를 좋아하며, 소통을 좋아하는 정치적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강좌'에서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빛을 보며 '인문학의 부활'보다  '인문학'이 위기시대에 과연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생각한다. 이것은 당연히 '인문학'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소비되는 것이 가장 '인문학적'인가에 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

대개의 '인문학 강좌'들이 고전을 다룬다. 동양 철학하면 '논어','노자'들을 이야기할 것이고, 서양하면 '소크라테스-플라톤' 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책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가장 널리 읽히는 책이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내가 학력고사가 끝나고 고등학교 겨울 방학때, 이 책을 읽었을때- 완전히 대학생 필독서 목록때문에 봤다. 왠지 고딩이 아닌 성인으로서 대학생이라면 이정도는 하는 생각에- 나는 이 책이 '소크라테스'가 쓴 줄 알았다.(요즘은 중학생들도 이 책을 읽으니 나보다 훨씬 앞서가는 녀석들이다.영어도 잘하고...무서운 놈들!!) 

소크라테스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왠만한 '철학 입문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알것이다. 후대 사람이긴 하지만 역으로 인용하자면 철학사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에게서 일어났다. (니체는 이런 전환이 '이론적 인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뜨악하게 바라본다.) 철학의 중심을 '자연'에서 '인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인간은 '신의 섭리 하에 있는 인간'이다. 우리는 '시녀가 된 철학'의 시대를 지나 데카르트 쯤 와야지 '생각함으로 인해 존재하는 인간'을 만난다. 소크라테스라면 과연 가장 '인문학적'인-나는 여기서 이것을 거의 철학과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만- '인문학의 용도'는 무엇이라고 생각했을 까?  CEO들에게 자신과 후배들이 남긴 몇 마디 명언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돈벌이로 복잡해진 머리를-비단CEO뿐만이 아니라- 잠시 세척하는 시간을 주는 것으로 사용되길 원했을까? 명언이 필요하면 포털 사이트 검색을 해보면 될 터이고, 고급스럽게 머리를 세척하려면 유명한 미용실에 가서 누우면 될 터인데...그럼에도 사람들은 '인문학' 강좌를 듣고, 감동하고,그리고 한 일주일 쯤 지나면 '강좌'에 갔었다는 사실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변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먼저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당신이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덕과 지혜를 추구하시오, 국가의 이익을 돌보기보다는 국가 자체를 돌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준수해야할 순서요."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명언으로 알려진 신전에 새겨진 신탁, '너 자신을 알라.'의 다른 버전이다. '자신을 돌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 몸이 건강하고 쾌락을 유지하라는 것만을 뜻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언지 생각하라'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로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상대와 스스로에게 질문하는자' 로 남는다. 그리고 '단순히 사는 삶'이 아니라 '잘 사는 삶'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에게 잘사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와 하나 되는 삶, 정의를 실천하는 용기 있는 삶, 중용과 절제의 삶이다. BMW 7시리지를 타고 강좌를 빠져나가며 소크라테스의 감흥에 고개를 끄덕여봐야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면 '단순히 사는 삶'일 뿐이다. 그리고 거기에 대개는 자본의 구조가 은폐해주는 사적 이익들이 숨어있다. 대신 '삶'의 방향을 바꿀 어떤 계기라도 얻게 된다면 비싼 돈 주고 수업들은 보람이 있을 것이다.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게 '돈'이었다면 그걸 써서 얻었다고 뭐라하지는 않는게 좋을 듯 싶다.

물론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철학이 성에 꽉 찰리는 만무하다. 그들의 자연철학은 요즘 시각에서는 실소를 머금게 한다. 하지만 그들이 철저히 이성의 추론으로 거기에 도달했다는 점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추론의 결과들이 때로는 신화적인 보편성을 얻을 수도 있어 보인다. 영화 같은데는 여전히 그런 장치들이 제법 잘 활용된다. 또한 신화적 틀에 잡혀 있는 인간관이나 영혼관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예전에 소비에트에서 나왔던 철학입문서 같은데서는 그들이 유물론을 배격했다는 이유로 귀족철학의 대변자,유심론자라는 식으로 매도당했다. 그런 세속적인 해석방식은 당시부터 지겨웠다.) 거기에 소크라테스의 신적인 절대성에 대한 합일 같은 개념들은 '신이 사리진 시대'의 눈으로 보면 70년대 헤어스타일을 보는 듯 하다. 그가 상정하고 있는 '절대적 선'이나 '절대적 덕'의 개념들은 신이라는 논리적 소실점이 있다면 가능하지만, '신'을 괄호 치고 나면 과연 그 '선'과 '덕'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길 수 밖에 없다. 하기야 이런 주제들은 철학사의 근본적인 숙제들이니까 소크라테스씨에게 모두 물어볼 필요는 없다. 

내가 생각할 때 고전의 가르침은 사실 '깨달음'의 즐거움보다는 '뱀의 독'처럼 쓰다는데 있어보인다.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반어를 섞어가며 소크라테스를 칭송하는 대목에 나오는 말이있다. 

... 뱀에 물린 고통을 맛본 사람은 뱀에 물려 본 일이 있는 사람 이외에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그런데 나는 독사의 이빨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주는 어떤 것에 물렸습니다. 그것도 제일 아픈 곳을 말입니다. 즉 심장을, 아니 영혼을 물렸어요.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습니다. 나를 문 것은 바로 철학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알키비아데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철학의 즐거움이 또한 고통을 동반한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독사의 이빨'이 '자신'을 물어뜯는 치열함이 없다면-그것은 끝없는 자기 성찰,각성, 수련.그리고 실천을 동반한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다. 우리가 심장이 없는 사람을 허수아비라고 부르듯이, 철학의 심장을 얻으려는 '분투'(쓰고 보니 이 말이 얼마나 힘든 말인가?)가 없는 '인문학'은 허수아비에게 악세서리를 하나 더 달아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프라다 가방을 매고, 아가타 귀고리를 하고 있어도 허수아비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고전을 읽을 수록 구양수가 말란 '다상량' 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多聞  多讀 多想量(다문 다독 다상량)

다독은 다상량에 비해 얼마나 쉬운 일인가? 요즘 내겐 진짜 명상이 필요하다.

생각의 꼬리를 놓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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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8-12-24 10:40   좋아요 0 | URL
저는 박종현님이 옮기신 책으로 읽었는데요, 희랍어의 원래 뜻을 보면서 읽을 수 있어서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고전의 참 의미는 그 시대로 돌아가서 그 시대의 마음으로 읽는 데서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고전을 어떻게 현대화할지는 그 시대의 마음으로 읽고나서 생각할 문제겠지요, 이 책에 나오는 문장과 단어들의 논리와 그것이 어떻게 증명되는 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문학 강의란.. 정말 허수아비에 달린 프라다 가방이겠죠. (아, 안녕하세요:> )

드팀전 2008-12-24 17:29   좋아요 0 | URL
^^ 안녕하세요